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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4·19혁명 주역 이영일 前 의원의 ‘혁명과 나, 그리고 호남’

“이승만 박사는 4·19로 하야했으나 대한민국 세우고 나라다운 나라 만들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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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독재정권 타도에 앞장… 5·16 당시 민족통일연맹사건으로 체포
⊙ “이승만, ‘前 민주주의 시대의 한국’을 ‘민주주의 시대의 한국’으로 이행시키는 과도기 대통령”
⊙ “박정희는 독단적 권력행사가 많았지만 主權在民 부정하지 않아”
⊙ “전두환 정권이 공매처분 직전의 유신 말기 중화학공업을 살려내”

李榮一
1939년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동국대 행정대학원 수료. 호남대 명예법학박사 / 3선 국회의원(11·12·15대),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장, 민정당 전두환 총재 비서실장,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 국토통일원 통일연수원장,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 한중문화협회 총재 등 역임 / 저서 《분단시대의 통일문제》 《80년대와 한국정치》 《햇볕정책의 종언》 등
4·19혁명에 참여했던 이영일 전 의원.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이영일(李榮一·81)은 4·19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한 해의 끝자락이지만 올해가 4·19 60주년이다.
 
  안타깝게도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여서 60주년 행사는 없던 일이 되었다. 대대적인 행사를 계획한 ‘혁명’ 동지들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나마 지난 6월 19일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가 서울 광화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50여 명의 동문을 모아놓고 조촐한 학술 세미나를 가졌다. 이날 기조 발제자가 이영일이었다.
 

  이영일. 1939년 9월생이다. 전남 함평군 해보면이 출생지. 함평 이씨의 명문가 집안으로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이 한때 은거한 ‘이참봉’댁의 후손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한글을 배웠다. 교과서도 없이 담임의 판서로 배운 한글이지만 1학년 때 한글을 깨치고,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들의 문자 해독을 도와주기도 했다.
 
  초등 2학년 때 광주로 전학해 광주서석초와 광주서중, 광주일고를 거쳐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서석초와 서중 시절, 국민의힘 김종인(金鍾仁) 비대위원장과 같은 반이었다.
 
  대학 3학년 때 4·19학생혁명 대열에 참가하면서 학생운동에 투신했고, 그 후에 언론계(동양통신), 국가공무원(국토통일원), 3선 국회의원, 대학 초빙교수 등을 두루 거쳤다. 스스로 “지금 원외(院外)지만 한국 정치의 방청석에 앉아 세상 하직할 날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살아갈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한다. 지난 11월 2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외신기자 클럽에서 그를 만났다.
 
 
  “4·19는 살아 움직이고 있다”
 
지난 6월 19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4·19 60주년 학술세미나에서 이영일 전 의원이 기조 발제자로 참여했다.
  “코로나19 파동에 휘말려 제대로 된 4·19 기념식 한번 못 하고, 60주년을 기념하지 못한 것이 몹시 서운했어요.”
 
  당시 대학 3학년 때 이승만(李承晩) 정권 타도에 앞장섰고, 5·16 후에는 민족통일연맹사건으로 체포되어 혁명재판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4·19에 유공(有功)한 학생이라고 해서 1년 후 석방되었다. 겨우 졸업장을 손에 들었지만 중앙정보부 신원조회의 덫에 걸려 10년 가까이 취업할 수 없었다. 출옥과 퇴학, 복학, 실업으로 이어지는 궁핍한 상황이었다.
 
  월간 《사상계》 등지에 글을 기고하면서, 대학연구실과 서울대 도서관의 한 모퉁이에 앉아 신생국의 근대화 연구에 나름 열정을 쏟았다. “4·19와 5·16, 그리고 세계의 주변국과 개도국을 비교 연구하면서 이승만과 박정희(朴正熙)를 바라보는 시각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고백한다.
 
