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발굴

‘殉敎 100주기’ 1946년에 간행된 《김대건 신부》

“5000년 忠孝의 조선아! 이 보배 또 아느냐”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일제강점기 펴낸 《수선탁덕 김대건》(1942)… ‘조선 귀국 100주년’ 기념 간행
⊙ 대구가톨릭청년회가 펴낸 《김대건 신부》(1946)… ‘殉敎 100주년’ 추모 간행
⊙ 《김대건 신부》에 실린 12수 聯시조… 문학적 가치 따져봐야
故 문학진 화백의 작품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초상화〉. 사진 제공=한국천주교주교회의
  올해는 한국 천주교 김대건(金大建·1821~1846) 신부가 탄생한 지 200년이 되는 해다. 세례명 안드레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다. 유네스코는 제40차 총회에서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확정한 바 있다.
 
  김대건은 1821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26세인 1846년 순교(殉敎)로 생을 마감했다. 비록 생애는 짧았으나 삶은 극적이었고 ‘밀알’이 되어 가톨릭을 뿌리내리게 만든 주인공이다.
 
《김대건 신부》(1946)와 《수선탁덕 김대건》(1942).
  김대건 신부와 동향(同鄕)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이근배(李根培) 시인이 두 권의 책을 《월간조선》에 공개했다. 《수선탁덕 김대건》(1942년)과 《김대건 신부》(1946년).
 
  《수선탁덕 김대건》은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 신학교를 떠나 1842년 조선으로 첫 귀국을 시도하던 때로부터 꼭 100년이 지난 1942년에 간행된 책이다. 지금은 잊혔지만 한국 천주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또한 대구가톨릭청년회가 펴낸 《김대건 신부》는 지금까지 거의 소개되지 않은 김대건 관련 소(小)책자다. 꼭 100년 전인 1846년 순교한 김대건을 추모하기 위해 간행됐다. 간행 시기가 좌우이념 대립으로 어수선한 광복 직후라는 점, 천주교 대구교구장이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바뀐 직후라는 점에 눈길이 간다.
 
  이 두 책을 통해 한국인 신앙 속에 가톨릭이 뿌리내릴 수 있었는지 모른다. 《월간조선》은 두 책의 내용 일부를 연대(年代) 흐름에 맞게 발췌해 소개한다. 원문을 살리되 현대어 표기에 맞게 수정했음을 밝혀둔다.
 
 
  ① 《수선탁덕 김대건》(1942)
 
  [편집자 註]
 
《수선탁덕 김대건》의 책 판권. 책의 편집 겸 발행인은 구로가와(黑川米尾) 신부로 적혀 있다.
  《수선탁덕(首先鐸德) 김대건(金大建)》은 1941년 10월경 서울 명동성당 유영근(兪榮根·1906~1950) 신부가 저술하였다. 책 머리말에 ‘소화(昭和) 16년’, 판권에 ‘소화 17년’이라 적혀 있다. 1941~42년 사이에 책이 만들어지고 출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편집인 겸 발행인은 구로가와(黑川米尾) 신부다. 일본인 신부를 앞세워 일제의 종교탄압을 막기 위해서였다. 발행처는 ‘천주교회’.
 
  김대건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1784) 이후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사제(司祭)로 서품되어 ‘수선탁덕’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수선은 ‘가장 먼저’라는 뜻, 탁덕은 ‘사제(司祭)’를 뜻하는 중국식 표현이다. 수선탁덕은 1846년 순교 이후 김대건 신부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책이 간행되기 꼭 100년 전인 1842년 당시 김대건 신부의 행적은 이렇다. 김대건 신부는 그해 2월 15일 프랑스 함대 세실 제독의 에리곤호에 승선, 마카오를 출발했다.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 김 프란치스코와 상봉했으며 그해 12월 29일 평안도 의주를 통해 조선에 일시 귀국했다. 신학생 후보가 되어 조선을 떠난 뒤 7년 만의 귀국이었다. 다음은 《수선탁덕 김대건》의 일부 내용이다.

 
 
  1. 탄생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충남 당진시 솔뫼성지.
  (전략) 성벽과 같이 솟아 있는 개산에서 뻗어 나온 작은 산맥들이 꿈틀거리는 벌레와 같이 소들을 향하고 엎드려 있으니 산맥과 산맥 간에는 들이 기어들어 가서 구불~ 시내의 모양을 이루었다.
 
  작은 산등을 뒤에 지고 작은 들을 앞에 안고 몇십 호씩 들어앉은 촌락 중에 놀매라 하던 동리가 있었다. 지금은 솔뫼(원문은 솔미-편집자)라 하고 관명은 범천, 송산리(松山里)라고 한다. 여기가 곧 우리 복자(福者·순교자일 경우 순교 사실이 밝혀지거나 순교자가 아닐 경우에는 기적이 적어도 2회 이상 일어난 사람-편집자) 안드레아 김 신부님의 태생지요, 때는 성하염천 하 일만초목에 녹음이 짙던 8월 21일이었다.
 
  안드레아는 1836년 영세할 때 받은 본명이요, 어려서는 재복(再福)이라 불렀으며 자는 대건(大建)이요, 보명(譜名·족보에 오른 이름-편집자)은 지식(芝植)이라고 기록되었다.
 
