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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이념과 정치

權力은 理念에서 나온다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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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요틴 앞세워 공포정치 하던 로베스피에르, 폭주 끝에 내부 반발로 자멸
⊙ 공수처, 로베스피에르의 기요틴, 레닌의 체카 역할 할 것
⊙ 1987년 이후 각계에 포진한 좌파가 만든 ‘프레임 정치’가 문재인 정권 버팀목
⊙ 보수세력은 文 정권의 자멸을 승리로 연결시킬 이념적 준비 되어 있나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 現 《미래한국》 편집위원,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2020년 12월 9일 국민의힘 의원들은 공수처법 개정안 강행 처리에 반대하는 농성을 벌였지만, 다음 날 민주당은 공수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사진=조선DB
  기요틴(guillotine)이라는 게 있었다. 프랑스혁명 당시 맹위(猛威)를 떨친 사형집행 도구다. 단두대(斷頭臺), 목을 잘라 죽이는 것이다. 느낌만으로도 서늘하다. 그러나 명분은 따뜻했다. 사형수(死刑囚)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것이었다. 사용 주창자는 조제프 기요탱이라는 의사였다.
 
  기요탱은 혁명세력의 일원이기도 했다. 프랑스혁명 첫해인 1789년 제3신분 대표자들에 의해 결성된 국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단두대라는 처형기계 도입을 주창한 것은 인도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는 본래 사형제 폐지론자였다. 하지만 사형 폐지가 안 된 상태에서라도 “모두에게 공평하고 고통이 덜한 처형 방법이 필요하다”며 그 도입에 앞장섰다.
 
 
  평등하고 자비로운 기요틴
 
  본래 프랑스에서 사형집행 방법은 두 가지였다. 귀족이라면 목을 자르는 참수형(斬首刑), 평민은 목을 매는 교수형(絞首刑)이었다. 참수형은 귀족에게 주어진 특권(特權)이었다. 단숨에 목을 자르는 게 고통이 덜하다고 여겨진 것이었다. 단두대는 말하자면 그런 특권을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형수에게 공평하게 주자는 프랑스혁명의 평등이념에 입각한 처형 기계였다.
 
  1792년 4월 25일 단두대에 의한 최초의 사형집행이 이루어졌다. 상습 노상강도로 악명을 떨친 범죄자였다. 그간의 숱한 악행(惡行)에도 불구하고 긴 고통 없이 단숨에 목을 잘라주는 자비가 베풀어졌다. 단두대의 무거운 칼날이 순식간에 일을 끝낸 것이다.
 
  당시 단두대의 이름은 아직 기요틴은 아니었다. ‘루이종’ 또는 ‘루이제트’라고 불렸다. 본래 만든 사람인 앙투안 루이라는 외과의사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나중에 기요틴이라 불리면서 기요탱이 발명자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는 그저 사용 주창자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결국 그렇게 굳어진 것은 단두대 처형 소식이 줄을 잇고 그 이야기가 연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였다.
 
  옛날에도 사형은 잦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곧 잊히곤 한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는 달랐다. 곧바로 잊히기 힘든 유명인들이 하나둘 목이 잘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땐가부터 처형 소식이 매일 이어졌다. 하루에 20명이 목이 잘리기도 했다. 프랑스혁명의 여파, 특히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恐怖政治) 때문이었다.
 
  프랑스혁명의 공식 발발일은 1789년 7월 14일이다. 바스티유 습격이 있었던 날이다. 이후 왕정이 무너지고 혁명세력의 시대가 시작됐다. 혁명의 진행과 함께 혁명세력은 자코뱅과 지롱드라는 양대 당파(黨派)로 분열했다. 1792년 9월 20일 출범한 국민공회에서 자코뱅과 지롱드는 좌우로 나뉘어 앉았다.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의 시작이었다. 거듭된 진통 끝에 1793년 1월 21일 좌익인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가 집정관이 되었다.
 
  그런데 이날은 또 다른 기록을 남긴 날이기도 했다. 바로 루이 16세가 처형된 날이었다. 기요탱처럼 로베스피에르도 본래 사형제 폐지론자였다. 그러나 그는 루이 16세의 처형을 요구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외 왕족과 귀족층 모두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결국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집행관은 루이 16세의 잘린 목을 군중 앞에 내들어 보였다. 로베스피에르는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렇게 왕을 처형하고 집정관이 된 로베스피에르는 같은 해 3월 10일 혁명재판소를, 4월 7일에는 공안위원회(公安委員會)를 설치했다. 그러더니 5월 25일 민중봉기를 선동했다. 우익인 지롱드파를 완전히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상퀼로트(Sans-culotte)라는 무리가 있었다. ‘퀼로트를 입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파리의 서민층을 일컫는 칭호였다. 귀족처럼 무릎 아래를 여미지 않고 긴 바지를 그냥 내려 입는 데서 유래했다. 상퀼로트는 열광적인 혁명 지지, 특히 자코뱅 지지 세력이었다. ‘어쨌든 혁명, 무조건 혁명’이요 ‘대가리가 깨져도 자코뱅’이었다.
 