  “흔히 사람들은 4·19를 60년 전에 있었던 역사의 한 사건으로 간주하면서 이미 끝나버린 전설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아직도 4·19정신은 우리 한국 사람들의 DNA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불의(不義)·부정(不正)에 항의하며 독재정권을 몰아내면서 나라의 주권자가 바로 국민 자신임을 체감한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는 2019년 10월 3일과 9일 광화문을 가득 메운 비폭력 대중시위의 물결을 지켜보면서 “아직도 4·19는 우리 역사 현장에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실감했다”고 덧붙였다. 촛불시위가 아닌 태극기 물결에 방점을 찍었다.
 
 
  4·19, 革命이냐 義擧냐
 
  ― 4·19로 수립된 정권은 혁명의 주체였던 학생이 아니고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이었습니다. 혁명의 주체와 정권의 주체가 달랐던 것이죠. 4·19가 혁명이냐 의거냐를 명확히 판가름 짓지는 못했는데 무엇으로 부르기를 원합니까.
 
  “4·19 당시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정권을 탐해서가 아니라 불의·부정에 항의하기 위한 자발적·비폭력 시위인 점에서 의거(義擧)라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정권 교체를 가져왔기에 혁명이라 불러야 합니다.
 
  한 가지 짚어야 할 점은 5·16쿠데타를 주도한 군인들이 ‘이승만 타도를 위해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먼저 궐기했다’고 말합니다. 제가 JP(김종필)한테 직접 들었어요. 《5·16군사혁명사》에도 그런 진술들이 있어요. 학생보다 군인이 거사를 먼저 일으켰다면 이승만은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학생들의 정의로운 궐기와 피 앞에 이승만이 손을 들었으니까요. 5·16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학생혁명으로 정권이 민주당으로 교체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4·19만을 하나로 떼서 보기보다 1960년의 한국 상황을 놓고 4·19로부터 5·16에 이르는 1년2개월의 시간 흐름을 혁명 과정으로 이해하는 안목을 갖고 평가해야 4·19혁명을 이해할 수 있어요.”
 
  ― 개인적으로 4·19 이전과 이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셨습니까. ‘학생운동에 나섰다가 폐인이 되었다는 말을 듣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22세 나이에 혁명재판을 받고 옥중에서 인생을 학습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어요. 자유당 부정선거의 원흉이라는 분들이나 혁신계로 분류된 김구 선생 계열, 김규식 박사 계열 인사, 장건상 선생의 혁신계 인사, 최근우 선생의 사회당 인사, 사회대중당의 김달호 선생, 윤길중 선생, 민족일보사의 조용수 사장 등과 어울려 지내면서 대화도 하고, 언쟁하는 사람들 틈에 끼여 한국 현대사에 대한 나의 무지를 통감했어요.
 
  학창시절 배운 입시용 역사 지식밖에 없는 내게 하루 하루가 도전적인 상황이었어요. 나훈아처럼 ‘테스 형, 테스 형’하고 불러야 할 만큼 아무것도 아는 것 없이 사소한 선동과 의기 하나로 학생운동에 앞장섰다가 아무 뜻도 못 펴고 분단 시대의 희생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나를 괴롭혔어요. 인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 람 모한 로이(Ram Mohan Roy)처럼 ‘그러나, 나는 역사의 편에 섰다’고 자부하면서 죽어간 삶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 퇴학당한 형편이었지만 서울대 도서관은 이용할 수 있었기에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생계를 해결하면서 옥중에서 내가 부족하다고 느낀 부분들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어요.”
 
  이영일은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보면서 “마음속에 나도 ‘실력재건최고회의’에 출근한다는 기분으로 도서관에서 한국 현대사, 특히 해방 전후사, 후진국의 정치 현상, 이승만이나 김구 선생의 이야기, 근대화 이론, 이데올로기와 수정주의 학파들의 이론을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한 2년 동안 대학시절보다 몇 배 많은 책과 씨름했다. 어느 날 문득, “자칫 세상을 잘못 살 뻔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세상에 나가고자 하는 자신감도 가졌다.
 
