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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de Away

역사속으로 사라진 전설적인 땅부자 1세대

1960년대 초에 한강 남쪽 논밭 사들인 이북 출신 상인들의 안목

글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sj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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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곡동 타워팰리스·대치동 은마아파트 땅 소유주였던 윤장섭 성보 이사장 별세로
    ‘강남 부동산 1세대’ 모두 역사속으로
⊙ 김형목 전(前) 영동고 이사장이 주축이 됐던 이북 출신 상인들의 ‘장한평농지개량조합’이
    강남 부동산 붐의 주역
⊙ 당시 정부가 내놓은 일본인 귀속재산, 구(舊) 왕실재산 대량으로 사들여
⊙ 국가에 기증, 공원 설립, 교육기관·문화재단 설립 등 부(富)의 사회환원에 적극적
강남구 대치동과 도곡동 일대 아파트가 들어선 모습. 1970년대 이곳은 홍수에 취약한 논밭이었다.
  2016년 5월 15일, 윤장섭(94세) 성보문화재단 이사장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윤장섭 이사장은 황해도 개성 출신으로 유화증권과 성보실업을 창립한 기업인이지만, 성보문화재단과 호림박물관을 설립한 문화재 수집가로도 유명하다. 기업으로 축적한 재산을 국내 문화재 1만5000여 점을 사들이는 데 상당 부분 투자했으며 특히 불교문화재에 애착이 커 불교계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다.
 
  윤장섭 이사장의 부고에 또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 강남 개발의 당사자들인 ‘강남 부동산 1세대’가 모두 사망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윤장섭 이사장은 현재 대치동 은마아파트와 도곡동 타워팰리스가 자리 잡고 있는 땅의 지주(地主)였다.
 
  윤 이사장은 작고한 김형목 전 영동고 이사장, 조봉구 전 삼호그룹 회장, 이준영 전 대유 명예회장, 윤도한 전 강남대 이사장 등과 함께 강남 부동산 일대를 소유했던 강남 부동산 1세대다. 1960~1970년대 서울시에서 기획관리관 및 도시계획국장으로 근무해 이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도 5월 10일 별세했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강남 부동산 1세대들의 숨은 이야기를 취재했다.
 
  강남 부동산 1세대란 6·25 이후 한강 이남의 땅을 사들여 엄청난 부를 얻은 지주들을 일컫는다. 북한 출신으로 상업이 발달한 개성에서 장사를 하다 전쟁 이후 월남한 ‘개성상인’들은 전쟁 후 남대문 등 시장에서 돈을 벌었고, 돈을 벌고 나서는 서울에서 투자처를 찾느라 분주했다. 상인들은 시장에서 포목, 지물포, 화공약품 등을 팔며 재산을 모았다. 모은 재산으로 제지업, 방직업 등 사업을 시작하거나 사금융업으로 돈을 벌기도 했다.
 
 
  전쟁 후 강남 땅 사들인 이북 출신 상인들
 
전재준
  1960년대 초 사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많은 땅을 소유한 김형목 전 영동고 이사장(2003년 작고)이 비슷한 상황의 이북 출신 상인들을 모아 ‘장한평농지개량조합’을 만들었던 것이 강남 부동산 붐의 시초다. 이를 주도한 김형목 전 이사장은 1970~1980년대 당시 ‘서울 강남 땅의 절반은 김형목 소유’, ‘김형목 땅을 밟지 않으면 강남을 지나갈 수 없다’는 말이 퍼져 있을 정도로 신화적인 존재였다.
 
  1960년대 초 강남 부동산에 주목한 김형목 이사장은 강남구 삼성동과 대치동, 압구정동 일대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비슷한 형편의 상인들과 공동투자에 착안한 그는 손위 처남인 이준영 대유 명예회장, 같은 실향민인 윤장섭 이사장과 전재준 삼덕제지 회장, 비슷한 시기에 강남 땅을 샀던 조봉구 회장 등과 의기투합해 ‘장한평농지개량조합’을 만들었다. 모두 1910~1920년대생으로 당시 50대 전후였다.
 
