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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60周忌… 一家 죽음을 둘러싼 60년 미스터리

그들의 죽음과 관련해 타살설이 계속되는 이유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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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살, 자살 전 행적, 현장 수사, 검시 기록 全無
⊙ 이기붕 증조부는 흥선대원군 사람… 예조판서 올랐으나 賜死당해
⊙ 집안 몰락으로 이기붕 조부 때 충북 괴산에 정착
⊙ 만송은 국회의장 시절(1956년), 門中에 1000만 환 쾌척… 요즘 시세로 수천억원?
⊙ 만송 일가 죽음, “당시 이승만 경호책임자인 ‘郭某’의 짓 아닐까”… 경무대 서장인 곽영주?
  기자는 지난 4월 28일 오전 11시쯤 경기도 고양과 파주 경계의 어느 야산에 있는 만송(晩松) 이기붕(李起鵬·1896~1960) 일가의 묘를 다시 찾았다.(《월간조선》 2020년 5월호 ‘망우리에서 사라진 이기붕 묘를 찾다’ 참조)
 
  일족인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종원들이 모여 만송의 60주기를 추모하는 기신제(忌晨祭)를 올리고 있었다. 기자는 이들을 통해 만송 윗대 조상의 행적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로 언론인인 이성춘(전 한국기자협회장·《한국일보》 부국장)씨가 전화로 현역 기자 시절 취재한 만송의 죽음 뒷이야기를 해주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조성 자문위원인 정종배씨가 만송의 보성중 동기인 최승만(崔承萬·1897~1984)씨의 자서전 《나의 회고록》을 빌려주었다. 책 속에는 만송의 미스터리한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가 많았다.
 
  한 제보자는 이승만(李承晩·1875~ 1965) 하야 후 과도정부의 수반을 지낸 허정(許政·1896~1988)의 회고록을 전해주었다.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려졌어도 잊힌 이야기들이었다. 만송 일가를 기억하고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의 일방적 주장일지 모르나 기록 차원에서 몇 가지를 추려 소개한다.
 
지난 4월 28일 경기도 통일로 인근의 한 묘지에서 전주이씨 효령대군 후손들이 이기붕 일가 60주기를 추모하는 기신제를 올리고 있다.
  문중에 따르면 만송의 출생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북 괴산이다. 괴산군 청천면에 생가가 남아 있다. 1950년대를 기억하는 노인들은 만송이 해마다 여름과 가을 사이 경호원을 데리고 생가를 찾아 자신을 길러준 유모(전주이씨)의 묘소를 찾았다고 한다. 또 마을 주민들의 숙원을 해결하고 그들 자녀의 일자리까지 챙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중부매일》 2003년 6월 15일)
 
  향토사학자 김사진씨는 “이기붕이 부통령이 되자 당시 청천에는 ‘남한(이기붕)과 북한(홍명희·당시 부수상) 2인자가 모두 괴산에서 나왔다’는 말이 돌았다”고 말했다.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종회(宗會)에 따르면 효령대군파 자손의 수가 현재 50만명에 이르는데 만송은 효령대군의 18대손이라고 한다. 또 벼슬한 윗대 조상이 많은 대학자 집안이었다.
 
  효령대군의 6세(世)인 량(樑·이조판서)에서 7세 정빈(廷賓·이조좌랑) → 8세 명(溟·호조판서) → 9세 민발(敏發·전라좌도수군절도사) → 10세 계(啓·병조참판) → 11세 득형(得馨·통훈대부) → 12세 도(·이조참의) → 13세 현묵(顯默·이조참판) → 14세 원달(源達·병조참판) → 15세 회정(會正·예조판서)까지 모두 중앙에서 고위직에 올랐다.
 
 
  만송의 고향이 충북 괴산인 까닭은…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
  15대손인 만송의 증조부는 정2품 예조판서를 지냈다. 구한말 권력의 정점에 있던 흥선대원군과 지근 사이였다고 한다. 함경감사로 있다가 임오군란 직후 예조판서로 발탁되었다. 이후 정변에 휘말려 가문이 몰락하게 되자 만송의 조부 이석우(李錫宇)는 식솔을 끌고 충북 괴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만송의 아버지 이름은 이낙의(李洛儀)였다. 이판공(吏判公) 종회 관계자의 말이다.
 
