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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집

눈앞 문용동 죽음 목격한 김영복씨

“같이 있다가 가버렸으니… 내가 가버렸으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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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2일 계엄군이 철수하자 각종 무기와 폭탄류를 도청 민원실 지하로 옮겨
⊙ 문용동·김영복,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 찾아가 폭약 뇌관 해체 요청
⊙ 지만원의 북한 특수군의 도청 내 TNT 설치·조립 주장은 가짜뉴스
김영복씨. 그는 5·18 당시 도청 민원실 지하에 있던 무기와 폭약을 관리했다.
  광주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김영복(金榮福·66)씨는 현실과 지옥의 경계선이 무너졌던 5·18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시간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가듯 이맘때면 오래 삭여온 상처가 떠오른다. 벌써 40년이 지났다.
 
  그는 바로 눈앞에서 문용동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를 데려간 무시무시한 총성을 또렷이 기억한다.
 
  기자는 지난 4월 2일 전남 광주로 내려갔다. 그는 전화로 “광주송정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남광주역 6번 출구로 나와야 한다”고 했다. 그의 설명을 따라 6번 출구로 나와 천천히 걸었다. 걷다 보니 봄빛 전령들이 연초록으로 물들어 있었다.
 
  인사를 나누자 그는 “나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부터 물었다. 사실 5·18의 미스터리는 5가지 정도다. ▲전남도청 지하실의 폭약은 누가 설치했는지 ▲광주교도소 공격은 사실인지 조작인지 ▲20사단장 지휘 차량은 어떻게 피탈되었는지 ▲아시아자동차 공장의 군용차량은 어떻게 피탈되었는지 ▲전남도 내 38개 무기고는 어떻게 피탈되었는지다. 이 모두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북한의 특수부대 개입설(說)이 거론되고 있다.
 
  이 중 ‘전남도청 지하실 폭약’과 관련한 중요한 증인이 바로 김영복씨다. 세간의 풍문은 물론 군(軍)과 정부 자료에는, 당시 전남도청 지하실에 광주시가지 절반을 폭파시킬 수 있는 분량의 다이너마이트가 뇌관과 결합된 채 보관되어 있었다. 일각에서는 8t 트럭 4대분이라는 설도 있다. 누가, 언제, 어떻게 그곳에 가져다 놓았는지는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다만 도청 지하실에 있던 무기를 문용동 전도사와 함께 직접 관리한 인물이 김영복씨다.
 
  “5월 21일까지만 해도 도청에서 총격전이 심했어요. …엄청 심했어요. 저도 총 들고 시위를 했으니까. (진압군이) 명사수만 데려왔는지 동료가 심장과 얼굴에 총알을 맞아 픽픽 쓰러지는데… 소름이 끼치더군요.”
 
 
  사람들이 총기류와 실탄을 밟고 다니며, 만지고…
 
  ― 도청 지하실에 무기와 폭약이 많았던 이유가 뭔가요.
 
  “폭약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출처는 모르지만 5월 21일, 아니면 22일부터 무기 회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숨을 가다듬은 뒤 덧붙였다.
 
  “놀랄 정도가 아니었죠. 원래 (지하실은) 도청 식당이 있던 자리입니다. 정확하게 말해 도청 민원실 지하식당입니다. 40~50평 정도로 꽤 넓었죠. 식탁 테이블과 의자를 한쪽으로 밀고 무기와 폭탄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죠.”
 
  그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렇다. 21일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하자 도청 마당에는 시민들이 가져온 각종 총기류와 실탄, 심지어 폭탄과 다이너마이트, 수류탄 등이 가득했다. 위험천만한 무기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하자 시민들이 자진하여 무기를 반납한 것이다.
 
  “무기가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어요. 사람들이 총기류와 실탄을 밟고 다니며 만지고…. 너무 위험하다 싶어 한곳에 모아야 하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었어요. 주변을 보니 도청 본관 옆 민원실 지하(식당)가 가까워 그곳에다 무기를 옮기기 시작한 것이죠.
 
  특별히 (시민군 중에서) 몇몇을 정해서 무기와 폭탄을 옮긴 것이 아니라 당시 도청에 있던 몇몇이 돕게 되었는데, 훗날 ‘폭약관리반원’이라 불렸지만 당시엔 그런 공조직은 없었어요.”
 
  김용복씨는 ‘폭약관리’를 하며 문용동 전도사를 알게 되었다.
 
  “문용동이와 뜻이 맞아서….”
 
  ― 우리가 하자?
 
