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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이념과 정치

‘간첩’과 ‘지식인의 아편’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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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라는 이름을 내세워 민중을 잘못된 길로 몰아세우는 좌파 지식인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아편’의 중독자”(레이몽 아롱)
⊙ “공산주의 윤리학이 상정하는 최고의 의무는 惡하게 행동할 필요를 수용하는 것이다”(루카치)
⊙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지만, 강남좌파들 보면 의식이 그들의 사회적 존재를 逆규정
⊙ “선동적인 ‘진보팔이’로 젊은이들을 호도하는 것은 문명의 퇴보를 재촉하는 것”(레이몽 아롱)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레닌은 전위정당에 의한 사회주의혁명을 주장했다.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디 있나?” 당사자는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고 했지만 박제된 관용구가 됐다. ‘안이함과 철없음의 수준’을 보여주는 상징으로서다. 하나 비유적 힐난으로 쓰자면 딱히 틀리지도 않은 얘기다. 간첩을 잘 잡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만에 간첩 검거 뉴스가 나왔다.
 
  지난 8월 2일 충북 청주의 ‘활동가’ 몇몇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무슨 활동을 했을까? 대표적 혐의는 북한 지령을 받아 미국산 F-35A 스텔스 전투기 도입 반대 활동을 한 것이다. 그 외에는 시민·노동단체 인사에 대한 포섭 활동도 했으며, 북한으로부터 공작금 2만 달러를 수령한 혐의도 있었다. 북한에 대해 충성맹세의 혈서(血書)도 썼다고 한다. 활동가? 간첩이다.
 
  이들 소위 ‘활동가’들은 “수사기관이 제시한 혐의는 모두 조작”이라고 버틴다고 한다. 익히 보던 수작이다. 하나 만만찮은 대목이 있다. 이들은 “스텔스기 도입 반대는 2018년 남북정상 간 9·19남북합의서 내용에 근거한 것일 뿐”이라 했다. ‘간첩짓’이 아니라 그에 부응한 당연한 ‘활동’이라는 것이다. ‘9·19합의의 당사자’가 답을 하긴 해야 한다.
 

  그런데 비슷한 때에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범(汎)여권 국회의원 74명이 한미연합군사훈련 연기를 주장하고 나섰다. 북한의 김여정이 한 소리 하자 마치 부랴부랴 하명(下命)을 받들 듯이 그랬다. 따지자면 이것도 ‘9·19합의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기도 하겠다.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는 게 있었다. 1949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1년 남짓 될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남로당의 프락치 활동 혐의로 현역 국회의원 13명이 검거·기소됐다. 국회 부의장이던 김약수를 비롯하여 노일환, 이문원 등이 체포됐다.
 
  당시 그들은 외국 군의 완전 철수,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남북정치회의 개최를 주요 내용으로 한 ‘평화통일방안 7원칙’을 내세웠다. 감성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이상주의적 주장이다. 그러나 거기에 어떤 독소가 도사리고 있는지는 새삼 논할 것도 없다.
 
 
  김여정의 下命을 받든 여권 의원들
 
  그렇다면 이번 범여권 74명 의원의 주장과 행태는 어떠한가? 신판 국회 프락치? 그럴 리야 있겠나? 미국을 비난하면서도 자식은 미국 유학을 보내고 집값을 잡겠다면서도 뒤로는 부동산 부자 추구에 여념 없는 자들이 그럴 리가 있나? 그러나 어떻든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이 한둘도 아니고 떼거리로 나서서 적국 수뇌의 하명을 받드는 꼴은 아연함을 느끼게 한다. 어지간한 소위 ‘활동’이라는 건 아예 잔챙이로 느껴질 지경이다.
 
  이번에 구속된 충북의 소위 ‘활동가’들의 직업을 보면 언론인, 대기업 직원, 간호사 등이었다. 평범한 이들이다. 이들은 시민단체에서부터 민노총 조직국장, 문재인 대선 캠프 특보 등도 역임하고, 더불어민주당·민중당 등을 종횡으로 누볐다.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현 더불어민주당 대표)과 대북(對北)사업도 논의했다.
 