  그 부친은 김제준(金濟俊), 자는 신명(信明)이요, 보명은 제린(濟麟)이니 이가 곧 복자 김 이냐시오이요, 모친은 고(高) 우르술라이시다.
 
 
  2. 소년시대
 
2014년 8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충남 당진시 솔뫼성지를 방문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조선 속담에 ‘나무는 떡잎 적부터 안다’ 하였다.
 
  사실 성현이나 위인호걸의 역사를 본다면 흔히 그 어렸을 적부터 남다른 무슨 특점이 있음을 보게 된다.
 
  안드레아 신부의 끼치신 그 위업(偉業)을 보아 그 어렸을 적에 얼마나 남달리 두뇌가 명철하였으며 심리가 바르고 성질이 민첩하며 또는 활발하였을까를 어렵지 않게 점칠 수 있는 바다. 그러나 그 소년시대의 일화(逸話) 한 토막도 전하여 있지 못함은 크나큰 유감이다. 오직 조선 가톨릭 교회사의 권위 높으신 삐숑(피숑·Leon Pichon·한국명 宋世興·1893~1945·한국 천주교회사를 처음으로 연구한 선교사 연구자-편집자) 신부님의 저서에서 아래와 같은 간단한 구절을 얻어 보게 된다.
 
  ‘(김재복) 소년은 그때 양반의 자제들과 같이 품행이 단정한 중 한문을 공부하고 있었다. 신체는 좀 허약한 편이었다.’
 
  이는 추측상으로도 어그러짐 없는 사실로 믿는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주신 표양 그대로 재복이 소년은 그 ‘부모에게 순종하야 받드’셨다.(루카 2, 51) 성 아오스딩(아우구스티누스-편집자)의 말씀과 같이 ‘순명지덕이 가장 큰 덕행이다. 그리하야 말하자면 모든 덕이 근원이요 어머니다.’ (중략)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천부적으로 여러 가지의 권능이 있는 것이요, 그 받은 능이 강하다면 강한 만큼 그 능을 발휘시키기 전에는 불만을 멸할 수 없는 것이다.
 
  명철한 두뇌를 가진 그들이 다시 말하면 철학적 정신을 가진 그들이,
  인생은 어데서 온 것인가?
  인생은 왜 세상에 사나?
  인생은 최후에 어데로 갈 것인가?
  등의 인생문제를 생각 아니 할 수 없는 것이요, 연구에 따라 복잡한 또는 다단한 번민을 느끼면서도 그래도 얼마간 해독을 얻기 전에는 불만의 불만을 품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역사가 또한 잘 증명하여 주는 일이다.
 
  조선학자들이 역사 선배(先輩)의 끼쳐준 유서(儒書)나 불경(佛經)으로써 만족을 얻지 못하고 언제나 몇몇 동지가 모이는 때에는 흔히 우주론이나 인생문제 같은 고상한 문제가 화제에 오르게 되던 것이다.
 
  중국에 리마두(利瑪竇·마태오 리치·1552~1610·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편집자), 남회인(南懷人·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1623~1688·벨기에의 예수회 선교사-편집자), 탕약망(湯若望·아담 샬·1591~1666·독일의 예수회 선교사-편집자) 같으신 학자 신부님들이 포교하시던 때이다. 이러한 신부님들의 저서가 다행히 조선학자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글을 읽음에 따라 조선학자들의 심중에 끼쳤던 의문의 안개가 사라짐을 깨닫게 되었다.
 
  ‘의덕을 주리고 목말라하는 자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배부를 것임이’(마태오 복음 5, 6)
  (현재 가톨릭 성경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편집자)
 
  진리에 목말라하던 그들은 천주교회의 서적을 계속하야 탐독하였고 읽으면 읽을수록 환연빙석(渙然氷釋·얼음이 녹듯 의문이 풀리는 모양-편집자) 이연이순(怡然理順·기쁜 마음으로 도리에 순종함-편집자)이라는 문자가 있음과 같이 과거의 오류(誤謬)는 봄바람에 얼음같이 없어지고 순리를 깨닫게 되었다.
 
  ‘천주께 가까이 갈 지이다. 이에 천주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야고보서 4, 8)
  (현재 가톨릭 성경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편집자)
 
  진리를 찾기에 여념이 없던 그들에게 주의 성우(聖佑·하느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편집자)가 박차를 달아주어서 급기야 그들에게 구령(救靈·신앙으로 영혼을 구원함-편집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 × ×
 
  ‘생애사정에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운 세속의 아들들은’(루카 16, 8) 이익을 위하야 험한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너며 양(洋)의 동서를 가리지 않고 답파하야 짐승의 꼬리 하나라도 남기지 않고 거두고 있었다.
 
  교회가 성행하는 나라에 열심한 신도들 역시 남의 구령사정에 특히 여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외방에 미신자(未信者)들의 구령을 생각하야 친척과 이별하고 고국을 등지며 멀리~ 극동으로 포교의 길을 떠나오는 서양 선교사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었고 그들의 동양의 땅을 밟는 때에 이미 먼저 장사꾼들의 발자국이 있음을 보고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만난을 무릅쓰고 생명을 걸고 온 그들의 열성은 놀라웠지만 여러 가지 환경은 그들에게 오직 불리하야 역사를 읽는 이는 누구나 안타까움을 아니 느낄 수 없다. 더욱 조선 전교 사정이 그러하였다. (중략)
 
  조선에 들어오신 라 신부[Pierre Maubant·피에르 모방 신부·한국명 나백다록(羅伯多祿)·1803~1839-편집자]께서는 들어오신 그 즉시로 다대한 곤란 중에 조선어를 연구하시며 조선풍습을 배우시는 일방 조선교회의 당시 형편을 살피시며 사무를 시작하셨고, 또는 장래 방침을 생각하시기에 분망(奔忙)에 분망을 거듭하셨다.
 
