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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재발굴

다시 읽는 ‘朴正熙-김호남 부부의 큰딸 朴在玉씨의 수기’

‘미안하다’며 어깨를 두드리시던 아버지

글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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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직전 부모 이혼… 친척집에 얹혀살아
⊙ 중학교 때 JP의 신당동 집으로 육영수 여사가 찾아와… “매를 맞고 살아도 나는 나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었다”
⊙ 박정희 대통령의 부관 한병기씨와 결혼… 5·16 후 10년간 외국 생활
⊙ 박정희 대통령, “누구에게 함부로 손 벌리지 말아라. 그러면 네가 다친다”

※편집자 註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큰딸 박재옥(朴在玉)씨가 지난 7월 8일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전부인 김호남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인(故人)은 박근혜(朴槿惠) 전 대통령보다 열네 살 위이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18년 가운데 절반 이상을 고인은 남편 한병기(韓丙起·2017년 작고)씨와 함께 해외에서 생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관(副官) 출신인 한병기씨는 1958년 고인과 결혼해 제8대 국회의원, 주(駐)칠레·유엔·캐나다 대사 등을 지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고인의 존재는 일반 국민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월간조선》 1995년 12월호에 실린 수기(정리=강인선)에서 고인은 어린 시절 겪은 부모의 이혼과 힘들었던 사춘기, 대통령인 아버지를 두고서도 ‘없는 존재’처럼 살아야 했던 시절 등에 대해 담담하게 술회했다. 고인의 수기를 발췌·정리해서 소개한다.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차려진 박재옥씨의 빈소. 사진=조선DB
  집에 돌아오면 책만 읽던 아버지
 
  할머니(박정희 대통령의 모친 백남의-편집자 주)는 나를 끔찍하게 보살피셨다.
 
  “불쌍한 내 새끼, 사촌 형제들 사이에서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고….”
 
  활발하고 씩씩한 사촌 형제들 사이에서 축 처진 내 모습을 보실 때마다 할머니는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모르셨다. 할머니의 속바지 주머니에는 늘 무엇인가 먹을 것이 들어 있었다. 무엇이든 바지 주머니에 감추어 두었다가 사촌들이 볼세라 내 입에 슬쩍 넣어주셨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나를 찾으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늘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와 음식 솜씨가 최고라고 칭찬하셨지만, 그것이 어머니에게 큰 위로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괴롭고 외로우셨을 것이다. 대가족의 살림을 챙기느라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나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으셨다. 남편도 없고 아이가 더 있는 것도 아니니 어머니의 사랑은 온통 내게 쏠렸다.
 
  아버지는 1년에 한두 번 정도 고향집에 돌아오시곤 했다. 늘 말이 없고 무뚝뚝했지만 내게는 인심이 후한 아버지였다. 담배 한 갑 사오라고 지폐 한 장을 내 손에 쥐여주시면 담뱃값이 얼마든 관계없이 잔돈은 늘 내 차지였다. 철없던 나는 그저 잔돈이 고스란히 내 것이 된다는 것이 기뻐서 좋아 날뛰었다.
 
  고향집에 돌아오시면 아버지는 하루 종일 책을 읽으셨다. 어떤 날은 아침상을 물리고 나서부터 책을 읽기 시작해 하루에 한 권을 다 읽으시는 날도 있었다. 저녁때가 되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 책이 다 내 머릿속에 있다. 자, 물어봐라. 다 알고 있으니까”라면서 책을 건네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와 함께 산 날은 훗날 서울에서 산 것까지 합해도 몇 년 되지 않는다. 만났다 헤어지고 또 만났다 헤어지고….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시간은 짧고 집을 떠나 계시는 기간은 길었다.
 
 
  ‘아버지는 왜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6·25 직전의 일이니까 내가 열 살이 좀 넘을 무렵의 일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오랜만에 상모리 집에 오셨다. 아버지가 집안 어른들과 뭔가 심각하게 의논을 하셨는데 아마도 이때 이혼을 하기로 결정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어쩔 줄을 모르셨다.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남편도 없는 집에서 막내 며느리라고 일만 죽어라고 한 게 10년이 넘었는데 그 대가가 이혼이라니. 어머니가 날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셨다.
 