  조합은 삼성동, 대치동 외에도 양재동 도곡동 개포동 등의 땅을 사들였는데, 정해진 대리인을 통해 공동명의로 매입하고 공동관리하는 등 끈끈한 팀워크를 보였다. 이 조합은 1960년대 말 정부가 강남 개발을 시작한 시점과 맞물려 엄청난 부를 형성하며 ‘강남 땅부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강남구청 사거리의 POBA강남타워. 이 일대 수만평이 김형목 영동고 이사장의 땅이었다.
  이들의 대부격인 김형목 전 이사장이 애초 강남 땅에 주목하게 된 것은 당시 정부가 구 왕실재산과 일본인재산을 대거 매각하며 도시토지개발에 나섰기 때문이다. 1963년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은 국내 산업을 농업 중심에서 중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로 전환하며 기반시설 조성을 위해 대도시에 공업용지 및 주택용지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농지였던 토지가 공업용지와 주택용지로 바뀌면서 땅값은 상승했고, 시장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들은 투자처로 땅에 주목했다.
 
  박정희 정부는 출범 직후인 1963년 당시 경기도였던 현재 강남구 지역을 서울에 편입했고 이 땅을 상인들에게 매각했다. 정부는 이를 자본으로 1960년대 후반 들어 한강에 제방을 만들며 강남 개발에 시동을 걸었다. 1969년 한남대교를 개통하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만 해도 시골이었던 말죽거리(양재동) 일대 땅값은 평당 200~400원에 불과했고 신사동 역시 200원 정도였다. 그러나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가 등장한 1970년대 초반에는 신사동과 양재동의 땅값이 평당 1만4000~1만6000원에 달했다. 정부는 1970년 강남지역을 주택지로 선정했고 이후 땅값은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반 강남 땅 수십만 평 매입한 김형목 이사장
 
김형목
  이 시점부터 ‘강남 땅부자’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이때 이미 땅을 수십만 평 소유해 돈방석에 앉은 사람이 함경남도 북청 출신인 김형목 이사장이었다. 그는 6·25전쟁 때 월남하여 1950~1960년대 제지와 해운 등에 투자해 부를 축적했고, 1960년대 초부터 강남 땅을 사들이다가 1968년에는 아예 부동산 회사인 ‘강남개발’을 세운다.
 
  작고한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저서를 통해 김형목 이사장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종로구에 사는 상인 김형목과 조봉구는 이미 1960년대 초에 강남 땅 수십만 평을 사 모았다. 정부가 강남지역에 많았던 구 왕실재산이나 일본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을 평당 100원 전후의 낮은 가격에 처분했기 때문이다. 김형목은 선릉 청담 삼성 대치동 등에 약 40만평을, 조봉구는 역삼 도곡 등에 60만여 평을 샀다.〉
 
조봉구
  그들이 강남 땅을 사들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특히 이들의 땅은 정부가 개발에 나선 후 땅값이 크게 오른 지역들이어서 특혜나 사전정보 등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팽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관계자들은 “강남이 개발되고 대박이 터진 것은 그들이 땅을 산 지 10여 년 후의 일”이라며 “상인의 촉이 작용했던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당시 그들이 샀던 압구정 대치 선릉 등 한강 이남 지역은 장마 때 쉽게 수해를 입는 지역으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정부 역시 싼 가격에 이를 처분했는데, 이에 주목하고 매입에 나선 사람이 김형목 이사장과 조봉구 회장이었던 것이다.
 
  손정목 전 교수는 “강남 땅투기 이야기가 나온 것은 1970년대고, 김형목 조봉구 등은 본인의 판단에 의해 땅을 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의 회고다. “땅투기는 그 이후의 일이다. 1970년대 초 청와대 지시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손 교수의 전임자인 윤진우 전 도시계획국장)이 강남 일대 땅을 수십만 평 샀다가 팔았는데 이 과정에서 김성곤(쌍용 설립자)씨와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고, 토지거래 차익은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김형목 등이 땅을 산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다.”
 
 
  토지 기증, 교육재단 설립 등으로 부의 사회환원에 나서
 
강남이 개발되기 전인 1969년 한강 이남의 모습.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다.
  1970년대 말 들어 강남지역 땅값이 폭등하자 ‘말죽거리 땅부자’, ‘복부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수백 수천 배로 오르자 너도나도 땅투기에 나섰고, 주부들이 땅투기에 뛰어들면서 ‘복부인’이 사회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강남에 총 100만여 평의 땅을 소유한 김형목 이사장과 조봉구 회장 등은 일각에서 “특혜 아니냐”며 질시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형목 이사장은 부자의 도덕적 의무,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킨 사람이다. 그는 본인 소유의 땅이었던 청담동 소재 북청군장학회 부지(면적 606.9m², 현재 시가 198억원 추정)와 삼성동 강남구립국제교육원부지(면적 3153m², 시가 837억원 추정)를 각각 북청장학회와 서울시에 기증했다.
 
