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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집

또 하나의 5·18, 혼돈의 광주

사회주의혁명을 꿈꾸던 운동권과 국가주의자들의 대결

글 : 김형석  역사학자·대한민국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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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해방구를 이끈 첫 번째 지도자는 20세의 재수생 김원갑
⊙ 학생수습委 김창길 중심의 온건파, 계엄군 철수 후 모든 무기를 반납기로 결정
⊙ 윤상원 중심의 강경파, 5·18 발발 전부터 ‘파리코뮌 스터디그룹’의 멤버로 활동
⊙ 온건파 김창길 몰아내고 강경 투쟁방침 세워… “죽더라도 다음 혁명의 불씨가 돼야”
⊙ 만약 도청 지하실의 폭약 뇌관을 분리하지 않았더라면…

金亨錫
1955년생. 건국대 사학과, 경희대 대학원 박사 / 총신대 교수, 한민족복지재단 회장, 《조선일보》 통일과나눔재단 운영위원장,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 역임. 現 대한민국사연구소 소장 / 저서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 《한국교회여 다시 일어나라》 《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첫날의 광주 금남로 도청 앞 상황.
  5·18민주화운동(이하 ‘5·18’)이 40주기를 맞았다. 공자는 ‘인생 40이면 불혹(不惑)’이라 했는데, 마흔의 5·18은 여전히 의문투성이 사실(史實)들로 갈등을 빚고 있다. 다수의 국민은 5·18이라고 하면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 진압, 시민군과의 처절한 시가전, 상무충정작전에 맞서 싸운 민주투사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5·18에는 복잡다단한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광주가 국가 공권력으로부터 이탈하면서 193명의 사망자(민간인 166명, 군경 27명)와 3139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사실상의 내전(內戰)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세계사의 유사한 사건과 비교하면 피해가 훨씬 작다는 점이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의 광주는 혼돈의 도시였다. 더욱이 22일 계엄군이 철수한 후의 닷새 동안은 무정부 상태였다. 이때 광주 해방구를 이끈 첫 번째 지도자는 스무 살의 재수생 김원갑이다. 그는 22일 이른 아침 500여 명의 무장시위대로 시민군을 조직하여 도청을 접수하고, 차량 안내방송을 통해 동요하던 시민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렇지만 재수생이 지휘한다는 자체가 지도부의 취약성을 단적으로 나타낸 증거였다. 결국 김원갑은 그날 저녁에 송기숙 교수의 주도로 결성된 학생수습위원회의 김창길(당시 23세·전남대 3년) 위원장에게 지휘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점에서 김원갑이 스스로 창출한 ‘셀프 권력’이라면, 김창길은 대학사회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이었던 셈이다.
 
  당시 광주에서는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도청 광장에서 ‘광주 지역 10개 대학 연합 민족·민주화 대성회’를 주도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당시 27세)이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5·17비상계엄령이 선포되자 그를 비롯한 각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이 모두 잠적해버리면서 혼란이 발생했다.
 
  따라서 학생수습위원회는 이들이 나타날 때까지 한시적인 학생수습위(委)로 결성되었다. 위원장 김창길, 부위원장 김종배(조선대), 총무 정해민(전남대), 대변인 양원식(조선대), 무기관리담당 허규정(조선대) 등을 선임하고, 산하에 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수리보수반, 질서회복반, 의료반을 두었다.
 
  김창길과 학생수습위의 당면한 업무는 구속자 석방과 무기 회수였다. 이에 김창길은 시민수습위원회의 한완석 목사·조비오 신부·명노근 교수 등과 함께 계엄사와 협상에 나섰다. 이때 김창길은 회수된 총기 중에서 카빈소총 150정을 반납하고, 대신 계엄사에 연행된 34명을 석방해왔다. 이를 계기로 학생수습위는 무기 반납을 주장하는 ‘온건파’와 이에 반대하는 ‘강경파’의 갈등이 나타났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비폭력 투쟁을 주장하는 종교계의 영향으로 무기 회수와 반납에 큰 마찰은 없었다.
 
 
  학생수습委의 쿠데타… 온건파에서 강경파로
 
5·18 당시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물러났을 때의 전남도청 앞 광장의 분수대 주변 모습이다. 희생자들의 시신이 널려 있고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있다.
  5월 25일 새벽에 열린 학생수습위는 김창길의 주도로 모든 무기를 반납기로 결정했다.
 
