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바덴바덴을 자주 찾았고 앞으로도 찾아갈 것이지만, 기념비를 세우기로 市당국과 잠정 합의했던 리히텐탈 산책로를 지날 때는 항상 꿈꾸어 왔고 스스로 제기했던 계획을 완결시키지 못한 죄책감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중되는 느낌을 받는다
愼鏞碩
⊙ 1941년 인천 출생.
⊙ 서울대 농대 졸업, 서울대 신문대학원 석사.
⊙ 조선일보 駐파리 특파원,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인권재단 이사장 역임.
⊙ 저서: <현장에서 본 프랑스 교육> 등.
⊙ 상훈: 佛 문화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등.
愼鏞碩
⊙ 1941년 인천 출생.
⊙ 서울대 농대 졸업, 서울대 신문대학원 석사.
⊙ 조선일보 駐파리 특파원,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인권재단 이사장 역임.
⊙ 저서: <현장에서 본 프랑스 교육> 등.
⊙ 상훈: 佛 문화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등.
- 19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84차 IOC 총회에서 서울이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자 우리나라 대표들이 환호하고 있다.
유럽의 수많은 크고 작은 도시 중에서 우리나라의 현대사와 관련된 도시는 헤이그(네덜란드), 함보른(독일), 바덴바덴(독일)이 아닌가 한다. 네덜란드의 헤이그는 1907년 李儁(이준) 열사가 亡國(망국)의 한을 품고 憤死(분사)한 곳이고, 독일의 함보른 광산은 1964년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광부들을 만나 서로 눈물을 흘렸던 곳이다.
그리고 바덴바덴은 나라 잃은 설움과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대통령과 광부들의 울음을 극복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성공시킨 곳이다. 20세기 초부터 중반을 거쳐 20세기 후반에 헤이그와 함보른 그리고 바덴바덴에서의 사건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운명과 그 운명을 딛고 일어나 세계의 주요 국가로 등장하는 역사 드라마의 주요 장면이었다.
1981년 바덴바덴에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가 열렸고, 1988년에 개최되는 올림픽대회의 개최권을 따내기 위해 일본의 나고야(名古屋)와 서울은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여 그 누구도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치밀한 전략과 추격전이 주효해 52 대 27이란 압도적인 표차로 서울이 88올림픽 주최 도시로 선정됐다. 필자는 당시 유치단의 핵심 요원으로 바덴바덴 현지에서 IOC 위원들을 상대로 득표 활동을 벌이고 전략을 수립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을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생각하고 있다.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할 당시(1969~1980년), 유럽 각지에서 열린 스포츠 관련 회의와 대회에 자주 참가한 결과, 많은 IOC 위원과 국제 스포츠 지도자들을 알고 있었던 것이 바덴바덴 유치단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됐다.
바덴바덴 성지순례
바덴바덴의 大捷(대첩)을 계기로 독일의 작은 온천 휴양도시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지게 되었고, 두 번째 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1983~1985) 기회 닿는 대로 이곳을 찾았다. 파리에서 열차 편으로 4시간 정도 소요되는 바덴바덴에 가면 항상 감회가 새로웠고, 자신감이 생겼고, 대한민국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올림픽 총회가 열렸고 사마란치 위원장이 “쎄울~!”을 외치던 쿠르하우스와 우리 유치단이 묵었던 빌트 호텔, 그리고 IOC 위원들의 전용 호텔이던 브레너스파크 호텔에 가면 유치 활동 당시의 급박했던 분위기와 일본을 누르고 올림픽 유치를 성공시켰던 당시의 감동이 되살아났다.
