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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도난·위조·오리무중, 수난의 충무공 문화재

사라진 ‘《난중일기》 일부와 영정 그림’ 관련 고문서들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johh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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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誓海盟山’ 각오가 새겨진 쌍룡검 진위 논란
⊙ 일제시대 대구고보 학생들 “이순신은 敵”이라는 말에 분개

감결(甘結)

아래는 감결이다.
이 도적들은 대규모 무리가 아니라 3, 4척의 교활하고 사나운 왜놈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물고기를 잡는 틈을 타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면서 기회를 엿보며, 크고 작은 섬에 기대어 정박해 있다. 진을 치고 밤을 보낼 때는 모두들 큰 소리를 내거나 부르짖지 말라. 각 배의 야간 경비(坐更人)는 이물(船頭)에 4명, 고물(船尾)에 4명으로 한다. 2명은 앉아서 경계하고, 2명은 교대로 잠을 잔다. 정해진 시간 없이 제대로 경비를 서고 있는지 어떤지 조사해 위반한 자는 무겁게 처벌한다. 까닭없이 군사를 놀라게 하는 자 또한 군율에 따른다. 혹 도적 소식을 들으면 깊은 밤일지라도 곧바로 자세하게 보고하되, 말로 전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싸움에 임해서 서로 구원하지 않거나 노를 잡고 물러나 도망치는 자, 주장(主將)의 임시 명령을 위반하는 자 모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군령을 중군장(中軍將)이 선봉(先鋒)과 척후(斥候)에게 모두 차례로 감결(甘結)을 받들게 하라.
대장(大將) 일심(一心)
무술(戊戌) 3월 12일
전군장(前軍將)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이순신(李純信) 수결
우군장(右軍將)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안위(安衛) 수결
중군장(中軍將)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응표(李應彪)〉 (박종평 번역)
충무공 이순신 감결. 사진=국사편찬위원회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1545~1598)이 수결(手決), 즉 사인을 연습한 부분이 있다. 충무공의 수결은 ‘일심(一心)’이다.
 
  이순신 감결(甘結·하급 기관으로 보내는 공문)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98년 예하장수인 이순신(李純信), 안위, 이응표에게 ‘야간에 적의 출몰에 각별히 주의할 것과 적중의 소식을 아는 대로 밀보(密報)하고 절대 ○傳하지 말 것’ 등의 전투 및 경계 지침을 하달하고 확인을 받은 문서다.
 
  이 충무공은 공문에서 ‘대장(大將) 일심(一心)’이라고 직접 서명했다.
 
  1928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종가(宗家) 소장 유물조사에서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으나 현재는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다. 1934년 청주에서 증보중간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활자화되어 수록되어 있다.
 
  감결은 최소한 1969년 4월까지는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었다. 1969년 4월 29일 《동아일보》가 현충사 유물전시관 완공을 설명한 ‘현충사 중건·관리 이모저모’ 기사를 보면 현충사 보관 목록에 감결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감결의 행방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난중일기》의 수결 연습 부분. 사진=《난중일기》 영인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구국(救國)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많은 이의 존경을 받기에 그의 손길이 닿았던 문화재는 영광과 시련이 있어 왔다. 도난되기도 하고, 오리무중인 경우도 있다. 위작·위조되어 유통되기도 했다. 후세에 오해로 엉뚱한 문화재가 충무공의 유품으로 둔갑한 경우도 있다.
 
  충무공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영웅이다. 그러다 보니 너도나도 충무공을 끌어다 쓰는 일이 흔하다.
 
  가까이로는 조국 법무부 장관이 후보자 시절 “인사청문회를 거쳐 문재인 정부의 법무부 장관이 된다면 서해맹산(誓海盟山)의 정신으로 공정한 법질서 확립, 검찰개혁, 법무부 혁신 등 소명을 완수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서해맹산은 충무공의 한시 ‘진중음(陣中吟)’에 나오는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를 줄인 말이다. ‘바다에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라는 뜻이다. 충무공의 왜적을 물리치겠다는 애국(愛國)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이순신 장군 연구가 박종평씨를 만난 것은 너도나도 충무공을 끌어들이는 세상 분위기 때문이었다. 박씨는 《난중일기》를 국역하는 등 이순신 연구에 몰두해왔다. 더불어 정규홍 문화유산회복재단 학술위원을 만나, 오랜 기간 수집해온 충무공 관련 문헌들을 넘겨받아 문화재의 행방을 찾아 나섰다.
 
