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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실향민 아버지와 함께한 6·25 참전유공자 신청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잊힌 영웅’… ‘지게부대’를 기억해달라”

글 :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군사전문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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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때 영국군 29여단 KSC로 근무하다 속초 100노무여단서 휴전 맞아
⊙ 2018년 첫 유공자 신청했으나 참전증명 없어 번번이 ‘퇴짜’
⊙ 국방부, 6·25전쟁 전문가 없어… 한시적으로 전문가 TF 구성해야
⊙ 지난 13년간 비군인참전자 1만498명 신청… 인정률 43%(4485명) 기록
⊙ ‘지게부대’ 복무자 30만 명, 전사자 2064명, 실종자 2448명, 부상자 4282명
⊙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미군 병력을 추가로 파병했어야만 했을 것”(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
⊙ 마침내 영국 29여단 하사 이름 기억… 영국 국방부 조회하며 선정 ‘급물살’
6·25전쟁의 숨은 영웅 지게부대원. 지게에 식량, 탄약 등 보급품을 실어 국군과 유엔군에게 보급했다. 사진=국가기록원
  지난 7월 24일. 경기도 파주에 사는 아버지(오순오·吳順五)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1923년 2월생이니까 올해 100세를 맞았다. 아버지는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이 날 6·25 참전자로 인정한대”라며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격앙된 목소리였지만, 분명 감격이 잔뜩 묻어났다. 전화를 받은 기자도 잠시 멍한 느낌이 들었다. 2018년 처음 ‘6·25전쟁 비군인참전자’ 확인 신청을 하면서 겪었던 6년간의 일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경기북부보훈지청 앞에서 참전유공자 등록을 마치고 참전유공자증서를 들고 있는 오순오씨. 사진=오동룡
  실향민인 아버지가 경기북부보훈청에 참전자 확인 신청을 한 것은 2018년 10월 29일이었다. 평남 평원이 고향인 아버지는 6·25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개성을 지나 고랑포로 월남(越南)해 경기도 양주에서 피란 생활을 했다. 1951년 4월 한국군 노무단(KSC·Korean Service Corps) 소속으로 설마리 전투 이후 영국군 제29여단에 배치됐고, 그해 겨울 한국군 노무사단 창설에 따라 100노무여단으로 소속을 옮겨 속초에서 휴전까지 노무자(지게부대)로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휴전하면서 부대에서 받은 ‘참전증명서’가 없어 국방부로부터 ‘참전 진술만으로는 참전유공자법의 대상자임을 확인할 수 없다’는 회신을 받았고, 이듬해 1월 11일 또다시 참전 사실 확인 신청을 했으나, 이마저도 국방부는 반려했다. 같은 해 10월 국민권익위원회 소속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했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지금껏 햇수로 6년간 참전유공자 확인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국방부와 국가보훈부 담당자조차 “진술의 구체성으로 볼 때 참전하신 것이 분명해 보인다”면서도 “함께 참전한 인우보증인이나 공적 또는 간접 입증 서류가 없어 어쩔 도리가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가족들도 이젠 안타깝지만 포기하자고 했다.
 
  그런데 올 들어 주변 몇몇 지인이 “어르신이 올해 100세시고, 게다가 한미동맹 70년, 정전 70주년을 맞는 의미 있는 해이니 참전유공자로 지정받으면 얼마나 의미가 있냐”며 다시 신청해보라고 강력히 권했다. 지난 3월 16일 아버지를 모시고 의정부에 있는 보훈지청에 신청한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기자는 그동안 주변의 참전자들이 국방부가 요구하는 ‘증명의 벽’을 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선 사례들을 안다. 따라서 이번 국방부의 참전유공자 확인 과정이 비록 개인사이긴 하지만, 아직도 참전 확인을 위해 애쓰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선정 뒷얘기를 소개한다.
 
