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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망우리에서 사라진 이기붕 묘를 찾다!

‘찬 서리 맞아 피기도 전에 지다니, 진정 애처롭구나’(이강욱 묘비명)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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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랫사람 죄를 대속하시려고 부인과 두 아드님 데리고…’(이기붕·박마리아 묘비명)
⊙ ‘불타는 정의감이 있었기에 웃으며 자진한 것을 우리는 아노라’(이강석 묘비명)
⊙ 망우리에서 비밀리에 경기도 통일로 주변 야산에 이장
⊙ 이기붕 가족묘는 멀리 북한산과 청와대를 바라보고 있어
  《중앙일보》 1972년 4월28일자 7면에 ‘이기붕씨 12주기 망우리서 추모식’이라는 짧은 기사가 실렸다.
 
  〈…만송 이기붕씨의 12주기 추모식이 28일 상오 11시 서울시내 망우리 가족묘지에서 고인의 친척·친지 등 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있었다.
 
  만송 생존 시 비서실장을 지냈던 한갑수씨의 사회로 진행된 추모식에는 전 자유당 국회의원 손도심·임철호·오범수씨 등과 전 상공장관 김영찬씨, 고인의 양자 이강복(36)씨 등이 차례로 분향, 명복을 빌었다.
 
  묘지에는 재향군인회장 김일환씨의 조화가 있었다. 5백여 평의 가족묘지에는 고인의 어머니 송씨, 장모인 고씨와 만송 내외, 아들 강석 형제와 딸 강희 등의 무덤이 같이 자리하고 있다.
 
  이날 최승만(전 인하공대 학장)씨가 추모사를 읽고 유호준 목사가 축도를 했다.…〉
 
  그후 망우리에서 이기붕(李起鵬·1896~1960·아호는 晩松)의 묘는 찾을 수 없었다. 비밀리 이장한 것이다. 아내 박마리아와 딸 강희(李康姬), 두 아들 강석(李康石)·강욱(李康旭)의 묘 역시 망우리에서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 이기붕도, 망우리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올해는 4·19혁명 60주년이 되는 해다. 3·15 부정선거 역시 60주년이다. 또한 국회의장이던 이기붕 일가족이 사망한 지 60주기(週忌)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기붕 일가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시계를 1960년 4월 26일로 돌려보자.
 
  그날 아침 8시10분쯤, 시민·학생 대표 5명이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李承晩·1875~1965) 대통령을 면담했다. 대표들이 대통령 하야를 권유하자 이 대통령은 “국민이 원해?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라고 되뇌었다. 시민 대표들이 경무대를 빠져나가고 10시가 되었을 즈음, 라디오에서 이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었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하겠다”는 등 4개 항으로 된 성명이었다. 제1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11년4개월에 걸친 이 대통령의 장기 집권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이 대통령이 경무대를 떠나던 4월 28일 아침 5시40분, 세종로 1번지 소재 경무대 제36호 관사에서는 5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이기붕 일가 4명이 권총 자살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이기붕의 아들이며 이승만의 양자 이강석은 먼저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 이강욱의 머리에 권총으로 각각 1발을 쏘고는 자신도 배와 머리에 총을 쏘아 목숨을 끊었다.
 
  당시 연세대 2학년생이었던 이강욱은 3·15 부정선거가 있기 전 “아버지가 당선되면 나라가 망하고 낙선되면 집안이 망한다”며 시위에 참여하려다 경호경찰에게 저지당했던 가슴이 뜨거운 청년이었다.(김정형의 《20세기 이야기-1960년대》 참조)
 
 
  絶家된 이기붕 가문과 死後 양자 이강복
 
1960년 4월 29일 수도육군병원 교회 안에 마련된 고 이기붕씨 일가의 빈소 모습이다.
  기자는 망우역사문화공원 자문위원인 정종배(鄭鍾培·61·서울 신현고 교사)씨와 함께 이기붕 일가의 묘를 찾아갔다. 이기붕 가족묘가 망우리에서 어디로 옮겨졌는지는 지금껏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세상인심도 이기붕 일가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았다. 동정은커녕 불편한 기억을 떠올릴 뿐이었다. 3·15 부정선거에 대한 분노와 선거 당일 마산 시위에서 사망한 17세 소년 김주열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정 위원과 기자는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서 만나 승용차로 40분 정도 달려 한 사설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고양과 파주 경계에 위치한 명봉산은 245m의 아담한 야산으로 가파르긴 했으나 포근하게 느껴졌다.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을 따라 2000여 기(基) 되는 엇비슷한 무덤이 봄 햇살을 받고 있었다.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일일이 묘비를 읽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묘지 정리 작업 중인 한 관리인에게 위치를 물으니 친절하게 대강의 위치를 알려주면서 “인근에서 가장 큰 묘 터를 찾으라”고 귀띔해주었다.
 
