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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이슈

한국 양궁과 현대차의 37년 금빛 컬래버

실력만 있다면 누구라도 발탁한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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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구, 외국 활 제조사가 자국 선수에게만 신제품 주자 ‘국산 활’ 제작 독려
⊙ 집중력 위해 프로야구장에서 활 쏘고, 번지점프하고
⊙ 양궁 종목 금메달의 70% 싹쓸이
지난 7월 30일, 안산이 ‘2020 도쿄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 결승에서 활 시위를 당기는 모습. 사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7월 26일, 도쿄올림픽 양궁 남자 단체전 결승.
 
  단 한 개의 화살만 남겨두고 있었다. 9점 이상을 쏘면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오진혁 선수가 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과녁에 꽂히기도 전에 오진혁이 나지막이 말했다.
 
  “끝.”
 
  1, 2초 지났을까, 양궁 해설위원의 흥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0점입니다. 텐! 대한민국 금메달입니다.”
 
  금메달을 확신한 듯한 오진혁의 ‘끝’은 올림픽 기간 내내 화제가 됐다. 오진혁은 화살을 쏘는 순간 10점을 직감했단다. 누리꾼들은 그가 얼마나 연습했기에 시위를 놓자마자 알았겠느냐며 감탄했다.
 
  대한민국 양궁이 도쿄올림픽에서 양궁에 걸린 5개 금메달 중 4개를 쓸어 담았다. 여자 단체전은 9연패, 남자 단체전은 2연패 하며 한국 양궁이 세계 최강임을 입증했다. 하지만 양궁이 지금은 우리의 ‘금메달 텃밭’인 양 자리 잡았지만 대한민국의 대표 스포츠 종목이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애당초 비인기 종목이었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실력은 세계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처럼 한국 양궁 역시 무(無)에서 유(有)를 이뤄냈다.
 
 
  한국 양궁에 학연·지연·파벌은 없다
 
정의선 대한양궁협회장(가운데)이 2016년 9월 1일, 양궁 금메달리스트 장혜진(왼쪽)과 구본찬에게서 32년간 지속한 정몽구 명예회장의 지원과 격려에 대한 감사패를 대신 전달받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번 남자 양궁 단체전을 보며 많은 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진혁은 올해 40세, 김우진은 29세, 김제덕은 17세다. 오진혁을 ‘맏형’, 김제덕을 ‘막내’라고 부르지만 부자(父子)지간에 가까운 나이 차이다. 10대, 20대 후반, 40대가 한 팀을 이뤄 경기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양궁협회의 선수단 선발 방식 때문이다. 양궁협회 후원사는 재계 서열 2위의 현대차그룹인데 37년 동안 협회를 지원하면서 협회 운영이나 선수단을 꾸리는 데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현대차가 후원사 자격으로 주문한 것은 딱 한 가지였다.
 
  ‘협회 운영은 투명하게, 선수 선발은 공정하게!’
 
  국가대표를 뽑는 일은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만큼 잡음이 많다. ‘실력도 없는데 돈으로 국가대표 된 것 아니냐’ ‘감독과 친분이 있어서 이번에 뽑혔다더라’ 등 뜬소문이 즐비하다. 일부는 사실로 드러났다. 몇 년 전 수영 국가대표를 뽑는 과정에서 연맹 측 인사가 돈을 받았다는 내부 폭로가 나와 검찰이 조사를 벌였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인사 비리가 양궁협회에는 없다. 양궁협회는 지연, 학연 등 파벌로 인한 불합리한 관행이나 갑작스럽게 선수를 발탁하는 일이 없다. 철저한 경쟁을 통해서만 선발된다. 실력이 있다면 나이는 상관없다.
 
  과거의 명성도 현재의 실력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2000년 시드니대회에서 금메달·동메달을 딴 김수녕 선수 사례다. 김수녕은 1988년 서울대회, 1992년 바르셀로나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고 은퇴했는데, 1999년 다시 선수로 복귀했다. 금메달을 두 차례나 딴 화려한 이력, 선수들보다 선배라는 경력이 있었지만, 그는 선수로 복귀하고 후배들과 동등하게 경쟁했다. 그런 뒤에야 다시 국가대표 자격을 획득하고 시드니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양궁협회는 선수뿐 아니라 코치진도 공채를 통해 공정하고 투명하게 선발한다.
 
