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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國歌 논쟁: 제헌국회에서 21대 국회까지

“애국가는 현재 근거규정이 없습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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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제헌국회, “남북이 통일되어 한 의사당에서 國歌 의논할 때까지 보류”
⊙ 4·19 직후 민주당 소장파, “제2공화국 탄생 기념하는 국가 필요”
⊙ 5·16 이후 6대 국회에 제출된 ‘5년 이내 국가 제정’ 법안
⊙ 5共 전두환 정권 당시 민간 주도 ‘국가제정추진위’ 설립… “애국가, 소멸적·의타적”
⊙ 문재인 정권의 親與 인사들, “나라 배반한 사람(안익태)이 애국가 만들어”
2017년 11월 17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야외광장에서 열린 제78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모습이다. 국무총리, 국가보훈처장, 독립운동가 유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애국가를 제창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대한민국 국가(國歌)는 애국가(愛國歌)인가 아닌가.
 
  애국가는 나라의 위촉이 아닌 안익태(安益泰·1906~1965)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애국심에 의해 작곡됐고, 1948년 건국(建國) 과정에서 국가를 제정·공포하는 과정 없이 애국가가 자연스레 국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일보》 1956년 12월20일자 2면에 흥미로운 문답(問答)이 실렸다. 한 독자(서울 흑석동에 사는 시민)가 이렇게 신문을 통해 공개 질문했다.
 
  “애국가와 국가는 다른 것인지요? 다르다면 왜 우리나라에는 국가가 없습니까?”
 

  이에 대한 문교부(현 교육부) 지승만(池勝萬) 사회교육과장의 공개 답변은 이랬다.
 
  “국가와 애국가는 그 의의와 성질에 있어 다른 것입니다. 국가는 국가(國家)와 민족의 존엄성을 표현하여 국민을 고무할 세계에 자랑하는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국가기관에서 제정·실시하는 것이요, 애국가는 애국·애족·정열을 표현한 것으로 국가와는 달리 민간으로부터 제작·애창되는 것입니다.”
 
  지승만 과장의 답변을 살펴보면,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애국가는 애국·정열의 부르짖음이지 국가는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도 애국가는 관습헌법으로 국가로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국가로 공식 인정하는 헌법적 조항은 없다. 지난해 김원웅 광복회장이 안익태의 애국가를 향해 저주한 이유도 어쩌면 애국가가 ‘공식 국가’가 아니기 때문인지 모른다.
 
 
  “애국가는 현재 근거규정이 없습니다”
 
1948년 5월 31일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 모습이다.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가 사회자로 선출돼 의사진행을 하고 있다.
  지난 2006년 11월 29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서 민주당 최인기(崔仁基) 의원이 애국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김대중(DJ) 정권 시절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정통 관료 출신이다.
 
  〈- 최인기 의원: 애국가가 지금 근거가 뭐가 있습니까?
 
  - 행정자치부 의정관 김국현: 애국가는 현재 근거규정이 없습니다.
 
  - 최: 없지요?
 
  - 김: 예.
 
  - 최: 그래서 애국가도 우리가 애창을 하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법률적 근거를 안 만드는 것은 그것을 관습헌법 범위로 보지 않았을까.〉
 
  최인기 의원은 이어 혼잣말을 하듯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애국가에 대해 무슨 법률을 만들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최 의원도 17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만들지 못했다. 사실 안익태의 애국가는 헌법과 법률에 인용되지 못한 채 대통령 훈령인 ‘국민의례 규정’에 속해왔다. 따라서 “국가 상징물 위상에 걸맞지 않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건국(1948년) 이래 애국가 위상과 새 국가 제정 논란은 명확한 결론 없이 지금껏 이어져 왔다. 제헌국회 당시 ‘애국가를 국가로 한다’거나 ‘새 국가를 만들자’는 식의 명확한 결론을 못 내렸기 때문이다.
 
  단기 4281(1948)년 9월 9일 오전 10시. 의사일정 제5항인 ‘국기(國旗)와 국가에 관한 건의안’이 의제로 상정되자 김약수(金若水) 부의장이 심사에 착수했다. 어쩌면 이날 결정이 애국가와 국가 운명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여다보자.
 
