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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발굴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을 놓은 과학자 1세대

李承晩이 씨를 뿌리고 朴正熙가 꽃을 피우다

글 : 홍하상  논픽션 작가  hasangstor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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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한국 미군 장교부인회의 도움을 받아 인재들을 유학 보내다
⊙ 박정희, 해외 과학자들 유치해 科學立國 초석을 다지다
⊙ 이휘소 박사도 유치 대상이었으나…
⊙ 애국심만으로 일하던 해외 유치 과학자들의 희생

홍하상
전경련 교수 역임. 저서 《이병철 대 정주영》 외 30여 권. 일본, 중국, 대만, 태국 등에서 저서 12권 번역 출간
1966년 2월 3일 KIST 준공식.
  1947년 8월 14일, 우리나라에서 선발된 젊고 유능한 학생들 30명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들은 미군 화물선 모턴호(MORTON)를 타고 인천항을 떠났다. 그들의 여권은 미 군정청이 발행한 것이었다. 그들이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하버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때 틈틈이 하버드 공대, MIT 공대 등을 찾아가 미국이라는 거대강국의 과학과 공업 연구의 실상을 보았다. 그는 그때 국가가 발전하려면 과학과 공업이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다. 후일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철강 산업, 원자력 산업을 일으키려 한 것은 이런 연유였다.
 
  당시 한국 최초의 유학생은 다음과 같다.
 
  윤일선(대한적십자 총재 역임), 고병간, 닥터송(성명 불상), 정대위, 전성천(전 공보처장·목사), 최영동, 최인규(전 내무부 장관), 이기택, 이규택, 송전무, 현만규, 이상호, 김은후, 현영학(전 이화여대 교수·신학자), 윤병학, 정선모, 조자용(건축가·에밀레박물관장), 정기석, 정명하, 김도식, 현학봉, 배영, 한인근, 김제직, 김영희, 고봉경(서울여대 설립), 김순원, 김선희(조자용 부인·경북대 영문과 교수), 안토니, 문덕순씨 등.
 
  이분들은 돈이 있어서 유학을 간 것이 아니고, 한국에 나와 있던 미군장교부인회의 주선과 후원으로 미국의 대학에 입학했다. 한국 미군장교부인회는 십시일반 돈을 모아 유학생들을 지원했고, 또한 동시에 학생들이 미국의 각 주별 장교부인회로부터 도움받을 수 있도록 알선했다. 정부 수립 이전이어서 한국 정부는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유학을 간 한국의 엘리트 젊은이들은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마치고 10명이 귀국했고, 20명은 미국에서 생활하다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해방 이후 한국의 최초 미국 유학생들이었다. 그 후 정부가 수립되고 몇 차례 유학생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미국이나 독일로 보내졌다고 하는데 자료가 파악되지는 않는다.
 

  1956년 들어 이승만 정부는 비교적 조직적으로 유학생을 파견한다. 그해 미국으로 건너간 유학생들은 여전히 미군장교부인회의 도움을 받았고, 그중 몇 사람이 물리학자 이휘소, 김훈철(미시간대 조선학 박사) 등이다. 그해에 독일 유학생도 선발했는데 독일 유학생의 경우는 좀 달랐다. 독일의 경우는 대학교 학비가 무료이므로 정부가 비행기표를 사주었고, 또 하나는 정부의 공기업이 월급을 주었다는 것이다. 즉 산업은행의 경우 산업은행에 입사한 젊은이 중에 독일유학선발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독일 유학기간 내내 월급을 지불했다. 그 월급은 유학생 본인이 쓰라고 준 것이 아니라 고향에 남아 있는 부모형제의 생활비로 준 것이다. 유학생 대부분이 가난했으므로 그들이 유학을 가고 나면 부모형제들의 호구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김재관 박사다. 김재관은 서울대 공대 기계과를 졸업한 후 산업은행에 입사했는데 독일국비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해서 독일 뮌헨공대로 유학했다. 그는 뮌헨공대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독일의 유수한 철강기업인 데마크에서 근무하다가 12년 만인 1968년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승만 정부의 유학생들이었다. 또한 미국에 유학갔던 윤여경(유타대 경제학 석사, KIST 정보분석실장 역임), 김훈철(KIST 조선선박 실장) 등도 그 무렵 귀국한다.
 
