⊙ 冷戰 시대에는 CIA 공작으로 모사데크(이란)·아옌데(칠레) 등 축출
⊙ 냉전 해체 후에는 인권·민주주의 명분으로 밀로셰비치(세르비아)·후세인(이라크) 등 제거
⊙ 빈 라덴 다음은 알 자와히리, 알 올라키 등 대상, 김정일도 표적 될 수 있어
⊙ 냉전 해체 후에는 인권·민주주의 명분으로 밀로셰비치(세르비아)·후세인(이라크) 등 제거
⊙ 빈 라덴 다음은 알 자와히리, 알 올라키 등 대상, 김정일도 표적 될 수 있어
빈 라덴 사살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직접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할 정도로, 미국으로선 ‘숙원’을 해결했다는 의미가 있다. 사살 시점이 전시(戰時)냐는 점을 비롯해 국제법적 정당성 논란이 아직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빈 라덴 사살은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 총구를 겨누는 이가 있다면 반드시 추적해 응징한다’는 미국의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기도 했다.
외교가에는 벌써 미국의 다음 표적이 알카에다의 2인자로 불리는 아이만 알 자와히리나 ‘아라비아반도 알카에다(AQAP)’의 지도자 안와르 알 올라키 등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빈 라덴 사살에 겁을 먹은 또 다른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의 지도자들은 이미 미국과 협상할 움직임을 보이는 등 몸 낮추기에 들어갔다. 일각에서는 한국과 미국에 대한 공격 운운하는 김정일도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거나 미국민들에게 위해를 입힐 경우 미국이 겨누는 보복의 칼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견해도 나온다.
冷戰시대에는 反共 명분으로 反美 지도자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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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옌데 전 칠레 대통령(왼쪽)은 대통령 관저인 모네다궁에서 미 CIA의 조종을 받은 쿠데타군에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
20여 차례의 제거 시도 중 직접 무력(武力)을 사용한 경우가 절반이 넘는 10여 차례이고, 나머지는 쿠데타 조종이나 반군 지원을 통해 개입했다. 석유 자원 등 경제적 이해도 함께 얽힌 외국 지도자 응징의 ‘명분’은 시대별로 바뀌었다.
1950~80년대를 관통하는 이른바 냉전시대에는 주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였다. 1953년 미 중앙정보국(CIA)은 이란의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를 실각시키기 위한 쿠데타를 배후에서 조종해 성공시키고 친미(親美) 성향의 팔레비 국왕을 권좌에 복귀시켰다. 팔레비 정권은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미국을 대신해 소련의 중동(中東) 진출을 견제하는 데 일등공신이었다. 1960년에는 당시 소련의 지원을 받던 아프리카 콩고의 파트리스 루뭄바 초대 총리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암살됐다.
미국은 특히 자국(自國)의 ‘앞마당’ 격인 중남미(中南美) 지역에 공산주의 세력과 반미(反美) 정권이 발붙일 수 없게 하겠다며 지도자의 제거를 시도했다. 하코보 아르벤스 과테말라 대통령과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은 각각 1954년과 1973년 CIA가 배후조종한 쿠데타로 물러났다. 또한 쿠바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후안 보슈 도미니카 공화국 대통령과 좌파 지도자 모리스 비숍 그레나다 총리는 각각 1965년과 1983년 미국의 무력 침공에 의해 권력을 잃었다.
冷戰 종식 후에는 人權 명분으로 내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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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이 2001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의 유고전범재판소에 출두하고 있다. |
2001년 9·11 테러 후에는 ‘테러와의 전쟁’이 지도자 응징의 명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 체포와 교수형 집행, 빈 라덴 사살 등이 그랬고 이는 아직까지도 ‘진행형’이다.
빈 라덴의 경우처럼 미국이 직접 군대를 동원해 지도자를 제거한 대표적 사례는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 알카에다의 또 다른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 등이다. 이들의 응징에는 나름의 시대적, 상황적 특징이 있다.
