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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탐구

‘인간 최재형 감사원장’, 그 삶의 궤적

“작은 자, 보잘것없는 자를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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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판사의 길 걸으며 ‘원칙주의자’ ‘작은 예수’란 평가 받기까지
⊙ 부친이 최재형 원장에게 써준 네 개의 ‘예언적’ 사자성어
⊙ 동생이 최재형 원장에게 ‘종교개혁’의 주역 마르틴 루터가 한 말을 메시지로 보낸 까닭
⊙ 최재형 원장이 필리핀 선교지에서 구겨진 ‘바람개비’를 일일이 폈던 이유
⊙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던 법조인의 회고 “최재형 원장 부부는 아들들에게 헌신, 그 자체였다”
⊙ 아내의 지극한 아들 사랑 “막내가 유학을 떠납니다. 그 아들을 보내려니 허전합니다”
⊙ ‘평생지기’와의 운명적 만남 “명훈에게 재형은 스스로 ‘지팡이’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 감사원장 발탁 秘話 “조국 민정수석이 ‘감사원장 맡아달라’고 전화했다”

※편집자 註
‘대쪽’. 누군가의 별명이었던 이 단어가 요즘 자주 들린다. 개원 72주년을 맞은 감사원을 이끄는 수장 최재형에게서 과거 ‘율곡사업’과 ‘평화의 댐’ 감사를 진행하면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겨눴던 감사원장 선배 ‘이회창’의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어서일 것이다.
실제 《월간조선》에 최재형 원장에 대해 취재해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이 쇄도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이에 본지는 ‘감사원장 최재형’이란 이면에 감춰진 ‘인간 최재형’을 조명해봤다. 정치적 의미 부여를 배제하고, 주변인의 증언과 자료 등을 통해 ‘인간 최재형’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려본 것이다. 직무 수행과 인품,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호평(好評)을 받는 최재형 원장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봤다.
  2017년 말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조국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다.
 
  “우리가 (감사원장 후보로) 여러분을 인사 검증했는데 (사법연수) 원장님이 최적임자라는 판단이 서 이렇게 연락을 했습니다.”
 
  최재형 감사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그의 비서로 일하며 각별한 신임을 받은 부친에게 대통령직에 오른 박 대통령이 함께 일하자고 했을 때 “각하, 저는 목숨을 걸고 한강을 건넌 사람이 아닙니다”라며 거절했던 일화를 떠올렸다.
 
  문재인 정부 탄생에 전혀 기여하지 않은 자신이 감사원장직을 맡는 게 도의(道義)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완곡히 사양 의사를 밝히니 조국 수석이 말을 이었다.
 
  “원장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후보로 추천하겠습니다. 많은 분을 검증했는데,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사람은 원장님이 유일합니다.”
 
  그렇게 최 원장은 여야 모두의 환영을 받으며 제24대 감사원장직에 올랐다.
 
 
  ‘神이 내린 인간’이란 극찬
 
최영섭(상단의 네모 박스) 대령, 최재형(하단의 네모 박스) 감사원장 父子의 해주 최씨 족보. 최영섭 대령의 두 동생도 각각 해병대 대령, 해군 부사관으로 전역했다.
  ‘감사원장 최재형’은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명문(名門)’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연수원(13기) 수료 후, 줄곧 판사의 길을 걸었다. ‘엘리트 이미지’는 인간미와 거리가 멀다고 느끼는 게 사람들의 고정관념이다. 최재형 원장은 거기에 더해 ‘철저한 원칙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원전(原電) 감사를 놓고 일고 있는, 정치권의 파상 공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어느 정도 확인이 됐다.
 
  감사원이라는 기관이 주는 인상도 한몫한다. 감사원은 각 정부 부처(部處)를 상대로, 외부의 압력 없이 독립적인 감사를 벌일 수 있는 국가 최고 감사기관이다. 감사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그 직무에 관해서는 독립성이 보장된다. 그만큼 감사원(장)이 주는 위압감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보만 갖고 있다면 ‘감사원장 최재형’의 인상은 딱딱함과 완고함으로 여겨질 것이다.
 
  ‘인간 최재형’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최재형 원장과 오랫동안 교류한 지인(知人)들은 최재형 원장을 가리켜 ‘신(神)이 내린 인간’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가 감사원장에 발탁되자 대다수 언론은 그와 관련한 미담(美談)을 쏟아냈다.
 
  지인들의 증언을 소개하기 앞서 그의 본관과 집안부터 살펴보자. 최재형 원장의 본관은 해주(海州)로, 서운부정공파 최용(崔·생몰년 미상)의 36대손이다. 해주 최씨는 고려 왕조에서 가장 빛을 발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의 역사는 곧 해주 최씨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가(史家)도 더러 있다.
 
  해주 최씨의 시조(始祖)는 최온(崔溫·생몰년 미상)이다. 최온은 고려 광종(光宗·925~975) 시기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황해도 해주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호족 출신으로 추정된다. 최온의 초기 벼슬은 호장(戶長)이었다.
 
  최온보다 더 유명한 이가 그의 아들인 ‘해동공자(海東孔子)’로 불리는 최충(崔沖·984~1068)이다. 문장과 글이 뛰어난 최충은 고려 초기 율령과 형법을 정비하는 작업에 주력해 최고 관직이자 재상(宰相) 자리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까지 올랐다.
 
