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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이념과 정치

문재인 정권의 거짓말 문제

거짓말 일삼는 정치인과 ‘빠돌이’ 무리가 결합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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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정권의 거짓말’은 그에 대한 견제 기능이 작동하지 않고 붕괴해가고 있다는 게 더 근본적인 문제
⊙ 근대는 정직성을 믿고 기대하는 게 아니라 정직성을 요구하는 규칙을 법제화
⊙ 좌익, 신뢰·정직을 부르주아의 虛僞의식으로 간주… 거짓말 경계하고 정직성 중요하게 보는 생각이 아예 없어
⊙ 자유민주체제의 국민은 거짓말에 속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 現 《미래한국》 편집위원,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2019년 1월 23일 서울 용산역 옥외 전광판에 뜬 문재인 대통령 생일 축하광고. 문재인 정권의 거짓과 오만의 배경에는 광적 지지층이 있다. 사진=뉴시스
  정치인에 대한 상식적 통념이 하나 있다. 거짓말쟁이라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든 그런 인식이 일반적이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게 여기기에 충분한 본보기가 많다. 작금도 그렇지만 거짓말 하면 단연 엄지를 치켜올릴 만한 압권의 예가 일찍이 있다.
 
  “저는 일생에 거짓말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거짓말한 일이 없어요. 이것은 약속을 못 지킨 것이지 거짓말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한 것하고 약속했다가 못 지킨 것하고는 다릅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말이다. 그에 대한 응수도 있다.
 
  “김대중은 숨 쉬는 거 빼고는 모두 다 거짓말이다.”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일갈이다.
 
  사람을 웃게 만드는 공방(攻防)이다. 웃다 보면 “정치는 본질이 거짓말”이라고 여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웃을 수만도 없다. 정치인의 거짓말은 당연하게 여기고 감수해야 하는 게 돼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면 정치인은 거짓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대중은 속을 의무가 있는 것처럼 된다. 그러려니 할 게 아니다. 따져야 할 문제다.
 
  최근 미국의 경우에서도 익히 목도했듯이 정치적 선진국이라 해서 별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언론이 특정 정치 세력과 한 패거리가 되어 행동하는 모습에선 유독 정치인의 거짓말만 문제 삼을 게 아니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에 대한 견제 기능의 작동 수준에는 차이가 있다. 정치적 당파성(黨派性)에 따른 선전·선동에 페이크 뉴스(fake news)가 난무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쪽에 의해 논박(論駁)되는 시스템이 작동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위법적(違法的) 거짓말에 대해선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게 하는 시스템이 작동한다.
 
  미국만이 아니라 대개의 정치 선진국들이 비슷하다. 달리 말하자면 정치적 거짓말에 대한 제도적 견제 시스템의 작동 수준 차이가 정치적 선·후진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선진국이라고 정치인이 거짓말을 안 하는 게 아니지만, 그게 걸리면 버티기가 힘들게 만드는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방자함의 근거는 狂的 지지층
 
  양김(兩金)의 공방은 옛일이라고 웃어넘기고 만다고 해도 작금 문재인(文在寅) 정권에 의해 벌어지는 거짓말 난장판은 그러려니 할 수 없는 현안이다. 물론 여야(與野) 따질 것 없고, 언제고 우리 정치판이 그렇지 않은 적이 있었냐는 반문(反問)이 있을 수도 있다. 하나 이런 식의 일반화는 문제의 회피이며 교묘한 변호가 된다. 지금 문재인 정권의 거짓말 문제는 단지 거짓말을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다. 그에 대한 견제 기능이 작동하지 않고 붕괴해가고 있다는 게 더 근본적이다.
 
  문재인 정권 인물들의 그간 언사들은 가관의 연속이었다. 원전(原電) 문제를 둘러싼 거짓말은 범죄적 수준이다. 북한 관련까지 보면 아연실색하게 된다. 인사청문회도 매번 혀를 차게 만들었는데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였다. 청문회 절차라는 건 그저 지나가는 거짓말 잔치일 뿐이다. “어디서 애써 저런 인물만 골라서 내세우나”는 힐난이 어제오늘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같은 자들이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다 임명됐다.
 
