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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프랑스의 親나치 청산, 우리의 모델인가

「청산」의 역사 되풀이하면서 국력 쇠퇴… 그런 프랑스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

김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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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政變 때마다 대량 살육극을 자행하면서, 「청산」과 「처단」의 역사를 되풀이해 왔다. 비시 정권에 대한 斷罪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청산」과 「처단」의 역사 속에서 프랑스의 국력은 쇠퇴하고, 프랑스는 세계사에 기여한 것이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반면에 「계승」과 「改善」의 길을 밟아온 영국은 산업혁명·의회민주주의·시장경제라는 유산을 인류에게 남겨 주었다.

金 光 東
1962년 충북 충주 출생. 고려大 정치외교학과·同 대학원 졸업. 한국발전연구원 연구위원, 국회의원 보좌관, 美 스탠포드大 후버연구소 객원연구원, 고려大·숙명女大 강사 역임.
一刀兩斷할 수 없는 역사
  지난 8월15일 盧武鉉 대통령은 제59회 光復節 경축사를 통해 역사 청산의 시작을 알리는 봉화를 올렸다. 대한민국의 왜곡된 역사, 桎梏(질곡)의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8월25일에는 『다른 나라는 다 역사 청산을 했는데 우리만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고, 나라와 공동체를 배반한 사람들이 득세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역사 청산 없이는 3만 달러 시대가 될 수도 없고 그렇게 돼도 지켜낼 수 없다』며 『경제를 핑계로 역사 청산을 회피하려는 기도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나섰지만, 그 정치적 배경에 대해 의심을 품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과거사 청산」 때문에 나라가 소란스러웠던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5년 전에는 제5공화국을 청산한다며 온 나라가 떠들썩했었다. 全斗煥(전두환) 前 대통령이 백담사로 유배를 갔다. 10년 전 金泳三 정부 시절에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명분으로 全斗煥·盧泰愚 前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다.
 
  하지만 그 결과 과연 역사가 바로 세워졌는지, 民族正氣가 확립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역사에 대해 하나의 기준을 설정하고, 그에 의거해 잘못된 역사를 청산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복잡한 것이다. 오히려 역사를 보면 「과거사 청산」은 항상 「현재 권력」을 가진 자가 「미래에도 계속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 권력」을 裁斷(재단)하는 것인 경우가 많았다.
 
  과거사 청산은 어렵다. 그 주체와 대상이 서로 무수히 얽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사는 한 개인의 삶조차도 愛國과 반역, 左翼과 右翼, 保守와 進步로 一刀兩斷(일도양단)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이다. 이것이 바로 36년 이상 식민지에서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적나라한 현주소다.
 
  특정 시기, 특정 시점만 현미경을 가지고 확대해서 본다면 처단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특정 시대의 특정 시각으로만 본다면 돌을 맞고 능지처참당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심지어 朴正熙 정권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였던 張俊河(장준하)도 5·16 직후 「思想界(사상계)」誌를 통해 군사혁명을 찬양했었다. 그렇다고 張俊河를 쿠데타 동조세력으로 규정해야 하는가?
 
 
 
 「청산」과 「처단」의 프랑스史
 
   과거사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 하는 얘기가 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 附逆者(부역자)들을 철저하게 청산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웠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盧武鉉 대통령도 『프랑스는 4년 남짓 동안의 점령기간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대항한 30만 명의 레지스탕스를 인정하고 포상했는데, 왜 우리는 50년이 넘는 식민시대에도 불과 1만 명밖에 포상하지 못하고 있는지 부끄럽다』고 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라도 抗日경력이 있으면 포상하자는 얘기가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 정말 우리가 모델로 삼을 만한 것인지, 프랑스 역사의 특질을 간과하고,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원래부터 近代 이후 프랑스의 역사는 「청산」과 「처단」을 반복해 온 역사다. 政變(정변)이 발생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예사로 수천 명을 처단·학살해 온 것이 프랑스의 근대사다. 어떻게 보면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나치 청산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후의 역사를 보자. 공포정치를 주도했던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斷頭臺(단두대)로 보내면서, 자신은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더욱이 로베스피에르는 「淸廉志士(청렴지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확신이 강했던 그는 다른 사람들의 과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다. 50만 명이 체포됐고, 단두대에서의 처형, 혁명파와 王黨派 간의 충돌, 농민폭동 등으로 17만 명이 희생됐다. 그러나 1년 여의 공포정치 끝에 로베스피에르 자신도 1794년 7월28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수년간의 혼란에 지친 프랑스 국민들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사 쿠데타와 독재정치, 그리고 帝政을 받아들였다. 나폴레옹은 국내 정치·경제를 안정시키고, 對外전쟁에서 승리하여 프랑스의 위신을 드높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92만 명에 달하는 프랑스 軍民의 죽음이 있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王家가 복귀하자 이번에는 과격 왕당파가 과거청산에 나섰다. 「白色공포」 정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약 7만 명이 체포·투옥·처형됐다.
 