  최충은 교육기관인 ‘9재(齋) 학당’을 설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거란의 침입으로 유명무실해진 고려 최고의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을 대체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 사숙(私塾)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9재 학당의 모태(母胎)다. 최충은 아들들에게 “선비가 세력에 빌붙어 벼슬을 하면 끝을 잘 맺기 어렵지만, 글로써 출세하면 반드시 경사가 있게 된다. 나는 다행히 글로써 현달(顯達)하였거니와 깨끗한 지조로써 세상을 끝마치려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대한해협 전투’ 승리로 이끈 父親 최영섭 (예)대령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 최영섭 예비역 해병대 대령. 사진=조선DB.
  최재형 원장의 부친은 해군사관학교 부교장을 지낸 최영섭(崔英燮·93·해사 3기) 예비역 해군 대령(현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이다. 최 원장은 최영섭 대령의 4남 중 차남이다.
 
  최영섭 대령은 우리 해군에서 ‘신화적인’ 존재다. 6·25전쟁 발발 직후, 우리 해군이 북한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서 승리한 ‘대한해협 해전’의 실질적인 주역(主役)이어서다. 이 해전은 6·25전쟁 최초의 해전이자 첫 승전(勝戰)이었다.
 
  당시 최영섭 대령은 백두산함의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였다. 제2함대 소속이었던 ‘백두산함’은 대한민국 해군이 보유한 유일한 전투함이었다. 이 해전에서 ‘백두산함’은 부산 동북쪽 해상에서 무장 병력 600여 명을 태우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1000t급 북한군 무장 수송선을 5시간에 걸친 추격과 교전 끝에 격침시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6·25전쟁 초기 북한군의 후방 공격을 차단할 수 있었다. 이후 179만명의 유엔군과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가 부산항을 통해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고, 이는 6·25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당초 최영섭 대령은 “공직자의 직무(職務)를 수행하는 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만남을 완곡히 사양했었다. 최영섭 대령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한 끝에서야 경기도 일산의 자택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어느 아버지라도 아들에 대해 속속들이 이야기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칼날 위에 서 있는’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父親) 아니던가. 최영섭 대령은 “정치적인 이야기는 일절 하지 말자”며 최재형 원장의 유년 시절 일화에 한해서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동교동에서 마장동까지 왕복 4시간 통학
 
  “재형이 출생지가 경남 진해로 돼 있지만, 사실 거긴 두어 달밖에 안 살았어요. 재형이가 태어나던 해인 1956년 10월인가 11월, 제가 서울에 있는 해군본부로 발령이 났어요. 그전에는 경남 진해에서 관사(館舍) 생활을 했는데, 서울에는 집이 없었어요. 그래서 살 집을 구하러 다녔죠. 그때 찾아간 게 창덕궁 부근 종로구 와룡동에 있던 어느 기와집이었어요. 집에 들어가니까 문 왼쪽에 머슴방이 월세로 나와 있었어요. 한 세 평쯤 되는 그 방을 얻었어요. 재형이가 9월 2일 태어났으니까 태어난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거죠. 그 핏덩어리만 서울로 데리고 올라와, 그 머슴방에서 한동안 둘이 같이 살았죠. 큰아들하고 아내는 어머니랑 진해에 있었고요.”
 
  와룡동 단칸방에서 살던 최영섭-최재형 부자(父子)는 회현동을 거쳐 동교동으로 이사했다. 그 사이 최영섭 대령은 전역을 했고, 진해에 있던 가족들도 서울로 올라와 함께 살게 됐다. 일가(一家)가 동교동에 정착했을 무렵, 최재형 원장은 한영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한영중학교는 현재 서울 강동구 고덕동에 있지만, 당시는 성동구 마장동에 있었다. 동교동에서 마장동은 서울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질러 가야 한다. 최영섭 대령은 “당시는 교통도 좋지 않아 재형이가 통학하는 데에만 왕복 4시간 정도 걸렸다”고 말했다. 최재형 원장은 그 먼 거리를 군소리 없이 3년간 다녔다.
 
 
  상무대에서 군사훈련 받을 때에도 ‘솔선수범’
 
  최재형 원장은 사법연수원 13기로 수료했다. 이 기수에서는 제법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 가장 유명한 이 중 두 명을 꼽으라면 역시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과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다.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 한상대 전 검찰총장, 조대환 전 청와대 민정수석, 최성준 전 방송통신위원장, 허익범 드루킹 특별검사팀 특별검사도 13기다.
 
  최재형 원장의 연수원 동기(同期)이자, 현재 법무법인 대표를 맡고 있는 A 변호사의 얘기다.
 
  “최재형 원장이 연수원 시절 친하게 지냈던 이들이 공교롭게도 ‘두 명의 최씨’, 즉 ‘3최’가 친했던 걸로 기억해요. 한 명은 현직 판사고, 또 한 사람은 정부 고위직을 지냈습니다. 이 중 고위직을 지낸 최씨하고는 연수원뿐 아니라 중·고교, 대학까지 동기랍니다.”
 
  이들 연수원 13기생은 1983년 광주 상무대에서 군(軍) 법무관 임관을 위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A 변호사는 “상무대에서 훈련받을 때 가장 힘들었던 건 유격훈련이었다”며 이런 말을 했다.
 