  시민군의 총기를 회수하여 도청 안에 모아놓고 모두가 도청에서 빠져나가기로 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윤상원은 무기 반납을 반대하던 부위원장 김종배·상황실장 박남선을 규합하여 무기 회수를 막고 시민군을 한 군데 집결시켜 전투력을 강화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날 오후 윤상원은 YWCA에서 운동권 학생 30명을 데려와서 회의장 옆방에 대기시켰으며, 회의장에는 강경파인 김종배·허규정에 운동권 인사인 정상용·이양현이 합류했다. 이들은 오후 7시부터 시작된 회의를 통해 김창길을 비롯한 온건파를 투항파로 몰아세웠다. 격렬한 논쟁 끝에 김창길은 학생수습위원장직을 내려놓고 도청을 떠나게 됐고, 이 과정에 박남선이 권총으로 김창길을 위협했다는 설도 있다.
 
  이로써 김창길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가 물러나고 김종배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 지도부가 태어났다. 이때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정상용의 말처럼 “도청 안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명칭을 민주투쟁위원회로 고치고, 위원장 김종배·상황실장 박남선·대변인 윤상원의 삼각체제로 출범했다. 김종배는 정치적인 지도자로, 박남선은 시민군 지휘관의 역할이 주어졌지만, 실제로 위원회를 이끈 사람은 윤상원이었다.
 
  윤상원은 5·18 당시 희생된,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델로 알려진 인물이다. 훗날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래극·판소리·영화 등으로 보급되어 5·18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윤상원이 중심이 된 민주투쟁위는 출범한 지 불과 30시간 만에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에 의해 와해되고 말았다. 이렇게 광주는 22일부터 27일 새벽까지 닷새 동안의 짧은 기간에 세 차례나 지도자가 바뀐 혼돈의 도시였다.
 
 
  자발적인 무기 회수와 도청 폭약 해체 사건
 
광주 5·18 당시 계엄군이 철수한 후 전남도청을 경비하고 있는 무장 시민과 학생들.
  5·18의 가장 큰 논란거리는 5월 21일에 발생한 3건의 ‘반국가적 사건’이다.
 
  설령 자위적으로 불가피하게 행한 사건이라 해도 ‘20사단장 지휘차량 탈취 사건’ ‘아시아자동차공장 장갑차량 탈취 사건’ ‘전남 도내 무기고 탈취 사건’은 국가 공권력을 부정한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다음 날부터 나타난 무기 회수 움직임이다. 22일 도청에서 5·18수습대책위가 결성되고 8인의 협상대표가 전남·북 계엄분소를 다녀온 뒤 열린 보고대회에서 일부 반발에도 무기 회수를 결정했다.
 
  무기 회수는 수습대책위원들 간에도 큰 논쟁거리였다. 필자가 수습대책위원으로 활약했던 방철호 목사(1935-2018)로부터 들은 증언이다.
 
  “그때 도청 지하실에서 수습대책회의를 하는데 광복회 활동하는 김갑제가 눈을 부라린 채 권총을 들이대면서 “광주시민이 다 죽어도 민주화는 해야 합니다.”하고 외치는 거예요. 근데 수습위원 한 분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놈아. 광주시민 다 죽으면 누구 데리고 민주화할래. 살긴 살아야 한다.”하고 호통을 친 후에 회의를 계속했어요.
  - (2018.1.15, 광주 농성동 소재 일식당 ‘가매’에서 한 인터뷰)
 
반론보도문
 
  방철호 목사의 인터뷰에 언급된 김갑제씨는 당시 홍남순·이기홍 변호사, 조철현, 김성룡 신부, 조아라, 이성학, 김천배, 윤영규, 위인백 선생 등 광주민주인사들과 함께 시민 측 수습위원으로 참여 활동했습니다.
 
  김갑제씨는 방 목사의 주장을 부인하며 “전남 도청 상황실과 부지사실에서 수습위원들과 며칠간 수습회의에 참여했지만, 지하철 무기고에는 한 번도 들린 적이 없고, 따라서 지하실에서 수습회의를 한 사실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월간조선에 알려 왔습니다.
 
