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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안익태의 親日·親나치 의혹에 대한 후손의 반박

“안익태는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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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회·김원웅 광복회장에게 민·형사 소송 준비… “안익태에게 親日·親나치의 멍에를 덧씌웠다”
⊙ “큰아버님(안익태)은 만주를 우리 땅으로 생각해 ‘만주 환상곡’ 작곡… 우리 뿌리인 만주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강산을 노래”
⊙ 日 외교관 에하라 고이치는 일본의 독일정보망 총책임자, 안익태는 ‘스페셜 에이전트’ 의혹… “구체적 물증 없는 허위사실”
⊙ 애국가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 의혹… “불가리아 정부에 표절 입장 묻겠다”
안익태 조카인 안경용씨.
  정세균 국무총리는 안익태(安益泰·1906~1965)가 작곡한 애국가의 곡조 변경을 “검토해보겠다”고 밝혔다. 지난 9월 14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다. 사족을 붙였다. “(친일 여부가 확인된다면) 국민들과 충분히 소통하고 의논하는 절차가 선행되는 게 옳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안익태 유족이 친일·친나치 의혹 규명을 위해 모국(母國)을 찾아왔다. 스페인에 사는 직계(直系)후손이 아니라 안익태의 조카가 나섰다. 안경용(安京龍·70·미국명 데이비드 안)씨는 안익태 막냇동생인 안익범(安益範·작고)의 장남이다. 안경용씨는 1982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현재 캘리포니아주에서 ㈜리모트컨트롤시스템사(社)를 운영하고 있다.
 
  안익태는 아버지 안덕훈(安德勳)과 어머니 김정옥(金貞玉) 사이 7형제 중 셋째다. 첫째 안익삼(安益三·일본 조치대 독문과 졸업)의 아들 안경철(작고)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둘째 안익조(安益祚·도쿄제대 의과 졸업)의 아들 안수남(작고)은 《경향신문》과 《중앙일보》 기자를 지냈다. 넷째 안익관(安益寬)과 다섯째 안익소(安益素)는 일찍 작고해 후손이 없다. 여섯째 안익복(安益福·작고) 역시 아들이 없고 일곱째 안익범은 슬하에 2남2녀를 뒀다. 장남이 안경용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7형제 집안의 장자인 셈이다.
 

  안씨는 지난 8월 15일 광복절 당시 김원웅 광복회장의 기념사를 듣고 며칠간 잠을 자지 못했다.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모국행을 결심했다. 2주간 자가격리 후 기자와 만났다.
 
  그는 삼촌 안익태가 1955년 3월 19일 오후 2시30분 서울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귀국할 때를 기억하고 있다. 겨우 여섯 살인데도 말이다. “서울 계동에 살 때다. 버스가 비포장길을 달렸는데 어찌나 멀던지 차멀미를 했다”고 한다. 또 1977년 7월 6일 오후 3시40분 선생의 유해가 KAL기 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할 때도 현장에 있었다. 스물일곱 살이던 그가 영정을 모셨다.
 
  당시 공군군악대의 추도가와 애국가가 울려 퍼졌고,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기남 대주교와 심흥선 총무처 장관이 함께했다. 선생의 유해가 경찰 사이카의 호위 속에 국립묘지 봉안관으로 옮겨지자 봉영(奉迎)위원회 부위원장인 모윤숙 시인이 헌화와 묵념을 한 기억도 안씨 뇌리에 스친다.
 
 
  ‘親日·親나치’라는 멍에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安益泰·1906~1965).
  안경용씨는 김원웅 광복회장을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준비 중이다. 안익태에게 친일·친나치라는 멍에를 덧씌웠다는 이유다.
 
  그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만 음악 전공자는 아니다. 안익태의 작품과 과거 행적의 시시비비를 가릴 만큼 깊이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국내 학계・법조계 인사들과 머리를 맞댈 생각이다.
 