파나마 노리에가, ‘전설’ 82공수사단에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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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나마의 실권자였던 마누엘 노리에가는 미군에 체포돼 미국에서 복역한 후 프랑스로 넘겨졌다. |
노리에가 체포를 위한 미군의 작전명은 ‘정의로운 명분(Just Cause)’. 이 작전에는 미군 남부사령부의 1만3000명과 본토에서 지원된 1만1000명 등 총 2만7684명의 병력과 300여 대의 항공기가 동원됐다. 12월 20일 오전 1시, ‘미군 특수부대의 전설’로 불리는 제82공수사단과 제75 특공연대 레인저부대의 1개 중대 병력이 낙하산을 타고 파나마의 유일한 국제공항이던 오마르 토리호스 공항을 장악했다. 공수여단과 레인저의 다른 병력은 노리에가의 해변 관저를 급습했다. 작전 시간을 새벽 1시로 잡은 것은 파나마군에 비해 압도적인 미군의 야간전투 능력를 살리기 위한 전통적인 선택이었다.
만 24시간이 채 흐르지 않아 사실상 파나마 전역은 미군에 장악됐고 노리에가는 작전 5일째이던 12월 24일 재빠르게 파나마시티의 교황청대사관 안으로 피신해 망명을 신청했다. 그러나 미군의 집요한 포위 전술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보름 뒤인 이듬해 1월 3일 제 발로 걸어 나와 미국에 투항했다. C-130 수송기로 압송된 미 연방법원은 1992년 미국내 마약공급에 관여한 혐의로 노리에가에게 종신형을 선고, 미국에 대해 범죄를 저지른 자는 외국 영토에서라도 강제연행할 수 있다는 ‘힘’을 보여줬다.
미국이 이처럼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오랜 영향력 아래 있었던 파나마에 미군 남부사령부가 설치돼 있어 현지 정보가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이던 1988년부터 노리에가에 대한 공격이 ‘정교한 미로’라는 작전명으로 검토되는 등 충분한 작전준비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의로운 명분’ 작전을 총지휘한 맥스웰 서먼 장군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미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를 졸업하고 1953년 학사장교로 임관한 후 초임장교 시절에는 레바논과 베트남전에 참전해 정보·포병 등 주로 야전을 담당했다. 마침 노리에가 제거 작전 때 맹활약한 제82공수사단의 포병대대장을 맡았던 적도 있어 작전 운용을 효율적으로 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작전에 앞서 그는 전역(轉役)할 예정이었지만 딕 체니 당시 미 국방장관이 부시 대통령에게 청원, 임기가 연장되면서 작전을 이끌었다.
노리에가는 미국에서 감형(減刑)된 뒤 2007년 9월 형기(刑期)를 마치고 프랑스에 보내졌다. 그는 프랑스에서 살인과 돈세탁 등의 혐의로 지난해 4월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CIA와 디지털기술에 당한 사담 후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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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에 체포돼 재판에 회부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
9·11 테러 이후 미국의 43대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가 보유한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2003년 3월 20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441호를 근거로 이라크전을 시작했다. 4월 9일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한 뒤 후세인이 종적을 감추자 미군은 줄기차게 추격전을 계속했다. 후세인의 목에는 250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북부 모술과 키르쿠크, 티크리트, 시리아 접경지역 등 후세인이 은신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들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좁혔다.
마지막 체포작전은 12월 13일 아침 시작됐다. 이날 아침 10시50분쯤 후세인의 고향인 티크리트에서 CIA가 풀어 놓은 정보망이 전달해 온 첩보가 입수됐다. 후세인의 은신처에 관한 것이었다. 미군은 ‘붉은 새벽(Red Dawn)’이라는 작전명으로 후세인 체포 작전에 들어갔다. 미 육군 제4보병사단과 특공대 등 600여 명으로 구성된 체포조가 티크리트 근교에 이날 저녁 8시 무렵 급파됐고, 곧이어 30분 만에 ‘거미 구멍’이라 불리는 작은 동굴을 급습해 후세인을 체포했다. 후세인은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후세인을 체포한 미군들은 다시 가옥을 수색했고 75만 달러에 달하는 100달러짜리 지폐 뭉치, 소련제 권총과 AK-47 자동소총 2정을 발견했다.