  “상무대 유격훈련장은 상무대로부터 약 60km인가? 아무튼 아주 멀리 있었어요. 거기까지 완전군장을 한 채 행군(行軍)을 해 가야 합니다. 그게 굉장히 힘들어요. 나도 일주일 동안 양치 한 번 못 했으니까요. 그때 최재형 원장이 분대장이었어요. 아무리 우리가 법무관 임관을 앞둔 사람들이라고 해도, 훈련병은 훈련병이잖아요. 교관(敎官)들이 적당히 훈련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죠.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 기를 죽이려고 했어요. 분대장이었던 최재형 원장은 훈련병하고 교관 사이에서 조율과 중재를 참 잘했어요. 우리 편하게 해주려고요.(웃음) 늘 솔선수범해서 다들 좋아하고 따랐지요.”
 
 
  판사와 ‘앙숙’인 검사 출신 법조인도 好評
 
  지금은 모 기업 고문으로 있는 연수원 동기 B씨(검사 출신)의 회고는 좀 더 자세하다.
 
  “상무대에서 훈련받을 때 최재형 원장은 제 옆 내무반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연수원 기수(期數)에서 가장 많았던 학번이 77학번이었는데, 최 원장은 고시(考試)가 늦은 편은 아니지만 75학번으로 학번상 연장자 축에 속했습니다. 어느 날 최 원장 내무반에 있던 녀석들이 요령을 피워 단체기합을 받더라고요. 그럼 분대장으로서 화도 날 법도 하잖아요. 나이도 어린 녀석들 때문에 기합을 받으니까요. 그런데 최 원장은 아무런 불평 없이 그들을 다독거리더라고요. 오히려 행군할 때 힘들어하는 동기들의 총이나 군장을 대신 메주기도 하고요. 생색은커녕 아무 말 없이 묵묵히요. 그래서 제가 ‘아니 저런 숨은 영웅이 요즘도 있냐’고 물어보니 다른 동기가 ‘몰랐어? 경기고 다닐 때 몸이 아픈 친구를 업어서 등교시켰던 사람’이라고… 그때 처음 들었어요.”
 
  판사 출신 변호사 C씨는 “판사들은 동기회에 잘 안 나오는 경우가 많다”면서 “최 원장은 빠짐없이 참석하려고 노력해 동기회에 신뢰를 줬다”고 말했다. C씨는 “나는 사회 비판적인데다가 할 말도 하는 편이지만, 최재형 원장은 남의 말을 경청하는 은자형(隱者型)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판사 출신 변호사 D씨(모 법무법인 대표)도 “원칙주의자는 일반적으로 유연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데, 최재형 원장은 원칙주의자이면서도 소탈하고 유연성이 있다”고 말했다. D씨 역시 “최 원장은 자기 얘기보다는 주로 경청하는 스타일”이라며 “어디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용(中庸)을 추구하는 분”이라고 했다.
 
  보통 판사와 검사는 ‘앙숙 관계’다. 판사에게 검사 평을 물어보거나, 검사에게 판사 평을 주문하면 혹평이 한두 개쯤은 나온다. 기자가 몇몇 검사 출신 법조인에게 최 원장에 대한 평가를 주문했더니 그 반응 역시 비슷했다. 고검장 출신의 현직 변호사는 “무결점이라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최재형 판사는 무결점에 가까운 분”이라고 했다.
 
  여기서 잠시 최재형 감사원장 집안의 병역 사항을 짚어보자. 감사원장 인사청문회에서도 언급됐듯이, 최재형 원장 집안은 ‘병역 명문가’다. 이는 최영섭 대령의 영향으로 보인다. 최영섭 대령의 국가관은 투철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최 대령의 말이다.
 
  “내 밑에 동생 2명이 있는데 바로 밑의 동생은 해병대 대령으로 예편하고, 한 명은 해군 부사관 출신입니다. 아들 넷 중 첫째는 해군 대위로, 재형이는 육군 중위로, 셋째는 공군 대위로, 넷째는 육군 소위로 복무했어요. 손자 1명은 해병대 중위로 DMZ(비무장지대) 소대장을 했고, 2명은 육군에서 복무했지요.”
 
  최재형 원장의 두 아들도 각각 해군과 육군에서 복무했거나 복무하고 있다. 최영섭 대령과 최재형 원장의 장남은 2016년 6월 28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롯데와 삼성 경기의 시구·시타자(始球·始打者)로 마운드에 섰다. 당시 최 원장의 장남은 현역 해군 병사였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시구·시타자로 나선 건, 해군과 롯데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계획한 장병사랑 캠페인 ‘땡큐 솔저’의 일환이었다. 최영섭 대령 3대(代)가 해군으로 복무했다는 게 이들이 마운드에 설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명훈에게 재형은 스스로 ‘지팡이’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최재형·강명훈의 피보다 진한 우정을 다룬 1981년 6월18일자 《조선일보》 기사.
  최재형 원장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요 키워드 중 하나는 그의 종교다. 최 원장은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최재형 원장 지인 중 상당수가 최 원장을 평가할 때, 종교와 연결 지어 설명하곤 했다. 그만큼 종교, 즉 기독교 정신은 최재형 원장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큰 요소로 작용했다.
 
  그가 교회를 다니게 된 배경엔 부모가 있었다. 최영섭 대령과 아내 고(故) 정옥경씨는 동교동 인근 신촌교회에 출석했다. 최재형 원장도 자연스럽게 신촌교회를 다녔다. 신촌교회 장로인 최 원장은 감사원장에 임명된 후, 휴무(休務) 장로가 됐다. 아내 이소연씨도 신촌교회 권사다.
 