  “미국에 살며 평소 한국 정치에 관심이 없었어요. 국내 뉴스도 거의 보지 않았죠. 김원웅 회장의 광복절 기념사를 듣고 며칠 잠을 못 이뤘어요. 그의 말 중에 안익태에게 한 ‘민족 반역자’란 말이 제 귀에 박혔어요. 아버지(안익범)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셨을까요. 제 나이 일흔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일을 매듭짓고 싶어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재능 있는 음악가들은 살길을 찾아 미국과 영국 등지로 떠났으나 안익태는 나치 독일에서 음악적 재능을 꽃피웠다. 1943년 동양인 최초로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했다. 일부 학자는 ‘아리아인도 아닌 안익태가 어떻게 유럽을 휩쓸던 나치 독일의 심장 베를린에서 음악적 성공을 이뤘을까’ 하는 의문을 단다. 친일을 넘어 친나치로 안익태의 영혼을 검게 물들일 기세다. 급기야 정세균 국무총리가 “친일 여부가 드러나면 애국가 변경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일부 언론과 학자들이 관련 의혹을 부추기며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사실들을 한 방향으로 구획을 지으려 한다. 어쩌면 몇 년 후에 한국인은 우리의 애국가를 부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선열의 피와 땀이 밴 국가(國歌)를 영영 잃을지 모른다.
 
  안경용씨의 말이다.
 
  “친일·친나치 행위를 안익태가 했다면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안익태는 친일·친나치 행위를 하지 않았어요. 결백한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범죄입니다. 마녀사냥과 다를 바가 없어요. 허위와 억지로 죄 없는 고인을 다시 사형시키고 있지요. 설령 안익태가 애국자는 아닐지 모르나 결코 친일·친나치는 아닙니다.”
 
 
  “거지꼴로 돌아왔다”
 
  ― 학자나 전문가가 아닌 유족으로서 어떻게 ‘친일·친나치’라는 멍에와 싸우시겠습니까.
 
  “큰아버님(그는 안익태를 ‘큰아버님’이라 불렀다. 그리고 첫째 안익삼을 ‘큰큰아버님’이라 칭했다)이 1955년 한국에 오셨을 때가 떠오릅니다.
 

  가방을 드셨는데 무척 낡은데다 굉장히 두꺼웠어요. 아마도 악보를 넣은 가방이겠죠. 그리고 구두가 다 찢어졌어요. 아버지(안익범)는 ‘거지꼴로 돌아왔다’ 속상해하셨죠. 아버지는 이북 사람(평양)이라 표현이 굉장히 직설적입니다. 우리 집안 사람이 다 그래요.
 
  아버지가 큰아버님에게 ‘구두 한 벌 사드릴까요?’ 하니 ‘아, 됐어, 됐어!’ 하시며 손을 내저었죠. 굉장히 신경질적이고 직선적이며 성격이 급하셨어요. 일찍 일본으로 건너갔고 외국 생활을 오래 하시다 보니 한글이 서툴렀어요. 그런데 그 양반(안익태)은 우리집에 와서도 항상 일본을 왜놈이라 불렀어요. 통상적으로 우리 집안 사람들은 왜놈이라 불렀습니다.
 
  물론 일본인과 개인적으로 친할 수 있겠지요. 미워하는 대상은 일본 군국주의 때 조선을 침탈하고 징병·징용을 한 사람들이 미운 것이지요.”
 
 
  “만주를 우리 땅으로 생각”
 
지난 8월 20일 이해영 국가만들기시민모임 공동대표가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에키타이 안(안익태)’의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관련 동영상을 공개하며 영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 당시 평양 사람들은 만주(滿洲)를 어떻게 생각했나요.
 
  안익태는 1942년 9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에서 4악장으로 된 ‘만주국 축전곡’을 지휘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때 연주된 ‘만주국 축전곡’의 피날레가 바로 애국가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만주국 축전곡’ ‘만주국 환상곡’이라 하는데 큰아버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할 때 ‘만주리안 판타지(Manchurian Fantasy)’라고 했지 ‘만주국’이라 부르지 않았어요. ‘만주 환상곡’인 거지요.
 
  이 곡은 일본 제국주의의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을 위한 교향곡이 아니에요. 우리 뿌리인 만주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강산을 노래한 것입니다. 판타지는 신화·상상·공상 같은 것이지 현실과 거리가 멀어요. ‘만주 환상곡’은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위한 곡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가 녹은 만주의 넓은 대지, 비옥한 농토, 추운 겨울…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곡이죠.
 