 
  이승만에 항거하다 돌아선 이유
 
이영일 전 의원의 건강 비결은 곤봉 돌리기다. 곤봉을 돌리고 나면 전신의 피로가 풀린다고 말한다.
  ― 4·19혁명 참여자로서 이승만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김 기자…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아는 지식과 정보의 양에 따라 사색과 판단의 수준이 결정된다고 하는데 살아보니 그 말이 맞아요. 나는 이승만의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손에 들고 이승만의 항일 독립투쟁의 역정을 알게 될 줄 알았는데, 읽었더니 1904년에 발간된 책이라 청나라와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논하면서 세계 각국의 정치제도를 설명하더군요. 미국 민주주의를 완미(完美)하다고 한 평가가 인상적이었어요.
 
  나는 ‘우리나라 최초로 나온 정치학 개론서구나’, 하고 내심 감동했죠. 이후 흥미를 느껴 이승만 생애를 두루 섭렵한 결과 4·19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그분의 삶과 인생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어요.
 
  해방 후 우리나라 정국의 난맥상을 뚫고 미·소 냉전이 벌어지는 상황, 더욱이 북한에 김일성을 우두머리로 하는 소련의 위성 정권이 세워진 상황에서 사분오열된 우익 진영의 갈등을 다독이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의 험난함을 보며,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건국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파악했죠.”
 

  1948년으로 돌아가 보자. 정부가 수립됐지만 문맹(文盲)률은 전체 인구의 80%를 넘었다. 해방된 나라를 찾아오는 귀국 동포들은 불어나는데 국토는 쪼개졌고, 북한이 전기마저 끊어버려 경제 수준은 지금의 캄보디아·미얀마 수준보다 낮았다.
 
  이런 대한민국을 향하여 북한군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침략했다. 국제외교사의 용어로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영일 전 의원의 말이다.
 
  “대한민국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역설적이게도 6·25전쟁 덕분에 국가다운 국가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국민도 ‘반공국가’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죠.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미군을 주둔시켜 제2의 베트남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안보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어요.”
 
  이영일은 “가난한 재정에도 1958년에서 1959년 사이 국비 장학생 280여 명을 미국에 유학시키는 만용(?)을 부린 이가 이승만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이 훗날 대한민국을 세계 최고의 원전(原電) 국가, 중화학 국가로 굴기(屈起)할 토대를 구축했던 것이다. 그는 “이승만 박사가 4·19혁명으로 비록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대한민국을 세우고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에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그분을 ‘전(前) 민주주의 시대의 한국’을 ‘민주주의 시대의 한국’으로 이행시키는 과도기 상황의 대통령이었다고 재평가하고 그분의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평가하여 그분의 인생을 넉넉한 마음으로 이해하는 국민적 포용력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박정희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 일 없어”
 
1981년 4월, 11대 국회 등원과 함께 가진 이영일 의원의 첫 번째 저서 《분단시대의 통일논리》 출판 기념회 모습이다. 이영일(왼쪽에서 두 번째)은 민정당 창당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승만 죽이기’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승만 죽이기’는 이승만에게 지도자로서의 잘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가 소련의 위성국가로 통일되는 것을 원했지요. 폭동과 시위에도 자유총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고 유엔의 승인까지 받자 민족분열 행위로 비난하기 시작해, 그 비난을 지금까지 퍼붓고 있어요.
 
  이승만이 공산화 통일, 소련 위성국가로서의 통일을 반대했다는 건 딱 숨기고 거두절미 민족분열·통일방해자로만 욕하는 식이죠. 이런 비판 선동이 한국 내에 뿌리내린 친북 주사파 세력에게 전염되면서 이들은 대한민국을 ‘태어나선 안 될 나라’라고 규정하고 ‘이런 나라는 해체해야 한다’는 당위론으로까지 논리를 비약시켰죠.”
 
  ― 이승만의 오류를 지적하자면.
 
