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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집

5·18 숨겨진 義人, 문용동의 日記

“누가 돌을, 각목을, 총기를 들게 했는가, 이럴 수가 있는가”

글 : 김형석  역사학자·대한민국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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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용동은 ‘전남도청 지하실의 폭발물 해체’의 당사자
⊙ 문용동 일기는 5·18정신을 이해하는 사상의 寶庫

金亨錫
1955년생. 건국대 사학과, 경희대 대학원 박사 / 총신대 교수, 한민족복지재단 회장, 《조선일보》 통일과나눔재단 운영위원장,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 역임. 現 대한민국사연구소 소장 / 저서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 《한국교회여 다시 일어나라》 《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1980년 5월 22일 자 문용동 일기.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5·18과 관련된 인물의 일기를 컬렉션으로 구축해 인터넷상에서 오픈할 예정이다. 그중에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이 문용동이 남긴 일기다.
 
  문용동(당시 27세·전도사)은 누구인가. 1980년 5·18 당시 시민군의 항쟁 거점이었던 옛 전남도청 지하실 무기고의 폭약을 안전하게 관리하다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인물이다.
 
  문용동 일기는 2010년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 ‘어떤 일기장’이란 시를 통해 알려졌다. 1986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만인보》는 2010년까지 인물로 본 한국 근현대사를 담은 30권짜리 시집이다.
 
  필자가 문용동 일기를 처음 접한 때는 《만인보》보다 앞선 2008년 봄이었다.
 
  강연을 위해 문용동이 다녔던 호남신학대를 찾았을 때 ‘문용동전도사순교기념사업회’가 만든 소책자 《새벽길을 간 이: 故 문용동 전도사 추모 자료집》을 통해서다. 2001년에 만들어진 《추모 자료집》에는 30편의 일기가 실려 있었는데 필자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일기’에는 성직자의 길을 준비하던 문용동이 5·18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독일의 행동주의 신학자 본회퍼(1906~1945)의 ‘미친 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는 명언이 담겨 있었다. 그가 필자와 같은 73학번이라는 점도 더욱 애착을 갖게 했다.
 
  문용동 일기는 《추모 자료집》을 통해 일부 알려졌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필자는 문용동을 가슴속에 간직해오다 2016년 한국장로교총연합회로부터 문용동에 관한 원고 청탁을 받고 일기를 세상에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 무렵, 문용동은 생전에 소속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통합)에서 순직자로 지정되었다.
 
  필자는 문용동 일기의 소장자를 수소문하다가 유족들이 ‘문용동전도사순교기념사업회’에 기증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지역사회 일부의 편견 때문에 선뜻 공개하기가 어려운 사정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2년이 지난 2018년 4월, 기념사업회의 협조로 복사본을 소장할 수 있었다. 이때 원본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관리를 위탁했는데, DB작업을 거친 1979년 9월 11일부터 1980년 5월 22일 사이의 일기가 ‘5·18’ 40주년을 맞아 온라인으로 공개된다.
 
  문용동은 중학교 3학년이던 1969년 3월 22일부터 1980년 5월 22일까지 11년에 걸쳐 일기를 썼다. 1974년 8월부터 1977년 11월까지 군 복무 전후 기간은 빠져 있지만, 1976년 2월부터 1977년 6월까지의 17개월간은 병영일기란 제목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36개월의 복무 기간 중에서 신병 시절과 제대를 전후한 4개월 동안은 일기를 쓸 수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하여 필자가 소장한 복사본은 일기 628편에 A4 용지로 477장 분량이다.
 
 
  1980년 5월의 절규
 
일기장 앞장에 적힌 메모. ‘인간이 인간되고자 노력하는 참된 아름다움 앞에 조그만 마음을 드립니다 78. 12. 28.’라고 적어 놓았다.
  필자는 1980년 5월 22일 마지막 날의 일기부터 시간을 거꾸로 소급하여 몇 편을 소개한다. 절박했던 당시 상황과 문용동의 고뇌를 사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1980년 5월 22일
 
  이 엄청난 피의 대가는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가.
 
  이 엄청난 시민들의 분노는 어떻게 배상해줄 것인가.
 
  도청 앞 분수대 위의 시체 관 32구.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인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전대(전남대-편집자 註) 부속병원 영안실의 시체 시체들. 병원마다 꽉 메인 총상환자들.
 
  카빈 소총과 M1(소총)으로 무장하고 눈이 뒤집어진 시민들의 차량의 돌진. 완전히 폐허 같은 금남로. 전소되어버린 문화방송국. 앙상한 골재만 남고 타버린 수많은 차량들.
 