  그런데 그들처럼 평범하면서 마찬가지로 그런 유(類)의 ‘활동’을 하는 소위 활동가들이 참 많다. 민노총과 범민련남측본부 등의 구성원들은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과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한 바 있다. 청와대에 그런 청원을 올린 자들도 있다.
 
  지난 8월 7일 광주 5·18광장에서 ‘광주전남 조국통일촉진대회’가 열렸다. 범민련 광주전남 지부가 주최하고 34개 단체가 참가했다. 어떤 통일을 하자는 것일까? 그들의 구호와 주장에 답이 있다. “미군철수, 한미동맹해체, 국가보안법철폐”가 구호였다. 그러면서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외쳤다. 북한의 상투적 주장과 구호의 완전한 반복이다. 북한 주장대로의 통일이다. 즉 다시 말하면 북한을 따르는 적화(赤化)통일이다.
 
  종북(從北) 활동이 완전히 일상의 풍경이 됐다. ‘충북(忠北·북한에 충성함) 활동가’들의 새삼스럽지도 않은 주장대로 모두가 조작이며 간첩 따위는 아무 데도 없다고 해두자. 그런데 아무 데도 없는데 나라 온 천지에서 간첩짓이나 다름없는 짓거리가 난무하고 있다.
 
 
  안이함의 결과
 
루카치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느냐고 하겠지만 오래됐다. 무엇보다도 안이함의 결과다. 어설픈 ‘민주 패거리’들과 어정쩡한 ‘먹물’들은 ‘독재’를 탓할 줄만 알았지 좌익의 위험성을 깊게 헤아리지 못했다. 반대로 좌익에 동조하거나 적어도 관용적이기는 해야 ‘양식이 있다’고 여기곤 했다. 겉멋이요, 허영이었다. 그 알량함이 이념적 혼돈을 낳고 탈선(脫線)이 방치되게 만들었다.
 
  종북 좌익 무리가 과거 입에 달고 다니던 언사가 “용공(容共)조작”이었다. 〈공산당선언〉에 감동받고 좌익혁명을 꿈꾸던 자들이 그랬다. 단도직입적으로 ‘공산주의자로 규정짓고 대우해주지 않아 자존심 상했다’는 얘기가 아니라면 참으로 기만적인 언사다. 그런데 이게 그들 무리의 본성화된 속성이다. 그들의 윤리학에는 거짓말과 기만에 대한 부담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산주의 윤리학이 상정하는 최고의 의무는 악(惡)하게 행동할 필요를 수용하는 것이다.”
 
  반공주의자의 비난이 아니다.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죄르지 루카치(1885~1971)의 신념에 찬 선언이었다.
 
  문예사상가로 알려진 루카치는 1956년 부다페스트 반소(反蘇)운동 결과로 탄생한 정권에 가담했다가 소련에 의해 그 정권이 붕괴되면서 망명한 이력이 있다. 그래서 나름 온건한 이미지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루카치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은 혁명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장 큰 희생이다.”
 
  자신들이 악행(惡行)을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는 것이다. 바로 부르주아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악행이란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적 산물이고 자신들이 범할 수밖에 없는 악행도 그 탓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르주아에 속한 것은 모조리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궤변일뿐더러 광기(狂氣)다.
 
  그럴 만했다. 마르크스주의 좌익 패거리는 그냥의 정치적 무리가 아니라 일종의 유사종교 집단이다. 루카치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역사와 계급의식》(1923년)에서 그렇게 단언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견본만 갖고는 실행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로 개종(改宗)되어야 한다.”
 