 
  ‘브리티시 아미, 전차대대 B중대’
 
  평안남도 평원군 검산면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1950년 7월 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 징집을 피해 다니다가 어머니가 “서울에서 목회하는 ‘고사촌’(고종사촌의 이북사투리) 누이댁에 일주일만 피신해 있으라”고 해서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개성의 송악산과 박연폭포를 지나, 고랑포를 거쳐 월남했다. 당시 서울과 경기는 인민군 치하였다. 서울 누이댁에 가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던 아버지는 6개월 동안 국군 패잔병들과 함께 감악산에서 숨어 지냈다. 그사이 수차례 인민군에게 붙들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
 

  아버지의 6·25 참전은 1951년 1·4 후퇴 때 충남 논산에서 두 달간의 피란 생활을 마치고 국군의 북진과 함께 경기 양주로 돌아오면서 시작됐다. 1951년 4월 초, 양주군 신산리 남면사무소에서 노무자(KSC) 입대지원서를 작성하고 입대했다.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 붙잡혀 끌려가느니 국군에 입대하면 더 안전할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는 1951년 4월 말경 경기도 파주 설마리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 29여단으로 배속받았다. 아버지는 당시 영국군 부대를 “브리티시 아미(British Army), 전차대대 B중대”라고만 불렀다.
 
  6·25가 발발하자 영국은 27보병여단에 이어 1950년 11월 29보병여단을 투입했다. 파주엔 영국군 29여단이 주둔했고, 전차대대라면 제8킹스 로열 아이리시 훗사르 전차대대일 것이라고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는 확인해주었다. 영국군 29보병여단은 역대 고려왕들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崇義殿) 일대에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전차 무한궤도 앞 흙막이에 새겨진 ‘41’이라는 숫자를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설마리 전투 후 영국군 부대에 배치돼
 
1951년 4월 설마리 전투 후 글로스터셔 부대가 사열을 받고 있다. 작은 사진은 글로스터셔 부대의 휘장. 사진=위키피디아
  설마리 전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아버지가 배치된 것이었다. 중공군과 전투를 벌인 글로스터셔 대대를 비롯해 영국군 4개 보병대대가 13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분위기는 침울했다고 했다. 영국군들이 아버지를 비롯해 KSC들을 인솔해 적성면 설마리 일대의 참호들을 수색해 병사들의 유류품을 찾기도 했다. 무기는 이미 치워졌고, 개인물품들이 조금 나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제29여단 전차대대 의무대에 배속돼 그곳 의무대에서 심부름을 했다. 작은 키에 베레모를 쓴 영국군 의무대장(대위)의 당번병 노릇도 했다. 그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것, 일요일에 욕을 하면 “이지 마우스(easy mouth·입 조심해)”라고 하면서 욕하지 말라고 했다. 캡틴의 지시로 식당에서 식사를 가져올 때, 아버지가 군복 양쪽 주머니에 과자를 잔뜩 넣어오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We have plenty of time, you can bring one by one(시간 많으니 한 개씩 가져와라)”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영국군들의 차(茶) 사랑은 특별했다. 아무리 총탄이 쏟아져도 오전 10시 ‘티 브레이크’를 종교처럼 챙겼는데, 그때 비스킷과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라는 붉은색 티를 마셨다고 했다. 식사는 영국군이 먼저 하고 노무자들은 나중에 먹었지만, 먹는 음식은 절대 차별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영국군 의무대에서 생활하다 병기고(Arms Room)에서 총기를 닦는 일을 맡았다. 미군이 쓰던 M1 소총이 아니라 총열을 빼놓고는 전부 노란색 목재로 된 소총(리 엔필드)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보급 일도 맡아 탄약, 피복이나 신발 등을 문산(文山)에 있는 영국군 보급창에 가서 타 왔다.
 
 
  백선엽 장군의 1군단 지원 부대로 전출
 
  1951년 7월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 등 한반도에 배치된 영연방 5개국의 모든 파병부대가 모여 ‘제1 영연방사단’을 결성했다. 영연방사단은 미 1군단의 일원으로 미 1기병사단, 미 3사단, 미 25사단, 백선엽(白善燁) 장군의 한국군 1사단에 배속돼 참전했다. 1951년 11월 영연방이 재편되면서 아버지를 비롯한 노무자들은 영국군을 떠나 새로 편성되는 한국군 노무부대로 전출을 갔다. 백선엽 장군이 군단장이던 국군 1군단을 지원하는 100노무여단에 배속된 것이다. 백 장군의 1군단사령부는 주문진(注文津)에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를 비롯한 노무자들은 파주에서 출발해 강원도 속초로 향했다. 대구 방직공장에서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온 노무자들과 합류해, 포항에서 미군 LST 수송선을 타고 삼척을 거쳐 속초로 갔다. 강원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가 100노무여단 본부가 자리 잡은 곳이었다. 부대 앞은 지금도 문암대와 백도해수욕장이 있다.
 