  현대차그룹도 연공서열 순혈주의를 없애고 젊은 인재를 발탁 중이다. 특히 2019년에는 직급과 호칭 체계를 축소 통합하고, 승진 연차 제도를 없앴다. 기존에는 한 직급당 4~5년 차가 돼야 승진이 가능했지만, 능력만 있다면 바로 상위 직급으로 승진하고 나이와 상관없이 팀장과 임원이 될 길을 마련했다.
 
 
  양궁 선수 위해 시력테스트기 직접 산 정몽구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맨왼쪽)이 1997년 9월 8일, ‘양궁인의 밤’ 행사에서 세계양궁선수권대회를 석권한 김두리(왼쪽에서 두 번째) 등 참가선수들로부터 70m 과녁을 선물받고 있다. 사진=조선DB
  한국 양궁과 현대차의 인연은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4년 현대정공(현재 현대모비스) 사장이었던 정몽구(鄭夢九) 현대차 명예회장은 LA대회 양궁 여자 개인전에서 양궁 선수들이 금메달 따는 모습을 지켜보고 양궁 육성을 결심, 이듬해 대한양궁협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현대정공에 여자 양궁단, 현대제철에 남자 양궁단을 창단할 정도로 양궁에 푹 빠졌다. 정 명예회장은 주먹구구식의 선수 훈련으로는 발전이 없다고 생각해 ‘스포츠 과학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스포츠 과학 기자재를 도입하고, 양궁의 질적 향상을 위해 세계 최고 수준의 양궁 장비를 갖추도록 주문했다. 정 명예회장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는 미국 출장 중에 심장박동수 측정기, 시력테스트기 등을 직접 사서 양궁협회에 선물을 보냈다. 과학적인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장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 현대정공에서 레이저를 활용한 연습용 활을 제작해 양궁 선수단에 주기도 했다.
 
  1990년 말, 양궁 활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외국 메이커가 신제품 활을 자국 선수들에게만 제공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당연히 신제품을 받지 못했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이때 마음먹었다.
 
  “이런 피해는 없어야 한다. 한국 선수 체형에 맞는 활을 개발해야겠다.”
 
  회장 집무실에 별도의 공간을 만들고 시간이 날 때마다 양궁 관계자들과 해외 제품과 국산 제품을 비교했다. 그렇게 국산 활이 탄생했다. 현대가(家) 특유의 뚝심이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오늘날 국제대회에서 다른 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이 한국산 활을 쓴다. 외국 메이커에 눌려 기죽지 않고,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발전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국산 활이 개발되고 난 뒤에는 초등학생 유망주들부터 국산 장비를 쓰도록 독려하고, 양궁협회도 일선 학교에 국산 장비를 지원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한국 선수들은 국제양궁대회에서 점점 실력을 뽐냈다. 그러는 중에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세계양궁협회가 1996년 애틀랜타 대회를 앞두고 토너먼트 형태의 새로운 경기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메달을 놓치는 경기 방식이다. 우리는 여기에 적응해야 했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또 나섰다.
 
  “시끄러운 데서 훈련해보면 어떻겠나.”
 
  선수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시끄러운 곳을 찾기로 했다. 코칭 스태프와 협회 직원들은 꽹과리・북 등 사물놀이를 하는 곳, 시끄러운 초등학교 운동장을 찾아다니며 훈련했다. 지금은 양궁 연습에서 필수 코스가 되다시피 한, 관중이 가득한 야구장에서 활쏘기 연습이 여기서 시작됐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1991년 폴란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선수들이 물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스위스에서 물을 공수해준 것은 여전히 회자된다.
 
 
  스타 플레이어에 기대지 않고 탄탄한 선수진 갖춰
 
  정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정의선 회장은 2005년 대한양궁협회장에 올랐다. 부친이 한국 양궁의 초석을 놨다면, 아들은 그 위에 과학을 덧칠해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렸다. 이번 도쿄대회에서 올린 성과는 정몽구 명예회장이 양궁 발전의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정의선 회장이 양궁의 스포츠 과학화와 도쿄대회만을 위한 맞춤형 지원을 통해 대표 선수단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란 얘기다.
 
  정의선 회장은 양궁협회장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 양궁 활성화 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양궁협회는 3기 13년에 걸친 중장기적 양궁 발전 플랜을 세워 시행하고 있다. 양궁 꿈나무의 체계적인 육성, 양궁 대중화 사업을 통한 저변 확대, 지도자와 심판 자질 향상, 양궁 스포츠 외교력 강화 등 한국 양궁의 내실 있는 발전을 이뤄내는 것이 골자다.
 