  큰아버님은 만주를 우리 땅으로 여겼어요. 적어도 평양 사람들은 만주를 우리 땅으로 인식합니다. 아니, 이북 사람들은 다 우리 땅으로 생각하며 늘 압록강을 건너다녔다고 해요. 실제 큰아버님은 할머니의 심부름으로 학창시절 만주를 자주 다녔고 시베리아까지 가셨다고 합니다. 당신은 만주를 옛부터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우리 민족의 역사가 어려 있고 우리의 기상과 서정이 녹아 있는 아름다운 영토라고 봤어요. 언젠가는 우리가 되찾아 올 우리 겨레의 정신적 뿌리라는 것을 노래한 음악적 교향시가 ‘만주리안 판타지’입니다. 큰아버님이 저희에게 늘 하시던 말씀이었죠.
 
  ‘만주 환상곡’은 ‘한국 환상곡’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잠깐 들어봐도 동양적 음률이 많아요. 방아타령 음률이라든지…. 물론 일본인이 그 프로그램을 기획·주최했으니 ‘만주국’이란 명칭을 썼을 수는 있겠죠.”
 
 
  ‘한국 환상곡’과 ‘만주 환상곡’
 
안익태 선생의 부인 로리타 안 여사의 유해가 2009년 7월 21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 내 안익태 선생의 묘에 합장됐다. 합장식에는 고인의 셋째 딸 레오노르 씨를 비롯한 유족 5명과 정부 및 안익태 선생 관련 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로리타 여사는 스페인 마요르카 섬 자택에서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진=뉴시스
  김원웅 광복회장은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관련 자료를 독일 정부로부터 입수했다며 “안익태가 베를린에서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연주회를 지휘하는 영상이 있다”고 했다. 또 “‘만주 환상곡’을 훗날 ‘한국 환상곡’으로 이름만 바꾸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연주회 콘서트홀에는 대형 일장기가 걸려 있었고, 일본 외교관인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1896~1969)가 4악장 ‘만주 환상곡’의 합창 부분을 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학자들은 “‘만주 환상곡’이 일본과 만주국의 영광을 기리고, 나치(독일) 및 무솔리니(이탈리아)의 건승을 비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안씨는 “‘한국 환상곡’이 ‘만주 환상곡’보다 훨씬 이전에 작곡되었다”며 “‘만주 환상곡’의 뿌리가 ‘한국 환상곡’”이라고 했다.
 
  “공개한 그 영상에서 나치와 일본인이 다수 관람하였다는데 그 공연장의 관람객·연주자·극장 종업원 모두가 친일·친나치라는 이야기인가요? 그 양반은 지휘자로 초빙되어 자기가 작곡한 곡을 지휘한 음악가입니다. 물론 일본 고관대작이나 천황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거나 총을 쏘진 않았지만, 민족을 반역할 만한 행위를 결코 한 적이 없어요. 단지 빼앗긴 나라 한국을 사랑하고 음악만을 생각하다 돌아가신 분입니다.”
 
  일부 학자는 안익태가 베를린의 에하라 고이치 집에 1941년 말부터 2년 반 가까이 머물렀다고 주장한다. 또한 에하라는 주(駐)독일 일본 첩보기관(IS)의 총책이며 안익태는 ‘특수공작원’이란 주장도 나온다. 이에 에하라가 안익태에게 일본제국과 나치독일의 선전활동 영역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안익태는 日 첩보기관의 ‘스페셜 에이전트’?
 
2011년 6월 문화재청이 문화재 등록을 예고한 안익태 대한국애국가 자필 악보. 사진=문화재청
  에하라 고이치는 어떤 인물일까. 역사학자인 김형석 박사의 저서 《안익태의 극일(克日) 스토리》에 따르면 1896년 11월 15일 오카야마현에서 태어난 에하라는 1923년 도쿄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중국 세관에서 근무하던 중 만주국이 건국되자 하얼빈특별시 부시장으로 임명되었다.
 