바덴바덴을 찾을 때마다 聖地(성지)를 순례하는 독실한 신자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도 88서울올림픽을 통해서 대한민국이 세계 일류 국가로 등장하게 된 성지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역사상 최고의 대회로 치르게 되자 전 세계는 서울과 대한민국을 재평가하기 시작했고,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제국은 88올림픽의 여파로 자유화의 물결이 넘쳐났다. 오늘날 각국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동유럽과 소련의 붕괴가 88올림픽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우리 자신은 올림픽 대회가 끝나기 무섭게 5共(공) 청문회 정국으로 치달았고, 서울 올림픽의 성과와 역사적 의미를 스스로 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서울올림픽기념사업회(SOMA)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필자는 88올림픽의 세계사적 의미를 조명하기 위한 국제학술대회를, 유치 10주년이 되는 1991년 바덴바덴에서 개최하기로 결심했다.
국내외 학자 20여 명과 각국 IOC 위원들을 비롯한 체육계 인사 100여 명이 참석했던 바덴바덴 학술회의에서 발표됐던 논문들과 토론의 요지가 수록된 책자는 지금도 88올림픽을 학술적으로 조명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1981년 올림픽 유치 성공으로부터 1991년 학술대회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동안에만도 수십 차례 바덴바덴을 찾았지만, 그 후에도 필자의 바덴바덴 방문은 계속됐다. 가까운 친지들과 함께 유럽을 여행할 때에는 물론, 2002년부터 尙美會(상미회)라는 여행 클럽을 주도하면서 바덴바덴을 가급적 일정에 포함시켰다.
1981년부터 28년 동안 바덴바덴을 찾은 것은 무려 110회에 이르고, 총 숙박일수는 400일을 육박하고 있다. 그동안 일 년이 넘는 날을 바덴바덴에서 지낸 셈이지만, 앞으로도 기회 닿는 대로 필자의 성지순례는 계속될 것이다.
로마 황제들도 찾았다는 온천탕
바덴바덴은 독일의 서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州(주)에 있는 도시이며, 슈바르츠발트(黑林)의 중심도시다. 바덴은 독일어로 溫泉(온천)을 뜻하는 단어인데, 바덴이라는 도시가 여럿 있다 보니 혼돈을 피하기 위해 바덴주에 있는 바덴이라는 뜻으로 바덴바덴이 되었다.
이 같은 도시 이름이 상징하듯 바덴바덴은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고, 로마 제국 때부터 로마 황제들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다. 오늘날 이곳에는 온천욕을 즐겼던 로마 황제 카라칼라의 이름을 딴 칼라칼라 大(대)온천탕과 로마와 아일랜드식 온천욕법을 혼합한 ‘프리드리쉬’ 온천이 있다.
500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카라칼라 대온천탕은 독일 최고를 자랑하는 질 좋은 온천수를 실내·외 대형 온천탕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해 놓았고, 10여 가지의 사우나와 누디스트 공간까지 마련되어 있는 유럽 최대의 온천장이다. 이곳에는 독일 각지에서는 물론, 세계 각국의 온천 애호가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야외 온천탕에 들어가면 흡사 人種(인종) 전시장에 와있는 느낌을 받는다.
프리드리쉬 온천은 온천수 샤워로 시작해 건식·습식 사우나와 각기 水質(수질)과 水溫(수온)의 차이가 있는 온천욕 등 17단계를 2시간 정도로 즐기도록 설계되어 있다. 19세기 말에 건립된 르네상스식 건물에서 17단계의 온천욕을 끝내면 전신이 상쾌하고 가벼워진다. 남녀 코스가 분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후반 코스에는 남녀혼욕이 허용되며, 주말에는 아예 남녀 구별이 없어진다.
대부분의 호텔에도 온천수를 이용한 크고 작은 욕탕이 마련돼 있어 구태여 카라칼라나 프리드리쉬에 가지 않아도 온천욕을 즐길 수는 있지만, 역시 기억에 남는 온천욕을 한 번쯤 체험하는 것이 좋다. 또 바덴바덴의 지하수는 유럽 어느 생수 회사의 수질보다 마시기 좋고 몸에 좋은 무기물질을 다수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식당에서도 값비싼 생수를 주문하기보다는 수돗물(필자는 바덴바덴 물을 달라고 주문한다)을 달라고 하면 대부분 알아듣는다.
