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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이념과 정치

소련군이 ‘해방군’? 함석헌의 기억

그는 그때 악마를 보았다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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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군 사령관,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세워도 자유’…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소련 일색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함석헌)
⊙ 신의주학생사건으로 사망자 20~150명, 부상자 300~700여명, 학생·시민 1000여명 체포, 시베리아 200여명 유형
⊙ “북조선의 군수중공업 공장들은 戰利品… 일본이 소련에 끼친 엄청난 손해에 대한 배상으로 소련으로 이송돼야”
⊙ 미국의 점령은 일본을 대상으로 한 것…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 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한다”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해방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해방군’을 자처했지만 온갖 패악질을 저질렀다. 사진=조선DB
  〈소련군이 들어오자마자 온 시내는 공포 기분에 싸이게 됐다. 첫째로 한 것이 상점 약탈이었다. 시계, 만년필은 닥치는 대로 “와이(내라)”다. 그담은 여자 문제다. 어디서 여자가 끌려갔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얼마 뒤인 9월 어느 무렵 북한의 평안북도 용천군에 있던 어떤 이의 회고다. 그는 당시 자신이 목격한 소련군과 그 패거리를 이렇게 묘사한다.
 
  〈한 손에 무수(無水) 알코올 병을 들고 한 손에 냉수컵을 들고 마셔대는 소련군, 인간으론 보이지 않고 짐승으로만 보이는 공산당 위원들.〉
 
 
  소련군이 해방군이라고?
 
  광복회장이라는 이가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라고 하더니 여권(與圈)의 유력 대권(大權) 후보 중 한 사람도 같은 소리를 했다. 이 정권 사람들의 뒤틀린 언사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 정권의 운동권 출신 586들이 그런 시각을 갖고 있음은 비밀도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문제의 발언을 던진 두 인물은 운동권 출신도 아니다.
 
  김원웅은 586도 아니며 옛 공화당에서 통합민주당까지 당적(黨籍)을 여러 차례 바꾼 정치인이다. 이재명은 세대로는 586이지만 운동권 경력은 전혀 없다. 그런데 김원웅은 부모의 독립운동 경력 날조 의혹이 제기된 상태고, 이재명은 대선 후보 경선전(競選戰)에 돌입해 있다. 도발적 언사를 통해 586류의 역사의식이 주류(主流)인 여권 지지층을 움직여 정치적 이득을 꾀하려는 수작이 느껴진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다. 이 정권 패거리와 그 지지층이 그런 역사관을 옳은 것인 양 여기고 있다는 문제다. 뿌리가 깊다. 좌익사관이 짐짓 비장한 수식어를 동반하며 행세를 해왔다. 물론 얄팍할뿐더러 오도(誤導)된 작술(作述)이었다. 하지만 그에 물든 맹신자들이 그 맹신을 집요하게 재교육·재생산해왔다. 그러기를 한 세대의 세월을 넘기면서 간단치 않은 층을 형성했다. 586 패거리들은 그 위에 올라타 있다. 철딱서니 없던 시절 “해방 전후” 운운하는 책자 몇 쪼가리에서 주워 먹은 것을 경전 구절마냥 읊어대며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러나 글머리에 인용한 어떤 이의 회고가 보여주듯, 해방 공간 그때 그 시절 바로 그곳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전혀 다른 기억을 전한다. 몇 대목을 더 들어보자.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지만 그날부터 일은 자꾸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것은 그저 하룻밤 새 생긴 공산당원의 횡포뿐이다. 정체 알 수 없는 특무대란 것이 생겼다. 그저 횡행천하했다.〉
 
  〈소련군 사령관이 오자마자 환영식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세워도 자유입니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소련 일색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벌써 거리마다 레닌·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을 레닌가 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학교에서 소련말을 가르치기 시작하지.〉
 
  이런 소련군이 해방군인가? 물론 이 정권 586들을 비롯해 그 뒤틀린 역사관을 떠받드는 무리는 예의 회고담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극우적(極右的) 편견일 뿐이라 여길 것이다. 그런데 이 회고담의 주인공은 그들 진영으로서도 결코 그렇게 치부할 수 없는 인사다. 바로 함석헌(咸錫憲·1901~1989)의 회고이기 때문이다.
 
