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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증언

1966년 ‘8·8 사건’의 추억, 송재신 중대장과 해병학교 35기생들

“50여 년 세월로 맺어진 불멸의 忠魂”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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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학교 35기생들은 1966년 8월 8일 공군 장교들과 집단 난투극 주역
⊙ 코로나19로 만날 수 없었던 해병학교 중대장이던 宋在新과 35기생들 再會… 8·8 사건으로 평생 인연
⊙ 35기생들, 매년 현충원 찾아 동기 전우들, 駐越 청룡부대 27중대 전몰 해병들 함께 추모
⊙ “순수한 情으로 맺어진 형제의 인연, 나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송재신)

도움말 = 장수근 전 자유총연맹 연구실장(35기 동기회장)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만난 해병학교(해병사관학교) 35기생들과 송재신 예비역 대위(뒷줄 왼쪽에서 8번째). 그리고 파월 청룡 5대대 27중대 해병 대원들. 백발이 되었으나 정신은 여전히 곧고 푸르다.
  현충일을 하루 앞둔 지난 6월 5일. 서울시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의 하늘은 비가 올 듯 어둑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망부석 같은 수많은 묘비 곁에 흰 국화가 피어 있었다. 꽃송이 한 잎, 한 잎이 고인의 흰 살점처럼 느껴지던 오후였다.
 
  이날 해병사관학교인 해병학교 35기생들과 주월(駐越) 청룡부대 5대대 27중대 해병대원들은 누군가를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시계를 만지고 눌러쓴 붉은 모자에 자꾸만 손이 갔다. 눈빛에서 오랜 설렘을 읽을 수 있었다.
 
  드디어 예비역 대위 송재신(88·宋在新·해군사관학교 14기)씨가 나타났다. 그는 1966년 5월 28일 해병 장교들이 임관될 당시 해병학교 중대장으로 142명의 35기생들을 교육·훈련시킨 스승이자 월남전에 함께 참전한 전우였다. 퇴역 후 1973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지만 해마다 귀국해 35기생들과 만남을 이어왔다. 특별히 코로나19 이후 만나지 못했다가 모처럼 재회(再會)한 것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중대장”으로 불렀지만 이제는 “형님” “아우”로 친근하게 부른다.
 
 
  세월이 흘러 紅鶴처럼 얼굴이 짙어졌으나
 
해병사관학교 35기생인 이수장 중위의 묘역.
  이날 송재신 중대장은 35기생들 외에도 사선(死線)을 함께 넘나들던 주월 청룡부대 5대대 27중대 해병들과도 다시 만났다. 박상두(朴相斗·해병 181기)씨는 전남 신안군 하태도에서 쾌속정으로 3시간을 달려 목포에 도착한 다음 KTX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옛 전우를 만나기 위해 거의 1박 2일을 달려왔다고 한다. 부산에서 숙박업을 하는 황시원(黃時元·172기)씨 역시 일찌감치 전날 상경했고 최갑수(180기), 윤재화(尹在和·181기), 최정구(183기)씨 등도 생업을 잠시 미뤄둔 채 동행했다.
 
  세월이 흘러 모두들 홍학(紅鶴)처럼 얼굴이 짙어졌으나 금세 날갯짓을 할 것마냥 거수경례의 손끝에 힘이 느껴졌다.
 
  이윽고 이들은 현충원 51묘역 이수장 중위(경기고·부산수산대학교 출신) 묘소 앞에 차례로 정렬했다. 1년간의 파월(派越) 근무가 끝나 귀국을 앞두고 있던 이 중위는 안타깝게도 1968년 3월 16일 ‘용궁작전’ 도중 목숨을 잃었다.
 
  “일동 차렷! 경례!” “일동 묵념!” 35기생들은 묘석을 쓰다듬으며 “전역 후 큰 배를 타겠노라”던 고인을 회억(回憶)했다. 묵념을 올린 뒤 ‘불멸의 충혼’ ‘추모’ 글자가 새겨진 리본을 가슴에 달았다. 동기회장 장수근(張秀根)씨의 말이다.
 