  최재형 원장은 신촌교회에서 ‘평생지기’ 강명훈(姜明) 변호사를 만난다. 최 원장이 학창 시절, 소아마비 친구를 2년간 업고 등교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이 일화 속 ‘친구’가 바로 강명훈 변호사다. 그들의 피보다도 진한 우정은 1981년, 두 사람이 나란히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 큰 화제를 낳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해 《조선일보》 6월18일자에 ‘신앙(信仰)으로 승화한 우정(友情) 10년’이란 제하의 기사로도 실렸다. 최재형-강명훈의 끈끈한 우정과 최재형 원장의 인격(人格)을 잘 보여주는 기사라 조금 길지만 요약·인용해보도록 한다.
 
  〈친구끼리인 두 사람이 나란히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은 그리 대수로울 것이 못 된다. 그 두 사람이 유달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그것이 떠들썩한 얘깃거리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소아마비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강명훈 군(25·서울대 법대 80년 졸업)과 강 군을 고등학교 시절부터 업어서 등·하교시키며 같이 공부해온 최재형 군(25·서울대 법대 79년 졸업)이 17일 나란히 사법시험(2차)에 합격하기까지에는, 우정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벅찬 인간애의 고뇌들이 있다.
 
  명훈과 재형이 처음 만난 것은 명훈이 보인중 3년에, 재형이 경기고 1년에 재학 중이던 72년 봄이었다. 둘 다 교회에 다니던 이들은 신촌장로교회 청년부에서 만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졌다…. 학년은 하나 위였으나 나이는 명훈과 동갑이었던 재형은 지체(肢體)가 부자유스러우면서도 구김살 없는 명훈이가 신기하게까지 느껴졌고, 사지(四肢)가 자유스러우면서 때로 좌절하기 잘하는 자신이 오히려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명훈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됐다. 재형은 몰래 기도했다. 이왕이면 명훈이가 자기가 다니는 경기고에 입학해서 같이 도와가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명훈이가 창천동에, 재형이가 동교동에 살았기 때문에 같이 다닐 수 있게 된다는 것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기도의 덕분이었는지 명훈이는 경기고에 추첨이 됐다. 중학교 때까지는 어머니가 업어서 등·하교를 시켰지만 이제는 일어설 수도 없는 몸으로 만원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해야 하는 명훈에게 재형은 스스로 ‘지팡이’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명훈이는 내려달라고 했지만 재형은 내려놓을 수 없었다”
 
  아래 이어지는 내용은 읽는 이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보통 20대 중반의 청년이라면, 젊음을 무기로 세속적인 즐거움에 심취하는 게 보통이다. 이들은 달랐다.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느껴지는 두 사람만의 ‘특별한’ 우정을 읽어보자.
 
  〈명훈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하굣길에 신촌 부근에서 내린 둘은 평소와 다름없이 명훈이는 양손에 책가방을 들고 재형이는 명훈이를 업고 집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집까지 중간쯤 왔을 때 등 뒤에 업힌 명훈이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공중변소나 화장실이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명훈이는 등에서 내려달라고 했지만 재형이는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명훈이는 등에 업힌 채로 실례를 하고 말았다. 처음으로 재형이는 명훈이가 우는 걸 보았다. 그 눈물은 다 큰 녀석이 길거리에서 실례했다는 부끄러움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감추고 스스로 극복하려 했던 신체의 결함이 사소한 곳에서 아픔으로 되살아난 그런 눈물이었다.
 
  그날 밤 둘은 명훈이의 집에서 같이 밤을 새워가며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으려면 서로 믿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재형이는 75년에, 명훈이는 76년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명훈이는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눈이 오는 날이면 강의실까지 가기 어려울 것이라며 아침 일찍 찾아와 주는 재형이를 볼 때마다 명훈이는 ‘사랑’을 보는 것 같은 뭉클한 느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명훈이는 성경(聖經)의 ‘로마서’에 나오는 구절을 외었다. “내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야만인에게 모두 빚진 자이니라.” (하략)〉
 
  최재형 원장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둘이 같은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은 앞으로도 서로 도우라는 하느님의 계시인 것 같아요. 앞으로 저나 명훈이나 많은 문제에 부딪히겠지만 훌륭히 극복할 것으로 압니다”라고 말했다. 최 원장은 또 “명훈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눈을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일 줄 아는 아량이 있을 뿐 아니라 지체가 자유스러운 사람보다 훨씬 넓은,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있으니까요”라고 친구 강명훈에 대한 깊은 마음을 표현했다.
 
  강명훈 변호사는 기자에게 “고등학교뿐 아니라 사법연수원 2년간도 함께 통학했었다”며 “잠시의 선행(善行)이 아닌, (진심으로) 장기간 친구를 도왔던 이가 최재형”이라고 말했다. 강 변호사는 “몸이 아픈 친구를 도왔던 일이나 아이 둘을 ‘가슴으로 낳은’ 일 모두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의 힘 덕분”이라고 했다.
 
  이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무리 선(善)한 일이라고 해도 아버지 입장에서는 안타까웠을 법하다. 최영섭 대령의 말이다.
 