  “너의 아버지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서울에 딴 여자가 있는 것 같구나. 어쩐지 내가 이 집 식구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아….”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말꼬리를 흐리셨다. 어린 마음에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혼을 한다는 거지….”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엄마, 이혼이 뭐예요?”
 
  “이제 너의 집에서 못 살고 쫓겨나게 된 거야….”
 
  어머니는 그때 “절대 내 손으로는 이혼 안 해줄 거야. 내가 이렇게 속을 썩었으니 자기도 좀 당해봐야 돼”라고 말씀하셨다.
 
  내 가슴 속에는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이 충격과 함께 자리 잡았다. 그리고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왜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내가 보기엔 우리 엄마가 최고인데… 엄마는 예쁘고 날씬하고 나에게도 그렇게 잘해주는데….’
 
 
  아버지의 재혼 소식
 
《월간조선》 1995년 12월호에 실린 박재옥씨의 수기. 왼쪽에 보이는 사진은 1958년 박재옥·한병기씨의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이다.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한 후 상모리를 떠났다. 대구로 삶의 터전을 옮긴 어머니는 다른 남자를 만나 같이 살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싫었던 나는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열네 살 때 “내겐 우리 식구가 있고 아버지가 계신데 여기 있을 수는 없어요. 나는 아버지에게로 갈 거야”라면서 어머니 곁을 떠났다. 이후 나는 외할머니댁, 구미의 사촌 오빠 집 등을 전전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나는 아버지에게 원망에 찬 편지를 쓰곤 했다.
 
  “아버지, 제게는 부모님이 모두 계신데 저는 왜 이렇게 남의 집에 얹혀살아야 합니까. 사촌 오빠가 나까지 데리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귀찮고 성가시겠어요. 저는 또 얼마나 미안한지 아세요. 오빠도 고생스럽고 나도 힘들고….”
 
  내가 투정 섞인 편지를 보내면 아버지는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것이니 열심히 살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곤 했다.
 
  아버지와 육영수(陸英修) 여사의 재혼 소식을 들은 것은 근혜도 태어난 후였으니 1952년쯤이었을 것이다. 집안 어른들이 내게 그 소식을 전해주셨다.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아버지의 재혼 소식을 듣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재혼하신 후에도 용돈과 학비를 꾸준히 보내주셨으므로 내 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결혼해서 서울에 살고 있던 영옥이 언니(박영옥·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가 서울에 와서 함께 살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해왔다. 나는 좋아라 따라나섰다.
 
  영옥이 언니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인데다가 나에게 워낙 잘해주었으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제기동의 언니 집에 살면서 동덕여고에 다녔다. 언니는 내게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잘해주었다.
 
 
  어머니가 간절히 필요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육 여사를 만난 적이 없었다. 친척들은 육 여사가 나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누구도 나에 관한 이야기를 육 여사에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말하자면 다들 나를 없는 것으로 치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제기동 언니 집으로 육영수 여사가 불쑥 찾아왔다. 예고 없는 방문이었지만, 나를 데리러 왔다고 하기에 나는 두말하지 않고 육 여사를 따라나섰다. 훗날 안 일이지만 친척들이 그렇게 쉬쉬한 나의 존재를 육 여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결혼 초에 이야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결혼을 하신 후에 알렸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왜 갑자기 육 여사가 나를 데리러 오기로 결심을 했는지 그 이유도 아직 모르겠다. 이유는 아무래도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첫 만남이었으나 육 여사의 인상은 아주 좋았다. 깔끔한 한복 차림에 조용한 분인 것 같았다. 내가 이날 아무 미련 없이 육 여사를 따라나서는 것을 보고 영옥 언니는 아마 몹시 섭섭했을 것이다. 그렇게 잘해준 것도 소용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쨌든 아버지 집으로 가고 싶었다. 매를 맞고 살아도 나는 나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었다.
 
  육 여사가 나를 데리러 왔을 때 나는 기쁘고 감사했다. 그때 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나중에는 계모든, 서모든, 아픈 어머니이든, 미친 어머니이든 내게는 어머니란 존재가 필요하다고 간절히 바라고 있을 때였다.
 
  게다가 육 여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을 하신 후에 만나 결혼하신 분이니 나로서는 육 여사에게 나쁜 감정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나는 노량진의 아버지 집으로 가면서 혼자서 몇 번이고 다짐을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 때문에 아버지와 육 여사가 싸우는 일은 없도록 최대한 조심하자는 야무진 결심이었다.
 