  김갑제씨는 또한 “권총을 들이댄 뒤 운운한 주장은 완전 날조된 거짓말이며 항쟁기간 내내 권총은 본 적도 없고 소지하고 다닌 적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김갑제씨는 수습위원들간 회의 중 무조건 무기반납을 주장하는 위원들을 향해 “계엄사로부터 무슨 보장을 받고 반납해야지 무조건 반납하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면서 “무조건 반납을 반대하는 발언을 하였다”고 알려 왔습니다.
 
  김갑제씨는 “방철호 목사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인터뷰가 사실인지는 알지 못하나 우선 진실규명 차원에서 반론문을 보낸다. 저의 말은 모두가 사실이며 아직도 5.18 때 함께 활동한 후 살아있는 분들이 많이 있어 당시 상황을 명확히 입증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날 방철호 목사는 5.18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들려주었다. 도청 지하실의 폭발물을 지키기 위해서 수습대책위원들이 출입구 앞 도청 마당에서 밤을 새웠던 얘기와 사망자들을 안장할 장지를 찾아 망월동 묘역을 광주시로부터 허락받고 첫 번째 장례를 집례한 얘기까지 거침이 없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지 않은 2월 12일 방 목사는 세상을 떠났다. 83년의 생을 살면서 광주지역사회를 위해 사회운동과 복지사업에 애쓴 그분의 마지막 인터뷰였다.
 
  당시 광주에는 초등학생도 총을 메고 다니는가 하면, 수류탄의 안전핀에 줄을 달아 어깨에 두르고 다니는 사람까지 있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대다수 시민은 총기 오발이나 수류탄 폭발 등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무기를 회수하여 안전하게 보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전남도청과 광주공원에 접수처를 설치하고 무기 회수를 설득하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22일 저녁까지 1500정가량의 총이 수거되었는데, 이를 미처 정리하지 못해 도청 수위실 주위에 수북하게 쌓아놓았다.
 
  다음 날부터는 수습대책위원인 조비오 신부·장세균 목사·이종기 변호사·남재희 신부가 함께 시내를 순회하면서 무기 회수에 나섰고, 25일에는 이성학 장로와 윤영규(초대 전교조 위원장)도 합류하여 외곽 지역을 돌며 활동했다. 그 결과 4500여 정의 총기가 회수되었는데 유실된 총기의 90%가량이었다. 광주는 기독교인이 20%, 천주교인이 10%에 달하는 지역 특성상 목사와 신부가 함께 다니며 “더 큰 희생을 막아야 한다”고 설득한 것이 무기 회수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90%의 무장력이 상실됨을 말하는 것으로 지역방위대 해산과 시민군의 와해로 이어지면서 희생자를 크게 줄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80년 5월 광주의 실상을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전남도청 지하실에 있던 폭약이다. 애초부터 시위대가 시민군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계엄군과 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럼에도 닷새 동안이나 대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폭약이 폭발하면 광주시가지의 절반이 날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계엄군도 진압작전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5월 22일 날이 밝자 밤사이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한 사실을 알게 된 시민들이 자진하여 총기를 반납하러 왔다. 이날 낮에는 화순광업소에서 탈취한 다이너마이트도 도청으로 들어와 마당에 총기와 폭약이 아무렇게나 널렸는데 8t 트럭 4대분이나 되는 엄청난 물량이었다. 이 모습을 본 청년들이 지하실로 옮긴 후에 안전 관리를 위해 봉사를 자원했다. 스스로를 ‘폭약관리반원’으로 부르며 현장에 남은 사람은 문용동(27), 김영복(26), 이경식(23), 박선재(22), 정남균(21), 양홍범(20) 등 6명이었다. 이들은 연장자인 문용동을 중심으로 학생수습위원회와의 업무는 조선대생 이경식이, 외부와 차단시키는 경비 업무는 권투선수 출신의 양홍범이 맡았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투쟁인가?
 
  무기고 관리는 무척 힘들고 위험했다. 도청 수비대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총과 실탄을 달라고 협박하였고, 밤이면 총구를 가슴에 들이대고 위협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소한 부주의로 오발 사고가 나거나 담뱃불이라도 떨어지면 폭발할 우려가 있어서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군에서 공병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폭발 사고를 경험한 적이 있는 김영복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수도경비사령부에서 복무한 문용동도 병기 관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로 뜻을 모으고, 5월 23일 전교사를 방문하여 김기석 장군(전교사 부사령관)을 만나 상황을 설명했다. 이때 다이너마이트 뇌관 700여 개를, 다음 날 2차 면담에서는 폭약 뇌관 2288개를 넘겨주었다. 이것을 본 김기석 장군은 탄약전문가를 파견해주기로 약속했다.
 
