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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인류 최초의「산악 그랜드슬램」달성한 산악인 朴英碩의 투혼

『가장 무서운 것은 나였고, 가장 힘겨운 것 또한 나와의 싸움이었다』

한필석    ps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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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아빠가 되겠다」는 약속을 지킨 朴英碩의 다음 목표는 한국 청소년에게 모험심과 도전정신을 심어 주는 일이다.
북극점에서 날아온 전화
북극점에 도달한 朴英碩(오른쪽에서 두 번째) 탐험대.
  지난 5월1일 오전, 기자는 한강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땀이 온몸을 적실 즈음 뒷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북극점에 막 도달한 朴英碩(박영석·42) 대장의 전화였다.
 
  『형, 성공했어요』
 
  朴대장은 목소리를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쓰는 듯했지만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거기서 2000km쯤 떨어져 있는 베이스캠프에서는 朴대장의 아내 洪京姬(홍경희·42)씨와 막내아들 성민군이 그의 무사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악인 朴英碩씨가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5월1일 오전 4시45분(한국 시각·현지시각 4월30일 오후 7시45분) 北緯(북위) 90도 북극점에 도달, 히말라야 8000m급 14개 산봉우리 등정, 세계 7대륙 最高峰(최고봉) 완등, 3극점 도보탐험을 성공리에 끝냈다. 1993년 5월16일 에베레스트 無산소 등정 이후 12년 만에 이룩한 쾌거다. 인류가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산 이래 이런 기록을 달성한 사람은 朴英碩뿐이다. 앞으로 상당 기간 깨지기 어려운 大기록이다. 그는 功을 동료들에게 돌렸다.
 
  『원정기간 아무 불평 없이 저를 따라 준 대원들에게 고맙습니다. 세계 첫 산악 그랜드슬램은 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이룩한 것입니다. 북극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제 자신이었고, 가장 힘들었던 것 또한 제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겨냈습니다. 단 1%의 가능성만 있다면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54일간의 얼음벌판 2000km 行進
 
  朴대장과 洪成澤(홍성택·39·장비 및 촬영 담당), 吳熙俊(오희준·35·식량 담당), 鄭贊一(정찬일·25·의료 및 인터넷 중계 담당) 대원으로 이루어진 북극점 원정대는 지난 3월8일 캐나다 최북단 육지인 워드헌트(북위 83도3분)를 출발했다. 이들이 북극의 빙원에서 보낸 54일간은 처절하리만치 험난한 자연의 끝없는 투쟁이었다.
 
  원정대는 북극점에 도달하기까지 100kg가 넘는 무거운 썰매를 끌면서 2000km의 북극 빙원을 걸어야 했다. 200여km의 亂氷帶(난빙대), 영하 50℃ 이하로 떨어지는 강추위, 초속 14m가 넘는 강풍인 「블리자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화이트아웃」, 그리고 건너편 얼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형성된 「리드」(얼음이 녹으면서 드러나는 바다)가 대원들을 쉴 새 없이 괴롭혔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북극지역의 얼음 상태도 나쁘고, 리드가 많이 형성돼 탐험성공률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국의 「펜 하도」(43)가 2003년 성공한 이후 지난해 도전한 6개 팀이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2003년에 이어 두 번째 도전인 朴대장으로선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난빙대는 탐험 이틀째인 3월9일부터 나타났다. 2년 전 난빙대 때문에 困辱(곤욕)을 치른 朴대장은 한숨부터 나왔다. 그러나 이미 각오했던 일. 아무 말 없이 작은 산만 한 氷塔(빙탑) 사이를 파고들며 루트를 찾아 나섰다. 커다란 얼음턱이 앞을 가로막으면 全대원이 무거운 썰매를 끌어당겨 턱 위로 겨우 넘길 수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다. 다시 오면 내가 개다』
 
  朴대장의 입에서는 초반부터 『이짓을 왜 하나. 이게 마지막이다, 두 번 다시 오면 개다』는 한탄이 쏟아져 나왔다. 그날 8시간 운행 동안 두 번의 간식 시간을 빼고는 계속 걸었는데, 이동거리는 고작 6.1km. 암담했다.
 