  도무지 뻔뻔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같은 방자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절대다수 의석의 힘 아닌가 하겠지만, 그 전부터 그랬으니 의석수 문제가 아니다. 광적(狂的)인 지지층의 존재라는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은 전남을 방문했다. 문 대통령은 거기서 “48조원 규모 신안해상풍력발전 계획”을 발표했다. 퍼주기 낭비의 규모도 기가 찰 노릇이지만 정치적 의도가 매우 뻔뻔하다. 서울·부산 시장 선거를 앞두고 그 지역 연고의 서울·부산 유권자들을 겨냥한 술수가 엿보인다.
 
  그런데 환영 플래카드가 가관이었다. “우주최강 미남”이라니! 48조나 퍼주겠다니 감격해서라고 하겠지만 희한함을 넘어 기괴하기까지 하다.
 
  바로 이게 문재인 정권의 정치적 방자함의 뒷배다. 문재인 정권의 지지도는 여전히 30~40% 선이다. 그러나 호남 지역을 제외하면 그런 정도의 지지가 전혀 나올 수 없다. 호남에서 70%가 넘는 지지가 나오고 그 연고자들이 무작정 밀어주기에 그나마도 나오는 것이다. 절박성마저 보이는 결합이다.
 
 
  거짓말과 ‘빠돌이’ 현상이 결합하면
 
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짓말 파문 이후 대법원 앞에는 그를 비판하면서 사퇴를 요구하는 조화들이 쏟아져 들었다. 사진=조선DB
  이런 기본적 지지세를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대깨문’이라는 ‘빠’ 집단을 결합시킨 게 문재인 정권의 지지 기반이다. 대중민주주의 정치의 약점이 전면화(全面化)돼 있는 양상이다. 대중민주주의 정치는 비유하자면 ‘극장정치’가 되기 십상이다. 바로 여기에서 ‘빠돌이’ 현상이 발생한다. 문 정권의 경우는 전형적이다. 이 같은 현상은 정치의 건강성을 심히 훼손한다.
 
  극중(劇中) 배우와 실제 배우는 전혀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관객이 그렇듯 정치에서의 대중도 종종 착오에 빠진다. 실제로 정치적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갖춘 인물을 찾고 선택하는 게 아니라 마치 배우를 그 역할의 실재(實在)인물인 양 착각하여 몰입하듯 선택을 하는 것이다. 대중민주주의 과정에서 정치인의 인기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빠돌이 현상이 심해지면 정치의 건강성이 무너지고 민주정 자체도 위험해진다.
 
  에릭 호퍼는 《맹신자들》에서 그런 ‘빠’ 심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추종자들을 끌어들이고 붙들어둘 수 있는 것은 자기발전 욕구를 충족시켜서가 아니라 자기부정 열망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애쓸 가치가 있는 자기발전 목표를 찾지 못한다.… 그들은 개인의 이익을 부패하고 사악한 것, 부정하고 불길한 것으로 여긴다.”
 
  “강인하게 홀로서기보다는 위로를 찾는 데 몰두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런 ‘빠’들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이성적(理性的) 양식(良識)은 더 이상 자리가 없다. 네 편 내 편이 있을 뿐이다. 거짓말임을 알아도 같이 우기기 일쑤다. 거짓말을 일삼는 정치인과 ‘빠돌이’ 무리가 결합하면 개인의 거짓말이 이제 집단적 거짓말이 된다. 거짓말의 집단화는 그냥 거짓말을 한다는 자체에 멈추지 않는다. 아집과 광기로 이어진다. “우리 이니 맘대로 해”라는 방자한 구호는 그렇게 나오는 것이다.
 