88올림픽 홍보관으로 사용했던 ‘스피엘 하우스’
워낙 울창한 산림지대여서 오늘날에도 슈바르츠발트라고 불리는 흑림지역의 중심도시 바덴바덴은 산과 나무와 계곡과 여울들이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시내 중심가에서 옛 수도원이 있는 곳까지 왕복 5km에 달하는 리히텐탈 산책로는 8000만 독일 사람들이 가장 걷고 싶어하는 곳으로 꼽힌다.
슈바르츠발트의 산악지대에서 흘러내려 오는 오스江(강)을 따라 계절 따라 자태를 뽐내는 화초와 수백 년 된 古木(고목), 그리고 넓은 초원의 경마장과 우아한 별장들이 즐비한 리히텐탈 산책로를 걷다 보면 독일인들이 이곳을 동경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落差(낙차)가 완만한 오스강의 물 흐르는 소리와 새들의 노래, 산책로 주변의 갖 가지 꽃들과 수목에서 나오는 향기, 그리고 우아한 별장들과 잘 가꾸어진 정원들을 보면서 걷다 보면 귀(耳)와 코(鼻)와 눈(目)을 모두 만족시키는 또 다른 산책의 묘미를 실감하게 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간편한 복장으로 한 시간여를 귀와 코와 눈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리히텐탈 산책로를 걷고 와서 먹는 독일식 아침식사 또한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바덴바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페스트 스피엘 하우스’다. 1908년에 개관한 이곳은 2500개의 좌석이 있는 독일에서 가장 큰 오페라 겸 연주회장이다. 빈의 건축가 빌헬름 홀츠바우어 교수가 설계한 페스트 스피엘 하우스는 옛 바덴바덴 철도 驛舍(역사)를 원형대로 보존해 매표소와 식당으로 바꾸고 뒷면에 현대식 오페라 하우스를 신축했다.
특히 옛 철도 역사는 1981년 IOC 총회가 열렸을 당시 서울과 나고야가 각기 홍보관을 차려놓고 IOC 위원들을 상대로 득표 활동을 벌이던 곳이고, 鄭夢準(정몽준·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 의원이 열성적으로 자원봉사 활동을 했던 곳이다. 음악회를 갈 때마다 이곳을 통과하며 28년 전 당시 정몽준 회장이 홍보관 안내를 담당했던 대한항공 승무원들과 미스코리아 출신 여성들을 독려하던 모습이 떠올라 또 다른 감회를 느끼게 된다.
페스트 스피엘 하우스는 독일 최대의 오페라 및 연주회장답게 계절마다 알찬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계절마다 최소한 하나의 오페라를 스스로 제작하여 무대에 올리고 세계 각지의 유명한 관현악단의 연주회들도 포함시킨다.
바덴바덴을 기억하자
건립 당시부터 공적 예산의 지원 없이 순수한 민간자본으로 출발한 페스트 스피엘 하우스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지금도 중앙이나 지방정부의 재정적 지원 없이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바덴바덴을 찾아 온천욕을 즐기고, 리히텐탈 산책로를 걷고, 서울올림픽이 결정된 쿠르하우스에서 식사를 하고, 페스트 스피엘 하우스의 음악회를 가면, 바덴바덴의 진가를 느끼게 된다. 특히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88서울올림픽이 결정된 곳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바덴바덴 방문의 뜻을 한 단계 승화시킨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부터 바덴바덴에 자그마한 기념비를 세우는 소박한 꿈을 지녀왔다. 1981년 이후 이곳을 자주 방문하면서 각계 각층의 현지 인사들과 교분이 생겼고, 1998년에는 마침 한국을 방문했던 당시 바덴바덴 시장과 간부들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필자의 꿈을 털어놓자 시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다음해 바덴바덴에 들렀을 때 시청의 담당 간부와 함께 88서울올림픽 기념비를 세울 부지를 함께 점검하다가 리히텐탈 산책로 옆에 위치한 국제회의 센터 옆으로 자리를 정하고 시의회의 동의절차까지 받을 수 있었다.