  “만송의 증조부(이회정)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에게 발탁되어 예조판서가 되고,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국상(國喪) 발표에 신중론을 폈다가 나흘 만에 예조판서에서 내의원 제조(提調)가 되었지요.
 
  임오군란 주동자 김장손(金長孫) 등을 국문할 때에는 판의금부사가 되었으나 명성황후 장례 문제로 계속 탄핵을 받아 전남 강진의 고금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어요. 1883년(고종 20년) 2월 18일 향리로 방축되었으나 흥선대원군과 같은 파당으로 지목되어 섬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할 계획이 사사(賜死)로 다시 바뀌었습니다.”
 
  이회정은 1883년 사약을 받고 사망했지만, 고종 31년인 1894년 복관이 됐다.
 
  이런 곡절을 겪으며 만송의 조부(이석우)는 지금의 충북 괴산군에 안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송 7세 때 부친이 큰 병을 얻어 부득이 서울로 상경했다고 전해진다.
 
  《동아일보》 기자와 이화여대 부총장, 제주도지사, 제주대 총장을 역임한 최승만의 회고록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와 만송은 퍽 오랜 친구다. 아마 7, 8세 때부터 사직동 도정궁(都正宮) 아래에서 같이 살았었다. 우리 집과 만송의 집 거리도 50m에 불과할 것이다. 만송 자당과 매씨도 잘 알고 지냈고 만송 아버님도 병중의 모습을 잠시 뵈온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는 달랐으나 중학교는 같은 보성으로 같은 반이었다.
 
  이때의 만송 집은 내자동(內資洞)이었고 내 집은 내자동 이웃인 송목동(松木洞·소나무골)이었다. 낮에는 학교에 가고 밤에는 만송집에서 조규수(趙奎洙)씨라는 분의 역사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같은 반 염상섭(廉想涉·소설가)군과 한 해 아랫반 엄항섭(嚴恒燮·임시정부 선전부장)군이 다 누하동(樓下洞)에 살고 있었던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밤이면 네 사람이 모여서 여러 달 동안 유익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만송이 宗會에 건넨 1000만 환의 가치는…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에서 제5대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 부통령이 1960년 3월 18일 오후 서대문 자택에서 국회 및 정당기자단과 회견을 가졌다. 사진=조선일보DB
  만송의 문중에 따르면 만송의 아버지는 만송이 7세 때 세상을 떠났다. 만송은 편모슬하에서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한동안 동네 친구 최승만네 사랑채에서 지내야 할 정도로 살림이 궁색했다. 간난(艱難)을 겪어서인지 만송은 이승만 정권 시절, 최승만이 제주도지사가 될 수 있게 대통령에게 천거했다고 한다.
 
  만송은 자신의 종중과 종회에 애정이 많았다. 1956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大同宗約院)을 창립하고 1960년 3월까지 이사장을 지냈다. 이사장 재임 때 쓴 ‘피는 물보다 진하고 일가는 백대지친(百代之親)’이라는 휘호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국내 많은 씨족단체 중 사단법인체가 된 종회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밖에 없다. 모두 만송이 국회의장 시절에 뒤를 봐주어 가능했다.
 
  1956년 전주이씨 대종회는 서울 종로구 와룡동 139의 건물 및 부지 218평(720.6m2)을 경매로 낙찰받았다. 당시 불하 대금 850여만 환을 마련할 길이 없어 막막했다. 그러자 만송이 사재(私財)로 1000만 환을 쾌척했다고 전한다.
 
  1000만 환의 가치는 얼마일까. 문중 자료를 보니, 22년 전인 1998년 당시 전주이씨 대종회 건물 100여 평(330m2) 과 부지 218평의 가격은 40억원이었다. 문중 관계자는 “불하 대금을 지불하고 남은 150만 환(약 10억원)까지 친다면 어림잡아 50억원이란 금액이 나온다. 말이 쉬워 50억원이지 이런 거금을 내놓을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라고 말했다. 2020년 현재 가치로 본다면, 어쩌면 수천억원의 자산으로 불어났을지 모른다.
 