  이기붕 가족묘는 왜 망우리를 떠났을까. 당시 이기붕을 따르거나 지근에서 지냈던 이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1972년 4월28일자 《중앙일보》에 언급되었던 한갑수·손도심·임철호·오범수·김영찬·최승만·김일환씨 등도 이미 고인이 되었다.
 
  이기붕의 양자 이강복(李康福)이 생존해 있다면 85세다. 사실 이강복은 이기붕의 사후(死後) 양자다. 4·19 이후 절가(絶家) 상태인 이기붕 가문의 재산 상속자로 친족회 결의로 선정된 것은 1962년 3월이었다. 이강복은 이기붕의 7촌 조카. 그는 슬하에 딸만 둘을 두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1968년 7월17일자 사회면에 ‘이기붕씨 양자와 소송’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전 국회의장 이기붕(李起鵬)씨의 사후 양자로 입적한 이강복(32·서울 종로구 세종로 121의2)씨가 16일 국가를 상대로 223만7033원의 부당이득금을 반환하라는 소장을 서울민사지법에 내어 화제.…〉
 
  이듬해 1969년 6월 28일 사회면에 ‘이기붕씨 양자 승소’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는 ‘국가는 이씨에게 불법징수한 상속세 230만원을 되돌려주라’고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이후 《조선일보》에 이강복 관련 기사는 없었다.
 
이승만과 이기붕의 인연은…
 
  윤치영이 소개… “내가 별 재주도 없는데…”(이기붕)
 
1960년 3월 5일 당시 자유당 대선 후보로 출마한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선거 벽보.
  뒷날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리던 이기붕이 이승만과 인연을 맺은 것은 돈암장(敦岩莊) 덕분이었다. 돈암장은 이승만이 1945년 환국하여 처음 기거했던 사저(私邸)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이기붕은 박마리아와 함께 당시 계동(桂洞) 부근에서 조그마한 반찬가게를 하며 단칸방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마리아는 낮에는 이화여전 교사로, 퇴근해서는 가게 일을 도왔다.
 
  유학시절 이기붕을 알게 된 윤치영(尹致暎)이 어느 날 이기붕을 돈암장으로 불렀다.
 
  “이 박사를 도울 겸 돈암장에서 일을 좀 해주시면 어떻겠소.”
 
  “내가 별 재주도 없는데 어떻게 무슨 일을 돕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할 것 없어요. 돈암장의 집안 살림을 맡아 해달라는 겁니다. 생활비용은 한 달에 한 번씩 고하(古下·宋鎭禹 호)한테 가서 타오면 돼요.”
 
  이기붕은 몹시 수줍어하며 사양했으나 설득을 계속한 끝에 며칠 후부터 박마리아와 함께 돈암장의 살림을 맡게 됐다는 윤치영의 술회다.
 
  다음 해 하지 중장과의 마찰 때문에 윤치영이 비서실장직을 그만두자 이기붕은 그 후임을 맡게 된다. 이때부터 이승만과 이기붕의 밀월관계는 1960년 4·19혁명 때까지 이어진다.(《동아일보》 1982년 5월4일자 ‘비화 미군정 3년’ 참조)
 
  ‘아랫사람 죄를 대속하시려고 부인과 두 아드님 데리고…’
 
1959년 7월 17일 기자회견 중인 이기붕 국회의장.
  기자는 드디어 이기붕 가족묘와 마주하게 되었다. 수많은 묘의 가장 높은 위치에 안장되어 있었다. 이기붕·박마리아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딸 강희·장남 강석·차남 강욱의 무덤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놀랍게도 이들 무덤에서 바라보니 멀리 백운·인수·만경 세 봉우리가 한 몸을 이루는 삼각산이 뚜렷하게 보였다. 또 보현봉 비봉능선도 눈에 들어왔다. 정종배 위원의 말이다.
 
  “위치상 청와대를 바라보는 위치라는 게 조금은 놀랍습니다. 이기붕의 권력에 대한 의지를 담고 있는지, 아니면 권력의 무상함을 나타내는지는 몰라도 위치가 좋아요.
 