대지와 기념비를 세우는 基壇(기단)을 바덴바덴市(시)에서 부담하고 기념비 제작과 관련 행사 비용은 우리 측에서 부담하는 조건으로 일단 합의를 해놓았지만 필자의 무능과 일신상의 사정으로 계속 추진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 것을 무척 자괴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대목이 되었던 역사의 현장에 자그마한 기념비를 하나 세우고 오랫동안 간직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믿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동안 바덴바덴을 자주 찾았고 앞으로도 찾아갈 것이지만, 기념비를 세우기로 시당국과 잠정 합의했던 리히텐탈 산책로를 지날 때는 항상 꿈꾸어 왔고 스스로 제기했던 계획을 완결시키지 못한 죄책감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중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바덴바덴은 나라 잃은 설움과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대통령과 광부들의 울음을 극복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성공시킨 곳이다. 20세기 초부터 중반을 거쳐 20세기 후반에 헤이그와 함보른 그리고 바덴바덴에서의 사건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운명과 그 운명을 딛고 일어나 세계의 주요 국가로 등장하는 역사 드라마의 주요 장면이었다.
1981년 바덴바덴에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가 열렸고, 1988년에 개최되는 올림픽대회의 개최권을 따내기 위해 일본의 나고야(名古屋)와 서울은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여 그 누구도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치밀한 전략과 추격전이 주효해 52 대 27이란 압도적인 표차로 서울이 88올림픽 주최 도시로 선정됐다. 필자는 당시 유치단의 핵심 요원으로 바덴바덴 현지에서 IOC 위원들을 상대로 득표 활동을 벌이고 전략을 수립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을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생각하고 있다.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할 당시(1969~1980년), 유럽 각지에서 열린 스포츠 관련 회의와 대회에 자주 참가한 결과, 많은 IOC 위원과 국제 스포츠 지도자들을 알고 있었던 것이 바덴바덴 유치단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됐다.
바덴바덴 성지순례
바덴바덴의 大捷(대첩)을 계기로 독일의 작은 온천 휴양도시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지게 되었고, 두 번째 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1983~1985) 기회 닿는 대로 이곳을 찾았다. 파리에서 열차 편으로 4시간 정도 소요되는 바덴바덴에 가면 항상 감회가 새로웠고, 자신감이 생겼고, 대한민국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올림픽 총회가 열렸고 사마란치 위원장이 “쎄울~!”을 외치던 쿠르하우스와 우리 유치단이 묵었던 빌트 호텔, 그리고 IOC 위원들의 전용 호텔이던 브레너스파크 호텔에 가면 유치 활동 당시의 급박했던 분위기와 일본을 누르고 올림픽 유치를 성공시켰던 당시의 감동이 되살아났다.
바덴바덴을 찾을 때마다 聖地(성지)를 순례하는 독실한 신자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도 88서울올림픽을 통해서 대한민국이 세계 일류 국가로 등장하게 된 성지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역사상 최고의 대회로 치르게 되자 전 세계는 서울과 대한민국을 재평가하기 시작했고,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제국은 88올림픽의 여파로 자유화의 물결이 넘쳐났다. 오늘날 각국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동유럽과 소련의 붕괴가 88올림픽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우리 자신은 올림픽 대회가 끝나기 무섭게 5共(공) 청문회 정국으로 치달았고, 서울 올림픽의 성과와 역사적 의미를 스스로 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서울올림픽기념사업회(SOMA)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필자는 88올림픽의 세계사적 의미를 조명하기 위한 국제학술대회를, 유치 10주년이 되는 1991년 바덴바덴에서 개최하기로 결심했다.
국내외 학자 20여 명과 각국 IOC 위원들을 비롯한 체육계 인사 100여 명이 참석했던 바덴바덴 학술회의에서 발표됐던 논문들과 토론의 요지가 수록된 책자는 지금도 88올림픽을 학술적으로 조명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1981년 올림픽 유치 성공으로부터 1991년 학술대회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동안에만도 수십 차례 바덴바덴을 찾았지만, 그 후에도 필자의 바덴바덴 방문은 계속됐다. 가까운 친지들과 함께 유럽을 여행할 때에는 물론, 2002년부터 尙美會(상미회)라는 여행 클럽을 주도하면서 바덴바덴을 가급적 일정에 포함시켰다.