  “이승만에게 물어야 할 정치적 과오가 있다면, 자기 후계자로 내정한 사람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 책동이 진행되는 것을 묵인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야했으니 정치적 책임을 다했다고 봐야 해요. 지금 ‘이승만 죽이기’는 적화통일 저지, 위성국가화 방지에 대한 원한을 품은 공산세력들이 주도하는 선전·선동에 가세한 남한의 일부 세력에서 나오고 있을 뿐입니다.”
 
  ― 4·19 관점에서 5·16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4월 혁명을 통해 나라의 주권이 독재자의 총칼에 있지 않고 국민에게 있음이 확고해졌기에 박정희 집권의 전 기간이나 그 뒤를 이은 전두환·노태우 정권도, 주권이 국민이 아닌 권력자의 수중에 있다는 생각을 감히 내세우지 못했어요. 물론 박정희 정권 당시 독단적 권력행사가 많았고 부작용도 적잖았죠. 그러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일은 없었어요.”
 
  이영일은 “국가의 모든 주요 결정을, 박정희는 투표로 국민 동의를 구했다”며 “이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정신을 확립한 4·19 민주혁명의 큰 공로로, 유산(遺産)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부 기자 사양하고 외신부 선택
 
  그는 1968년 11월 23일 강원용 목사의 주례로 경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서울 수유동의 단칸방에 살림을 차렸지만, 직장이 없었다.
 
  몇 군데 취업시험에서 필답고사에는 합격했지만 신원조회 때문에 낙방했다. 정상적인 취업은 어려웠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동양통신의 김성곤(金成坤·1913~1975·당시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 회장의 비서인 현소환 기자(이영일의 서울대 정치학과 1년 선배. 훗날 연합통신 사장을 지냈다)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김 회장이 흔쾌히 수락하고 이력서 2종을 가져오라고 했다.
 
  옥중 전과기록이 들어 있는 것과 전과기록이 없는, 두 통의 이력서를 제출했다. 김성곤 회장은 낙하산으로 들어오는 것보다는 시험을 치르고 들어오는 것이 직장에서 더 떳떳할 것이라며 단독으로라도 와서 시험을 보라고 했다. 논문과 영어시험이었는데 좋은 성적으로 외신부 발령을 받았다. 그의 회고다.
 
  “동양통신 정치부장 김성진씨(훗날 문공부 장관 역임)는 나에게 정치부에서 일할 생각이 있다면 끌어주겠다고 했어요. 나는 정치가 싫었고, 정치인들을 만나 취재하기는 더더욱 싫어서 고명식 부장이 있는 외신부를 지원했어요. 큰딸이 태어나면서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지만 투옥과 사회적 배제의 어려움을 겪은 덕에 가난을 잘 견뎌냈습니다.
 
  한때 법정투쟁과 거리투쟁으로 명성을 날린 학생운동권 투사였지만 결혼 이후 극도로 초라해진 내 모습에 좌절이 컸어요. 뭔가 심한 가치 박탈을 느꼈다고 할까요? 더군다나 단칸 셋방임에도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이 놀러 와서 밤새 토론하는 바람에 아내는 부엌에서 뜬눈으로 지새우는 때도 있었죠. 그때 철야 토론을 하던 이창균(서울대 철학과)은 독일 유학 중에 월북하여 조선노동당 중앙위원까지 올랐다는 풍문이 있는데 생사는 알 수 없어요.”
 