  5월 24일 저녁 도청 지하실에서는 전교사에서 파견된 배승일 탄약검사사와 문용동·김영복·정남균·이경식 등 5명이 촛불을 켜고 밤새워 폭약 해체 작업을 수행하고, 밖에는 양홍범이 출입문을 통제한 채 경비를 섰다. 당시 다이너마이트 뇌관과 손가락 길이 정도의 도화선으로 장치한 폭약 뭉치 2100개와 수류탄 신관 450여 발을 제거했다는 데서 얼마나 위급한 상황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배승일은 무사히 소임을 마치고 16시간30분이 경과한 25일 오후 1시에 도청에서 철수한 후 부대까지 도보로 2시30분쯤 복귀했다. 배승일은 그때의 작업일지를 수첩에 자세하게 기록해두었다.
 
  5월 20일에 발행한 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학생혁명위원회(25일 결성한 민주투쟁위원회와 별개의 조직)의 ‘결전의 순간이 왔다’란 전단에 “행동강령으로 무기를 제작하라!(다이너마이트, 화염병, 사제폭탄, 불화살, 불깡통, 각종 기름 준비), 전 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 차량을 획득하라, 특공대를 조직 무기를 탈취하라! 아! 형제여! 싸우다 죽자!”라고 적혔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사실, 도청 지하실에 있던 폭약 뭉치는 시위대나 계엄군 모두에게 ‘아킬레스건’이었다. 시위대는 이 폭약이 자신들을 지켜줄 최후 보루로 여기며 계엄군과의 협상에 지렛대로 사용하였고, 반면 계엄군은 도청 진압작전 강행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런 마당에 문용동이 전교사를 찾아가 배승일을 불러들이고, 폭약과 수류탄을 해체해버렸으니 한순간에 지렛대 균형이 깨져버린 셈이었다.
 
  따라서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강경파들은 문용동을 계엄군의 프락치로 몰아세웠고, 계엄군은 문용동이 자기들의 공작요원이었다는 거짓말을 퍼트리며 군사작전의 성과로 치부했다.
 
  이런 이유로 한동안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무기 회수 운동이나 도청 지하실의 폭발물 해체 사건은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왔다. 정의와 민주화를 내세우며 무장투쟁을 주장하면 자랑스러운 일이고, 국가와 생명의 존엄성을 말하는 것은 배신자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편견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윤상원과 함께 강경파의 입장을 대변하던 정상용의 인식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나는 그때 당시 무기 반납에 반대했지만 어느 한쪽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았다고는 보지 않는다. 무기 반납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계엄사의 앞잡이도 아니었고,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 충분히 그와 같은 입장을 취할 수가 있었다. 교수, 신부 등 수습위원들이 무기를 회수하고 다닌 것도 희생을 줄이기 위한 순수한 행위였고, 나이도 더 들었으므로 매사에 조심스러운 행동의 결과였다고 본다. 우리는 평소 사회변혁을 추구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항쟁 자체를 바라보는 입장이 달랐던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까지 끝까지 싸우자고 했던 사람들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영웅적이었으며, 수습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투항주의자였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서로 입장의 차이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항쟁에 뛰어들어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그 점을 더욱 높이 평가해야 될 것이다.”
  -2007년 5월 29일 ‘전남대 5·18연구소’와 가진 정상용의 증언 중에서
 
 
  사회주의혁명을 꿈꾸던 사람들
 
  5월 25일 저녁 ‘도청 안 쿠데타’는 단순히 학생수습위원장이 김창길에서 김종배로 바뀐 것이 아니라, 항쟁의 성격이 ‘사회주의혁명’으로 선회한 것을 의미한다. 5.18의 출발은 학생들이 중심이 된 민주화운동이었다.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된 광주시내 10개 대학 연합 민족·민주화대성회는 평화로운 횃불시위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김창길의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그 연장선상에서 출발하였다. 그런데 25일 도청 안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는 무장 항쟁을 통한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민중운동권이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민중 항쟁으로 성격이 변질되었다.
 