 
  “國歌를 새로이 창조하자” vs “애국가는 어느 정도 國歌化되었다”
 
  ‘국기와 국가에 관한 건의안’을 낸 조선민족청년단(이하 족청) 소속 정균식(鄭均植·1904~1957) 의원이 국가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그는 “나라의 노래는 국가에 있어서 언사적(言事的) 내지 정신적 문화예술 방면을 통한 국토와 국민과 주권에 대한 표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애국가와 국가는 당연히 다르다고 해석되는 바입니다. 이 애국가의 발족도 여러분께서는 아실 것입니다마는 전날에 우리 애국청년으로서 우리 독립을 얻으려 할 때에… 나라를 사랑하며 주권을 그리워함으로써 애달픈 가사로 지어놓은 것입니다.
 
  그 계통을 보면 당초 아주 오랜 서양의 이별 곡조였습니다. 그것이 ‘안 무엇’이라고 하는 작곡가의 곡조라고 합니다마는… 우리가 정부를 새로이 수립하고 만방에 우리가 독립을 선언하는 새 나라의 재건에 있어서 반드시 우리는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균식 의원은 안익태를 ‘안 무엇’으로 낮잡으며 “새 정부의 독립 수립과 재건에 맞게 국가를 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계속된 그의 주장이다.
 
  “국가는 애국가와 달라 곡조에 있어서 국가를 우리가 제정한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정신을, 즉 우리의 혼탁한 머리를 좀 더 향상할 만한 번뜻한, 예술적으로 모든 부문에 있어서 번뜻한 우리 국가를 새로이 창조하자고 하는 그런 말이올시다.”
 
  그러자 같은 족청 소속 강욱중(姜旭中·1908~1969) 의원이 정 의원 주장에 반박한다.
 
  “우리 국가라는 것이 애국가가 어느 정도 국가화(國歌化)해진 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라는 것은 한 나라를 상징한다 할 것 같으면 어느 정도의 역사성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지만, 국가화됐으며 역사성을 갖췄다”는 주장이다. 강 의원이 말한 ‘역사성’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를 비롯해 망명 동포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애국가가 해왔다는 의미다.
 
  강 의원의 발언이 끝나자 정 의원이 “잠깐, 보충 말씀을 드리겠다”며 발언권을 얻었다. 그는 “강 의원이 대단히 오해하신 것 같다”며 “애국가를 결코 말살하자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고 물러섰다. 정 의원의 말이다.
 
  “우리가 40여 년 동안 노예화 민족의 눈물로서 우리가 언제나 부르고 싶었고 그리워하던 우리 애국가를 결코 말살하자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새로운 신생국가로서 국가 하나 없으니 이것을 하나 만들자고 하는 것이지 절대로 애국가를 말살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 의원의 주장은 다소 모호하다. 새 국가를 만들며 애국가를 어떻게 할지 고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국가와 국가를 병용하자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만장일치로 ‘새 國歌 건의안’ 철회
 
제헌국회 당시 국회부의장인 김약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하 독촉국민회) 이주형(李周衡·1906~?) 의원은 새 국가 제정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마(魔)의 38선’이 가로놓인 남북분단을 그 이유로 들었다. “북쪽에 있는 1000만 동포를 생각하면 가슴도 찢(어지)거니와 눈물이 흐른다”면서 통일 이후로 국가 제정을 미루자는 주장을 편다.
 
  “국가와 국기를 법률로 확실히 제정하지 않아도 38선을 철폐하고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지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국가(國家)임네, 하고 국가를 제정할 것 같으면 오히려 남북한이 통일하는 데에 커다란 지장이 있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남북이 완전히 통일되어 3000만이 전부가 대표를 보내서 한 의사당에서 의논할 그때까지 보류할 것을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독촉국민회 김철(金喆· 1898~1978) 의원이 “재청합니다”, 무소속 이호석(李浩錫·1911~?) 의원이 “3청합니다”라고 말을 받았다.
 
  김 부의장은 “표결에 부치겠다”며 “‘국기와 국가에 관한 건의안’은 보류하자는 동의가 들어왔고, 따라서 성립이 되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이때 소수 의견으로 “성립이 안 돼요”라고 외치는 이도 있었다.(제헌국회 속기록 참조)
 
  김 부의장의 “보류 선언” 직후 한국민주당 소속 정광호(鄭光好·1897~?) 의원은 “우리가 어떠한 조건이 완성되기까지 (국가 제정을) 보류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구속당하는 것”이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차라리 “건의안 제출을 철회하라”는 요구였다.
 