  즉 이승만이 뿌린 씨앗이 박정희(朴正熙) 정부 때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해외 유학생들, KIST로 모이다
 
최형섭 KIST 초대소장.
  1964년 말, 최형섭은 청와대로부터 국가 발전을 위해서 공업과 과학에 관한 브리핑을 해달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그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장관들 앞에서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 방향, 과학교육 개편 방안, 연구소 설립과 시스템 구축, 운영 방향 등을 브리핑했다. 그리고 한국에 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해야 하며 그 모델은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처럼 연구는 물론 기업의 수탁연구를 시행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발도상국은 산업현장의 요구에 맞춰 생산에 바로 적용될 수 있는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의에 따라 대통령은 그에게 KIST 설립을 지시하고 초대소장을 맡긴다.
 
  최형섭은 ‘한국과학기술의 개척자’ ‘과학행정의 달인’ ‘과학과 정부의 매개자’ ‘과학기술의 전도사’ 등으로 불릴 정도로 금속공학자이면서 대한민국 과학기술 연구체계의 기본 틀을 세운 과학행정가였다. 최형섭이 고민한 것 중 첫 번째는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과학자들을 유치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육성법안’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그 핵심을 이렇게 정리했다.
 
  1. 정부가 연구소의 건설비, 운영비, 운영기금을 출연하고
  2. 정부는 연구소가 필요로 하는 국유재산을 무상으로 양여 또는 대여할 수 있으며
  3. 연구소가 필요로 하는 재원은 한국과 미국 두 나라 정부가 부담하지만 연구소는 이에 대한 정부의 회계 감사나 사업 계획의 승인을 받지 않는다.
 
  즉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놓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 행정부 및 관계된 관료들의 저항은 엄청났다.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와 청와대는 그러한 내용을 강력하게 밀어붙여 국무회의 의견을 거쳐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의 반발도 거셌다.
 
  1965년 9월에 열린 정기국회는 이 법안을 심의했으나 재경위 소속 야당 국회의원들이 반발했다. 연간 수십억원에 달하는 정부 돈을 받게 되는 연구소에 대해 국회나 정부가 회계 감사를 할 수 없고, 사업계획서마저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냐는 것이었다.
 
  정부는 야당 의원들의 강력한 반발을 일부 수용하여 제5조 사업계획서는 회계 연도별로 주무장관의 승인을 받기로 하는 조건으로 1965년 12월 6일 국회를 통과시켰다. 이 법률은 1966년 3월 30일 일부 수정되어 법률 제1917호로 국회를 통과한다. 개정된 이 법률안은 제5조에서 “연구소의 사업계획서는 정부의 승인이 필요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1966년 2월 3일 KIST 준공식
 
KIST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최형섭 KIST 소장.
  홍릉 임업시험장 내에 KIST 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최형섭은 서울 중구 명동에 있는 YWCA 건물 내 빈 사무실을 하나 얻어 KIST의 운영방안 등을 연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 최형섭에게 KIST 소장의 임명장을 수여하니 들어오라고 하였다. 박 대통령은 최형섭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예산을 얻기 위해 경제기획원에 들어가지 마라.
  둘째, 절대로 인사 청탁을 받지 마라.
 
  당시에는 취직자리가 없어 정부의 주요 기관장들이나 정치가들이 인사 청탁을 많이 하던 때였다. 그렇게 당부해놓고도 박 대통령은 걱정이 되었던지 “최형섭 박사는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래도 혹시 힘든 일이 있으면 나에게 말해달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장 임명장을 받기가 무섭게 자기 사람을 써달라는 청탁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최형섭은 대통령의 ‘빽’을 믿고 곧이곧대로 밀어붙였다. 어느 날 정부의 고위직에 있던 사람이 최형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KIST에서 내년 예산을 10억원 신청했다는데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2억원을 삭감하여 다른 데로 돌려야겠으니 양해해주십시오.”
 