  이 상퀼로트들이 6월 2일 로베스피에르의 선동에 호응하여 국민공회를 포위했다. 그런 상태에서 자코뱅파는 지롱드파 의원 전원에 대해 추방 체포를 의결했다. 그리고 이날 상퀼로트의 지지를 등에 업은 로베스피에르는 최고지도자로 옹립됐다. ‘우리 피에르 맘대로 해’였던 셈인데, 자코뱅과 로베스피에르는 그렇게 했다.
 
  6월 23일 일명 ‘자코뱅 헌법’으로 불리는 새 헌법을 제정했다. 공안위원회에 더 큰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공안위원회는 이제 독재적 통치기구가 되었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재판소를 앞세워 반대세력을 제거해나가기 시작했다. 혁명반대파는 물론 애초 혁명에 뜻을 같이했던 세력 가운데 온건파들도 그 대상이었다. 그냥 몰아내기만 한 게 아니라 죽였다. 일컬어 ‘공포정치’였다.
 
 
  恐怖政治
 
공포정치를 자행한 로베스피에르.
  공포정치는 영어로는 ‘Reign of Terror’라고 한다. 하지만 원래의 프랑스어로는 ‘La Terreur’ 그냥 ‘테러’다. 이 Terreur는 오늘날 때때로 접하게 되는 테러, 테러리즘, 테러리스트 등의 어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지칭은 비판자들이나 반대파들이 붙인 명칭이 아니었다. 공포정치를 자행한 당사자들이 붙인 것이었다.
 
  1793년 9월 5일 국민공회에서 혁명파 변호사 한 명이 이렇게 발언했다.
 
  “공포를 오늘의 법으로 만들자. 평등의 칼날이 만인의 머리 위로 휘날리게 하자.”
 
  그리하여 이날은 공포정치의 공식적 개시 선언일로 기록되게 되었다.
 
  그 선언대로 체포, 처형이 줄을 이었다. 9월 중순~10월 중순까지 15명이던 사형이 다음 한 달간에는 65명, 4배로 늘었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바로 그 무렵인 10월 16일 단두대에서 참수됐다. 고삐가 완전히 풀렸다. 처형의 증가세는 폭증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1794년에는 2월 중순~3월 중순까지 116명, 3월 중순부터 한 달간 155명, 4월 중순부터 한 달간 354명이었다.
 
  파리에 혁명재판소가 설치된 1793년 4월부터 1794년 6월 10일까지 약 1년간 1251명이 처형되었다. 약식재판이 허용된 6월 11일부터 7월 27일까지는 1376명을 처형했다. 불과 47일 만에 그 전 1년간 처형수를 넘어선 것이다.
 
  공포정치는 1년여간(1793년 9월 5일~1794년 7월 27일) 이어졌다. 그 기간은 공포와 광기(狂氣)에 진저리를 치기에 충분했다. ‘인도적이고 평등한 기계’에 의해 수만 명의 목이 잘렸다. 그러면서 주창자인 기요탱의 이름이 악명 높은 처형도구의 명칭으로 기억되게 만들었다. 저주스러운 기억은 심지어 기요탱조차 결국 기요틴에 의해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낳았다. 그러나 기요탱이 기요틴에 의해 죽은 건 아니었다. 그는 76세에 자연사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자연사하지 못했다. 그는 1794년 7월 28일 자신이 휘두르던 기요틴에 의해 목이 잘렸다. 이 사건을 ‘테르미도르의 반동(反動)’이라고 한다.
 
 
  “다음은 너의 차례”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일으킨 인물들은 본래 반(反)로베스피에르 세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자코뱅의 일원이었으며, 공포정치를 열렬히 수행하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반로베스피에르가 된 원인은 로베스피에르의 폭주 때문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하면서 1794년 봄 본래 자코뱅파 동지였던 에베르파와 당통파도 숙청했다. 4월 5일 처형된 당통은 특히 마라,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프랑스혁명의 3거두(巨頭)로 불리기도 한 인물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 당통을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 처형했다. 당통은 기요틴을 향해 가는 도중 이렇게 말했다.
 
