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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외교전쟁 1년, 다시 생각하는 韓日관계

한국을 사랑했던 일본인, 일본을 사랑했던 한국인

글 : 장상인  JSI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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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誠信交隣’을 주장했던 에도 시대의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
⊙ 국경을 넘는 제자 사랑을 보여준 진주농고 교장 이마무라 다다오
⊙ ‘생명의 은인’의 나라 조선의 孤兒들을 돌본 소다 가이치
⊙ 포스코 건설 등 돕고, 한국 땅에 묻힌 가나야마 마사히데 대사
⊙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했던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
⊙ 철로에 떨어진 취객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이수현

장상인
1950년생. 동국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석사, 인하대 대학원 언론정보학 박사과정 수료 / 대우건설 기획부장·홍보부장·마케팅담당 상무·문화홍보실장·이사, 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이사, 경희대 언론학부 겸임교수 역임. 現 JSI파트너스 대표이사, 《부동산신문》 대표이사 발행인
韓日 친선을 위해 애쓴 사람들.(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아메노모리 호슈, 소다 가이치, 가나야마 마사히데, 이수현, 후세 다쓰지.
  한국과 일본을 오간 사람이 2019년 한 해 885만여 명이었다. 한국에서 558만여 명이 일본을 다녀왔고, 327만여 명이 일본에서 한국을 다녀갔다. 2018년에 비해 대폭 감소한 수치이다. 코로나19의 영향이 크지만, 외교력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대화가 실종된 것이 큰 이유이다. 이와 같이 골이 깊어질수록 피해는 고스란히 양국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양국의 선린우호를 바라는 사람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국 관계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역사 속의 인물 중에서 ‘한국을 사랑했던 일본인’ ‘일본을 사랑했던 한국인’을 발굴해 양국의 관계 개선을 위한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성신교린의
  아메노모리 호슈
 
  꽉 막힌 한일관계를 보면 오래전 ‘성신교린(誠信交隣)’을 주창한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가 떠오른다. ‘성신교린’이란 무엇인가.
 
  “성신(誠信)이라는 것은 진심이란 뜻으로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고, 진심(眞心)으로 교류하는 것이다. … 성신의 교류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이웃 나라의 사정을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고, 말로써 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메노모리 호슈가 생전에 줄곧 강조하면서 몸소 실천했던 성신교린이다. 그는 1668년 5월 17일 일본 시가현(滋賀縣)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던 그는 일찍이 한문을 배웠다. 스승은 자신의 부친이었다. 9세 때 지은 그의 한시(漢詩)가 예사롭지 않다.
 
  寒到夜前雪
  凍民安免愁
  我儕猶可喜
  穿得好衣遊
 
  간밤에 내린 눈으로 추위는 닥쳤는데
  추위에 떠는 사람들 어떻게 근심을 면할까
  우리가 그래도 기쁜 것은
  떨어진 옷을 입고서도 노는 것을 좋아한다네
 
  아메노모리 호슈는 1693년 26세에 쓰시마(對馬島)의 외교 담당 문관으로 부임해서 1755년 88세로 생을 마감했다. 조선어와 중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특히 조선과의 성신교린을 모토로 하는 외교철학으로 조선의 유학자들과 많은 교류를 했다. 그는 항상 시대에 앞서가는 생각을 했고, 언행이 일치했다. 쓰시마 출신이 아니면서도 쓰시마에서 일했고 그곳에 묻혔다.
 
 
  “公的 일을 할 때는 나를 잊어버려야”
 
쓰시마에 있는 아메노모리 호슈의 현창비.
  쓰시마의 이즈하라시 민속자료관 앞마당에는 아메노모리 호슈 선생의 현창비(顯彰碑)가 있다. 자료관 내부에는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비롯해서 쓰시마의 역사와 자연 환경 등이 전시돼 있다. 호슈 선생 삶의 궤적도 한눈으로 볼 수 있다. 그중에서 선생의 다음과 같은 글이 필자의 가슴에 와닿았다.
 
  “공적(公的)인 일을 할 때는 나를 잊어버리고, 국가의 일을 할 때는 가문을 잊어야 한다(公爾忘私 國爾忘家).”
 