  그 어느 날이다. 협착한 조선집의 방 한 칸을 지키고 계신 라 신부께서 우울한 중에서 무엇을 깊이 생각하시고 계셨다.
 
  그 얼굴은 더욱 엄중하셨고 그 입은 침묵에 굳게 닫혀 계셨다.
 
  라 신부께서는 멀리 이역(異域)에 있는 외로운 몸으로서 고향이나 혹 친우들을 생각하심이런가?
 
  아니다!
 
  그러면 탁덕의 일생에 주요한 부분인 기도 중이시던가?
 
  아니다!
 
  혹 그러면 여러 방면에서 느끼시는 고통 때문에이시던가?
 
  그도 아니다!
 
  라 신부께서 조선교회를 얼마간 살피신 후 장래의 교회 발전상 몇몇 가지를 결정하셨다.
 
  첫째, 당시에 이미 중국인으로서 조선에 체류 중이던 바드리시오 유(劉) 신부[유방제(劉方濟) 신부·순조 33년인 1833년 조선에 들어왔다-편집자]가 더 오래 조선에 계실 필요가 없음을 아시고 곧 중국으로 돌아가시게 할 것이었고, 둘째는 이미 국경에서 입선의 기회를 기다리고 계신 정 신부와 뒤따라 제2차 조선 교황 대리 감목으로 임명되신 범 주교 각하를 조선에 무사히 들어오시도록 주선할 것이었으며[정 신부는 샤스탕(Chastan) 신부, 범 주교는 앵베르(Imbert) 주교-편집자]
 
  셋째로는 조선교회의 기초를 견고히 세우기 위하야 무엇보담도 본토인 성직자 양성의 필요를 느끼사 유망한 조선 아동을 선택하야 유학시킬 문제 등이었다.
 
  이 문제의 소년은 곧 김재복이었다
 
  사실 신학생 유학문제에 있어서 이미 소년 두 명을 결정적으로 간선하야 당신 집에 유숙시키시고 계셨다. 그러나 내포에 가서 전교하실 때에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소년 한 명을 보시고 당신 댁에 부르셨으나 이를 다 본 아이들과 함께 유학시키실 문제에 있어서는 십분 주저와 고려(考慮)의 필요를 느끼심이었다.
 
 
  이 문제의 소년은 곧 김재복이었다.
 
1972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 동상 제막식(절두산) 모습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제막식에 참석했다. 사진제공=천주교 서울대교구
  이 소년은 이미 그 증조 되는 김비오(운조·運祚)씨부터 교회를 알아 받들어 그 증조는 1814년경에 충청도 해미에서 사망하고 그 후 박해 당시임에도 신자들이 각각 헤어져 흔히 서로 소식도 없이 살았으며 또한 다년간 지도하여 주시는 목자도 없이 지냈고 설혹 신부께서 계신 때라도 신부를 만나 뵈옵기는 극난하였다.
 
  하여튼 여러 가지 사정으로 김재복이라는 소년이 1836년에 이르러서만 라 신부님께 영세하야 안드레아라는 본명을 받았고 또한 견진(가톨릭의 일곱 성사 가운데 하나-편집자)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 8월 11일부터는 신학생의 지원자로 신부 사택에 머물러 이왕 배우던 한문을 더욱 숙달하고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학생을 선택하시는 라 신부님께서는 그 책임상 소년의 일거일동에 있어서 또는 그 가진 소질과 성질에 있어서 살피실 바이었고 더욱 이 소년의 영세한 기간이 짧은 만큼 일층 더 충분한 시련을 하실 것이었다.
 
  신학생으로 결정할 것인가? 그리고 다른 동무와 같이 유학을 보낼 것인가?이렇게 기도로써 주의 성의를 구하시는 동시에 깊은 생각에 잠겨 계시던 것이었다.
 
  앞으로 만단고초와 싸우고 필요하다면 생명을 이바지할 것을 각오하며 주의 영광을 위하야, 교회의 사업을 위하야, 남의 구령을 위하야 모든 것을 희생할 일꾼인 만큼 주의에 주의를 기하야 고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② 《김대건 신부》(1946)
 
  [편집자 註]
 
《김대건 신부》의 책 판권. 인쇄일은 1946년 9월 26일, 발행일은 10월 1일로 적혀 있다.
  책의 부제는 ‘조선이 낳은 세계적 위인 순교자 (안드레아)’이다. ‘대구가톨릭청년회’ 발행이다. 당시 대구교구는 전후(戰後) 한국 천주교의 중심 역할을 할 때였다. 책 판권에 인쇄 1946년 9월 26일, 발행 10월 1일로 적혀 있다. 머리말에는 ‘9월 12일 책을 펴낸다’고 밝히고 있다.
 