 
  함석헌
 
함석헌. 사진=조선DB
  함석헌은 3·1운동에 참가한 이래 일제(日帝)시대 막바지까지 지속적으로 반일(反日) 저항운동을 이어간 사람이다. 그 때문에 그는 1940년대에 한 번은 평양의 대동경찰서 유치장에서 1년여, 또 한 번은 경성의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여를 모두 두 차례 투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독립운동 인사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내내 정권에 맞선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 인사였다. 그는 한일회담에 반대했으며, 3선 개헌에도 반대했으며, 10월유신 후에는 반유신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수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 4월에는 《씨의 소리》라는 월간지를 창간해 1980년 1월 폐간될 때까지 1970년대 내내 매섭게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
 
  1974년에는 윤보선·김대중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만들었으며, 1970년대 민주화운동 사건에 거의 빠짐없이 연루되곤 했다. 1974년 7월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에 서명하기도 했다. 그의 민주화운동은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계속되어 1984년에는 장기표·백기완 등이 만든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1987년 6월항쟁을 앞두고 만들어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의 고문도 맡았다.
 
  이쯤 되면 이른바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정도를 넘어선 태두(泰斗)급의 인사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단순히 정치적인 민주화운동가 수준을 넘어 철학적인 정신적 지도자로 받들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런 인물이 ‘소련군과 공산당원의 횡포’를 말한 것이다. 더욱이 이 회고는 다름 아닌 《씨의 소리》 1971년 11월호에 실린 글이었다. 제목은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 사건’이었다. 그랬다. 함석헌은 해방 후에는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 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과 공산당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1947년 3월 17일 월남(越南)하였다.
 
 
  신의주학생사건
 
신의주 의거로 재판에 회부된 학생들(왼쪽)과 당시 살해된 신의주제일공업학교 4학년 박태근 학생의 어머니가 아들의 유골을 안고 서울로 왔다는 내용을 보도한 1945년 12월8일자 《동아일보》.
  1945년 11월 23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중학교 학생들이 ‘공산당 타도’를 외친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 사건이 일어났다. 신의주학생사건(新義學生事件)이다. 11월 18일 용암포 제일교회에서 소련군과 조선공산당의 실정과 횡포를 비난하는 ‘인민위원회 지지대회’가 열렸을 때 소련군과 공산당이 습격한 게 발단이었다.
 
  당시 소련군과 공산당은 공장 노동자들을 동원해 대회장을 점거하고 간부들을 폭행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평안교회의 장로를 현장에서 죽이고 대회 참가 학생과 시민들에게 중상을 입혔다. 소련군 등의 이런 폭력에 격분한 신의주 학생 대표들은 공산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대규모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11월 23일부터 신의주의 6개 중학교와 부근의 5000여명 학생들이 함께 궐기해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공산당을 몰아내자!’ ‘소련군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가지를 행진했고, 공산당 본부와 인민위원회 본부, 보안서 등을 점거했다.
 
  소련군과 공산당은 무력(武力)으로 진압에 나섰다. 공산당 보안대와 소련군은 학생들을 무차별 사격했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희생자 수는 출처마다 다르지만 대략 사망자 20~150명, 부상자 300~7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학생과 시민 1000여명이 체포되어, 그중 200여명이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점령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저항운동으로 기록됐다.
 