  김종배와 윤상원은 5·18이 발발하기 전부터 YWCA에서 모인 ‘파리코뮌 스터디그룹’의 멤버였다. 그중에서도 윤상원은 광주 운동권 인사들의 모임 터인 녹두서점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민주회복통일국민회의 사무국장과 전민노련 중앙위원 겸 광주 지역 노동운동 총괄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22일 시위대가 도청을 장악하자 안으로 들어가 녹두서점과 YWCA에 머무르는 운동권을 학생수습위원회의 강경파와 연결하고 있었다. 그런데 25일 학생수습위원회가 무기 반납을 결정하자, 김종배·박남선과 연대하여 번복시키고 온건파를 무너뜨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송정리 황룡강에서 채취한 골재를 영광원자력발전소 건설 현장에 납품하던 박남선은 대학생 위주로 구성된 학생수습위원회에서 이방인 같은 존재였다. 가난한 가정환경 탓에 중2 때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는데 ‘천성적으로 노가다 사업체질’이었다. 따라서 군대도 못 간 방위병 출신이지만 예비군 훈련 때 보여준 특유의 친화력과 통솔력을 인정받아 중흥동 동원 중대에서 부중대장을 맡고 있었다. 18일 동생이 공수부대에 폭행당해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실려 간 소식을 듣고부터 시위에 가담했는데, 21일 아시아자동차공장과 나주경찰서 무기고를 탈취하는 데 앞장서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날 저녁 무장시위대 600여 명을 광주천 변에 매복시킨 후 해가 뜨자 무장시위대를 인솔하고 도청으로 입성했다. 이러는 사이 그는 무장시위대의 지도자로 부각되고 있었다.
 
  노동자 시인 박노해는 《노동해방문학》 1989년 5월호 ‘광주 무장봉기의 지도자 윤상원 평전’에서 박남선의 등장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도청 지도부 실세는 무장력을 관장하는 박남선을 중심으로 한 상황실이었다. 박남선은 봉기한 광주 민중의 무장력을 출중한 혁명적 지도력에 의하여 점차 조직적으로 장악해가고 있었다. 무장투쟁 속에서 익힌 ‘안면(顔面)’과 역동하는 봉기 상황에서 발휘한 ‘단호한 결단력’이 그의 지도력의 핵심이었다.…〉
 
  박남선의 등장은 민중운동권의 뒤늦은 참여를 의미했다. 5·18이 일어나자 이들은 “운동권의 씨가 마르게 된다”는 이유로 참가를 거부했다가 23일 시민군 결성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시민군을 통해 무장봉기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박남선의 입지와 시민군의 역할을 주목하고 학생수습위를 장악하는 데 활용한 사람이 윤상원이다. 박노해는 두 사람의 만남을 이렇게 설명한다.
 
  〈…박남선은 항쟁지도부에서 갑작스럽게 부상했지만 정치의식이 부족하고 조직적으로 훈련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런 한계를 알면서도 며칠간의 혁명적 상황에서 수십 년을 상회하는 정치의식과 지도력을 응축하여 체득한 혁명 지도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선 사람이 윤상원이었다.…〉
 
  당시 윤상원은 6가지 투쟁 방침을 제시했다.
 
  첫째, 민중봉기는 파쇼 권력이 타도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패배하여 죽더라도 다음 혁명의 불씨가 되기 위하여 결사 항전해야 한다.
 
  둘째, 봉기를 전국으로 확산시켜야만 이길 수 있다.
 
  셋째, 도청을 중심으로 형성된 혁명군을 통일된 전투지휘체계로 조직화해야 한다.
 
  넷째, 수습위원회의 무기 반환으로 침체된 민중의 혁명투쟁 의지를 고양시키고 전 민중의 적극적 무장화를 촉진시켜야 한다.
 
  다섯째, 혁명적 입장을 견지하는 김종배를 무장력으로 강화시켜줌으로써 수습위원회의 분열을 견인한 후 투항주의자를 축출한다.
 
  여섯째, 복귀한 운동권 인사들을 도청 지도부의 간부로 입각시키고 의식 있는 학생들을 무장부서에 대체시켜 적의 교란작전을 봉쇄한다. 그리하여 혁명적이고 중앙집권화된 실질적 집행력을 갖춘 대체권력으로서의 봉기 지도부를 창출한다.
 