  100년 전인 1846년 9월 16일은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가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처형된 날이다. 따라서 순교 1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책을 펴낸 것이다. 책 끝에 ‘축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이라 적혀 있다.
 
  책의 저작자(著作者)는 주재용(朱在用·1895~1975) 신부다. 3대 대구교구장인 일본인 하야사카(早坂久兵衛·1887~1946) 주교가 1946년 갑자기 선종하자 뒤를 이어 교구 임시관리자가 되었다. 주재용은 그해 2월 27일 ‘십자가로 구원(Salus in Cruce)’으로 사목지표를 정하고 계산 주교좌성당에서 제4대 대구교구장으로 착좌하였다. 주 교구장은 해방 직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교육 사업에 애정을 쏟았다. 그해 9월 대구 대건중학교, 11월 경북 왜관 순심중학교, 이듬해 1947년 4월 김천 성의학교, 1948년 부산공과학원을 설립하는 등 해방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섰다는 평가다.
 
  책의 발행자는 대구가톨릭청년회 총무부장 김점묵(金占默)이다. 그는 1928년 대구고보(현 경북고) 맹휴사건에 가담해 제적된 인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학생들이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을 요구하며 일으킨 동맹휴교 투쟁이다. “이순신 장군을 적(敵)”으로 규정한 일본인 교사의 발언이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곳은 12수 연(聯)시조다. 김대건의 순교를 추모하고 고난을 찬양하는 시조가 인상적이다. 김대건이 15세 때인 1836년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세례받고 최양업(토마),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중국으로 출발하면서 겪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40년대에 이런 연시조를 썼다는 사실이 놀랍다. 잘 쓴 작품이다. 시인 이근배도 “문학사적으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시조를 누가 썼을까. 주재용 교구장이 썼을까. 대구가톨릭청년회에서 썼을까. 책 머리글에 적힌 ‘일송(一松)’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책 내용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머리말
 
  이 책은 한 사람의 역사를 간단히 적은 책자이로되 그 속에 스며 있는 암시(暗示)는 진실로 무한하도다.
 
  ‘인생은 어디로 쫓아오나 인생은 어디로 돌아가나 인생은 무엇을 하여야 하나’. 우리 민족의 철학적(哲學的) 세계관적(世界觀的)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투쟁, 이 투쟁이 마지막 낳은 씨가 이미 뿌려졌느니.
 
  진리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넋, 정의에 희생하는 우리 민족의 피, 신앙을 전취(戰取)하는 우리 민족의 기상(氣像)… 한 사람은 이를 증명하였도다.
 
  한 사람은 한 사람이로되 다시 억만 사람이요, 한 씨는 한 알의 씨로되 드디어 억만 광을 채우리로다.
 
  1946. 9. 29. 일송(一松)
 
 
  首宗徒 성 베드로는 이 우리 대건 선생에 비기면
 
  저 소설가의 묘사의 한 장면으로서 웃통을 벗은 채 잠방중의만 허리에 두르고 어깨에 그물을 둘러메고 로마부 —저 마다니아가 그린 폐허의 폼페이를 능가하는 명실 그대로의 화도(華都) 로마부— 에 세계적 대학자, 대정치가로 뽐내는 그 철학가 그 귀족들 앞에 나타난 옛적 수종도(首宗徒) 성 베드로는 이 우리 대건 선생에 비기면 그래도 훌륭한 한 양반의 대우를 받음 직하였으리라.
 
  그렇건마는 이 선생이 한번 상해 부두에 나타나매 그 남루한 차림 속에 그 학식(學識), 그 초췌한 몰골 속에 숨어 있는 그 인격(人格), 그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그 타고난 기상(氣像), 이 모든 것이 혜성(彗星)같이 한꺼번에 비추기 시작하였나니 영국 장교들을 만나면 영어로, 불란서 사람을 만나면 불어로, 지나(支那·중국-편집자) 관헌을 대하면 지나어로, 만나는 족족 거침없이 각각 그 나라 말로 담화를 걸며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개구리떼처럼 시끄럽게 구는 지나 관헌들의 그 수없는 질문을 놀라운 웅변으로 일일이 막아내며 심지어 월권적인 불필요한 그들의 조사에는 작대기로 대답해주매 대국사람 지나 관헌들이언마는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당시 두 나라 사이에 성문되어 있는 엄연한 국제법에 조선인으로서 지나 땅에 표풍해온 자는 반드시 북경천자께 보하여 그 배는 불사르고 그 사람은 조선 정부에 부치어 육로로 돌려보내야 할 명문이 소연함을 번연히 아는 그들은 이 법을 내세우면 “나도 두 나라 조약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육지로 조선에 돌아가는 것은 싫고… 우리 사정을 천자께 고하든지 말든지 당신네 권리이지만 그것은 나는 원치 않으니 그대들은 우리가 귀국(貴國) 연변에 와서 이 지방의 땅을 밟고 이 지방의 물을 마시는 것만 그대들이 알고 있으면 그만인 줄 안다” 하여 막아나가니 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고민하던 끝에 그 상관인 송강부(松江府) 도독에게 보고한즉 “그이는 내가 잘 아는 이이니 천자께 보할 것도 없이 제 원하는 대로 제 배를 고쳐가지고 그 배로 제 나라에 돌아가게 가만두어라”는 밀령이 나리지 않는가. 이에 저 관헌들은 더욱 이상히 여기고 더욱 걱정되어 기어코 그 정체(正體)를 알아버려 아무리 머리를 썩여가며 애를 써보나 알아볼 길은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버려두자 하니 자기네 책임문제가 또한 크고 하여 오직 마음으로써 그 어서 하루 바삐 떠나주기만 고대하고 있었다 하니 이만하면 우리 선생의 그 기품과 인격이 어떠하였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선생은 송강부 도독만이 신임할 뿐 아니라 그 당시 엊그제 끝난 소위 아편전쟁의 전승자로서 상해 천지에 서슬이 푸르른 저 영국 장교들도 이 양반만은 극진히 후대하며 영국 공사는 바로 그를 팔인교(八人轎)에 태워 공사관을 무상출입하게까지 하지 않는가. 그 시 중국 관헌들과 민중이 이 어른의 정체를 알지 못하여 그 머릿속에 별별 가지 공상과 억측을 그려보아도 도저히 알아낼 길이 없으매 마침내 ‘구과이(古怪·불가사의하고 신비한 존재-편집자)’란 대명사(代名詞)를 덮어씌우고 말았다 함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이 폐의파립의 초췌한, 다 깨어진 죽장망혜 대활보(大步)로 좌왕우왕함 보는 우리 동족 겨레로서 그 아니 통쾌하며 그 아니 감개하랴. 저절로 어깨가 우쭐거려지고 저절로 뽐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나지 않는가.
 