  우리 모두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금언(金言)이 아닌가. 오늘날 공직자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너무나 공감이 가는 말이다. 쓰시마 출신 학자 나가도메 히사에(永留久惠)는 저서 《조선을 사랑한 아메노모리 호슈》에서 ‘公爾忘私 國爾忘家’를 “정치를 하는 사람은 눈앞의 업무도 중요하지만, 그뿐만이 아닌 먼 장래에 대한 큰 계획으로 희망을 갖고 업무에 정진하도록 훈시한 것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우삼동(雨森東)이라는 조선 이름을 쓰면서 조선어, 그것도 ‘경상도 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했다’는 아메노모리 호슈.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성신교린’이 우리의 세대에서 다시금 빛을 보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민족과 국경을 초월한 교육자’
  이마무라 다다오
 
  일반인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마무라 다다오(今村忠夫·1887~1963) 선생의 한국 사랑도 감동적이다. 그는 일본 고치(高知)현 도사시(土佐市) 출신이다. 이곳에서 중·고교를 마치고 홋카이도대학 농학부를 졸업했다. 1920년 조선총독부에 발령받은 그는 1925년 5월 8일 진주농립공업학교(현 경남과학기술대학) 교장으로 부임해서 해방을 맞은 1945년 8월 15일까지 재임했다. 그는 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실천궁행(實踐躬行·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밟고 몸소 행한다)의 교풍을 진작시켰으며, 진주농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마무라(今村) 교장과 달리 조선 학생들을 무시하고 망언을 하는 괴팍한 일본인 교사가 있었다. 이마무라 교장이 부임한 지 2년째인 1927년의 일이다. 그 교사는 “내 목이 떨어져도 조선은 독립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격분한 진주농고 2학년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당시 일본 경찰은 주동 학생들의 퇴학(退學)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마무라 교장은 학생들의 편에 서서 경찰을 설득했다.
 
  “퇴학은 무리입니다. 정학(停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일본인을 향한 보복행위가 많았으나, 이마무라 교장은 제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마무라 교장은 퇴직금 전액을 자신이 20년간 몸담았던 학교의 도서 구입비로 기부했다. 퇴직금을 기부받은 학교는 그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장학회를 만들었다. 이마무라 교장의 이름을 딴 ‘금촌(今村) 장학회’가 탄생한 것이다.
 
 
  제자들이 일본에 송덕비 다시 세워
 
일본 도사시에 있는 前 진주농고 교장 이마무라 다다오 선생의 송덕비.
  해방 후 학교 안에 있던 이마무라의 송덕비(頌德碑)가 일제(日帝) 잔재 청산 차원에서 없어졌다. 그의 송덕비는 철거된 지 43년 만에 일본에 다시 세워졌다. 1988년의 일이다. 진주농고의 옛 제자들이 기금을 모아서 이마무라 선생의 생가가 있던 일본 고치현 도사시에 ‘은사의 송덕비’를 재건한 것이다. 비명은 옛 제자인 은초 정명수씨가, 비문은 설창수씨가 썼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반세기의 시간을 넘어 일본과 한국이 맺은 사제(師弟) 간의 사랑”이라면서 이 일을 보도했다. 경남 과학기술대학교 홍보담당 윤성민(45)씨의 말이다.
 
  “저도 지난해 여름 김남경 총장님을 따라 일본의 이마무라 선생 묘지와 현창비에 가서 참배를 했습니다. 총장님께서는 ‘친일파(親日派)가 아니라, 지일파(知日派)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학교는 한일합방 후 1대부터 6대까지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이 근무했습니다. 그중에서 6대의 이마무라 교장께서는 진주농고 학생들의 항일(抗日)이 3·1운동에 이어서 두 번째 독립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떠난 참 교육자로서 조선의 학생들을 보살피셨던 것입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마무라 다다오 교장의 손자인 이마무라 마사키(今村昌幹·68) 박사는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할아버지에게 은혜를 갚는 것보다 이 은혜가 지속적으로 유지돼서 한일관계가 미래지향적으로 발전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마무라 교장의 아들 이마무라 쇼코(今村昌耕·1917~2017)에 이어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서 학교 발전을 위해 후원하고 있는 이마무라 가문의 한국 사랑은 이렇게 진한 울림이 되고 있다.
 