  “고인은 파월 복무 중 그 무렵 갓 데뷔한 영화배우 윤정희씨와 펜팔로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1968년 4월 고인 안장식 때 윤씨가 직접 찾아와 국화꽃 한 다발을 바치고 목례를 한 뒤 돌아갔대요.
 
  안타깝게도 이 중위의 양친이 모두 사망한 뒤엔 35기 동기생들 외엔 찾아오는 이가 없어요.”
 
 
  ‘그가 기리던 자유의 노래는 억겁을 메아리 하리니…’
 
  옛 전우들은 묘비 주위에 자란 잡풀을 뽑고 주머니에서 꺼낸 수건으로 마른 비석을 닦았다. 고인의 비석 앞에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 여기 자유와 평화의 수호신으로 월남 전선에서 젊음을 산화한 우리의 전우 이수장이 잠들다. 그가 기리던 자유의 노래는 억겁을 메아리 하리니 생전에 그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를 영원히 추모할 것이다.…〉
 

  청룡부대 27중대 해병이던 윤재화(76)씨는 파월 근무를 1년 연장, 2년간 소총수로 베트남 전선을 누볐다. 송 중대장과 띠 동갑이다. 그는 27중대 제1소대장이던 이수장 중위와 허물없이 지낸 사이였다고 한다. 이 중위를 “자애롭게 대원들의 마음을 다독이던 분”으로 기억한다. 전역 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소대장 묘역을 찾았는데 우연히 해병학교 35기생들과 만나 송 중대장 소식을 알게 되어 만남을 이어왔다.
 
  일행은 이어 해병학교 2구대장 김갑수 대위(해사 17기) 유택으로 이동, 거수경례와 애도의 묵념을 올리고 묘비에 추모 리본을 달았다.
 
  예비 해병 장교들에게 엄격하면서도 자상했던 고인은 1966년 9월 10일 그가 교육·훈련시킨 35기들을 실무 배치시킨 직후 파월, 그해 11월 9일 ‘용안작전’ 도중 베트콩이 매설한 지뢰에 폭사하고 말았다.
 
 
  ‘먼 이역에서 숨진 푸른 넋이 여기 있나니…’
 
해병학교 35기생을 교육·훈련시킨 김갑수 대위(해사 17기)의 묘역.
  경남 통영 출신인 김 대위는 군 복무 시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 학생과 열애 중이었다고 한다. 그의 묘석엔 어머니가 아들에게 바친 글이 새겨져 있었다.
 
  〈… 다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 하나, 나라와 겨레의 이름으로 먼 이역에서 숨진 푸른 넋이 여기 있나니 오로지 그 넋을 우러러 그 뜻을 심으니 청사에 길이 빛날 장한 넋이여! 고이고이 잠들어라.…〉
 
  다음으로 노병들이 찾은 곳은 26묘역 청룡 5대대 27중대 전몰(戰歿) 해병 9명의 묘소였다. 당시 27중대장이 송 대위였다.
 
  청룡 5대대(대대장 이화출 중령)는 1967년 7월 8일 부산항을 떠나 7월 14일 월남 중부 쾅나이성 추라이(ChuLai)에 도착했다. 대대는 곧바로 청룡부대 G3(작전처)로부터 작전지역을 할당받아 진지를 구축하고 현지 적응에 들어갔다. 3개 중대 및 소대의 주간 정찰과 매복도 동시에 이뤄졌다.
 
  그해 운명의 8월 30일 오후 27중대원들로 구성된 매복조 13명(분대장 서정수 하사, 전사 후 중사 추서)은 본부에서 1km 남짓한 매복 지점에 도착했다. 여단본부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작은 교량 부근이었다. 교량 한쪽 경비는 월남 민병대가 맡고 있었다.
 
  월남 민병대가 미덥지는 않았지만 직접 베트콩과 맞닥뜨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그러나 그게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베트콩과 내통한 월남 민병대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빠졌고 이들은 27중대 매복조의 병력과 위치 정보를 베트콩에게 흘렸다고 한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매복 부대원들이 긴장을 늦춘 사이 베트콩이 선제 공격을 해왔다. 졸지에 기습을 받은 터여서 초전(初戰)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 긴박한 교전과 지원을 요청하는 통신병의 무선을 청취한 송재신 중대장은 즉각 반격대 투입 허가를 대대장에게 요청했다.
 
