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04년 12월28일 푸껫州 파통 해변.
사망자 수가 1만~2만 명 정도에 이를 것이라는 외신보도를 접하면서 긴장하고 있는 터에 서울 데스크에서 푸껫으로 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푸껫은 홍콩에서 비행기로 세 시간 거리다. 취재 장비와 여름 옷가지 몇 개를 넣은 가방을 달랑 든 채 무작정 공항으로 나갔다.
드래곤 에어의 홍콩~푸껫 직항편 좌석의 3분의 2는 텅 비어 있었다.
승무원은 『당초 풀 부킹(만석)됐었는데 어제 지진해일 사고 소식으로 손님들이 대부분 예약을 취소했다』고 울상을 지었다.
푸껫의 참혹상은 이날 밤 도착한 푸껫 공항 입출국장에서 확연하게 다가왔다.
2층 출국장을 찾아가 보니 아수라장이었다. 방콕으로 나가는 10여 개의 항공사 카운터마다 헝클어진 머리와 옷을 대충 입은 관광객들로 장사진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이 스티로폼 일회용 도시락에 밥이나 태국식 국수를 담아 나눠 주고 있었다.
독일 뮌헨에서 연말 휴가차 푸껫에 부부 동반으로 왔다는 50代 후반의 아하트니크氏는 『지진해일로 호텔방에까지 물이 차 지갑과 돈, 휴대품 등을 모두 잃었지만 그나마 목숨을 건져 다행이다. 다른 많은 투숙객들은 가족들을 잃어 너무 슬프다』면서 침통해했다.
공항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푸껫 시내의 로열푸껫시티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
태국 전체 관광수입(연간 100억 달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天惠의 관광 名所 푸껫은 제주도의 절반 크기로 상주 인구가 16만 명에 달한다. 한국 관광객은 한 해 20만 명이 찾는다고 한다.
12월28일 아침 취재에 나섰다. 첫 목적지는 푸껫 서쪽의 파통 비치. 파통은 관광객을 상대로 한 각종 야간 쇼가 성행하는 최대 환락가이자, 200~250실 규모의 고급 대형 호텔들이 늘어서 있는 푸껫州에서 가장 큰 번화가였다.
6km에 이르는 해변을 빽빽이 메웠던 파라솔과 등받이 의자는 모두 사라졌다. 대신 사망자를 옮기는 軍 헬기가 서너 대 요란하게 백사장 위를 떠돌고 있었다. 해변가의 상점과 식당은 모두 창문이 깨져 있었고, 건물 쓰레기 더미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지진해일로 여러 대의 승용차들이 건물 안쪽이나 모래턱에 처박혀 있었다.
지진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지 사흘째였지만 사고현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에메랄드빛 파란 바다가 야속해 보였다. 인간세상은 지옥이었지만, 푸껫의 자연은 여전히 천국이었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노점상들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고, 두꺼운 마스크를 낀 군인들은 옷을 땀으로 적시면서 뒤집힌 승용차를 세우고 돌무덤에 깔린 사람들을 빼냈다. 손으로 작업하느라 일의 진척이 느렸다.
해변 가까이에 있는 르 메르디앙 푸껫 비치 리조트 호텔은 1층 유리창이 모두 깨졌고, 야외 수영장은 汚物 범벅이었다. 호텔 지배인은 『물과 전기의 공급이 끊겨 투숙객을 모두 내보냈다. 언제 손님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말을 아꼈다.
인근 「카타 비치 리조트」에 투숙했던 스웨덴 관광객 아그네타 구스타프손(52·여)씨는 『12월26일 오전 10시경 갑자기 바닷물이 300m 이상 빠져나가더니 엄청난 파도가 호텔을 덮쳤다』면서 『가슴까지 물이 차올라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호텔 기둥을 붙잡고 버텼다』고 말했다.