  새로운 항쟁지도부 대변인을 맡게 된 윤상원은 5월 26일 오후 5시 민주투쟁위원회가 주최하는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시민들과의 소통을 내세웠지만 의도는 국제사회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윤상원은 “북쪽을 향해야 할 군인들의 총이 왜 남쪽을 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 우리는 매일 반공 구호를 외치고 시작한다. 그렇게 몰고 가지 마라. 억울하다”고 호소하면서 주한 미국 대사와의 면담과 국제적십자사에 구호를 요청했다.
 
  당시 회견에 참석했던 《뉴욕타임스》 도쿄지국장 스토크스는 “지도자들은 몹시 지치고 어려 보이는 젊은이들로 무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대변인(윤상원)을 만나러 방에 가보니 카빈총을 마치 장난감 총이나 되듯이 벽에다 기대놓고 있었다. 안전장치는 제대로 해놓은 것일까?”라고 회상했다. 그의 말처럼 무기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오합지졸의 학생들로 계엄군과 맞서 싸운다는 발상부터 비현실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주의혁명을 꿈꾸면서 글라이스틴 미국 대사와의 면담을 요청하고 미국 항공모함이 와서 구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평화주의자 한완석과 제자 문용동
 
1980년 5월 24일 전남도청사 복도에서 카빈 소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는 청년. 당시 조선일보 사진부 이병배 기자가 촬영했다.
  5·18이 유례가 없는 무력항쟁이었음에도 나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탄약관리반원들이 전남도청 지하실의 폭약을 안전하게 처리한 때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러나 도청 폭약관리반에서 활동한 문용동에 대해 ‘계엄군의 프락치’ ‘광주의 배신자’라는 부정적인 평가부터 ‘광주를 구한 의인’ ‘사랑과 평화의 순교자’라는 칭송까지 극명하게 다른 평가가 나타난다. 그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문용동이 ‘상무대교회 전도사’라는 사실과 한완석 목사와의 특수한 관계를 근거로 제시한다.
 
  이 중 상무대교회 전도사에 대한 시비는 상무대교회가 전교사에 소속된 군인교회이지만, 문용동은 군인가족을 대상으로 주일학교와 학생회를 지도하기 위해 전남노회 여전도회연합회에서 파송한 민간인 신분인 것을 모르고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문용동을 생각할 때, 첫 번째로 떠오르는 사람이 고(故) 한완석(1925~ 2007) 목사이다. 문용동은 1952년 전남 영암군에서 문순봉과 김봉님의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군서북초등학교를 졸업하자 1965년 광주로 이사하여 조선대부속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고3 때인 1972년 4월 친구를 따라 광주제일교회에 출석했는데, 고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사가 되기 위해 호남신학교(현 호남신학대)에 진학했다. 기독교를 믿은 지 불과 1년 만의 이 같은 변화는 전적으로 그가 존경하고 따르던 한 목사에게 받은 영향이었다. 한 목사는 자택을 늘 교인들에게 개방했는데, 문용동은 거의 매일 한 목사와 저녁 식사를 나누었다. 교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문용동은 한 목사의 아들보다 식사를 함께 한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 한완석 목사는 누구인가. 1925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한완석은 일본에 유학하여 히로시마 흥문중학교를 졸업했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장로회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으며, 군산에서 목회하던 1958년 독일에서 열린 제13차 세계기독청년면려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1973년 광주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위임받았으며, 1975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전국적인 교회 지도자로 자리매김하였다. 당시 그가 남긴 ‘총회장 성탄 메시지’에는 국가와 사회를 향한 관심이 잘 나타나 있다.
 
  “성탄을 축하한다고 교회의 담장 안에서만 즐기는 성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로 나가 봉사하는 성탄이 더욱 의의 있는 성탄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국방을 위하여 젊음을 쏟고 있는 장병들을 기억하며, 내 주위에 있는 불우한 이웃을 도와야 할 것이다.”
 
  한완석 목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평화주의자 혹은 국가주의자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황성수(전 국회의원)·이대순(전 체신부 장관)·노정현(전 연세대 교수) 등과 전국을 순회하면서 기독청년운동으로 평화와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총회에서는 군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기 때문에 교제하는 장성도 많았다.
 