  결국 정균식 의원은 자신이 제헌국회에 냈던 건의안을 철회하고 말았다. 김 부의장은 “철회 여부를 표결로 묻겠다”며 손을 위로 들어 가부(可否)를 물어 재석 133석 중 가 121표, 부 0표로 일단락됐다. 이로써 국가 제정은 수면 아래 잠기게 됐고, 국가 제정을 남북통일 이후로 미루자는 명확한 결론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언론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이튿날(1948년 9월 10일) 《조선일보》 1면 기사는 이랬다.
 
  〈9일 제60차 회의는 김약수 부의장 사회로 개의하여 ‘연호에 관한 법률안’ 제정에 관한 건과 ‘국가와 국기 수립에 관한 건 국회법 개정안’을 상정 토의한바 ‘연호에 관한 법률안’ 제정은 법제사법위원회에 임하기로 가결하고, ‘국가·국기 수립안’은 현재 사용하는 애국가와 태극기가 남북통일의 목표와 민족재건의 유일한 투쟁상징이 되는 것으로 구태여 새로 제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만장일치, 철회하기로 가결한 후 오전 11시50분 산회하였다.〉
 
 
  “한국식 음계, 우리 정서가 포함된 國歌를 만들자”
 
1960년 8월 23일 장면 내각 구성 후 신임 국무위원들. (왼쪽부터) 박제환 농림, 오천석 문교, 이태용 상공, 주요한 부흥, 정일형 외무, 김선태 무임소장관, 오위영 국무원사무처장, 조재천 법무, 장면 총리, 정헌주 교통, 윤보선 대통령, 김영선 재무, 이상철 체신, 홍익표 내무, 현석호 국방장관.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건의안 철회 대신 ‘국가를 애국가로 대신한다’고 명문화하거나 ‘남북통일 이후 국가를 제정한다’는 식으로, 애국가의 운명을 명확히 했더라면 이후 불필요한 논란이 없었을지 모른다.
 
  새 국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후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정치권에서, 그리고 음악계와 시민사회 여론 주도층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되었다.
 
  《조선일보》 1959년 10월3일자 4면에 KBS 이상만 PD의 ‘신(新) 국가 제정을 제의함’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상만(李相萬·87)은 《월간조선》 2021년 4월호에 ‘개관(開館) 축제 전문가, 이상만’으로 소개한 원로 음악인이다.
 
  그는 《조선일보》 1984년 9월21일자를 통해서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이상만이 말하는 국가 제정의 이유를 요약하면 이렇다.
 
  〈국가의 음계(音階)는 민족적인 음계라야만 하고, 양악기나 국악기로도 모두 자연스럽게 연주될 수 있어야 하는 보편성도 있어야겠다. 노랫말도 제대로 우리말의 억양에 일치되어야 하겠다. 현행 애국가는 서양 음계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현재의 애국가를 그만 부르자는 뜻은 아니다. 애국가가 몇 개 있어도 괜찮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담고 여기다 민족정신의 표상, 한국식 음계, 우리말 억양, 우리의 정서를 담은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다.
 

  국가 제정운동이 본격 불거진 것은 1960년 4·19 직후였다.
 
  그해 8월 ‘혁명국회’라고 불리는 제5대 민의원이 개원하자마자 박준규(朴浚奎)·김영삼(金泳三)·김재순(金在淳)·류청(柳靑) 의원 등 민주당 내 신·구파 의원들이 “우리나라 국기와 국가(國歌), 국호, 연호(年號) 등이 시대적으로 맞지 않으니 4·19를 계기로 깨끗이 고쳐버려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때가 4·19 직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주장은 아무래도 이승만 정권 붕괴와 새로운 정부 출범을 감안한 주장으로 보인다.
 
  당시 문교위원인 류청 의원은 1960년 11월 4일과 5일에 걸쳐 국회에서 오천석(吳天錫) 문교부 장관을 상대로 국가 제정 문제를 따졌다. 오 장관은 “국가는 절대로 있어야 한다. 속히 국가를 제정하는 방향으로 힘쓰겠다”고 답했다.
 
  〈- 류청: 나라가 건국되어 의식 때나 모든 때에 애국가를 부르는데 애국가하고 국가하고 어떻게 틀리는지 모르지만, 국가라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외국은 전부 국가가 있어요. 그래서 제2공화국이 탄생하는 것을 기념한다고 할까, 국민한테 무엇을 주입시키기 위해 국가를 만들어 부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는가요?
 