  만송이 무슨 돈으로 그런 거액을 쾌척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송의 가까운 친인척도 아닌 먼 피붙이들이 해마다 기제사를 올리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효령대군파 이판공 종회장인 이강부(李康夫)씨는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후손들의 단체인 사단법인 청권사(淸權祠·서울 서초구 방배동 190-1 소재)와 보성군(寶城君)파에서 각각 70만원씩 만송을 추모하는 비용을 대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는 30분가량 진행된 기신제를 지켜보았다. 제례 순서에 따라 문중 관계자들이 모두 서 있는 상태에서 헌관(獻官·일종의 祭主)인 이강부씨가 꿇어앉아 향을 사르고 두 번 절했다. 다시 상 앞에 앉으면 우(右)집사가 술병을 들고 헌관 오른편에 꿇어앉고, 좌(左)집사는 잔과 잔대를 들고 헌관의 왼편에 앉았다. 우집사는 잔에 술을 8부 정도 따랐다. 헌관은 왼손으로 잔대를, 오른손으로 술잔을 잡았다.
 
  제사 진행을 낭독하는 이의 손에 든 ‘묘제홀기(墓祭笏記)’를 얼핏 보니 일상생활에서 쓰지 않는 한자투성이였다. 어려운 한자 낭독에 따라 사람들이 묵묵히 의례를 이어갔다.
 
 
  門中에서 말하는 만송 一家 죽음의 미스터리들
 
《조선일보》 1960년 4월28일자 1면. 기사의 헤드라인은 ‘비극으로 끝마친 이기붕씨 일가’였다.
  효령대군파 종회에서 제작한 사보 《청권》 최신호(117호, 지난 2월 발행)에 ‘만송의 억울한 죽음’을 다뤘다. 글쓴이는 청권사 부이사장인 이기윤(李起允)씨다. 그는 한국소설가협회 사무국장, 한국문인협회 감사를 지냈다.
 
  이 부이사장의 의문은 이렇다.
 
  ▲계엄사의 발표대로 1960년 4월 28일 오전 5시40분 이강석이 부모와 동생에게 먼저 총질을 하고 자신을 쏘았다면 3발의 총성이 나고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2발의 총성이 나야 하는데 이날 발표는 잇달아 다섯 발의 총성이 울렸다고 했다. ▲다른 가족은 모두 한 발에 갔고 이강석만은 자신의 가슴과 머리에 2발을 쐈다고 했는데, 검시 결과 양쪽 다 단번에 숨을 거둘 수 있는 급소였다. 따라서 검시관은 1발을 쏜 후 머리나 복부에 다시 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전했다. ▲사건 당시 이무기 비서가 바로 옆방에 있었는데 사건 이후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식구 중 어느 누구도 한 줄의 유서나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만송 일가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만송과 동문수학한 최승만의 회고록에는 만송의 죽음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최승만은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 또는 동생을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는 소문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믿을 수 없는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했다.
 
  ‘양심을 가진 인간이 몹쓸 귀신으로 환장이 되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러한 잔인무도한 일을 감행하겠는가. 여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다’며 ‘다른 사람이 아니고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최승만은 ‘이 대통령 경호책임자인 곽모(郭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곽모란 바로 곽영주(郭永周·1924~1961)를 말한다.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장 격인 경무대 경찰서장이었다. ‘이 대통령의 정권이 더 오래가고 하수인 자신도 영예를 받으리라고 생각해 이런 끔찍한 일을 단행한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는 것이다. 다음은 최승만의 회고록 중 일부다.
 
  〈그 사람(곽영주‐편집자)이 사형까지 당했는데 그 죄가 무엇일까. 그때의 재판관은 알 터인데 왜 지금까지 그 진상이 알려지지 않음은 무슨 까닭일까. 결국 대통령이 물러나게 되기는 했지마는 명령대로 받들어 행한 사람이 참혹하게 끝을 마치다니 말이다. 또 젊은 형제, 강석과 강욱은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불쌍한 죽음을 당해야 했는가.
 
  비록 대통령에게는 만송가족 살해사건에 아무 관련이 없다 할지라도 곽모가 이 대통령을 믿고 한 일임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부하나 자식의 잘못이 있다면 상관이나 부모의 책임이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이 대통령의 양자가 되었던 강석이 희생된 것은 더욱 말할 수 없는 마음 아픈 일이 아닐까.〉
 
  기자는 만송의 7촌 조카인 이세재(李世宰)씨를 만났다. 그는 수도육군병원에 마련된 만송 일가의 빈소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보았다고 기억했다.
 