  또 그는 1970년대 초 영동중학교와 영동고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영동고 이사장으로 재임하며 영동고를 경기고, 서울고 등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한 기존 명문고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강남구청 사거리의 POBA강남타워(구 영동백화점)와 청실아파트 등이 그의 땅에 지어진 건물들이다. 그의 세 아들은 각각 강남의 부동산을 물려받아 부동산업 외에도 건설업과 서비스업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문화재 수집가로 유명했던 윤장섭 이사장
 
윤장섭
  고 윤장섭 성보 이사장은 개성 출신으로 전쟁 후 화학제품 판매업과 금융업 등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1961년 성보화학의 전신인 서울농약을 설립했고, 유화증권과 성보실업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그는 주로 대치동과 도곡동 일대 땅에 투자했다. 현재 은마아파트와 타워팰리스가 서 있는 땅이 윤 이사장의 땅이었다.
 
  1960년대 이 땅을 매입한 그는 은마아파트 자리를 한보 정태수 회장에게 매각했고 정태수 회장은 이 땅을 기반으로 한보그룹을 설립했다. 윤 이사장은 타워팰리스 자리가 나대지일 당시 정부에 전투경찰 훈련장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이 밖에 역삼동 성보아파트(현재 테헤란아이파크) 부지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가 갖고 있던 땅을 주로 아파트 건설사가 매입해 한때 윤 이사장을 ‘강남아파트 개발의 최대 수혜자’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윤 이사장은 김형목 이사장과 동향의 실향민이어서 김 이사장과 가깝게 지냈고, 함께 강남 땅에 주목하면서 장한평농지개량조합의 일원이 됐다. 벌어들인 부를 성보고등학교, 성보문화재단, 호림미술관 설립 등 교육사업이나 문화재단 설립 등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도 김 이사장과 유사하다.
 
  1970년대 ‘돈병철, 땅봉구’라는 말이 있었다. 돈많은 부자로는 이병철 (삼성) 회장이 최고이고, 땅부자로는 조봉구 삼호 회장이 최고라는 뜻이다. 조봉구 회장은 1954년 경남모방을 설립한 후 조선방직을 인수, 경남모방을 국내 최대의 면방직 업체로 키운 사람이다. 모방 시장을 석권하며 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김형목 이사장과 같은 시점에 강남 부동산에 주목해 수십만 평을 매입했다.
 
윤장섭 성보문화재단 이사장은 사업과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한 후 성보문화재단과 호림미술관을 세워 각종 문화재를 수집했다.
  현재의 역삼역 인근을 중심으로 강남 일대 대규모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던 조 전 회장은 부동산 투자로 큰 돈을 벌고 나서 건설업을 시작, 삼호개발을 설립해 개나리아파트, 진달래아파트 등을 지었다. 또 그랜드백화점(현재 롯데백화점 강남점)도 조 전 회장의 땅이었다. 그는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에는 해외 건설시장과 유통, 골프장 등 다양한 산업에 진출해 삼호그룹을 13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서열 9위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방배동에 1700여 평의 단독주택을 소유했던 그는 1980년대 초반 전국 주택재산세 순위에서 늘 1, 2위를 차지하곤 했다.
 
  그러나 부를 2세에게 물려준 다른 멤버들과 달리 조봉구 회장은 삼호그룹 해체라는 아픔을 겪고 말년을 어렵게 지냈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서라는 주장이 있다.
 
  조 회장의 조카인 가수 조덕배씨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조봉구 회장 집에 500년 된 탐스러운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영부인 이순자 여사가 그 나무를 원했지만 조 회장 부부가 거절했다”며 “그 이후 가족들이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고 부실거래로 수사를 받는 한편 언론에선 삼호그룹 해체설이 돌았으며, 결국 그룹이 해체됐다”고 주장했다. 삼호그룹은 1984년 8월 정부의 산업합리화 조치에 따라 갑자기 해체됐는데, “조봉구 회장이 대통령의 정치자금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조봉구 회장은 장한평농지개량조합 멤버 중 유일하게 부를 유지하지 못하고 미국에서 생활하다 2010년 작고했다.
 