 
  ‘은인의 나라’ 한국의 고아들을 돌본
  소다 가이치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이 있다. 면적 1만3224m2인 이 묘원에는 선교사와 그 가족을 포함해 구한말(舊韓末) 이래 이 땅을 밟았다가 세상을 떠난 417명이 잠들어 있다. 그들의 국적을 보면 미국·영국·캐나다·프랑스·필리핀·남아프리카공화국 등 15개 나라에 이른다. 그중에 유일한 일본인 묘가 있다.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1867~1962)의 묘다. 그의 비문(碑文)에는 그가 양화진에 묻힌 이유가 잘 적혀 있다.
 
  〈소다(曾田)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1867년 10월 20일 일본국 야마구치(山口)현에서 출생했다. 1913년 서울에서 가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을 창설하매, 따뜻한 품에 자라난 고아(孤兒)가 수천이리라. 1919년 독립운동 시에는 구속된 청년의 구호에 진력(盡力)하고, 그 후 80세까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 종전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국민적 참회(懺悔)를 순회 역설했다. 95세 5월 다시 한국에 돌아와 가마쿠라보육원 자리에 있는 ‘영락(永樂)보린원’에서 1962년 3월 28일 장서(長逝)하니 향년(享年) 96세라. 동년(同年) 4월 2일 한국 사회단체 연합으로 비(碑)를 세우노라. 1950년 1월. 부인 다키코 여사도 서울에서 서거(逝去)했다.〉
 
  선생의 묘소에 있는 안내문에도 소다 선생의 업적과 함께 그가 한국을 사랑하게 된 이유가 상세히 적혀 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그의 젊은 시절은 방황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소다(曾田)가 (대만에서) 술에 만취된 채 노상에서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다. 이때 무명(無名)의 한국 사람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05년 소다(曾田)는 ‘은인의 나라인 한국에 은혜를 갚으리라’ 결심하고, 한국에 와 서울 YMCA 일본어 선생이 되었다.〉
 
 
  근대식 고아원의 효시
 
서울 양화진외국인묘원에 있는 소다 가이치의 묘.
  성(姓)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은혜를 갚기 위해 조선을 사랑했다? 참으로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 아닌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이름 모를 한국 사람을 위해 그 나라에 헌신한다’는 마음가짐-진정한 인간애를 지닌 사람임에 틀림없다.
 
  소다 가이치는 1962년 3월 28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370번지 영락보린원에서 별세했다. 선생의 죽음에 대해 많은 한국인이 슬퍼했다. 그의 장례식은 한국사회단체연합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정부·사회단체 관계자 및 시민 2000여 명이 참가했다. 그 당시 언론들은 ‘국경과 민족의 벽을 넘은 진실한 사랑의 봉사자’라고 대서특필했다.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는 한국 근대식 고아원의 효시였다. 영락보린원의 전신이다. 소다는 해방 후 일본에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에 와서 영락보린원에서 1년여 동안 기거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평소 가슴에 간직했던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이뤘던 것이다.
 
  이러한 그에게 한국 정부는 1962년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한일국교정상화가 되기 전의 일이라 이례적인 일로 평가됐다. 그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는 생전에 고아들을 돕기 위해 식품이나 의류가 동이 나면 헌옷이나 식료품을 모집하러 다녔다. 일본인들은 그를 보면서 ‘국가의 수치(羞恥)’라고 비웃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고아들을 가르치고, 먹이고, 입히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는 진정한 한국 고아의 아버지였다.
 
 
  한국 땅에 묻힌
  가나야마 마사히데
 
  “나의 시신은 한국 땅에 묻어달라. 나는 죽어서도 일한(日韓) 간의 친선과 친화를 돕고, 지켜보고 싶다.”
 
  제2대 주한(駐韓) 일본대사였던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1909~1997)의 유언이 독특하다. 그의 묘지는 경기도 파주시 정문로의 하늘묘원에 있다. 주한 일본대사를 지낸 사람이 일본이 아닌 한국 땅에 묻힌 이유는 무엇일까. 묘비에 새겨진 글을 통해서 알아본다.
 