  - 오천석 장관: 국가는 절대로 있어야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치고 국가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아직까지 국가를 정하지 못하고 지난 30년 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문교부로서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기에 대해서 연구해본 일은 없습니다. 제 개인의 소견으로는 절대로 필요하고, 이것은 문교부 소관이라는 것보다 정부 전체가 고민할 일이고, 국회까지도 이 문제가 논의되어야 할 문제로 생각하는데, 구태여 소속을 따진다고 할 것 같으면 국무원(國務院) 사무처의 소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희로서는 좀 더 연구해서 국무원 사무처와 연합해 속히 국가를 제정하는 방향으로 힘쓰겠습니다.〉
 
 
  國歌 개정 ‘통일 완수 後’ vs ‘통일 무드 뒤’ vs ‘통일 前 가능’
 
1964년 2월 11일 《조선일보》 3면에 실린 〈국기·國歌·국화, 어떻게 다뤄야 하나〉라는 기사다. 고려대 김성식, 소설가 박종화, 시인 이은상이 鼎談을 나눴다.
  5·16 이후에도 국가 문제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1964년 2월 11일 《조선일보》 3면에 ‘국기·국가·국화, 어떻게 다뤄야 하나’라는 기사가 비중 있게 실렸다. 기사의 부제는 ‘또 고개 든 개정론의 시비(是非)’. 당시 국가 개정(제정) 요구가 사회 일각에서 제기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날 정담(鼎談)에는 당대 지식인을 대표하던 고려대 김성식(金成植·1908~1986) 교수, 소설가 박종화(朴鍾和·1901~1981), 시인 이은상(李殷相·1903~1982)이 참석했다. 다음은 기사 일부다.
 
  〈▲김성식=국가 등을 가지고 논할 시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국가는 없다고 하더라도 애국가로 사용해왔는데 이제 말씀대로 우리 민족을 상징하고 기백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을 만들자면 우리가 좀 더 안정되고 통일적(統一的)인 어떤 ‘무드’가 생겨가지고 이것을 만들어야 되겠는데 지금 이 혼란한 시기에 해방 직후 고쳤어야지 지금은 때가 아니다.
 
  ▲박종화=저도 역시 국가 등을 고쳐야겠다고 해방 직후에는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는 민족이 분단돼 있고 또 20년 동안은 그것으로 삼아왔고 이렇게 됐으니까 우리 민족이 다 한 광장에 서서 통일의 완수를 기껍게 축하하는 자리에서 국가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은상=애국가만 해도 슬픈 곡조나 가사로 나오는 것보다는 좀 더 이 민족이 새롭게 살아가야 하며 내 조국을 찬미하고 내 민족의 단결을 노래하고 해 돋는 동방의 나라의 대의념(大意念)을 표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 지어 말씀드리자면 원칙적으로 새로 만들어야겠다는 데 찬성이고 시기적으로는 지금이 아니라는 데도 찬성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통일된 연후라고 한다면 문제가 다르다고 봅니다.〉
 
  당대 지식인을 대표하던 3인의 생각이 묘하게 일치됨을 알 수 있다. “해방 직후 국가는 물론 국기와 국화까지 고쳤어야 했다”는 것이다. 국가 개정 시기를 두고는 “혼란스러운 이 시점에서 개정은 옳지 않다”면서도 조금씩 견해 차이를 보였다. 박종화는 “통일 완수 후”, 김성식은 “통일적인 어떤 무드가 생긴 뒤”, 이은상은 “통일 이전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6대 국회, “5년 이내에 새 國歌를 만들도록 강제 규정”
 
1965년 12월 공화당 안동준 의원이 대표 발의한 ‘國旗 및 國歌에 관한 법률안’. 당시엔 필경사의 손으로 법률안이 작성됐다.
  국가를 새롭게 만들자는 논의는 이듬해 1965년 다시 국회로 번졌다.
 
  공화당 안동준(安東濬·1919~2010) 의원의 대표 발의로 국회의원 69명이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한 것이다. 그해 12월21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국회 안동준 의원 등 69인은 20일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안’을 내놓았다.
 