김대건 신부는…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되던 해 聖人 반열에
 
  김대건 집안은 지금의 충청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 자리했다. 김제준(이냐시오)과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1821년 8월 21일 태어났다.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845년 8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첫 미사는 그해 8월 24일, 마지막 미사는 1846년 4월 8일이었다. 그리고 그해 6월 5일 백령도에서 관헌에 붙잡혔고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순교 후 김대건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1857년 ‘가경자’[可敬者·시복(諡福·복자로 선포하는 것) 후보자로 신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람]로, 1925년 ‘복자’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 선교 200주년인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성인[聖人·복자가 된 후 다시 두 번 이상 기적이 일어난 것이 입증되어 성인으로 선포하는 시성(諡聖)을 거친 사람]으로 선포했다.
 
  그의 學識, 그의 氣像, 그의 교양 깊은 人品
 
한국형 이콘으로 만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대관절 선생은 어찌하여 그때 거기서 이와 같은 인기(人氣)를 끌고 이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던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의 학식(學識), 그의 기상(氣像), 그의 교양 깊은 인품(人品). 이것이 그렇게 만인의 인기를 끌게 하였던 것이니 이는 바로 저 미국 공사 포-베(M.Forbes)씨가 증명해주는 바이니 우리에게는 추호의 의점(疑點)의 여유도 있을 수 없는 바이다. 그 상해에 온 지 불과 며칠 되지 아니한 그는 “이 청년은 학식도 많고, 상식도 풍부하며, 여섯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청년이다. 그러기에 저 영국 장교들은 이 청년이 지식도 넓고 좋은 교양(敎養)도 받은 자이므로 그 교제하기에 매우 유쾌한 인격자임을 발견하였던 것이다”라 하여 이처럼 극구 찬양하는 말을 남겨두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평이며 이 얼마나 영예스런 찬사인가. 이러한 찬사, 이러한 평을 내린 자자가 그만저만한 보통사람이라면 또 모르되 적어도 일국을 대표한 고관(高官)으로서 문화의 수준이 높고 교양의 정도가 큰 학자, 정치가로서 그 보는 점이 남다를 것이요, 비판하는 판단력이 평범하지 아니할 것이어늘 이러한 자가 이러한 평을 내리게 될 적에야 다시 망설일 그 무엇이 또 있으랴. 더욱이 그 시대 그네들의 눈에는 저들만이 문화인(文化人), 저들만이 문명인(文明人)인 체 스스로 자처 자긍하는 한편 동양인은 보다 학식도 예의도 교양도 없는 야만인으로밖에 보이지 아니하던 그때인지라 동양 사람의 여간한 미점(美點), 여간한 우수성(優秀性)으로는 도저히 그들의 그 깊은 우월감, 그 강한 선입견을 깨뜨릴 수 없어 여간한 것쯤에는 그네들의 그 높은 코 끄트머리도 실룩거리지 아니할 정도이었다. 그렇거늘 이러한 그네들의 입에서 이러한 극도의 찬사, 찬평이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길 지경이었다면 우리 선생의 그 인품 그 지식 그 교양의 정도가 어떠하였음을 가히 엿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선생의 육국말(6개 국어-편집자)에 대하여 조선말은 물론이려니와 중국말, 라틴말은 그 남겨둔 20여 통 서간이 증명함과 같이 우리네의 모어(母語) 이상 능란하였고 불란서말도 훌륭히 통어하실 만큼 배우신 증거는 약 8개월간 세실 함장의 통역관의 요직에 있음만 보아도 알 것이요, 영어 역시 오송항[우쑹(吳淞)은 중국 상하이 중심가에서 북동쪽으로 20km가량 떨어진 항구-편집자] 상해 등지에서 영국 장교들과 회화함을 보든지 더구나 당시 서간 중 친히 말씀한 바와 같이 영국 공사와 통변없이 직접 담화하였다 함을 보아 그 넉넉히 통화할 수 있는 정도임을 알겠는데 그 여섯째 나라말은 어느 나라 말이었는지 똑똑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음은 가장 애석한 바이다. 요동반도 대장하(大莊河) 부두에서 이태리말을 사용하였다 한 기록이 있으나 그때 그 환경을 보아 그 시에 사용될 말이 아니라 하여 보통 오자·낙서로 돌리거니와 천주교와 로마의 관계로 보든지 그 시 마카오에 포교선생 직속의 이태리인 선교사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사실 등을 참작하여 이태리말을 배웠거나 아니라면 적어도 포도아말(포르투갈어-편집자)을 배웠으리라 함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 그 시대 조선 안에 2000만 주민 중엔 서양 글의 꼴도 구경한 이가 없던 그 시대에 선생은 육국어를 알았으니 5000년 조선 유래에 이 어찌 끔찍한 일이 아니며 이 어찌 일대 경이적 인물(一大 驚異的 人物)이 아니리요. 근대적 세계 영웅 나파륜(나폴레옹-편집자)이 죽던 그해(1821)에 탄생한 우리 성웅(聖雄)으로 체번(替番)하신 것이나 아닐런가.
 