  원정 7일째 朴대장은 리드에 빠지고 말았다. 얼음 덩어리를 잡고 간신히 기어 나왔으나 이미 한쪽 신발이 차가운 바닷물에 젖어들고 말았다. 신발이 젖은 게 문제가 아니라 동상이 문제였다. 서둘러 텐트를 치고, 버너를 켠 다음 옷을 벗고 寢囊(침낭) 속에 들어가 체온을 높여야 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대원 한 명이 리드에 빠지면 행진은 몇 시간 동안 중단되고, 오후에 리드에 빠지는 날이면 그날 운행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朴대장은 2년 전 첫 번째 도전에서 리드를 건너려다 물에 빠져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리드의 폭이 500m 이상 벌어져 네댓새 동안 꼼짝 못 하고 얼음이 얼어붙기를 기다렸던 惡夢(악몽)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살짝 얼어붙은 얼음을 건너려다 다시 얼음이 깨지면서 이번에는 가슴팍까지 빠져 들었다.
 
  朴대장은 「악으로 깡으로」 리드 도강을 강행, 결국 건너편 얼음 위에 텐트를 쳤다. 힘은 들었지만 戰意(전의)를 불태울 수 있는 날이었다.
 
  원정이 보름쯤 지나면서 朴대장은 체력의 限界를 느끼기 시작했다. 힘이 들었다. 마흔둘이란 나이는 북극점 도전처럼 험하고 오랜 기간이 걸리는 탐험을 하기에는 분명 늦은 나이다. 힘이 들 때는 후배 대원들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텐트를 치고 쉬고 싶었다. 그렇지만 참았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는 순간 원정은 끝이었다. 凍傷(동상)으로 인한 통증이 심했고, 잠이 쏟아졌다. 가까운 이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하지만, 가야 했다. 『단 1%의 가능성만 남아 있더라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몸 깊숙이에서 치밀어 올랐다』고 한다.
 

 
 
 朴英碩의 비장한 결단
 
  3월30일 원정대는 베이스캠프에서 날아온 경비행기를 통해 400여kg의 보급품을 지원받았다. 3주 동안 땀냄새와 발냄새에 찌든 침낭과 의류를 몽땅 갈아입고, 모처럼 푸짐한 저녁식사로 배를 불릴 수 있었다. 원정대는 엄청난 체력소모를 가져오는 강행군을 하면서 하루에 두 끼만 먹었다. 아침과 저녁은 텐트에서 칼로리 높은 냉동건조 식품을 뒤섞은 잡탕밥과 국을 만들어 먹고, 낮에는 간식으로 초콜릿 바와 영양음료를 두 차례 먹었다. 간식은 끝없는 빙원을 바라보며 선 채로 먹어야 했다. 앉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바람 반대 방향으로 앉아 봤자 북극의 바람은 수시로 변해 어느샌가 얼굴로 바람이 들이쳤다.
 
  한정된 식량과 간식으로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아침저녁마다 압력밥솥이 뚫어져라 긁어먹기 때문에 일부러 씻을 이유가 없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대원들의 대화는 전부 먹는 이야기였다. 자장면, 보신탕, 닭 한 마리…, 알고 있는 메뉴란 메뉴는 몽땅 늘어놓고 귀국하면 무엇부터 먹을까 고민하곤 했다. 朴대장은 補給(보급)받은 지 일주일이 되던 날 대원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단을 내렸다.
 
  『도저히 이래선 안 되겠다. 짐을 줄이자. 각자 우선순위를 정해서 내려 놔라. 식량과 연료도 3분의 1 줄인다. 더 이상 리드에 빠지면 안 된다. 옷 말릴 만큼 충분한 연료도 못 가져간다. 총도 버린다』
 
  식량과 연료는 다른 원정대가 사용할 수 있도록 빨간 리본을 달아 얼음 언덕 위에 올려 놓고 호신용으로 가져온 총을 버렸다.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14개 거봉을 완등하고, 3극점 도전에 나섰던 이탈리아의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는 두 번째 북극점 도보탐험 도전을 북극곰의 추적 때문에 포기했다. 북극곰이 밤낮 가리지 않고 여러 날 쫓아다닌 것이다.
 