  〈이 무덤의 주인공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님은 1909년 1월 24일 일본국(日本國) 도쿄도(東京都) 세다가야구(世田谷區)에서 육군 장성의 자제로 태어났다. 일찍이 국립동경대학 정치학과에 재학 중 가톨릭에 입문하여 그의 천성이라고도 할 박애주의적 세계관과 인간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1934년 학업을 마치고 같은 해 국가공무원 상급시험 외교과에 합격해서 바로 외교관으로 출발, 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 등 주재공관의 서기관으로 일하다가 1942년 바티칸 일본 사절관·참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중과 종전 후를 합쳐 10년간이나 바티칸에 머물렀다. 그의 독실한 신앙생활과 성실한 인간성으로 교황 바오로 12세를 비롯한 성청(聖廳) 내 여러 성직자의 두터운 신임을 사서 전후(戰後) 일본의 전범(戰犯)처리와 평화재건문제 등에 전폭적 지원을 받음으로써 크게 공헌한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필리핀을 거쳐 1968년 한국대사로 부임하게 된 가나야마 대사는 한국 사람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특히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포항종합제철(포스코) 건설 등 한국의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72년 외교관직을 퇴임한 후에도 한국과의 우호 증진을 위한 일을 했다. 그는 국제관계공동연구소 소장, 일한문화협회중앙회 회장, 일한친선협회 이사장, 수림외어학교 교장, 목포 공생원 이사 등을 역임했다. 다시금 비문의 내용을 들여다봤다.
 
 
  “바른 지식 위에서만 상호 신뢰관계 성립”
 
1969년 12월 3일 경제기획원에서 열린 종합제철 한일기본협약 체결식. 앞줄 오른쪽부터 박태준 포철 사장, 가나야마 대사,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1973년 도쿄한국연구원 최서면(崔書勉) 원장을 찾아서 참여를 자원하여 동원(同院)의 이사로 취임함과 더불어 국제공동연구소를 병설하고, 그 초대 소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문제를 깊이 연구하여 한일관계의 친화를 굳히는 데 힘을 기울이고, 아울러 한국의 국제적 선양에 이바지하였다. 이렇듯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여 마지않던 그가 1997년 11월 1일 이승을 떠나니 향년 88세였다. 평생에 추구하고 실천한 가톨릭적 박애주의의 완수, 그것이 곧 그의 생애(生涯)였다. 고인은 생전 유족에게 거듭 ‘나의 시신은 한국 땅에 묻어달라. 나는 죽어서도 일한 간의 친선과 친화를 돕고, 지켜보고 싶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명(幽明)을 달리한 뒤 유족을 비롯해 이제까지 그를 기리는 한일 양국 간의 친지들이 이렇듯 여기에 무덤을 짓고 우정의 징표로서 돌 하나를 세우는 바이다.〉
 
  1998년 8월 28일에 세워진 비문이다. 시인 구상(具常·1919~2004) 선생이 글을 지었고 서예가 김단희(金端喜) 선생이 글씨를 썼다. 가나야마 대사가 1992년에 발간한 저서 《일한 신시대의 꿈》에는 한국과 일본의 아픈 상처는 물론 미래를 위한 고언(苦言)이 듬뿍 담겨 있다.
 
  〈과거의 불행한 역사 위에 새로운 일한 양국의 신뢰관계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절대적인 과제이고, 또한 그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 당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선 서로를 아는 것이었다. 올바른 지식 위에서만이 상호 신뢰관계도 성립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어느 한쪽만이 일방적으로 좋다고 하고 다른 한쪽이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서로가 좋아지는 도리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가나야마 대사는 책에서 ‘한국민의 우수성을 인정하면서 일본과 한국이 서로 잘 지내야 미래가 있다’는 것을 수없이 강조했다. 남북이 통일을 해서 하나가 되는 것도 간절히 소망했다. 그의 소망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
 
 
  ‘일본판 쉰들러’
  후세 다쓰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했다.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춘원 이광수(李光洙)는 같은 대학에 다니던 최팔용(崔八鏞)을 비롯한 조선인 유학생들을 규합해서 선언서를 발표하는 거사를 주도했다.
 