 
  쌍검에 새겨진 ‘誓海盟山’
 
원융검(쌍룡검). 사진=《조선미술대관》
  ‘서해맹산’은 충무공 연구자들의 ‘쌍룡검(雙龍劍)’ 진위 논쟁에서 등장한다. 현재까지 알려지기로, 현존하는 충무공 관련 칼은 6점이다. 현충사에 소장된 장검 1쌍, 통영 충렬사에 소장된 명나라 신종이 선물했다는 귀도(鬼刀) 1쌍과 참도(斬刀) 1쌍이 있다. 더불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쌍룡검’이라는 1쌍의 칼이 있는데, 오랜 기간 진위 논쟁이 있었다.
 
  쌍룡검의 유일한 기록은 조선고서간행회가 1910년에 궁내부박물관 소장 유물을 촬영해 실은 《조선미술대관》에 기록된 사진과 기록이다.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사진의 칼은 임진왜란 때 수군을 이끌고 우리(일본) 군대와 힘써 싸웠던 이순신이 항상 차고 있던 물건으로 왼쪽에 문장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상자에는 조각으로 이러한 것이 기록되어 있어 이 물건은 애초 한국 제작의 물건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 역사의 깊은 관계에 특별히 참고되기에 이를 싣는다.〉
 
  칼에는 충무공의 한시 ‘서해맹산’이 인용되어 있어 충무공의 검이라는 강한 확신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미술대관》뿐 아니라, 박종경(朴宗慶·1765~1817)의 《돈암집(敦巖集)》에 실린 〈원융검기(元戎劍紀)〉 역시 이러한 확신을 강화시킨다. 내용은 이렇다.
 
  〈훈련대장 박종경은 1811년 가을에 병조판서 심상규로부터 이순신이 차고 다녔다는 칼 1자루를 받았는데, 그 칼에는 “쌍룡검을 만드니 오랜 세월이 지날지라도 그 기운은 오히려 웅혼할 것이구나.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서한 그 뜻, 충성을 다하려는 분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鑄得雙龍劒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라는 시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박종경은 시귀의 ‘쌍룡검’이라는 것에 착안해 다른 한 자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한 자루를 구하고자 했다. 십여 일이 지나 아산 사람에게서 똑같은 다른 칼을 구한 뒤에 쌍룡검을 이순신의 칼로 여겼다.〉
 
  여러 근거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쌍룡검은 충무공의 검이 아닌 것으로 굳어지고 있다.
 
 
  정말 충무공의 검인가?
 
  이순신 연구가 박종평씨는 그 근거를 이렇게 제시한다. 1819년경에 이순신의 후손 이호빈(李浩彬·1777~?)이 저술한 아산읍지인 《신정아주지(新定牙州誌)》가 근거다. 해당 책은 현존 현충사 장검과 이복연(李復淵·1688~?)의 쌍장검을 각각 나눠서 설명하고 있다.
 
  우선 현충사 장검은 이렇게 설명한다.
 
  〈충무공에게 1쌍의 장검이 있어, 검면에 자명(自鳴)을 새겼다. 하나는 ‘석 자 장검 높이 들어 푸른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바다가 함께 기뻐하네(三尺誓天 山河動色)’, 또 하나는 ‘단칼에 더러운 무리 깨끗이 쓸어버리니, 산과 바다가 핏빛으로 물드는구나(一揮掃蕩 血染山河)’라고 했다. 지금까지 후손 집에 전해져 오고 있다.〉
 
  쌍장검의 설명은 이렇다.
 