  이 엄청난 피해의 현장. 누가 이 시민에게 돌을, 각목을, 총기를 들게 했는가. 이럴 수가 있는가. 정말 이럴 수도 있는가.
 
  우리는 참여하여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계엄 당국의 엉터리 없는 오도(誤導). 불순분자의 난동이라니, 그럼 내가 불순분자란 말인가. 대열의 최전방에서 외치고 막고 자제시키던 내가 적색분자란 말인가. 우리는 후세에 전 국민에게 광주사태가 몇몇의 불순세력에게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선량한 시민들의 궐기임을 알리고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전 시민이 빵과 주먹밥과 음료수를 나누는 광경이 적색 폭도란 말인가. 뭔가를, 진정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보여줘야 한다. 나의 불참이, 나의 방관, 외면이 수습을 더 지연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문용동 일기의 마지막 부분이다.
 
  5·18 당시 시민군이 수거한 무기와 탄약을 관리하는 ‘탄약관리반원’에 자원한 문용동은 다음 날부터 무기고를 지키느라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부득이 일기장 대신 수첩에다 메모를 남긴 것으로 추정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니체·미셸 파스트·빅토르 위고의 글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다음은 5월 24일 수첩에 적힌 메모다.
 
  〈…양심이란? 내 마음속에 숙소를 정하고 계신 하나님의 목소리. 나의 영혼은 침묵하라. 하나님이시다. 빅토르 위고…〉
 
  이렇게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한 토막 문장으로 문용동은 3일 뒤의 죽음을 앞둔 그의 유언이자 신앙고백을 한다. 이 문장이 11년간 써온 일기(와 수첩메모)의 마지막이었다.
 
 
  ‘이래야만 되는가. 다른 방법은 없는가’
 
1980년 5월 18일 자 문용동 일기. 이날 일기에서 문용동은 ‘개인이건 국가건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
  〈…1980년 5월 18일
 
  나는 무엇을 말하고 써야 하는가. 경찰과 학생의 충돌. 투석전. 터지는 수류탄. 이래야만 되는가. 다른 방법은 없는가. 왜 나이도 어린 저 전경과 동류인 학생들이 욕을 하고 돌을 던져야 하는가.
 
  군의 투입, 공수부대 개입. 드디어 터질 것이 터져버렸다. 안 터져야 하는 것을, 안 벌어져야 하는 것을. 무자비한 공수부대. 곤봉과 군화발질로 학생들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기고 군화로 짓이겨 군용트럭에 싣는다. 학생이나 시민이나 달려들어 개 패듯이 끌고 간다. 항의하는 목사님도 군화발질. 반 기절한 시민을 업어다가 병원에 치료했다. 맞은 상처도 치료했다.
 
  영창예배 분위기가 다르다. 6소대 5명의 전북 대학생 난 무슨 말을 전해야 하는가. 어젯밤 보안대에 급습당하여 끌려온 대학생들 죽었다는 말도 있다.
 
  ‘심는 대로 거둔다.’ 개인이건 국가건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5·18이 일어난 당일의 일기이다. 그날 오후 상무대교회를 다녀오다가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 병사들에게 폭행을 당해 쓰러진 사람을 업고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달려간 얘기와 그 이전에 상무대 영창에서 구금자를 위한 예배를 인도하면서 느낀 점을 적어놓고 있다. 현장에는 많은 시민이 있었지만 구타당하는 장면을 보고도 성난 공수부대원들의 모습이 무서워 선뜻 아무도 나서지 않았는데, 이때 그가 나서서 그 사람을 구한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불의에 대한 ‘역사의 심판’을 강조한 것이 눈길을 끈다.
 
 
  ‘개인이건 국가건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1980년 5월 10일
 
  어지러운 정가(政街). 소란스런 학원. 위기와 같은 시국. 현 시점에서 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탁류 속의 민주주의란 배(船)는 안개 속을 지나 어디로 흘러가는가. 예언자적 통찰 역사를 직시하는 눈길. 시대를 분별하는 사고. 그리고 상황과 시공에 맞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저 소요 사태(민주회복운동, 학원자율화, 계엄 해제…)를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고 난 그냥 있어야만 하는가?…〉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을 보면서 신학대학생이자 상무대교회 전도사라는 이중적인 신분을 가진 입장에서 민주화운동 참여 여부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그로부터 사흘 뒤 문용동은 전남노회여전도회연합회 회원을 대상으로 ‘세상을 향한 교회’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현실 참여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우리의 삶을 뒤돌아본다.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땅 위에만 살기에 급급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분을 만나지 못하고 나 혼자만… 그래서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한복음 12:43)라는 가슴 아픈 말씀을 듣게 된다. 베드로는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여기서 삽시다’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고통, 죄악 속에 신음하는 저 아래 세상 속으로 다시 내려갔다. 교회의 본연의 목적은 이웃을 위하고 세상을 향한 교회이다.”
  -1980년 5월 13일 전남노회여전도회연합회 상무대 야외예배 설교 중에서
 
