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발굴 현대사

해방공간 대구·경북 언론을 통해 본 自畵像

10명 중 7명은 실업자… 광복의 환호성은 울분으로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버스 차장 유니폼을 한복과 양장 두고 논란
⊙ 대구 10·1 사태 당시 식량배급제 폐지로 쌀값 치솟아… ‘三旬九食’ 연명
⊙ 1948년 대구시민 7할인 22만6848명이 무직… ‘이렇게 연명하는 것은 기적’
1946년 10월 2일, 경찰이 10·1 사건에 가담한 청년을 검거하고 있다.
2일 오후부터 대구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주동자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어닥쳤다. (사진출처=매일신문)
  해방 직후 환호성이 지적 욕구로 분출되어 각종 신문과 잡지가 창간·복간되었다. 식민지 청산의 감격을 전하는 소식들이 쏟아졌고, 한편으론 그동안 일제에 억눌렸던 민중의 목소리가 여과 없이 분출되었다.
 
  이런 혼란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강 이남의 대구·경북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더 뜨거웠다. 당시 대구에서는 《민성일보》를 시작으로 《대구시보》 《영남일보》 《부녀일보》 《남선경제신문》 등의 신문이 창간됐다. 이 신문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해방공간의 군상(群像)을 확대경으로 클로즈업했다.
 
  기자 출신의 언론학 박사인 박창원씨는 해방기 언론을 통해 대구·경북 현실을 탐사했다. 그가 설명하는 당대 대구·경북 언론 약사(略史)는 이렇다.
 
  “해방이 되자 35년간 일제에 억눌렸던 민중의 울분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봇물처럼 터졌습니다. 1945년 9월 15일 창간하자마자 미 군정에 비판적이었던 《민성일보》는 인쇄공장이 수시로 테러당하는 등 문을 닫을 때까지 곤혹을 치렀어요. 같은 해 10월 3일에는 《대구일일신문》(일본어판 신문)을 조선인 종업원들이 인수해 《대구시보》를 창간했죠. 또 10월 11일에는 공동출자 공동운영 체제로 《영남일보》가 창간되어 지금껏 똑같은 이름으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이듬해인 1946년 3월 1일에는 해방 후의 경제난 극복과 경제부흥을 주창하며 지금의 《매일신문》 전신인 《남선경제신문》이 창간됐어요. 같은 해 7월에는 여성 계몽의 기치를 내건 《부녀일보》가 첫 호를 내고 발행되다 다른 신문과 통합한 뒤 이내 사라졌어요.”
 
  박 박사에 따르면 《부녀일보》 편집국장이 바로 언론인 최석채(崔錫采·1917~1991)다. 《매일신문》 테러사건(1955년) 때 주필을 지낸 최석채와 동일인물이다. 그는 훗날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역임하는 등 한국 언론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당시 대구·경북의 인구는 얼마일까. 《남선경제신문》의 집계에 따르면 1947년 말 경북도의 총인구는 225만5010명이었다. 그중 대구는 남자 16만7226명, 여자 16만1000명으로 32만명을 넘었다. 여기에는 외국인도 포함되었다.
 
  대구를 제외하고는 경주군이 21만7000여 명으로 인구가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영일군(지금의 포항) 20만7000여 명, 안동군 18만6000여 명 순이었다. 기자는 박 박사의 자료제공으로 해방공간 대구·경북의 민중사를 더듬어보았다. 그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조금 지난 뉴-쓰, 우리의 지금은 어디서 왔을까?》(아인커뮤니케이션즈 刊)를 최근 펴냈다.
 