  북극곰은 공포의 존재다. 그래서 모든 원정대는 베이스캠프를 출발할 때 총을 휴대한다. 朴대장은 극점 도달을 위해 곰의 위협도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대원들은 한 끼 200g에서 절반인 100g 분량의 식량으로 한 끼를 해결하고, 연료를 2ℓ에서 1.5ℓ로 줄여 가면서 차가운 텐트 안에서 지내야 했다. 朴대장과 세 명의 대원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하루하루 강행군을 해냈다.
 
  특히 42일째인 4월19일에는 하루 운행을 끝낸 다음 베이스캠프와의 무전교신에서 「이튿날 아침부터 블리자드가 불어댈 기미가 보인다」는 기상예보를 받았다. 朴대장은 텐트를 걷고 밤 10시 다시 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이튿날은 분명 꼼짝없이 텐트에 갇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날이 좋을 때 조금이라도 더 걷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날 밤 따라 초반부터 난빙대가 앞을 가로막고, 리드까지 나타나 애를 먹였다. 하지만 朴대장은 썰매를 연결해 살얼음 같은 얼음을 깨면서 앞으로 전진했다.
 
  朴英碩 대장은 한발 한발 극점으로 다가갔다. GPS의 계기판이 「북위 90도 00.000분」을 가리키자 모두들 환호성을 질러 댔다.
 
  막내인 鄭贊一(정찬일) 대원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극지는커녕 히말라야 등반 경험조차 없는 鄭대원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누를 길이 없었다.
 
  朴英碩 대장은 예정일보다 6일 앞선 5월1일 오전 4시45분 북극점에 도달, 산악그랜드슬램의 마지막 별을 따냈다.
 
  영하 22℃, 朴英碩 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의 북극점 入城을 축하하듯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원정기간 내내 사람을 날려 버릴 듯 불어 댔던 블리자드도, 100kg이 넘는 썰매를 안간힘을 다해 끌어올려야 했던 난빙도, 순식간에 대원들을 집어삼키던 시커먼 바닷물이 그대로 드러난 리드도 정작 북극점에는 없었다.
 
  54일간의 원정 동안 작은 노트에 日記를 써 오던 朴英碩 대장은 5월1일자 日記에 단 한 줄의 글만 적었다.
 
  「드디어 별을 따냈다」
 
 
 
 悲劇으로 마무리지은 14개 거봉 완등
 
   朴英碩 대장이 험난한 북극점 도보탐험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산에서 닦은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2001년 여름, 세계 제2위 고봉인 K2(8611m)를 정복, 히말라야 8000m급 14개 거봉을 모두 올랐다. 神들의 領域(영역)이라 일컬어지는 히말라야의 高山을 38차례나 등반한 끝에 이루어 낸 값진 결과였다.
 
  그는 K2 정상에서 서러움에 북받친 눈물을 쏟았다. 10여 년 동안 함께 등반하다 목숨을 잃은 선후배 대원 4명과 셰르파 2명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朴대장은 눈을 파낸 다음 이들의 영정을 고이 묻어 주었다.
 
  그런데 K2 하산 중 후배 대원인 박영도씨가 실족사했다. 登頂 길에 올랐다 포기한 박영도씨는 마지막 캠프로 내려서다 雪稜(설릉)에서 발을 헛디디면서 수천m 절벽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박영도 대원은 늘 쾌활하고 위트가 넘쳤다. 원정에 活力素(활력소) 같은 대원이었다. 그렇게 좋은 후배가 함께 등반하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갔다는 데 대한 죄책감을 朴英碩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朴대장은 히말라야 14개 거봉 완등을 이룩해 냈건만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베이스캠프에서 기다리던 선후배 대원들과 힘없는 악수를 나눈 뒤 텐트로 들어갔다. 그리곤 입술이 꽉 깨물며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등반과 탐험에 대한 朴英碩의 熱情(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K2 등반을 앞두고 「14개 거봉·7대륙 최고봉 완등·세계 3대 극점 도보탐험」 성공을 약속한 그는 그 목표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섰다.
 