  눈길을 끄는 것은 유소년에서 국가대표에 이르는 우수선수 육성 체계다. 현대차는 일선 초등학교 양궁 장비와 중학교 장비 일부를 무상으로 지원하고, 2013년에는 초등부에 해당하는 유소년 대표 선수단을 신설해 장비와 훈련을 지원하고 있다. ‘유소년대표(초)-청소년대표(중)-후보선수(고)-대표상비군-국가대표’에 이르는 탄탄한 선수 육성 시스템이다. 스포츠 스타 1명에게 기대는 시스템이 아니라 탄탄한 선수진을 만드는 시스템이다. 또한 현대차는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잘 적응하도록 국가대표, 상비군, 지도자, 심판을 대상으로 무료 영어 교육을 한다. 또 국내 최대 규모의 양궁대회인 ‘현대자동차 정몽구배 한국양궁대회’를 개최해 양궁 저변 확대와 대중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극한 상황에서조차 정신을 붙들어라”
 
  “텐, 기대해봅니다. 아… 이제 10초밖에 안 남았어요. 이제는 쏴야 합니다.”
 
  정작 메달이 아니더라도 보는 사람들의 가슴이 콩닥거린다.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날 법한데, 정작 우리 ‘태극 궁수’들은 동요하지 않는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마지막 순간에 ‘텐’을 쏴댄다. 정신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받은 훈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관중이 꽉 찬 프로야구 경기장에서의 훈련이 대표적이다. 대회 경기 중 관객들이 내는 열광적인 응원, 수백 대 카메라의 셔터 소리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베이징대회 당시 중국 관중의 응원 소리 때문에 우리 선수들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적이 있다. 2010년 세트제 시행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다이빙, 번지점프 훈련을 했다. 도쿄대회가 열리는 도쿄만은 강풍이 강한 곳. 양궁협회는 승부에 변수가 될 강풍에 대비하기 위해 전남 신안군의 섬에서 훈련했다.
 
  극한 환경 체험은 양궁 후원사인 현대차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현대・기아차가 내놓은 모든 차량은 극한의 테스트 끝에 고객들에게 선보인다. 가장 가혹한 레이싱 서킷에서의 주행 테스트, 여름 평균 온도 49도 사막 테스트, 영하 40도의 혹한 지역 테스트는 기본이다. 현대차가 주행 테스트를 하는 곳은 뉘르부르크링이라는 곳이다. 20.8km 길이의 뉘르부르크링 트랙은 300m에 달하는 심한 고저 차, 73개 코너, 급격한 내리막길, S자 코스, 고속 직선로 등 지구 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도로 조건을 충족한다는 평을 받는 곳이다. 이곳을 시험장으로 삼아 차량을 테스트하는 현대차와 응원 함성이 가득한 야구장에서 그 어느 때보다 고도의 집중력을 내보이는 양궁 선수의 모습은 참 닮아 있다.
 
 
  “진천선수촌을 도쿄와 똑같이 만들어라”
 
이번 도쿄올림픽을 위해 진천연습장을 현지와 비슷하게 꾸민 한국 양궁팀. 사진은 2016년 리우대회 때 태릉양궁장을 ‘가상 리우 삼보드로무 양궁장’과 흡사하게 꾸민 모습이다. 사진= 조선DB
  이번 도쿄대회 양궁 경기가 펼쳐진 도쿄 유메노시마공원 양궁장은 우리 대표 선수들에게 이미 익숙한 곳이었다. 그곳에 가본 적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익숙할 수 있었을까. 바로 선수들이 훈련한 진천선수촌을 이와 똑같이 꾸몄기 때문이다.
 
  정의선 회장은 2019년 도쿄대회 양궁 테스트 이벤트 대회 현장으로 날아갔다. 대표 선수들을 응원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도쿄대회 양궁 경기장인 유메노시마공원 양궁장과 선수촌 시설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양궁협회 관계자들과 시설을 꼼꼼하게 살핀 정 회장은 한국으로 돌아와 진천선수촌에 도쿄대회 양궁 경기장과 똑같은 시설을 만들고, 도쿄대회에서 예상되는 음향・방송 환경 등을 적용한 모의대회를 개최토록 했다. 일본 양궁장을 그대로 재현한 진천선수촌 훈련장에서 우리 선수들은 하루 최대 500발씩 쏘며 실력을 갈고닦았다. 현대차의 지원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리우대회 때도 선수촌을 리우 삼보드로모 경기장과 비슷한 환경으로 꾸미고 시뮬레이션 훈련을 했다.
 