푸껫에서 가장 붐비는 곳은 병원이었다. 푸껫 방콕 인터내셔널 병원은 밀려드는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2층 휴게실에도 매트리스를 깔아 간이침대 30여 개를 만들어 놓았다.응급실에서 만난 호주人인 리즈 보드먼 (56)씨 부부는 『바다로 빨려나가는 시체를 바라볼 때 느낀 충격은 인생 최대의 고통이었다』며 울부짖었다. 이들은 『해일이 덮치기 직전 바다가 큰 숨을 들이쉬는 듯 갑자기 바닷물이 200m 정도 빠져나가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며 『순간 무조건 육지를 향해 뛰었다』고 회고했다.
이날 오후 7시 무렵 푸껫 시내 삼콩 지역의 불교 사원 「왓코짓」에는 두 개의 촛불이 켜졌다. 지진해일로 사망한 한국인 네 명의 넋을 기리기 위한 합동 분향소가 마련된 것이다.
자정을 넘어 까오락 리조트에서 시신이 발견된 신혼부부 이혜정(26·여)씨의 시신이 든 관이 도착하자, 주변을 지키던 교민들이 일렬로 줄을 서 큰절로 고인의 넋을 달랬다.
지진해일의 충격은 푸껫의 한국 교민 사회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한국인 모씨가 운영하는 파통 해변의 「판와 스파」는 지붕만 남긴 채 무너져 버려 3억원이 넘는 투자금을 고스란히 날리게 됐다.
푸껫 한인들의 「밥줄」이던 한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은 하루 아침에 끊어졌다. 한 여행사 사장은 『1월에 푸껫으로 신혼여행을 오기로 했던 100여 쌍의 신혼부부가 예약을 모두 취소했다. 2월 예약을 취소하는 전화도 줄을 잇고 있다. 지진해일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방콕까지 예약이 70% 정도 취소됐다』며 울상을 지었다.
진명표 한인회장은 『그래도 지진해일은 일회성이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염병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보다는 낫다』며 『우리 나름대로 정성과 노력을 모아 새 출발을 준비할 것』이라며 각오를 다졌다.
지진해일 발생 5일째인 12월30일, 20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팡아州 까오락 휴양지를 찾았다. 땅바닥에 여행객들의 배낭과 옷가지 등이 널려 있고 곳곳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말 그대로 「阿鼻叫喚(아비규환)」을 연상케 했다.
푸껫에서 북쪽으로150여km 떨어진 까오락은 팡아州가 이웃 푸껫州를 능가하기 위해 州 정부 차원에서 야심만만하게 지어 최근 완공한 첨단 리조트 단지다. 바다에 바로 붙어 있는 방갈로型 휴양 호텔들이 해변을 따라 즐비했다.
이 일대는 폭격을 맞은 듯 폭 200여m의 해변 전체가 초토화돼 있었다.
까오락과 푸껫州를 잇는 왕복 2~4차선의 4번 국도 주변에는 건물 잔해 속에서 꺼내 흰 천을 덮어 놓은 수백 구의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시신이 썩는 냄새가 진동해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는 돌아다니기 어려웠다.
푸껫에서 「잠롱 닷컴」 사이트를 운영하는 교민 김대홍씨는 『까오락에서 방콕 방면의 타쿠압에 이르는 20여km 구간 해변에는 관광지와 현지인 마을이 있었지만 5m가 넘는 바닷물이 삼켜 옛날 모습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는 『지진보다 해일이 훨씬 더 무서운 것 같다. 지진이 나면 건물 틈 등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지만, 해일은 전체를 휩쓸고 가 생존자가 거의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해변가에 드문드문 설치된 구호품 배급소에서는 먹을 것과 옷가지를 얻으려는 난민들의 아우성과, 구호품을 얻은 사람들을 태운 픽업 트럭이 울리는 경적 소리로 아수라장이 됐다.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차오밍(43)씨는 『먹을 물도 부족하고 밤에 모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고 호소했다.
팡아州 정부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의 80%가 해변 근처에 살던 태국인들이고, 나머지 20%의 외국인 관광객이다. 외국인 중에는 장기 휴양을 온 유럽인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팡아州의 해일 피해 지역만 직선 거리로 60km에 달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태풍·지진 같은 대자연의 재해를 거의 겪어 보지 못한 태국인들의 경험과 준비 부족으로 현장 정리와 시신 발굴 등은 턱없이 느리고 답답해 보였다.