  2002년 1월11일 남미 「아콩카구아」(6959m), 5월11일 오세아니아 「칼스텐즈」(4884m), 7월7일 유럽 「엘브루즈」(5642m), 11월25일 남극 「빈슨매시프」(4897m)…, 2002년 한 해 동안 4개 대륙 최고봉을 오름으로써 7대륙 최고봉 등정 레이스를 마쳤다. 그리곤 2003년 봄 북극점 도전에 이어 그해 겨울 남극점 도보탐험에 도전했다.
 
  垂直(수직) 이동에 익숙한 그는 水平(수평) 이동은 수월할 걸로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너무 쉽게 생각하고 도전한 게 화근이었다.
 
  2003년 도전은 러시아의 「아르크체스키」곶(81도)에서 시작했다. 「극점까지의 거리는 멀어도 난빙 구간이 짧다」는 정보를 지나치게 믿고 나선 원정이었다. 시작하자마자 거대한 리드를 만나 닷새 동안 꼼짝 못 하고, 헬기를 타고 리드를 건너선 뒤에는 험난한 난빙대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진을 빼냈다. 얼음이 녹아 내리면서 리드는 점점 많아졌다. 중간 보급과 극점 도달 시 경비행기로 픽업을 약속한 러시아 대행사가 「더 이상 일정이 길어지면 픽업을 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2003년 첫 도전은 북위 86도에서 접어야 했다.
 
 
 
 『내가 이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오랜 세월 朴英碩과 친분을 맺어 한 공간에 安住(안주)해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히말라야를 다녀오면 다음 산을 생각하고, 또 그것이 마무리되면 다른 산을 머릿속에 그렸다. 산을 다녀왔을 때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첫 번째 말은 『어휴, 이번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였다. 그리곤 산에서 겪은 일을 현란한 제스처를 섞어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곤드레만드레될 때까지 늘어 놓곤 했다. 그의 무용담은 『내가 이 짓을 왜하는지 모르겠어요』로 마무리지었다. 산은, 등반은 그에게 마약 같은 같은 존재였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서 겪은 사고들을 회상할 때에는 눈물이 맺히곤 했다. 1991년 봄, 그는 에베레스트 南西壁(남서벽) 해발 7000m대 절벽에서 150여m나 떨어졌다. 50층 높이 빌딩의 옥상에서 땅바닥에 떨어진 것 같은 엄청난 추락이었다.
 
  『바위에다 얼굴을 매치는 순간 의식을 잃었다가 눈을 떴더니 눈앞이 온통 피바다더군요. 바위며, 雪斜面(설사면)이며 피로 물들었던 거죠. 그리곤 또다시 깜빡했다 눈을 뜨고 나니까 제2캠프(6500m)의 텐트 안이더군요.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지 뭐예요. 그때까지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거죠.
 
  대학 동기 녀석이 옆에서 「영석아, 죽으면 안 돼!」 하며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도 「저 놈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할 정도로 정신이 오락가락했습니다. 결국 그 사고로 깨진 광대뼈를 고정시키기 위해 백금 철사를 세 개나 감아야 했습니다. 1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게으르다 보니 아직도 핀을 빼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 에베레스트 등반 중이던 미국인 의사의 도움으로 응급처치를 받고 헬리콥터로 카트만두에 後送(후송)됐다. 그런데 朴英碩은 카투만두의 병원 입원실에 붙어 있는 에베레스트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고 한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일단 실패하고 나면 기가 죽거나, 포기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는 달랐다. 일단 목표로 삼은 산봉우리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도전, 꼭 정상을 밟았다.
 
 
 
 死線을 넘나들다
 
   1993년에는 에베레스트 無산소 등정 이라는 국내 최초이자 아직도 깨지지 않는 기록을 세웠지만, 후배 두 명을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1995년에는 그 에베레스트의 北東稜(북동릉)을 등반하던 중 눈사태에 맞아 무려 700m나 쓸려 내려가는 사고를 당했다.
 
