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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한계에 달한 건강보험 체계와 ‘의대 증원’ 논란

의대 증원은 미봉책, 건보 체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글 : 박한슬  의료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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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보료 인상 회피가 전공의에 대한 과도한 의존, 성형 등 非보험 진료과 성행 야기
⊙ 의사 증원하면 의료비 하락? 전공의 줄어들고 ‘필수 의료’ 기피 늘어날 것
⊙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현재의 건강보험 체제는 지속 불가능
⊙ ▲의료 보장 차등화 ▲가벼운 질환에 대한 건보 보장 축소 ▲국공립 의료기관에만 건보 적용 등 건보 개혁 고민해야
⊙ 보수 세력이 이탈하면 진보좌파가 보건의료 영역 장악할 수도

박한슬
1991년생. 차의과학대학교 약학대학 약학과 졸업, 연세대 통계·데이터사이언스 석사 / 《중앙일보》 《주간조선》 칼럼니스트, 前 서울시 미래서울전략회의 자문위원 / 저서 《오늘도 약을 먹었습니다》 《바이오 투자의 정석》 《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
대한의사협회가 3월 3일 서울 여의도에서 정부의 의대 정원 추진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진=조선DB
  문재인 대통령 재임 시기인 2020년의 의사 파업 이후 4년여 만에 재차 의사 파업이 발생했다. 계기는 설 명절을 앞두고 발표된 대규모 의대 증원 정책이다. 물론 의대 증원 정책 자체가 특별히 충격적일 이유는 없었다. 대통령실에서는 의대 증원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꾸준히 표명했었고, 의료계 내에서도 이런 정책 추진은 상수(常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작 변수(變數)가 된 건 의대 증원의 규모다. 암묵적으로 예상되던 연간 300여 명 수준의 증원을 훨씬 뛰어넘는 2000명대 의대 증원이 발표되자 의사들이 집단적으로 반발을 하고 나선 것이다.
 
  표면적으로만 살피면 저번과 유사한 파업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현재 진행 중인 파업은 여러모로 과거 문재인 정부 때의 파업과는 결이 다르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파업을 주도 중인 의사들이 요즈음의 집단행동을 ‘파업’이 아닌 ‘집단 사직(辭職)’이라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파업의 주축인 대학병원 전공의들은 1년마다 재계약을 하며 비정규직 고용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재계약 시점이 매년 2월 말엽이다. 그러니 기왕 증원 발표가 난 김에 아예 재계약을 않고, 집단 사직하는 방식으로 법률적인 파업 요건에서 벗어나겠다는 전략이다.
 
  법률적 포섭(包攝)이야 어찌 됐든 업무 중단에 따른 불편을 지렛대 삼아 정부를 상대로 강한 협상력을 발휘하는 행태는 전형적인 파업의 양상(樣相)을 띤다. 그간 윤석열 정부가 가장 자신 있게 펴던 정책이 무엇인가. 임기 중 발생한 숱한 파업에 강경하게 대응해, 노조의 항복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니 의사 파업에도 대응 방식은 같았다. 타협 없이 법과 원칙에 따른 엄중 처벌을 진행해, 불법 파업을 분쇄(粉碎)하겠다는 것이다. 집단행동을 시작한 전공의들에 대한 업무개시명령 발동은 물론 면허 정지 등의 강력 대응은 이미 진행 중이다.
 
 
  보수 성향 의사 세력의 이탈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방식은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다. 고용계약 만료라는 변칙적인 방식으로 사직한 이들의 집단행동을 법적으로 처벌한다는 게 난망(難望)하다는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이런 강(强) 대 강 대치의 피해자는 결국 환자이기 때문이다. 이미 주요 대학병원급 의료기관은 전공의가 빠져나간 공백을 채우기 위해 교수들이 초과 당직 근무를 서고, 이마저도 부족해 의사 업무의 일부를 간호사에게 떠맡기는 실정(實情)이다. 예정됐던 수술이 취소되고, 응급환자가 타(他) 병원으로 이송되는 상황에 대해 국민이 과연 언제까지 의사 탓만 할까. 여론의 뭇매를 맞는 중인 의사는 물론 정부도 오래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다.
 