  동양통신에서의 생활은 어려웠지만 세계 유수의 기자들이 쓰는 기사를 우리말로 옮겨 각 신문사로 보내야 했기에 오전 6시부터 9시까지 쉴 틈 없이 바쁘게 일했고 보람도 있었다. “특히 UPI에서 잘나가는 기자들의 기사를 매일 번역하면서 영어 실력이 늘었고, 문장도 좋아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통일전문가의 길로
 
2001년 남북한 연합예배를 위해 평양을 찾은 이영일·정정애 부부.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무렵 동양통신을 떠나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새벽 근무시간에 당시 야당인 신민당 김대중(金大中) 의원이 그에게 두 차례 전화를 걸어왔다. “박정희 3선 개헌 시도를 외신들이 어떻게 보도하느냐”, 신민당 박영록 의원(6~8대 국회의원)이 “독일 베를린 스타디움 올림픽 승리자 기념탑에 적힌 ‘JAPAN’ 을 지우고 ‘KOREA’를 새겨넣은 사건의 진위”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영일은 “새벽 근무인데다 바빠서 다른 이야기할 틈이 없어 간단히 답해주고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공화당 김창근 대변인에게서 반도호텔(지금은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정치학과 선배인 김창근을 개인적으로 잘 몰랐지만 나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김 선배 왈 ‘동양통신을 그만두고 민주공화당 길재호 사무총장의 보좌역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어요. ‘정치할 생각이 없다’고 했더니 얼굴색이 바뀌면서 ‘당신, 김대중에게 가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면서 다소 위협적으로 말하더군요.
 
  그 다음 날 중앙정보부 정홍진(鄭洪鎭) 국장을 만나니 다시 ‘이영일-김대중 관계가 당·정 간에 문제가 되어 공화당으로 오지 않으면 틀림없이 대선 정국에서 언론계를 떠나라는 압력이 있을 것’이란 얘기를 하더군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죠. 아니나 다를까 김성곤 회장도 ‘길재호 총장을 도우라’는 겁니다.
 
  ‘동양통신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고 했더니 주미(駐美) 특파원으로 내보내도록 주선하더군요.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그분처럼 고마운 분을 본 적이 없어요.”
 
  이튿날 중앙정보부에서 다시 그를 불렀다. “상부 지시여서 김성곤 회장의 뜻대로 되기는 힘들 것”이라며 “여야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국토통일원’에 가서 일하도록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통일문제는 평소 관심을 가졌고, 그것 때문에 혁명재판까지 받았잖아요. 정부 기관으로 자리를 옮겨 통일문제연구에 정진하는 것도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해서 1970년 10월, 운명은 그를 통일전문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 때 ‘개발독재’라는 용어를 유포시킨 주인공
 
  이영일은 1970년대 이후 10년 동안 국토통일원에 들어가 박정희가 부르짖는 평화통일 노선을 현실적인 통일정책으로 구현하는 데 앞장섰다.
 
  ―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과 관련한 질문인데요, 5·16은 혁명인가요, 쿠데타인가요.
 
  “5·16은 그 사건 자체만으로 떼어서 보면 쿠데타지만 1960년대의 시대정신인 근대화와 4·19혁명을 하나의 변동과정으로 묶어 이해한다면 군부가 주도한 근대화를 위한 혁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 때 ‘개발독재’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국내 언론에 유포시킨 주인공이 이영일이다. 그러나 한국을 제외하고 ‘개발독재’에 성공한 신생국은 전무하다. 한국의 군사정부가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이렇게 봅니다. 첫째, 불의·부정에 항거하는 4·19의 DNA를 가진 국민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는 한국군에 대해 평시·전시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어요. 셋째,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는 김일성이 도사리고 있으니 국력 배양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권력을 사유화할 수도 없었어요. 여기다 박정희는 일제 강점기의 사범학교 출신다운 청렴(淸廉)과 염직(廉直)의 태도를 지녔죠.”
 
  그는 박정희식 산업화와 관련해 의미 있는 첨언을 했다.
 
  “박정희는 ‘이병철(李秉喆)형 인간’ ‘정주영(鄭周永)형 인간’ 양성을 위해 노력했어요. 미국에서는 ‘헨리 포드(Henry Ford)형 인간’이나 ‘록펠러(Rockefeller)형 인간’이 자생되었지만, 한국은 대기업과 기업가를 의도적으로 정부가 키워 만들었다고 봅니다.
 