  “(재형이는) 원래부터 착한 애예요. 뭐, 걔는 본성이 착한가 봐요. 지금도 아침 8시에 매일 문안 인사를 올려요. 대학생 때도 자기 스스로 학비를 벌었어요. 재형이 친구들도 다 착해요. 명훈(강명훈 변호사)이도 그렇고, 지금 기독교 계통의 모 재단 사무총장으로 있는 김○○이도 그렇고…. 세 명 다 신촌교회 청년부 출신이거든요.”
 
 
  “최재형 장로는 삶과 신앙이 일치”
 
  최재형 원장이 오랫동안 출석해온 신촌교회를 찾았다. 그곳에서 남진희(35) 목사와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남진희 목사는 신촌교회에서 7년째 일하고 있으며, 최재형 원장과 깊은 교분을 나눴던 목회자다.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 ‘장로 최재형’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즘 한국 교회 내에서 장로라고 하면 ‘덕스럽지 못하다’는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장로가 어떤 계급처럼 일반 신도들과 다른 계층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다른 교회에서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봤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인품을 대부분 ‘학습된 겸손’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그에 비해 최재형 장로님은 참 보기 드문 분입니다.”
 
  — 어떻게 보기 드뭅니까.
 
  “최재형 장로님은 신앙이나 삶이 괴리되지 않아요. 항상 일치해요. 아름다운 사람이라 해도 가까이서 보면 흠이 보이잖아요? 근데 이분은 아니에요. 늘 한결같고 소탈해요. 이분은 자기만의 분명한 원칙이 있고, 그게 일관됩니다.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어요. ‘판사들이 다 이런 건가’ 법관에게 이런 이야기 하면 좀 웃길 수 있지만 ‘이분은 법 없이도 살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 구체적인 사례가 있습니까.
 
  “올해 초 우리 교회 집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얘깁니다. 이 집사님은 변변찮은 직장도 없고, 가족도 몸이 안 좋은 아들만 있는 분이셨어요. 보셨다시피 우리 교회(신촌교회)는 굉장히 서민적인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그 집사님께 잘 보인다고 어떤 이득을 얻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최재형 장로님은 그분 장례에 오셨어요. 현직 감사원장이 장례에 오신 거죠. 이미 조화(弔花)를 보냈음에도요. 얼굴만 내밀고 가신 게 아니라 계속 자리를 지키셨어요. 장로님은 교회 내의 모든 경조사(慶弔事), 특히 조사엔 빠짐없이 다 참석하세요.”
 
  — 장로라는 책임감에 그랬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4년 전 얘기를 해드릴게요. 그때 최 장로님이랑 필리핀 선교를 갔어요. 필리핀 같은 곳에 선교를 가면 어린아이들이 정말 많이 몰려옵니다. 그럼 준비한 선물도 다 동이 나 아이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장로님께 ‘포화 상태라 더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내일 일정도 있고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애들이 얼마나 상처받고 돌아가겠나.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면서 준비해 간 바람개비를 나눠 주시더라고요.”
 
 
  ‘바람개비’ 일화
 
2016년 최재형 감사원장은 필리핀 선교를 갔을 때 현지 아이들에게 선물로 바람개비를 만들어 주었다. 당시 선교를 담당했던 남진희 신촌교회 목사는 “이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회고했다. 사진=신촌교회 제공.
  — 바람개비요?
 
  “그냥 돌려보낼 수 없으니 바람개비라도 주자는 거였어요. 바람개비 중에는 행사하느라 구겨진 것도 있고 그랬거든요. 빨리 애들한테 줘서 돌려보내야 하는데 최재형 장로님은 바람개비를 하나씩 하나씩 다 확인하시더라고요. 구겨진 걸 일일이 편 다음에 제대로 돌아가는지까지 확인하신 거죠. 장로님은 ‘우리가 선교를 하러 왔으니 아이들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신 거 같아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는 장로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밤 우리끼리 피드백을 하면서 장로님의 그런 모습을 상기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는 마음을 갖자’고 다짐했을 정도니까요.”
 
  남진희 목사는 최재형 원장의 이 모습을 촬영한 영상이 있다고 했다. 기자는 그 영상을 볼 수 있었다. 필리핀 선교지에서의 최재형 원장은 판사도 장로도 아니었다. 그곳 아이들과 한데 어울려 순수한 모습으로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남 목사는 필리핀 선교 당시 최재형 감사원장이 적은 기도 제목도 보여줬다. 필리핀 선교를 떠남에 있어 일종의 ‘마음가짐’을 적은 글이었다. 최재형 원장의 기도 제목은 ‘선교 과정이 정결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과 ‘주님의 마음으로 필리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남진희 목사는 또 다른 일화를 들려줬다.
 
필리핀 선교지에서 짐을 옮기는 최재형 감사원장. 남진희 신촌교회 목사는 최재형 원장을 “늘 솔선수범하는 분”이라고 했다. 사진=신촌교회 제공.
  “선교를 갔던 필리핀 불라칸(Bulacan)은 제대로 인프라가 갖춰진 곳이 아니에요. 빈민가죠. 사실 씻는 것도 아주 불편해요. 물이 제대로 안 나오는 곳이니까요. 잠자리도 불편해 남자들은 조그마한 예배당에 대충 매트 깔고 누워 자야 하는 상황이죠. 최재형 장로님은 그런 곳에서 그냥 주무세요. 절대 숙소를 따로 잡지 않으세요. 다른 데에서 잠시 쉬었다가 행사 때 잠깐 얼굴 비치는 그런 것도 없어요. 공항 출발부터 현지(現地)에서까지 우리랑 똑같이 참여하는 거죠. 짐을 나를 때에도 더 솔선수범하세요. 거기 기자가 있겠어요, 아니면 감시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런데도 평소랑 똑같이, 그리고 진심을 담아 행동하시는 겁니다.”
 