  이 법안은 현재 쓰고 있는 태극기를 그대로 국기로 하며, 국가는 이 법 시행 후 5년 이내 제정하도록 하고 그때까지 애국가를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공동 발의한 69명은 당시 재적 의원 189명의 36.5%. 다수 여야 의원이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눈길을 끄는 것은 법 통과 후 5년 이내에 새 국가를 만들도록 강제 규정을 뒀다는 사실이다. 안 의원은 왜 이런 법안을 만들려 했을까. 당시 의안(議案)을 찾아보니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일(韓日) 국교 정상화와 때를 같이하여 퇴폐적인 외래 풍조의 침입과 경제 침략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민족적 긍지와 주체성의 확립은 물론 국기나 국가에 대한 존엄성을 인식하고…〉
 
  1965년 6월 22일 맺은 한일 수교를 즈음해 새로운 국가 제정을 제안한 것이다. 이 법안이 나온 뒤 1년이 훨씬 지난 1966년 9월 20일이 돼서야 법안 심의가 국회 문교위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국가에 관한 사항은 총무처 소관”이란 점을 들어 법안 심사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듬해 1967년 3월 6일 국회 내무위에 이 법안이 다시 상정되었다. 그러나 내무위원들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민정당 유치송(柳致松·1924~2006) 의원은 “이런 정도의 법률이면 지금 이것을 제정할 필요가 있느냐”며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것은 애국가이지만 애국가인 동시에 일반 사람들에게 이것은 국가의 하나”라고 했다. 유 의원은 법안을 발의한 안동준 의원에게 직설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지금 애국가는 국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5년 이내에 국가를 제정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러한 규정을 넣는 것인지요?”
 
  그러자 안 의원은 이렇게 답했다.
 
  “지금 (애)국가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런 식의 비(非)희망적이고 곡조도 슬픈 이런 애국가를 우리의 국가로 부르는 것보다는 그야말로… 희망에 찬 국가를 제정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 애국가를 고쳐가지고 좀 더 활발한 국가를 제정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 해서… 제정을 해보자고 했던 것입니다.”
 
  안 의원은 법안이 처리된 후 5년 이내에 국가를 제정해야 한다는 조항에 유치송 의원이 부정적으로 반응하자 “5년 이내에 제정해야 한다는 부칙은 삭제해도 무방하다”고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내무위 의원들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주공화당 최치환(崔致煥·1922~ 1987) 의원은 “이 자료, 이런 것을 가지고서는 대단히 심사하기에 미흡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며 “이 안건은 ‘보유’를 해두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결국 조시형(趙始衡·1927~1995) 내무위원장도 ‘보유’를 선언했다. 법률용어로 보유(保留)는 안건의 결정을 뒤로 미룬다는 뜻이다.
 
  결국 안동준 의원이 낸 ‘국기·국가 법안’은 6대 국회(1963~67년)를 끝으로 폐기되고 말았다.
 
 
  “새 國歌 만들어 보급하자”
 
《동아일보》 1983년 4월29일자 11면에 실린 ‘國歌를 새로 만들자’는 기사. 國歌제정추진위의 주장을 담았다.
  1970~80년대 사이에도 새 국가 제정 논의가 있었다.
 
  1977년 1월 음악인들 사이에서 “새 국가를 만들어 보급하자”는 주장이 제기됐고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뒤인 1983년 당시 학술원 원로인 안호상(安浩相·1902~1999)씨가 국가제정추진위원회를 설립, 새로운 국가를 제정하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 위원회에 저명인사 5000여명이 동참했는데 여기에는 한글학자 한갑수, 전 국회의원 박병배, 나운영 음악가, 김종갑 사회운동가, 백시영 전 언론인, 유진오·백낙준·이희승·유달영씨 등이 참여했다고 《동아일보》(1983년 4월29일자 11면)는 전한다. 다음은 기사의 일부다.
 
  〈… 지금의 애국가는 ▲우리나라 국토가 만주까지라는 것를 강조해야 하는 데도 “무궁화 3천리”라고 영토를 한정시켜 일제의 반도 사관과 흡사하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고 하여 소멸적이며 하소연하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고 ▲“하느님이 보우하사”라고 하여 의타적이고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고 하여 세계로 뻗어가는 오늘의 기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또 곡도 ▲겨레의 기백이 담겨 있지 않고 고유의 리듬이나 장엄 활기찬 면이 없으며 ▲불가리아 민요와 비슷한(16소절 중 8소절) 서양곡이고 ▲당초 안익태 선생이 국가가 아닌 환상곡으로 작곡한 것이어서 부적합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국가제정추진위 설립의 배경에는 전두환 정권의 입김이 실려 있었다는 시각도 나온다.
 