  날씨 좋으면 인천 부평 계양산도 보이고 강화 마니산도 보이는 안산(案山)의 눈높이에 위치해 있어요. 나름 명당자리인데 일부 무덤의 잔디가 죽은 것으로 봐서 수맥이 흐르는 것 같아요. 무덤 위치가 조금만 앞에 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 위원과 대화를 나누는데 길고양이 한 마리가 무덤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후 5시가 넘어 해가 기울고 있었고 서녘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무덤 주변에는 양지꽃, 꽃다지가 피어 있었고 무덤 아래에서 토끼 똥 흔적이 눈에 띄었다. 정 위원은 “토끼 똥은 무덤 주위가 양지바르고 편안하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기붕·박마리아의 합장묘.
  이기붕·박마리아 묘의 앞쪽 비문을 읽어보았다.
 
  〈…國會議長 晩松 李起鵬 先生墓
  夫人 朴瑪利亞 女史 祔左
 
  여기 거칠고 험한 일생을 슬프고 애처롭게 걸어내신 내외분이 잠드셨으니 3·15 선거의 잘못을 책임지시고 온 가족이 함께 애절한 최후를 마치신 리기붕 선생과 부인 박마리아 여사이십니다. 세상에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은 많으나 그 잘못의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은 너무도 드뭅니다. 만송 선생은 손수 이끌어 가시던 정당이 저지른 잘못을 확인하시자 아랫사람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부인과 두 아드님을 데리고 미련 없이 담담하게 가신 것입니다.
 
  칠십 평생 만송 선생의 걸음걸음이 깨끗하였듯이 선생의 최후도 또한 깨끗하였습니다. 모시던 저희로서 영광스러운 고종명을 누리시게 해드리지 못한 것을 못내 송구하게 여기오며 높고 맑으신 덕을 추모하면서 작은 정성을 모아서 삼가 영복을 비옵니다.
 
  10주기를 맞아서 만만클럽 회원 일동…〉
  (원문을 충실히 따르되 일부 단어와 띄어쓰기는 현대어 표기에 맞게 고침-편집자)
 
  만만클럽은 이기붕이 살았을 때 가까이 지내던 150여 인사의 모임이다. 지인이 150명이나 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따랐다고 한다. 이들은 이기붕 일가에 닥친 비극적 최후에도 인연을 끊지 않았던 것이다. 만만클럽은 흔히 쓰이는 ‘낭만클럽’이란 명칭에 만송의 ‘만’자를 넣어 만들지 않았을까. 정 위원은 “이승만의 ‘만’과 만송의 ‘만’자가 합쳐진 말로 추정된다”고 해석했다.
 
  기자는 비문 중에 ‘세상에는 그 잘못의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은 너무도 드물다’와 ‘아랫사람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미련 없이 담담하게 가신 것’이란 표현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만만클럽은…
 
  국회의장 비서실장, 《서울신문》 사장, 보성학교 동기
 
  정확하게 만만클럽의 면면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중앙일보》 1972년 4월28일자 7면에 적힌 ‘이기붕 12주기 추모식’ 참석자들이 중심인물은 아니었을까.
 
  명문장가로 알려진 한갑수(韓甲洙·1913~2004)는 만송의 국회의장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인물이다. 생전 한갑수는 연세대 김형석 명예교수에게 4·19 이전에 있었던 일화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평소 이기붕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비서 한갑수에게 “이번 토요일 오전 10시에 중대 성명이 있다고 언론에 알려라. 그리고 내가 모두 책임지고 정계 은퇴를 한다는 성명서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성명서는 한갑수가 대독할 예정이었다.
 
  토요일 오전 9시쯤 자유당 강경파 의원 3명이 찾아왔다. 성명서를 보자마자 찢어버렸다. 성명 발표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이기붕도 세 의원을 설득지 못했다. 그리고 4·19혁명이 터졌다. 이기붕 일가는 자살을 택했고 의원 3명 중 두 사람은 영어(囹圄)의 신세가 됐다. 그리고 한 사람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손도심(孫道心·1920~1979)은 4·19의거 당시 현역의원으로 《서울신문》 사장으로 있다가 신문사가 불타는 등 수난을 겪었고, 그해 5월 국회에서 제명되었다. 세월이 흘러 지난날의 여당의원들이 정계에 복귀하거나 사업 등으로 활로를 개척한 것과는 달리, 손도심은 외롭게 말년을보냈다고 한다. 1966년의 여름, 전남 화순의 탄광지대에서 누더기에 밀짚모자를 쓰고 성경책을 팔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임철호(任哲鎬·1905~1999)는 1951년 한일회담 대표, 이듬해에는 자유당 중앙당 조직부장과 자유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이기붕이 국회의장 시절 부의장이었다.
 