  — 침식(寢食)을 같이했으니 ‘날것 그대로의’ 최재형 원장을 많이 봤겠습니다.
 
  “하루는 일정이 끝나고 저녁에 최재형 장로님은 물론 교역자들이 다 함께 샤워를 했어요. 물 사정이 안 좋으니 찔끔찔끔 나오는 물로 다 같이 씻고, 등 밀어주고 그랬죠. 사실 장로님도 연세가 있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데 발가벗고 샤워하는 게 쑥스러울 수 있잖아요. 장로님은 그런 권위의식이 없어요. 그냥 허물없이 함께 샤워를 했어요. 그러곤 다 같이 선풍기 켜고 앉아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눴죠. 참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작은 예수’
 
  — 아까 말한 소탈함이 그런 모습인 거 같습니다.
 
  “소탈하다는 말로는 좀 부족하죠. 그냥 적선(積善)하듯이 베푸는 게 아니라는 거죠.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호흡하고 생활하는 그런 장로님의 모습에서 우리도 완전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에는 ‘작은 예수’라는 말이 있어요. 예수가 그랬듯 작은 자, 보잘것없는 자를 진심을 다해 섬기는 사람들을 흔히 ‘작은 예수’라고 일컬어요. 아마도 최재형 장로님이 ‘작은 예수’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 감사원장이 된 후에도 뵌 적이 있습니까.
 
  “1부 예배 ‘호산나 성가대’에 매주 나오셨어요. 지금은 코로나19로 비대면 예배가 됐지만, 그전까지는 성가대 활동을 계속하셨어요. 감사원장 취임 후, 우리 교회 부교역자(부목사)들을 초대해줘서 (감사원에) 한번 간 적이 있어요. 가면 직접 원두커피를 내려주세요. 장로님이 커피를 좋아하세요. 그래서 좋은 원두 있으면 우리에게 나눠도 주세요. 장로님 중에는 일부 공직(公職)을 맡으면 교회에서 하던 봉사를 내려놓는 경우가 많아요. 최재형 장로님은 교회에서 맡은 봉사에 다 참석하세요. 근데 본인이 드러나는 자리는 안 가세요.(웃음) 농어촌 선교 같은 데 가면 앞에 나가서 몇 마디 이야기할 법도 한데 그런 건 전혀 안 하세요. 이분이 집중하는 건 딱 두 가지, 전도(傳道)와 봉사입니다.”
 
  — 부인 이소연씨는 어떻습니까.
 
  “부인도 장로님과 똑같아요. 신앙심이나 인품 전부 다요. 우리 교회에서 주방 봉사를 하세요. 원래 장로님 댁이 서울 목동입니다. 이소연 권사님은 목동 지역에서 집사 두 분이랑 같이 협력하면서 그 지역을 위해 봉사를 많이 하세요. 아주 화기애애하고 분위기가 좋은 곳입니다.”
 
 
  가족 그 이상의 가족… 두 아들 이야기
 
최재형 감사원장이 어린 막내아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 과자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사진=부인 이소연씨 페이스북
  두 아들의 ‘입양’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강명훈 변호사는 기자에게 “최재형 원장을 말할 때 기독교와 관련해 꼭 얘기해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는데, 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입양’이었다.
 
  최재형 원장 부부에게는 두 딸이 있고, 그 밑으로 아들 둘을 각각 2000년(차남)과 2006년(장남) 입양했다. 흔히 ‘가슴으로 낳아 기른다’고 표현하지만, 이는 쉬운 게 아니다. 게다가 최재형 원장 부부는 한 명이 아닌 둘을 자녀로 받아들였다. 여기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최영섭 대령이 말하는 ‘입양 스토리’다.
 
  “며느리(이소연씨)가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던 고아(孤兒)들을 기르는 기관에서 봉사를 했어요. 거기서 핏덩어리를 맡아 1년 정도 봉사 차원에서 키웠는데, 그때 정이 많이 들었나 봐요. 그래서 결심을 한 거죠. 그렇게 받아들인 아이가 지금의 둘째 아들이에요. 내가 재형이한테 그랬어요. ‘네 나이가 이제 50줄에 접어드는데 괜찮겠냐’고요. 재형이 부부는 이미 결심을 굳힌 것 같더라고요.”
 
  최영섭 대령은 손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재형이 첫째 아들이 나처럼 해군에 입대했잖아요. 근데 이 녀석이 사격에서 1등을 했다고 그러더라고. 나중에 갑판병으로 배정될 때에도 10등 이내로 들어갔다고 하대요. 손자 두 놈이 나를 좋아해요.(웃음) 그중 큰놈이 나한테 ‘할아버지 제가 군대에서 배운 게 있어요’ 그러대. ‘뭐냐’고 물었더니 ‘인생을 사는 데 노력한 만큼, 땀 흘린 만큼 리워드(reward·보상)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대요. 큰놈은 손재주가 있어서 지금 패션 디자인 계통에서 일하고 있어요. 재형이 부부가 두 아들을 살뜰하게 키웠어요. 그건 내가 너무 잘 알지.”
 