 
  越南 도착 1개월 16일 만의 전투
 
  그러나 대대장은 “여단 G3의 승인이 필요하니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그야말로 1분 1초가 급한 상황. 잠시 후 여단 G3는 “특공중대를 투입하겠다. 5대대 야간 반격대 투입은 위험하다”고 말렸다. “빨리 반격대를 보내라”고 외치는 매복 부대원들의 절규를 듣고도 송 중대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렇다고 명령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특공중대의 야간작전 투입도 돌연한 것이어서 시간적으로 지체된 데다 중대 규모 베트콩들의 맹렬한 총격으로 반격이 용이하지 않았다. 결국 생존자는 겨우 3명. 나머지 매복대원 10명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월남 도착 1개월 16일 만의 안타까운 전사였다. 27중대 해병이었던 박상두씨는 “당시 송 중대장은 그날 받은 충격으로 일주일 넘게 식사를 하지 못했고 양치질만 하셨다. ‘내 자식의 죽음’이라 자책하시며 울분을 토했다”고 말했다.
 
  당시 해병 전사자는 상병 박용출(묘번 1126), 상병 최문길(묘번 1127), 상병 김학태(묘번 1128), 상병 장대환(묘번 1129), 상병 최상진(묘번 1130), 상병 이병준(묘번 1131), 상병 신찬식(묘번 1132), 중사 서정수(묘비번 1138), 중사 장대식(묘번 1134).
 
  함께 전사한 고영배 상병은 부모가 고향인 제주도로 이장해 현충원 26묘역에는 9명의 묘소만 있다.
 
  해마다 현충일이면 이들 앞에 국화 한 송이가 놓인다. 올해도 어김없다. “현충일마다 먼저 간 9명의 해병 전우가 눈에 밟혀 눈물을 흘린다”는 노병 윤재화씨. 그는 이수장 소대장 묘역은 물론 27중대 전몰 전우들의 묘비를 말끔히 닦고 간다. 1969년 7월 전역 후 53년째 해오고 있지만 유족을 만난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6월 5일 예의 국화송이를 놓다가 고(故) 박용출·장대환·최문길 상병 유가족을 만났다.
 
 
  故 박용출·장대환·최문길 상병 유족의 사연
 
해병학교 35기생들의 ‘스승’인 송재신 예비역 대위가 해병 중위 이수장의 묘에 헌화하고 두 번 절하고 있다.
  유족들은 “해마다 국화꽃을 놓고 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드디어 오늘 만나게 됐다”며 반가워했다. 윤재화씨는 “저 말고도 해마다 찾는 해병 장교들이 있다”고 알려줬다.
 
  “장교들이요?”
 
  “예, 27중대 송재신 중대장님께서 해병학교 중대장 시절 교육하신 35기 장교들입니다.”
 
  “그분들이 왜? 처음 듣습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작년 6월 8일 아침 고 장대환 상병의 조카(여성) 된다는 분이 35기 동기회장(장수근)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왔다.
 
  “장 상병 조카입니다. 35기 장교분들이 해마다 찾아주시는 줄 몰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고 최문길 상병 외사촌도 “장교분들이 해마다 찾아오셔서 외로운 넋을 위로해주고 가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고맙습니다”고 말했다고 윤씨가 전했다. 그는 “고 최문길 상병 친가(親家)는 대가 끊겨 외사촌 여동생이 아들, 어린 손녀와 함께 다녀간다”고 귀띔했다.
 
  또 고 박용출 상병 여동생은 “오빠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게 안타깝지만 옛 전우를 잊지 않고 찾아주는 아름다운 분들이 있어 고맙고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윤씨는 “친족 대가 끊겼을 때 외가 쪽에서 보훈급여를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없는 게 아쉽다”고 속엣말을 털어놨다.
 