 
  김형목의 처남 이준영 대유 회장
 
이준영 대유 회장이 경기도 광주에 설립한 영은미술관.
  2007년 작고한 이준영 대유 회장은 황해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장사에 뛰어들었다. 전쟁 후 월남해 동대문에서 좌판장사를 하며 자본을 모은 그는 1954년 섬유업체인 마산방직을 설립해 섬유업에 집중했다. 국내에서 최초로 스웨터를 만들어 수출한 것으로 업계에서 유명한 마산방직은 1970년대 당시 섬유수출 수요가 폭증하면서 회사 규모가 급속히 커졌다. 이준영 회장의 여동생 이정례씨가 김형목 이사장과 결혼하며 이 회장은 김 이사장과 처남·매부의 인연을 맺게 됐고, 이후 김형목 이사장과 함께 부동산 매입에도 나서게 된다. 그러나 이준영 회장이 단독으로 소유한 강남 땅은 많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준영 회장이 소유한 땅은 생전에 거주하던 청담동 자택 인근 땅이다.
 
  이준영 회장도 매부 김형목 이사장과 함께 ‘개성상인’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근검절약, 신용중심, 무차입경영이라는 개성상인의 상도를 몸에 익혔다. 회사가 어려울 때면 억대의 사재를 현금으로 내놓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준영 회장의 아들 이상은 전 대유 회장은 1980년 마산방직의 이름을 대유통상으로 바꾸고 해외시장을 개척했으며 현재 대유는 이준영 회장의 손자 이종훈 사장까지 3대에 걸쳐 견실하게 운영되는 중견기업이다.
 
  이준영 회장은 문화사업에도 적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대유문화재단을 설립했고 경기도 광주에 소유하고 있던 땅 10만여 평에 100억여 원을 투자해 ‘경안미술문화단지’를 준공했다. 현재 영은미술관(2000년 완공)과 관련 스튜디오, 창작관 등이 있는 곳이다. 이는 개관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미술문화단지였다.
 
 
  수백억 땅 기증한 전재준 삼덕제지 회장
 
옛 삼덕제지 공장터를 개발한 안양 삼덕공원. 부지 기부자인 전재준 삼덕제지 회장의 흉상이 서 있다.
  2010년 작고한 전재준 전 삼덕제지 회장도 부의 사회환원에 적극적으로 나서 세간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개성 출신인 전 회장은 종이도매업과 종이제조 등 제지업에 주로 종사하다 1961년 안양에 인쇄용지 제조회사인 삼덕제지를 설립했다. 삼덕제지의 규모가 커지자 그는 삼정펄프를 세워 지류업의 대부로 등장한다.
 
  당시 삼덕제지에 지분을 갖고 있던 김형목 이사장은 본인보다 나이가 열한 살이나 적지만 실향민으로서 부를 축적한 개성상인 전재준 회장을 주목, 강남개발 설립을 제안했다. 김형목 이사장과 공동으로 주식회사 강남개발을 설립한 전 회장은 장한평농지조합 멤버들과 함께 강남지역의 땅을 소유하게 된다. 김형목 이사장과 전재준 회장은 이후 지분정리를 통해 강남개발과 삼덕제지를 각각 소유하게 되며 김 이사장은 부동산, 전 회장은 제지업에 집중했다. 전 회장은 부동산 매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김형목 이사장과 함께 투자 차원에서 부동산을 소유했다.
 
  사업과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한 전 회장은 수백억 원어치의 땅을 지자체와 학교에 기탁한 ‘기부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처음으로 회사를 설립한 장소인 안양 삼덕제지 공장터를 2003년 안양시에 공원용지로 기증했다. 안양시가 커지면서 안양 시내 중심지가 된 땅 4300여 평으로 당시 시가는 300억원 정도. 안양시 측은 “그 땅은 일반주거지역이어서 아파트나 주상복합을 지었다면 엄청난 이익을 거뒀을 텐데 전 회장이 기증이라는 결단을 내린 점에 모든 공무원이 경의를 표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 회장은 “안양 시내에 떡하니 자리 잡은 땅이 왠지 마음에 걸렸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곳이 안양이라 안양시민들을 위해 내놓고 싶었고, 가족회의를 했는데 아내와 자녀들 모두 흔쾌히 찬성해 기증하게 됐다”고 전했다. 현재 삼덕공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전 회장은 이듬해인 2004년에는 경기도 포천의 50억원 상당 임야를 성균관대에 기부했다.
 