  “이 대통령이 다른 관들은 그냥 지나쳤는데 양자인 이강석의 관 앞에 서서는 한동안 손을 관 위에 올려놓고 기도하는 듯 보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정이 깊었나 봐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반민특위 경기도 책임자로 있던 이기룡(李起龍)씨가 이승만 대통령과 각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노선은 달랐나 봐요. 이 대통령이 ‘좋은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해서 이기룡씨가 ‘내 (집안) 아우가 있으니까 써보라’고 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라 들었어요.
 
  또 만송과 박마리아가 미국의 교회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성극(聖劇) ‘동방박사’에서 만송이 남주인공을, 박마리아가 여주인공을 맡았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결혼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1982년 《월간조선》에 실린 ‘이기붕 일가 毒殺되었나’ 기사
 
  《월간조선》 1982년 12월호에 실린 ‘이기붕 일가 독살(毒殺)되었나’ 기사에 곽영주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 기사는, 기자가 아닌 극작가 김교식(金敎植)씨가 썼다.
 
  당시 ‘36호 관사’에 들어 있는 이기붕 일가의 모든 일을 관장한 사람은 곽영주였다. 곽영주만이 관사를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이 대통령과의 사이를 오간 사람이었다.
 
  1960년 12월 19일 곽영주는 혁명재판소 상고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을 받으면서도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봉건시대의 경어를 써서 판사와 방청석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다음은 당시 판사와 곽영주의 일문일답이다.
 
  “피고 이름은?”
 
  “곽영주라고 하옵니다.”
 
  “나이는”
 
  “금년 37세인 줄 아옵니다.”
 
  “피고의 전직은?”
 
  “경무대 경호책임자였나이다.”
 
  곽영주는 말끝마다 ‘이랬사옵니다’ ‘저랬사옵니다’ 하며 정중히 허리를 굽혀 저자세를 취했다.
 
  “피고의 말은 왜 그렇소?”
 
  “예?”
 
  “‘이랬습니다’ ‘저랬습니다’ 하지를 않고 어째서 ‘이랬사옵니다’ ‘저랬사옵니다’ 하는 거요?”
 
  “황공한 말씀이오나 버릇이 되어 그만 소인도 모르게 그렇게 됐사옵니다.”
 
  “‘됐사옵니다’라니? 무슨 버릇이 그렇게 됐다는 거요?”
 
  “어르신네를 모시던 버릇 때문에 그만 그렇게 됐사옵니다.”
 
  “어르신네라니?”
 
  “이 박사 어르신네 말씀입니다.”
 
  곽영주는 언제나 이승만 박사 앞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 버릇이 법정 안까지 옮아왔을 때 재판부나 피고인들, 방청석의 여러 사람은 쓰디쓴 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월간조선》은 이기붕 일가의 죽음과 관련한 곽영주의 의혹에 이런 일화를 공개했다.
 
  〈…1972년 노엽(盧燁·예비역 대령·전 HID 대장)은 필자에게 이렇게 귀띔해왔다.
 
  “곽영주가 죽기 전 교수대 앞에서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지금까지의 죄를 사죄하라는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가 이 대통령 경호관으로 재직하면서 저지른 여러 죄과 가운데 이기붕 일가를 죽인 것도 자신이라면서 사죄를 하더라고 합디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기붕 일가는 자결이 아니라 곽영주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필자는 아직 그 목사를 찾지 못했고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때 노엽이 전해준 이야기를 토대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정가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극작가 김교식씨는 이기붕 일가의 죽음 미스터리를 쓰며 ‘타살설은 정가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언론인 이성춘씨의 이기붕 취재 이야기
 
이기붕과 아내 박마리아.
  효령대군파 이판공 종회장인 이강부씨는 “문중에서는 이강석이 (부모를) 쐈다는 이야기는 없고 딴 사람이 했다는 이야기만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딴 사람’이 ‘곽영주’라는 질문에 “그렇다. 그런데 물증이 없으니까…”라고 덧붙였다.
 
  ― 곽영주가 목사 앞에서 죄를 고백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나요.
 
  “들었어요. 사형장에 갈 때 이야기했다고 하더군요. 담당 변호사는 잘 알겠지…. 내려오는 말이 곽영주가 ‘억울하다, 억울하다’고 했다는 겁니다.”
 
  곽영주는 왜 억울했던 것일까.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종회지인 《청권》 117호에 ‘국사편찬위 자료’라며 이런 내용이 소개됐다. 기자는 국사편찬위 자료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다. 《청권》에 실린 글을 인용한다.
 