  경기장을 그대로 재현해 훈련하도록 한 것은 현대차그룹이 먼저 시작한 일이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품질 강화를 위해 2002년부터 운영한 ‘파이롯트 센터’가 원조다. 현대·기아차 남양연구소에 있는 파이롯트 센터는 신차 양산에 앞서 양산공장과 동일한 조건에서 시험차를 생산·운행하는 곳이다. 차량 개발 완료 후 생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생산라인을 그대로 연구소에 재현하고 생산직원들이 실제 생산라인과 동일한 조건에서 조립 연습을 실시한다.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미미한 흠까지 확실히 걸러내고자 함이다. 그 결과 현대·기아차는 ‘JD파워’ 신차품질평가, 내구 평가에서 1위에 오르는 등 유수의 품질 평가 기관에서 세계적 품질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도쿄와 기온 비슷한 곳에서 전지훈련
 
2011년 넥센히어로즈와 KIA타이거즈의 경기가 열린 서울 목동 야구장에서 양궁 선수들이 소음 적응 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 뉴시스
  2020년 1월 말에는 대표 선수들이 도쿄대회와 동일한 기후 조건에서 연습할 수 있도록 7월 말의 도쿄와 유사한 기후 지역인 미얀마 양곤에서 기후 적응을 위한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미세한 오차로 승부가 갈리는 양궁은 실전 적응력 향상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정의선 회장은 양곤 전지훈련장을 직접 방문해 선수들의 상태를 살폈다.
 
  코로나19는 양궁선수들의 훈련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국제대회가 줄줄이 취소되는 바람에 선수들이 대회 경험을 할 수 없었고, 이전처럼 야구장에서의 소음・관중적응 훈련도 불가능했다. 이에 정의선 회장이 나섰다. 지난 5월과 6월, 네 차례에 걸쳐 스포츠 전문 방송사 중계를 활용해 실제 경기와 비슷한 환경 속에서 경기하도록 지원했다. 정 회장이 올림픽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전달한 것은 《두려움 속으로》란 책이었다. 미국 유명 스쿼시 코치인 폴 아시안테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다양한 노력에 대한 경험을 풀어낸 책이다. 정 회장은 선수들에게 ‘긴장감을 극복하고 건강하게 경기를 펼치라’고 다독였다. 선수들이 인터뷰에 대한 부담을 극복하도록 전문 강사를 초빙해 미디어 트레이닝도 실시했다. 도쿄대회 경기 대기 시간에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휴게 장소에 별도로 선수별 릴랙스 의자를 만들었다.
 
  양궁이 도쿄대회에서 금메달 행진을 이어갈 때 소셜미디어(SNS) 여러 곳에선 ‘회장님의 찐사랑(진짜 사랑)’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정의선 회장이 경기가 열리는 땡볕 경기장에서 다른 관중과 같이 앉아서 정신없이 경기를 구경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정의선의 양궁 사랑은 ‘찐’이다”
 
정의선 회장의 양궁 ‘찐사랑’이 화제다. 정 회장이 뙤약볕이 내리쬐는 도쿄에서 양궁 여자단체전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 사진= 뉴시스
  정 회장은 강렬한 햇볕을 막는 장비도 없이 넋을 놓고 궁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 회장은 후원사로서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선수들을 찾아 격의 없이 식사하고 대화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주요 국제경기 때마다 현지에서 직접 응원함은 물론, 선수들이 조금도 불편함 없이 시합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적극 돕고 있다.
 