  이로 인해 유학생 60여 명이 체포됐고, 최팔용・백관수 등 8명이 기소됐다. 이 조선 유학생들을 변호한 사람이 바로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 변호사였다. 그는 최팔용과 백관수, 송계백을 변호하면서 이들에게 적용된 내란죄 혐의에 대해 무죄(無罪)를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관헌(官憲)의 착취와 학대, 차별 문제 등을 규탄·항의하는 등 항상 조선인들의 편에 섰다. 그는 ‘차별을 받아 살 곳이 정해지지 않는다’는 일상생활의 문제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 시대의 ‘인권변호사’였던 셈이다.
 
  후세(布施) 변호사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많은 조선인이 수시로 그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는 일본인이면서 조선인을 위해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를 ‘일본의 쉰들러’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러한 공적으로 우리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을 수여했다. 일본인으로서 건국훈장을 받은 것은 그가 최초이다. 그가 눈을 감은 지 50년이 흐른 2004년의 일이다.
 
 
  “민중과 함께”
 
후세 다쓰지 변호사를 기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 앞줄 맨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박용만 駐 센다이 총영사고, 여섯 번째가 마쓰우라 겐타로 회장.
  후세 변호사는 1920년 〈자기혁명의 고백〉을 통해 “일본 국내의 사회문제만이 아니라 조선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에도 직접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과 대만인까지 포함한 양심선언이었다. 일본인 운동가와 사상가의 민주주의적 성향을 가늠하는 기준의 하나로 식민지 문제와 피억압(被壓迫) 민족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다. 후세는 분명 다른 사람보다 한걸음 앞서가는 선각자였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못 말리는 사람이다. ‘조선인의 벗’ 후세 변호사는 항상 재판장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조선 민중이 모두 이 재판을 주목합니다. 피고들의 향후 활동에 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조선 민중의 비통한 양심의 소리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후세 변호사는 조선인을 변론한 것 때문에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30년대에만 세 차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두 번이나 투옥됐다. 그는 8·15광복 후에도 한신(阪神) 교육투쟁 사건, 도쿄(東京) 조선고등학교 사건 등 재일본 한국인과 관련된 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또한 1946년에는 광복된 한국을 위해 〈조선 건국헌법초안(草案)〉을 저술했다. 무정부주의자로 일본 천황 암살을 기도하다가 투옥됐던 박열(朴烈・1902~1974)의 전기 《운명의 승리자 박열》 등을 펴내기도 했다.
 
  그의 고향 미야기(宮城)현 이시노마키(石卷)시의 공원에는 커다란 현창비가 근엄하게 서 있다. 비(碑) 또한 흘러간 세월을 대변하는 듯 고색창연했다. 변호사 후세 다쓰지 현창비(辯護士 布施辰治 顯彰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이 비는 1993년 11월 13일 후세 다쓰지 현창회가 건립했다. 글은 나고야시립여자단기대학 모리 다다시(森正) 교수가 썼다.
 
  〈1935년 9월 13일 국내외에서 경애를 받던 불세출의 전투적 인도주의자는 73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민중의 인권옹호를 위해 생애를 바친 후세 다쓰지의 발자취는 근현대적 일본의 인권사에 찬연히 빛을 발하고 있다〉.
 
 
  ‘신오쿠보 역의 전설’
  이수현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李秀賢)씨, 카메라맨 세키네 시로(關根史郞)씨는 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15분경, 신오쿠보(新大久保)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위험을 무릅쓴 채 용감히 선로에 뛰어들어 인명을 구하려다 고귀한 목숨을 바쳤습니다. 두 분의 숭고한 정신과 용감한 행동을 영원히 기리고자 여기에 이 글을 남깁니다. 동일본여객철도주식회사〉
 
  도쿄의 JR신오쿠보역 벽면에 있는 초록색 동판(銅版)의 글이다. 글은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필자는 2019년 9월 ‘위령의 동판’ 앞에 서서 묵념을 했다. 18년이 지나서일까. 필자와 ‘위령의 동판’을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쁜 일상에 쫓기는 것도 있지만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당연할 터이다. 필자는 묵념을 마친 후 역구내의 계단을 올라갔다. 순간 전차가 길게 호흡을 하면서 들어섰다. 필자는 눈을 감고 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15분경의 상황을 그려봤다.
 