  세계 5위의 자동차 수출국으로 자리매김한 데는 정주영 회장의 능력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지만, 박정희는 현대가 생장(生長)하도록 지원하되 경쟁·경영에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게 터전을 만들어준 것이죠. 이병철의 삼성반도체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 조선업도 이러한 전례에 따라 발전한 겁니다. 기업과 기업인을 키운 박정희의 기업 중심 노선이 이러한 성공의 기반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어요.
 
  소련이 망할 때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주의가 망한 게 자본주의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배출한 창의력 있는 기업과 기업가 때문이었다’고 자탄하지 않았나요? 북한이 오늘날 한국에 뒤진 것은 박정희 같은 리더 밑에 창의력을 가진 기업가를 만들어내지 못한 데 큰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3金의 무능과 5共의 등장
 
이영일은 1992년 민자당을 탈당해 이종찬씨를 따라 새한국당 창당에 합류했다. 당시 이종찬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이영일. 그러나 이종찬은 대선을 포기하고 당을 떠나버렸다.
  이영일은 박정희 시대 말기를 회상하며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중화학공업을 일으키기 위해 단기 차입으로 비싼 외자를 도입한 것은 위험한 도박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무렵 값비싼 외자로 세운 공장들이 가동중단 상태에 빠져들었다. 또 “시해로 끝난 박정희 이후의 권력을 잡기 위해 이른바 3김씨 중심의 선동정치와 각 분야에서 혼란과 갈등이 솟구쳐 한국의 내일을 점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태”로 몰고 갔다.
 
  박정희 시해 사건 수사과정에서 김재규 시해 음모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군 수사 당국에 체포된다. 이 사태를 주도한 전두환 세력의 권력 장악 공작이 성공하였고, 3김 영향력은 차단되었다. 결국 ‘박정희 키즈’로 불릴 군부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 박정희 시해 이후 정국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이영일은 당시 통일연수원장(1977~ 1980·현 통일교육원장)에 재직 중이었다. 당시 그가 한 일은 각 군의 정훈장교들을 기수별로 모두 통일연수원에 입교시켜 안보연수를 하는 것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군의 조직과 사기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 사후를 대처하는 3김 전략이 서로 달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JP(김종필)는 신군부가 자기를 대안으로 영입할 것으로 기대했고, DJ(김대중)는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자신의 열세를 극복하려고 대학생 시위를 막후에서 적극 사주하면서 제2의 4·19 방식으로 정권 장악을 기도했죠. 반면 YS(김영삼)는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 누구보다도 우세한 위치에서 승리할 것을 자신하면서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입장을 취했어요.
 
  그러나 신군부는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 체제를 유지하면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이 김재규와 공모했으리라는 가정하에 수사 범위를 확대하다 보니, 하극상을 하지 않고는 수사를 종결할 수 없다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요. 결국 12·12라는 하극상을 통해 군권(軍權)을 장악하면서부터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들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 된 것이죠.
 
  하지만 반정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불상사가 광주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신현확 총리는 사임하고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도 비자발적 양위식으로 하야하면서 전두환이 정권을 인수하면서 5공(共)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어요.”
 
  ― 박정희 시해 후 3김이 군부 동향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나요.
 
  “둔감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쿠데타로 발전하게 된 것이죠. 3김이 최규하 대통령과 담판이나 대화를 통해 정국수습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했다면 비극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3김 모두 내심 정권 장악의 기회가 올 것을 기대하면서 군인들이 시국을 좌지우지하도록 방임했던 것이죠. 5공의 출현은 3김에게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언제까지 해태 타이거즈가 이기는 재미로만 살겠느냐”
 
  이영일은 통일원에서 교육홍보국장, 적십자회담 전략지원반장, 통일교육원장 등의 요직을 거친 후 민정당 초대 중앙정치연수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52번으로 배지를 달았다.
 
  “내 바로 앞 번호가 김종인이었어요. 그는 6·25 때 광주로 피란 와서 나와 서석초등학교 5~6학년을 같이 다녔고, 광주서중으로 진학해 2학년까지 같이 다녔지요.”
 
