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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가 ‘아트’에 주목하는 이유는

글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sj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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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테이트모던에 11년간 장기후원 계약, 백남준展도 후원…
테이트모던 역대 최대규모 기업후원


⊙ ‘현대차=모던 프리미엄(modern premium)’ 이미지로 유럽 문화향유계층 공략
⊙ 신흥국가 예술가 지원 통해 브라질, 러시아, 인도 진출 발판 시너지
⊙ 미술계 “대기업의 대규모 예술계 후원 고무적인 일… 정부·기업차원의 후원 확대 기대”
3월 7일 서울 주한영국문화원에서 조원홍 현대자동차 전무, 니컬러스 세로타 테이트미술관그룹 총관장, 마틴 프라이어 주한영국문화원장이 현대차-테이트의 협약을 발표하고 있다.
  3월 초, 국내 미술계 ‘큰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영국 테이트(TATE)미술관그룹의 총관장인 니컬러스 세로타(Sir Nicholas Serota, 58) 씨가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에 각 미술관장과 큐레이터, 재벌가의 미술수집가 등이 세로타 관장과 만남을 갖기 위해 연줄과 인맥을 총동원한 것이다. 유수 재벌가 부인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줄을 섰다는 것은 이미 미술계에 잘 알려진 소문이다.
 
  니컬러스 세로타 관장은 매년 국제 미술잡지들이 선정하는 ‘세계 미술계 파워 인물 100’에서 10위 안에 포함되는 인물로, 큐레이터(curator·미술관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사람)로서는 글렌 로리 뉴욕근대미술관(MoMA) 관장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그는 옥스퍼드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하다가 1988년 테이트미술관그룹의 총관장으로 부임해 1999년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knight) 작위를 받고, 영국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상인 터너상의 심사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영국 문화계의 핵심인사이기도 하다.
 
  테이트미술관그룹은 테이트브리튼, 테이트모던, 테이트리버풀, 테이츠 세인트 아이브스 등 4개의 미술관을 보유하고 있다. 2000년 문을 연 테이트모던 미술관은 연간 관람객 수가 500만명이 넘어 전세계 현대미술관 중 관람객 수가 가장 많은 곳이다. 미술평론가 정준모(前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씨는 “문을 연 지 오래되지 않은 테이트모던이 런던의 새로운 명소가 된 것은 콘텐츠 개발에 힘을 쏟은 니컬러스 세로타 관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6년간 테이트미술관그룹의 수장으로 일하면서 테이트를 세계 최고의 미술관으로 만든 세로타 관장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계에 보기 드문 장기후원 계약
 
영국 런던 템스강 인근에 위치한 테이트모던 미술관. 현대미술관 중 관람객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곳이다.
  2014년 1월 20일, 영국 언론은 한국의 글로벌기업인 현대자동차가 테이트모던 미술관을 11년간 장기 후원키로 했다고 보도했다. 협약에 따라 현대차는 테이트모던과 11년간 글로벌 마케팅 파트너십을 맺고, 테이트모던의 핵심인 ‘터바인홀(Turbine Hall)’에서 10년간(2015~2025) 매년 6개월씩 ‘더 현대 커미션(The Hyundai Commission)’이라는 이름의 전시를 열기로 했다. 또 백남준의 작품도 테이트모던이 9점 구입토록 후원했다.
 
  이날 영국의 60여개 매체가 “테이트가 글로벌 기업과 대형 스폰서십을 체결했다”며 이를 보도했다. 영국 일간지 《더 가디언》은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니컬러스 세로타 관장과 마리아 밀러 (영국) 문화부 장관,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현대차의 테이트모던 장기후원 협약식이 열렸다”며 “(이번 협약은) 영국의 단일 미술관에 주어진 스폰서십 중 가장 큰 규모인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BP와 유니레버, BMW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테이트를 비롯해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에 스폰서십을 제공한 케이스는 적지 않지만, 현대차-테이트모던의 협약은 그들에 비해 규모가 크고 기간 또한 길었다.
 