  상대는 경제기획원의 핵심 실세였다. 최형섭은 난감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에서 2억원을 삭감해달라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2억원 삭감안은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보고되었다. 그러자 대통령은 경제기획원의 실세에게 “KIST의 예산이 2억원 삭감되었다는데 사실이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경제기획원의 실세는 “소장과 의논해서 그쪽의 양해를 얻어 삭감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다시 10억원으로 집행하시오”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으므로 경제기획원의 실세도 어쩌지 못했다. 그 후로 KIST의 예산은 어느 누구도 삭감하지 못했다.
 
  연구의 자율성이 확보되자 연구원들은 열심히 일했다. 24시간 불이 꺼진 적이 없었다. KIST의 연구동, 행정동, 주택단지, 부대시설은 1966년 10월 착공식을 한 이후 3년 만에 완공되었다.
 
  박 대통령은 공사 현장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자신이 직접 공사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현장에서 일하는 작업자들과 일일이 악수했다. 심지어 그들에게 돈 봉투까지 쥐여주면서 그들의 사기를 북돋워주었다. 박정희는 한일협정, 베트남 파병, 새마을운동, 제1차 5개년 건설계획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음에도 KIST와 관련해 엄청난 열정을 보였다. 자신의 침실에 건설현황 계획표를 차트로 만들어 걸어놓고 수시로 공사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도 했다.
 
 
  3가지 조건
 
  부지가 확정되었다고 끝은 아니었다. 연구소 건물도 지어야 하고 실험 실습실도 만들어야 하며, 그보다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 인재 확보를 위해서는 최형섭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최형섭은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로 건너갔다. 당시 바텔기념연구소에는 한국인이 많이 근무하고 있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 일찍이 미국이나 유럽에 유학한 우리 과학자들이 바텔기념연구소 초빙으로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바텔연구소는 자신들의 연구소에 근무하는 한국인 인사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있는 800여 명의 한국 출신 연구원 명단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최형섭은 바텔기념연구소 인사처에 부탁을 거듭하여 그들의 명단과 이력서를 확보했다.
 
  일단 당장 급하게 모셔와야 할 연구원은 80명이었다. 최형섭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최형섭이 그들에게 제시한 조건은 세 가지였다.
 
  1. 절대적으로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한다.
  2. 재정적으로 충분히 안정성을 보장하겠다.
  3. 보람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봉급, 주택 등을 확실하게 제공하겠다.
 
  그는 이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한국 출신 연구원들을 인터뷰하러 다녔다.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없었다. 강행군이었다. 그렇게 해서 1차로 30명을 선발했다. 다시 이들을 대상으로 2차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이어 3차 인터뷰까지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18명이 선정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초기 유치 과학자들
 
1974년경 KIST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설명하는 김재관 박사(당시 KIST 제1연구실장).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넨 김재관의 <한국철강산업계획안>.
  김재관(독일 뮌헨공대 철강금속학 박사), 김훈철(미국 미시간대 조선학 박사), 윤여경(미국 유타대 경제학 석사), 한상준, 이경서(MIT 기계학 박사), 양제현, 정만영, 정원, 천병두, 권태완, 안영옥(미국 뒤퐁 근무), 조종수, 현경호, 장경택, 남준우(기계학 박사, 미국의 강관회사 근무), 윤용구, 최영복, 박송백 등이다.
 
  이들은 모두 책임연구원급 연구자로 임명되었고, 봉급 외에 주택이 제공되었다. 봉급은 당시 서울대 교수 월급의 3배로 대통령 월급보다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속한 미국의 기관에 비해서는 30% 수준이었다.
 