  뜻밖의 만남은 기자가 찾은 이날에도 이뤄졌다. 고 김학태 상병의 동생인 김안태(金安泰·63)씨가 두 아들 민수(34)·민철(31)씨와 함께 묘역을 찾았다가 송재신 중대장 등 고인의 전우들과 조우했다. 놀랍게도 고인의 조카인 민수(가톨릭대 국제학부 조교)씨 또한 ‘귀신 잡는’ 해병(1099기) 출신이었다. “집안의 권유가 아닌 스스로의 결정”이었단다.
 
 
  故 김학태 상병의 조카는 해병대
 
“일동 차렷! 경례!” “일동 묵념!” 해병학교 35기생들, 월남 파병 해병대원 등은 해마다 현충일을 즈음해 전몰 해병대원들을 추모하고 있다.
  김안태씨의 말이다.
 
  “직장 때문에 서울로 올라온 1986년 현충일부터 한 해도 빠지지 않고 형님 묘역을 찾았어요. 그해 여름(1967년 8월 30일 전사) 어머니께서 전사통지서를 받고 쓰러지셨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보다 12세 위인 형님은 학창 시절 훤칠하게 키가 컸고 리더십도 뛰어나 학교 대대장을 했는데 구령 소리가 학교 담장 밖까지 울렸다고 합니다. 매년 찾아올 때마다 스무 살의 형님이 그 치열한 전투 속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외로웠을까 생각했는데 송 중대장님을 비롯한 전우들이 참배하시고 기리셨다는 말씀을 오늘 듣고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해병 전우인 27중대원 황시원씨는 흐르는 눈물을 자꾸만 닦았다.
 
  “당시 선임이었던 제가 그날의 매복조 13명을 차출했고 처절했던 전투 직후 고인들의 시신도 가장 먼저 달려가 제 눈으로 확인했어요. 참혹한 상흔을 저 역시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았습니다.
 
  오늘 만남을 위해 서울역에 도착해 행인들에게 ‘국립묘지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모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전쟁의 비극을 모두 잊어버린 듯해서 가슴이 아파요.”
 
  노병들이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19묘역 35기 동기생 한장석 소령의 묘소. 고인(휘문고·성균관대 졸)은 해병대사령부 인사국에서 파월 업무를 담당하다 과로로 1969년 4월 순직, 소령으로 추서됐다. 일행은 나라를 위해 고귀한 생을 바친 영령들 생각에 저마다 눈물을 훔쳤다. 고귀한 희생 앞에 살아 있음이 잘못인 양 무릎을 꿇었다.
 
 
  ‘8·8 사건’
 
서울 현충원 26묘역 청룡 5대대 27중대 전몰 해병의 묘소 앞에 선 ‘영원한 해병’. 왼쪽부터 윤재화, 황시원, 송재신(중대장), 박상두, 최정구, 최갑수씨.
  송재신 중대장과 해병학교 35기생과의 첫 만남은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8월 8일 일어난 그 ‘사건’만 없었어도 훗날의 일생이 이렇듯 겹치지는 않았으리라. 전말은 이렇다.
 
  주말 부산으로 외박을 나갔던 35기생 몇 명이 그해 8월 7일 오후 시외버스를 타고 경남 진해로 귀대 중 구포다리를 건너기 전 정류장에 잠시 정차했다.
 
  승객이 많아 앞문으로 승차하기 어렵게 된 공군 장교들이 주먹으로 버스 뒷문을 두드렸다. 뒷문 쪽 좌석에 앉아 있던 35기생 한 명이 “앞문으로 타라”고 말하면서 시비가 붙었다.
 
  다음은 《조선일보》 1996년 6월 11일 자 조간 47면의 기사 〈이양호(李養鎬) 국방장관 전도봉(全道奉) 해병사령관 30년 전(前) ‘난투극 인연’〉의 일부다.
 
  〈… ‘귀신 잡는 해병’의 차기 총수로 전도봉(全道奉) 해병소장이 내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10일 국방부 내에서는 전(全) 차기 사령관과 이양호(李養鎬) 국방장관을 결과적으로 맺어준 30년 전 사건을 놓고 얘기꽃이 분분했다. 이 두 사람은 창군 이래 최대의 군 난투극으로 기록된 66년 8월 8일 일어난 소위 ‘8·8 사건’의 두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임관을 앞둔 해병 간부 후보 35기 8명과 공군 김해 비행학교 조종 학생들 3명 간에 버스 내 시비가 벌어져 공군 측이 얻어맞으면서 비롯됐다.
 