  더 큰 문제는 보수우파 세력의 든든한 우군(友軍)이었던 의사 세력이 이번 일을 기점으로 집단적 이탈 조짐마저 보인다는 것이다. 국내 보건의료 인력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간호사들은 상대적으로 진보 정당에 우호적인 성향이 짙고, 그 반대편에서 균형을 맞춰주던 게 보수 성향이 강한 의사들이다. 그런데 이들마저 이탈하면 보건의료 영역 자체가 진보좌파 세력의 영향권으로 침잠(沈潛)하고 말 것이다. 당장 이번 총선에서는 여당에 도움이 될지 몰라도 제대로 된 구조 개혁을 진행할 동력을 잃으면 종국엔 나라를 바로 세울 기회를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 공공(公共) 의료보험인 건강보험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음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공공 서비스의 한계
 
  공공 서비스의 본태적(本態的) 한계 중 하나는 비용이 시장(市場)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국 대처 총리 집권기에 이루어진 대규모 보수주의 개혁은 여러 자문기관의 도움을 받아 성공할 수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인 애덤스미스연구소(Adam Smith Institute)에서는 이를 경제학의 공공선택이론(公共選擇理論)으로 설명한다. 얼핏 보기엔 고결해 보이는 투표와 정치적 결단조차 정치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표 거래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용역을 공급하면 할수록 적자(赤字)를 보는 기업이 있다고 해보자. 정상적인 시장의 압력에 따르면 이런 기업은 당연히 도산(倒産)하고 만다. 그렇지만 국가나 정부가 관여하는 공공 부문에서는 이런 시장 압력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민주국가에서는 국민들이 투표할 때 아무런 값을 지불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표를 받는 선출직 정치인은 막대한 국가 예산에 대한 의사 결정권을 가지므로, 국민의 환심을 사는 정책을 펴서 표를 얻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국민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정책을 펴도록 강제하는 민주국가의 기본적 원리다.
 
  그런데 이것이 시장원리와 충돌을 빚으면 어떻게 될까. 가령 국민들이 거의 염가(廉價)에 이용하는 공공 서비스가 있다고 해보자. 당연히 시장원리에 따라 마진이 없거나 적자를 볼 테고,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부채(負債)가 쌓여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 이르겠지만, 그래도 선출직 정치인들은 이런 공공 서비스의 비용을 쉽게 인상하지 못한다. 국민들이 자기 주머니 털어가는 정치인에겐 표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이런 현상을 가장 두드러지게 관측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전기료다. 애초 낮은 전기요금이 산업 발전을 위한 일종의 보조금(補助金)적인 성격이 있다고는 하나, 발전 원가(原價)가 부쩍 높아지는 상황에서도 전기요금을 인상하지 못한 건 정치적 부담을 우려한 정치인들 때문이었다. 실제로 한국전력은 문재인 대통령 임기 중에만 약 26조원가량의 손실을 봤고, 적자를 감당하기 위해 찍어낸 한국전력 기업채(企業債)가 국내의 거의 모든 자금을 빨아들인 탓에 국내 자본시장은 심각한 자본경색까지 겪었다.
 
 
  보장성보다 낮은 건보료 원해
 
2019년 6월 28일 무상의료운동본부 관계자들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건강보험료 동결 등을 요구했다. 사진=조선DB
  건강보험이 처한 상황도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의 의료 비용은 여타의 선진국에 비해 매우 저렴한 편에 속하고, 의료비를 올리려는 시도에 대한 국민적 저항감도 매우 강한 편이다. 의료 전문 매체 《청년의사》가 2022년에 진행한 창간 30주년 기념 특집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설문 응답자의 58%는 ‘보장성이 낮더라도 건강보험료(건보료)를 동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설령 건보료를 인상한다고 하더라도 ‘보장성 확대’가 선행(先行)되어야만 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42%인 걸 고려하면, 건보료 인상이 정치인들에게 쉽지 않은 선택지라는 게 여실히 드러난다. 그렇지만 건강보험 재정 압박은 실재(實在)하니 정치인들도 대안을 찾아야만 했고, 재정 확충과 의료 이용량 통제라는 정도(正道)만 쏙 뺀 숱한 방법이 시도됐다.
 
  가장 먼저 시도된 방법은 의료 이용량을 줄이는 것이었다. 이런 장치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던 영국의 사례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먼저 살펴보자.
 