  신의주학생사건은 무엇보다도 소련군의 행패와 공산당의 횡포가 원인이 돼 발생한 것이었다. 소련은 사건을 계기로 점령통치 방식과 체계 정비에 나섰다. 그러나 이후에도 북한 주둔 소련군의 일탈행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현지 지휘부부터 엉망이었다. 사건 한 달 뒤인 1945년 12월 29일 자 소련군 보고서는 그 실상을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낮에도 길거리에서 술에 취한 군무원들을 볼 수 있다. 밤만 되면 모든 여관이며 공창(신의주에 70 곳이 넘는다)마다 술잔치가 벌어진다. 취한 군관들은 바로 거기서 순찰 중인 경무부대원(군사경찰·헌병-편집자 주)들의 묵인하에 병사들과 교대로 창녀를 찾는다. 신의주에 주둔하고 있는 비행사단의 개별성원(정치부장 추니크 중좌)도 이런 온갖 추태스런 품행을 보이고 있다. 소좌(소령-편집자 주) 데미도프가 지휘관으로 있는 현지 보병연대 군무원들 역시 이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데미도프는 토요일 아침부터 다음 날 저녁까지 이틀 동안(12월 8~9일) 그에게 별도로 제공된 경무사령부 여관방 두 개에서 계속 창녀들과 술잔치를 벌였다.
 
  (…) 회의 참석차 이틀 일정으로 평양으로 떠난 기르코 대신 자리를 지킨 부사령관 표도로프 소좌는 이틀 동안 술에 취해 사령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령부에는 당직 사관만이 남아 있었고 심지어 군관조차 한명 없었다. 고주망태가 된 표도로프와 군관들을 우리는 이틀째 되는 날 집에서 발견했으며, 경무사령부의 나머지 군관들의 소재는 파악할 수 없었다. (…) 그런 상황은 바로 최근 신의주에서 있었던 조선 민족주의자들의 시위의 일부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글머리에 인용한 소련군의 난행(亂行)에 대한 함석헌의 얘기는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더욱이 소련군과 공산당의 그 같은 작태는 당연히 신의주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북한 전역이 그런 상황이었다.
 
 
  일탈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일탈행위에 있는 게 아니었다. ‘해방군’ 운운이 가증스러울 만큼 소련군의 추태와 행패가 극심했지만 그것뿐이기만 했다면 인간인 이상 언제 어느 곳에서든 나타나기 다반사인 방만함과 해이함의 문제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련군과 공산당의 진짜 문제는 그런 흐트러짐이 아니라 의도된 악행(惡行)의 자행이었다. 그들의 이념 자체가 야기한 악행이었다.
 
  〈당초에 공산당이 들어오면서부터 한 수법이 그렇다. 동리 안에서도 아무리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의 눈으로 봐도 ‘그건 사람이 아니’라는 쪽지가 붙은 사람들을 골라서 흡수해가지고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가진 악감정을 불어넣어가지고 소위 민청이니 여청이니 하는 것을 조직해서 평지풍파로 없는 계급적 감정을 일부러 만들어서 간 데마다 사회를 파괴시켰다. 그것이 그들의 소위 계급투쟁의 과학적 방법인 것을 내가 모르지 않았다.〉
 
  함석헌은 자신이 예전부터 알던 한 인물이 소련군의 그 같은 의도적 조장으로 어떻게 변모해갔는지를 말했다.
 
  〈소련군이 오기 전까지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그 후부터 아주 사납게 굴기 시작했다.〉
 
  이념이 불러온 악마화(惡魔化)를 본 것이다.
 
 
  그들의 해방이 말하는 것
 
해방 후 소련 군정 치하의 북한에서 열린 노동절 행사. 단상의 김일성과 소련군 장성들 뒤에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사진=조선DB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소련극동군 연해주군관구 제25군이 진주했다. 평양비행장에 도착한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자신들을 ‘해방군’으로 규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조선 인민들이여, 여러분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행복은 이제 여러분 손 안에 있다.”
 