  유학생 이수현(李秀賢)은 그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일본 도쿄도 신주쿠(新宿)에 위치한 JR히가시니혼 야마노테선의 신오쿠보역에서 기숙사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술에 취한 한 남자(사카모토 세이코·당시 37세)가 반대편 선로에 추락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선로로 뛰어내렸다. 취객을 선로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한 사람이 더 선로로 내려와 그를 도왔다. 일본인 카메라맨 세키네 시로(關根史郞·당시 47세)였다. 사람을 발견하고서도 멈추지 못한 열차가 빠른 속도로 들어왔고 미처 선로를 빠져나오지 못한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일본인들에게 ‘충격’ 안겨줘
 
  이 사건으로 일본 사회가 충격으로 들끓었다. 그저 못 본 체하고 지나갔어도 아무도 탓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본인도 아닌, 일본에 유학 온 젊은이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졌다’는 뉴스에 일본인들은 단순한 ‘감동’ 수준을 넘어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빈소에는 모리 요시로(森喜郞) 당시 일본 총리와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 등이 찾아와 일본 정부를 대표해 조의(弔意)를 표했다. 이후 ‘이수현의 할아버지가 일본 탄광에 끌려갔던 강제징용 피해자였다’는 일본과의 악연(惡緣)이 알려지면서 세상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이수현은 울산광역시 출신으로 부산에서 성장해 1993년 고려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1999년 7월 대학을 휴학하고, 이듬해 1월 일본 도쿄에 있는 아카몬카이(赤門會) 일본어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그는 학교에 제출한 유학 동기서에 ‘두 나라의 교역과 문화 교류에 있어 확실한 제1인자가 되고자 한다’고 썼다.
 
  2001년 정부는 그를 의사자(義死者)로 선정해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지금 부산시립 영락공원에 잠들어 있다. 고인의 이름을 딴 LSH 아시아장학회가 2002년 1월에 설립・운영되고 있다. 지금까지 1000여 명의 학생(아시아 유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았다.
 
 
  “양국 관계 좋아졌으면…”
 
  필자는 2019년 10월 부산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이수현 추모비’ 앞에서 모친 신윤찬(69)씨를 만났다.
 
  ― 다큐멘터리 영화 〈가케하시(懸橋·가교)〉를 일본인들과 같이 관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그리고 양국관계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세요.
 
  “2008년의 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가 이수현 중심이라면 〈가케하시〉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1부는 사고 당시의 상황과 장학회의 활동,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의 모습을 그렸고, 2부는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들이 교류하는 모습과 수현이의 연고(緣故) 지역에 대해서 다뤘더군요.
 
  수현이의 18주년 추모회와 더불어 도쿄에서 시사회를 가졌습니다. 그때도 많은 분이 함께해주셨습니다. 시사회를 마치고서 제가 인사말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남편(이성대)이 아들 곁으로 떠난(2019년 3월) 슬픔도 있었지만, 양국관계가 어려운 오늘에 있어서도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정치를 모르는 가정주부이지만, 양국관계가 좋아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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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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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민현    (2020-08-15) 찬성 : 1   반대 : 0
보통의 일본사람들과 대화를나누면서 독도는 한국영토라고하면 사람들은그래 독도는 한국영토맞어라고 이야기를합니다 놀랍기도했지만 일본의 극우인들을빼고는 보통의 일본인들의 생각입니다...누차 언급을했지만 일본에선 아베와같은 극우세력들이 반한감정을부추겨가며 원하는바를 이루어가듯이 이땅에서는 삶은소머리들이 반일감정을 부추겨가며 정치적인 영향력을 영위해가고있습니다 지난역사에대한반성요?일본사람들끝까지하지않을겁니다 반성이라는게 강요해서되는것도 아닌데,우리는 우리들의 국익과 보편타당한 가치관을갖고 살면 되는겁니다
  이정자    (2020-08-09) 찬성 : 5   반대 : 0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인물들입니다.

2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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