  최재형 감사원장 부부가 ‘가슴으로 낳은’ 두 아들에게 지극정성이었다는 건 여러 계통으로 확인이 된다. 과거 최재형 원장 부부와 서울 목동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던 한 법조인의 회고다.
 
  “최재형 원장은 제가 살던 아파트 바로 아래층에 사셨어요. 막내아들이 초등학생 때인가, 아마 그랬을 거예요. 하루는 막내아들이 등교하면서 준비물을 두고 집을 나섰나 봐요. 그랬더니 (최재형) 원장님 부부가 집 밖에까지 나와 챙겨주더라고요. 모르는 사람들이 봤으면 그저 ‘친아들 챙겨주고 있겠거니…’ 했을 거예요. 최재형 원장 부부는 아들들에게 헌신, 그 자체였습니다. 아마 ‘가슴으로 낳았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아들을 보내려니 허전합니다”
 
  최재형 원장의 차남은 지난 8월 17일 육군에 입대했다. 그래서일까. 최재형 원장 카카오톡 계정에는 ‘○○야 힘내라’라고 써 있다. 여기서 ‘○○’(이)가 바로 최 원장 차남이다. 극진한 ‘아들 사랑’은 아내 이소연씨의 페이스북에서도 확인된다. 2014년 2월 25일 이소연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중 한 대목이다.
 
  〈즐거운 꿈을 또 꾸었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딸 두 명의 엄마라 할 때, 제 맘속에는 항상 딸들뿐 아니라 아들들이 내게 있을 거 같은 그 당시로는 이상한 확신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알 수도 없었던 소망을 주께서 주셨던 거 같아요. 우리 막내 ○○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손목이 부러지기 전까지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입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의 마음을 만지셨습니다. ○○가 어릴 적 엄마를 쳐다보던 그 눈길에서 저는 주님이 날 보시면 이리 사랑스런 눈으로 보실 거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들을 보내려니 허전합니다. 날개를 달고 넓은 곳으로 비상하려는 우리 아들 축복해주며 웃으며 보내주렵니다.〉
 
 
  “내가 받은 상처 많아 아들들을 일반 학교에 넣고 싶지 않았다”
 
  차남(막내아들)은 중국 하얼빈(哈爾濱)에 있는 기독교 계열 학교로 진학했다. 이소연씨는 차남을 이 학교에 입학시킨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014년 2월14일자 페이스북 글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들은 늘 ‘멀기만 한 당신’이셨다. 고등학교 때는 특히 힘들었다. 잔디를 아이들이 모르고 밟으면 잔디에 백 번씩 절하라는 학교, 조회시간에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불려 나가 전교생 앞에서 뺨 맞는 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눈 마주치면, 지난 시간에 배운 거 물어봐서 모르면 교실 끝에 밀려가도록 때리던 선생님….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고 두려움이 생기곤 했다. 내가 받은 상처가 많아서인지, 나는 내 아들들을 일반 학교에 넣고 싶지 않았다…. 자존감이 낮은 우리 아이들이 받는 대우를 미리부터 너무 겁먹었던 것 같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참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차남)가 6년을 다니던 학교를 떠나 하얼빈이라는 먼 곳에 있는 만방학교로 간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는데,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여셨다. 오늘 종업식으로 드림학교, 이 정든 아름다운 학교를 떠난다.
 
  교장 선생님, 선생님들의 퇴임식이 아이들과 선생님, 엄마들의 눈물 바다가 되었다. 배고파하는 아이들을 위해 늘 간식 준비해놓고 기다리시는 선생님들, 내가 엄마인지 선생님이 헷갈릴 정도로 아이를 이해해주시던 선생님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늘 장점으로 격려해주시던 분들,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편지 써주시는 교장 선생님. 아이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을까 늘 기도하시는 우리 사랑스러운 선생님들. 고마워요. 당신들의 사랑의 수고로 우리 아들들, 아니 저까지 치유받고 떠납니다. 사랑해요. 감사해요.〉
 
  이소연씨가 2012년 3월 7일 남긴 글에서도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이 듬뿍 배어 나온다.
 
  〈○○(장남)이가 두레자연학교에 입학을 했다. 자기는 안 춥다고 고집부리며 이불도 안 가져간 아들이 추워진 날씨 때문에 걱정스럽다. 에구 옷이라도 입고 자겠지…. ○○(차남)는 지각할까 봐 노심초사 5시 반에 일어나 준비하고 7시면 나간다. 오늘도 8시에 도착했다고 기쁜 목소리로 전화 왔다. 학교가 멀지만 씩씩하게 다니는 ○○가 고맙다.〉
 
  이소연씨는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를 졸업했다. 이소연씨의 선친이자 최재형 감사원장의 장인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중견 기업을 운영했던 고(故) 이해원(2015년 별세)씨다. 장녀인 이소연씨 밑으로 여동생 둘, 남동생이 한 명 있다.
 
 
  ‘Here I stand, help me God!’
 
  지난 9월 2일 최재형 원장의 동생 최재민(62) 원장을 찾았다. 최재민 원장은 서울 양재동에서 소아과를 운영 한다. 최재민 원장을 찾은 이유는 동생이 생각하는 형의 모습이 궁금해서였다. 남자 형제끼리는 서먹한 듯하면서도, 때론 흉금 없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묘한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해 가장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재민 원장은 “나하고 형은 특별한 추억이 없다”며 “병원에 환자들 외에 다른 사람이 와선 곤란하다”며 기자의 방문에 난색을 표했다.
 