  일방적인 제정 움직임에 반대 여론이 강하게 일자, 국가제정위 김종갑(金鍾甲) 사무총장은 “현 애국가는 무엇보다 국가로서 제정된 것이 아닌데도 국가가 돼버렸다는 데 문제가 있다”며 “새 국가가 만들어져도 현재의 애국가를 없애자는 것은 아니고 국가로서의 자격만 바꾸자는 것”이라고 물러섰다. 그리고 흐지부지 동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던 것이 1988년 제6공화국이 들어서자 이번에는 국가 상징물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관행적으로 사용되어온 애국가와 무궁화를 ‘공식 국가’와 ‘국화’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총무처는 그해 10월 7일 ‘국가상징 선양사업 발전계획’을 논의했지만, 어떤 영문인지 애국가를 국가로 공식 지정하지는 못했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5월 국내외 행사에서 기존 애국가와 함께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2의 애국가’를 만든다고 발표하였다. “애국가가 국제행사 때 한국을 대표하여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국민적 신뢰를 잃은 김영삼 정권의 민심 만회를 위한 정치적 고려였을까. 그해 말 IMF가 터지면서 ‘제2의 애국가’ 역시 구두선(口頭禪)에 그치고 말았다.
 
 
  20대·21대 국회에서 불거진 애국가 운명
 
2020년 8월 20일 김원웅 광복회 회장이 국회에서 ‘에키타이 안(안익태)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영상 공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놀랍게도 국가 문제가 국회에서 재등장한 것은 20대 국회에서다. 2017년 5월 30일 새누리당 곽대훈(郭大勳) 의원 등 10명이 ‘대한민국 국가법안’을 발의한 것이다. 곽 의원은 “국가에 관한 법적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다”며 발의 이유를 밝혔다. 그렇다면 애국가를 폐기하고 새로운 국가를 제정하자는 주장일까.
 
  곽 의원은 “대한민국 국가를 애국가로 명시화”하는 내용을 법안에 담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애국가를 정식 국가로 채택했음에도 아직도 훈령에 그치고 있는 상황은 정부의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이듬해(2018년) 2월 같은 당 정갑윤(鄭甲潤) 의원 등 14명의 국회의원이 앞서 곽 의원의 법안과 명칭이 똑같은 ‘대한민국 국가법안’을 다시 발의했다. 물론 정 의원도 새로운 국가를 제정하자는 취지가 아니라 애국가를 국가로 정하자는 취지였다.
 
  정 의원이 이 법안을 발의한 이유는 그해 2월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 애국가를 홀대하는 문재인 정부 때문이었다.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국기와 국가에 대한 논란이 적지 않았다”며 “개최국 국가인 애국가가 정치적 이유로 연주되지 못하는 등의 푸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정 의원의 말이다.
 
  “적어도 국가가 개최국이거나 주최국으로 치러지는 국제행사 등에서 애국가 외의 노래 등이 대한민국 국가로 동일시되거나 유사하게 오인되도록 활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도록 규정하고자 했어요.”
 
  그러나 곽 의원과 정 의원의 ‘대한민국 국가법안’은 20대 국회를 끝으로 폐기되고 말았다.
 
  잠잠하던 애국가 문제에 불을 붙인 것은 김원웅 광복회장이었다. 그는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적’을 문제 삼으며 애국가 폐기를 주장했다. 얼마 후 여당 국회의원이 가세했다.
 
  민주당 이해식(李海植) 의원은 2020년 9월 14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외국의 경우 100여 개 나라에서 국가를 바꾼 적이 있다. 프랑스, 미국, 독일을 비롯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진국도 대부분 국가를 바꾸었다”며 김원웅의 주장에 동조했다. 다음은 이해식 의원의 주장이다.
 
  “애국가의 가사는 물론 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곡조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애국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라를 배반한 사람이 만들었다 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으냐, 그런 시각은 존중해야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정세균 총리는 “좀 고민을 해봐야 될 것 같다”면서도 “장구한 기간 동안 국가처럼 이렇게 국민이 불러왔기에 그런 문제를 결정하거나 추진할 때 국민과 충분히 소통하는 절차가 선행되는 게 옳다”고 답했다.
 
 
  ‘친일파 프레임 씌우기’
 
  1948년 건국 이후 국가 제정 혹은 개정 논란이 줄곧 지속되었다. 4·19, 5·16, 5공, 6공 등 정권 교체기 때마다 민심 수습을 위해 국회 혹은 민관(民官) 주도로 추진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애국가를 국가로 명문화하는 데도 실패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친여 인사 주도로 국가 논란은 재현됐다. 정확히는 애국가를 아예 없애자는 것이다.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의 친일 시비가 갑자기 부상했다.
 