  〈이복연은 통제사로서 1쌍의 장검을 만들었다. 검명은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서한 그 뜻, 충성을 다하려는 분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라고 했다. 모두 이충무공을 우러르는 뜻이다.(李復淵 端錫子也 以統制使鑄一雙長劍 銘曰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蓋慕李忠武之意也)〉
 
  이복연은 이순신처럼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1726년 12월~1727년 12월)하기도 했다. 이복연이 ‘이(李)’씨라는 점, 아산 출신인 것, ‘통제사’를 역임했다는 점이 오해를 불렀다. 이러한 문헌상의 근거로 이복연이 충무공을 존경해 검을 제작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이 칼을 박종경이 충무공의 칼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홍익대 조혁상 교수는 2008년 <충무공 이순신의 검에 대한 소고>('이순신연구논총' 10호)에서 이순신의 8자루 칼에 대한 문헌 자료를 고찰하였다.
 
 
  《난중일기》 일부는 왜 사라졌나
 
《난중일기》. 사진=뉴시스
  ‘《난중일기》는 진짜인가?’ 도발적인 질문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후손 누군가 만들어놓은 《난중일기》 필사(筆寫)본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박종평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박씨는 “《난중일기》를 꾸준히 읽다 보면, 내용을 수정한 흔적이 군데군데 있다”며 “필사본이면 그렇게 되어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오랜 기간 현충사에서 근무한 관계자 역시 기자에게 “당시 역사적 사건과 《난중일기》 내용의 상관성, 필체의 일관성 등을 보면, 충무공의 기록임이 확실하다”고 이야기한다.
 
  《난중일기》는 임진년(1592)부터 무술년(1598)까지 7년간의 기록이다. 7책 20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임진(1592), 계사(1593), 갑오(1594), 병신(1596), 정유(1597, 2권), 무술(1598) 일기가 현재 남아 있다.
 
  안타깝게도 〈을미(1595)일기〉 1책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 원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이충무공전서》 편찬 당시에는 존재했기에 도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충무공전서》는 1795년(정조 19년)에 왕명으로 교서관(校書館)에 이를 관장할 국(局)을 설치하고, 이순신 유고와 관계 문건을 망라해 편집, 간행되었다. 이 전서는 왕명을 받고 국가적인 사업으로 완성한 만큼 조선시대 출판문화의 금자탑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충무공 개인의 전기(傳記) 자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서 사진을 촬영한 1929년 당시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면, 1800년에서 1927년 사이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라진 《난중일기》는 현재 도난문화재(소재불명)로 등록된 상태다. 이와 관련해, 현충사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1929년 일제시대에도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집안사람 누군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도난문화재로 등록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책임을 면하기 위해, 아예 〈을미일기〉 자체를 불태울 것이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일제시대 《난중일기》는 일본에 팔려 갈 위기가 있었다. 당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일본계 은행에 대출을 받았는데, 부채를 갚지 못한 것이다. 《난중일기》를 포함한 유물이 압류돼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1913년 이러한 사실이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대대적인 성금 모금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성금액은 1만6000원이 넘어, 이씨 종가의 빚 2300원을 갚고도 남았다. 그 당시의 성금이 종잣돈이 되어 지금의 현충사가 뿌리를 내렸다.
 
  한편 《난중일기》 1책과 더불어 이순신 우의정 증직교지(贈職敎旨)의 행방도 알 수 없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98년 11월 전사한 이후 12월 조정에서 이순신 장군을 우의정에 추증하면서 내린 교지로, 1928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종가 소장 유물조사에서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으나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다. 1969년 《동아일보》 유물전시관 소개 기사에 소개된 것으로 보아, 1969년까지는 존재했다.
 
 
  “충무공, 큰 체구에 담력 있다”
 
《동아일보》 1928년 7월5일자, 충무공 한산도 제승당 초상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충무공 관련 초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은 부산 동아대 소장, 〈전 이순신 초상(傳李舜臣肖像)〉이다. 우측 상단에 ‘충무공 이순신 상(忠武公李舜臣像)’이라고 써 있다. 조선 후기 작품으로 보이며, 우측을 응시하고 있는 한 장수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이다. 그림 속 장수는 원형의 보석 장식이 달린 끈이 있는 투구를 쓰고 있고, 둥근 옷깃에 앞쪽을 여미는 방식의 상의를 입고 있다. 초상은 상상화다.
 
  실제로 충무공을 보고 그린 그림은 없기에, 그에 대한 기록으로 모습을 상상해야 한다. 충무공의 용모를 기록한 것으로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이 있다.
 