  『눈사태를 맞는 순간 한강변에서 지낸 어린 시절부터 당시 갓 태어난 첫아들의 얼굴까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군요. 그러다 어느 순간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생기면서 헤엄치듯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소용없어요. 눈을 떴을 때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었으니까요.
 
  엄청난 무게의 눈에 눌려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거죠.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이제 이렇게 죽어 가는구나」 싶어지면서 눈물이 양볼을 타고 주르륵 흐르더군요. 그런데 눈이 들어오지 않도록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움직여 보니 눈이 흩어지면서 곧 하늘이 보이지 뭐예요』
 
  그가 살아난 것은 눈을 뚫고 나온 그의 손가락을 본 셰르파가 신속하게 구조한 덕분이었다. 朴英碩은 갈비뼈 세 대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건만 티베트의 奧地(오지) 병원에서 응급치료만 받고 다시 山으로 올라갔다. 그러고 나서 대원들을 이끌고 해발 8700m 고지까지 오르는 강한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1997년 朴英碩씨는 「다울라기리」(8167m) 두 번째 도전에서 크레바스(설원이나 빙하의 갈라진 틈)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다. 후배와 함께 엄청난 폭풍설에 밀려 철수하는 길이었다. 워낙 숨은 크레바스가 많아 앞서 내려가는 후배의 발자국을 조심스럽게 밟으면서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이 푹 꺼져 들면서 몸이 허공에 던져졌다. 거의 반사적으로 온몸을 쭉 펼치고 헤엄치듯 했다. 어느 순간 추락이 멈추어졌다. 크레바스 속의 눈 턱에 걸린 덕분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정신을 차렸으나 이승인지 저승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픈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자 미친 듯이 위로 올라왔다. 갑자기 사라진 그를 찾던 후배가 구멍을 내려다보며 『형~』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朴英碩은 1963년 서울 남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6남매 중 위로 네 누나를 둔 長男으로 태어났다. 군납사업을 해온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했다.
 
  서울 숭의초등학교-동북중학교-오산고등학교, 모두 南山 기슭에 있는 학교들을 차례로 졸업하고 진학한 학교가 역시 남산 기슭에 자리 잡은 동국대학교다. 대학 시절 매일 남산 약수터까지 10km 뜀뛰기를 하며 체력을 다졌으니, 오늘의 朴英碩은 남산의 기운이 키워 낸 셈이다.
 
  朴英碩씨는 어린 시절부터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부친의 가르침에 따라 격투기에서부터 사격에 이르기까지 안 해 본 운동이 없다. 아들이 직업선수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그의 부친은 아들이 한 가지 운동에 빠져 들기만 하면 다른 운동을 시켰다.
 
 
 
 설악산과 「설악산 처녀」에 매혹당해
 
  오산高 시절 그는 사격부원이었다. 어느 날 오산중학 사격부 후배들을 모아 놓고, 『누나 있는 녀석들, 사진 안 가져오면 재미없다』고 윽박질렀다. 그중 순진한 한 후배가 사진을 가져왔고, 그 인연으로 高1 때부터 사귀기 시작한 동갑내기 설악산 처녀가 지금의 동갑내기 아내인 洪京姬씨다.
 
  여자친구 집은 설악산 五色(오색)의 나물·기념품 상점인 오색상회. 거기로 놀러갔다가 내친 김에 大靑峰(대청봉·1708m)까지 올라 보았다 설악산에 빠져버렸다. 방학 때마다 나중에 처남이 된 후배 홍승범씨며 친구들과 설악산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高3 때인 1980년 그는 동국大 마나슬루 원정대의 카퍼레이드를 보았다. 그 순간 「사나이라면 히말라야를 올라야 한다」는 엉뚱한 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고교 시절 朴씨의 대학 목표는 「어느 大學, 어느 科」가 아니었다. 한국 산악인들의 기억 속에 「비극의 산」으로 기억되고 있는 마나슬루를 등정한 동국大 산악부가 목표였다. 동국大 체육과에 입학했고, 즉시 산악부에 가입했다.
 