당시 이라크 쿠르드애국동맹(PUK)의 한 고위 관리는 “후세인이 티크리트의 한 가옥에 은거 중이라는 첩보를 접수한 뒤 쿠스라트 라술 알리가 이끄는 쿠르드애국동맹 특수부대가 미군 특수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해 후세인을 체포했다”고 밝혀, 후세인 체포작전에는 쿠르드족의 첩보가 결정적이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물론 쿠르드족(族)은 CIA가 후세인 체포를 위해 공들여 온 대상이었다.
또한 후세인 체포작전을 지휘한 제4보병사단은 ‘FBCB2’라는 보안 디지털 무선통신 장비를 전투차량이나 헬기에 갖춘, 당시로서는 최첨단 ‘디지털 사단’으로 불렸다. 이라크전에서 처음 사용된 FBCB2 시스템은 모든 전투차량이 작전본부의 컴퓨터 스크린에 그대로 비쳐 작전 현장에서 수십 km 떨어진 지휘관들도 모든 상황을 낱낱이 볼 수 있게 한 장치였다. 가령 미군의 탱크와 헬리콥터, 험비 등은 인공위성이 촬영한 이라크 지형도의 스크린 위에 파란색 아이콘으로, 적군은 빨간색 아이콘으로 각각 표시됐다. 이런 점에서 이번 빈 라덴 사살 작전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들 한다. 체포된 후세인은 미군 전범재판에 회부돼 2006년 11월 사형을 선고받은 뒤 그해 12월 30일에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다.
신출귀몰 알 자르카위, 정교한 공습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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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한 알 카에다 지도자 알 자르카위. |
2006년 6월 7일 요르단 출신 알카에다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의 사망은 미군의 공습 덕분이었다. 알 자르카위는 2004년 한국의 김선일씨를 납치해 살해한 테러조직 ‘타우히드 왈 지하드(단합과 성전)’의 지도자였으며, 피신한 빈 라덴을 대신해 알카에다를 이끌었다. 특히 미군과 거래하는 외국인, 특히 미국인과 영국인을 납치해서 칼로 목을 베 처형하고 그 장면을 비디오로 만들어 인터넷에 공개하면서 미국의 주요 타깃이 됐다.
‘신출귀몰’한 알 자르카위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자국민의 피해가 커지자 부시 대통령은 주도면밀한 작전을 지시한다. 이번에도 역시 CIA의 ‘두뇌’가 앞장서 현지 정보를 수집하는 데 나섰다. 이 과정에서 공습이 이뤄지기 2주전 알 자르카위 조직원의 제보가 이라크 경찰에 날아들었다. 제보의 핵심은 조직원의 대부(代父)이자 알카에다의 또다른 지도자 아부 알 이라키에 관한 것으로, 그가 알 자르카위를 만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4월 말 공개된 알 자르카위의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은신처를 알아본 현지 주민 또는 요르단 정보요원이 제보했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튼 이 같은 정보들은 미군에 전달됐고, 알 자르카위에 정통한 CIA 요원과 군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공습작전이 세워졌다. 미군과 이라크 정보기관은 알 이라키를 추적해 그가 7일 오후 6시15분에 바그다드 북쪽 65km에 위치한 바쿠바 인근 디얄라 지역의 안전가옥에서 알 자르카위와 회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알 자르카위는 자신의 사망설을 여러 차례 언론매체에 흘리면서도 테러활동을 계속해 미국을 곤혹스럽게 하는 등 미군에게 망령(亡靈)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미군은 사전(事前) 현장답사 등 철저한 준비를 했다.