  첫 번째로 유치한 과학자는 철강의 김재관 박사였다. 김재관은 세계 최대 철강회사 연구원, 그것도 종합기획실에 근무하기에 충분한 봉급을 받고 있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위해 매일매일을 준비하던 그에게는 오히려 기다려오던 시간이었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더 나아가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돌아갈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불러들인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 18명의 연구원으로 초빙을 시도했지만 무산된 사람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이휘소 박사였다. 이휘소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유력시되던 인물이었다. 이휘소는 당시 연구가 너무 바빠 만날 시간이 없어 편지로 의사를 보냈다. 그 편지에서 이휘소는 “KIST는 기초연구보다는 당장 국가 발전에 필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인재를 뽑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사양하면서 “나중에 기초과학 연구가 필요할 때는 자신을 반드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최형섭은 유타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고 있던 우리나라 화학계의 거두가 되는 이태규, 훗날 삼보컴퓨터를 창업한 이용태 등을 만났다. 그러나 그 두 사람도 당시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아 어렵다고 고사했다. 훗날 이용태는 KIST에 합류한다.
 
  최형섭이 가장 고민한 문제는 봉급 외에 주택 문제였다. 초빙한 연구원 대부분은 10년 이상 외국에서 거주한 탓에 한국에 돌아와도 집이 없었다. 결국 그들에게 사택을 지어 지금으로 치면 30평 정도의 아파트를 한 채씩 나누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에서 유치한 18명의 과학자들이 속속 귀국했다. 최상일(화학), 김영덕(물리학), 김병진(화공학), 현경호(원자력학), 박용구 등이며, 여기에 전자공학의 김완희 박사가 합류했다.
 
  이는 신동식 당시 청와대 비서관 증언이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방문
 
1964년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에 차관을 빌리러 갔다가 뮌헨에서 열린 한국 유학생들과의 다과회에 참석했다. 그때 젊은 과학자 한 사람이 대통령에게 국가가 공업을 발전시키려면 제일 먼저 철강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설명하고 대통령에게 <한국 철강산업 계획안>이라는 문서를 건넸다.
 
  그의 이름은 김재관. 국가의 공업을 일으키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금, 그다음이 철강공장의 건설이다. 제철소가 없으면 건물, 공장, 조선, 기계, 무기 등 어떤 것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건넨 보고서는 훗날 포스코를 건립할 때 밑바탕이 된다.
 
  대통령은 철강전문가이자 한국 최초의 뮌헨공대 기계·금속학 박사인 김재관을 불러들였다. 김재관은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철강회사인 데마크에 근무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뮌헨에서의 만남 이후, KIST가 설립되자 직접 최형섭 소장에게 김재관 박사의 유치를 요청했다. 18명의 유치 과학자 중 유럽에서 온 과학자는 김재관 박사가 유일했다. 김재관은 KIST 설립에 있어 최형섭 소장 다음으로 중요한 제1연구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김재관 박사에 대한 기대와 믿음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결국 대한민국 산업화의 초석을 마련하고, 중화학공업을 일으키는 중요한 결실로 이어지게 된다.
 
 
  “나, 朴이요”
 
  훗날 윤여경 박사는 김재관 박사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참여한 사람들 중, 김재관 박사는 달랐어요. 김재관 박사는 이미 오기 전부터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준비하고 온 사람이었어요. 이미 한국의 산업화에 대한 계획과 꿈을 가슴 속 깊이 담고 있던 분이었지요. 한국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KIST에 대한 관심은 각별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거나 찾아왔다. 김재관이 전화기를 들어보면 뜻밖에 상대방은 박 대통령이었다.
 
  “나, 박(朴)이요.”
 
  난데없이 걸려온 전화에 “누구시냐”고 물었다.
 
  “나 박정희요.”
 
  대통령은 소탈했다. 비서관을 통해 지시할 수 있는 일도 직접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격려 차원이었다.
 
  김재관의 자리는 책상 아래위 할 것 없이 종이쪼가리들이 천지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가 참고해야 될 자료들이었다. 신기한 것은 그 파지더미 속에서도 자신이 필요한 서류들을 즉각즉각 찾아낸다는 것이었다.
 