  이에 공군 측 30여 명이 뒤쫓아가 해병 후보생들을 집단 구타했으며, 이를 뒤늦게 안 전도봉 후보생 등 해병 간부 후보 동기생 128명(35기생들은 ‘전체 인원 142명 중 환자와 당직 근무자 13명을 제외한 129명’이라고 주장한다-편집자 註)이 야음을 틈타 김해 공군비행학교를 습격, 집단 난투극을 벌였던 것. 이양호 장관은 당시 공군 대위로 김해비행장 당직사관이었다.
 
  이 싸움으로 해병 후보생 1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넘는 중경상자가 발생했으며 이를 안 박정희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 양측 관계자 20명이 구속됐다.
 
  당시 이양호 대위는 당직사관으로서 사태를 제대로 조치 못 했다는 차원에서 구속됐으나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며 재판 과정에서 의연한 태도를 보여 결국 정직 3개월의 징계로 끝났다. (하략)〉
 
“송정(松井) 송재신 형님!”
 
해병사관학교 35기생을 대표해 김무일(왼쪽)씨가 송재신 중대장(가운데)에게 아호 송정(松井)을 선물하고 있다.
  송정(松井). 송재신 중대장님의 아호(雅號)다.
 
  이 아호는 내가 존경하는 장충식 전 단국대 총장께 부탁드려 특별히 받았다. 35기는 1966년 8월 8일 공군 김해 비행학교 기습 사건으로 해병대사령관의 꿈을 품고 계셨을 송재신 중대장님께서 군문을 떠나시게 한 ‘죄’가 있다. 그래서 반세기가 넘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늘 송구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를 잊지 못하고 존경하고 있다.
 
  그러던 중 2015년 11월 7일 동기회가 지방 거주 동기들과의 만남을 위해 대구 여행을 준비 중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회동 장소에서 중대장님께 아호를 ‘선물’하기로 작정, 한문학에 통달하신 장 전 총장을 찾아가 부탁을 드렸다.
 
  장 총장께서는 ‘인간 송재신’ 스토리를 듣고서 그분의 곧은 성품을 단박에 알아본 듯 두 말 않고 ‘송정’이라는 호를 내려주셨다. 송정은 ‘선비 같은 절개로 목마른 사람을 보살피라’라는 뜻이다.
 
  송재신. 그는 부하를 가리지 않고 사랑했고, 인격적으로 대했다. 또한 불의를 보곤 참는 법이 없었다. 미국에 살면서 한시도 조국 사랑하는 마음을 버린 적이 없다.
 
  2005년 11월 종북 좌파들의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철거 움직임에 맞서 동상 수호에 나선 해병 전우 회원들의 식사와 방한복 구입비로 1만2500달러를 모금해 지원한 바 있다. 그리고 서울을 찾았을 때 광화문 태극기 집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송정 형님! 만수무강하십시오.
 
  〈글 김무일(金武一·35기 5대 동기회장·전 현대제철 부회장)〉
 
  송재신 대위의 잊히지 않는 回憶
 
  35기생들은 당시를 떠올리며 “안타까운 불상사였지만 동지애가 걸려 있었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무적 해병’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고 말한다. 당시 35기생을 가르친 이가 송 대위. 그의 말이다.
 
  “어떤 사고나 사건에서 원인이나 동기는 결과보다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35기 장교들의 김해 공군학교 습격 사건은 공군 소위들이 자초한 것이었지요. 동원된 인원 숫자나 타군(他軍) 영내를 습격한 사실만 갖고 말하면 안 됩니다. 공군 측에서 부대 차량을 동원, 진해 근교까지 쫓아와 해병 장교들을 집단 구타한 것에 대한 응징이었을 뿐입니다. 공군 측에서 해병대가 당하고 가만히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은 큰 착각이었죠.”
 

