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愼鏞碩의 지구촌 이야기]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三浦綾子) 기념문학관 : 월간조선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서북부에 위치한 아사히가와(旭川)라는 도시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三浦綾子·1922~1999)의 소설 <氷點(빙점)>을 통해서였다.

1964년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당시로서는 큰 금액이었던 1000만 엔 현상공모에 1등으로 뽑혔던 <빙점>은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출판사에서 경쟁하듯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필자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죄를 용서한다’는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빙점>은 내용 자체는 재미있었으나 우연의 연속이 많았던 기억이 나지만, 그 후 미우라 여사가 집필한 자전적 소설 <길은 여기에>와 <이 질그릇에도>를 읽으면서 작가의 내면 세계와 삶의 자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미우라 아야코의 작품들을 많이 읽고 가까이하게 되면서 아사히가와라는 도시가 정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우라 씨의 작품을 통해 묘사되는 도시 분위기와,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모들이 다정스럽게 다가왔던 것이다.

한 작가가 작품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관광홍보를 포함한 그 어떤 광고보다도 효과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사히가와는 결과적으로 미우라 씨의 작품을 통해서 일본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전 세계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셈이다.

아사히가와에 미우라 아야코 기념문학관이 개관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1998년이었다. 눈(雪)으로 유명한 홋카이도가 온통 은색으로 덮여 있던 2002년 1월에 미우라 기념문학관을 처음 찾았을 때의 기분은 聖地(성지) 순례를 떠나는 신자 같은 심경이었다.

13년 동안 폐결핵과 척추 카리에스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다가 37세의 나이에 연하의 남자 미우라 미스요(三浦光世) 씨와 결혼하여 내 집 마련을 위해 잡화상점을 열고 밤마다 글을 써서 아사히신문 공모소설 1등의 영예를 차지한 것도 드라마틱한 이야기지만, 작가로 유명해진 다음부터 그녀의 삶이 더욱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미우라 아야코 부부의 삶의 자세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아사히가와(旭川)에 위치한 미우라 아야코(三浦綾子) 기념문학관 입구.

자전적 소설 <이 질그릇에도>에는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빙점>이 당선되던 날 남편 미스요와의 대화가 나온다.

“사람은 유명해지거나 조금이라도 돈이 들어오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어리석기 쉬워. 또 사람들이 모두 떠받들어 주면 진짜 바보가 되거든. 지금부터의 행동이 중요해.”(과연 그렇다고 나는 끄덕였다)

“그리고 1000만엔이란 돈은 생각지도 않던 큰돈이야. 이 큰 돈을 손에 쥐고 무엇에 쓸까 하고 망설이다 보면 올바르게 쓸 수가 없어. 역시 아까워지니까. 나는 이 돈의 사용에 대해서도 하느님의 뜻대로 쓸 수 있도록 벌써부터 기도했지. 하느님과 사람을 위해서 써야 해.”(참으로 미우라다운 말이었다)

<이 질그릇에도>에는 <빙점>을 탈고하던 당시의 이야기도 나온다.

‘마침내 1963년 12월을 맞이했다. 12월 31일이 현상소설의 마감일이었다. 그러나 마감이 10일밖에 남지 않은 어느 날, 나는 덜컥 감기로 눕게 되었다. 38도나 되는 고열이었다… 밤 10시에 가게를 닫고, 돈을 세고, 미스요가 장부를 적고, 2층에 올라가 취침하면 그때부터가 소설을 쓰는 시간이었다… 잉크가 꽁꽁 얼어붙는다. 그 잉크를 만년필 촉으로 쿡쿡 찍으면서 이불 속에서 새벽 2시경까지 썼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니 하나도 쓰라릴 것이 없고 悲壯感(비장감)도 없었다. 누가 강요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시작한 것이다.’

<빙점>이라는 소설보다도 미우라 아야코 여사와 남편 미스요 씨의 삶의 자세가 더욱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아사히가와의 기념문학관을 찾았던 것이다.

기념관은 시내 중심에서 벗어난 외국 樹種(수종) 연습림(실습림) 입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기념관 건립을 구상하면서 아사히가와의 여러 곳을 후보지로 생각하다가 이곳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작가 자신이 키가 큰 스트로브 소나무(Pinus strobus) 숲을 신비스럽게 느꼈었고, 소설 <빙점>에서도 이곳을 여러 차례 언급할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흡사 교회당 건물처럼 생긴 기념관은 2층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미우라 문학의 본질에 따라 ‘빛과 사랑과 목숨’을 주제로 했다는 기념관은 5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60대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작가의 대형 천연색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소설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인생을 진지하게 살고 있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느껴졌다.

‘국가의 기만성’에 회의 느껴 교직 떠나

미우라 아야코(三浦綾子).

제1전시실(미우라 문학의 전부)에는 작가의 작품이 연대별·장르별로 전시되어 있는데 한국어를 비롯하여 중국어, 영어, 핀란드어, 몽골어 등 17개국 13개 언어로 번역된 100여 권의 책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제2전시실(작가로 가는 길)은 태어나서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전소설 4부작 <들풀의 노래> <돌멩이의 노래> <길은 여기에> <이 질그릇에도>를 통해 조명하고 있다.