  영국은 국민건강서비스(NHS)라는 체계를 이용해 실질적인 무상(無償)의료를 수행하고 있다. 이런 방식이 의료에 대한 접근성 측면에선 이용자에게 가장 바람직할 수는 있지만,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처럼 자기가 부담할 비용이 없다면 의료 이용량이 한도 없이 늘어날 수 있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실제로 영국은 의료 서비스를 받고자 하는 환자가 지나치게 많아, 의사 진료를 보기 위해선 평균적으로 최소 6주에서 8주 정도를 예약하고 기다려야만 한다. 진보좌파 진영에서 흔히 낙원(樂園)으로 묘사하는, 무상의료가 이루어지는 유럽 국가의 적나라한 의료 이용 현실이다.
 
 
  실손보험 허용 후 의료 이용 폭발적 증가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는 전체 의료 비용 중 일정 비율을 본인부담금 형태로 납부하게끔 하여 진료에 대한 가격 장벽을 세웠다. 예컨대 의료기관을 찾아 10만원짜리 진료를 받았다고 해보자. 이 경우 동네의원에서는 3만원(30%), 종합병원에서는 5만원(50%), 흔히 대학병원으로 불리는 상급종합병원은 6만원(60%)을 본인이 내야만 한다. 돈 한 푼 내지 않는다면 10만원짜리 진료라도 한 번 받아보려는 ‘가짜 의료수요’는 3만원이라도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상당 부분 사그라든다. 불필요한 의료 이용이 줄어드는 건 물론 대학병원으로의 쏠림도 줄어드는 꽤 합리적인 방식의 의료 이용량 통제 정책이다.
 
  이론적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의료 이용이 적정 규모로 통제되어야 했으나, 2007년 노무현 정부가 실손의료보험(實損醫療保險) 상품이 판매되는 걸 허용하며 이런 상황이 바뀌게 됐다. 흔히 실손보험이라 불리는 보험에 가입하면, 본인부담금을 보험사에서 내주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의료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의료 이용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통제 기능이 무너진 건강보험 재정 지출도 늘어나게 됐다. 그래서 차선으로 선택된 방식이 병원에서 청구한 의료비를 엄격하게 심사해 삭감하는 것이었다. 의료 서비스 소비자이자 표를 쥔 유권자 통제가 아니라 공급자인 의사를 억죈 것이다.
 
  방식은 이렇다. 실손보험 덕분에 환자는 본래 자신이 내야 할 본인부담금을 민간보험사에서 내준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돈 걱정 없이 다양한 진료를 요구하고, 의사 역시 진료량을 늘리면 매상이 늘어나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성의껏 진료를 본 다음 건강보험에서 갖은 이유를 들어 진료비를 지급하지 않고 제동을 걸면 어떨까. 병원 처지에서는 품은 품대로 팔고 아무도 진료비를 주지 않는 황당한 상황이 도래한다. 진료를 수행했는데도 청구한 진료비를 주지 않는 삭감의 전형적 행태가 이렇다. 건강보험공단이 의료량 증가에 의한 재정 압박을 일정 부분 민간 의료기관들에 떠넘긴 것이다.
 
 
  샛길 찾다 발견한 의대 증원
 
  이런 상황이 십수 년째 반복되다 보니, 애초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非)보험 진료’를 주력으로 하는 진료과가 생명에 직결되는 필수 의료 진료과보다 벌이가 훨씬 나아지는 기형적 상황이 만들어지게 됐다. 삭감의 불확실성과 낮은 의료 비용을 감내하는 것보다 실손보험이 보조해주는 비싼 비보험 진료에 전담하는 게 훨씬 나은 선택지가 됐기 때문이다. 건보료 인상이나 의료 이용을 통제 같은 방법을 택하지 않고, 변칙적인 방법으로 재정 손실을 벌충하려다 보니 생긴 부작용이다. 그런데도 재정 절감 효과는 크지 않았고, 필수 의료 기피라는 엉뚱한 부작용만 늘었다. 여기서 재차 다른 샛길을 찾다 발견한 게 의대 증원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대학병원급의 거대한 의료기관에서조차 상대적으로 저렴한 의료비를 지불하고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전체 의사 인력의 40% 정도가 일종의 비정규직인 전공의(專攻醫)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의사면허를 취득해 대학병원 바깥에서도 충분히 진료를 볼 수 있는 고급 인력이지만, 전문의(專門醫) 자격 취득을 위해 대학병원에 남은 이들이다. 이런 전공의들이 주(週) 80시간 이상씩 3~4년을 쉼 없이 수련(修練)받으며 일하는 덕분에 대학병원은 의료 서비스의 인건비를 대폭 낮출 수 있다. 의료비 원가(原價) 중 의사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대학병원 바깥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른 병원에 고용되어 일하는 봉직의(奉職醫) 임금도 수요-공급에 따라 비교적 탄력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졸저 《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에서도 다뤘듯, 의사 공급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서울 핵심 지역에 고용되어 일하는 의사의 평균적 급여(給與) 수준은 상대적으로 의사 공급이 적은 지방 광역시 지역보다 낮다. 의사만이 아니라 약사, 치과의사, 간호사 등의 보건의료 전문직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다. 그러니 의사를 전국적으로 부쩍 늘리면 의사의 전반적인 임금이 하락해 의료비 원가가 감소하게 되므로, 재정 절감을 이룰 수 있다는 게 정부의 계산이다. 분명 합목적적(合目的的)인 정책이긴 하나, 이런 방식의 정책적 접근은 다른 부작용을 낳는다.
 