  이게 좌익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맞닥뜨려 겪고 있는 상황은 그 유사종교적 광기에 눈을 감고 안이하게 대한 결과다. 온 천지가 감염되다시피 해 보이는 해괴한 양상은 그저 벌어진 게 아니다. 대중의 문제점도 있다. 그러나 그저 진행된 탈선(脫線)이 아니다. 각성이든 타락이든 대중의 의식 변화는 결코 그냥 진행되지 않는다. 언제나 작동이 있다.
 
 
  의식이 존재를 逆규정한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1857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테제다. ‘사적 유물론’에서부터 ‘계급론’ ‘혁명론’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사회·정치 이론은 이에 기초해 있다.
 
  그런데 레닌은 노동자 계급 대중이 혁명적으로 되는 것은 목적의식적인 전위(前衛)에 의해 그렇게 이끌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단언했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1901년)에 그렇게 썼고 그렇게 행했다. 전위의 목적의식이 대중의 혁명성을 이끌어낸다는 건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마르크스의 논리가 그 충실한 제자를 자처한 레닌에 의해 부정된 셈이다.
 
  러시아혁명의 주역인 소위 그 혁명적 전위들의 존재 양태 자체도 마르크스의 테제를 부정한다. 그들은 절대다수가 부르주아 출신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계급적 존재 조건과는 어긋나는 길을 갔다.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역(逆)규정’한 것 아닌가?
 
  이 모든 것 이전에 마르크스 자신부터가 하나의 역설(逆說)이다. 스스로가 전형적인 부르주아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낭비벽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화하기는 했어도 단 한 번도 노동자인 적은 없었다. 그에게 생활비를 대주던 동료 엥겔스는 심지어 공장주, 즉 자본가였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마르크스 이전에도 그랬고, 러시아혁명 이후의 모든 좌익혁명운동이 그랬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념이 계급에 의식을 불어넣었다
 
  “한국 사회주의의 원조(元祖)는 대부분 《태백산맥》에 나오는 기층(基層) 민중이 아니라 일본 유학을 다녀온 부유한 지주의 자식들이었다.”
 
  “1945~53년 격변의 해방 8년사 (후도 마찬가지다) 좌파운동은 사라졌지만, 민주화운동 그리고 취약하나마 진보운동을 주도한 것은 강남좌파였다. 1970년대 이후를 예로 든다면, DJ(김대중)와 YS(김영삼)부터 재야지식인, 학출(학생운동 출신 위장취업 노동운동가), 1987년 6월항쟁 당시 명동을 메운 사무직 노동자 등 운동을 이끈 것은 대부분 강남좌파였다.”
 
  반(反)마르크스주의자의 지적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정치학자가 그렇게 말했다.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남좌파’의 존재를 변호하는 얘기였다. “강남좌파를 갑자기 생겨난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 언제 어디서고 급진적 주장을 들고나온 자들은 대개 강남좌파 같은 부류들이 먼저였다.
 

  지식분자들은 늘 그렇다고 한다면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은 그에 한해서만큼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사회적 의식은 물질적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분자들 이념의 문제가 된다. 실제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의 논리든 혹은 저항의 논리든 그것은 언제나 지식분자들이 내놓는 “세계에 대한 이러저러한 해석”에 기대어 있었다. 계급이 이념을 낳은 것이 아니라 이념이 계급에 의식을 불어넣었다.
 
  그런데 객관적 계급의식이 없는 것이라면 그 법칙적 필연성을 앞세운 혁명론은 근거를 상실한다. 그런데도 혁명을 외칠 수 있나? 상관없다! 레닌 이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더 이상 그런 딜레마에 신경 쓰지 않는다. 레닌은 “혁명이론 없이 혁명은 없다”고 했고, 루카치는 레닌의 이 테제를 변주하여 아예 “프롤레타리아는 철학적 범주”라고 했다.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으로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을 경우엔 역사 변혁의 담당자를 이념으로서의 계급의식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없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요, 객관 없는 이념만의 혁명이다. 그런데 그런 혁명이란 결국 거기에 집착하는 자들의 관념의 유희일 뿐이다. 일종의 정신적 약물에 의한 취기다. 좌파 지식인은 그 약물을 대중에게 판다. 그게 대중의 각성이요, 의식화다.
 