1981년부터 28년 동안 바덴바덴을 찾은 것은 무려 110회에 이르고, 총 숙박일수는 400일을 육박하고 있다. 그동안 일 년이 넘는 날을 바덴바덴에서 지낸 셈이지만, 앞으로도 기회 닿는 대로 필자의 성지순례는 계속될 것이다.
로마 황제들도 찾았다는 온천탕
바덴바덴은 독일의 서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州(주)에 있는 도시이며, 슈바르츠발트(黑林)의 중심도시다. 바덴은 독일어로 溫泉(온천)을 뜻하는 단어인데, 바덴이라는 도시가 여럿 있다 보니 혼돈을 피하기 위해 바덴주에 있는 바덴이라는 뜻으로 바덴바덴이 되었다.
이 같은 도시 이름이 상징하듯 바덴바덴은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고, 로마 제국 때부터 로마 황제들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다. 오늘날 이곳에는 온천욕을 즐겼던 로마 황제 카라칼라의 이름을 딴 칼라칼라 大(대)온천탕과 로마와 아일랜드식 온천욕법을 혼합한 ‘프리드리쉬’ 온천이 있다.
500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카라칼라 대온천탕은 독일 최고를 자랑하는 질 좋은 온천수를 실내·외 대형 온천탕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해 놓았고, 10여 가지의 사우나와 누디스트 공간까지 마련되어 있는 유럽 최대의 온천장이다. 이곳에는 독일 각지에서는 물론, 세계 각국의 온천 애호가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야외 온천탕에 들어가면 흡사 人種(인종) 전시장에 와있는 느낌을 받는다.
프리드리쉬 온천은 온천수 샤워로 시작해 건식·습식 사우나와 각기 水質(수질)과 水溫(수온)의 차이가 있는 온천욕 등 17단계를 2시간 정도로 즐기도록 설계되어 있다. 19세기 말에 건립된 르네상스식 건물에서 17단계의 온천욕을 끝내면 전신이 상쾌하고 가벼워진다. 남녀 코스가 분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후반 코스에는 남녀혼욕이 허용되며, 주말에는 아예 남녀 구별이 없어진다.
대부분의 호텔에도 온천수를 이용한 크고 작은 욕탕이 마련돼 있어 구태여 카라칼라나 프리드리쉬에 가지 않아도 온천욕을 즐길 수는 있지만, 역시 기억에 남는 온천욕을 한 번쯤 체험하는 것이 좋다. 또 바덴바덴의 지하수는 유럽 어느 생수 회사의 수질보다 마시기 좋고 몸에 좋은 무기물질을 다수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식당에서도 값비싼 생수를 주문하기보다는 수돗물(필자는 바덴바덴 물을 달라고 주문한다)을 달라고 하면 대부분 알아듣는다.
88올림픽 홍보관으로 사용했던 ‘스피엘 하우스’
워낙 울창한 산림지대여서 오늘날에도 슈바르츠발트라고 불리는 흑림지역의 중심도시 바덴바덴은 산과 나무와 계곡과 여울들이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시내 중심가에서 옛 수도원이 있는 곳까지 왕복 5km에 달하는 리히텐탈 산책로는 8000만 독일 사람들이 가장 걷고 싶어하는 곳으로 꼽힌다.