  ‘교회 본연의 목적은 이웃을 위하고 세상을 향한 것’이라고 외치면서 ‘고통과 죄악 속에 신음하는 저 아래 세상 속으로 내려가자’고 문용동이 설교한 시점은 5·18의 분위기가 이미 무르익던 5월 13일이다. 문용동 일기에는 그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하고 사색한 흔적이 뚜렷이 묻어난다.
 
 
  ‘소년의 절망의 눈빛. 난 그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1980년 4월 18일
 
  그리도 허무한 바람의 물음. 거리를, 포도(鋪道)를, 골목을 맴돌아 나의 자그만 방까지 찾아온 방황의 몸부림. 그분의 수난일(성 금요일 4월 4일). 그리도 숲을 울리고, 대나무를 흔들고, 고향의 물품지를 흔들어대더니 바람은 서러운 울음 속에 어머니를 모셔갔다.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그곳으로 가신 어머니. 이 밤 모질게 와닿는 그날의 바람소리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머니. 어머니 가신 10일 만의 생일잔치 비에 젖어 호젓이 거기 계신 어머님 무덤가.…〉
 
 
  〈…날짜 미상
 
  철장 속의 그들 서대문 구치소로 이감 가는 나이 어린 그 소년의 절망의 눈빛. 난 그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 휭하니 빈 어둠의 좌절 무력감이여 그들을 지키소서. 위로하소서.…〉
 
  4월 18일 자 일기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일을 맞아 그리움에 사무친 사연이 나온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 적힌 날짜 미상의 일기에는 상무대 영창에서 서대문구치소로 이감된 소년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그려져 있다.
 
 
  〈…1980년 4월 15일
 
  새벽이 오도록 설교 준비. 그리고 마음을 주는 편지. “기도할게요. 한번 봐주십시오. 어머니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머리를 쓰다듬는 아 따사롭고 그윽한 손길이여.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아멘.” 병상의 허공을 울리는 메마른 어머니 목소리. 새벽 교회 종소릴 들으며 당신 앞에 엎드립니다.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며 빗소리 속에 눈물을 흘립니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엄니. 보고 싶습니다. 이 밤 몸서리 쳐지게 당신의 주름진 손길이 따스한 음성이. 어머니 병상에서 그리도 고통당하시던 모습이 그리도 슬프셔 슬픈 만가를 흥얼거리시던 모습. 어머니. 이 밤, 바람이 되어 당신을 부릅니다. 있지 아니한 이곳에. 작년 가을 받아온 이 고운 꽃씨. 당신의 무덤가에 뿌릴 줄은 몰랐습니다. 어머님이 가신 지 일주일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습니다. (하략)〉
 
  어머니를 그리는 안타까운 사연은 4월 15일 자 일기에 절절히 나타난다. 밤을 지새우며 새벽이 오도록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준비했다는 설교는 무엇일까? 다행히 일기와 함께 발견된 유품 가운데는 문제의 설교가 수록되어 있다. 바로 ‘4·19혁명’이라는 제목으로 4월 20일 영창예배에서 행한 설교 글이다.
 
 
  ‘미친 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
 
  〈…4·19혁명(요한복음 12장 24~25절)
 
  사월의 하늘 아래 봄이 열리고 생명의 흐름을 본다. 잿빛 죽음의 겨울 속에서 움터 나오는 진한 생명을, 모진 추위와 차가운 바람을 이겨내고, 무거운 흙을 밀치고 솟구치는 해맑은 생명. 그러나 그 생명이 탄생하기까지는 갖은 고초와 어려움이 있었다. 한 생명이 살아나기 위해 또 하나의 생명이 죽어야 했다. 조그만 밀알 하나가 자기 혼자 살기 위해 썩어지기를 거부하면 한 알 그대로이나, 한 생명이 썩어짐으로 10배, 30배, 100배의 생명을 얻는다.
 