  오범수(吳範秀·1919~1997)는 해사 2기로 6·25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해군통제부 시설부장, 연합작전본부 시설참모, 해군 군항건설단장 등을 역임하고 대령으로 예편했다. 1960년 3·15 당시 충북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부정선거 가담을 이유로 반민주 행위자로 분류되어 공민권이 제한되고 국회의원 직이 상실됐다.
 
  김영찬(金永燦·1911~1983)은 1952년 한국은행 부총재, 1954년 재무차관, 1955년 한국은행 수석부총재, 1958년 산업은행 총재를 지내는 등 주로 금융계에서 활동했다. 1960년 4월 상공부 장관에 취임했으나 4·19혁명 직후 3·15 부정선거자금 문제로 물러났다.
 
  김일환(金一煥·1914~2001)은 이기붕 자살 당시 교통부 장관이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모범수로 가석방되었다. 이후 재향군인회 회장, 한전 사장, 관광공사 총재를 역임했다.
 
  최승만(崔承萬·1897~1984)은 이기붕과 동문수학한 사이다. 보성중학교 재학 당시 몸이 허약한 이기붕이 한동안 최승만의 집에 하숙하며 통학했다. 최승만은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의 창간 동인으로 참여했고 《신동아(新東亞)》 부장으로 재직하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을 계기로 퇴직하였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교화국장을 지내고 1948년 연희대학 교수, 1951년 제주도지사, 1952년 제주대학 초대 학장, 1954년 이화여대 부총장 등을 역임했다.
 
  강희·강석·강욱의 묘비명
 
(사진 위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기붕의 딸 강희의 무덤, 장남 강석의 무덤, 차남 강욱의 무덤이다.
  이기붕·박마리아 묘비 뒤쪽에도 긴 글이 적혀 있었다. 옮겨본다.
 
  〈…1896年 12월 20일 충북 괴산군 청천(靑川)면 후평(後坪)리에서 낙의공(洛儀公)과 은진송씨(恩津宋氏) 정현여사(貞賢女史)의 독자로 탄생하시니 효녕대군(孝寧大君)의 18세손이 되시며 예조판서 회정공(會正公)의 증손이 되심.
 
  1923년 미국 아이오와주(州) 데이버대학 문과 졸업 후 11년간 체미(滯美)하시며 3·1신문 발행 등 조국 광복 운동에 종사하심.
 
  1949년 서울특별시장, 1951년 국방부 장관, 1952년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 1954년 제3대 국회의장 피선 이래 1960년까지 연임, 1960년 4월 28일 3·15 선거의 책임을 지시고 가족과 함께 비장한 최후를 마치심.…〉
 
  이기붕은 6·25 당시 서울시장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12일 국방장관에 취임했다. 당시 참모총장이 정일권 중장이다. 이 국방장관은 그해 6월 2일 정일권 중장과 함께 서부 제일선 국군 제816부대를 찾아 부대 장병들에게 “혁혁한 전과에 빛나는 816부대의 전통을 더욱 빛내기 위하여 일층분투(一層奮鬪)”하라는 훈시를 남기기도 했다.(《조선일보》 1951년 6월4일자 2면)
 
  이기붕이 국방장관이 된 것은 국민방위군 사건 때문이었다. 예비군인 국민방위군 50여만명 중 5만명 이상이 후방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자, 이승만은 당시 신성모 장관을 경질하고 이기붕을 임명했다. 이기붕은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원칙을 깨고 재심을 지시했고 주요 간부 5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엄벌에 처했다. 전시(戰時)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로써 이기붕은 이승만의 후계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기붕 무덤의 아래쪽 오른편에 딸 강희의 무덤이 있었다. 비석 뒷면에는 이기붕 내외가 적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글이 적혀 있었다.
 
  〈…李康姬之墓
  강희야 귀한 강희야
  어두운 밤 무서워 말고
  눈보라 비바람에 떨지 말고
  천사, 너를 지키리니
  여기 고이고이 잘 쉬어다오
  요단강 건너가 다시 만나자
 
  1949년 11월 22일
 
  애달픈 아빠 李起鵬
  엄마 朴마리아…〉
 
  생전 이기붕 내외는 딸의 요절을 매우 안타까워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강희는 심장이 약한데다 38도가 넘는 고열에도 학교(당시 이화여중 2학년 재학)에 나가 중간시험을 치렀고, 결국 쓰러져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들어온 부의금에다 동창 학부형들이 십시일반 모은 3500여만원으로 재단법인 이강희기념장학회가 설립됐다. 가난한 수재에게 학비를 보태고 졸업생들에게 입학금도 지원했다고 전한다.
 