 
  ① 멀미 나는 부영뻐스
 
1914년 대구 달성공원에 들어선 대구신사. (사진출처=매일신문)
  대구부에서는 4월 1일부터 부영뻐스 운영을 종전과 같이 회복시켜 부민에 편리를 도모하는 화원, 동촌 양선의 대수를 증가하는 동시에 시내 노선을 운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노선에 필요한 차장을 모집하게 되었는데 응모자는 오는 20일까지 이력서를 지참, 부에 지원하면 된다.
  -《영남일보》 1946년 3월17일자

 
  당시 부영은 대구부(大邱府)에서 운영하는 대구의 시내버스였다. 오전 7시30분부터 운행을 시작해 밤 9시까지 다녔다. 그러다 밤 8시로 운행시간을 단축하기도 했다. 애초 10여 대의 버스를 동시에 운행하려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기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구역 앞에서 출발한 버스를 타면 얼마 안 가서 속이 메스꺼웠다. 덜커덩거리는 비포장도로 탓이었다. 화원이나 동촌에 도착하기도 전에 멀미가 나기 일쑤였다. 그래도 이만한 호강이 없었다. 속은 울렁거리고 내리자마자 토해도 수십 리 길을 ‘이고 지고’ 걸어가는 수고에 비한다면야….
 
  버스운행은 운전사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차장도 필요했다. 요금도 받고 일일이 승하차 안내도 해야 했다. 주로 16~20세 전후의 여성을 뽑았다. ‘버스 걸’이라 불리기도 한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어 회화 능력과 외모도 봤다.
 
  하지만 해방 이후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다만 계산 능력인 산수 테스트는 여전히 필요했다. 애초 버스 차장이 생길 때는 한복과 양장 중에 어떤 옷을 유니폼으로 할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인기 직종이었다.
 
 
  ② 쌀자루, 바구니를 들고 찾은 대구부청
 
‘쌀자루를 들고 찾은 대구부청’ 기사.(《남선경제신문》 1946년 7월2일자)
  7월 1일 조조부터 남녀노소 1000여 명에 달하는 주림을 밥 먹듯 하던 군중은 쌀자루와 바구니를 든 채 대구부청을 에워싸고 쌀을 달라, 속히 식량을 배급하라는 고함소리를 외쳐 위정자에게 커다란 파동을 던졌다.
  -《남선경제신문》 1946년 7월2일자

 
  해방되던 1945년에는 풍년이 들었다. 경북도는 쌀 수급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 낙관했다. 쌀 수확량이 평년과 같은 260만 석이 될 것으로 어림짐작했다. 당시 연간 1인당 쌀 소비량을 1석으로 잡았는데, 해외 귀환 동포를 포함해 도민 250만명이 먹어도 10만 석 정도가 남을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미 군정이 식량배급제를 폐지하면서 쌀값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월에는 최고가격제를 시행했는데 한 말에 75원으로 가격을 묶었지만 대구 지역 시장에서는 3월에 이미 400원을 넘었다. 미 군정은 다시 배급제 시행을 위해 미곡수집령을 공포했다. 예상 목표량의 10% 남짓의 쌀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지주들과 중간매집상들의 농간이었다.
 
  굶주림에 지친 주민들이 대구부청으로 몰려가 식량을 달라고 아우성쳤다.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삼순구식(三旬九食)’으로 연명하던 사람들이었다. 쌀 배급이 중지되고 호열자(콜레라)로 교통이 두절된 데다 이 기사를 쓸 당시(1946년 7월 초) 폭우가 내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경북도는 그해 8월 19일부터 기아에 허덕이는 대구부민에게 1인당 2홉씩 식량을 배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이를 보도하던 신문기자단은 “민중이 신문조차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대구 10·1 사태는 그렇게 분출되었다.
 
 
  ③ 달성동 장봉사에게 사람들이 몰려간 까닭
 
‘달성동 장봉사’ 기사.(《영남일보》 1947년 10월18일자)
  ‘일요일은 쉽니다’ 벽보가 붙어 있고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조그만 온돌방에 10여 명의 부인이 앉아….
  -《영남일보》 1947년 10월18일자

 
  당시 대구 달성동 입구에 용한 점쟁이 장봉사가 살았던 모양이다. 그 동네에 장봉사집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문전성시였다. 당시 대구·경북 언론은 장봉사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뤘다.
 