 
  ‘필수 의료 기피’ 심해질 것
 
서울 신사역 인근 한 건물에 ‘非보험 진료’를 주로 하는 성형외과와 피부과 간판이 빼곡하게 달려 있다. 일부 전문의들은 국민 건강에 밀접한 필수 의료 분야를 기피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첫 번째는 대학병원으로의 전공의 유입 감소다. 전공의들이 대학병원에서 3~4년의 추가적인 수련을 밟으며 장기간의 노동을 감내하는 이유는 전문의 자격 취득 후엔 비(非)전문의인 일반의(一般醫)에 비해 1.5배에서 2배가량 임금 소득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대 증원으로 연간 배출되는 의사 수가 늘면 의사의 기대 수익은 전반적으로 감소하게 된다. 그러니 역설적(逆說的)으로 전공의들이 고된 수련을 감내할 이유 역시도 낮아진다. 애써 수련을 밟을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번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에서 드러났듯, 전체 의사 수의 10%도 되지 않는 전공의들이 사표를 쓴 것만으로도 대학병원은 기능 부전(不全) 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정책에 대한 반발로 인한 일시적 사직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전공의가 줄어드는 상황이 온다면, 현재와 같은 방식의 대학병원 운영은 불가능해진다.
 
  두 번째는 소위 ‘필수 의료’에 대한 기피가 더 심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대규모 의대 증원은 건강보험료 인상이나 의료 이용에 대한 통제는 없이 의료 서비스의 원가만 깎아 건강보험 재정 적자를 땜질하는 식의 정책이다. 그런데도 건강보험 재정을 나눠가질 의사의 머릿수는 늘어났으니, 기존보다 의사 각자가 가져가는 몫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건강보험 재정에 강하게 의존하는 필수 의료 진료과 전문의들의 소득이 기존보다 대폭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건강보험에 대한 상대적 의존도가 덜한 비보험 진료를 주로 수행하는 진료과 전문의들은 필수과 전문의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소득이 증가하는 효과가 난다. 결국 필수 의료 분야에 대한 선호도가 지금보다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의대 증원은 ‘마지막 카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3월 5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의대 증원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진=조선DB
  이와 같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의대 증원이 현 체계를 땜질해서 지탱하려는 몇 안 되는 절박한 시도 중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다. 투표로 선출되는 정치인이 최종 결정권을 갖는 환경에서 공공 서비스가 겪을 수밖에 없는 본태적 한계를 고려하면, 지지율과 표를 희생해야만 밀어붙일 수 있는 공공 서비스 요금 인상과 이용량 통제 정책 외엔 꺼낼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사용한 것에 가까워서다. 그런데 애초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건강보험 체계가 더는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이 제대로 고려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저출산으로 인해 인구 구조가 무너지며 부양비(扶養比)가 육중하게 기울어지는 상태에선 의사 수만 늘리는 게 절대 해법이 될 수 없어서다.
 
  현재와 같은 건강보험 체계가 가동될 수 있었던 건, 우리나라가 그동안 인구배당(人口配當) 효과를 강하게 받아왔기 때문이다. 인구통계학에선 만 15세에서 65세 이하의 인구 집단을 생산가능인구(生産可能人口)라고 칭하는데, 이 연령대의 사람은 사회에서 소비하는 양보다 생산하는 양이 많아 사회의 순(純) 생산을 늘리는 데 기여(寄與)한다. 바꿔 말하면 이외의 연령대는 생산하는 양보다 소비하는 양이 많다는 의미고, 이들은 생산가능인구의 도움 없이는 자생(自生)이 어렵다. 부양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생산가능인구가 더 많은 시기에는 주식에서 배당금을 받듯 인구 구조에서 이득이 생긴다. 이것이 인구배당 효과다.
 