  “로베스피에르, 다음은 너의 차례다!”
 
  동료세력들까지 처단하기 시작하자 그에 대한 반발이 움트는 건 필연이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7월 26일 로베스피에르가 국민공회에 나타나 반혁명파를 숙청하겠다고 말했다. 당통에 뒤이은 숙청 예고에 공포와 저항의 기류가 감돌았다.
 
  위험을 느낀 일부 인물이 다음 날인 7월 27일 밤 전격적으로 로베스피에르파를 습격, 로베스피에르와 그 친위(親衛) 인물들을 체포했다. 그러고 나서 다음 날인 7월 28일 곧바로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모두를 기요틴으로 처형했다. 불과 3일 만에 이뤄진 전격적인 행동이었다.
 
  로베스피에르를 처단한 이들은 반혁명세력도 반자코뱅파도 아니었다. 한때는 모두 로베스피에르의 동료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위협받는 상황을 감내할 수는 없었다. 생존본능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확고한 신념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비타협적 확신은 광기의 폭정으로 치닫기 일쑤다. 광기의 폭정은 안정적으로 이어질 수 없다. 대개 그 스스로에 의해 자멸의 운명을 맞는다. 로베스피에르의 ‘우리 피에르 맘대로’도 그렇게 종언(終焉)을 고했다.
 
 
  文 정권의 기요틴, 공수처
 
  2020년 12월 10일 공수처법 개정안이 최종적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법사위 날치기 뒤 예정된 수순이었다. 야당의 공수처장 임명 비토권을 무력화(無力化)시킨 개정이었다. 이로써 공수처는 이제 이 정권의 무기로 본격 등장할 채비를 갖추게 되었다.
 
  공수처는 한마디로 파쇼적 기구다. 자유민주체제 국가 가운데는 어디에도 그런 게 없다. 비슷한 걸 찾자면 중공의 국가감찰위원회가 유일하다. 거슬러 오르면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의 ‘전(全)러시아 비상위원회(Cheka)’가 있다. 레닌이 기존 법체제를 무시하고 만든 수사기관으로 기소에서 재판까지 마음대로 했다. 이후 모든 공산 전체주의 국가가 이를 흉내 냈다.
 
  행태를 예상해보자면 더 거슬러 올라 자코뱅 로베스피에르의 경우가 눈에 띈다. 혁명재판소와 기요틴, 로베스피에르는 이를 마구 휘둘렀다. 이 정권의 공수처는 바로 그 같은 행태를 예상케 한다. 문 정권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쳐낸 뒤 공수처를 마치 로베스피에르의 기요틴처럼 휘두를 셈인 것이다.
 
  하지만 내 칼이라도 멋대로 휘둘러대다간 그 칼에 베일 수 있다. 기요틴을 휘둘러대던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파는 결국 그 칼에 의해 목이 잘렸다. 문 정권 이 발탁·임명한 검찰총장이 자신들을 수사한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 자신의 범죄적 행각 때문이었다. 공수처는 어떨까? 따지자면 공수처는 문 정권의 기요틴이다.
 
 
  ‘프레임 정치’
 
  문재인 정권의 행태는 이미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의 폭주를 뺨친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에게는 그나마 이상주의(理想主義)라도 있었다. 그런데 문 정권의 행태에선 그런 면모도 없다. 그 파렴치(破廉恥)를 보면 폭정이라는 말도 좀 아깝다. 정치적 차원도 아닌 범죄 집단의 행패가 연상된다. 윤석열은 문재인 자신이 발탁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쳐내겠다고 난리다. 자신들의 각종 범죄적 부패에 대한 수사를 피하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광기가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저열하다.
 
  문 정권은 그 저열함도 혀를 찰 노릇이지만, 국정파탄도 이미 따질 수준을 넘어섰다. 나라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있다. 이런 정도면 전 국민적 반발에 직면해야 마땅하다.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 의미 있는 지지율이 아예 없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문 정권은 지지율 따위는 고비를 넘기고 적절히 마사지를 하면 된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럴 만도 하겠다. 지지율이 추락하고 있다지만 달리 보면 여전히 그만한 지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게 오히려 놀랄 일이다. 완강한 버팀선이 있다. 지역적 지지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또 다른 게 있다. 정치적 프레임이다. 이 정권 세력이 앞세우는 정치적 담론의 프레임이 어느 땐가부터 확연하게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장악력을 갖게 됐다. ‘민주’를 필두로 하더니 그것을 뒤따라 ‘진보’ ‘정의’ ‘평화’ 등이 행세를 하기 시작하고 드디어는 지배적 담론의 위치에 올라섰다. 문재인 정권 무리가 파렴치한 범죄적 면모를 드러내면서도 다른 한편 여전히 행세를 하고 버티는 건 그 덕분이다.
 