  노무자들은 미국이 일본에서 전시 군수물자로 제작해 공수한 군복을 지급받았다. 모자부터 상하의까지 하늘색이었다. 왼쪽 어깨에는 노무여단을 뜻하는 KSC(Korean Service Corps)라는 마크를 새겼다. 겨울용 누비옷도 받았는데, 노무부대원들은 그 옷이 마치 죄수복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1951년 11월 이후 아버지는 제100노무여단에서 휴전 때까지 약 2년간 전투를 지원했다. 영국군 부대 시절처럼 1군단을 지원하는 보급을 담당했다. 군인 1인당 안남미를 하루 정량씩 지급했고, 담배는 10개비를 주었다고 한다. 한 달에 월급으로 600원을 지급받았다. 전쟁 통에도 월급이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국군은 보급이 열악한 상황에서 싸웠다. 영국군 부대 KSC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굶주렸다고 한다. 동료 중 일부는 거진항 해변에서 파도칠 때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펄쩍펄쩍 뛰는 복쟁이(참복)를 구워 먹고 배앓이를 하다가 죽은 이도 있었다. 해변의 초가집을 헐어 그 목재로 동료를 화장했다고 한다.
 
  100노무여단은 1군단의 지시에 따라 탄약이나 밥, 물 등을 산꼭대기로 져 나르는 운반 책임을 맡았다. 1군단사령부는 보급품을 실은 차량이 인민군에 피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야산이나 외진 곳에 부려놓도록 했다. 그러면 ‘지게부대’가 그것을 산으로 지고 올라가는 것이다. 한창 전투가 벌어져 상황이 급해지면, 고지 아래에서 보급을 관리하던 아버지까지 고지 중간 능선까지 보급품을 어깨에 메고 뛰었다고 한다.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방전이 벌어질 때는 참호(塹壕)를 파는 것도 노무자들의 일이었다.
 
 
  돌아갈 곳 없는 귀향
 
  아버지는 노무부대를 ‘지게부대’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정작 지게는 쓰지 않았다고 했다. 지게는 부대 내에서 물건을 운반할 때만 사용했고, 대부분 한쪽에 쌓아두었다고 한다. 산에 오를 때는 탄약이나 식량 상자를 멜빵으로 메고 다녔다. 그래야 총탄 소리가 들리면 신속하게 엎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산할 때는 부상병을 부축해 내려올 수도 있었다. 한번은 포탄에 충격을 받아 축 늘어진 병사를 부축해서 내려왔다고 한다. 복부에 파편상을 입었는데, 붕대로 응급치료를 했음에도 군복 밖으로 피가 흥건하게 새어 나왔다고 한다.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3년 1개월간의 전쟁이 끝나자 100노무여단도 해체됐다. 아버지는 영국군 노무자 경력까지 합쳐 약 2년 3개월 동안 전쟁터에서 살았던 것이다. 휴전 당일, 제100노무여단 장교가 “노무 해산으로 다 집으로 돌아간다”며 “보유한 장비는 전부 반납하라”고 지시했다.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온 노무자들은 “고향으로 간다”며 즐거워했으나, 아버지는 오히려 분단의 현실을 체감하면서 눈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당시 국군 1군단사령부는 임무 해제를 기념해 노무여단 참전자들에게 ‘참전기장’과 ‘참전증명서’를 주었다고 한다. 현역으로 갈까 고민도 했으나, 이북에 있는 가족 품으로 돌아갈 생각이 더 컸다. 고향이 가까운 파주 적성으로 와보니 영국군 부대가 아직도 주둔하고 있었다. 다시 영국군 부대에서 근무하게 됐다. 얼마 후 영국군 부대도 한국을 떠났다. 영국군들이 한국을 떠나기 얼마 전, 노무자들이 근무하는 막사를 찾아와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들은 닭고기와 스튜, 케이크 등 음식을 잔뜩 차려주고는 애국가를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멜로디에 맞춰 불러주었다. 이것이 아버지가 설마리 전투에서 한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영국군의 마지막 모습이다.
 