  소련군이 그렇게 스스로 ‘해방군’이라 선언하고 그럴듯한 언사를 늘어놓았으니 “과연 그렇습니다” 해야 한다면 아예 생각이라는 게 없는 것이다. 내세우는 말을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은 사기(詐欺)를 자청(自請)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소련군은 북한에서만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 도처에 진주할 때도 ‘해방’을 앞세웠다. 그런데 소련은 볼셰비키 혁명 직후 우크라이나 침공(1917~1920년)부터 마지막 무렵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1989년)에 이르기까지 언제 어디에서든 ‘해방군’을 자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만행이 없은 때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저 부분적 일탈(逸脫)일 뿐 그들의 이념적 기준에선 그런 행동은 아무튼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해방이란 바로 공산화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들의 ‘해방’ 운운은 이념적 믿음이었고, 동시에 그에 입각한 강변(强辯)의 프로파간다였다.
 
  그들의 해방 개념은 애초 마르크스 때부터 언제나 공산화(共産化)였다. 나중에 레닌이 천명한 “약소민족 해방”이라는 것도 결국 공산화였다. 궁극적인 전 세계의 공산화를 위해 개개 국가들을 차례로 공산화하는 과정의 하나일 뿐이었다. 소련 입장에선 그들의 국익과 각국의 ‘해방=공산화’는 동일화돼 있었다. 북한에서의 해방군 운운도 당연히 그랬다. 소련군이 자신을 해방군이라 한 것은 북한의 공산화를 밀어붙이겠다는 적화(赤化) 추진의 선언과 다름 아니었다.
 
 
  소련은 북한의 공업시설을 약탈해 갔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짚어봐야 할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소련의 국가적 차원에서의 약탈행위다. 개별적인 약탈 문제가 아니다. 소련이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적·체계적으로 자행했던 산업시설 약탈의 문제다. 이것은 그들의 위선(僞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 그들이 내세운 성취 이면의 허상도 보여준다.
 
  일제시대 만주에서 북한에 이르는 지역은 대단한 공업지대였다. 일제가 그렇게 강력하게 공업지대로 육성한 것은 대륙 침략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소련은 만주와 북한의 공업시설을 자신들의 전리품으로 간주했다.
 

  1945년 12월 소련 외무부 극동 제2국 참사관 수즈달레프가 작성한 〈조선에서의 일본의 군비와 중공업에 관한 보고〉가 그것을 보여준다. “북조선의 군수중공업 공장들은 붉은 군대에 대항해 싸운 일본군을 위해 봉사했고, 또 붉은 군대의 엄청난 희생으로 쟁취(爭取)한 것이므로 전리품(戰利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그래서 “북조선의 군수중공업 공장들은 이번 전쟁에 대한 배상의 일부로, 또 소비에트 러시아가 출발한 이후 현재까지 일본이 소련에 끼친 엄청난 손해에 대한 배상으로 소련으로 이송돼야 한다”고 했다.
 
  소련은 당초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북한 지역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기획했던 것이다. 소련은 북한 진주와 동시에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금・은・구리 등 광물을 비롯한 갖은 물품들을 소련으로 가져갔으며 주민들의 생필 품목에 해당하는 쌀, 소·돼지 등까지 대량으로 공출해 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약과였다. 결정적인 것은 공업설비의 반출(搬出)이었다. 소련은 당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공업설비들을 가져갔다. 특히 중대한 것은 수풍댐 수력발전소 발전기 3대(5대라고도 한다)를 뜯어간 것이다. 이것은 당시 미소(美蘇) 간에 외교문제가 되기도 했다. 수풍 수력발전소는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에도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45년 11월 미국이 항의각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소련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뿐만 아니라 소련은 공업설비 반출과 관련된 다른 모든 일도 다 잡아뗐다. 악의적(惡意的) 모략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조선공산당도 나섰다.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는 1945년 10월3일자 사설에서 “(소련이) 기계를 뜯어 간다느니… 하는 얘기는 허무맹랑한 소리이며 계급적으로 반동을 획책하려는 모략”이라고 했다. 적반하장이었다. 그러나 그 알리바이는 매우 허술했다. 미국뿐 아니라 중국과도 마찰을 빚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설적(逆說的)이게도 이후 소련의 경제성장 궤적이 말해주는 바도 있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급속한 공업 성장을 했다
 
  레닌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후 이른바 전시공산주의라는 급속한 공산화 정책을 추진했다. 대소(對蘇) 간섭과 내전(內戰)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그렇잖아도 취약한 러시아의 공업 생산력을 무너뜨렸다. 레닌은 이에 1921년부터 네프(NEP)라는 신경제정책을 추진했다. 그 덕분에 소련 경제는 겨우 혁명 전 수준으로 회복이 되었다.
 