 
  의료 보장 차등화
 
  우리나라는 고도성장기에 인구배당 효과의 수혜(受惠)를 크게 받았고, 건강보험도 젊은 직장인들이 내는 건강보험료에서 본 흑자(黑字)가 피부양자인 노년의 친족과 지역가입자가 만드는 적자를 벌충하는 덕분에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년 동안 저출산 기조가 꾸준히 이어지며, 생산가능인구 대비 노령인구의 비(比)를 의미하는 노년부양비가 극단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2023년 기준으로 생산가능인구 100명이 부양해야 하는 노령인구는 26명 정도인데, 2038년쯤에는 이 수치가 2배인 55명으로 부쩍 늘어난다. 노령인구의 의료비 지출이 젊은 인구의 3배가량인 걸 고려하면, 현행 건보료를 늘리는 수준으로는 의료비 지출이 감당되지 않는다. 결국 인구 구조 변화로 인해 대규모 구조 변화가 반쯤 강제되는 상황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직접적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데 집중하는 의료가 아니라 쇠약해진 노인의 일상생활을 돕고, 노환으로 와병(臥病)을 돕는 돌봄 영역에서의 재정 투입도 추가적으로 필요하다는 걸 고려하면 지금처럼 언제든 병원에 들러, 저렴한 가격으로 원하는 의료 서비스를 받는 형태의 의료체계 유지는 불가능에 가깝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현 체계를 개변(改變)해야만 하는 것이다.
 
  현행 건강보험 체계가 나아갈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세 가지 정도로 좁힐 수 있다. 첫 번째 대안은 현재와 같이 전 국민이 동일한 의료 보장을 받는 일원화(一元化)된 형태의 건강보험이 아닌, 납부하는 건보료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에 차등을 주는 방식이다. 예컨대 건강보험료 플랜 A를 선택한 국민은 상대적으로 건보료가 저렴하나, 치과나 한의원과 같은 추가적인 의료 서비스에 대해서는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다. 반대로 건강보험료 플랜 B를 선택한 국민은 상대적으로 건보료가 조금 비싸지만, 치과에 대해서는 건강보험이 적용되고 한의원에서는 건강보험을 적용받지 못한다. 그리고 가장 비싼 건강보험료 플랜 C를 택한 사람은 현재와 같은 모든 의료 서비스에 대해 건강보험을 적용받는 식이다.
 
  이런 방식을 택하면 현재와 같은 건강보험 체계를 최대한 유지할 수 있고, 공공 영역으로 건강보험을 일원화하는 분명한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공공선택이론이 충실히 보여주듯, 정치가 결합한 비(非)시장적 의사 결정 구조에선 값싸고 저렴한 건강보험 상품에 대한 유권자를 만족시키는 매표(買票) 행위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저렴한 건강보험 플랜에 포함되는 의료 서비스의 가짓수와 범위는 선거를 거듭하면서 점차 건강보험 재정과 무관하게 늘어날 수밖에 없고, 재정의 건전성은 다시 나빠질 수밖에 없다.
 
 
  건보 보장 범위 축소
 
건강보험공단은 재정압박을 일정 부분 민간 의료기관에 떠넘기고 있다. 담도암 환자들이 2021년 11월 3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앞에서 진료비 삭감을 하는 심평원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진=조선DB
  두 번째 대안은 건강보험료 수준은 유지하고, 건강보험이 보장하는 치료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다. 예컨대 중증 외상이나 희귀질환, 암과 같은 중증(重症)질환은 개인이 오롯이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니 중증질환에 대해서는 현재처럼 건강보험을 적용해 개인의 부담을 최대한 덜어주되, 이외의 의료 서비스에 대해서는 건강보험이 보장하는 금액을 극도로 낮추자는 것이다. 가령 동네의원에서 감기 진료를 본다고 할 때, 환자가 부담하는 금액은 전체 감기 진료비 1만2000원의 30% 수준인 3600원 정도다. 이런 경증 질환에 대해서는 진료비를 환자가 30%만 부담하는 게 아닌, 90% 정도인 1만1000원을 부담시키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건강보험이 보장하는 범위를 좁히면, 당연히 의료접근성은 현재보다 많이 낮아진다. 암과 같은 중증질환이 아니라도 삶의 질에 영향을 주는 질병은 많다. 이들 질환에 대한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낮아지면, 치료비 부족을 이유로 질병을 달고 사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건강보험의 진공(眞空) 영역을 채우려면 현재도 활발히 운영되고 있는 실손보험에 가입해 민간건강보험의 보장을 받는 게 반쯤 필수가 된다. 재난적 의료비가 발생하는 상황은 국가가 책임지되, 삶의 질에 영향을 주는 이외의 다양한 질병들은 개인의 부담 능력에 따라 치료받는 형태의 의료체계로 바뀌는 것이다.
 