마침내 알 자르카위가 조직원을 만나는 시각, 미군 특수부대 소속 F-16C 전투기 두 대가 출격했다. 동시에 미국과 요르단·이라크 3개국의 합동작전 팀도 지상에서 전격 공격에 들어갔다. F-16C 전투기들은 500파운드(약 230kg)의 폭탄을 안전가옥에 투하했고, 레이저 유도 미사일인 GBU-12 Paveway II 등도 퍼부었다. 해질녘 시작된 작전은 공습으로 은거지가 폐허가 되면서 10여분 만에 종결됐다. 포탄 소리가 멎자 알 자르카위의 시신은 안전가옥으로 옮겨져 시신 확인작업이 이뤄졌다. 지문과 상처 문신 얼굴 확인작업에 이어 미 연방수사국(FBI) 특수팀의 DNA 조사가 끝난 뒤 “알 자르카위가 맞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5년 뒤 자신이 알 자르카위와 비슷한 신세가 될 줄 몰랐겠지만 빈 라덴은 당시 알 자르카위가 사망한 뒤 3주 후 알 자르카위의 사망을 확인하고, 그를 ‘성전(聖戰)의 사자(lion of holy war)’로 추앙하며 애도했다.
‘에이스 중 에이스’ 네이비실을 못 피한 빈 라덴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미국의 작전명은 ‘제로니모(Geronimo)’였다. 제로니모는 인디언 아파치족 추장의 이름이다. 거친 아프가니스탄 국경 산악지방을 무대로 펼쳐진 알카에다 지도자 추격전은 처음부터 미국인들에게 거친 서부의 이미지를 연상시켰으며, 제로니모라는 암호명도 그런 비유에서 비롯됐다.
미국이 빈 라덴을 10년 만에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저인망식의 정보 수집과 끈질긴 추적, 치밀한 작전 등이 결합된 결과였다. 미 당국은 9·11 테러 직후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포로 2명으로부터 빈 라덴의 측근인 연락책의 정보를 손에 넣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가명(假名) 정도만 파악했으나 2007년 본명을 입수했고, 지난해 8월에는 그가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 살고 있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이 연락책이 지난해 중반 미 정보당국이 정밀 감시해 오던 인물과 통화를 하면서 위치추적을 할 수 있었다.
미 당국은 그의 거주지가 당초 예상됐던 산악지방이나 동굴이 아닌 이슬라마바드에서 100km 떨어진 부유한 소도시 아보타바드라는 점에 주목했다. 부근의 다른 집들에 비해 8배나 넓고 삼엄한 경계시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미 정보당국은 최소 20만 달러를 호가하는 3층짜리 호화주택이 중요한 인물, 즉 빈 라덴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은신처란 결론을 내렸다. 이쯤 되자 미군은 아프간 바그람 공군기지에 빈 라덴의 은신처와 똑같은 모형을 만들고 수개월간 모의 실전훈련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바마 행정부는 테러범의 응징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놓칠 수 없었기에 최정예 부대와 첨단 병기를 투입키로 결정했다.
이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미해군 특수부대 네이비실의 ‘팀6’ 요원들이었다. 1962년 창설된 네이비실은 바다(Sea) 하늘(Air) 육상(Land) 어디서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된 최정예 부대. 베일에 가려진 존재만큼이나 강력한 전투력으로 네이비실 안에서도 특히 ‘팀6’은 ‘에이스 중의 에이스’로 꼽힌다고 한다. 보통의 네이비실 구성원들보다 훨씬 강도 높은 훈련을 거치며 네이비실 요원들 사이에서도 지옥훈련으로 소문나 있다. 예를 들어 약 9km 상공에서 산소마스크만을 쓴 채 공중 강하해 해상의 납치된 여객선으로 침투한 뒤 선박통제권을 확보하는 등의 훈련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또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개발해 온 스텔스 헬기도 투입된 것으로 미 언론들은 보도한다.