  1938년 독일과 만주국의 국교가 수립되면서 베를린공사관의 참사관으로 부임했다. 그가 안익태를 처음 만난 것은 1941년 11월 2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의 일본공사관에서였다. 베를린에 주재하면서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의 만주국 공사도 겸하였던 그는 명치절 아침 일본공사관 의식에서 안익태를 만났고 이후 에하라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2006년 베를린에 유학 중이던 송병욱이 슈트라우스 연구소에서 안익태의 편지를 발견한 후 봉투에 적힌 주소지가 에하라의 주소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당시 안익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던 국내 음악계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고,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하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2015년에는 독일의 한국학 학자 프랑크 호프만이 ‘에하라가 만주국공사관의 첩보활동을 총괄하면서 독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의 정보를 수집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덧붙여 이해영 한신대 교수가 관련 자료를 공개하며 ‘에하라가 일본의 독일정보망 총책임자로서 학자와 예술가를 망라한 300여 명의 정보원을 두고 있었다. 안익태는 그의 집에 2년 반이나 머물렀는데 에하라의 스페셜 에이전트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호프만이 공개한 자료(미국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에하라)는 주(駐)폴란드 정보기관(IS)과 공동작전을 수행하였다. 바이라우흐(Weirauch)에 의하면 에하라는 처음에는 러시아, 다음에는 독일에 대항해 폴란드 IS와 일했다.…>
 
 
  에하라 고이치와 안익태
 
2005년 3월 16일 오전 문화관광부 청사에서 내한한 안익태 선생의 유족들이 애국가의 저작권을 무상으로 양도하겠다는 기증서에 서명을 했다.
  안경용씨는 “호프만의 자료를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유인즉, 폴란드는 1932년에 소련, 1934년에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1939년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이 분할 통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은 독일과 동맹국이어서 협력하는 사이였다.
 
  “일본과 독일은 동맹관계인데 독일에 대항했다? 앞뒤가 맞지 않아요. 추리소설이라고 해도 저급하다고 느낍니다. 억지로 친일·친나치로 만들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스러워요.
 
  한 가지 더 이야기할게요. 스파이 영화를 보면 스파이는 신분을 감추려 몰래몰래 다니는데 어떻게 스페셜 에이전트를 자기 집에 둡니까?
 
  또 에하라는 독일이 패망하자 일본으로 돌아가 변호사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죠. 만약 에하라가 정보기관 총책이라면 전범(戰犯)으로 처벌받지 않았겠어요?”
 
  안경용씨와의 인터뷰를 주선한 역사학자인 김형석 박사는 이런 말을 보탰다.
 
  “전후(戰後) 일본으로 돌아온 에하라는 제2도쿄 변호사회인 청유회(淸遊會)의 중심 멤버로 활동하면서 변호사회 부회장이 되었어요. 에하라가 남긴 글 중에 현재 확인된 글은 ‘안익태군의 편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옹의 추억’ ‘악성 모차르트를 방문하여: 유럽에서 들은 모차르트 음악’ 등이 있어요
 
  에하라는 일본 그리스도교회의 찬송가 가사 번역자로 활동했고, 1966년에는 《뫼리케 시초》를 출판했죠. 1969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외교관, 변호사, 문필가, 번역가, 음악평론가 등의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하라에 대한 의혹은 있으나 구체적인 첩보활동에 대한 물증이 없어요. 그런데도 ‘스파이 총책’이라 단정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안익태를 일본에 협조한 스파이로 모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 아닐까요?”
 
  김 박사는 안익태가 에하라 고이치의 집에 2년 반 가까이 머물렀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닐 것”이라 했다.
 
  “1941년 말부터 2년 반 가까이 기숙했다지만 그 기간 동안 16차례의 외지 공연(타국 14회, 타 지방 2회)과 그에 따른 연습 일정을 감안하면 베를린의 에하라 저택에 머문 기간은 9개월 정도가 아닐까 추정합니다.”
 
 
  독일 제국음악원 회원이면 나치?
 
안익태의 조카 안경용씨(왼쪽)와 역사학자인 김형석 박사.
  김 박사는 저서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견해를 밝히고 있다.
 
  <…안익태가 베를린에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1942년 3월 비엔나 공연부터 9월 베를린 공연까지 6개월과 1943년 5월 로마 공연 후부터 8월 베를린 공연까지의 3개월로 두 차례에 걸쳐 9개월 정도이다.…>(244쪽)
 
  안경용씨는 “에하라 고이치의 후손을 찾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 변호사회 부회장까지 했다면 훌륭한 법조인이었을 겁니다. 일본은 사회적으로 중의원이나 참의원보다 변호사를 더 존경해요. 사립탐정을 고용해서라도 그분 후손을 찾아 의혹을 밝힐 생각입니다.”
 