  2012년 런던대회 때는 경기장과 숙소가 1시간 이상 떨어져 있어 이동이 불편하자, 선수들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경기장 인근 호텔에서 지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끼니때마다 선수들이 원하는 한식을 먹도록 조치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때는 계양아시아드 양궁장을 미리 찾아 경기장 시설들을 꼼꼼히 살피며 선수들이 심리적 동요가 발생하지 않도록 경기장 운영에 만전을 기해달라고 강조했다. 직접 경기장 시설과 관중석, 선수 대기 장소 등의 안전 상황을 체크했다. 이후에도 매일 경기장을 찾아가 경기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봤다. 리우대회 때는 대표단의 출국 전날 직접 선수촌을 방문해 선수들의 대회 준비 상황을 체크하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안전한 경기장 이동을 위해 사설 경호원을 고용하고 방탄차를 제공했다. 대회 기간 동안 경기장 인근 식당을 빌리고, 상파울루에서 한식 조리사를 초빙해 언제든지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점심에는 한식 도시락을 만들어 경기장과 선수촌으로 배달하는 등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최대한 배려했다.
 
 
  선수·코치·후원사가 함께 이룬 기적
 
  한국 양궁은 1984년 LA대회부터 올해 도교대회 남자 단체전까지 금메달 26개, 은메달 9개, 동메달 7개를 획득했다. 양궁 종목에 걸린 전체 금메달의 70%를 대한민국이 차지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1978년 방콕대회를 시작으로 2018년 자카르타대회까지 금메달 42개, 은메달 25개, 동메달 16개를 차지했다. 선수와 코치진의 노력, 현대차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쾌거다.
 
  하지만 세계 여러 나라가 한국의 지도자들을 스카우트해 벤치마킹하는 등 한국 추격에 나섰다. 또 한 번 실력을 업그레이드할 필요성이 있었다. ‘도쿄대회 석권’을 목표로 추진된 기술 프로젝트가 있다. ‘세계 최강의 한국 양궁이지만 현대차그룹의 미래차 R&D 기술을 접목하면 선수들의 기량을 한 단계 더 향상시킬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현대차 관계자는 “장비의 품질과 성능을 더욱 완벽히 하고 선수들의 멘탈 강화 등 경기 외적 변수를 최소화하는 데 실질적인 기여를 하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현대차그룹은 2016년 브라질 리우대회 직후부터 양궁협회와 함께 다양한 기술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인공지능, 비전인식, 3D프린팅 등 첨단 신기술을 활용키로 했다. 이를 토대로 탄생한 것이 ▲고정밀 슈팅머신 ▲점수자동기록 장치 ▲비전 기반 심박수 탐지 ▲딥러닝 비전 인공지능 코치 ▲선수 맞춤형 그립이다. 단순히 이번 도쿄대회만을 겨냥한 기술이 아니다. 향후 대한민국 양궁이 계속 강자로 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기술들이다.
 
 
  신기술로 무장한 대한민국의 양궁
 
  고정밀 슈팅머신은 최상 품질의 화살을 선별하는 장비다. 양궁에서 화살은 활과 함께 꼭 필요한 장비이기에 선수들은 품질이 우수하면서도 자신에게 맞는 화살을 선별하기 위해 직접 활시위를 당기며 테스트한다. 여기에 소요되는 시간이 크기에 현대차와 양궁협회가 협의해 제작한 기기가 ‘슈팅머신’이다. 선수들은 70m 거리에서 슈팅머신으로 화살을 쏴 신규 화살의 불량 여부를 테스트한다. 과녁에 쏜 화살이 일정 범위 이내에 탄착군을 형성하면 합격이다. 방향, 속도 등 동일한 조건에서 테스트가 가능해 선수 컨디션, 날씨, 온도의 제한 없이 화살 분류가 가능하다. 화살 분류는 1차로 슈팅머신을 통해 불량 화살을 솎아낸 뒤, 선수들이 직접 자신에게 맞는 화살을 테스트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두 번, 세 번 화살 분류를 통해 선수들이 균일한 품질의 화살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
 
  점수자동기록 장치는 점수를 자동으로 판독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장치다. 선수들이 화살을 쏘면 전자 과녁이 무선 통신을 이용해 점수를 모니터 화면에 실시간으로 표시한다. 선수나 코칭 스태프가 직접 과녁에 가거나 망원경으로 보지 않더라도 효과적으로 점수를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점수만 표시되는 것이 아니라 화살 탄착 위치까지 모니터에 표시된다. 점수와 탄착 위치 데이터는 훈련 데이터 센터에 자동으로 저장되는 시스템을 갖춰 빅데이터로 활용할 수 있다. 이 장치를 활용하면 일반 훈련 때에도 몰임감을 극대화할 수 있다. 발사 이후 점수를 바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경기에서와같이 두 선수가 스코어를 두고 경쟁하는 ‘경기 모드’가 가능하다.
 