  그러나 국민 가슴 속에는 여전히 애국가가 국가로 남아 있다. 애국가를 국가로 생각하지 않는 국민은 드물다. 정부·여당이 힘의 논리로 애국가를 폐기하려 들거나 새 국가를 제정하려 들 경우 엄청난 저항이 불가피하다.
 
  집권 4년 차인 이 정권은 새 국가 제정을 추진할 명분도 동력도 잃어버렸다. ‘친일 프레임 씌우기’로 국가 문제를 거론하면 할수록 실(失)이 더 크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다만 애국가를 계속 흠집 내어 언젠가 다시 국가 제정을 들고나올 게 뻔하다. 이를 막기 위해선 애국가를 국가로 법률로 지정해야 한다.
 

  인터뷰
  제헌국회 당시 애국가 논란을 연구한 이영일 전 의원
 
  안익태는 친일파 아냐, 亡國 음악가일 뿐”
 
   제11·12·15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영일(李榮一·82) 전 의원은 최근 연구논문 〈제헌국회와 안익태의 애국가 문제〉를 썼다. 논문 발표에 앞서 《월간조선》에 보내왔다. 이 전 의원은 논문을 작성하며 친북 주사파들의 현대사를 보는 사관(史觀)이 새삼 걱정스러웠다고 한다.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라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논리를 답습하면서 국가 상징물인 국기와 국가로서의 애국가를 거부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만시지탄이지만 애국가 유래에 대해 국민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도록 계몽할 필요가 있었기에 논문을 썼다”고 말했다.
 
  ― 논문 〈제헌국회와 안익태의 애국가 문제〉를 쓰면서 무엇을 느꼈나.
 
  “저는 작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이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을 친일파로 단정하면서 ‘민족반역자가 작곡한 애국가를 부르는 나라가 이 나라 말고 그런 나라가 어디에 있겠느냐’고 힐난(詰難)했다는 기사를 읽고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2년 전 겪은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광주 학생운동 발상지이고 제 모교인 광주일고(光州一高)에서 교가 작곡가 이흥렬 선생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는 이유로 당시 전교조에 속하는 교장이 앞장서고, 광주 지역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일을 하는 김 모 동문이 제휴해 교가 바꾸기에 나섰다.
 
  이들은 동문들의 압도적인 반대에도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가 김종률에게 위촉, 교가 고치기를 강행했다. 안익태 선생을 친일파로 몰면서 대한민국 애국가를 뜯어고치려는 음모가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왔다.”
 
  ― 안익태의 애국가를 보는 제헌국회 의원들의 태도는 어떠했나.
 
  “1948년 9월 9일 열린 제헌국회의 본회의는 김약수 부의장의 사회로 ‘국기와 국가에 관한 건의안’을 토의했다. 이날 다수의 의견은 임시정부가 정한 대로 국기는 태극기로, 애국가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유지하되 남북한 통일정부가 구성될 상황이 조성되면, 국기와 국가 문제를 재론 결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 제헌국회가, 통일이 될 때까지 국가와 국기를 새로 제정하지 않기로 한 배경은 무엇인가.
 
  “그 배경을 당시 속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하나는 태극기와 애국가가 독립운동 시기에 민족을 단결시키는 상징이 되어왔다는 사실을 중시한 것이다. 태극기와 애국가는 남북한 동포가 역사 속에서 공유해왔기 때문에 이를 버리면 통일을 이룩할 공통분모를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다. 다른 하나는 정부의 정통성을 둘러싸고 분단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기 위한 측면도 간과할 수 없었다. 김일성은 1946년 9월 27일 작가들을 모아놓고 임시정부가 사용을 승인한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의 가사 내용이 인민들의 감정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수적이며 남의 나라 것을 따다 만든 곡으로 시원치 않다면서 애국가를 새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결국 박세영 작사, 김원균 작곡으로 애국가를 새로 만들었다.
 
  다만 발표 시기를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미뤘다. 그것은 국토 분단의 책임이 자기들에게 있지 않고 남한에 전가하려는 저의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북한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8년 9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헌법을 채택한 뒤 9월 9일 인공기(人共旗)와 애국가를 채택, 부르기 시작했다.”
 
 
  “식민지 시대보다 더 나은 國歌 가질 필요도 있어”
 
한국을 떠난 지 25년 만인 1955년 4월 안익태가 귀국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게 한국 최초의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 통일이 되면, 기존의 태극기와 안익태의 애국가 대신 새로운 국기와 국가를 ‘반드시’ 만들어야 하나.
 