 
  정치적 거짓말을 제도적으로 견제하는 게 중요
 
  문재인 정권의 경우에서 적나라하게 보이듯 정치인의 거짓말 문제는 결코 그러려니 하고 넘겨도 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러니 정직한 정치인을 찾아야 한다는 식은 답이 아니다. 문 정권이 하도 양아치 같은 저질 행태를 보이니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갈망이겠지만, 너무 소박하다. 정치 지도자는 어떻든 능력이 전제가 돼야 한다. 능력이 있으면 도덕적 자질은 넘어가도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도덕적 자질에 절대적 비중을 두는 건 또 다른 오판(誤判)이 된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치인이든 평범한 일반인이든 인간은 마냥 정직하거나 늘 속이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그저 불신(不信)해서도 안 되지만 과도하게 믿어서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익(私益)을 위해 타인(他人)을 기만(欺瞞)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규칙이다.
 
  개인적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의 윤리성은 생물학적인 게 아니라 문화적·제도적인 것이다. 올바름을 장려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윤리성의 지탱은 그에 어긋나는 잘못을 금하는 문화의 보편화와 함께 제도의 확립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 관행의 정착과 함께 법적 규칙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법적 규칙을 지탱하는 사법(司法)의 안정성은 정치 과정의 안정성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현실의 정치는 언제나 ‘소음과 격정’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법이 당파적 이해(利害)에 휩쓸리지 않는 불편부당(不偏不黨)함의 엄정성을 지키면 정치는 좀 소란스러워도 괜찮다. 사법이 강건하면 사회적이든 정치적이든 어지간한 소란은 역동성일 수 있다.
 
 
  대법원장이 거짓말을 하다니
 
김명수 대법원장. 사진=조선DB
  물론 법이라고 해서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해석과 판결이 달라지기도 한다. 법리적 판단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여론에 휩쓸리기도 하고, 오판을 할 수도 있다. 타당성에 대한 시비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법의 세계는 정치 세계와 절대적으로 다른 게 하나가 있다. 거짓말의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판결의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어떻든 거짓말 범주의 문제는 아니다. 법관의 자세도 마찬가지다.
 
  법관은 (사적으로는 몰라도) 업무와 관련된 일에선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최근 그런 일이 일어났다. 다름 아닌 대법원장이라는 사람이 공적(公的) 업무와 관련해 대놓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단순한 수준의 거짓말이 아니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수호해야 할 사람이 노골적으로 정치권력 패거리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따지자면 이뿐이 아니다. 김명수(金命洙) 대법원장은 2017년 취임 이래 줄곧 문 정권과 한 패거리의 코드 인사로 일관했다. 사법의 존엄과 독립성이 무너지고 있다. 다름 아닌 그 수장(首長) 자신에 의한 자해적(自害的) 붕괴다.
 
  문 정권의 법무장관들이 그야말로 몰골의 연속이었는데, 사법부마저 이런 꼴이면 법의 존재 자체가 위기다. 법은 정치적 사안과 관련해선 특히 네 편 내 편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 이게 지켜지지 않으면 제도적 과정으로서의 정치는 붕괴한다. 안정적인 제도적 과정이 무너진 정치는 둘 중 하나로 치닫는다. 현존 권력의 힘이 압도하면 독재적 폭정(暴政)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홉스적인 ‘만인(萬人) 대(對) 만인’의 투쟁, 말하자면 내전(內戰) 상태가 된다. 지금 한국 정치는 바로 그런 갈림길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정직성과 계산은 양면의 한 짝
 
  동서 세계 어디든 전근대(前近代) 시대에는 정치인의 도덕적 자질을 먼저 따지곤 했다. 기독교 세계든 유교(儒敎) 세계든 그 나름의 논리로 덕성을 물었다. 인간에겐 갖추어야 할 덕성(德性)이 있으며 그것을 갖출 수 있는 선한 자질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정치 지도자는 그 같은 자질과 덕성을 더 잘 갖춘 존재로 간주되었다. 믿음이기도 했고 주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의 왕과 귀족들의 모습은 달랐다. 부도덕과 타락의 범벅이기 일쑤였다. 성직자들의 경우도 그랬다. 아니 어떤 때는 더 심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위선(僞善)의 체계였다. 당연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지배·피지배와 인간의 도덕성 문제는 범주부터가 별개이기 때문이다.
 