 
  선수들의 심박수 측정해 심리적 불안감 없애
 
  ‘압박감을 어떻게 이겨내지? 심장이 터져버리는 건 아닐까?’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금메달을 향해 질주하는 선수들을 보며 한번쯤 느꼈을 생각이다.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버티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실제로 선수들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뛰고 있는지를 측정하는 장치가 있다.
 
  도쿄올림픽을 두고 현대차가 개발한 비전(vision) 기반 심박수 측정 장비다. 선수 얼굴의 미세한 색상 변화를 감지해 맥파를 검출, 심박수를 측정하는 장비다. 경기나 훈련 중에는 직접 선수들의 몸에 스티커를 붙이거나 심박수를 측정하기 어렵다.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현대차그룹은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선수 얼굴 영역을 판별하고 주변 노이즈를 걸러내는 별도의 안면인식 알고리즘을 개발해 장치를 만들었다. 얼굴을 측정할 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방송용 원거리 고배율 카메라로 선수들의 얼굴을 잡았다. 양궁 국가대표 코칭 스태프는 훈련 과정에서 축적된 심박수 정보와 점수 데이터를 연계해 선수의 심리적 불안 요인을 제거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 심리 제어 훈련을 통한 경기력 향상을 꾀했다.
 
  현대차는 선수들의 긴장 완화를 위해 국내 명상 애플리케이션 개발 전문업체와 협력해 ‘명상 앱’도 제작해 지원했다. 선수단을 지속 관리해온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심리 전문가의 의견을 바탕으로 개인 선수 맞춤형으로 콘텐츠를 구성해, 시간과 장소에 제약 없이 편안한 심리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AI가 태극 궁수들 코치 역할
 
  ‘태극 궁수’들의 코치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인공지능도 이들의 기량을 높이는 데 한몫을 했다. 현대차는 인공지능 전문 조직 에어스(AIRS) 컴퍼니가 보유한 AI 딥러닝 비전 기술을 활용해, 선수들의 훈련 영상을 분석해 평소 습관이나 취약점을 분석할 수 있는 ‘딥러닝 비전 인공지능 코치’를 개발했다. 기존에는 훈련하는 선수가 활시위를 당기고 쏘는 자세를 촬영한 영상과 표적에 화살이 적중하는 영상을 사람이 일일이 대조해 분석 데이터를 만들었다. 하지만 ‘인공지능 코치’는 영상 속 선수의 세트업 및 릴리즈 시점과 과녁 영상 내 화살이 꽂히는 시점만을 정확히 포착해 하나의 짧은 영상으로 자동 편집해준다. 준비 동작 등 분석에 불필요한 영상은 과감히 편집된다. 기술 개발을 위해 ‘에어스 컴퍼니’는 수천 개의 양궁 동작 이미지를 통해 영상에 등장하는 선수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딥러닝 비전 컴퓨팅을 활용했다.
 
  도쿄올림픽에는 양궁 선수의 손에 최적화된 그립을 3D로 스캔해 제작한 ‘맞춤형 그립’이 적용됐다. 통상적으로 선수들은 활의 중심에 덧대는 ‘그립’을 자신의 손에 꼭 맞도록 직접 손질한다. 기성품 그립을 자신만의 수제품으로 만드는 거다. 하지만 도쿄대회처럼 장기간 경기가 벌어지는 도중에 그립에 손상이 가면 새 그립을 다시 손에 맞도록 다듬어야 한다. 양궁은 예민한 경기인지라 1mm의 오차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현대차그룹와 양궁협회는 3D스캐너와 3D프린팅 기술을 활용해 선수 손에 꼭 맞는 맞춤형 그립을 제작해 선수들에게 제공했다. 특히 가벼운데다 미끄러짐이 없는 혼합 소재 알루마이드 그립을 선수들에게 제공했다.
 
  여자 양궁 단체전. 첫 화살을 쏜 안산 선수가 두 번째 순서로 경기를 준비하는 강채영 선수에게 다가가는 장면이 중계에 노출됐다. 두 번째 선수가 그 순간의 환경을 파악할 수 있도록 자신이 경험한 풍향, 조준점을 얘기하는 것이다. 팀원 간의 무한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끈끈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대한민국 양궁과 그들의 ‘키다리 아저씨’를 자처하고 나선 현대차그룹의 금빛 컬래버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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