  1985년 광주 서구에서 민정당 후보로 출마해 1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지금의 광주 남구까지를 포함한 넓은 지역이었다. 5·18 여진이 계속되고 있어서 민정당 공천을 받고 출마했지만, 당선은 장담하기 힘들었다. 당시는 1구(區) 2인제(人制)였다.
 
  “나는 광주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언제까지 해태 타이거즈가 이기는 재미로만 살겠느냐’고요. ‘(권투 선수가) 챔피언이 되려면 왼손과 오른손을 다 써야 상대를 누를 수 있듯이 여당과 야당을 하나씩 당선시켜 달라’고 호소했어요.”
 
  광주에서 당선된 후 당 총재(전두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는 보도가 났다. 당사에 들러 이한동 사무총장을 만났더니 그가 인사 경위를 설명해줬다. ‘당 총재 비서실장으로 임명해 광주 민의(民意)를 수렴케 하고, 대통령이 광주 출신 비서실장과 함께 국정을 운영한다는 이미지를 주는 것이 좋다’고 건의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85년 2월부터 1986년 8월까지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 곁에서 본 전두환은 어떤 분이던가요.
 
  “소박하면서 의협심이 강한 군인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은 없었고 육군참모총장이 인생 최대의 꿈이었다’고 자주 술회한 기억이 납니다. 리더십이나 보스 기질은 남달랐어요. 또 5·16 당시 육사11기 출신 현역 대위로 육사에 뛰쳐 들어가 육사생들의 5·16 지지 시위를 이끌어낸 것은 정무 감각이 남다른 측면도 있겠지요.
 
  자신이 좋은 대통령이 될 만한 자질과 학문이 부족하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인들을 멘토로 초청해 부지런히 노력한 점도 평가할 만합니다.”
 
  ―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을 회고해주세요.
 
  “나름 보람 있는 시기였어요. 매주 수석비서관 회의에 참석했기에 국가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죠. 대통령이 주재하는 각종 회의, 예컨대 수출진흥확대회의, 과학기술회의, 국가안보회의에 항상 참석했어요. 정치학 공부 평생해서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정보 이상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죠.”
 
 
  ‘광주 暴徒’라는 말을 없애다
 
민정당 이영일 의원이 1985년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와 만났다.
  ― 광주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민원 창구 역할을 하셨죠.
 
  “5·18 해결에 필요한 조치를 수시로 건의할 수 있었던 것도 보람 있는 일이었어요. 당시 5·18 관련자들에 대한 관청의 용어가 ‘폭도(暴徒)’였는데 그 용어를 폐기하지 않고서는 화합적 해결이 어렵다고 건의한 기억이 납니다. 또 해직 교수, 해직 교사 문제를 단계적이나마 원상회복하도록 여건을 만들 수 있었어요. 광주에서 간신히 당선되어 조그마한 민원이라도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어 다행이었어요.”
 
  그는 이런 이야기도 덧붙였다.
 
  “당시 3저(低) 호황으로 한국이 외채망국론의 함정에서 벗어나 외채를 갚는 나라로 바뀌는 보고 현장이 바로 대통령 수석비서관 회의 자리였어요. 사공일(司空壹) 경제수석은 외채가 늘어나는 상황을 매주 보고하다가, 3저 호황이 되면서부터 외채 갚는 상황을 매주 보고하였지요. 이때 마치 승전보를 듣는 것처럼 기뻤어요.
 
  결국 박정희 시대에 외채를 갚기 위해 외채 빌리기에 나섰던 어려움을 이겨내고, 전두환 정권이 공매처분 직전의 유신 말기 중화학공업을 살려낸 겁니다”
 
  1980년 광주 5·18 당시 이영일은 통일연수원장 자격으로 5월 15일부터 27일까지 독일 출장을 떠나 광주의 비극을 직접 접하지는 못했다.
 