 
  영국에도 민간 영리의료기관 존재
 
  세 번째 대안은 현재 수준의 건강보험 보장 범위와 건강보험료 수준을 모두 유지하는 대신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의료기관을 국공립 의료기관 등으로 좁히는 방식이다. 일반적인 교양 수준의 지식으론 영국이 ‘무상의료’를 수행하는 국가로 이해되고 있으나, 이는 사실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영국이 운영 중인 무상의료는 국민건강서비스(NHS)가 작동하는 공적 의료기관에만 해당할 뿐, 영국에도 영리적 목적으로 운영되는 민간의료기관은 별도로 존재한다. 국가가 운영하는 국민건강서비스는 대기시간은 길어도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으나, 민간이 운영하는 의료기관은 대기시간이 짧은 대신 비싼 돈을 지불해야 한다.
 
  만약 우리나라가 이런 방식으로 국내 의료기관을 이원화(二元化)한다면, 의료 이용량을 통제하는 장벽은 비용이 아니라 긴 대기시간이 된다. 빈부(貧富)에 따라 의료 이용에 차이를 두는 게 아니라 불편을 감내할 수 있는 기간에 따라 의료 이용에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택하면 자연스레 불필요한 경증 질환으로 의료기관을 찾는 환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고, 기다림이 힘들다면 돈을 써서 민간의료기관을 찾을 수도 있으니 자유에 대한 침해도 상대적으로 적다. 기다림에 지친 국민들의 불만이 정치권을 향할 수밖에 없지만, 국공립 의료기관 설립을 위한 재정 투입은 공공 서비스 비용 인상을 억제하는 것보단 더욱 신중한 정치적 의사 결정을 요구하는 일이다. 현재 국내의 공공 의료기관 비율이 5%에 불과해 실현 가능성이 작긴 하지만 재정 파탄을 막고, 의료 이용량을 통제하기에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구조 개혁 先行해야
 
  살펴본 것처럼 의대 증원이 현재 상황을 타개(打開)하는 한 가지 수단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건강보험 체계를 바꾸는 대규모 구조 개혁이 없는 한, 이런 정책도 결국 동족방뇨(凍足放尿)일 뿐이다. 이런 불완전한 정책을 대규모 의사 파업과 장기간의 의료 대란을 감내하며 추진할 이유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미 전공의를 넘어 의과대학 교수까지 사표를 내기 시작한 상황을 언제까지고 방치할 수는 없다.
 
  게다가 증원을 진행한다고 한들, 요즈음 거론되는 2000명이라는 수치는 현재의 의과대학이나 대학병원 수련 환경이 감내하기 힘든 규모다. 개별 의과대학에서야 정원을 늘릴 욕심에 한껏 증원 신청 규모를 부풀리고 있지만, 정작 삼키지도 못할 음식을 입에 욱여넣는 미련한 일일 뿐이다. 이제라도 정부가 나서서 정상적으로 소화가 가능한 적정 규모로 조정하는 게 옳다.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건 부양비가 더 무너지기 전에 진행해야 할 건강보험 구조 개혁이다. 노년부양비가 2배로 늘기까진 고작 10여 년이 남았다. 그런데 사회적 논의를 거쳐 국민들이 현재의 의료 시스템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길 바라는지 총의(總意)를 모으는 데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게 자명하다. 여론전으로 의사를 악마화하며, 과다한 증원 규모를 원안대로 밀어붙이는 데 쓸 시간이 없다는 말이다. 시대의 과제에 부응(副應)해 한국 사회가 겪을 큰 문제를 해결한 정부로 남을지, 귀중한 보수 집권기를 의사들과의 드잡이질로 허비한 정부로 남을지는 오직 대통령실의 선택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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