  지배층이라 해서 본래부터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게 타고난 존재일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적 덕성과 선성(善性)에 대한 믿음은 양방향으로 착오를 만들어낸다. 피지배 백성은 지배자가 자신보다 도덕적 자격을 더 잘 갖추었기에 자신을 다스린다고 믿는다. 혹은 그렇게 믿어야 한다. 역으로 정치 지배자는 자신이 피지배 대상보다는 도덕적으로도 더 우월한 자격을 갖고 있다고 믿게 된다. 혹은 그렇게 내세운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그 같은 관념에 큰 변화가 왔다. 물론 한순간에 이루어진 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든 근대 세계는 더 이상 인간 내적(內的)인 자질과 수준을 묻지 않게 되었다. 성선(性善)이든 성악(性惡)이든 모든 인간은 본질적인 수준에서 차이가 없이 평등하다고 간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도덕성이 무가치하거나 낡은 것으로 취급받게 됐다는 게 아니다. 근대 세계는 계산이 모든 것에 앞서기에 인간 본연적 덕성은 뒤로 밀려난 비인간적인 세계가 된 듯이 여기는 발상이 있다. 근대 초기부터 그랬으며 지금도 그 같은 관념이 위세를 부린다. 하지만 그것은 감상적 불평 이상이 아니다. 오히려 근대는 계산이 앞서기에 정직성이 더 중요해진다. ‘정직하지 않은 계산’은 성립될 수 없는 형용모순이며 흔한 말로는 사기(詐欺)다. 그래서 정직성과 계산은 양면의 한 짝이다.
 
  근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하는 명제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1723~1790)가 《국부론》(1776)에서 그 함의와 작동 원리를 설명했다. 애덤 스미스는 그러면서 인간의 이기심(selfishness)이 경제 발전을 가져온다고 긍정했다. “빵집 주인이 빵을 만드는 목적은 소비자들에 대한 ‘자비’가 아닌 개인적 이익 추구이지만 결과적으로 소비자는 빵을 먹고, 주인은 돈을 번다”는 것이다.
 
 
  근대야말로 정직성이 핵심적 덕목
 
  그런데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만 논한 것이 아니다. 그에 앞서 1759년 《도덕감정론》을 내놓았다. 용어만으로 보면 이기심과 도덕감정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정직을 논하는 대목에선 이기심과 정직이 함께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예부터 내려오는 훌륭한 속담은 이러한 상황에서 거의 완전한 진리가 된다.”
 
  애덤 스미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성공은 거의, 항상 그들의 이웃과 동료들의 호의와 호평에 의존한다. 따라서 꽤 균형 잡힌 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거의 얻어낼 수 없다.”
 
  자신의 성공이라는 “이익을 위해 정직성을 지킨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래서 “상인은 자신의 평판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며 모든 계약을 꼼꼼하게 지키려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같은 신뢰의 토대가 되는 정직과 평판은 사회 지도층을 비롯해 상인과 일반 대중 모두에게 성공에 기여하는 사회적 자본이 된다고 보았다.
 
  계산은 이른바 감성적 소통의 영역은 아니다. 그 자체로는 그저 독립적인 이성적 행위다. 그런데 타산(打算)이 되면 관계 앞에 놓인 게 된다. 이성에 대한 신뢰를 전제한다면 이성적 판단으로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합리적 타산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다. 칸트의 실천이성론에 따라 “네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언제나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도덕법칙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땅히 그러해야 할 당위일 수는 있어도 반드시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이 갈파했듯 “이성은 감성적 정념의 노예”이기 일쑤다. 그 때문에 인간의 실천이성적·도덕적 능력도 늘 한계 앞에 놓인다. 그래서 그에 대한 믿음을 곧바로 현실세계의 원리로 삼으면 위선과 기만, 나아가 사기를 피하지 못한다. 인간은 도덕적일 수 있고 정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믿어져야 하는 게 아니라 요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면의 덕성을 그저 믿는 게 아니라 드러나는 행위에 대해 타당성과 책임을 묻는 것이다.
 