  어제가 4・19 자유당의 부정과 부패와 불의를 참지 못해 참다운 민주주의와 바른 인권을 살리기 위해, 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꽃다운 젊음을 불태운 4·19혁명의 날. 사회가 불의를 보고도 외치지 못하고 바른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는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다. 4·19 때 183명이 경찰의 총탄에 사망하고 1800여 명이 부상당했다. 경무대 앞에서 하얀 손수건을 들고 대통령을 만나려던 학생들에게 경찰의 총부리가 불을 뿜어 피투성이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히틀러는 600만 유대인을 학살했다. 독일 국민은 공범자로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한 가닥 양심이 살아 있는 지성인 중에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한 본회퍼가 있었다. ‘어떤 미친 사람이 무고한 행인들에게 차를 몰고 돌진하는 것을 본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그저 그 끔직한 재앙을 지켜보다가 부상당한 사람을 돌보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운전사의 손에서 억지로라도 운전대를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외쳤다.
 
  그는 사전에 발각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소수의 대학생들은 자유와 정의를 부르짖으며, 우리는 침묵하기를 거부한다며 지하운동을 하다가 게쉬타포에 체포되어 꽃다운 나이에 불의의 제물이 되었다. 역사는 저항운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략)〉
 
  문용동은 이날의 설교에서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에 나오는 ‘미친 운전사론’을 인용하면서 불의한 사회를 위해 크리스천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강조했다. 그것이 한 달 뒤에 5·18에 참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처럼 문용동의 설교는 일상의 이야기 대신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또 다른 일기였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5·18
 
1980년 3월 22일 자 문용동 일기. 사순절을 맞아 스스로를 돌아보는 내용의 글이 담겨 있다.
  〈…1980년 3월 22일
 
  밤이 졸고 있는 병실. 밤이 꺼져가는 창. 졸린 밤이 깜빡거린다. 그리하여 밤을 지킨다. 3월에 오는 눈. 이리도 힘들게 오는 봄. 꽁꽁 언 손. 허옇게 부서지는 입김. 봄은 오고야 만다.
 
  예루살렘 입성. 온갖 불의와 위선과 부패, 독선, 증오, 형식 그런 냄새나는 사회와 생활 속으로, 어린 나귀로 평화로 들어가셨다는 분. 어쩜 너무나 초라하고 빈약한 행렬. 권력자와 가진 자의 눈엔 우습게 보이는 모습. 그러나 그들 가슴에 화살처럼이나 도끼처럼 쏘아오는 예수의 정의의 눈빛과 발걸음에 빛이 싫어 스스로 어둠에 몸을 더 깊숙이 도사리며, 빛을 향하여 손가락질하며, 빛 앞에 드러난 너무나 초라하고 어둠으로 가득 찬 행위에 자신을 감추며 빛을 매질한다. 가식과 형식과 죄악의 어둠·불안·방황, 졸고 있는 나의 예루살렘성에 오시는 그분. 오셔야 할 나귀 타고 평화의 왕으로 오실 그분.
 
  정의의 채찍에, 사랑의 질타에, 깨어나는 허영과 헛것들의 예루살렘 생활. 화려한 정치와 종교의 미명 아래 온갖 추악과 억눌림의 불안의 예루살렘 거리. 그때에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마태복음 26:56) 하루에도 몇 번이나 우린 그분을 버리는가. 버림받은 그분. 버리고 온, 도망쳐 온 엠마오. 갈릴리의 생활. 아- 버린 것이 아니라, 버림을 받은 것은 나 자신 바로 우리였습니다. (하략)〉
 
  이날의 일기는 기독교인이 부활절을 앞두고 40일 동안 경건 생활로 준비하는 사순절을 맞아 스스로를 돌아보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다음 날인 23일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제목으로 영창예배에서 행한 종려주일 예배의 설교에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 3월 18일
 
문용동 전도사의 군 시절 모습이다. 그는 대한민국 최정예 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에서 헌병으로 복무하며 총기류와 폭약류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물음을 잃어버린 나날. 회의와 곤감(困感)이 정지한 흐름. 그러기에 더욱 메말라버린 윤기 없는 생활. 나는 어디에 있는 건가? 세월에 조류에 밀려다니며 어디쯤 떠 있는가.
 
  망각해버린 삶의 제반 것들. 망각을 강요되어버려 생활의 노예로 전락한 그레고리. 잠시 나의 삶을 살지 못하고 정욕과 안일 속에 넌 언제 일어나겠느냐. 닭 울음소리에 통곡조차 잃어버린 그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무너져버린 심전(心田).
 
  아! 불을 질러라. 태워버려라. 가증한 냄새나는 것들을, 시선을 외면해버리고 사람의 눈빛을 채우려는 애쓰는 몸부림의 안타까운 안쓰런 안타까움. 언어를 상실한 시간. 내부를 살지 못하고 헛웃음 속에 보내진 돌팔매 같은 공간과 그것들. 나를 살지 못함에 나를 슬퍼한다.
 