  당시 마리아 밀러 문화부 장관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미술관 테이트와 세계적인 기업 현대차의 협약은 미래를 위한 의미있는 파트너십”이라고 소개했고,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현대차가 테이트와의 협약을 통해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기업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니컬러스 세로타 관장의 이번 방한은 당시 맺은 협약을 한국에서 공식 발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로타 관장은 3월 7일 서울 신문로 주한영국문화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테이트는 그동안 많은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어 왔지만, 이번 현대차와 맺은 협약은 테이트가 더욱 글로벌한 미술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또 장기파트너십을 통해 문화사업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깊이 있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이다. “10년간 ‘더 현대 커미션’이 열릴 터바인홀은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한가운데에 있고 각종 기획전을 열고 있으며 매년 수백만 명의 관객이 찾는 전시장으로, 지금까지 현대미술의 뜨거운 이슈가 되는 국제적인 작가들의 전시를 해 왔습니다. 현대차의 후원으로 ‘더 현대 커미션’은 무료로 열릴 것이고 세계의 많은 관객들이 훌륭한 작품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세로타 관장은 “영국 미술계에서 한국 작가들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며 “이번에 현대차 후원으로 백남준의 작품 9점을 처음 구매했지만 앞으로 한국 작가들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후원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제조업체가 미술을 후원하는 이유
 
지난 1월 영국 런던에서 니컬러스 세로타 총관장과 마리아 밀러 문화부장관,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협약을 맺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삼성·SK·금호 등 다른 대기업과 달리 친인척과 관련된 갤러리나 미술관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현대차가 미술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기도 하다. 현대자동차의 CMO(최고마케팅책임자) 조원홍 전무는 “현대차가 왜 미술에 관심을 갖고 장기적인 후원을 하느냐”는 질문에 “이제 자동차는 교통수단이 아닌 라이프스타일”이라며 “고객이 기대하는 것 이상의 경험과 가치를 제공한다는 브랜드 방향성에 따라 예술 지원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조 전무의 얘기다.
 
  “테이트는 문화예술계에 글로벌 네트워크가 있습니다. 현대자동차 역시 글로벌 네트워크와 비전이 있고요. 남미와 중동, 러시아, 동유럽, 아시아 등 신흥 시장은 테이트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현대차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겹치는 지역이죠. 테이트와 현대차의 글로벌 비전이 결합된 프로그램은 양쪽 모두에 시너지 효과를 갖고 올 겁니다.”
 
  테이트는 전통적으로 유럽과 미국미술 중심이었던 미술관이지만, 최근에는 남미와 아시아, 동유럽의 근현대 미술을 보여주는 미술관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활용한 것이다.
 
  현대차는 3년 전부터 문화예술 분야를 지원하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테이트와 협약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1년 전부터다. 이는 오너(정의선 부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바탕이 됐다.
 
  현대차 마케팅전략팀에서 아트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이대형 아트디렉터의 얘기다. 그는 미 컬럼비아대학에서 큐레이팅을 전공하고 큐레이팅 및 아트마케팅 회사(H-Zone)를 설립해 운영해 왔던 전문가로 1년 전 현대차로 자리를 옮겼다.
 
  “현대차는 수준 높은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위해 기업 내 자체적인 역량을 키우고 있습니다. 3년 전부터 경영진에서 문화예술 마케팅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고,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인재 영입과 문화예술마케팅그룹 신설 등 내부에서 관련 역량을 강화해 왔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전문인력을 채용하고 있고요. 단순한 제조업체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고 이끌어 나가는 업체라는 이미지를 확립하려 하고 있습니다. 미술에 관심이 있고 수집할 능력이 되는 계층은 전세계에 몇 퍼센트 되지 않는 상류층이거든요. 현대차가 공략하려는 소비자도 이들입니다. 현대차가 추구하는 ‘모던 프리미엄’ 이미지를 예술 후원을 통해 각인시키는 겁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장기후원
 
현대차는 국립현대미술관과도 10년간 장기후원 협약을 하기로 했다.
  현대차 문화예술마케팅그룹은 테이트와 협약 외에도 다양한 아트마케팅을 진행하고 있다. 현대차는 2013년 11월 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을 기념해 10년간 총 120억원을 후원하는 장기후원 프로그램을 발표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연간 작품구입 예산이 30억여 원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매우 큰 액수다. 현대차는 이 파트너십을 통해 기성작가의 개인전 지원, 신진작가의 창작지원과 전시 지원 등 작가 양성 시스템을 구축했다. 현대차 측은 “국립현대미술관 지원은 문화예술 발전 및 대중화 지원을 통해 문화와 산업이 함께 발전하는 새로운 형태의 동반성장 프로그램”이라며 “고객에게 기대 이상의 경험과 가치를 제공한다는 브랜드 방향성인 ‘모던 프리미엄’의 일환으로 추진했다”고 밝혔다.
 