 
  정직성은 믿는 게 아니라 요구되어야 한다
 
  근대와 전근대의 차이가 바로 거기에 있다. 서구(西歐) 기독교 세계의 경우를 보면 전근대 가톨릭 시대의 경우 죄를 고백하고 사제(司祭)를 통해 용서의 은총을 받는 고해성사(告解聖事)가 도덕적 구현 과정에서 중요했다. 그런데 이것이 당치 않은 타락으로 이어졌다. 면죄부(免罪符)다. 바로 이게 계기가 되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더 이상 고해성사를 교회의 성례전으로 삼지 않게 되었다.
 
  개신교에도 ‘죄의 고백과 용서’라는 의식이 있다. 하지만 개별적인 고해와 사제에 의한 용서가 아니라 신도 전체 예배의 일환이다. ‘죄의 고백과 용서’가 ‘신도와 사제 그리고 신(神)이라는 삼자(三者)관계’가 아니라 ‘신도 개개인과 신과의 일대일(一對一)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비종교적 각도에서 보면 개개인의 양심이 핵심적 의의를 갖는 게 된다. 양심이란 것은 타인이 짐작할 수는 있어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이제 측정할 수 없는 내면을 묻고 따지지 않고 드러내는 행위에 대해 그 타당성과 결과의 책임을 묻게 된다.
 
  근대는 정직성을 믿고 기대하는 게 아니라 정직성을 요구하는 규칙을 법제화한다. 정상참작이라는 게 없는 게 아니지만 근대적 법질서에는 ‘77번이라도 용서를 반복하는’ 식의 온정은 없다. 그래서 어떤 점에선 더 엄격하고 냉정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종교적 혹은 인치적(人治的) 온정의 전근대 시대가 오히려 가혹함의 시대였다. 지배층은 자신에 대해선 위선적이면서 피지배층에 대해선 가혹했다. 이것은 기독교 세계가 아닌 동양의 유교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좌익은 이념 자체가 거짓말
 
애덤 스미스
  하지만 좌익적 관념에 젖은 이들은 이런 점을 보지 않는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따뜻한 공동체적 인간미는 다 사라졌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갖은 복잡하고 신랄한 말로 근대를 비판한다. 근대 자본주의 세계를 비인간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그 비인간성을 극복한다고 설쳐댔다. 마르크스 이래 오늘날까지 그 같은 언설과 행태는 끝이 없다.
 
  이 같은 좌익적 관념은 특히 정직성과 관련해서 잘못을 피하지 못하게 만든다. 좌익사상은 근대적 계산의 문화를 그저 비인간적인 타산으로 여긴다. 이익의 추구를 이기적 탐욕으로 비난할 뿐 “신뢰의 평판을 위해 계약을 꼼꼼하게 지킨다”는 상인정신과 “이익을 위해 정직성을 지킨다”는 근대적 도덕감정의 가치를 전혀 헤아리지 않는다. 그들은 정직성이라는 걸 그저 이기심 추구를 위한 부르주아적 허위의식으로만 간주한다.
 
  좌익들이 거짓말에 거리낌이 없는 행태를 보이는 게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사고(思考)구조 안에 거짓말을 경계하고 정직성을 중요하게 보는 가치관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정치인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선 잘못 설정된 프레임이다. 정치적 거짓말 문제에서 이념적 본질의 문제를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행태만으로 보자면 정치인의 거짓말에 좌우가 따로 있지는 않다. 하지만 좌익은 이념 자체가 거짓말이다. 행태상의 문제는 애덤 스미스가 통찰했듯이 스스로를 위해 정직의 평판을 유지하려는 긴장과 법적 제도적 압박에 의해 견제가 된다. 하지만 이념 자체가 거짓말인 경우는 긴장과 압박을 수용하는 게 아니라 그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바꾸어버리려 하게 된다.
 