  십자가 없는 부활. 그건 과정(process) 없는 허울 좋은 이름. 고난이 없는, 아픔이, 고뇌가, 눈물이, 피가 없는 생이란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된 부활. 그건 그의 너무나 아픈 고난 후의 일인 것이다. 병상에 신음하는 어머니. 부활이 있어야 한다. 아픔과 고통에의 몸부림 부활은 있어질 것이다.
 
  잡기(雜記): 회색빛 봄날. 무표정의 거리에서 암울한 회색 도담이 되어 창백해진 핼쑥한 얼굴. 의미 잃은 거리의 소란한 잡음. 찌들어지고 병약한 영혼의 뜨락. 탈출(exodus) 난 떠난다. 떠나리라.…〉
 
  병상에서 신음하는 어머니를 간병하던 문용동은 어머니의 고통과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비교하면서 부활의 소망을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본인이 ‘잡기’라고 첨언한 문장에서 탈출을 암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탈출은 3월 22일 자 일기를 통해 일상의 삶과 세속 정치·종교로부터의 엑소더스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 목적지는 십자가의 부활이었다.
 
 
  문용동은 누구인가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탈환한 후 참담한 현장의 모습이다. 당시 조선일보 사진부 이영배 기자가 촬영했다.
  〈…1980년 2월 3일
 
  춘천행 경춘선. 눈으로 덮인 노년기의 산등. 설경의 동양화 같은 아름다움. 북한강의 푸르른 흐름의 잔물결. 재미(才美·여자친구의 애칭-편집자)와의 정담. 음악공부를 한다. 영하 17℃의 추위는 청량리 맘모스에서 온갖 이목구비를 만족시킨다. 귀로(歸路)에 눈발 날리는 고속도로. 재미와 일숙(一宿).
 
  그가 없음에 오는 미움과 분냄과 그러한 것들. 그의 면전에 못 있음은 황량한 빈 바람 갈증 나고 목쉰 소리. 영창 9명의 세례식. 무릎 꿇고 눈물 떨구는 수인(囚人). 자청한 근무자… 밤 어머니와 누나, 준희 가정 기도회를.…〉
 
  이날의 일기에는 문용동의 일상이 다 드러나 있다. 여자친구와 춘천 여행을 다녀오면서 느낀 즐거움에 대한 회상, 상무대교회 전도사의 일과, 그리고 저녁의 가정기도회 인도까지. 이렇게 그는 대학생의 낭만과 성직자의 길을 준비하는 신학생의 두 가지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문용동 일기가 갖는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는 무엇일까?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된 5·18 관련 자료는 공공기관이 생산한 자료가 대부분이며, 민간 영역의 자료라고는 시민들의 성명서와 선언문, 일기, 취재수첩 등 극히 일부이다.
 
  문용동 일기는 그가 5·18에 시민군으로 참여하게 된 이유와 그 이후의 행적을 통해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더욱이 문용동은 ‘전남도청 지하실의 폭발물 해체’의 당사자라는 점에서 사건 실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다. 11년간에 걸쳐 기록된 문용동 일기는 활용하기에 따라 5·18정신을 이해하는 사상의 보고(寶庫)가 될 수 있다.
 
  한편, 고은의 《만인보》에는 문용동에 관한 4편의 시가 담겨 있다. 《만인보》 30권의 대미를 장식하는 5·18의 서사시가 ‘문용동’이다.
 
  시민군 문용동/ 5월 26일 날 저녁/ 오래된 단팥빵 두 개 먹었다 배고픈 것 나았다/ 옆에서 피우는 담배 연기 독했다./ 구약성서 모세의 떨기나무와 벌거숭이 시나이 산을 생각했다./ 호남신학대 졸업하면/ 낙도에 가/ 교회 개척할 생각도 가려운 듯 무러운 듯 이어졌다/ 밤이었다./ 이런 생각 다 버렸다/ 지난 열흘 동안/ 어설픈 시위대열/ 하루하루/ 가열찬 시위대열 시민군이 되고 말았다/ 도청 지하실 무기관리를 맡았다 … 죽음이 다가왔다/ 신 새벽이었다/ 계엄군 충정작전 병력이 칠흑 속 다가왔다./ 도청 1층/ 탕 탕 탕 쓰러졌다./ 2층/ 풀 풀 풀 쓰러졌다/ M16 총탄 세발 맞은/ 주검 문용동
  -고은 시 ‘문용동’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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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식    (2020-05-18) 찬성 : 8   반대 : 3
빨갱이들을 옹호하는 것인가?? 지금까지 조선일보의 5.18 에 대한 시각은 폭동이었는데 갑자이 왜 이러나??? 일제시대처럼 재빨리 변신하는 것인가???

2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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