  현대차 이대형 아트디렉터는 현대차가 예술 중에서도 특히 현대미술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는 데 대해 “현대미술은 단순한 회화나 조각이 아닌 종합예술로, 자동차산업과 통하는 점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이다.
 
  “현대미술 작품의 키워드는 ‘융합’입니다. 단순히 아름답고 보기 좋은 작품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를 결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보여주고 느끼게 하는 것이 현대미술이거든요. 그런 점이 현대차가 추구하는 자동차산업과 유사하다고 판단하는 겁니다. 예술가들을 지원하면서 마음껏 창작을 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게 하는 거죠. 그래서 단기지원이나 프로젝트 지원이 아닌 장기후원에 나서는 겁니다.”
 
  그는 또 “VIP마케팅의 정점은 아트마케팅이라 할 수 있다”며 “세계 트렌드를 리드하는 각국 부유층 및 상류층의 관심사는 현대미술에 집중돼 있고, 그들에게 인정받는 브랜드는 진정한 ‘프리미엄급’이라 할 수 있는 만큼 국내 기업들도 예술 시장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후원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현대차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테이트 후원에 이어 올해 상반기 중 미국 유수 미술관에 대한 후원협약도 준비 중이다.
 
‘현대展’이 열리는 터바인홀은

 
‘더 현대 커미션’이 열릴 테이트모던의 터바인홀.
  테이트모던은 2000년 전후로 영국 전역에서 이뤄진 예술계 ‘밀레니엄 프로젝트’ 중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템스강 남동쪽 폐쇄된 발전소를 개조해 문을 연 테이트모던은 다른 미술관보다 한 발 앞서 세계의 현대미술을 소개하며 테이트를 영국 최대의 미술관그룹으로 만들었고, 낙후됐던 해당 지역을 예술 중심가로 만드는 경제효과도 가져왔다.
 
  특히 영국의 현대미술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 신진작가들의 전시를 주로 여는 터바인홀이다. 테이트모던의 중앙홀 터바인홀은 5층 건물을 관통하는 독특한 구조의 홀로 바닥 면적은 약 3만m²이며 매년 한 작가를 선정해 10월부터 약 6개월간 기획전을 마련한다. 홀의 규모나 전시 예산이 일반 갤러리나 작가로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정도인 만큼 대기업이 신진작가를 위해 후원을 맡는 경우가 많다. 이 기획전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가로 칠레 태생의 도리스 살시도, 덴마크 출신의 올라퍼 엘리아슨 등이 있다. 현대차는 내년(2015년)부터 터바인홀 전시의 후원을 맡는다.
 
  미술계, “정부 및 기업 차원의 예술지원 시스템 마련해야”
 
테이트모던은 현대차 후원으로 백남준의 작품 9점을 구입했다. 테이트가 구입한 백남준의 2002년작 〈Bakelite Robot〉.
  테이트미술관그룹의 니컬러스 세로타 관장은 다양한 콘텐츠 개발로 미술관을 발전시킨 능력 외에도 미술계에서 대기업과 스폰서십을 통해 안정적인 시스템을 만든 인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그는 “(테이트에) 취임하던 1988년에는 예산 중 정부지원이 80%에 달했으나 현재는 30%에 불과하다”며 “대신 기업과 개인의 후원이 훨씬 많아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지금까지 BP와 유니레버 등 영국기업 외에도 BMW 등 글로벌기업들이 테이트에 지속적인 후원을 해 왔다.
 
  서진수 미술시장연구소장(강남대 교수)은 “중국을 비롯해 신흥 국가들의 미술 시장이 성장하고 자국 작가가 인정을 받고 있는 있는 배경에는 정부 및 기업의 지원과 파워컬렉터가 있다”며 “한국에는 그런 문화가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고 미술 시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시장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에서 음악이나 체육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인물이 있지만 유독 미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작가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작가를 양성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현대차-테이트 협약을 계기로 국내 대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예술 후원에 나서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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