  朴英碩씨의 부모는 아들이 「登山狂(등산광)」이 된 것이 못마땅했다. 아버지는 운전기사를 시켜 몰래 동국大 산악부실을 급습, 아들의 장비를 몽땅 끄집어 내 불태워 버리기도 했다. 부모의 애원도, 만류도 朴씨의 뜨거운 山열정을 꺾지 못했다.
 
 
 
 「보스 기질」, 후배 사랑
 
  山 선배에 대해 깍듯한 예절을 차리기로 유명한 朴씨는 「보스 기질」 또한 대단한 것으로 평이 나 있다. 그가 인류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램을 이룩한 것은 그의 뛰어난 등반력과 함께 그를 따르는 후배 산악인들의 덕분이랄 수 있다. 朴씨는 평소에는 짜임새가 없는 듯하지만,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컴퓨터 같은 판단력을 발휘한다고 그의 후배 산악인들은 말한다.
 
  동료나 후배 대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대단하다. 1993년 에베레스트를 無산소 등반하게 된 것은 의도적인 면도 있었지만, 등정길에 나선 동료 대원에게 그의 몫으로 정해진 산소를 넘겨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95년 에베레스트 北東稜에서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발 8700m까지 등반하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보여 주었다. 이것 역시 고산등반 경험이 적은 후배들을 정상까지 안전하게 이끌기 위한 노력이었다.
 
  러시아의 「코뮤니즘」(7495m)에서는 등정 후 하산 길에 후배에게 우모복을 벗어 주었다가 동상에 걸려 困辱(곤욕)을 치렀다. 천산산맥의 「칸텡그리」(7010m)에서는 추위와 고소증으로 헤매는 후배를 안전하게 하산시키기 위해 등반을 포기하기도 했다.
 
  이번 북극점 원정에서도 45일째인 4월22일 洪成澤(홍성택) 대원의 생일을 맞아 비장해 둔 맥주와 과일을 꺼내 놓았다. 북위 88도에서 맥주와 과일 이상 호사로운 음식이 있을 수 없었고, 대원들은 感激(감격)했다. 이런 인간미 때문에 朴씨의 주위에는 늘 좋은 선후배들과 셰르파들이 포진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朴英碩씨가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히말라야에 인생 올인한 山꾼
 
  히말라야 등반 때문에 빚을 많이 졌다. 자존심이 강해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제대로 못 하는 그는 원정 때마다 모자라는 부분은 자기 주머니를 털어 해결했다. 첫번째 히말라야 원정인 「랑시사리」(6427m) 등반 때에서는 경비가 모자라 굶어 가면서 등반을 해야 했다.
 
  두 번째 히말라야 원정인 「랑탕리」(7205m) 초등 때에는 네팔 편도항공권만 마련해 네팔로 가서, 선배가 카트만두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여행자 숙소)에 한국 등반대들이 맡겨 놓은 장비를 얻어 내어 등반에 나섰다. 귀국할 길이 막연해지자 당시 결혼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예비 신부 洪京姬씨에게서 돈을 얻어내야 했다.
 
  등반을 주도하는 위치가 되면서 원정등반만 다녀오면 빚이 늘어났다. 朴英碩은 원정만 다녀오면 기자에게 『다시는 안 간다』고 수차 얘기했다. 그러나 결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91년 결혼 직후 에베레스트를 가기 위해 결혼 貝物(패물)을 팔았다. 히말라야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1992년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게스트하우스를 차렸다. 선배 산악인이 운영하던 것을 인수한 것이지만, 돈벌이 장소가 아니라 그의 네팔 히말라야 등정 베이스캠프였다. 그의 게스트하우스는 한국 산악인들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산악인들이 모이는 「산악인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1996년 안나푸르나 원정을 위해 부모님께서 마련해 준 아파트까지 팔아 버렸다. 산을 오르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던 그는 두 아들 성우(14)·성민(10)이 커 가는 모습을 보면서 굳은 결심을 했다. 「산에 관한 한 아빠가 최고라는 소리를 듣는 아버지가 되겠다」는 다짐이었다. 1996년 당시로서는 터무니없는 일로 여겨졌던 「1년 안에 8000m급 고봉 5개 연속 등정 시도」에 이어 「히말라야 8000m급 14개 거봉 최단기간 등정」을 발표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정상에 올라서서 두 팔을 번쩍 드는 순간 아들들의 이름을 외쳤다. K2 정상에서 두 아들 성우·성민의 이름을 부르며 『아빠가 드디어 해냈다』며 흐느꼈다. 그런 아빠의 노력 덕분에 두 아들은 朴英碩씨를 세상에서 最高(최고)의 남자로 생각하고, 또 잘 자라고 있다.
 