까오락에는 세 쌍의 한국인 신혼부부가 여행을 왔다가 한 쌍만 간신히 목숨을 건져 귀국했고, 나머지 두 쌍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 12월28일 시신이 발견된 이혜정씨의 남편 조모(28)씨를 찾기 위해 양가 부모와 직장 동료들이 와 있었다.또 다른 신혼부부인 이모(30)씨와 허모(여·31)씨의 가족들도 시신을 찾기 위해 30℃가 넘는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가족들은 신혼부부의 여행가방을 붙들고 오열하다 혼절하길 반복했다.
결혼 하루 만에 삶을 마감하리라고 생각할 신혼부부가 어디 있었을까? 한 신혼부부의 경우 결혼식 날 신랑은 좋은 신부를 얻었다고 『만세』를 三唱했고, 신부는 한 살 연하의 신랑을 얻어 『땡잡았다』를 세 번 외쳤다고 한다.
낯선 외국에서 「시신만이라도 수습해 갔으면」 하는 가족들의 간절한 소망을 감안해 서울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팀과 경찰청 지문감식 요원들이 두 명씩 파견됐다. 이들은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시신만 있으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한국인인지를 확인하느라 흙탕물과 수천여 구의 시신들을 일일이 뒤적이는 死鬪를 벌였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소속의 박희찬 경사는 세 명의 요원과 함께 크라비 지역 병원은 물론 시신이 쌓인 곳마다 돌아다니며 8일 동안 지문감식을 했다. 그는 신발이 시신에서 나온 구더기로 범벅이 되는 바람에 신발을 버리고 슬리퍼를 끌고 지난 1월8일 인천行 비행기를 탔다.
경력 23년의 베테랑 경찰관인 그는 『삼풍백화점 사고 땐 그나마 얼굴이라도 남아 있어서 확인이 쉬웠던 편이다. 삼풍사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사현장이었다』고 말했다. 『닷새 동안 한국인 시신 네 구를 확인한 것만도 기적에 가깝다』고 한다.
새해 첫날인 1월1일 낮에는 승용차로 2시간30분 정도를 타고 가 크라비 지역을 찾았다. 피피 섬에서 희생된 관광객들의 시신을 한데 모아 신원을 확인하는 곳으로, 한국인 실종자 가족 10여 명이 며칠 전부터 陣을 치고 있었다.
피피 섬은 인근 「제임스 본드 섬」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관광지이다. 일반적인 푸껫 단체관광 코스는 피피 섬과 제임스 본드 섬, 시내관광 각 1박으로 3박4일 코스를 채우는 게 보통이다.
피피 섬은 평소 하루 평균 방문객이 2000명을 웃돌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희생자는 사망과 실종자를 포함해 16명 남짓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얘기들이 곳곳에서 흘러 나왔다. 「선 타임 트래블」社의 황명현 사장은 그 이유를 나름대로 이렇게 풀이했다.
『12월25일이 성탄절이었는데다 올해 방학이 늦어 12월24~25일 무렵 한국인 관광객들이 평소의 절반도 안 되는 하루 평균 700명 수준으로 줄었어요. 반대로 유럽인들은 이 무렵 대거 몰려와 호텔 방값이 치솟았지요. 당연히 배낭여행객들은 피피 섬에 올 수 없었습니다. 또 우연의 일치겠지만 서울로 가는 비행기편 때문에 12월26일 아침 피피 섬에 간 한국인 단체여행객들은 모두 50명이 채 안 됐어요. 만약 지진해일 발생 날짜가 며칠만 늦었더라도 최소 수백 명의 한국인 사상자가 생겼을 겁니다』
12월26일 사고 당일 아침 두세 차례의 큰 해일이 좌우편에서 한 차례씩 피피 섬 해변을 때려 2000여 명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됐다.