 
  2064명 전사
 
지난 7월 10일 용산구 로카우스호텔에서 열린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안보포럼에서 한기호 국회 국방위원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한 위원장은 국회에서 지게부대 예우에 관한 ‘국가유공자법’ 개정을 주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정부가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나라’를 표방하며 보훈을 국정과제로 정한 가운데, 이름도 없이 6·25전쟁에서 큰 활약을 펼친 ‘노무부대’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국민의힘 한기호(韓起鎬) 국방위원장(육사 31기)은 비군인참전자인 노무부대에 대해 국회 차원에서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의원이다.
 
  한 위원장은 지난해 6월 17일 국가유공자와 보훈가족 초청 오찬에서 “국가 위기 상황에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지게부대원과 그 유족들에 대해 적절한 예우를 하고, 그 정신을 책임 있게 계승하는 것이 국가의 품격이고 나라의 정체성을 세우는 길”이라며 “잊힌 영웅, 6·25전쟁의 ‘지게부대’를 예우하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보훈 정책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 육군 소속 한국군 노무단은 6·25전쟁 중 월튼 워커 미 8군사령관의 병력 요청에 따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긴급명령 제6호(징발에 의한 특별조치령)를 내려 1950년 7월 26일 창설됐다. 처음엔 민간수송부대(CTC)로 불렸지만, 최악의 전투 상황 속에서도 탄약과 보급품을 탁월하게 투입해주는 이들의 능력을 높이 사 밴 플리트 장군은 1951년 KSC 부대로의 재편을 지시했다.
 
  1951년 5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국민방위군이 해체되자 국방부는 101사단, 102사단, 103사단, 105사단, 106사단 등 5개 예비사단을 창설했다. 이들 예비사단 중에서 훗날 101노무사단, 103노무사단, 105노무사단 등 3개 노무사단과 100노무여단, 200노무여단 등 2개 노무여단을 재편해 만들었다. 그 당시 KSC는 미 8군 군수처의 작전통제를 받았다. 101노무사단은 미 1군단, 103노무사단은 미 10군단, 105노무사단은 미 9군단을 지원했고, 100노무여단은 동부전선의 한국군 1군단, 200노무여단은 중부전선의 한국군 2군단을 지원했다.
 
  미 8군지원단에 따르면, KSC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엔 10만 명을 넘어섰다. 전쟁 기간 동안 모두 30만 명이 넘는 한국 민간인들이 KSC에서 복무했고, 그중 2064명이 전사하고, 2448명이 실종됐으며, 4282명이 부상했다.
 
 
  밴 플리트,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지게부대로 알려진 노무부대는 노무단, 근무단, 보국대 등 공식 명칭보다 지게를 지고 전장을 누비는 모습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 미군들은 노무대원이 지고 다니는 지게의 모습이 알파벳 A와 비슷하다고 해서 ‘The A-frame Army’라고 불렀다. 이들은 철모는커녕 군복도 없었다. 6·25전쟁 당시 고지전이 곳곳에서 치열하게 펼쳐질 때 맨몸으로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한가운데를 누비며 보급로를 뚫은 것이다.
 
  전사에 따르면, 1951년 6월 전략요충인 강원도 철원군과 접한 평강지구에서 국군이 적군과 고지쟁탈전을 벌이던 중 포탄이 동날 위기에 처했으나, 400명의 지게부대원이 포탄을 들고 보통사람 걸음으로 4~5시간 걸리는 험지를 2시간 만에 도착해 승리에 기여했다.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은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미군 병력을 추가로 파병했어야만 했을 것”이라고 했다.
 
  백선엽 장군은 생전 기자에게 “다부동 전투에서 지게부대로 불리는 노무자들도 전투원들 못지않게 큰 희생을 치러가며 잘 싸웠다”고 했다. 지난 7월 5일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백선엽 장군 동상제막식에는 다부동 전투 당시 이른바 ‘지게부대’ 대원으로 참여한 지역 주민 희생을 기리기 위한 ‘다부동 전투 참전 주민위령비’ 제막식도 함께 거행됐다.
 
