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愼鏞碩의 지구촌 이야기] VIP들의 천국, 스위스 그슈타트의 추락 : 월간조선

스위스의 마을 그슈타트(Gstaad)를 처음 찾은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유럽 사람들에게조차 이 마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철저하게 상류층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름철에는 알프스 산록에서 하이킹을 체험하고 겨울철에는 수십 개의 다양한 스키장에서 각종 스키를 즐길 수 있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곳으로, 돈 많은 부호들이나 스포츠, 연예계의 스타들, 유명한 정치인들이 주로 찾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슈타트의 상징이기도 한 팔라스 호텔을 위시해 스위스에서 손꼽히는 유명한 호텔은 물론, 고급 샬레(산장)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세계적인 VIP들이 여름철 또는 겨울 바캉스를 보내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산과 눈이 많은 스위스에는 생 모리츠, 다보스, 체르마트, 마르티니 등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겨울철 고급 스키 휴양지도 많지만 그슈타트가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들 나름의 마케팅 원칙 때문이라는 것을 그곳에서 며칠간 머물면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파파라치를 신고하는 그슈타트 시민들

그슈타트 시내 중심가에 있는 물 마시는 송아지 동상.

스위스 정부 관광청의 초청으로 그슈타트의 팔라스 호텔에 머물면서 첫날부터 이상하게 느낀 것은 호텔 종업원들의 태도였다.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면서 프런트 데스크 직원으로부터 “우리 호텔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짧고 의례적인 인사말 외에는 팔라스 호텔에 머무는 동안 종업원들로부터 인사말은 고사하고 눈인사도 받은 적이 없었다.

호텔 복도에서 간혹 종업원들과 마주칠 때가 있었지만 아무런 인사도 없이 눈을 아래로 보면서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었다. 스위스에서 손꼽히는 세계 정상급 호텔의 분위기가 하도 냉담하고 이상해 다음날 안내를 맡았던 그슈타트 관광 담당자에게 넌지시 이유를 물어봤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손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팔라스 호텔에 투숙하는 대부분의 고객은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람들이어서 못 본 척해 주는 것이 오히려 편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금도 팔라스 호텔이 이 같은 원칙을 계속 고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명인사들을 대하는 스위스식 역발상이 기발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슈타트의 VIP 마케팅 기법의 정수(精髓)는 파파라치들의 접근을 시(市)의회 결의에 따라 철저하게 봉쇄하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나타나거나 모이는 곳이면 파파라치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유명 인기인들의 재미있는 사진 한 장을 찍으면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사진 미디어 시장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슈타트시의 규정 때문에 파파라치들이 찾아오지 않으며, 간혹 일반 여행객으로 위장한 파파라치가 나타나도 즉각 적발돼 벌금을 물고 추방당한다는 설명이었다. 그슈타트를 찾는 유명 인기인들을 파파라치들의 카메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복경찰들이 시내 요소에 배치되어 순찰하는가 하면 일반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다.

이 같은 시 당국의 빈틈없는 파파라치 대책으로 그슈타트에 별장을 가지고 있거나 자주 이곳을 찾는 유명인사들은 안심하고 편안하게 휴가를 보낸다. 그슈타트 관광 담당자에 따르면 유명 인기인들이 그슈타트에 머물면서 가장 선호하고 재미있어 하는 것은 아침에 빵가게에서 일반 시민들과 줄을 서서 방금 구워낸 식빵을 사거나 신문을 직접 사는 일이라고 한다. 또한 카페나 식당에 들어가 가족이나 친지들과 식사를 해도 파파라치들의 카메라가 없어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을 그슈타트의 최대 장점으로 꼽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금융위기의 직격탄 맞은 명품 호텔들

그슈타트의 상징이며 스위스 최고급 호텔로 꼽히는 팔라스 호텔.

이 같은 그슈타트의 VIP 고객 마케팅과 그들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파파라치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덕분에 그슈타트라는 알프스 산록(山麓)의 작은 마을은 풍요를 구가하고 있었다. VIP들만이 찾는 명품 마을로 자리 매김한 그슈타트는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휴양지이지만, 세계적인 유명인사들에게는 별천지로 인식되고 있었다. 명품 마케팅을 성공시킨 역발상이 그슈타트 성공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말 스위스 로잔에 스포츠 관계 회의에 참석했다가 며칠간 여유가 있어서 20여 년 만에 그슈타트를 다시 찾았다. 기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그슈타트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스키장 쪽으로 고급 샬레들이 새로 들어선 것을 제외하고는 시내 중심부의 고급 상점이나 호텔들도 20여 년 전과 다름이 없었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VIP 인사들이 모여드는 스키 계절이었음에도 시내 중심부는 물론 필자가 묵은 포스트 호텔에도 빈 방이 많았다. 20여 개의 객실을 가진 소규모 스위스식 가족 경영의 호텔인 포스트 호텔에는 10명 내외의 손님만이 투숙하고 있었고, 저녁식사 시간의 호텔 식당도 그슈타트에 사는 주민들이 없었다면 쓸쓸한 저녁시간이 될 뻔했다.

2008년 말에 시작된 금융위기가 그슈타트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독특한 마케팅 수법과 파파라치 접근을 봉쇄함으로써 세계적인 VIP들의 휴식처였던 그슈타트가 불황을 맞게 된 것이다. 팔라스 호텔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하루 숙박비가 최저 1500달러에 달하는 최고급 호텔로 명성을 날리던 곳이었지만 한산한 분위기였다.