  〈…국사편찬위 자료에 의하면, 이강석의 군인 운전사(상사)인 김학○은 이강석이 마지막 유언 겸 상관의 명령으로 “자살하겠으나 반드시 확인 사살로 머리를 쏘아 달라”고 지시했고 김학○이 확인 사살을 이행했다고 한다.…〉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이판공 종회장인 이강부씨.
  한국기자협회장과 《한국일보》 편집 부국장을 지낸 이성춘(李成春)씨는 이기붕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오래 취재했다. 취재 과정에서 답답했던 것은 국내에 이기붕 일가의 자살, 자살 전 행적, 현장 수사, 검시 등에 관한 기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60년 전 일가가 자살했을 때의 관련 인사들도 지금은 대부분 사망했다.
 
  그의 취재에 따르면 이기붕 일가는 죽음 직전 두 차례에 걸쳐 피신했다. 제1차 피신은 1960년 4월 19일 오후 2시경. 대학생들이 경무대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의 발포로 밀리자 화가 난 군중이 “서대문 이기붕의 집으로 가자”며 몰려갔다. 이기붕과 박마리아, 차남 강욱 등은 검은색 지프를 나눠 타고 집을 나섰다. 의정부 북쪽으로 차를 몰아 육군 제6군단 본부에 도착했다.
 
  당시 군단장은 강영훈 중장(후에 국무총리 지냄)인데 1952년 이기붕이 국방장관 때 경리 및 감리국장으로 재직했다. 강영훈 장군은 이들이 온 사실을 당시 김정렬 국방장관, 송요찬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유재흥 1군사령관에게 보고했다. 20일 밤 김 장관이 전화로 “서울 상황이 안정돼가고 있으니 내일은 귀가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 장군은 21일 아침 윤태호 군단 참모장을 안내 역으로 붙여 일가를 서울로 보냈다. 이들은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경무대로 직행, 이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비서들이 주선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제2차 피신은 4월 25일 오후. 이날 교수단 시위로 크게 불어난 군중이 ‘부정의 원흉인 이기붕을 몰아내자’며 서대문으로 몰려가자 일가는 의복과 신발도 제대로 못 갖춘 채 지프를 북쪽으로 몰았고, 밤 9시경 다시 6군단에 도착했다. 이때 군단사령부 일직 사령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금 들어온 서울 미아리 검문소 보고에 의하면 1대당 대학생 20여 명씩 탄 화물트럭 20여 대가 의정부 쪽으로 북상 중이라고 했다.
 
  강 장군의 참모들은 이들이 이기붕 일가의 행적을 알고 6군단으로 향하는 게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군단사령부엔 전투 병력이 거의 없었다. 참모들은 북쪽으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산하 1개 연대 병력이 주둔한 부군단장 숙소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기붕은 “자네 판단대로 하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강영훈 전 총리는 생전 《조선일보》(2008년 6월14일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기붕이) 영락(零落)했다고 저까지 외면해서는 인간 된 도리가 아니죠. 잠시 원주에 출장 간 동안 당시 제 참모들이 이 전 부통령(이기붕)에게 ‘사령관님 입장을 곤란하게 하지 말아달라’고 했나 봐요. 이 전 부통령이 그 길로 서울에 갔는데 다음 날(실제로는 사흘 뒤‐편집자) 일가가 자살했어요.”
 
  — 당시 한 신문이 ‘강영훈 장군이 이기붕씨를 서울로 돌려보내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식의 기사를 썼죠? 그런 오해에 대해 왜 적극 해명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당당하면 되는 거지요. 해명한다고 누가 그것을 믿겠습니까.”〉
 
 
  이승만을 보호하려고 이기붕 일가를 제거?
 

  언론인 이성춘씨의 말이다.
 
  “이기붕 일가는 이튿날 저녁 경무대에 도착해, 이무기 비서가 묵고 있는 36호 관사로 들어갔습니다. 밤에는 본관으로 이승만 내외를 방문했는데 이 자리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별인사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기붕 일가는 이날 밤 거기서 묵은 후 다음 날은 온종일 누구도 외출하지 않고 관사에 칩거했고, 다음 날인 28일 새벽 집단자살로 세상을 등졌지요.”
 
  이와 별개로 이승만은 그 무렵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이기붕 일가의 미국 망명을 교섭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한·미 간 이기붕 망명 합의 내용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성춘씨의 말이다.
 