  딸 바로 옆에 장남 강석의 무덤이 있었다. 묘비 앞면에 ‘리강석의 무덤’이라 적어놓고 뒷면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불타는 정의감이 있었기에 부모님 모시고 동생 데리고 기꺼이 웃으며 자진해서 간 것을 우리는 아노라
 
  李康石君 1960년 4월 28일 24歲로 散花함…〉
 
  강석의 무덤 왼쪽에 동생 강욱의 묘가 있었다. 묘비 앞면에 ‘리강욱의 무덤’, 뒷면에는 38자(字)의 글이 적혀 있었다.
 
  〈…한창 피어오르던 어린 싹 너에게 때아닌 찬 서리를 맞혀 피기도 전에 지게 하다니 진정 애처롭구나
 
  李康旭君 1960년 4월 28일 20歲로 散花함…〉
 
  ‘산화’라는 단어가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기붕 일가족이 자살하자 당시 검찰은 현장을 조사하고 시체를 검안한 뒤 ‘합의된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발표 내용은 이랬다.
 
  〈…유서는 없었다. 권총은 모두 다섯 발이 발사되었다. 이강석만이 머리와 가슴에 두 발을 맞았고 다른 사람들은 머리에 한 발씩 맞았다. 세 발은 28일 새벽 5시50분경 연속으로 발사되었고 4, 5분이 지나서 두 발이 발사되었다. 이기붕은 상의(上衣)를 의자에 걸어놓고 속셔츠만 입은 채로 숨져 있었다.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은 매트리스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고 이강석은 가로로 쓰러져 있었다.…〉
 
 
  관리비를 전혀 안 내고 있어
 
망우역사문화공원 자문위원인 정종배씨가 이기붕·박마리아 합장 묘 앞에서 4·19혁명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기자는 1시간가량 이기붕 가족묘에 머무른 뒤 묘지 관리사무소 쪽으로 내려왔다. 다음은 관리소장과의 일문일답이다(기자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이 사설묘지는 현재 2000여 기의 무덤이 있다. 이미 1991년 만장(滿葬)이 되어서 묘를 더는 안 받고 관리만 하고 있었다.
 
  ― 망우리에서 이곳으로 언제 이장했는지 아시나요.
 
  “그걸 잘 모르겠어요. 1979년에 공원묘지 소유주가 바뀌면서 이전 관리대장이 사라져버렸어요. 이전에는 신천지(묘지)라고 불렀어요.”
 
  ― 누가 찾아옵니까.
 
  “이기붕의 친인척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딱히 관리 주체도 없습니다. 종중에서 1년에 두어 번 와서 제(祭)를 지냅니다. 한동안은 많이 왔다 갔다 했죠. 경기도 구리 쪽으로 이장하려 했는데 허가가 안 나와 못 옮긴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 그런데….
 
  “(묘지) 관리비를 안 냈어요. 그게 문제라니까.”
 
  관리비는 평당 2만2000원. 이기붕 가족묘는 넓이가 200평이 넘는다. 어림잡아 벌초비용이 1기에 30만원 정도 한단다.
 
  ― 그동안 관리비를 전혀 안 냈나요.
 
  “과거엔 사람이 아예 안 찾아와 갈대(억새)가 우거졌어요. 그런데 12년 전 미국에서 여성 한 분이 관리비를 보내와 지금의 모습으로 손을 봐서 석축을 쌓고 묘 터도 단장한 겁니다. 그때 (공사비가) 몇천만 원이 나왔죠? 전임 관리소장(작년에 사망)이 그분에게 ‘무슨 사연으로 돕느냐’고 물으니 ‘예전 이기붕이 미국에 있을 때 도움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분이 한동안 관리비를 보내다가 몇 해 전부터 ‘더는 못 내겠다’고 했나 봐요.”
 
  ― 무덤에 가보니 관리가 잘 돼 있던데요.
 
  “우리가 가끔 (벌초를) 해주죠. 관리비 문제도 있고 해서 종중에 얘기했는데 연락이 없어요. 현재 옛날 묘들에 대해 권리신고를 받고 있어요. 관리비를 안 내니까….”
 
  4·19혁명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은 이기붕 일가는 한국 현대사에 가장 불행한 인물이다. 씻을 수 없는 교훈을 남겼다. 어쩌면 오늘날 ‘남 탓’ ‘네 탓’만 하는 ‘내로남불’의 한국 정치권에 견준다면 일가의 죽음이 장렬하고 깨끗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제는 편히 쉬시라 말하고 싶다. 하늘나라 저녁연기 피어나는 마을에서 일가족이 모여 농부의 얼굴처럼 평화롭게 지내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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