그슈타트 관광 책임자인 로제르 사이프리츠 씨는 “경제 호황과 함께했던 그슈타트의 파티(축제)는 끝났다”며 “세계적인 불황에 그슈타트도 예외는 아니다. 그슈타트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의 관광 진흥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VIP 고객을 위주로 한 명품 마케팅에서 탈피해 값싼 민박(民泊)까지도 생각해야 할 시기라는 사이프리츠 씨를 통해서 관광 노하우의 첨단 국가 스위스다운 유연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슈타트가 겪고 있는 불황은 금융위기와 함께 온 세계적인 경제 침체의 영향만은 아닌 듯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스위스라는 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외부로부터의 곱지 않은 시선과 국가 이미지 추락도 그슈타트의 불황에 관련이 있어 보였다.

스위스 금융기관의 잇단 不法행위로 국가이미지 추락

영세 중립 국가를 표방하면서 세계 1·2차 대전에 휘말리지 않았던 스위스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공식으로 사용하는 다국적 국가의 장점을 살려 수많은 국제 기구를 유치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화 추세로 치닫던 20세기 후반부터 경쟁력 있는 국가로 성장하면서 부(富)를 축적하고 풍요를 구가할 수 있었다. 스위스인들의 타고난 근면성과 비밀 계좌를 보장하는 금융업의 번영으로 스위스라는 나라는 유럽에서도 부러워하는 첨단 산업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탄탄대로를 달리던 스위스가 국제 무대에서 고전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0년대 말부터였다. 유럽에서 가장 견실한 회사로 알려져 왔던 스위스 항공사인 스위스에어가 파산하고 천혜의 스키장으로 알려진 시옹(Sion)이 동계올림픽 유치에 연거푸 실패하면서 스위스라는 나라의 이미지가 탈색하기 시작했다.

스위스의 국가 이미지가 더욱 추락한 것은 미국 법무부가 끈질기게 조사해 집요하게 요구해 왔던 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의 예금을 당사자들이나 가족에게 돌려주라는 제소(提訴) 때문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반세기가 지난 동안에도 스위스 정부와 은행들은 당사자들의 예금 환불 요구가 없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의 예금을 동결해 놓은 상태였다.

유대인 단체와 미국 정부의 정밀 조사와 정보를 바탕으로 한 국제적인 압력에 스위스 금융기관들은 마침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금자들의 비밀 보장을 앞세워 세계 각국의 독재자들이나 탈세를 목적으로 한 검은돈을 유치하여 재미를 보았던 스위스 은행들에 제동이 걸렸고 국가 이미지는 크게 손상되고 말았다.

스위스 은행들의 수난은 이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계적인 금융 위기의 진원이 되었던 미국의 비우량 주택 담보 채권에 거금(巨金)을 투자했던 스위스 최대 은행 UBS가 파산 직전까지 갔다가 520억 달러에 달하는 정부의 구제금융으로 간신히 되살아났다. 그러나 UBS는 또다시 미국 국세청(IRS)의 표적이 되었다. 이번에는 미국의 자산가들이 탈세 목적으로 UBS에 비밀 계좌를 이용한 것이 문제된 것이다.

미국 국세청은 5만여 미국 시민의 UBS 계좌가 주로 탈세용으로 이용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하면서 UBS에 7억800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하고 법무부에서는 미국인들의 계좌 내용을 통보하라고 강력히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스위스 정부까지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UBS와 미국 국세청은 4450명의 계좌 내용을 통보해 주는 것으로 협상을 매듭짓고, 1470명의 미국인의 자진 신고로 일단락되었으나 스위스라는 나라의 이미지는 또 한 차례 크게 손상됐다.

유대인들의 예금을 돌려주지 않고, 비밀 계좌를 통해 독재자들과 탈세자들의 검은돈을 맡아 주는 나라라는 인식이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스위스 제2의 은행인 크레디트 스위스도 지난해 말 미국 정부와 뉴욕주 사법 당국으로부터 5억 달러의 벌금형을 부과받았다. 이번에는 크레디트 스위스가 미국 정부에 의해 금융 거래 금지 국가로 지정된 이란, 리비아, 수단과의 불법 금융 거래를 했다는 증거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스위스 금융기관들의 잇단 불법행위가 미국 정부 당국으로부터 고발되고 벌금이 부과되면서 스위스 정부와 금융기관은 오랫동안 스위스 금융기관의 관행이 되어 왔던 비밀 계좌 제도 자체를 스스로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관광산업과 국가이미지

그슈타트에서 만난 스위스 금융계 인사는 “앞으로 스위스 금융산업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금융기관의 경쟁력을 되살리기에 앞서 스위스 국가 이미지 개선이 더욱 시급한 문제”라고 털어놓았다.

그슈타트의 관광청 관계자는 “연달아 터진 스위스 은행들의 비리 때문에 그슈타트를 찾는 사람들이 격감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관광산업과 국가 이미지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스위스라면 알프스의 아름다운 산록에 평화로운 목장과 맑고 깨끗한 크고 작은 호수와 융프라우나 마터호른 만년설이 연상되는, 아름답고 가고 싶은 나라로 손꼽혀 왔다. 특히 스위스는 한국인들에게 그동안 찾고 싶은 나라의 수위에 꼽혔던 나라다. 2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그슈타트에서 한 나라의 국가 이미지 추락이 몰고오는 결과를 현장에서 보고 느끼면서 스위스라는 나라가 제자리를 찾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