  “네, 우리가 하자…. 문용동이와 제가 한 살 차이였으니까(당시 문용동 27세, 김영복 26세). 함께 폭약관리반에 참여한 양홍범이나 박선재는 스물한두 살로 나이가 어렸어요. 저는 1975년 군에 입대했다가 제대한 입장이었으니까.”
 
  ― 제대는 언제 했나요.
 
  “1978년도.”
 
 
  지뢰매설·제거하던 전투공병대 출신
 
김영복씨는 전투공병대 하사관 출신이다. 군에서 폭약사용법을 가르치는 조교였다.(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군 시절 김영복씨다.)
  김영복씨는 전투공병대 하사관 출신이다. 군에서 전문적으로 폭약을 취급한 적이 있다.
 
  “2군단 사령부 공병대에서 근무했어요. 논산으로 처음 입대했다가 하사 보병교육을 마치고 서울 행정학교(경기 성남에 있던 육군종합행정학교를 이르는 것으로 보임)에서 부관 주특기를 받고 2군단 사령부(춘천)로 갔죠. 그곳에서 공병부대로 떨어졌는데 전투공병단입니다. 탱크가 지나가게 다리를 놓지 않습니까. 또 수류탄 투척이나 지뢰 매설과 제거 등을 공병대에서 주로 교육받았어요. 땅을 파거나 다리 놓는 공사만 하는 부대가 아니고 유사시 지뢰 매설·제거도 하고…. 그래서 폭약과 폭탄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군에 있을 때 이리역(지금의 익산) 폭발사고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기로 다이너마이트가 30t인가 터져 인근 500m 건물이 모두 날아가고 10m 깊이의 웅덩이가 생겼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폭발사고였어요.”
 
  그는 이런 이야기도 덧붙였다.
 
  “하사관 시절, 직접 총기 오발사고를 겪었어요. 대원 한 명이 오발사고를 내서 지나가던 학생이 팔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그런 기억 때문에 평소 총기 오발사고에 경각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 폭약관리는 어떻게 했나요.
 
  “도청 주변이 굉장히 어수선했어요. (시민군 내에)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고, 도청 본관을 점거해서 군복 입고 권총 차고… 나이가 어린 애들도 총 메고 다니고… 우리는 (시민군의) 협상에 전혀 관여 안 하고 지하에서 무기만 관리했으니까요.
 
  누가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 (지시)한 적도 없고, (자율적으로) 회수된 무기를 보관만 하는 거예요.”
 
  ― 무기나 폭약을 관리한 사람은 몇 명 정도였나요.
 
  “처음에 무기를 옮긴 이는 9명 정도? 제가 앉혀놓고 이야기했죠. ‘위험한 무기고, 국가 자산인데 자신 없으면 포기하고 나가라’고요. 그래서 2명이 빠지고, 얼마 후 또 2명인가 나가고… 마지막까지 5명이 남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끝까지 했으니까 쉽게 말해 ‘폭약관리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 그 명칭은 그때 쓰인 말이 아닌데….
 
  “그렇죠. 나중에….”
 
 
  “(사람들이) 몰려와 무기를 달라 하지, 우리도 지쳐가지…”
 
김원필 군목을 돕고 있는 문용동 전도사(오른쪽 양복 입은 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도청 내 폭약을 관리하던 이는 문용동, 김영복 외에 양홍범, 이경식, 박선재 등 5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김영복씨는 당시 겁이 났다고 한다. 군 무기고를 연상시킬 정도인 엄청난 양의 탄약과 폭약이 한꺼번에 터진다면 광주는 잿더미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도청 민원실 지하로 무기·폭약·수류탄을 옮겨놨지만, 지키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저녁이 되면 사람들이 무기를 달라고 찾아와요. 무장해야 한다고…. 같이 있던 양홍범이가 겪었을 거예요. 양홍범의 배를 총구로 쑤시면서 무기를 달라고 해서…. 우리는 ‘못 준다’ 하고.”
 
  권투선수 출신으로 책임감 강한 양홍범이 지하식당 무기고의 경비책, 그러니까 방패막이 역할을 했던 것이다.
 
  ― 무기를 왜 (시민군에게) 안 줬습니까.
 
  “(무기가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니까. 무기를 회수하기로 돼 있는데 누구 마음대로….”
 
  ― 전투상황이라면 자기 보호를 위해 무기를 건넬 수밖에 없지 않았나요.
 
  “그렇기는 하죠. 그러나 우리는 한번 들어온 무기를 밖으로 반출한 적은 없어요. 반출한 것은 5월 26일, 아니 27일 자정쯤 (계엄군이) 장갑차 몰고 들어온다고 하니까,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기 지급을 했어요. 그전엔 철저히 막았습니다. 오발사고 같은 위험성 때문이었어요.”
 