 
  87체제 30여 년
 
2019년 8월 2일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결정을 규탄하는 자유한국당 의원들. 보수정당도 反日정서에 편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진=조선DB
  이런 양상은 갑작스레 이뤄진 게 아니다. 짧게 잡아도 87체제 이래 30여 년이라는 한 세대의 세월에 걸쳐 진행된 것이다. 우선 민주화에 의한 87체제 수립이라는 논리가 당연시되면서 민주-독재라는 프레임과 민주가 절대가치화되었다.
 
  민주주의는 약점이 없는 게 아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이전 시대가 폄하되기만 해서도 안 된다. 위대한 성취의 시대였으며 결코 암흑의 시대도 아니었다. 정치적으로도 점진적 성장의 시대였다. 그리고 민주는 정치적 가치가 아니라 섬세히 다루어져야 하는 정체(政體)다.
 
  민주는 자유라는 가치와 결합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포퓰리즘의 위험도 늘 상존한다. 이면에서 위선과 불순의 독초가 자라날 수 있다. 그러나 민주가 신성한 가치의 자리에 오르면서 그런 문제들을 따질 수 없게 되었다.
 
  한편 87체제 수립 이후 좌파적 가치가 전면적으로 대두하여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진보, 정의 등은 결국 좌파적 가치의 수식어였다. 평화도 마찬가지였다. 반대하기 힘든 정치적 올바름의 위력을 동반하고 있었다.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전교조가 급성장하며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반박하기 힘든 무비판적 상황 속에서 좌파적 가치가 전 사회, 전 분야로 퍼져갔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이 전교조의 영향으로 물들어갔다. 보수우파 진영은 우려를 하기는 했다. 그러나 심각해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쯤은 민주화 개방의 시대로선 당연하다 여기곤 했다. 그런 만큼 보수우파적 가치를 치열하게 천착하고 설파하는 것도 소홀히 했다.
 
  습관적으로 이어져온 ‘민족’ 논리도 있었다. 거기에는 통상의 좌파적 가치 이상으로 위험한 요소들이 있었다. 그러나 타성적(惰性的) 방치가 이어졌다. 이 같은 방치로 ‘민족’은 ‘평화’라는 논리와 함께 북한에 대한 경계심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친북’의 발호도 방치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일본에 대해선 퇴행적(退行的) 반일(反日)선동이 여전히 위세를 떨칠 수 있는 양상이 이어졌다. 보수우파 진영은 이에 대해 적극 맞서지 못했다. 기성 보수정당은 특히 더 그러했다. 오히려 반일정서에 편승하기 일쑤였다.
 
 
  이념의 싸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문재인 정권의 지지구조를 살펴보면 전체 지지율이 오르든 내리든 언제나 40대가 돌출적으로 높다. 바로 87체제 30여 년간 전교조 등을 필두로 한 세력들의 이념세례에 물들어온 대표적인 세대다.
 
  보수우파 진영, 특히 기왕의 정당은 이 문제에 전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문제의식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자세도 안이했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당락과 입신영달에만 몰두했을 뿐이었다. 지역구 예산 확보 성과에 몰두하면서 청년세대의 이념교육에는 노력이 없었다. 관심도 없었다. 아니 관심을 가질 만한 안목의 소양 자체가 없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고, 문 정권은 분명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 결정적이지 않다. 대안(代案)세력이 국민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도 나쁘지만 무엇보다도 담론의 힘이 턱없이 약하다. 어느새 우리 사회의 지배적 프레임이 돼 있는 저들의 담론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다.
 
  호소력 있는 반대 담론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치열한 노력으로 대중을 설득해내야 한다. 결국 이념(理念)의 싸움이다. 그러나 이전의 보수우파 정권들은 이를 소홀히 했다. 이념이 아니라 실용(實用)이 중요하다고 했다. 확장을 위해서라며 좌파적 정책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막연한 국민통합론에 몰두하기도 했다. 결국에는 저들 좌파 진영의 담론에 지나지 않는 논리를 마치 공통의 것인 양 대하기도 했다. 그것을 관용적이고 통합적인 자세로 여겼다. 선거 때면 늘 중도(中道) 확장 운운의 논리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다 알량한 정쟁적(政爭的) 갈등으로 탄핵난동에 굴복하고 편승해 자멸(自滅)했다. 그리하여 반역적 세력에게 국권을 탈취당하는 절체절명의 과오를 범했다.
 