  두 분과 함께 사는 동안 두 분이 크게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육 여사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닐까, 나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 왜 육 여사의 얼굴이 그렇게 어두웠는지 그 의문이 풀린 것은 내가 결혼한 후였다. 아버지의 부관이었던 남편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아버지의 여자 문제 때문에 당시 육 여사는 늘 수심에 잠겨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가끔 집에서 나와 마주치면 내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는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한 일이지만, 그때마다 나는 쌀쌀맞은 표정으로 아버지를 대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내가 육 여사와 친하게 지낼 수 있게 하려고 여러 모로 애를 쓰셨다. 나를 따로 불러 용돈을 주시는 일도 없었고, 아버지와 내가 단 둘이 얘기하는 기회도 만들지 않았다. 내가 용돈을 달라거나 의논이라도 할라치면 아버지는 늘 “어머니와 상의하라”고 하셨다. 내가 육 여사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해서였다.
 
  육 여사와 나는 열두 살 차이였다. 나는 ‘어머니’라는 호칭이 쉽사리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을 때에만 어렵사리 그 호칭을 이용하곤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당시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육 여사가 나의 친어머니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였다.
 
 
  결혼
 
  내가 결혼을 한 때는 우리 가족이 신당동에 살고 있던 1958년이었다. 남편은 아버지의 부관으로 우리 집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때부터 안면을 익히기 시작해 결혼에까지 이른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덕여대에 진학한 후 나는 빨리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남편의 청혼을 받고 나는 ‘차라리 잘됐다. 어차피 결혼할 거면 일찍 해버리자’는 결심이 서서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버지 월급으로 어렵게 꾸려나가는 집안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데다가 육 여사가 임신 중이어서 몸도 편치 않은데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께 우리가 쓸 이부자리만 한 채 해주시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웨딩드레스도 낭비인 것 같아 흰색 한복을 한 벌 지었다. 흰색 한복 한 벌이면 나중에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을 것 같아 실용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나는 결혼을 위해 아무것도 새로 마련하지 않고 시집을 갔다. 옷장은커녕 새 옷 한 벌 장만하지 못했다. 그래도 결혼반지만큼은 백금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것이었다.
 
  남편은 내게 결혼반지를 구리반지로 하자고 그랬다. 좋은 반지를 하면 살림이 어려울 때 팔아버릴 우려가 있지만 구리반지라면 절대로 팔게 될 리가 없으니 진짜 영원한 결혼반지가 될 수 있으리란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철이 덜 들었는지 그것만큼은 싫다고 우겨서 결국 백금반지를 마련했다.
 
  결혼식은 지금은 없어진 서울 종로의 동원예식장에서 했다. 주례는 원용덕(元容德) 장군이었는데 이날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도 어쩐지 착잡하신 것 같았다.
 
 
  지척에 살면서 서로 몰랐던 아버지와 어머니
 
  대구에서 헤어진 어머니를 만나게 된 때는 결혼 후였다. 나는 다시 외갓집에 연락해서 어머니가 부산 어딘가에 있는 절에 살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남편과 함께 부산의 그 절로 어머니를 뵈러 갔다. 절에서, 재혼한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키우며 살고 계시던 어머니는 나의 갑작스런 방문에 깜짝 놀라 나를 붙들고 무척 많이 우셨다.
 
  나는 어머니께 “이제부터는 내가 모실 테니 우리와 함께 가자”고 졸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셨다.
 
  “나는 세상이 귀찮으니 그냥 절에 있겠다. 나는 사가(私家)에 살면 잡념이 생기는 사람이다. 모든 것은 업보(業報)이니 내가 여기서 기도하며 살 수 있도록 나를 그대로 둬라.”
 
  결국은 우리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 후에는 어머니가 가끔씩 우리 집에 찾아오시곤 했으므로 나는 한결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었다.
 
  나는 그때 부산의 절을 찾아갔다가 기절할 만큼 놀랐는데 어머니가 머무시던 절이 군수기지사령관으로 계시던 당시 아버지의 관사 지척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두 분 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셨지만 도대체 무슨 인연인지 어머니 계신 절에서 아버지의 숙소가 내려다보이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떠난 때는 1962년 4월이었다. 5·16이 난 지 1년도 채 안 되어서였다. 우리는 곧 여기가 우리가 있어서는 안 될 자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를 둘러싸고 별의별 소문이 다 퍼져나갔다. 시아버지 위패(位牌)를 모신 대구의 한 절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친어머니를 찾아갔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돌아다녔다.
 