피피 섬에서 건져 낸 시신들을 모아 놓은 크라비 사찰에 들어가는데,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마당에 들어서자 바닥에 200여 구의 시신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사망한 지 닷새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퉁퉁 부어 올라 形體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30℃를 오르내리는 날씨와 습기가 主犯이었다.
대다수 시신의 머리 부분은 이미 시꺼멓게 썩어 있었다. 치아나 반지·목걸이 같은 장신구나 신체 부위의 커다란 특징이 없다면 원천적으로 男女 구분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실종자 유족들은 가족의 시신을 찾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날 발견된 K씨(여·44)는 배에 있는 수술 자국과 반지 덕택을 봤고, 남자친구와 함께 피피 섬에 갔다가 실종됐던 J씨(23)는 오빠의 기억력이 일등공신이었다.
서울에서 온 오빠는 『목걸이에 고양이 문양이 있고 속옷은 회사에서 경품으로 받은 「록시(ROXY)」 상표일 것』이라고 귀띔했다. 까오락에서 발견된 L씨(여·26)는 방갈로 지붕 콘크리트에 상반신이 깔렸지만 어머니가 사준 귀고리 때문에 간신히 신원을 확인했다.
어머니가 『귀고리 양쪽의 짝이 각각 다르다』고 알려줘 곧바로 태국 경찰에 시신 인도를 요구했던 것이다. 모두 남다른 가족 사랑과 直感力, 눈썰미 같은 「힘」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월3일 오전 10시쯤에는 이재민 구호센터가 마련된 태국 푸껫 시내 「쌀라클랑」 도청 광장을 찾았다.
가족이 뿔뿔이 친척집으로 흩어졌다는 피차야 쿠낫(24·여)씨는 『부모님 시신이라도 찾아야 하는데, 모래 속에 묻혔는지 깊은 바다 속으로 휩쓸렸는지…』라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파통 해변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브리 파랏좁(28)씨는 『가게들이 다 부서져 두세 달은 실업자로 지낼 텐데… 그렇다고 푸껫에서 600km나 떨어진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고 했다.
신분증·사회보험증서 복사본 한 장씩과 피해증명서류를 손에 쥔 이들은 서너 시간 동안 줄을 선 탓인지 충혈된 눈에 피곤한 표정이 역력했다.
지진해일로 남편을 잃었다는 40代 중반의 여성은 『오전 6시30분부터 줄을 서서 네 시간 만에 2만 바트(60만원)의 보조금을 받았다』며 『앞으로 애들 셋과 어떻게 살지…』라며 한숨을 지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탁신 총리가 행정력을 발휘해 사태를 장악했다는 사실이다. 탁신 총리는 사고 직후부터 수시로 푸껫·팡아·크라비州 등 사고현장을 수시로 찾아 신속한 피해 복구와 생존·사망자 발굴에 軍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총력을 경주하라고 독려했다.
인근 인도네시아나 스리랑카 등의 시종일관 지리멸렬한 정부 대응과 확연하게 차별되는 측면이었다. 당초 우려됐던 콜레라 등 전염병 창궐 가능성도 태국에 관한 한 「뜬소문」에 불과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윌리엄 앨디스모(58) 태국지부장은 『지난해 7월 이후 태국 정부가 조류독감 발생에 대비해 신속대응팀을 가동해 온데다, 방역작업에 철저를 기해 최소한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전염병도 접수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열흘 만에 다시 돌아온 푸껫 공항은 처음 도착 당시와 정반대로 텅 비어 있었다. 공항 카운터 직원들의 얼굴은 더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다. 필자를 포함한 승객들도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랄까, 「罪스러움」 때문인지 謹愼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연말연시를 재난현장 취재에 고스란히 바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인간의 연약함과 무기력, 그리고 인류애의 소중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아울러 삶과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동전의 앞뒷면 같다는 평범한 진리가 머리를 스쳤다. 단 1~2초 차이로 삶과 죽음의 운명이 극명하게 엇갈렸다는 수많은 증언과 無言의 절규하는 듯한 屍身 모습들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