  이것은 단순히 기성 정치세력만의 과오가 아니었다. 지식인·언론인 등을 비롯해 이 나라의 정신적 양식을 지키고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할 이들이 모두 그랬다. 이념적 천착과 무장 자체부터가 사실 빈약했다. 위기가 왔을 때 맞서는 결기도 허약했다. 그 때문에 불량한 무리의 강탈을 막아내지 못했다. 아니 그 이전에 대한민국을 강탈한 그 세력의 악랄함과 사악함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념적 실력 있어야
 
  국민의힘은 걸핏하면 사과 타령이다. 횟수를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러나 그 사과 행각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당연하다. 대중은 정치인·정당의 사과를 절대로 진실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유지하기 위한 알량한 행각으로 볼 뿐이다. 더욱이 우습게 알게 된다.
 
  대중이 정치인·정치세력에게 원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지도자다. 사로잡고 이끄는 힘이 있어야 한다. 내용이 있어야 하며 결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비겁해 보이거나 알량해 보이면 더 무시당한다.
 
  정치 시즌, 다시 말해 선거만 다가오면 정치공학적 언설이 기승을 부린다. 정치공학이 쓸모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념적 원칙의 기초가 없는 정치공학은 유의미한 결실을 낳을 수 없다. 진짜 필요한 정치공학은 사과 타령은 물론 중도 타령도 얄팍해 보일 뿐임을 헤아리는 것이다.
 
  결국 정치공학 이전에 이념적 실력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단순한 물리적 덩어리가 아니라 이야기의 존재다. 개인이든 집합이든 인간은 이야기 속에 살아간다. 달리 말하자면 역사다. 개인에겐 개인사가 있고 집단에겐 또 그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 인간과 인간의 정신적 교감이란 스토리텔링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념도 이야기다. 이야기가 개념으로 다듬어지면 이념이 된다. 개념을 갖추지 못한 이야기는 이념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을 갖추지 못하고 추상에만 머무는 이념도 힘이 없다. 이념은 대중적으로 전달될 때는 추상을 벗어나 다시 이야기가 돼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대중이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기 시작하면 ‘이념-이야기’는 최종적으로 동의와 승인을 획득한 힘이 된다. 바로 권력이다.
 
 
  “적이 실수하고 있을 때 말리지 마라”
 
  마오쩌둥(毛澤東)이 “권력은 총구(銃口)에서 나온다”고 한 말은 1938년 국민당과의 2차 국공합작 무렵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공산당에선 국민당에 대한 ‘조건부 복종론’ ‘대화우선론’이 대두되고 있었다. 그때 마오쩌둥은 공산당이 기본적 군사력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했다.
 
  이 언급은 통속적으로는 마오쩌둥과 중공당의 흉측한 본색을 말해주는 것임과 동시에 냉혹한 정치공학적 언명으로 읽히곤 한다.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그 언명은 공산당이라는 이념집단을 전제로 한 것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총은 그냥은 단지 도구일 뿐이며 갖는 주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사냥꾼이 가지면 사냥총이지만 정치집단이 가지면 정치적 도구가 된다. 물론 그 정치집단의 정당성의 문제는 별개다. 어떻든 총구, 즉 군사력의 권력적 발현도 결국에는 그에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는 정치이념이 전제이며 원천이다. 그래서 결국 권력은 이념에서 나오는 것이다.
 
  전쟁(과 정치)에서 가장 흔한 결말은 장렬한 대결 끝의 승패가 아니다. 가장 많은 경우는 한쪽의 자멸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적이 실수하고 있을 때 말리지 마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쟁(과 정치)은 시합이 아니다. 그래서 적의 자멸이 곧바로 자신의 승리가 되는 게 아니다. 전쟁(과 정치)에서의 승리는 오직 그것을 굳히고 지킬 수 있는 준비의 결과로만 주어진다. 적의 자멸은 그저 기회일 뿐, 자신의 준비가 없으면 승리는 없다. 정치에서의 승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는 이념적 준비다. 이념적 실력을 강화하고 그 이념으로 대중을 사로잡아나가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은 반대세력의 공격으로 무너진 게 아니라 스스로 먼저 자멸해갔다. 이 정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폭주하는 모든 세력은 그런 운명을 맞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을 승리로 맞을 준비가 없으면 기회는 온다 해도 스치고 지나가게 될 뿐이다. 이것은 얄팍한 정치공학적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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