  당시 논산훈련소 소장을 지내고 광주로 내려와 전투교육사령부 부사령관으로 근무하던 김기석 장군과는 같은 익산 출신이었다. 또 국가관이 통하는 바가 있어서 각별한 사이였다. 이 때문에, 5·18 기간인 5월 23일 수습대책위원회와 계엄사의 협상으로 34명의 구금자를 석방한 것이나 24일 문용동이 폭약 해체를 상의하기 위해 전교사에서 김기석을 면담할 수 있었던 것도 한완석과 김기석의 두터운 신뢰관계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한 목사는 주일마다 교회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설교할 때 평화와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데모는 간디처럼 맨손으로 비폭력으로 하는 것이다”는 얘기를 수시로 강조했다. 이런 한완석의 국가관이 문용동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기독교수습대책委와 광주시기독교비상구호委
 
  한완석 목사는 5·18이 일어나자 다음 날인 19일에 광주제일교회에서 전남노회 대표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5월 22일에는 15개 교파의 200여 교회를 대표한 100여 명의 목사·장로로 광주시기독교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광주 교계의 원로인 김신근(1914~ 1996·광주 숭의학원 설립자) 목사를 위원장에 추대하고, 한 목사는 고문을 맡는 한편 도청의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같은 기독교이지만 신앙노선과 사회참여 문제를 놓고 대립하던 15개 교파가 이렇게 빠른 시간에 동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어 25일에는 오전에 주일예배를 마친 교계 지도자 50여 명이 오후에 광주제일교회에서 기도회를 가졌는데, 이때 한 목사가 ‘교회가 평화적 해결에 앞장설 것’을 촉구한 것이 일부 참석자의 반발을 불러왔다. 〈계엄사 상황일지〉의 ‘시국 수습을 위한 목사 동향’ 보고서에는 한 목사가 계엄 당국의 포고령에 의해 옥내·외 집회가 금지되어 저녁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계엄사와 접촉하여 예배를 정상화하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한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기독교수습대책위원회는 광주제일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명칭을 광주시기독교비상구호위원회로 바꾸고 위원장 한완석 목사, 총무 방철호 목사를 선출했다. 불필요한 오해에서 벗어나서 구호활동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동 위원회는 모금운동을 전개한 결과 국내·외 94개 교회와 기독교 기관이 보내온 성금은 약 4000만원(3999만9761원)이었다. 이 성금으로 광주기독병원·전남대병원·조선대병원·국군통합병원 등에 입원한 민간인은 물론 군인, 경찰 등 549명(타 지역으로 이송된 48명: 서울 34명, 대구 7명, 대전 3명, 부산 3명, 진해 1명 포함)과 개인병원에 입원한 환자 33명에게도 위로금을 전달하고, 목사들을 12개 조로 편성하여 사망자 102명(경찰 포함)의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여 위로금을 전달하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사망자에 대한 장례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구용상 시장을 방문하여 묘지를 망월동으로 지정해줄 것을 요청한 결과, 29일에 변남주·방철호·노정열 목사의 집례로 망월동묘지에서 기독교식으로 47명의 장례식을 처음으로 거행했다. 또한 보안대, 정보부, 경찰서 등을 계속 방문하여 구속자 석방을 건의하고, 교도소를 방문하여 위문품과 영치금을 넣어주며 위로해주었다. 광주시기독교비상구호위원회의 활동은 5·18로 인한 시민의 상처를 위로해주는 인도주의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그해 11월 8일까지 6개월 동안의 활동을 마치고 해산했다.
 
 
  또 하나의 5·18을 생각하며
 
  역사에 ‘가정’이란 필요가 없는 단어이지만, 만약 5월 25일 저녁에 ‘도청 안의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고 원래 결정대로 무기 반납과 도청에서 철수가 이루어졌으면 어떠했을까? 그 이유는 5·18이 끝난 지 40년이 지나도록 정쟁이 끊이지 않고,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점점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약 그랬더라면, 5·18의 피해는 훨씬 적었을 것이고, 이후의 갈등도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가정은, 만약 도청 지하실의 폭약 뇌관을 분리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시민군을 지휘한 상황실장 박남선과 기동타격대장 윤석루는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하면 다이너마이트를 폭파하고 자폭하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그들의 젊은 혈기와 행태를 보면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을 개연성이 상당히 높았다.
 