  소련의 공업화가 나름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1924년 레닌 사망 후 정권을 이은 스탈린에 의해서였다. 스탈린은 1928년 10월부터 5개년 계획을 골자로 한 급진적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 초기 10년 동안인 1928년부터 1937년까지 연(年)평균 경제성장률은 6.2%에 달했다. 대단한 성과를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1928년 이래 거의 20여 년에 가까운 세월에 걸쳐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소련은 여전히 농업국가였으며, 공업에 있어서도 여타 앞선 공업국들과는 비교할 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1945~1959년에 놀라운 공업 생산 증가가 이루어졌다. 1945~1950년 동안 소련의 공업 총생산은 두 배로 늘어났다. 1946~1950년의 4차 계획 동안 소련 경제는 매년 15%씩 성장했다. 소련에서 공업이 농업을 역전하여 명실공히 공업국가가 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거기에는 만주에서 철거・반출해 간 철강 및 전력 등 중공업 시설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물론 소련은 전후(戰後) 점령지인 독일에서도 많은 자원을 가져갔다. 특히 독일의 우수한 인적 자원은 소련의 전후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시설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단연 만주였다.
 
  독일은 다 파괴됐지만 만주에는 일본이 건설한 수많은 공업 인프라가 아무런 피해 없이 고스란히 남았다. 관동군은 철수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기반시설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철수했다. 소련은 그렇게 만주에 남아 있던 공업시설의 거의 절반 이상을 뜯어 갔다.
 
 
  소련·중국의 공업화와 ‘만주의 유산’
 
  관동군 지배하 만주국의 공업 기반은 대단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일본 본국을 제외한 아시아 최대의 공업 지대가 바로 만주였다. 소련은 바로 이것을 접수하여 전리품으로 챙겼다. 아직 중국이 공산화되기 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권은 소련의 그 같은 처사에 맹렬히 항의했다. 그러나 국공(國共) 내전의 와중에 있던 중국은 소련 행위에 제동을 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점에선 중공(中共)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소련이 막대한 공업설비를 뜯어 간 이후에 남은 것도 대단했다. 이른바 개혁개방으로 중공이 본격적인 경제발전이 시작되기 전 중국 공업생산력의 상당 정도를 담당했던 게 바로 만주의 남겨진 공업시설이었다.
 
  동북지방은 개혁개방 이전까지 중국 최대의 공업지대로서 산업을 이끌어 ‘공화국의 맏아들’이라는 별명을 갖기까지 했다. 동북 지역은 제조업 분야에서 1970년대까지 전국의 20%를 차지하며 상하이와 더불어 중국 경제의 대표적인 선진 지역으로 꼽혔다.
 
  소련은 만주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공업시설들을 전리품으로 뜯어 갔다. 수풍댐 수력발전소 설비 반출은 특히 주목되는 것이다. 수풍댐 수력발전소는 1944년 준공 당시 미국의 후버댐에 비견되는 세계 최대급 수준의 수력발전소였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이후 소련의 공업 성장과 관련해 아무 역할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2004년 강진아 경북대 사학과 교수(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중국과 소련의 사회주의 공업화와 전후 만주의 유산〉 논문에서 이런 사실을 분석하고 있다.)
 