 
  성숙한 자본주의 배경으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은 없다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성장이 노동자 계급의 성장을 가져오고, 또 그렇게 하여 결국에는 붕괴되면서 사회주의-공산주의로 넘어갈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이래 어떤 공산좌익혁명도 성숙한 자본주의와 노동자 계급의 성장을 배경으로 한 예는 없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성공한 모든 공산좌익혁명은 자본주의의 발전도 취약하고 그래서 근대적 노동자 계급의 성장도 미약한 곳에서 일어났다.
 
  1917년 10월혁명은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르자면 일어날 수 없거나 더 심하게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멘셰비키는 그랬다. 멘셰비키는 러시아에서 산업발전과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장해가는 게 선행(先行)해야 한다고 여겼다.
 
  레닌은 달랐다. 레닌은 그들을 그저 경제주의자일 뿐이며 혁명이 뭔지도 모르는 바보라고 여겼다. 레닌은 멘셰비키 등과는 정반대로 사회주의 혁명은 그저 경제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의식적 투쟁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성숙을 기다리는 ‘경제주의’는 그저 기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단언했다.
 
  “혁명이론 없이는 혁명운동도 없다. (…) 오로지 선진적 지도그룹에 의해 지도되는 당만이 선진적 투사의 역할을 할 수 있다.”
 
  혁명이론으로 무장한 혁명적 전위집단이 이끄는 당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각성시키고 이끎으로써 혁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유명한 전위정당론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은 더 이상 객관적인 법칙적 발전의 결과가 아니다. 이제 혁명은 의식의 문제였다. 레닌주의의 그 같은 의식의 강조는 러시아혁명 이후 도처의 지식분자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좌절감을 겪고 있는 후진국(後進國)의 지식분자들은 더했다.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은 더 이상 자본주의의 성장을 충분히 기다리는 것일 필요가 없었다. 얼마나 있든 그저 노동자들-무산자(無産者)들을 각성시키고 의식화해 이끌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부족하면 농민도 그렇게 이끌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럴듯하게 등장한 게 노농(勞農)동맹론이다. 마오쩌둥(毛澤東)주의가 대표적이다. 노동자든 농민이든 아무튼 피억압 인민, 즉 민중이면 되는 것이었다.
 
  그랬다. 더 이상 법칙도 과학도 아니었다. 이제 혁명은 의식의 문제요, 의지의 문제가 됐다. 레닌 이래 좌익사상은 그렇게 됐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레닌주의가 맞기는 하다.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이른바 노동자 계급이 성장한다고 해서 그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가 없다.
 
 
  계급·계급의식은 객관적 발현이 아니라 조장의 결과다
 
  사실 계급과 계급의식이라는 발상부터가 일종의 주관적 원망(願望)이다. 계급이 있고 계급의식이 있다는 사고방식은 언젠가부터 보편적 상식처럼 군림하고 있다. 좌익이 아닌 이들도 그렇기는 하다고 여기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일 뿐 객관적 진실이 아니다.
 
  ‘취준생’(취업준비생)이라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게 있다. 자신이 다른 취준생과 동지적 관계가 아니라 경쟁관계라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하든 이것은 객관적이다. 그런데 그 취준생은 고용이 되는 순간, 즉 취직이 되는 순간은 무엇보다도 고용주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게 된다. 그리고 이제 직장생활이 시작되면 또 당연한 경쟁이 진행된다. 월급 인상에서 승진에서 동료들과 경쟁이다. 한편 고용된 이들은 아직 미고용 상태에 있는 이들과 이해관계상의 대립상태에 놓인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저 정서적으로 비슷한 처지에 있다는 인식 정도가 전부일 뿐 이른바 하나의 노동자 계급이라는 계급의식은 사실 형성이 안 된다.
 