  ― 일부 학자들은 독일제국음악원 회원이라는 이유로 안익태를 나치 회원이라 주장합니다. 그래서 독일 패망 후 귀국하지 못한 채 스페인으로 도주했다고 하고, 프랑스는 안익태를 기피인물로 취급했다는 주장도 있어요.
 
  안씨의 계속된 말이다.
 
  “당시 독일제국음악원 회원 수가 17만명이라고 합니다. 회원이 아니면 음악활동을 못 했어요. 일종의 노동허가증일 뿐이죠. (안익태가) 나치를 위해 뭘 했겠어요? 히틀러를 따라다니며 발을 씻어준 것도 아니고, 나치 행진곡을 만든 것도 아니잖아요.
 
  종전 후 스페인으로 도주했다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파리 레지스탕스와 연합군 폭격 등으로 위험하니, 당시 중립국이던 스페인 대사가 ‘함께 열차를 타고 가자’고 해서 갔다고 해요. 가서 그곳에서 연주여행 중에 아내(로리타 탈라베라)를 만났던 겁니다. 나치를 피해 도망갔다? 너무 웃긴 얘기 아닌가요?
 
  또 큰아버님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1961년 2월 2일, 파리 샹젤리제극장)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에텐라쿠(越天樂)와 ‘降天聲樂’, 그리고 옥보고의 ‘降天聲曲’
 
안익태 선생이 즐겨 입던 연미복과 초상화 등 유품들.
  안익태가 남긴 여러 곡에도 친일 의혹이 있다.
 
  예컨대 안익태가 일생의 역작으로 자부했던 작품인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越天樂)’(1938)는 천황을 찬미하고 헌정한 노래라는 의혹이다. 그런데 해방 후, 그러니까 1959년 이 곡을 ‘강천성악(降天聲樂)’으로 교묘하게 제목만 바꿔 “대한민국을 농락했다”는 것이다.
 
  안씨의 반박이다.
 
  “제가 일본 정부에다 편지를 보냈어요. 천황에게 곡을 헌정했다면 무슨 문서에 기록이 돼 있지 않겠어요? 안익태 위상으로 볼 때 분명 문서에 남아 있을 겁니다.
 
  ‘에텐라쿠’라는 말은 한자어로 월천악(越天樂), 그러니까 ‘하늘에서 음악이 내려왔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큰아버님은, 음악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라 하늘이 인간에게 준 것이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나중에 한국에 들어와 월천악과 비슷한 ‘강천성악’을 지휘하게 됩니다. (두 곡이) 비슷해요. 민요 방아타령도 나오고….
 
  한국 음악의 근원을 이야기할 때, 통일신라시대 거문고 명인 옥보고(742~765년 경덕왕 때 음악가)의 ‘강천성곡(降天聲曲)’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인 강천성곡의 뜻이 그대로 에텐라쿠의 의미로 옮겨가지 않았을까요? 이런 주장을 펴는 학자들의 견해에 동조합니다. 훗날 세종대왕이 아악(雅樂)을 정리할 때 ‘신라시대 때부터 이어져온 음악을 모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해요.
 
  이 양반(안익태)은 ‘벼농사나 불교문화처럼, 음악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생각하셨던 분입니다.”
 
  ― 혹시 그 이야기를 안익태 선생에게 직접 들으셨나요.
 
  “우리 집안 사람들끼리 하는 이야기죠.”
 