  한번은 남편의 동기들이 당시 정보부장이던 김재춘(金在春)씨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남편 친구들이 우리 이야기를 하자 김재춘씨는 “앞으로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마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우리에게 거리를 두고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뜸해지고 우리는 고립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불안했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 있으면 아버지께 누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결국 미국행을 택한 것이다. 결심을 굳힌 남편은 김종필씨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우리 가족은 곧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로…
 
한병기씨가 駐칠레대사로 있던 1974년 대사관저에서 찍은 가족 사진.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신 후에 내가 얼마나 미묘한 입장에 서게 되었는지를 일일이 설명하기는 힘들다. 내가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로 어떤 특혜를 받고 있다는 말이 나올까 두려웠고, 내 행동이 내 의도와는 달리 아버지와 육 여사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염려스러웠다.
 
  한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내던 상모리의 대가족들이 아버지에게 갖는 불만도 컸다. 집안에 대통령이 났는데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친척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냉랭한 태도에 속이 상한 친척들은 나만 보면 참았던 이야기들을 퍼부어댔다. 아버지에게 가서 이런 얘기를 해봐라, 저런 부탁을 해봐라, 나에게 쏟아지는 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탓에 나는 그런 것에 관해서는 입도 뻥긋 하지 못했다. 나는 친척들에게 아예 “저도 청와대에 못 들어가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친척들은 “딸도 못 들어오게 한다더냐”며 화를 내곤 했다.
 
  나는 아버지와 친척들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지금도 친척들은 “나는 청와대에 가서 물 한 잔도 못 얻어먹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아버지가 청와대에 계실 때 나는 육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아버지를 뵙고 싶어요”라고 말씀드리면 육 여사는 먼저 “급한 일이냐”고 물으셨다. 그렇다고 하면 “저녁때 와서 식사나 같이 하자”거나 “몇 시쯤 들르라”고 말씀해주시곤 했다. 육 여사가 돌아가신 후에는 늘 근혜를 통해 이야기를 전하곤 했다. 아버지와 직접 통화한 일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가끔 내게 용돈을 주신 적도 있다. 그때마다 내게 “어디 가서 남이 주는 돈 함부로 받지 마라. 누구에게 함부로 손 벌리지 말아라. 그러면 네가 다친다”는 이야기를 꼭 하셨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버지에게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던 내가 꼭 한 번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울어버린 일이 있다. 1967년의 일이다. 우리는 남편이 공화당의 공천(公薦)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새벽 영옥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명단에 남편 이름이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청와대로 찾아갔다. 육 여사에게 한참 하소연하고 나서 돌아서려는데 육 여사가 “아버지 뵙고 가야지” 하시기에 아버지 집무실을 찾아갔다.
 
  나는 “아버지,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이렇게 됐으니 이제 어떻게 하지요”라고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나를 달래셨다.
 
  “정치를 해봐라. 그건 결코 행복한 게 아니다. 이제 네가 코흘리개 시절의 이야기까지 낱낱이 들추어지고 별별 이야기를 다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끝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지 않으냐. 남편이 정치를 한다는 건 여러 가지 면에서 너에게 불행이 되면 됐지 좋은 일은 아니다. 남편이 출세한다고 여자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야.”
 
  나는 화가 나서 “그것도 아버지 생각이지요. 그래도 하려던 일인데…”라고 말하다가 울면서 그대로 그 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육 여사는 아버지와 똑같은 이야기로 나를 설득하려 하셨다.
 
  “여자들이 남편 성공시키려고 하지만 그런다고 여자가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남편 출세해 봐야 그 부인은 남편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어지는데 여자들이 그걸 몰라서 그렇게 설치는 거야.”
 
  백번 옳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재혼은 하지 않겠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도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산 기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한때는 그토록 원망한 아버지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어머니를 이해했듯 아버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미안한 마음도 커져만 갔다.
 
  나는 아버지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내게 이상형의 남성상이었다. 늘 말이 없고 조용하신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취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집에 돌아오셨을 때는 늘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고 계셨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시는 저녁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 주무시곤 하셨다.
 