  때마침 이날은 최재형 감사원장의 생일이었다. 최재민 원장은 형(최재형 감사원장)에게 보낸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여주며 별말 없이 “읽어 보라”고만 했다. 최재민 원장은 형의 생일을 축하하며 ‘미션(mission·사명)’을 강조하고 있었다. 최재민 원장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형이 감사원장으로서, 지금 국가 현안을 다루고 있는데 그게 형에게 부여된 미션이죠. 그 미션을 사심(私心) 없이, 무엇이 최선인지 국민의 입장에서 현명히 판단해달라는 당부를 담은 겁니다. 이런 간단한 메시지 외에 형과 전화통화도 안 합니다. 혹시라도 불이익이 갈까 봐요.”
 
  최재민 원장은 지난 7월 29일 최재형 감사원장에게 보낸 메시지도 보여줬다. 이날은 최재형 감사원장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한 날이었다. 최재형 원장이 월성 1호기 감사 과정과 관련해 “정치적 중립성을 위배한 적이 없다”고 강조하며 여당 의원과 설전(舌戰)을 벌인 바로 그날이다.
 
  최재민 원장은 국회 출석을 앞두고 있는 형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메시지 속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했다는 ‘Here I stand, help me God’이라는 말이 써 있었다. 최재민 원장은 이 메시지를 보낸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잖아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가 마르틴 루터를 만나자고 했어요. 황제가 루터에게 (종교개혁에 관한) 신념을 버릴 것을 종용하려고 부른 거죠. 황제는 하루의 시간을 더 줍니다. 다음 날 루터는 황제 앞에서 ‘하나님 제가 교황 앞에 서 있지만, 저는 하나님의 진리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 서 있겠으니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육신은 저 사람(교황)에게 있지만, 제 마음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저를 살펴주십시오(Here I stand, help me, God!)’라고 부르짖은 겁니다. 즉 진리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배반하지 않겠다는 마르틴 루터의 고백을 형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 후 마르틴 루터는 파문(破門)을 당해 바르트부르크 성(城)에 숨어 지내야 했다. 숨어 있는 동안 루터는 일반 시민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것이 훗날 ‘면죄부(免罪符)’를 팔며 타락했던 구교(舊敎)에서 신교(新敎)가 갈라져 나오는 종교개혁으로 승화됐다.
 
 
  父親이 최재형 원장에게 써준 네 개의 사자성어
 
최영섭 대령이 최재형 감사원장에게 써준 네 개의 사자성어. 단기출진(單騎出陣) 불면고전(不免苦戰) 천우신조(天佑神助) 탕정구국(蕩定救國). 위 사진 역시 최영섭 대령이 친필로 기자에게 써준 것이다.
  기자는 이 문자 메시지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중 마르틴 루터가 처해 있던 500여 년 전 상황과 최재형 원장이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을 떠올려 봤다. 마르틴 루터에게 있어 진리란 무엇이었고, 최재형 원장에게 있어 진리는 무엇일까. 피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한 최재형 원장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부친 최영섭 대령이 한 말도 문득 떠올랐다. 최영섭 대령은 최재형 원장이 감사원장으로 발탁됐을 때, 특별히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사자성어를 써줬다고 한다.(해석은 기자가 임의로 붙인 것이다.)
 
  〈단기출진(單騎出陣) 홀로 진지를 박차고 나가면,
  불면고전(不免苦戰)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천우신조(天佑神助) 그럴 때 하늘(하나님)에 도움을 구하면,
  탕정구국(蕩定救國) 나라를 안정시키고 구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최영섭 대령은 최재형 원장을 비롯한 자녀들에게 항상 “의연하게 살라”고 가르쳐 왔다고 했다. 마르틴 루터가 한 말과 최영섭 대령이 일러준 네 개의 사자성어, 그리고 ‘의연함’은 최재형 원장이 처해 있는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최재형 원장이 나아갈 방향까지도 미리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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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정    (2020-10-02) 찬성 : 9   반대 : 0
이런 훌륭한 분과 윤석렬을 발탁한 조국에 감사해야한다니 참... 감사원장으로서 맡겨진 일을 신앙과 국민에 부끄럽지 않도록 완수하시길 응원합니다.
  김경배    (2020-09-27) 찬성 : 13   반대 : 0
대한민국에 이런 공직자가 있다는게 참 영광입니다.
진정한 국민을 위하시는 공복으로 최선을 다하시며 끝까지 순교자의 소명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보통사람인 나도 기도로 보탰으면 합니다.
모처럼 감동적인 공직자를 만난것같아 답답한 코로나의 암울한 소식가운데 신선한 공기를 마신듯 상쾌합니다. 감사합니다.
  홍종우    (2020-09-23) 찬성 : 20   반대 : 0
이런 훌륭한 분이 있다는건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런분이야말로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더큰 일을 할수있도록 해야 할것이다. 현재 우리 주위의 타락한 정치인들하고는 너무 차이가 난다. 이런분들이 하루속히 대한민국의 진정한 지도자로 선출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병훈    (2020-09-21) 찬성 : 22   반대 : 0
이 분이 어떤 소명을 받으셨는지.. 배움이 짧고 식견이 부족한 제 눈에도 환희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정자    (2020-09-20) 찬성 : 39   반대 : 0
최재형 감사원장에 대한 얘기와 가족의 얘기, 모두 예사 사람들이 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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