제로니모 작전은 40분 만에 끝났고, 사살된 빈 라덴 시신은 항공모함 칼 빈슨호에서 아라비아 북부 해역에 수장됐다. 미 당국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수장했다고 했지만, 빈 라덴의 묘지가 만들어질 경우 급진 무슬림들의 성지(聖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다음 타깃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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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라덴 사살 이후 미국의 다음 표적이 되고 있는 알 자와히리. |
가장 먼저 미국이 겨냥하는 목표는 이집트 외과의사 출신의 아이만 알 자와히리다. 알카에다의 2인자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빈 라덴에 맞먹는 거물급 테러리스트다. CIA는 “빈 라덴이 알카에다의 얼굴이라면 알 자와히리는 두뇌”라고 평가한다. 카리스마에선 빈 라덴이 앞설지 모르지만, 2001년 9·11 테러는 물론이고 1998년 탄자니아 주재 미국 대사관 테러, 2000년 미국 군함 콜(Cole)호 테러, 2005년 영국 런던 자살폭탄 테러 등 각종 테러를 실질적으로 기획·주도한 이가 알 자와히리라고 보고 있다. 알 자와히리는 리비아 내전(內戰)이 한창이던 4월 14일 비디오 연설을 통해 “서방국가들의 리비아 사태 개입이 리비아에 대한 침략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아랍권은 서방과 카다피 축출에 나서야 한다”고 선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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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QAP의 지도자인 예멘계 미국인 안와르 알 올라키. |
미국의 응징 대상이 반드시 알카에다와 탈레반 등 이슬람 테러조직의 지도자들만을 겨냥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빈 라덴 사살 이후 한국 내에서는 특히 보수(保守)인사들을 중심으로 김정일(金正日)도 미국의 응징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미국이 테러리스트를 응징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1998년 채택한 대통령령(令) 62조다. 테러리스트들을 용납하지 않으며, 모든 법적 장치를 동원해 테러리스트들을 응징한다는 게 골자다. 아울러 미국은 ‘테러행위를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응징한다’는 유엔 안보리의 결의까지 활용해 왔다.
金正日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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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군 부대를 시찰하는 김정일. 김정일도 미국인에 대한 도발을 자행할 경우 미국의 제거대상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이던 1980년대 중반 미국은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국제 테러에 연루돼 있다는 이유로 카다피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 바 있다. 또 최근 중동·북아프리카 민주화 시위과정에서 반군 등을 살해한 것 때문에 미국과 나토군이 카다피의 트리폴리 관저를 공습해 카다피의 여섯째 아들 사이프 알 아랍과 손자 3명이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김정일도 유사한 경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김일성(金日成) 생존시부터 아웅산 테러(1983년), KAL기 폭파(1987년)와 일본인 납치 등에 관여했고 작년 천안함 폭침(爆沈)과 연평도 포격, 황장엽(黃長燁) 전 북한 노동당비서 암살조 파견 등을 직접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김정일은 핵(核)무기 개발을 통한 핵전쟁 위협, (미국 대륙까지 도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이란·시리아 등지로의 불법 무기수출 등에도 연루돼 있다. 지난 2003년 김정일 정권이 ‘핵 보유’ ‘ICBM 개발’ 등을 운운했을 때 친북(親北) 성향의 셀리그 해리슨 국제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조차 “북한의 발언들은 미국의 대북(對北) 강경파들에게 전혀 억지력을 갖지 못하며 오히려 이들을 자극해 응징의 명분을 키울 것”이라고 《뉴욕타임스》에 말한 바 있다.
그렇지만 김정일이 미국과 미국민에 대해 무력도발 등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적대행동을 지시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 당장 미국의 응징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관측통들 사이에서는 북한이 지금처럼 핵을 포기하지 않고 연평도·천안함 등 동맹국인 한국에 대한 도발과 테러를 계속할 경우, 미국이 중국을 이용한 김정일 제거 혹은 북한 내부의 쿠데타 배후조종을 통한 실각 등을 꾀할 것이라는 예상들을 꾸준히 제기한다.
8년 재임기간의 대부분을 빈 라덴 잡기에 보낸 부시 전 대통령은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정의는 실현된다”고 했고, 오바마 대통령도 “이제 정의가 실현됐다”며 마침표를 찍었다.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가 이번 미국의 빈 라덴 추적과 사살 소식에 위협을 느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북한의 관영 매체들은 빈 라덴 사살이 전해진 5월 2일 이후 최소 1주일간 빈 라덴 사살 소식을 다루지 않았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북한이 세계적인 뉴스인 빈 라덴 사망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미뤄 상당한 압박을 실감하고 내부의 철저한 단속에 나선 것 같다”고 해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