  그래서 계급의식이 형성되려면 고용주, 즉 자본가가 적대적 대상으로 악마화(惡魔化)돼야 한다. 자본가는 임금을 적게 주고 착취하고 있다 그래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뭉쳐서 맞서야 한다는 식의 논리다. 먼저 나서게 되는 건 노동조합이다. 그런데 어떤 기업의 노조도 아직 고용되지 않은 예비 노동자에게 자신의 이익을 양보할 생각은 꿈에도 안 한다. 이렇게 되면 여전히 노동자 계급은 없다. 그러니 이제 노동 계급의 보편적 이익을 내세우는 또 다른 존재가 등장해야 한다. 정치집단, 노동자당이다. 이제 이들이 나서서 자본가-부르주아를 정치적으로 적대적 존재로 몰아간다.
 
  그런데 모든 나라의 모든 경제사가 증명하지만 그 같은 악마적 자본가-고용주에 의한 기업은 성공적으로 성장하고 이어져간 사례가 없다. 간단히 말해 상식 밖의 착취를 하는 회사-기업은 잠깐은 몰라도 결국은 망했다. 그래서 ‘악질적 자본가’ 대(對) ‘성실한 노동자’라는 대립구조는 애초에 연속적으로 이어져가는 계급적 대립구조일 수 없다. 그저 인간 사회라면 어디서든 있기 마련인 부실함이나 일탈의 문제일 뿐이다.
 
  물론 갈등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나의 기업 안에서 자본-노동의 대립보다는 기업과 기업 간의 경쟁이 당연히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경쟁이 당연시되면, 또 노동자 계급의 계급적 일체화는 없다. 그래서 개별 기업을 넘어서서 노조가 뭉쳐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하게 된다. 산별(産別)노조라는 것, 그리고 노조 총연맹 등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도대체 회사는 누가 키우나? 상관없다. ‘우리 회사’ 따위를 운운하는 건 자본가의 속임수일 뿐이라고 몰면 된다.
 
  자본가-부르주아의 악마화, 그리고 자본-노동의 대립이라는 관념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조장된 르상티망적 관념일 뿐이다. 더욱이 그 경제 현장, 삶 현장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라 그저 관찰하고 더러는 아예 관찰도 없이 상상하는 자들의 관념이다. 요즘 속어로 말하자면 ‘뇌내망상’이요, ‘뇌피셜’이다.
 
 
  의식화? 가스라이팅이다!
 
레이몽 아롱의 《지식인의 아편》.
  그런데 이게 바로 레닌주의 이래의 좌익사상의 기본적 핵심 논지다. 계급의식은 자연스럽게 그저 형성되지 않는다. 의식적인, 즉 의지적인 각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각성은 스스로 되는 게 아니다. 그런 이념 이론으로 무장한 선진적 지도집단 전위에 의해 그 같은 이념 이론을 전수해야 한다. 교육·선전이다. 그리고 선동도 중요하다. 그래야 그 각성의 과정에 힘을 더한다. 그 모든 과정을 일컬어 ‘의식화’라고 한다.
 
  지속적인 교육·선전·선동에 의한 의식의 변화다. 그런데 이것은 통속적 비유로 달리 말하자면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소위 전위 혹은 혁명적 지식인이라는 자들은 가스라이팅 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이것은 약을 파는 것과도 비슷하다. 각성을 위해서라며 각성제를 파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그 약을 자신이 먼저 먹기는 해야 한다.
 
  이른바 혁명적 좌익 패거리에서 지도적 행세를 하는 자들은 대개 두 가지 부류다. 건달 아니면 지식분자들이다. 이 둘은 겹치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그런데 어떻든 레닌 이래 마르크스주의적 좌익혁명운동에선 지식분자가 행세할 자리가 확실히 마련은 됐다. 이제 뭔가 행세를 하고픈 지식분자들은 그 허세적 갈망의 충족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도취된다. 아편에 중독되듯이!
 