  문용동과 탄약관리반원들이 해체한 폭약의 규모도 1977년 11월 11일 일어난 이리역(현 익산역) 폭발 사고 때와 거의 비슷했다. 이리역 폭발 사고는 화물열차에 싣고 있던 30여t의 폭발물이 폭발하여 반경 500m 내의 건물이 파괴되고, 59명의 사망자와 115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1647가구 78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을 만큼 어마어마한 사고였다.
 
  1980년 광주시 인구는 72만명으로 익산의 2.5배인데다가 도청 주변의 밀집한 주거 환경을 감안할 때, “도청의 폭약이 폭발했더라면 이리역 폭발 사고보다 최소한 3배 이상의 피해가 날 것으로 판단했다”는 배승일의 증언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필자는 문용동과 탄약관리반원들, 그리고 배승일을 ‘1980년 5월 광주를 구한 의인(義人)들’이라 부른다.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예장 총회(통합)에서 4년 전 순직자로 지정한 문용동을 순교자로 추서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순교(殉敎)라는 용어를 ‘자기가 믿는 종교,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아 목숨까지 잃게 되는 일’이라는 보편적 의미로 해석할 때는 해당되지 않지만, ‘주의·사상을 위해서 죽는 경우’를 포함하는 광의(廣義)로 해석하면 문용동의 경우가 적합한 예이다. 문용동 일기와 설교가 그 증거이다.
 
 
  온건파의 행적 또한 5·18의 소중한 자산
 
  5·18은 정치적으로 민주화운동이라는 ‘법적 지위’를 쟁취했지만 논란은 그치지 않고 있다. 5·18에는 두 가지 구조적인 사회현상이 공존한다. 5·18 기간에 해방구가 된 광주는 온건파가 나흘을 통치하고, 강경파가 마지막 하루를 통치한 셈이다. 황무지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듯 그 죽음의 현장에서 생명을 사랑하고 국가 질서를 지키려고 애쓰던 온건파의 행적 또한 5·18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들은 투항주의자도 아니었고 독재자의 앞잡이도 아니었다. 민주화를 생각하는 방법이 달랐을 따름이다. 이런 점에서 ‘신군부의 등장과 전국 계엄 선포’라는 5·18의 외인(外因)을 떠나 광주 시민사회의 내재적(內在的) 입장에서 살펴보면, 5·18은 사회주의혁명을 꿈꾸던 운동권과 국가주의자들의 대결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5·18민주화운동 40주기를 맞아 역사의 그늘에 숨겨진 ‘또 하나의 5·18’의 증인인 문용동과 의인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자취를 더듬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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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철    (2020-05-15) 찬성 : 0   반대 : 11
미얀마와 같은 군사독재자들을 국가주의로 포장하는 당신 정체가 뭐냐? 그럼 미얀마 군사독재는 뭐냐? 중국 공산당 천안문 학살은 뭐냐? 광주 5.18은 뭐냐? 똑같은거야 전두환 노태우는 2억달러 상당의 부정부패잡범들이잔아 애국자가 아냐? 악독한 인권유린 독재세력에 저항하는데에 수단이 된거일뿐이다.전시평시 군사작전권이 외세 미국에 잇는 당시 군부는 미국의 괴뢰군부다.,괴로군부와 싸운 세력이다. 정신채려 이게괴뢰군부 아니면 뭐가 괴뢰냐? 자랑이냐? 국가주의같은 소리 하고잇네
  권남익    (2020-05-14) 찬성 : 17   반대 : 3
518 문제해결의 시작은 지만원박사가 제출한 대규모북한군 사진증거의 공식수사다. 사실이면 국가안보상 심각한 문제인데 광주라고 덮어듈순 없다. 사진은 과학이다. 이것 덮어두고 518 갈등 해결안된다.
  우재원    (2020-04-28) 찬성 : 9   반대 : 42
말은 바로 하자 조선아 자유민주주의혁명을 꿈꾸던 자유민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대결이지 너희들은 어떻게든 광주학살을 비하하려고 사회주의라는 사상을 가지고 와서 덪칠하려는 모양인데 누가 이기나 해보자 범진보가 190석을 얻었으니 조선 중앙 동아를 비롯해 극우진영의 언론들을 대개혁 할 것이다 전대갈이가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아예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뭐 도청안의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했으면 이라는 가정자체를 두지마라 조선아 너희들의 그 발악의 끝을 언론개혁을 통해서 보게 될 것 같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건강하고 새로운 보수로 태어나는길이... 뭐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지만...

2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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