  〈얼굴이 단아하여 마치 수양하고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담기(膽氣·담력)가 있었다.〉
 
  다음으로 윤휴(1617~1680)의 《백호선생문집(白湖先生文集)》 〈통제사 이충무공의 유사(統制使李忠武公遺事)〉는 이렇게 기록한다.
 
  〈나의 선인(아버지 윤효전)께서 공의 딸을 외부(소실)로 삼으셨으므로, 나는 그나마 공의 집사, 하인 및 공을 섬긴 사람들을 만나서 공의 용모와 기호와 모습이 어떠한 사람이었나를 물어 알 수 있었다. 공은 큰 체구에 용맹이 뛰어나고 붉은 수염에 담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평상시에도 본디 비분강개하여 적을 죽이면 반드시 간(肝)을 취하였다.〉
 
 
  “福將은 아니지만, 죽어서도 죽지 않았다”
 
  고상안(1553~1623)은 1594년 3월 말 한산도에서 실시한 무과시험에 감독관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태촌집(泰村集)》에는 이순신에 대한 인물평이 있다.
 
  〈갑오년(1594) 봄에 나는 삼가현감으로 있으면서 주사(舟師·수군)의 시험관을 맡아본 일이 있는데, 그때에 이순신은 통제사로 있었고, 원균은 영남우수사이고, 이억기는 호남우수사이며, 구사직은 호서(충청)의 수사로 있었다. (중략) 통제사는 동년(과거시험에 같은 해 합격함)이기 때문에 며칠을 같이 지냈는데 그 말의 논리와 지혜로움은 과연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얼굴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못하고 관상도 입술이 뒤집혀서 마음속으로 여기기를 ‘복장(福將)은 아니구나’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잡아들여 죄를 추궁하라는 명이 있었고, 다시 쓰이기는 했으나 겨우 1년이 지나서 유탄을 맞고 고종(考終)을 하지 못했으니 한탄할 일이로다. 그러나 죽던 날까지 군기를 기획하니 죽은 통제사가 살아 있는 고니시를 도망치게 함으로써 다소나마 국치를 씻고 봉상시(제사와 시호 등을 맡는 관아)에 기록되었으며 이름을 만고에 전하였으니 이는 죽어서도 죽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여러 충무공 영정이 그려졌다. 그 가운데 1932년 민족성금으로 현충사 중건 시 모셔진 이상범 작 영정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다.
 
 
  “이순신은 敵”에 분개한 학생들
 
  여러 어려움이 있었고, 일부 사라진 유물도 있지만 충무공의 유물과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기사가 있다. 《동아일보》 1928년 4월 3일 기사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충무공 문제로 14명 강제 전학. 경북 대구고등보통학교에서는 금년 새 학기가 열리면서 돌연히 그 학교 2, 3, 4학년생 14명에게 “관공립학교에는 전학을 할 수가 없으니 사립학교에 가고 우리 학교에는 다시 오지 마라”고 사실상 퇴학 처분을 하였으므로 학생 간 공기는 매우 험악하고 (중략) 학교에서 돌연히 같은 처분을 하게 된 원인은 듣건대 수일 전 동교 일본인 학생이 일본 역사를 가르칠 때에 지난 임진란 때에 공을 세운 이순신을 적(敵)이라고 말하자, 학생들이 이순신은 조선의 유명한 충신이라고 들었는데 적이라 함은 이상하다 하여 몇 마디 질문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학교 당국에서는 14명 학생에게 전학 처분이라는 기이한 처분을 내렸다.〉
 
  기사는 완곡하게 “이상하다”라고 적었으나, “충무공은 적”이라는 일본인 학생의 발언에 곧바로 들고일어났던 조선인 학생들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에도 충무공을 욕되게 하는 말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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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욱    (2020-01-05) 찬성 : 0   반대 : 1
추미애 법무장관은 법무장관으로 임명되기전에 검찰 및 사법부를 장악하기 위해 검찰인사 보고를 받고 윤석열 검찰사단을 해체하기위해 검칠수뇌부에 검찰출신도 아닌 범죄자(피의자)를 인사발령하여 윤석열 검찰사단을 해체하려는 음모는 내란음모죄, 반역죄, 국가문란죄등에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참고유투브 :
https://www.youtube.com/watch?v=Ym5urwDwH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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