 
  소련군은 약탈군이었다
 
1945년 9월 9일 서울 중앙청에 진주하는 미군. 그들은 ‘점령군’으로 왔지만, 그 점령은 일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사진=조선DB
  어떻든 그런 일을 행한 소련군을 해방군이라 하는 것은, 그 말 자체를 우습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 해방이 곧 공산화를 뜻하는 것이라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본의에 비추어 말하자면 가증스러운 왜곡이다. 소련군은 ‘해방=적화’라는 의미에서도 점령군일 뿐만 아니라 변명의 여지없는 탐욕스러운 약탈군이었다.
 
  그럼에도 “소련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주장을 하는 자들은 뻣뻣하다. 소련은 아무튼 ‘해방’을 말했는데, 어떻든 미군은 스스로 포고령을 통해 ‘점령’이라 하지 않았느냐고 한다. 바보가 아니라면 사특(邪慝)한 선동(煽動)이다. 그 포고령의 점령(occupation)은 항복한 일본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한반도는 아직 독립된 나라가 아니었다. 한반도는 아직은 항복한 일본의 옛 영토일 뿐이었다. 소련이 해방군을 운운한 것은 정치적 선전의 언사였으며, 미군의 ‘점령’은 행정적·법적 천명이었을 뿐이었다.
 
  미군의 포고령은 그러면서도 “점령의 목적은 (일본이 조인한)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조선 인민의) 그 인간적·종교적 권리를 확보함에 있다”면서,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 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한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 같은 미국의 논지에도 불구하고 ‘점령’이라는 용어 하나를 이유로 소련의 소위 ‘해방’ 운운에 대비시키는 게 옳은가? 불순한 의도의 말장난 이상이 아니다.
 
  내세우는 말을 그대로 믿어주자면 세상에 사기꾼은 없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사기꾼과 정직한 자를 구분하는 것은 의외로 쉽다. 달콤하고 그럴듯한 말을 앞세우는 자는 대개 사기꾼이다. 속일 의사나 딴마음이 없는 사람은 대개 말투가 무덤덤하고 건조하기 일쑤다. 소련과 미국의 경우에 비추어보면 과연 어떠한가?
 
  어떤 사기꾼도 “나는 사기꾼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기꾼은 언제나 선한 의도와 정직을 가장하고 감언이설을 읊조린다. “나는 악마다”라고 자백하면서 등장하는 악마는 없다. 악마는 언제나 선량한 모습으로 달콤한 소리를 지껄이며 등장한다. 아니 악마는 아예 천사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소련군이 읊조린 ‘해방군’ 운운도 그와 다르지 않다.
 
  공산주의와 그 일당은 내내 갖은 현란한 언사를 읊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 이념의 사기성과 악마성을 가리는 사술(邪術)의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사기꾼의 말에 속으면 결과는 망(亡)이며, 악마의 속삭임에 현혹되면 가는 곳은 지옥이다. 역사는 공산주의가 결국 그런 것임을 증명했다.
 
 
  바보들의 ‘역사의식’
 
  교활한 정상배(政商輩)들이 세상을 농단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농단이 통하게 되는 것은 정상배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허위의식에 젖은 쓸모 있는 바보들이 거기에 기름을 부어준다.
 
  이 바보들은 걸핏하면 ‘역사의식’을 들먹이며 행세를 한다. 하지만 그들이 떠드는 역사의식이란 지식의 수준에선 얄팍하기 짝이 없으며, 관점의 차원에선 철 지난 좌익적 감성 이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 정권의 안팎에는 그런 부류들이 득시글거린다. 그리고 교활한 정상배와 허위의식의 알량한 바보들이 달리 구분할 필요 없이 한 몸이 돼 있다.
 
  이들은 이미 철딱서니 없음과 불순함이 한 덩어리가 된 떼를 이루어 우롱과 기만으로 난장판을 만들어왔다. 그런데 이제 그 행패가 절정이다. 드디어 ‘해방’ ‘점령’을 운위하며 대한민국의 출발선 자체에 난도질하고 나섰다. 그 작태가 계속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꺾고 제압하지 않으면 낙관할 수 없다. 나라의 운명이 결정적 상황을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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