  ― 실탄도 반출 안 했나요.
 
  “실탄도 탄창에 어마어마하게 많았지만…. 중요한 것은 뭐냐면, 하루이틀도 아니고 계속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치가) 이어지니까 저도 불안하고 매일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고… 강경파 중에 워낙 거센 애들이 많아서… 한계점이 오지 않을까, 언제까지 지속될까 하는 불안감이 컸어요.
 
  그때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로 오려다 공항에 내려오지 못하고 다시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들렸어요. 당시 외신기자들이 도청에 왔다 갔다 했어요. 오죽했으면 제가 문용동에게 ‘빨리 끝내려면 외신기자 두 명만 인질로 (협박)하면 빨리 수습되지 않을까’ 하고 말한 적이 있어요.
 
  왜냐하면 저녁만 되면 (사람들이) 몰려와 무기를 달라고 하지, 우리도 지쳐가지…, 뭔가 빨리 끝내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지하실에 어마어마한 양의 무기가 있으니 놔두고 갈 수가 있나요? 위험성을 아는데 갈 수 없었죠. 그래서 문용동이와 상의했죠.”
 
  김영복과 문용동은 전투교육사령부(이하 전교사)를 찾아가 수류탄 공이와 다이너마이트 뇌관 분리 작업의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심했다.
 
  “도청에 군용 지프가 많이 버려져 있었어요. 제가 지프를 몰고 전교사로 갔는데, 다이너마이트 다발 3개를 갖고 갔어요.”
 
 
  ‘상무충정작전’과 문용동의 죽음
 
  ― 다이너마이트는 왜 지프에 실었나요.
 
  “(계엄군에) 보여주려고요. ‘이렇게 위험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도청 지하실에 무기와 폭탄이 있다. 제거해달라고 찾아왔다’고 말하니 육군 대위가 우리를 안내하더군요. 그래서 나중에 군무원인 배승일씨가 도청 지하실로 몰래 들어와 수류탄과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을 제거하게 된 겁니다.”
 
  ― 문용동·김영복 두 사람의 판단이었나요.
 
  “(5명이) 같이 상의해서 한 것입니다.”
 
  폭약관리반과 계엄군과의 면담은 5월 23일과 24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고 한다. 그리고 군무원 배승일씨가 24일 밤 9시에 무기고로 들어와 폭탄 해체 작업을 하게 된다. 그는 전교사 병기근무대에 소속된 탄약검사사였다.
 
  ― 도청 내 점거 중이던 강경파들은 뇌관 분리 작업을 몰랐나요.
 
  “몰랐어요. 철저히 비밀에 부쳤으니까.”
 
  ― 뇌관 분리를 안 했다면 군이 (도청 내에) 진입을 했을까요.
 
  “…안 했겠죠. 그로 인해 한동안 딜레마에 빠진 것도 사실입니다. 수류탄과 폭약이 해체된 후에 진압군이 5월 27일 새벽 이른바 ‘상무충정작전’을 감행해 많은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폭탄 뇌관 제거 작업을 했기에 (진압군이) 안심하고 들어와 희생자가 컸다고 생각했어요. 인간적으로 제가 한 행동에 죄책감을 느꼈죠. 그러나 나중 알고 보니, 뇌관 제거와 상관없이 군은 이미 27일 도청 무력 진압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더군요.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면, 폭약이 터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을 사전에 막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론 훗날 문용동이 (군의) 프락치라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 런데 생각해보세요. 만약 프락치라면 27일 도청 진압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 때 이미 도망쳤지 현장에서 죽을 리가 없잖아요.”
 
  ― 그렇죠.
 
  “사전에 군과 이야기해서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 문용동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문용동이 살았다면 큰일을 할 사람인데…”
 
  ― 5월 27일 새벽에 일어난 도청 진압 당시의 상황은 어땠나요.
 
  “무기고를 지키던 5명 중 3명을 먼저 보내고 문용동과 제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어요. 도청 민원실 2층 유리창에서 보니 그날 새벽 YMCA 건물 쪽으로 진압군의 장갑차가 막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총을 쏘면서….”
 
  ― 총을 쏘면서… 도청 안으로….
 