  “북한은 자기들이 독자적으로 애국가를 만들었지만 대한민국은 제헌국회의 태도를 존중, 통일될 때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채택한 애국가를 국가에 준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분단 상황이 장기화되어 한반도에 주권국가에만 가입을 허용하는 국제기구인 유엔에 각기 회원국으로 가입한 두 개의 주권국가가 남북한에 병존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감안, 애국가를 변화된 현실의 시대정신에 맞게, 가사와 선율을 새롭게 바꾸자는 논의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국가 제정 논의가 몇 차례 있었지만 국가를 공식적으로 제정한 일이 없었다. 흔히 국가나 학교의 교가는 속성상 제정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기능 음악’이라고 부른다.
 
  기능 음악에서 중요한 것은 가사가 70%로 가장 중요하고, 선율이 30% 정도의 비중을 지닌다. 또 국민이 따라 부르기 쉬워야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통일이 미결 상태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세계열강의 반열에 근접할 만큼 발전했다. 특히 문화적으로는 한류(韓流)의 위력이 세계인의 공감을 얻고 있는 수준임을 생각할 때 식민지 시대보다 더 나은 국가를 가질 필요도 있다.”
 
  ― 좌파들이 안익태에게 친일 프레임을 씌우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안익태는 14세 때 서양음악을 배우기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오른 이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학습과 연주의 무대를 옮기면서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그가 고국을 방문한 것은 1955년 무렵이었다.
 
  그는 해외에서 스페인 여성과 결혼해 살면서도 유년 시절의 정서를 회상하며 한국의 정서를 되살리는 18편의 악곡을 남겼고, 특히 미국 유학 시절인 1935년에 애국가를 작곡했다.
 
  일부 독일 유학생 중에서 안익태가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독일제국음악협회 회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들추어 ‘친나치 분자’로 비난했고, 1942년 만주국 탄생 1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만주환상곡〉을 작곡・연주했다고 해서 친일파로 몰았다.
 
  그러나 독일제국음악협회 회원이 된 것은 20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 Strauss)가 안익태의 지휘 능력을 평가, 자기의 제자로 삼으면서 입회를 추천해주었기 때문이다. 또 이 협회의 회원이 되어야만 독일에서 음악인으로 생계를 꾸릴 자격을 갖기 때문이다. 안익태는 망국(亡國) 음악가였다.
 
  오늘날 국내의 친북 좌파들은 자기 편이 아니면 친미나 친일파로 단정, 반민족 매국세력으로 규탄한다. 친북 좌파인 음악가 윤이상(尹伊桑)은 민족세력이고 안익태는 친일・친나치 분자로 매도하는 식이다. 국내에서 안익태를 옹호하거나 변명하면 그는 토착왜구로 몰린다. 여기에서 민족세력이라 함은 ‘우리 민족끼리’의 민족을 뜻한다.”
 
 
  “좌파들이 남한 내 존립 기반을 만들려 친일파 프레임 공작”
 
  ― 정세균 국무총리는 2020년 9월 14일 대정부 질문에서 “안익태 선생의 친일 전력이 확정되면 애국가 변경을 해야 한다”는 민주당 이해식 의원 주장에 대해 “그런 주장도 일리가 있다”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정 총리는 친일문제가 갖는 정치적 의미에 관하여 충분한 연구가 없는 것 같다. 일제강점기나 한일합방 전에는 친일파가 있었지만 해방 후로는 친일파가 있을 수 없고 있지도 않다. 지금 발전경쟁 면에서 일본이 한국을 아직도 앞서고 있는 부문이 많지만 그래도 몇 군데서는 우리가 일본을 앞선다. 1인당 GNP 격차도 많이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친일파는 있을 여지가 없다.
 
  그런데 왜 좌파들은 걸핏하면 친일파 문제를 들고나오는가. 6·25동란이 끝난 후 한국 사회가 반공민족주의 사회로 그 정체성(正體性)을 확립하면서부터 좌파들은 이 땅에 발붙일 소지를 상실했다. 북한에 동조하는 좌파세력들이 남한 내에 존립할 기반을 만들고 그들이 민족세력으로 행세할 근거를 만들어야 했다. 이 작업이 바로 친일파를 만들어내는 공작, 다시 말해 친일파 프레임 씌우기 공작이었다.
 
  이 공작으로 나온 것이 《친일인명사전》이며 이 문서가 나오자 역대 좌파 정권들은 제주 4·3보고서와 더불어 이를 합법화시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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