 
  ‘악명’ 높은 국방부 심사
 
참전 사실 확인 신청 과정에서 국가보훈부와 국방부, 국민권익위 산하 행정심판위원회에서 받은 공문들. 사진=오동룡
  통상 6·25전쟁 참전자가 관할 국가보훈청에 참전자 확인 신청을 하면, 국방부가 참전 여부에 관한 심사를 통해 관할 보훈청에 사실증명을 해주고, 보훈청은 신청인에게 결정통지를 하면서 참전유공자 예우 절차에 들어간다.
 
  여기서 문제는 국방부다. 진위(眞僞)를 가려야 하는 책임부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국방부의 심사는 까다롭기로 ‘악명(惡名)’이 높다. 국방부는 인사복지실 산하 인사기획관실의 현역 대령(과장)을 중심으로 중앙참전확인심의위원회를 운영해 심사하는데, 철저하게 서류증빙 심사에 의존한다.
 
  정부는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약칭 참전유공자법)에 따라, 참전유공자뿐만 아니라 6·25전쟁 또는 베트남전쟁에 비군인 신분으로 참전한 사람도 ‘비군인 참전유공자’로 인정한다. 여기엔 징용된 노무자, 노무사단 예비장병, 호국장병, 학도병, 군무원, 교원, 유격대원, 정보원 및 애국단체원, 종군예술단원, 종군기자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노무자들은 현역 참전자와 달리 군번이 없기 때문에 국방부가 이들의 참전 여부를 판단할 자료가 없다. 따라서 비군인참전자인 노무자들이 국가보훈부에 참전 확인을 하려면 참전증명, 참전기장, 생존전우의 인우(隣友)보증이 필요하다.
 
  참고로 6·25전쟁에 현역 군인 등 ‘전시근로동원법’에 따라 참전한 사람은 ‘국가유공자법(제74조 1항 제3호)’에 따라 보상대상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노무자 등 ‘징발에 관한 특별조치령’에 따라 동원된 사람은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법률상 보상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비군인참전자(노무자, 학도병, 유격대원 등)를 예우하기 위해 국가보훈부 소관의 ‘참전유공자법’을 제정해, 이 법에 의거해 노무자들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참전증명과 생존 전우가 없는 경우엔 사실상 참전을 인정받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수많은 6·25전쟁 참전자들이 참전한 사실이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참전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유명(幽明)을 달리하고 있다. 지금 생존한 참전자 숫자는 90대가 넘은 나이로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참전심사위원회에 6·25 전문가 없다”
 
  실제로 스스로 6·25전쟁 참전자인 부친도 국방부 중앙참전확인심의위원회 담당 장교가 찾아와 질문을 했을 때, “전투 중 휴가는 다녀왔느냐” “상급자나 동료의 이름을 대라”는 아리송한 질문에 적잖이 당황해 “모르겠다”를 연발한 경우가 있다고 했다.
 
  6·25전쟁사 전공자인 남정옥 박사(전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는 “군사편찬연구소 재직 시절, 참전 증빙이 없어 심사에서 탈락한 노무자들이 내 방을 찾아와 눈물을 흘렸다”며 “6·25 전공자들은 그분들에게 한두 건 질문하면 실제 참전했는지, 학습에 의해 허위 증언을 하는지 금세 판별할 수 있다”고 했다.
 
  남 박사는 “국방부 참전심사위원회에 6·25전쟁을 아는 전문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것은 ‘무면허 의사’가 ‘중환자’ 진료를 보는 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제도적으로 국방부가 참전 여부를 확인하고 보훈처는 사후관리를 하는 이원화된 체제는 비효율적”이라면서 “노무자뿐만 아니라 비정규전 참전자까지, 명예회복을 위한 전문가 TF를 구성해 운영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라고 했다.
 
  국가보훈부 관계자는 “6·25전쟁에 참가한 노무자 가운데 8월 4일 현재 보훈부에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노무자는 5820명”이라고 밝혔다. 6·25전쟁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 전장에 동원돼 국난 극복에 기여한 헌신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노무자들이 국가유공자로 등록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정부는 지게부대원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군번이나 계급이 없는 민간인 신분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이를 입증할 자료의 미비 등으로 현행법상 예우와 지원 대상으로 인정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아버지도 1970년대까지 참전증서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 이후에 분실했다고 한다. 그것이 6·25전쟁 참전유공자로 확인되는 데 애를 먹었던 부분이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참전했다는 사실을 확인해줄 KSC 출신 동료들도 2000년대 이전에 모두 세상을 뜨는 바람에 실제적 인우보증인으로서 도움을 주지 못했다. 영국 군인들은 휴식 시간에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전차 위에서, 병기고에서 많은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 사진들이 어디로 다 달아났는지 모르겠다고 아버지는 한탄했다.
 