  모든 좌익 정치인이 출발부터 의도적 거짓말쟁이인 것은 아니다. 그 이념은 거짓말의 체계이지만 그의 정치적 행위의 시작은 그게 진실이라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덕감정을 부르주아적 허위의식으로 여기는 좌익 이념의 독소(毒素)는 결국에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도덕 부재(不在)로 치닫게 만든다. “심연(深淵)을 들여다보다 그 심연의 광기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주화입마(走火入魔)다.
 
 
  ‘사람이 먼저’라는 거짓말
 
  이런 점에서 보면 문재인 정권의 거짓말 난장의 행태는 그 좌익적 특성의 문제와도 무관치 않다. 어떤 점에선 이게 더 큰 문제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문재인 정권과 그 세력들이 걸핏하면 들고나오는 감성적 슬로건의 문제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이 언설은 얼핏 그럴듯하게 다가오고 짐짓 따사롭게 들린다. 하지만 이것은 전근대적 온정주의와 그런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좌익적 감수성의 표현이다. 온정과 배려는 오히려 해악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삶도 그렇지만 정치이념은 더 그러하다. “사람이 먼저다” 운운은 우선은 일종의 위로이지만, 결국은 속임수가 된다.
 
  그러나 한번 그런 길로 들어서면 그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거짓의 구호를 앞세운 자들과 그에 엮인 대중 모두가 그렇다. 그리하여 고의에 바보가 함께 놀아나는 거짓말의 난장으로 빠져든다. 지금 문재인 정권과 그 추종 빠돌이 무리의 모습이다.
 
 
  돈만큼 인간을 평등하게 만든 게 없다
 
  우리는 매우 자주, 아니 거의 매일 돈에 대한 부정적 언설들을 접한다. 돈 싫다는 사람 없음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도 돈을 저주하는 얘기가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돈밖에 모르는 더러운 세상’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황금만능주의’ 운운이다.
 
  저마다 ‘돈이면 뭐든 다 살 수 있는 황금만능주의’를 개탄한다지만, 그건 개탄할 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돈은 교환(交換)의 매개물이다. 돈은 교환이란 관념의 탄생이 전제다. 교환이 있기 전 사람들은 필요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다면 그냥 뺏었다. 약탈이다. 교환의 관념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상황은 바뀐다. 최초에는 물물교환(物物交換)이다. 그러다 교환의 매개(媒介) 수단인 돈이 탄생한다. 이제 사람들은 필요하다고 그냥 마구 뺏는 게 아니라 ‘사고판다’. 이게 나쁜 것인가? 돈의 탄생은 인류문명사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일대 전진이요 도약이다.
 
  “사람이 먼저다”에 현혹되는 이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도 솔깃해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저자의 또 다른 책 제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골똘히 생각하면 정의(正義)가 구해지는가? 오히려 돈으로 사는 게 제대로 보장되는 게 정의로운 것 아닌가?
 
  황금만능주의는 욕해야 할 게 아니다. 그것은 어떤 점에선 근대적 평등의 다른 표현이다. 신분제의 시대는 신분의 권력이 돈을 앗아갔다. 그러나 황금만능주의라고 욕하는 자본주의 시대에선 모두가 돈 앞에 평등하다. 반면 돈을 없애버리고 평등을 실현하겠다고 설쳐댄 공산주의는 모두를 권력에 따른 불평등으로 서열화했다. 평등이 좋고 올바른 것이라 한다면 인류 역사 이래 돈만큼 인간을 평등하게 만든 게 없다.
 
  물론 이 같은 진실은 쉽게 헤아려지지 않는다. 인간은 마냥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감성의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성적 구호에 놀아나면 거짓말의 밥이 된다. 정상배(政商輩)의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민 스스로가 속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자유민주 체제의 국민은 거짓말에 속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다.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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