  ― 광주 5·18의 한(恨)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한이 무엇인지 누구도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어요. 한이 있다고 주장하면 있는 것이겠지만 명확히 무엇을 한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아요. 나는 정치에서 쓰는 용어의 상당 부분을 선동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한이 무엇이라고 딱 짚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어요. 다만, 나는 선거유세에서 ‘광주에는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눈에 보이는 문제며,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지역의 낙후성이고, 눈에 안 보이는 것은 흔히 한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당선되면 눈에 보이는 광주 문제 해결에 매진하겠다’고 연설해 청중의 호응을 얻었지요.”
 
  ― 지금의 야당(국민의힘)이 호남 지지를 얻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요.
 
  “5·18 묘지에 가서 무릎을 꿇는다고 해서 호남 민심이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면 오산입니다. 비위 맞추는 정치는 공감의 정치가 아니에요. 호남이나 비호남을 떠나 국민의 삶을 규정하는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 어려움, 안타까움, 좌절감을 덜어주거나 해소할 수 있는 비전·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야당이 여당보다 훨씬 나은 정책을 내놓을 때 호남인들의 지지를 얻지 않을까요?
 
  호남과 비호남을 구별하면서 5·18을 찬양한다거나 묘소를 참배한다는 사실 자체가 내심 호남을 경멸하는 마음의 표현이 아닐까요? 그런 모습은 결국 반발과 조소만 사고 타(他) 지역 사람들의 지지마저 줄어들게 만들 것입니다.”
 
 
  ‘敵은 죽여야 하지만 敵手는 제압하면 족하다?’
 
  이영일은 “흔히 사람들은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을 미국으로 초청하여 한미정상회담을 해주는 조건으로 김대중의 사형집행을 막았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레이건의 압력에 전두환이 굴복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레이건은 헤리티지재단 이사장을 통해 DJ를 구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고 하는데, 그보다 앞서 전두환 대통령은 그의 단임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여건 마련을 위해 ‘김대중 카드’를 검토하고 있었어요.
 
  민정당 연수원장이던 나에게 전두환 대통령은 단독 대면 자리에서 ‘적(敵)과 적수(敵手) 차이를 아는가’를 묻고 ‘적(enemy)은 꼭 죽여야 하지만 적수(adversary)는 제압하면 족하다는데, DJ는 적수인가 아니면 적인가’를 묻더군요. 나는 ‘대통령에 출마해 500만 표 이상을 얻은 정치인인 DJ는 적이라기보다 적수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답한 일이 있어요. 그는 결국 DJ를 적수로 보고 살려서 미국으로 보냈던 겁니다.”
 
  ― YS의 ‘역사바로세우기’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정치에서 의리의 의미를 훼손한 사건입니다. YS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성공한 쿠데타는 불벌(不罰)’이라면서 감쌌고, 선거 당시 ‘도와줘서 감사하다’고 연희동을 방문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했죠. 그러다가 자기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노태우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폭로되어 위기에 몰리자, 이를 타개할 방법으로 꺼내든 카드가 역사바로세우기입니다. 전두환·노태우를 소급법으로 잡아 가두었죠.
 
  DJ의 요구로 두 대통령은 석방되었지만 정치에서 ‘의리’의 의미를 완전히 훼손한 더러운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 박근혜 탄핵 이후 한국의 보수 세력들은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국민이 원하는 것은 항상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입니다. 키신저는 ‘위정자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정객은 다음 선거의 표만 걱정한다’는 명언을 남겼어요. 야당은 정객이 아닌 위정자다운 정책을 내놓고 국민 심판을 기다려야 합니다.
 
  현 정권은 대한민국이 해체되는 한이 있더라도 표만 얻어 권력을 유지하면 장땡이라 생각하는 집단입니다. 그러나 야당은 대한민국의 유지·발전에 목표를 두고 목전의 포퓰리즘을 좇는 정객의 길보다 위정자다운 정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대중에게 아부하고 포퓰리즘으로 여당과 경쟁하려 해선 백전백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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