  “사건 발생 후 한동안 집단자살에 대한 갖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첫째, 이강석이 3명을 먼저 쏘고 나란히 소파에 앉힌 후 자살했다면 3발의 총성이 나고 적어도 3~5분 후 다시 2발의 총성이 나야 하는데 계엄사는 잇달아 5발의 총성이 울렸다고 해 석연치 않았죠.
 
  둘째, 수면제를 먹게 하고 1발씩 쐈다고 하나 적어도 한 명이라도 총성에 놀라 깨어 어느 정도 저항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셋째, 이강석이 2발을 쏴서 자살했고 머리와 복부 모두 치명상이라는데, 과연 1발을 맞은 후 머리나 복부 등을 다시 쏜다는 게 가능한가요.
 
  넷째, 바로 옆 별실에 있었다는 이무기 비서의 행적이 일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경비실에 보고했다고는 하나 처음 총성이 났을 때 달려가 목격한 것인지, 전혀 들어가보지 않았는지 아리송해요.
 
  다섯째, 제3자에 의한 집단타살설입니다. 경무대 내부의 곽영주 경무관 등 이승만의 최측근 또는 충성분자들이 자유당의 숱한 실정(失政)과 3·15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인책(引責) 공세를 예상해, 이승만을 보호하려고 아예 이기붕 일가를 제거했다는 주장입니다.”
 
 
  죽은 이강석의 애인이 묘지 단장
 
이기붕 60주기 기신제에서 만난 이세재씨(왼쪽)와 이강준씨.
  이기붕과 종친인 이기윤씨는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만송은 권력욕이 없었다”고 했다.
 
  “선생은 1956년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아 종종 사석에서 21년 연상인 이승만보다 먼저 죽을 것임을 토로했다”는 것이다. 1960년 3월 무렵, 부통령 후보로 지명됐지만 혼자 힘으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몸이 불편했다고 한다. 다리 신경통이 악화돼 두 발로 걸을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만송은 또 성격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순박했다고 전한다. 다음은 최승만의 회고록에 나오는 만송에 대한 기억이다.
 
  〈만송은 선량한 사람이다. 결코 악의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정치에 경험은 없다 하더라도 옳고 바르게 하자는 신념을 가졌다는 데는 틀림없는 사람이다. 허물이 있다면 왜 이 대통령의 말대로만 하고 자기의 주장을 강경히 표시하지 못했느냐가 될 것이다.〉
 
  허정 전 총리의 회고록에도 만송의 성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음에도 마음이 그렇게 고운 사람은 만송밖에 없을 겁니다. 도무지 남을 욕한다든가 해친다는 일은 꿈에도 생각 못 할 사람이지요. 언제나 무슨 일에나 성실하고 겸허하고 정직했는데 특히 우정을 나누는 마당에서 그의 신의란 것은 본받을 만한 것이었죠. 정치의 세계란 처신이 어려운 곳이지요. 내 생각에 정치는 성격이 울뚝불뚝하고 큰소리도 탕탕 치고 얼렁뚱땅하는 사람이라야 할 것 같은데 만송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어요. 자유당을 만들고 이끌어 나가는 일은 그에게 엄청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요. 불치의 신경통 병이 생긴 것이 아마 정치 때문이었을 거예요.〉
 
  이기붕 일가의 묘가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경기도 통일로 인근 야산으로 언제 이장했는지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취재 결과, 1976년 4월 17일 이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놀랍게도 어느 군 사단장이 망우리에서 헬기로 시신을 옮겼다고 전한다. 사단장이 누군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또 이기붕 일가 묘를 단장한 것은 미국에 사는 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월간조선》 2020년 5월호 참조) 이와 관련해 만송의 7촌 조카인 이세재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강석과 결혼 약속을 했던 여인이 미국에 살고 있어요. 그 여인이 3~4년 전만 해도 해마다 묘지를 찾아왔다고 해요. 묘지 주변을 조경하고 비석으로 단장한 것도 이 여인이라고 합니다. 여인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시집 안 갈 테니, 시집 보낼 돈을 달라’고 해서 그 돈으로 단장했다는 겁니다. 묘지관리인 이야기를 들어보면 해마다 까만 옷을 입고 찾아와 꽃다발을 무덤 앞에 두고 갔다는 거예요.”
 
  만송 일가의 죽음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히고 있으나 아직도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입에 오르내리는 사실이 놀랍다. 또 한 여인이, 지금은 노년이 되었겠지만, 이강석과 그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놀라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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