 
  一大 驚異的 인물이 아니리요
 
김대건 신부의 두상. 가톨릭대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응용해부연구소가 복원했다. 사진 제공=서울역사박물관
  선생이 서울 옥중에 계실 때에 당신이 중국 어선(魚船)에 맡겼던 편지들이 발각 압수되어 경성에 들어오매 조정에서는 가장 큰 증거물이나 잡은 듯이 — 사실은 그 시대에 있어서 원자폭탄에 못지않은 위험물이 그 속에 있었음은 그 시 정부 몰래 조선 안에 잠복(潛伏)하고 있던 불국인(프랑스-편집자) 주교, 신부 두 분의 편지도 그 중에 들어 있었던 것인데 어전회의에 모인 그 정부 요로들은 서양 글씨를 처음 보고 놀라는 중, 선생의 쓴 편지와 서양인이 쓴 편지의 글체가 다름에 착안하여 “이 편지가 모두 네 손으로 쓴 것이라면 어찌하여 그 글씨가 이렇게도 다르냐” 하고 묻는 말에 그는 “한 사람의 글씨라도 그 잡은 편(철필)의 다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여 이 일촉즉발의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더니 그들은 또다시 “철필은 우리나라에 없으나 하여튼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쓸 수 있다는 증거만은 댈 수 있으니 어디 이리 달라” 하여 그 새 깃을 먼저 매우 뾰족하게 다듬어가지고 가늘게 몇 자를 적어 보인 후에 다시 그것을 뭉툭하게 잘라 버리고 퉁퉁하게 만들어가지고 굵직굵직하게 큰 글자를 얼마 그린 후 “보시오. 이 두 글체가 그 얼마나 다른지 그러니 이 편지들은 다 모두 내가 쓴 것이지 다른 서양인이 이 땅에 있어서 쓴 것은 아니요” 하매 군신 상하가 모두 “○너니(옳거니?-편집자) 그, 그렇겠다”라 하여 곧이듣고 속아넘어가더라 하였으니 (중략)
 
  대개 그 고대하던 순교의 날, 즉 군문효수(軍門梟首)의 날을 당하여 순량한 양(羊)과 같이 새남터 모래밭 사형장에 끌려온 선생님은 ‘사형의 죄목은 외국인(外國人)과 상종한 탓’이라 공포하는 포장의 사형선고문의 낭독이 끝나자 즉시 일어서 명랑하고 자약한 음성으로 자기의 사형당하는 참다운 이유를 설명함과 동시에 운집한 군중을 최후로 제성권면(큰소리로 격려하다는 뜻-편집자)코자 말씀하시기를 “나의 생명의 최후시각이 이르렀으니 제군은 나의 말을 들을지어다. 내가 외국인과 교제한 것은 다만 우리 믿는 종교와 우리 대군(大君) 대부모(大父母) 천주(天主)를 위하여 하였을 뿐이요, 그 외에 다른 뜻이 없었나니 나는 이제 오직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인즉, 내 앞에는 곧 영원한 생명(生命)이 시작될 것이다. 제군도 사후 영원한 복락을 얻으려 하거든 나와 같이 천주교인이 될지어다. 천주께서는 당신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영원한 불로 벌하시나니라” 하여 군중의 흉금을 울린 후 다시 좌 깃대 아래 꿇으시매 형역들은 그 머리에 줄을 잡아매어 좌 깃대 구멍에 꾀어 잡아당기니 자연 선생의 머리는 높이 달리었다. 이때이다. 선생은 극히 태연한 어조로 “이렇게 하면 칼로 치기가 좋으냐” 물어 형역의 “좀 몸을 이렇게” 하며 몸짓함에 따라 “자, 그럼” 하시면서 몸을 조금 고쳐주자 형역들의 칼날은 벌써 그 목을 한번 스르르 문지르고 지내간다. 이때 선생님은 “나도 이젠 내 할 일 다 했으니 너희도 어서 쳐라” 하시며 모래 우에 고이 내려놓이었다. 아 — 이 얼마나 태연자약한 기상이며 이 얼마나 순량한 고양(羔羊·어린양-편집자)의 희생인고. 종교적 입장을 떠난 순전한 민족적 견지에서 보더라도 이러한 위대한 인격자를 뉘 있어 부러워하지 않으며 뉘라서 심상히 보아 넘기고 말 것이랴. 오— 조선이 낳은 이 위인! 오! 조선의 이 보배! 이 보배를 아는 자 그 몇이나 되는고!
 