  朴英碩씨는 1994년 말 2년 동안 해오던 상업등반 전문여행사인 「국제캠프」에서 손을 뗐다. 한동안 유아용품 수입상을 운영하다 가까운 선후배들과 함께 고산등반 전문여행사인 「에베레스트 투어」를 차리기도 했다. 히말라야 8000m 14개 거봉 완등자인 嚴弘吉(엄홍길), 韓王龍(한왕용)씨가 한식구다.
 
 
 
 새로운 도전
 
  「영원무역」의 지원을 받으면서 등반활동을 해오다 2001년 K2 등반을 마친 뒤 영원무역 子회사인 「골드윈코리아」에서 이사 대우로 진급했다. 대학 산악부 후배와 함께 도봉산 입구에 「노스페이스」 대리점을 차려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2년 전에는 모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교수 자리까지 제의받았지만 사양했다. 그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두 아들만이 아니라 자라나는 모든 소년소녀들에게 도전의식을 키워 줄 만한 영웅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맨날 컴퓨터 앞에 앉아 지내고, 학교와 학원의 굴레에 갇혀 지내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안쓰럽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커서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을 만났을 때 과연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싶어요.
 
  뉴질랜드에서는 인류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인 에드먼드 힐러리卿(경)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5달러짜리 지폐에 그의 모습이 담겨 있고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를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인물이 나와 아이들에게 모험심과 도전의식을 키워 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朴英碩씨는 존경하는 힐러리卿을 남극점 탐험에 성공한 2004년 4월 초 방문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지낼 정도로 건강이 나쁜 상태에서도 朴英碩을 기꺼이 맞아 주었다.
 
  힐러리卿 역시 남극점에 다가선 적이 있었다. 그가 남극대륙을 횡단한 것은 근 반세기 전, 1953년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인류 최초로 등정한 지 4년이 지나서였다. 1957년부터 이듬해까지 농장용 트랙터를 타고 횡단했다. 힐러리卿은 『당시만 해도 남극대륙 횡단은 꿈도 꾸지 못했는데 트랙터 회사에서 후원을 해줘 시도했고, 그때는 방한복이 시원치 않아 엄청 추웠다』고 기억을 되살렸다. 그러면서 『頂上을 오르는 길은 쉽지 않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탐험가의 도전정신에서 나는 희망을 찾는다』며 당시 마흔한 살의 朴英碩씨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朴英碩씨는 老산악인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더 나아가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뒤에도 새로운 꿈에 부풀어 있다. 이제는 후배 뒷바라지에 전력을 다할 생각이다. 오는 7월 말에는 K2 베이스캠프를 방문할 계획이다. 2001년 사라진 후배 박영도 대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등산용품 태워 버린 아버지의 인정을 받다
 
  그는 산에만 가면 생기가 돈다고 말했다. 히말라야를 다녀올 때마다 『다시는 안 가겠다』고 다짐하곤 했지만, 곧 히말라야 기슭으로 돌아갔다. 그는 남극과 북극 탐험에 성공하면 다시 히말라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곤 했다.
 
  『체질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저는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이에요. 고비가 수없이 많았는데 여태껏 숨쉬고 있으니 말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神이 있기는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살아 있는 걸 보면 神의 簡擇(간택)을 받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히말라야의 女神께서 뭔가 계속하라고 저를 살려 두시는 게 아닐까요』
 
  2001년 14개 거봉 완등 축하연 때 朴英碩 대장은 누구보다도 반가운 손님을 맞았다. 아버지가 병중임에도 뉴질랜드에서 날아와 환영식에 참석해 준 것이다. 오랜 세월 갈등을 빚어 오던 아버지에게서 자랑스러운 아들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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