  레이몽 아롱이 일찍이 통렬하게 그 점을 지적하는 책을 썼다. 《지식인의 아편》(1955년 발간, 1962년 개정증보판)이다.
 
  “‘역사적 변증법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무산계급의 시대가 억압된 자들을 해방시킨다’는 공산주의 이론은 사이비 종교와 같다. 절대성을 강조하고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은 민중을 고난으로 이끌 뿐이다. 거대한 수용소 국가로 전락한 소련의 모습은 이를 대변한다. ‘진보’라는 이름을 내세워 민중을 잘못된 길로 몰아세우는 좌파 지식인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아편’의 중독자다. 객관성·보편성과 소통하지 못하는 사상은 억지요, 고집일 뿐이다.”
 
  좌익 지식분자들이란 ‘마르크스주의라는 아편’에 중독된 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혁명적 이념에 의한 민중의 각성이란, 결국 자신을 중독시킨 약을 민중에게도 팔아서 중독시킨다는 것일 뿐이다.
 
 
  지금 한국은?
 
  한국은 후진국이라서가 아니라 충분히 성숙한 고도의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와 노동자 계급이 일치하지 않는다. 연봉 1억원을 넘나드는 현대자동차 같은 기업의 노동자를 무산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부르주아 뺨치게 부유한 노동자들이 전투적인 노동운동의 최선두를 이루며 “노동해방”을 외친다.
 
  루카치가 예를 든 경우와는 반대로, 배가 불러 프롤레타리아가 더 이상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계급의식을 앞세우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는커녕 스스로가 비정규직에 대한 착취자의 입장인 노동귀족들이 그 점은 은폐한 채 위선적으로 계급적 정치구호를 외치고 있다. 종북(從北) 무리도 그 속에 똬리를 틀더니 이제는 아예 주도적 위세를 부리고 있다.
 
  더욱이 이들은 이제 치외법권의 특권집단이 됐다. 교회 예배도 막고 다른 집회 시위를 다 막아도 이들의 집회는 막지 못한다. ‘기업유죄 노조무죄’요, ‘좌익무죄 우익유죄’가 됐다. ‘종북무죄 애국유죄’요, 급기야 ‘북한은 무죄요, 대한민국은 유죄’인 꼴이 됐다. 가치관이 전도되고 상식이 뒤집혔다. 좌익적 가스라이팅과 약팔이를 제압하지 못한 결과다.
 
 
  레이몽 아롱의 경고
 
  대선이 6개월여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공방도 치열하고 주장도 갖가지다. 그런데 해괴한 공약 하나가 등장했다. 여당의 한 후보자가 정부 보증으로 “전 국민에게 1000만원” 기본대출을 하겠다고 한다. 사실상 돈을 살포하겠다는 매표공약이다. 게다가 극히 위험하다. 500조원이다. 인플레만 문제가 아니다. 그냥 주는 돈으로 여길 가능성이 크다. 채무 불이행이 줄을 잇게 된다. 그러면 천문학적 규모의 돈이 부실 대출이 돼버린다.
 
  그럼에도 이런 엽기적 공약이 내세워지는 건 그럴 만한 탈선과 타락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정권은 “국민 삶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러니 돈 없다고 뻗대면 나라에서 어떻든 생돈이라도 줘야 한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일지에 대해 레이몽 아롱은 이미 오래전에 경고해두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욕망에 따라 배분받는다’는 선전은 허공의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인간의 열망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허구에 몰입할수록 ‘모두가 잘사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가난한 세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은 그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롱은 덧붙여 말한다.
 
  “좌파들은 어설픈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역사의 진실을 어지럽혀선 안 된다.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의견을 용인하지 못하는 폐쇄성은 전체주의로 귀결된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선동적인 ‘진보팔이’로 젊은이들을 호도하는 것은 문명의 퇴보를 재촉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발성과 창의력을 키우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가 인류 진보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아편을 끊으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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