  ‘산천(山川)이 어둡거니 일월(日月)을 어찌 보며
  지척(咫尺)을 모르거든 천리(千里)를 바라보랴’
 
  (중략) 그런데 이 대건 김 선생님의 그 십년간 남긴 행적이야말로 정말 너무나 극적이요 참말 너무도 탁월하여서 그를 일일이 소개하기는 이 제한된 면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므로 여기 오적 그 간단한 일람표를 제공하여 그 업적의 큰 윤곽만이나마 파악하게 하려 한다.
 
 
  김대건 선생의 약력 일람표
 
  1. 경기 용인 한덕동에 한문 사숙하는 어린 재복이 ‘글방 도련님’ 김대건(1821년부터 1836년 7월 10일까지)
 
  2. 모정에 쌓인 조선을 뒤에 버리고 붕정만리의 길 떠나는 15세 ‘어린소년’ 김대건(만주 몽골 산서 중국대륙의 중앙을 뚫고 약 8개월 간 길손)
 
  3. 산설고 물선 만리이역 마카오에 외로이 정학(精學)하는 ‘유학생’ 김대건(1837년부터 1842년까지)
 
  4. 불국(프랑스-편집자) 동양함대장 세실 제독함 상에 오른 지나어(중국어-편집자) ‘통역관’ 김대건(1842년 2월 15일부터 9월 하순까지)
 
  5. 양자강 하류 오송(吳淞)구에서 세실 함상을 하직하고 귀국 준비를 획책고자 황세흥(黃世興) 집에 신세기 치는 ‘외로운 손(孤客)’ 김대건(1842년 9월 하순)
 
  6. 요동반도 대장하(大莊河) 부두 벌떼같이 덤벼드는 지나 관헌을 준책하여 외국인을 건져내고 백가점(白家店)에 은신한 ‘구호자(救護者)’ 김대건(1842년 10월 중순)
 
  7. 8년 만에 다시 보는 내 고향 내 나라를 앞에 두고 동족에게 구축 받고 깊은 산, 찬 눈 위에 쓰러진 정체(正體) 모를 가련한 의주 변문[중국 국경 근처에 있는 변문진(邊門鎭)-편집자]의 ‘걸인(乞人)’ 김대건(1842년 엄동)
 
  8. 장춘 서북 몽고 팔가자(八家子)에 전공의 신(神)철학을 완성하는 조선 초유의 ‘철학가’ 김대건(1843~44 양년간)
 
  9. 백두산 눈보라는 뼈를 녹이고 만주벌 찬바람은 살을 에는 4000리 황야를 횡단하여 경원(慶源) 변문을 두드리는 수상스런 ‘홍차(紅茶)’장수 김대건(1844년 엄동)
 
  10. 네 번째 모험으로 마침내 의주 변문의 경계망 뚫고 한양에 숨은 ‘저술가’ 김대건[1845년 춘(春)]
 
  11. 일엽편주로 황해 노도(怒濤)와 싸우는 ‘모험적 항해가’ 김대건(1845년 4~5월)
 
  12. 구사일생 오송구에 표류되어 영국함장의 구호를 청하는 눈치 빠른 ‘수완가’ 김대건(1845년 5월 하순)
 
  13. 오송 관헌의 강경하게 주장하는 의법처치(依法處置)를 단호 거절하는 ‘웅변가’ 김대건(양국 조약에 배는 불사르고 사람은 나라에 부치어 육로로 귀국게 함)
 
  14. 국제도시 상해 부두에 영국 장교들과 악수하는 조선 초유의 ‘사교가’ 김대건(1845년 6월 초순)
 
  15. 영국 공사(公使)를 방문하고 팔인교(八人橋)에 태워 위의 품품하게 나오는 조선 초유의 ‘외교관’ 김대건(1845년 6월 초순)
 
  16. 광풍노도에 찢기다만 일엽편주가 일시 전능 주(全能 主)의 엄엄한 성전으로 화할제 그 앞에 공손히 조력하는 ‘조제(助祭)’ 김대건(1845년 6월 초순)
 
  17. 상해 관민(官民)들로 하여금 그 정체를 알지 못하여 머리를 썩히게 하는 그들의 구과이(古怪) 우리의 ‘신비객(神秘客)’ 김대건
 
  18. 상해 관헌들의 그 성가신 질문을 작대기로 대답해주는 조선의 ‘큰양반’ 김대건
 
  19.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열없이 전도하려 덤비는 영국목사 스밀 등을 함구무언케 하는 조선 초유의 ‘신학자(神學者)’ 김대건
 
  20. 상해 김가항(金家港)서 성직(聖職)에 오르는 조선의 ‘첫 신부(神父)’ 김대건(1845년 8월 17일)
 
  21. 상해 완당 성전에서 조선사람으로서 처음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조선의 ‘첫 사제(司祭)’ 김대건(1845년 8월 24일)
 