 
  끝까지 창씨개명 거부
 
  안익태를 둘러싼 여러 의혹 중 하나는 창씨개명도 있다. 안익태를 ‘에키타이 안’이라고 부르는 데서 생긴 의혹이다. 1921년 일본으로 유학을 간 안익태는 국립 고등음악원을 다니며 연주활동을 병행했다고 한다. 이때 일본에서 사용한 이름이 ‘안 에키타이’다. 안익태의 일본식 발음이다. 1930년 미국 신시내티음악원 입학허가서에는 ‘An Iktai’로, 미국 노동부 이민심사국의 서류에는 ‘IkTai Ahn’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미국 유학 시절, 그의 영문 표기는 ‘Eak Tai Ahn’, 독일에서 활동하면서는 다시 ‘에키타이 안(Ekitai Ahn)’으로 불렸다. 1947년 스페인 정부로부터 영주권을 받았을 때의 이름은 ‘Eak-tai Ahn’이었다. 악보에 영문으로 표기한 서명은 더욱 다양하다. ‘Ik Tai Ahn’ ‘EakTai Ahn’ ‘EakT. Ahn’ ‘Eaktay Ahn’ ‘EkiTai Ahn’ 등이다. 그렇지만 평생토록 ‘안(Ahn)’이라는 성은 바꾸지 않았다.
 
  안씨의 말이다.
 
  “큰아버님은 일본에서 공부를 끝내고 잠시 한국에 들렀다고 해요. 당시 한국과 일본을 왕래할 때는 여권이 필요 없었어요. 도항증만 있으면 됐죠. 미국 유학을 가려고 여권이 필요해서 총독부에 갔다고 해요. 당시 총독부 관리가 ‘이름이 뭐냐’고 묻기에 ‘안익태’라고 답하니 받침을 못 읽는 일본인이 ‘에키타이’라고 적었다는 겁니다. ‘익태’를 일본식으로 읽었던 거지요. 그 양반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셨던 분이에요.
 
  저와 잘 아는 일본인에게 ‘에키타이와 비슷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그런 이름을 가진 일본인은 없다. 몽골 장군 수부타이처럼 몽골 이름 같다’고 하더군요.”
 
 
  애국가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 의혹
 
  이 밖에 안익태의 ‘애국가’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루얀스키 크라이(O! Dobrujanski-krai)’를 표절한 것이란 의혹도 구체적으로 제기된다. 김원웅은 “전문가들이 확인을 통해 애국가 중 72%가 표절했다”고 주장한다.
 
  안씨는 “큰아버님이 1938년인가 1940년에 불가리아에 가서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했는데 표절을 했다면 그 사람들이 불렀겠느냐”고 반문했다.
 
  표절 의혹은 1964년 제3회 국제음악제에 초청된 불가리아 출신 미국인 피터 니콜라프가 제기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최선의 대우를 약속한 안(익태)씨가 약속을 어겼다”며 불만을 터뜨리며 애국가 몇 소절이 불가리아 민요를 닮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시작된 표절 시비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교수인 보리스 크레만리예프가 ‘오! 도브루얀스키 크라이’의 악보를 국내에 보내면서 증폭되었다.
 
  한국에서 음악평론가로 활동한 미국인 제임스 웨이드가 <애국가와 불가리아 노래와의 비교>라는 논문을 통해 표절을 주장하면서 재연되었다. 1976년 이유선은 《한국양악백년사》를 출간하면서 ‘애국가는 안익태가 1937년경 불가리아 여행 시 얻은 멜로디를 살린 것으로 하루 속히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이후 애국가가 1935년 11월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안익태가 처음 유럽을 여행한 1936년 6월 이전에 작곡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1977년 1월 18일 당시 문화공보부는 이런 입장을 밝혔다.
 
  ‘…현행 애국가가 30여 년간 모든 의식에서 국가 역할을 해왔음을 감안할 때 명확한 근거 없이 표절 여부를 논의함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선율이 같지 않지만 불가리아 민요를 충분히 연상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떨칠 수가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에 대해 안씨는 “불가리아 정부에다 애국가 표절에 대한 공식 입장을 물어보겠다”고 말했다.
 
  “친일·친나치주의자로 내몰린 안익태는 정치적인 친일 행위자가 아니었고, 친나치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었어요.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음악가였고 조국을 사랑한 한국인이었어요. 김형석 박사의 연구에서 드러났듯이 1960년 2월 해방 후 일본에서 첫 공연한 곡도 ‘한국 환상곡’이었다고 해요. 4절의 애국가를 연주할 때 일본인 합창단원들이 한국말로 애국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1965년 4월 10일 NHK TV 실황 중계로 지휘한 도쿄필하모닉 교향악단과의 공연 때는 ‘논개’를 지휘하겠다고 고집을 피웠고 관철시켰어요. 그의 가슴에 조국과 민족이 없었다면 그런 말을 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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