  날이 새기가 무섭게 장봉사 집 안의 조그만 온돌방에 10명이 훨씬 넘는 사람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여자 사이에 군데군데 남자도 끼어 있었다. 장봉사를 보려면 꼭두새벽부터 서둘러야 했고, 반나절 정도 기다리는 것은 예사였다. ‘일요일은 쉽니다’는 팻말이 붙은 이유였다.
 
  당시 장봉사집 같은 점(占)집이 성황한 이유는 해방 직후 대구·경북민의 삶이 팍팍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의 기대와 희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낙담과 절망으로 바뀌었고, 경제적 빈곤은 더해만 갔다. 콜레라 같은 전염병으로 가족을 잃은 경우도 안타깝게 많았다.
 
  이러다 보니 장봉사집 기와대문 안의 온돌방에는 근심 가득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족이 병들었다” “돈이 벌리지 않는다” “아이의 미래가 걱정이다” 등 사연도 갖가지였다.
 
  장봉사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당시 신문은 장봉사가 “부적을 써야 한다”거나 “아이의 저고리에 이름을 써서 세 번 절하라”는 등 기이한 비방을 내놓았다고 한다. 비방 대가는 50원 안팎으로, 당시 영화관의 새 영화 관람료가 35원 정도였으니 결코 싼 가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미래의 불안감을 떨쳐내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④ 10명 중 7명은 ‘빈둥빈둥’
 
  아무리 해방 후 사회적 혼란으로 정업(定業)을 갖기가 매우 곤란한 현상이라 할지라도 전인구의 1, 2할이라고 해도 모르겠거니와 7할이라는 막대한 숫자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전연 사회적 혼란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당국의 시책이 옳지 못함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으로서 대체 이 수많은 무직자들이 어떻게 연명을 하여 가는가. 이것은 큰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선경제신문》 1948년 9월25일자

 
  해방 3년째인 1948년 9월 대구부가 인구조사를 했다. 쌀배급통장과 호적대장을 대상으로 해 비교적 사실에 가까웠다. 대구의 당시 총인구는 33만6524명. 해방 이듬해의 26만9115명보다 7만7000여 명이 더 늘었다.
 
  직업별로는 농업인이 3만4000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직업이 없었다. 대구시민의 전체 7할인 22만6848명이 실업자였다.
 
  대구부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었다. 경북 역시 실업자가 45만명에 이르렀다. 실업자 중에는 해방 이후 고국으로 귀환한 동포가 많았다. 반면 약 10만명은 토착 극빈자였다. 1946년 경북도 내 실업자가 16만명이었음을 감안하면 2년이 채 되지 않아 3배 정도가 늘어난 셈이었다. 당시 신문은 ‘수많은 무직자가 겨우 목숨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⑤ 3배 오른 신문 구독료
 
  서울 중앙지와 타도(他道) 지방지는 벌써 작년 10월 또는 11월에 대폭 인상하였음은 독자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구에 있어서는 많은 악조건을 극복하며 경리상의 적자도 돌보지 않고 신문 문화성을 최고도로 발휘하여 지가 현상유지에 노력해 왔으나 금년에 이르러 용지가격은 10여 배로 대폭 오리고….
  -《영남일보》 1947년 2월4일자

 
  대구에서는 해방된 해 9월에 《민성일보》를 시작으로 일간신문이 잇따라 창간했다. 그러나 신문의 창간 러시는 용지 부족을 심화시켰다. 1945년에만 신문 용지값이 무려 10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용지값 급등은 구독료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물가폭등에 연일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내던 신문들로는 자가당착에 빠져버렸다. 독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대구 신문들은 서울의 신문들이 가격을 올린 후에야 뒤따랐다. 1946년 월 25원 하던 구독료를 1947년 2월 1일부터 60원으로 올렸다. 당시 구독료를 떠올리면 3배 가까운 인상이지만 용지가 10배까지 치솟았음을 감안하면 많이 올린 것도 아니었다.
 