  이 ‘8·8 사건’으로 송 중대장은 헌병대에 구속됐고 ‘부하범죄 부진정’ 죄명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부하범죄 부진정’이란 지휘관이 부하가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알고도 묵인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8·8 사건’은 중대장이 모르는 사이 먼 곳에서 발생했다. 이 경우도 해당이 되느냐의 시비가 붙자 당시 재판장(강복구 대령)이 휴정을 선포했다. 이후 속개된 군법회의에서 군검찰관이 ‘사령관훈령 제1호에 대한 위반’ 죄명을 들고나왔다. 사령관훈령 제1호는 ‘예하부대 각급 지휘관은 사고 미연 방지에 적극 노력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훈령이 시달될 때 35기 기초반 중대는 경남 창원군 소재 훈련연대에 있어서 중대장이 접수, 결재한 사실이 없었다. 따라서 지휘관이 인지하지 않은 사안에 대한 죄가 성립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또 불거졌다. 결국 군법회의는 ‘군검찰의 공소 취하’로 끝이 나고 송 대위는 풀려났다.
 
 
  越南 파병과 27중대와의 만남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7~68년 당시 청룡 5대대 이화출 대대장(가운데)과 송재신 중대장(왼쪽).
  이후 진해교육기지로 원대 복귀한 송 대위는 청룡부대 증파(增派) 대대인 27중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1967년 7월 파월 후 그가 27중대를 지휘해 참전했던 큰 작전은 파월 3주년을 기해 실시한 바탕간(Batangan) 상륙작전(한·미·월 합동 용화작전)이었다. 바탕간 반도 일대의 적을 탐색·소탕, 월남 정부 행정력이 미치게 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양(羊)머리처럼 생긴 이 반도는 서울 여의도 절반인 125k㎡ 크기였다.
 
  예상했던 적의 저항은 함포 및 미 공군기에 의한 선제 폭격으로 제압했으나 40여 일에 걸친 동굴 탐색 및 베트콩과의 교전에서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작전 중 27중대에 배속된 2명의 미군 장교가 송 대위의 부대 운용과 중대 작전 상황을 상급부대에 ‘일일 보고’했고, 이 보고가 미국 훈장 내신의 근거가 되어 대대장 이화출 중령은 동성, 송재신 대위는 은성훈장을 받았다.
 
  또한 미 해병대 잡지 《레더넥(Leatherneck)》은 1968년 3월호에 송 중대장과 27중대 해병대원의 활약을 보도했다. 미 해병대는 또 27중대가 상륙, 평정한 바탕간 지역을 ‘송의 섬(Song’s Island)’으로 명명하고 그에게 ‘군정장관(Military Governor)’ 호칭도 부여했다.
 
  송 대위는 파월 근무(1967년 8월~68년 8월)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해 김포 제1여단 민사참모로 발령받았으나 ‘8·8 사건’과 관련한 이력이 흠이 돼 군복을 벗고 말았다. 그는 1973년 3월 미국으로 이민한 뒤 LA에서 의류도매업을 시작, 휴스턴에서 부동산 임대업으로 성공, 탄탄한 사업 기반을 닦았다. 현재 LA에 거주하고 있다.
 
 
  35기생들과 형제의 연을 맺어
 
‘분연히 산화한 그대들 푸른 청춘들. 그대들이 보여준 참된 용기와 값진 희생에 오늘의 옛 전우와 조국의 번영이 여기에 있다.’ 2000년 6월에 전몰 해병 전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 앞에 선 해병학교 35기생들. 김무일 예비역 해병 대위가 글을 쓰고 사재를 털어 건립했다.
  ‘영원한 해병학교’ 스승인 송재신씨는 “우리의 인연은 한때 어려운 고비도 있었지만 더욱 결속시켜 ‘형과 아우’의 연(緣)을 맺게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결과적으로 ‘8·8 사건’은 내 아내와 결혼하는 계기가 됐고 일찍 전역해 이민을 떠난 것도 모두 35기생들과의 인연 때문이라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 50여 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면 보통 인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한때 명예나 부(富)는 부질없는 것이고 한순간에 끝이 납니다. 그러나 순수한 정으로 맺어진 아우들과의 인연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죠. 그래서 저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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