슈바르츠발트의 산악지대에서 흘러내려 오는 오스江(강)을 따라 계절 따라 자태를 뽐내는 화초와 수백 년 된 古木(고목), 그리고 넓은 초원의 경마장과 우아한 별장들이 즐비한 리히텐탈 산책로를 걷다 보면 독일인들이 이곳을 동경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落差(낙차)가 완만한 오스강의 물 흐르는 소리와 새들의 노래, 산책로 주변의 갖 가지 꽃들과 수목에서 나오는 향기, 그리고 우아한 별장들과 잘 가꾸어진 정원들을 보면서 걷다 보면 귀(耳)와 코(鼻)와 눈(目)을 모두 만족시키는 또 다른 산책의 묘미를 실감하게 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간편한 복장으로 한 시간여를 귀와 코와 눈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리히텐탈 산책로를 걷고 와서 먹는 독일식 아침식사 또한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바덴바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페스트 스피엘 하우스’다. 1908년에 개관한 이곳은 2500개의 좌석이 있는 독일에서 가장 큰 오페라 겸 연주회장이다. 빈의 건축가 빌헬름 홀츠바우어 교수가 설계한 페스트 스피엘 하우스는 옛 바덴바덴 철도 驛舍(역사)를 원형대로 보존해 매표소와 식당으로 바꾸고 뒷면에 현대식 오페라 하우스를 신축했다.
특히 옛 철도 역사는 1981년 IOC 총회가 열렸을 당시 서울과 나고야가 각기 홍보관을 차려놓고 IOC 위원들을 상대로 득표 활동을 벌이던 곳이고, 鄭夢準(정몽준·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 의원이 열성적으로 자원봉사 활동을 했던 곳이다. 음악회를 갈 때마다 이곳을 통과하며 28년 전 당시 정몽준 회장이 홍보관 안내를 담당했던 대한항공 승무원들과 미스코리아 출신 여성들을 독려하던 모습이 떠올라 또 다른 감회를 느끼게 된다.
페스트 스피엘 하우스는 독일 최대의 오페라 및 연주회장답게 계절마다 알찬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계절마다 최소한 하나의 오페라를 스스로 제작하여 무대에 올리고 세계 각지의 유명한 관현악단의 연주회들도 포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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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에서 가장 큰 오페라 겸 연주회장인 스피엘 하우스. |
바덴바덴을 기억하자
건립 당시부터 공적 예산의 지원 없이 순수한 민간자본으로 출발한 페스트 스피엘 하우스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지금도 중앙이나 지방정부의 재정적 지원 없이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바덴바덴을 찾아 온천욕을 즐기고, 리히텐탈 산책로를 걷고, 서울올림픽이 결정된 쿠르하우스에서 식사를 하고, 페스트 스피엘 하우스의 음악회를 가면, 바덴바덴의 진가를 느끼게 된다. 특히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88서울올림픽이 결정된 곳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바덴바덴 방문의 뜻을 한 단계 승화시킨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부터 바덴바덴에 자그마한 기념비를 세우는 소박한 꿈을 지녀왔다. 1981년 이후 이곳을 자주 방문하면서 각계 각층의 현지 인사들과 교분이 생겼고, 1998년에는 마침 한국을 방문했던 당시 바덴바덴 시장과 간부들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필자의 꿈을 털어놓자 시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다음해 바덴바덴에 들렀을 때 시청의 담당 간부와 함께 88서울올림픽 기념비를 세울 부지를 함께 점검하다가 리히텐탈 산책로 옆에 위치한 국제회의 센터 옆으로 자리를 정하고 시의회의 동의절차까지 받을 수 있었다.
대지와 기념비를 세우는 基壇(기단)을 바덴바덴市(시)에서 부담하고 기념비 제작과 관련 행사 비용은 우리 측에서 부담하는 조건으로 일단 합의를 해놓았지만 필자의 무능과 일신상의 사정으로 계속 추진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 것을 무척 자괴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대목이 되었던 역사의 현장에 자그마한 기념비를 하나 세우고 오랫동안 간직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믿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동안 바덴바덴을 자주 찾았고 앞으로도 찾아갈 것이지만, 기념비를 세우기로 시당국과 잠정 합의했던 리히텐탈 산책로를 지날 때는 항상 꿈꾸어 왔고 스스로 제기했던 계획을 완결시키지 못한 죄책감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중되는 느낌을 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