 
  유공자 인정률 14%
 

  실제로 국방부 인사기획관실이 한기호 국방위원장에게 제출한 자료, 2010년부터 2023년 7월 현재까지 ‘비군인 참전 사실 확인 접수 처리 현황’에 따르면, 이 기간 중 총 1만498명이 신청해 4485명이 인정을 받았고, 인정률은 43%를 기록했다. 그런데 신청자가 2010년 1117명에서 점차 줄어들어 2016년부터는 500명 선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령의 참전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는 것이다.
 
  특히 각 정부마다 인정률에 차이를 보였다. 이명박 정부 때 평균 65%로 가장 높았고, 박근혜 정부에선 인정률이 43.5%로 떨어지더니, 문재인 정부는 26%로 급감했다. 보훈을 국정과제로 삼고 있는 윤석열 정부 들어와서도 인정률은 크게 높아지지 않고 있다. 2022년에는 13%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고, 2023년 7월 현재 519건이 신청돼 14%(72건)의 인정률을 기록하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신청자가 참전 신분을 ‘노무자’로 특정하는 경우에도 신청인의 소속부대를 정확히 특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이며, KSC·지게부대·노무부대·노무사단·보국대·보급대·국민방위군·유엔군부대·국군사단 등 다양하게 주장하고 있어 신청 부대별 현황 정리가 제한된다”며 “다만 KSC(한국노무단)의 경우, 101사단, 103사단, 105사단, 100여단, 200여단으로 편성된 기록이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남정옥 박사는 “참전자들의 인정률이 낮게 나오는 것은 국방부가 참전자의 증언 내용보다 참전자 소속 부대의 유무(有無)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우려된다”며 “참전 노인들은 해가 갈수록 기억이 희미해지는데, 그분들의 당시 활동에 중점을 두고 심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질문양식, 실무자의 전문성 결여가 인정률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한기호 의원은 “2010년 주한 미 8군사령부가 KSC 창설 60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전·사상자들을 추모한 것에 고맙기도 하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미동맹의 시초로 주한미군의 실질적인 손발이 되었던 ‘지게부대’에 대해 주한미군사령부 측에서 적극적 자료 제공 협조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만큼, 전수조사를 통해 관련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면서 “‘입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분들을 예우하기 위해 ‘국가유공자법’ 개정 및 관련 정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70년 만에 생각난 영국군 이름
 
지난 8월 7일 오순오씨가 파주보훈회관에서 설마리 영국군 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정명선 선생과 함께 국가보훈등록증을 보며 기뻐하고 있다. 정명선 선생도 참전유공자로, 영연방사단 호주군 소속 요리사였다. 사진=오동룡
  아버지의 기억력은 점차 떨어지고, 국방부에서 요구하는 추가 인우보증을 기대할 수 없어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였다. 군(軍) 원로들은 “6·25전쟁 참전자들의 참전 여부는 국가가 입증해야 할 책무를 진다”면서 “국가가 6·25전쟁 과정에서 징집에 응한 분들의 기록도 유지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지, 참전자들에게 ‘입증 책임’을 전가하는 처사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고 했다. 상식적으로 함께 싸운 전우들이 모두 저세상으로 간 상황에서 어떻게 새로운 인우보증인, 새로운 참전 증거를 제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기적처럼 새로운 인우보증인이 나타났다. 오철환(吳鐵煥·93) 6·25참전유공자 파주지회장의 소개로 아버지가 설마리 영국군 부대에 있을 때, 함께 근무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명선(鄭銘善·87)씨가 나타났다. 정 선생은 당시 영연방사단 호주군 소속 요리사로 근무했었고, 아버지는 그 시기 영국군 병기고와 보급계에 근무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 당시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과거의 기억들이 소환되고, 영국군들과 주고받은 영어도 ‘방언’처럼 간간이 튀어나왔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영국군 29여단 전차대대 무기고 담당 서전(Sergeant)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당시 병기고는 중사가 책임자였는데, 아버지는 그 중사의 이름을 1922년생 ‘윌리엄(William)’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무기고에서 윌리엄의 부하인 하사(Corporal) 데이비스(Davids)와도 함께 일했다면서 영국인들의 이름을 하나 둘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한국군 참전자들의 이름도 넷이나 기억해냈다.
 