  22. 광풍노도에 포로되어 제주(濟州) 근해에 방황하는 라파엘호의 ‘선장’ 김대건(1845년 8월 31일부터 10월 12일까지)
 
  23. 강경포 황산에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형설의 ‘개선자’ 김대건(1845년 10월 12일)
 
  24. 10년간 그리웁던 어머님 모시는 ‘효자(孝子)’ 김대건[1846년 초 춘(春)]
 
  25. 순위도(巡威島)의 이변으로 등산(登山) 해주(海州) 한양(漢陽)에서 열변 토하는 열렬한 ‘신앙표백자(信仰表白者)’ 김대건(1846년 5월 13일부터 9월 16일까지)
 
  26. 서울 옥중에서 친히 만드신 세계지도 지리지(世界地圖 地理志) 등으로 임금을 위시하여 온 조선을 놀래게 하는 조선 초유의 ‘경이적 대인물’ 김대건(1846년 8월 하순)
 
  27. 조선 위정자들의 사색(四色)투쟁과 실력무능을 보고 조선의 장래를 못내 설워하며 크게 우려하는 조선의 진수한 ‘우국지사(憂國志士)’ 김대건
 
  28. 내외친지와 교우 일동에게 일일이 보내는 최후 고별사로서 순교를 각오하는 ‘부감목(副監牧)’ 김대건(1846년 7월 28일~8월 26일)
 
  29.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최후의 대(大)설교로 구름같이 모인 군중의 흉금을 울린 후 “내 몸을 이렇게 가지면 치기가 좋으냐” 물어 조금 이쪽을 땡겼으면 하는 형역의 말에 “자, 그럼” 하며 고쳐 앉은 후 시험해보는 듯 놀리는 희광이의 칼이 자릿자릿 하게도 그 울대머리를 스스로 문지르고 지내매 “나도 이젠 내 할 일 다 했으니 너희도 어서 쳐라” 하시며 사르르 눈을 감고 유유히 칼을 받는 영웅적 ‘대(大)순교자’ 안드레아 대건 김신부(1846년 9월 16일)
 
  30. 십만 군중을 탄토하는 세계적 대(大)전당 로마 대성전에서 창조주 조물진주의 지상대리자 로마교황으로부터 세계의 사표(師表) 세계 인류의 활(活)모델로 표창받는 ‘성웅(聖雄)신자’ 안드레아 대건 김신부(1925년 7월 5일)
 
 
한국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의 대형 동상과 순교박물관이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 전경이다.
  조선이 낳은 세계적 위인 천상 복자(福者) 안드레아 대건 김신부의 역사는 대강 이러하다.
 
  × ×
 
  十五세 어린몸이 괴봇짐 걸머지고
  정든땅 뒤에두고 정처없이 길손되니
  마카오 낯선땅아 박대말아 이少年
  이역에 八개성상 반성공* 품에안고
  네보山 찾노라고 요동땅 굽어드니
  山川은 의구ㅎ건마는 건데없네 父子情
 
  그립던 母子情을 지척에 끊어두고
  편주에 맡긴몸이 노도에 포로되고
  광풍에 까불린배는 그칠줄을 모르네
 
  김가항** 탁덕승품 천고에 경사이요
  강경포*** 금의환향 만고에 보배로다
  五천년 忠孝의 조선아 이보배 또 아느냐
 
  三千里 너른 강산 터좁다곤 못할지며
  二천만 숱한동포 數적다곤 못하련만
  沙장에 버린 저보배 임자없음 설어라
 
  내겨레 내동포는 내몰라라 하던임을
  하늘밑 온누리가 서로다퉈 찬양하네
  鮮血에 주린조선아 언제까지 잠자려나
 
  × ×
 
  白頭山 나린물은 白鹿潭에 흘려있고
  무궁화 고운꽃이 옥야청산 붉었으니
  아마도 우리복자의 血滴인가 하노라
 
  山허리 단풍잎은 실바람에 물결치고
  가을밤 밝은달에 쌍기러기 노래하니
  묻노라 철없는 너희들도 이날만은 아는고야
 
  까마귀 눈비맞아 희는듯 검다마는
  티없는 저달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信仰에 굳어진마음 칼날인들 어이리
 
  솔숲을 이불삼고 돌틈에 베개삼아
  三천리 너른땅에 갈데없어 헤맬적에
  기어코 이기쁨있을줄을 뉘그때 알았으리
 
  비단결 금수강산 가뜩이나 고운데다
  때아닌 무궁화가 더한층 고운지고
  무심한 조선兒들아 뉘덕인줄 아느냐⊙
 
[편집자 註]
 
  *반성공: ‘八개성상 반성공’은 마카오로 떠난 조선인 8명(3명의 신학생 후보 김대건·최양업·최방제 포함)이 황해도 개성(開成) 상인으로 변장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해석으로 여덟 해, 혹은 8개 성상(聖像)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 ‘반성공’은 ‘반드시 성공’으로 추측된다.
 
  **김가항: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탁덕은 ‘천주교회의 사제’를 뜻하는 중국식 표현이다
 
  ***강경포: 김대건은 1845년 10월 12일 충청 강경 부근의 황산포에 도착해 포교활동에 나섰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6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