  내가 아들을 낳았을 때 나는 ‘이 아이를 잘 키워 육사(陸士)에 보내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어야지’ 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큰아이가 시력이 좋지 않아 육사는커녕 군대에도 못 가게 됐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 아들을 아버지처럼 만들 수 없게 된 것이 그렇게 속상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건 1978년 봄, 공관장 회의가 있어 서울에 왔을 때였다. 물론 그때는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청와대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별말을 안 하셨다. 여러 번을 만나도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란 것이 고작 “언제 왔나?” “언제 가나?” 정도였고, 그날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하실 때 그것은 늘 남편과 아버지 사이의 화제였다.
 
  아버지가 혼자서 동생들을 데리고 사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장례식이 끝나고 난 후 아버지와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는 “나는 재혼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일이 워낙 바쁘시니까 외로움쯤이야 잊고 사시려니 생각한 것이 불찰이었다.
 
 
  凶夢
 
  1978년 봄 이후에는 어찌 된 일인지 아버지와의 통로가 꽉 막혀버린 것만 같았다. 직간접으로 듣는 한국의 정정(政情)은 누가 보아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서울에서 날아드는 갖가지 소식과 풍문은 이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특히 남편은 온갖 외신들을 일일이 점검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뭔가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인지 나에게는 충분한 설명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 혼자서 무슨 속을 그렇게 끓이는지 꼬챙이처럼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카리브해 연안의 작은 섬나라 도미니카공화국에서였다. 남편은 당시 캐나다대사로서 카리브해 연안의 몇몇 섬나라 대사도 겸임하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아 축하 사절로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미니카공화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캐나다대사관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며, 한국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기어코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전날,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나는 꿈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꿈속에서 나는 이전에 남편이 대사로 있던 칠레에 가 있었다. 무슨 큰 행사가 열렸는지 피노체트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커다란 검은색 자동차가 사람들이 모여 있던 건물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그 차에서 역시 검은색 옷차림의 아버지와 육영수 여사가 내렸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다가 내 앞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피노체트 대통령이 아버지를 붙들고 “당신 딸이 여기 있다”고 나를 소개했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모른 체하고 그냥 획 돌아서 가셨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검은색 옷을 입은 꿈은 좋지 않은 징조라던데….
 
  캐나다대사관에 급히 연락을 취했더니 ‘유고(有故)’라는 대답이 왔다. ‘유고’라니 ‘사고가 있다’는 뜻인 모양인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을 의미한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허리케인으로 엉망이 된 도미니카의 공항이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당일로 서울에 갈 방법이 없었다. 어찌어찌해서 미국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잡아탔다. 뉴욕에 가니 남편 친구들이 서울에는 가지 말라고 충고했다.
 
  “아무래도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 같다. 한국의 정정이 이토록 불안한데 지금 가서 어쩌겠다는 거냐. 여기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천천히 가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 가족도 위험할지 몰라.”
 
 
  아버지 死後에 얻은 자유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 國葬에 참석한 유족과 친지들. 앞줄 왼쪽부터 상주 박지만, 큰 영애 박근혜, 작은 영애 박근영, 뒷줄 왼쪽부터 김종필 前 총리와 장녀 예리씨, 육인수 공화당 중앙위 의장 부부, 한병기 駐캐나다대사와 박재옥씨. 사진=조선DB
  그러나 남편과 나는 그럴 수는 없었다. 뉴욕을 떠나 도쿄에 도착하니 당시 주일대사관 공보관이던 이원홍(李元洪)씨가 나와 있었다. 이원홍씨의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가 비로소 세상을 떠나셨음을 알았고, 서울 상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달려왔지만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0월 29일 저녁, 입관(入棺)이 끝난 상태였다. 사람들은 내게 마지막 인사니 아버지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싫다고 했다.
 
  “됐어. 나는 아버지 돌아가신 모습은 보지 않을 거야. 그냥 살아 계실 때 모습만 기억하면서 아버지가 늘 그렇게 살아 계시겠거니 그렇게 생각하고 살 거야.”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계시는 동안 나는 10년을 외국에서 살았다. 미국과 칠레, 캐나다에서 조용히 지냈다. 숨어 살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어쨌든 남 앞에 나서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 덕에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거리를 돌아다녀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니 나는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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