  KIST 과학자들은 밤이고 낮이고 없었다.
 
  “집이 코앞인데, 이게 뭐 하는 짓들이냐?”
 
  과학자들이 집조차 들어가지 않고 밤낮없이 일만 하자 아내들의 불만이컸다.
 
  박 대통령은 때때로 KIST 연구원들을 한정식집으로 불렀다. 한정식집에 가보면 그야말로 술상이 떡 벌어지게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긴장이 풀려서인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코피를 쏟는 연구원들이 많았다. KIST 연구원들은 대부분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음식을 들기도 전에 코피를 흘리며 드러눕는 연구원이 있어 안쓰러웠다.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월급이 미국에서 받던 봉급의 3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애국심을 가지고 일했다. 그렇게 일하다 보니 일찍 세상을 떠난 과학자들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KIST 설립 후 3년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대화를 직접 나누면서 그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었다. 건설 당시에는 현장에 직접 나와서 건설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주는 등 신경을 많이 썼다.
 
  또한 박 대통령은 권력이 있는 국가기관의 부당한 간섭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KIST가 요구하는 예산은 1원 한 푼 삭감하지 않고 모두 지급하도록 경제기획원에 명령했다.
 
 
  일하는 척만 하는 공단
 
  김재관이 1968년 여름 한국으로 돌아온 그해 11월 미국의 유타대학에서 경제학 MBA를 마치고 미국의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윤여경도 귀국했다. 최형섭은 김재관과 윤여경 두 사람에게 “두 달간 유급 휴가를 줄 테니 한국의 기업체들을 돌아보고 오라”고 지시했다.
 
  한국의 기업 실정을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사업계획을 짜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대뜸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분의 봉급이 들어 있었다.
 
  이미 KIST 오기 3개월 전부터 자신의 봉급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윤여경은 KIST의 경제분석실장이 되어 각 부서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계획의 경제와 타당성을 분석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구로공단, 부평수출공단을 시찰했다. 관찰력이 뛰어난 박정희는 대번에 공단이 일하는 척만 할 뿐 실제로는 성과가 없다는 것을 간파했다.
 
  “공단이 놀고 있으면서 맨날 융자 지원만 해달라고 하고 있군. KIST를 통해 기업을 철저히 진단한 후 보고하라”고 당시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는 최형섭 소장에게 하달되었다. 심문택 연구담당 부소장을 총책임자로 한 공장 진단반이 만들어졌다. 최형섭은 모든 연구실 요원은 공단 진단반에 협조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윤여경의 경제분석실 직원이 현장에 투입되었다. 각 연구소의 실장들도 KIST 버스를 타고 현장 방문에 동행했다. 구로공단, 부평수출공단에 있는 40여 개 공장을 모두 방문했다.
 
  공장 대부분은 가발과 와이셔츠를 만들고 있었다. 그나마 주문이 없어서 반 이상은 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구로공단에 있는 대한광학과 부평공단의 세정실업은 그런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대한광학은 일본으로부터 OEM(주문자부착상표)으로 일감을 받아 ‘마미아’라는 상표로 카메라와 쌍안경을 만들고 있었다.
 
  세정실업은 기타를 만드는 회사였다. 가발과 와이셔츠 공장들이 놀고 있는 와중에도 두 회사는 제법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공단 진단반은 3개월 동안 대한광학과 세정실업 두 회사를 모델로 하여 <수출공단 경영합리화 방안>을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했다. 대통령에게 보고할 보고문서는 각 연구실장들의 협조하에 만들어졌다. 책임자는 윤여경 실장이었다. 윤여경이 만들어놓고 보니 무려 3시간에 걸쳐 보고해야 할 긴 내용이었다.
 