  “속으로 ‘아, 올 것이 왔구나’ 했어요. 전날부터 진압하러 온다는 소문이 자자했으니까. 우리도 무장했죠. 진압군이 ‘투항하라, 살려준다’ 하는 소리가 들리고, 민원실 2층에서 한 명이 밖으로 뛰어나갔는데 곧이어 총성이 울리고 쓰러진 거예요. 비명과 함께…. (지하 무기고에 있어서)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소리가 나니까 알았죠. 그 순간 우리도 나가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압군은 도청 민원실 지하실에 엄청난 양의 무기가 있고, 폭약 뇌관을 제거한 사실을 알면서도 폭약관리반원들을 보호할 뜻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 문용동·김영복, 두 사람은 민원실 지하에서 올라와 도청 뒤쪽을 향해 도망쳤다. 뛰어가다가 작은 건물로 들어가니 총알이 빗발쳤다.
 
  “건물 바닥에 개구리처럼 엎드려 있었어요. 한동안 총을 쏘더니 우리가 죽은 줄 알았는지 총성이 멎어요. 헬기에서 ‘투항하라’는 방송이 들리고 어느덧 아침 해는 뜨는데…. 문용동이가 밖으로 나가자고 하더군요. 제가 ‘좀 있어 봅시다’ 했더니 ‘무슨 일이 있겠냐’고 거듭 나가자고 해요. 문용동이가 앞서고 저는 뒤따라 미닫이문을 열고 나서는데, 도청 옥상에서 ‘다다다’ 하는 총소리가 나고 문용동이가 눈앞에서 쓰러졌어요.
 
  이후 저는 도망치다 진압군에 잡혀 끌려가는데 도청 입구에 있는 20여 구 시신 중에서 문용동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호흡을 한번 가다듬더니 이렇게 말을 마쳤다.
 
  “같이 있다가 가버렸으니… 내가 가버렸으면…. 문용동이 살았다면 큰일을 할 사람인데…. 죄책감을 느낍니다.”
 
  붙잡힌 김영복씨는 33일가량 군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이후 직장생활을 했지만 오래 할 수 없었다. 서울 친척 집에 한동안 머무르다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1985년 제1회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해 그때부터 부동산업을 해오고 있다. 그는 광운대 대학원(부동산학 석사)을 졸업하고 권리분석사·경매분석사·평생교육사 등의 자격증까지 땄다.
 
  “5·18만 되면 문용동 생각이 나서 괴로워요. 민주·평화·화해… 5·18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는데, 저는 그 현장에서 위기의 순간을 겪어서 그런지 거창한 단어는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이 민주화를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마음 아픈 것은 5·18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이… 안타까워요.
 
  5·18유공자 명단 공개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당사자로서 말씀드리면 광주시민 전체가 유공자예요. 민주유공자입니다. 아닌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북한군 개입설은 사실이 아닙니다. 지만원씨를 만나 설명해주고 싶어요. 왜냐? 제가 도청 지하실 무기고를 직접 관리를 했으니까요.
 
  언젠가 양홍범·박선재씨와 함께 그때 폭탄 뇌관 제거 작업을 한 배승일씨도 만나고 싶어요.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만나면 할 말이 많을 것 같아요.”.⊙
 
지만원의 북한 특수군의 폭탄 설치는…
 
  도청 내 2100발 TNT 폭탄 설치·조립 주장은 거짓
 
  지만원씨는 2015년 뉴스타운에 ‘광주 5·18, 전남도청의 TNT: TNT 광주 사람이 조립해놓았는가, 아니면 북한 특수군이 조립해놓았는가?’라는 글을 기고하며 이런 주장을 폈다.
 
  〈…그러면 이 TNT는 광주 사람이 조립해놓았는가 아니면 북한 특수군이 조립해놓았는가? 광주시민이 80만 인구의 당시 광주를 날려버리기 위해 이 위험한 폭탄을 조립했는가? 광주에는 이런 폭탄을 조립해서 5·18 유공자가 된 사람이 없다. 광주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말문이 막혀 있다. 2100발의 TNT 폭탄을 광주시민이 조립했는가.…〉
 
  지만원씨의 이런 주장은 사실상 북한 특수군이 내려와 도청 지하실에다 다이너마이트(TNT)를 ‘설치’ 혹은 ‘조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영복씨는 지씨의 주장을 일축한다. ‘설치’나 ‘조립’이 없었다는 것이다. 도청 마당에 흩어진 무기와 폭약을 민원실 지하(식당)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물론 누가 어디서 어떤 과정을 거쳐 무기와 실탄, 폭약을 탈취해 도청으로 가져왔는지는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일각에서 “트럭으로 한두 대 정도 되는 폭약을 화순탄광에서 실어 도청으로 가져왔다”는 증언이 나온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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