 
  도곡동 신학교 인수한 윤도한 강남대 이사장
 
윤도한
  2004년 작고한 윤도한 강남대 이사장은 김형목 이사장이나 조봉구 회장 같은 땅부자는 아니었다. 윤 이사장이 소유한 땅은 수천 평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한평농지개량조합 출신 중 윤도한 이사장은 멤버들 중 가장 땅이 적은 편에 속한다. 다른 멤버들이 수십만 평이었다면 그는 고작 수천 평이었다. 하지만 그는 김형목 이준영 조봉구 전재준 등 회원들이 거액의 땅을 사고 팔 때 대리인 역할을 전담할 정도로 지주들로부터 깊은 신임을 얻었다.
 
  과거 대치동과 도곡동 일대 땅을 사려고 지주를 찾는 사람이나 기업은 “윤도한을 통해야만 살 수 있었다”고 했다. 지주들이 수만~수십만 평을 보유한 거부들인 만큼 직접 계약에 나서지는 않고 대리인을 지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 대리인이 늘 윤도한 이사장이었다는 것이다. 중개료도 엄청난 액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윤도한 이사장은 당시 특별한 사업체나 업장을 가진 사람이 아니어서 그의 정체를 궁금해한 사람도 많았다.
 
  윤도한 이사장은 지주들의 부동산 중개를 하는 한편 지주들이 부동산에 투자할 때 소액이라도 함께 하는 방식으로 부를 쌓았다. 기독교 신자였던 윤 이사장은 1970년대 도곡동에 있던 신학교를 인수해 강남사회복지학원으로 바꾸고 1980년 이 학교를 경기도로 이전해 종합대학인 강남대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강남대 이사장으로 취임해 교육자의 길을 걸었지만 1970~1980년대에도 계속 강남 부동산을 조금씩 매입했다. 현재 강남구 청담동에는 윤도한 이사장 가족 명의로 700억원대의 땅과 건물이 있다.
 
 
  부동산으로 부 축적하고 자식들에겐 금융, 제조업 등 사업체 물려줘
 
강남개발이 시작되던 1977년 강남구 압구정동의 모습. 현대아파트 단지와 농촌마을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장한평농지개량조합 지주들의 공통점은 이북 출신으로 사업과 부동산으로 큰 부를 축적했으며, 교육과 문화사업 등을 통해 사회에 부를 환원했고 자식들에게는 땅보다 사업체를 물려줬다는 점이다. 윤장섭 이사장은 성보화학을 장남 윤재천 부회장에게, 유화증권을 4남 윤경립 사장에게 물려줬다. 전재준 회장은 아들 전성오 삼정펄프 사장에게 사업체를 맡겼다. 대유 이종훈 사장은 이준영 전 회장의 손자이며, 윤도한 강남대 이사장의 아들은 윤신일 강남대 총장이다. 전재준 회장은 생전에 “땅(으로 번 돈)은 땀흘려 번 것이 아니지 않으냐”며 “가족들에게도 땅 욕심을 갖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종종 이야기했다. 그들은 소유한 땅을 상당 부분 생전에 매각했다.
 
  사실 이들은 단순히 ‘땅부자’라고 부르기엔 적절치 않은 훌륭한 기업인들이다. 특히 신용을 중시하고 한 가지 사업에 집중하며, 근검절약하는 개성상인의 특징을 이들에게서 볼 수 있다. 이들은 수조 원대의 자산가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재산과 회사재산을 철저하게 분리해 관리하며 가족들은 사치하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했고, 반면 직원들에게는 섭섭지 않은 처우를 해 줬다. 이와 관련한 일화도 적지 않다.
 
  이준영 대유 회장이 수출업무로 야근이 많아지던 어느날 직원들에게 각자 월급보다 많은 금일봉을 주고 본인은 남대문시장 우동 한 그릇으로 저녁을 때웠다는 일화는 사원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전재준 회장은 삼덕제지가 2000년대 초 수도권에서 경남으로 이사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만두는 사람들을 위해 퇴직금 외에 1인 2000만원 이상의 전별금을 줬다. 지금의 국내 기업인 중 이런 자세로 운영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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