 
  ‘청와대 박사 윤여경’
 
KIST 초기를 회고하는 윤여경 박사.
  윤여경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최형섭에게 “보고서 내용을 잘 살펴보고 중요한 내용을 잘 숙지하십시오”라고 건의했다. 자신이 만든 내용이고, 경제학적 내용이라 이과 출신인 최형섭 소장이 은근히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최형섭 소장은 “당신이 만들었으니 당신이 직접 보고하시오”라고 일축했다.
 
  대통령에게 점수를 딸 기회였으나 최형섭은 담당자의 권한과 입장을 최대한 존중해서 당사자에게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대통령은 보고 내용을 끝까지 진지하게 듣는다. 보고하는 동안 질문이라는 것은 일절 하지 않는다. 다만 듣는 도중에 대통령의 눈이 가늘어지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 대목에서는 다시 알아듣게 상세히 설명하라. 대통령은 알아듣지 못하면 바로 메모를 시작하고 보고가 끝난 이후에는 엄청난 질문이 쏟아진다. 그렇게 되면 보고는 망치는 것이다”라고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요령까지 알려주었다.
 
  윤여경은 최 소장이 가르쳐준 대로 차트를 넘기며 보고했다. 장·차관들이 배석한 보고는 잘 끝났다.
 
  “역시 KIST가 낫구먼.”
 
  대통령은 흡족해했다.
 
  어느 날 윤여경이 박정희 대통령과 마주쳤을 때 그의 보고에 만족했던 박 대통령이 ‘점심이나 같이 하지’ 하면서 그를 붙들었다.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자 박 대통령이 윤여경 실장에게 “윤 박사, 윤 박사 내 옆에 앉아”라고 말했다.
 
  윤여경은 유타대학에서 MBA로 석사까지만 공부한 사람이다. 윤여경이 말했다.
 
  “각하, 저는 박사 학위가 없습니다. 이제 제 일도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으니 나가서 마저 학위를 마치겠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이 말했다.
 
  “나라에 할 일이 많은데 가기는 어딜 가? 당신은 출국 금지야.”
 
  그러자 당시 경제기획원 김학렬 총리가 거들었다.
 
  “각하, 이 자리에서 윤 실장에게 박사 학위를 주시지요.”
 
  그러자 박 대통령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당신은 오늘부터 청와대 박사야. 대통령이 직접 박사 학위를 주는 거야.”
 
  그날 이후로 윤여경은 ‘청와대 박사’로 불렸다.
 
  윤여경 박사는 훗날 김재관 박사를 도와 포항종합제철을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쓰러진 과학자들
 
  KIST 설립 초기 대거 한국에 입국한 과학자들은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거의 매일 새벽 3~4시까지 일하는 강행군이었다. 정부가 전폭적으로 시설이나 장비를 지원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열악한 환경이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보니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최상 박사: 기술정보실장을 역임하다 백혈병으로 46세인 1973년에 별세
  ▲장경택 박사: 금속가공실장. 42세인 1975년 과로로 별세
  ▲현경호 박사: 원자력연구소 근무. 임파선암으로 53세인 1980년 별세
  ▲정원 박사: 한국표준연구소 부소장, 49세에 과로로 별세
  ▲천병두 소장: KIST 도약을 위해 일을 하다가 1986년 암으로 별세
 
  그들의 가슴 속엔 오직 국가를 잘살게 하겠다는 애국심뿐이었다. 그들의 가슴 속엔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잘사는 국가로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은 모두 그러했다.
 
  그들에게는 복잡한 역사가 있었다. 6·25전쟁 중 대학에 들어갔고, 전쟁 중에 판자로 지어진 판자촌에서 강의를 들었다.
 
  도도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미약하지만 강한 의지를 가진 한국인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개인들이 결국 국가를 움직였다. 그들은 KIST와 더불어 한국의 철강산업, 자동차산업, 원자력 등 국가의 주요 산업을 만들었고, 한국이 세계적으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한국의 과학, 공업 발전의 초석을 놓은 1세대는 거의 대부분 작고하거나, 이제 몇 명만 생존해 있다. 기록도 남은 게 별로 없다. 먼 훗날을 위해 여기 기록을 남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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