  윌리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던 참전용사로, 6·25전쟁이 발발해 29여단이 재소집되자 다시 중사로 입대해 한국전선에 왔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국방부는 지난 6월 16일 국방정보본부와 주영국 무관부를 경유해 영국 국방부에 윌리엄 하사의 참전 여부, 생존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아버지의 구체적 진술이 나오면서 국방부 참전사실심의위는 아버지의 참전 사실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지난 6월 29일 파주시보훈회관에서 국방부 관계자들이 아버지를 상대로 참전 진술을 청취했다. 마침내 지난 7월 11일 국방부로부터 참전자 결정 통보를 받았고, 담당 장교는 우리 측에 “현재 영국 대사관 측에 영국군 29여단 윌리엄 중사의 참전 확인 회신 여부와 관계없이, 그동안 진술의 일관성, 구체성을 놓고 볼 때 참전이 확실하다”고 통보했다.
 
 
  집배원이 유공자증 전달
 
  정부가 2021년 4월 13일 ‘6·25전쟁 전후 적 지역에서 활동한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6·25비정규군보상법)’을 공포하고, 육군이 ‘6·25무공훈장법’이란 특별법까지 만들어가며 참전자들을 찾아 나서는 것은 ‘우리의 영웅’들이 우리 곁에 남아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올해 100세를 맞은 아버지는 참전 확인 과정에서 수많은 벽에 부딪히며 좌절했다. 국가보훈부 집계에 따르면, 올해 6·25와 월남전 참전용사의 평균 연령은 각 92세, 72세다. 김희상(金熙相) 한국안보문제연구소(KINSA) 이사장은 “서류에만 근거해 심사하려는 ‘탁상행정식’ 사고를 과감하게 털어내고, 국방부가 전향적인 자세로 참전자들의 증언을 경청해야 한다”면서 “그것이 국난의 시기에 목숨을 건 그분들의 희생에 조금이나마 우리가 보답하는 길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보훈은 예우지 시혜가 아니다”
 
  지난 7월 24일 아버지는 윤석열 대통령 이름과 대통령 인감이 찍힌 ‘국가유공자 증서’를 받고 감격해했으나, 기자는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날은 장마에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는데 집배원의 손을 통해 아버지가 국가유공자증을 전달받았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는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이다. 지난 6월 5일 윤석열 정부는 국가보훈처를 국가보훈부로 격상시켜 출범시켰다. 첫 장관엔 일곱 살 때 베트남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은 박민식(朴敏植) 장관을 임명했다. 박 장관도 언론 인터뷰에서 “보훈은 예우지 시혜가 아니다”며 ‘보훈의 일상화’를 추구하고 있다.
 
  국가유공자 증서를 최소한 관할 보훈지청의 담당자로부터 전달받으면서 국가유공자 등록 절차와 ‘참전유공자 보훈 수혜제도’에 대해 설명을 듣는 것은 당연한 예우 아닐까. 5·18유공자와 4·19민주화유공자에 대해서 우편으로 증서를 전달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100세 노인이 ‘국가보훈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해당 보훈지청에 가서, 참전자 혜택을 물어가며 국가유공자 등록을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대목이다. 하나 더, 국가보훈부가 ‘제복의 영웅들’ 캠페인으로 제작한 참전유공자 제복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기자의 볼멘소리를 잠재우시며, “생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자손들에게 ‘6·25전쟁 참전자’의 자손이라는 명예를 안겨주고 떠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말만 되뇌셨다. 올 추석엔 아마도 아버지는 6·25전쟁 때 근무했던 연천의 숭의전과 파주 ‘영국군 설마리 전투 기념공원’을 가족들과 찾을 것이다. 호루고루성 카페에서 아버지는 임진강을 굽어보며 두고 온 고향 이야기를 더욱 신나게 하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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