  신문 용지난이 신문 구독료 인상만으로 해결되지 않자 경북군정청은 신문 발간에 제동을 걸었고, 부득이 정기간행물의 신규 허가를 정지하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용지난은 언론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말았다.
 
 
  ⑥ 기생 화대 횡령액 2만여 원
 
‘기생 화대 횡령액 2만여 원’ 기사.(《영남일보》 1946년 8월6일자)
  대동권번 조 총무의 화대 횡령사건을 싸돌고 오랫동안 사회의 물가가 분분하였거니와 도 경찰청에서 금번 장부를 압수하고 상세한 조사를 한 결과 김애자 외 18인분의 총액 2만6582원4전을 횡령한 것이 판명되어 지난 5일 피해자 이은자 외 5명을 소환하여 그 진상을 조사 중인데 귀추가 주목된다.
  -《영남일보》 1946년 8월6일자

 
  당연한 말이지만, 기생들의 화대는 생명과 같이 중요했다. 화대는 자신의 생계비이자 가족에게 건네는 생활비였다. 화대는 자선사업의 비용으로도 썼다. 화대를 모아 수해의연금을 내고 공익적인 사업에 기부하기도 했다.
 
  이처럼 쓰임새가 긴요한 화대의 돈 관리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게 당연했다. 대동권번의 기생들은 화대 관리를 조 총무에게 맡겼다. 대동권번은 해방된 해 10월에 결성된 대구의 기생조합이다. 조 총무는 대동권번을 만들 때 임원을 맡아 궂은일을 도맡던 인물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기생들에게는 든든한 삼촌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당시로서는 큰돈인 2만6000여 원에 이르는 화대를 가로챈 것이다.
 
  당시는 자고 나면 물가가 치솟던 시기다. 쌀 한 가마니가 400~500원 할 때였으니 폭등한 쌀값에 비춰봐도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그 후 조 총무는 기생들의 눈물 젖은 화대를 돌려줬을까? 아쉽게도 후속 기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⑦ 70년 전의 스카이캐슬
 
‘향학열에 따른 부정입학’ 기사.(《남선경제신문》 1948년 6월30일자)
  금전으로 입학하는 예는 과거 왜놈들이 하였으니 해방 후 조선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구체적인) 실례가 있다면 철저 적발 처단하겠다. 돈으로 입학하는 것은 소위 유지신사(有志紳士) 자제들이 많으나 그자들은 두뇌가 학습 불량이라고 본다.
  -《남선경제신문》 1948년 6월30일자

 
  해방 이후 높아진 향학열은 상급학교 진학으로 이어졌다. 1948년 당시 전국적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19만여 명이었다. 반면에 중학교의 수용인원은 7만명에 불과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예 진학을 포기하는 학생을 감안해도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부정 입학 거래의 유혹을 떨칠 수 없었던 건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탓이었다. 신분제가 사라지고 누구나 배울 수 있게 되자 향학열이 활활 타올랐다. 학교는 배짱을 부렸다. 입학금 외에 학교서 정한 기부금을 내지 못하면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학교 입학에다 편입마저 어렵다 보니 이를 둘러싼 금품수수 사건이 심심찮게 불거졌다.
 
  해마다 상급학교 입학 시기가 되면 교사에게 금품을 제공하거나 요릿집으로 불러 향응을 베푸는 일이 벌어졌다. 그렇다고 학교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열악한 재정이 문제였다. 돈이 없다 보니 교실 증축이나 학교 운영비도 학부형들의 주머니에 의존해야 했다. 교육 당국이 학교의 강제기부를 금지한다고 해도 듣는 체 마는 체했다.
 
  학부모들의 고통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싼 학비가 등골을 휘게 했다. 공립 중등학교라도 입학금은 1만원이 훌쩍 넘었다. 당시 도지사 월수입이 3512원, 군수 2300원, 보통직원 1817원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정말이지 큰돈이었다. 이러니 ‘공부는 실력이 아니라 돈으로 한다’는 이야기가 나돌 수밖에 없었다. 명문학교 진학을 바라는 욕망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없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4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