<빙점>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제3전시실은 작가의 데뷔작이자 대표적인 장편소설 <빙점>에 대해서 발표될 때까지의 경위, 집필과정, 작품의 붐과 시대배경 등을 다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제4전시실에서는 <빙점> 이후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텔레비전 작품과 영화 연극이 된 미우라 문학’ ‘이 사랑 그 누가’ ‘자연 속에서 산다’ ‘역사 속의 그리스도인’ ‘쇼와(昭和)를 바라보며’ ‘뜨거운 생애를 전하면서’ 등 각 작품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마지막 전시실인 제5전시실은 아야코 씨의 인간적 면모를 남편 미스요 씨와 함께하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30대 후반에 결혼하여 40여 년 동안 발걸음을 같이해 온 두 사람의 부부애를 실감할 수 있는 자료와 사진들은 또 다른 감동을 준다.

책과 자료가 가득한 작은 방에서 두 사람이 마주앉아 집필하고 있는 사진을 보고 있으면 미우라 아야코의 문학 작품들이야말로 남편과의 공동작품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결혼식을 올렸다고 해서 이튿날부터 바로 부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일생 동안 노력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던 목사님의 말씀을 끝까지 실천했던 미우라 부부의 모습을 제5전시실에서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미우라 문학기념관을 찾았을 때는 그리 크지도 않은 기념관에 두어 시간 머물면서 전시내용을 살피고, 전시물을 통해서 작가의 내면과 철학을 찾아보는 것이 보람차게 느껴졌다.

아사히가와에서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국가의 기만성’에 회의를 느끼고 7년 만에 교직을 떠난 후 13년 동안의 투병생활을 하다가 37세에 결혼했던 작가가 평범한 주부의 길에서 유명 작가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도움도 컸지만 작가 자신의 의지도 대단했음을 기념관 관람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빙점>을 구상하고 있을 때 아사히가와에 왔던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1907~1992: 미스터리, 탐정소설, 역사소설, 논픽션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을 쓴 일본의 작가 겸 언론인. 1952년 아쿠타가와 상 수상-편집자 주)의 강연을 듣고 쓴 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아사히가와 휴양림.

“나는 작가입니다”

‘마쓰모토 씨는 여러 가지 사회정세를 이야기하는 중 “나는 작가입니다”라고 말했다. 내게는 그 말이 제일 크게 울렸다. 소설을 쓰려고 하는 나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가 한없이 부러운 존재였다. 그날 밤 나는 적지 않게 흥분해 집으로 돌아왔다. 작가를 눈앞에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문학기념관이 준공된 다음 해에 미우라 아야코는 77세의 나이로 아사히가와 재활병원에서 多臟器不全(다장기부전)으로 세상을 떠났고, 필자가 문학관을 처음 찾았던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인 2002년이었다. 그 후 필자는 홋카이도에 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사히가와의 미우라 문학기념관을 찾아갔다. 올 1월에 찾았던 것이 다섯 번째가 아닌가 싶다. 새로운 특별 전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작가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목적은 더욱 아니었다.

인생의 전반부를 힘겹게 살아 온 작가가 42세가 되던 해에 소설 <빙점>을 통해 극적으로 ‘작가’로 태어나는 과정 자체가 그 어떤 소설보다도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또 투병 중에 세례를 받고 일생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생활하면서 연하의 남편 미스요 씨와의 결혼생활 역시 소설 이상의 의미와 감동을 준다. 작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일생을 비서로, 남편으로, 신앙의 동반자로 부인을 뒷받침하며 살아온 미스요 씨의 생애 역시 범상하지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사히가와의 기념문학관을 여러 차례 찾게 된 것은 자신의 고향을 사랑하고 끝까지 아사히가와를 떠나지 않았던 미우라 아야코의 고향사랑 때문이 아닌가 한다.

<빙점>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선 미우라 씨에게는 일본 각지에서 강연요청이 쇄도하고 신문·잡지 등에서의 원고청탁 또한 끊이지 않았다.

많은 인세수입 등으로 도쿄(東京) 같은 대도시로 이주하지 않고 춥고 눈 많은 홋카이도의 서북쪽 도시 아사히가와를 지키면서 창작활동을 펴고, 교회를 통해 사회봉사활동을 펴온 미우라 씨의 신념 또한 한국의 한 독자로 하여금 아사히가와를 찾게 만든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미우라 씨가 생전에 한 “나는 작가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감격했다는 마쓰모토 세이초 씨의 문학기념관은 기타규슈(北九州)의 고쿠라(小倉) 중심부에 있다. 규모도 크고 작가의 저택을 實物大(실물대)로 재현해 놓은 기념관은 대단했지만 연습림 입구의 靜寂(정적)을 느끼는 곳에 있는 미우라 기념관 같은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앞으로도 홋카이도에 가는 기회가 있으면 또 다시 미우라 아야코 기념문학관을 다시 돌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