  1830년 7월 샤를 10세의 극단적 反動정치에 항거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샤를 10세는 망명하고, 부르봉 王家의 傍系(방계)인 오를레앙家의 루이 필립이 새 국왕으로 추대됐다. 그 와중에서 1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초기에는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던 루이 필립이 反動化되자 1848년 2월 혁명이 발생했다. 파리 거리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시위와 총격전이 계속됐다. 王政이 폐지되고 제2공화정이 들어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2공화정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는 1851년 親衛 쿠데타를 일으켜 종신 대통령이 되더니, 얼마 후 나폴레옹 3세로 帝位에 올랐다. 『황제 만세!』라는 함성이 全프랑스를 뒤덮었다. 그 과정에서 600명 이상이 학살되고, 2만7000여 명이 체포됐으며, 1만 명이 알제리로 유배됐다.
 
 
 
 프랑스의 親나치 청산
 
   1871년 나폴레옹 3세가 普佛전쟁에서 패배해 포로가 되자, 프랑스 국민들은 즉시 帝政을 폐지하고 제3공화정을 선포했다. 이 과정에서 일단의 공산주의자들이 수도 파리를 장악하고 「파리 콤뮨」을 수립했다. 제3공화정 정부는 무력으로 파리 콤뮨을 진압했다. 2만여 명이 살해되고, 4만 명이 체포됐으며, 7000여 명이 해외 식민지로 유배됐다.
 
  이런 혁명과 反혁명, 부정과 처단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동안, 한때 유럽 대륙의 覇者(패자)이던 프랑스는 유럽의 覇權을 독일에게 넘겨주게 됐다. 普佛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방을 독일에 할양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의 침략을 받아 13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독일군의 電擊戰(전격전)에 굴복하고 말았다. 국토의 상당 부분이 독일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非점령지역內에 비시(Vichy) 정부가 들어섰다(1940~1944).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필립 페탱 元帥가 이끄는 비시 정부는 左右를 막론한 국민들의 지지 속에 출범했다. 1930년대 左右翼 갈등과 非효율적인 정치체제가 敗戰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국민들은 페탱이 내세운 「민족혁명」이라는 주장에 열광적으로 동조했다.
 
  후일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한 프랑수아 미테랑 前 프랑스 대통령 등도 초기에는 페탱 정권의 열렬한 지지자 가운데 하나였다. 곳곳에 페탱의 초상화가 걸리고, 페탱의 초상이 성냥갑, 달력 등 모든 일상용품에 새겨졌다. 『프랑스는 페탱을 위한 것이며 프랑스는 페탱이다』는 가사의 찬미가가 유행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페탱 정권은 모든 실패와 惡의 근원으로 매도됐다. 페탱을 비롯한 비시 정부를 주도했던 인물들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었다.
 
  「對獨협력자」에 대한 추적이 벌어졌다. 200만 명이 조사대상에 올랐고, 99만 명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재판도 하기 전에 약 1만 명이 즉결처형됐다. 6763명이 死刑 선고를 받았고, 그 중 786명이 死刑에 처해졌다. 4만 명이 징역刑, 2702명이 終身 강제노동刑을 선고받았다. 약 9만 명이 有罪 선고를 받았다. 페탱 元帥도 1945년 8월, 특별법정에서 死刑 선고를 받았으나, 終身刑으로 減刑(감형)됐다. 그는 1951년 뒤섬의 감옥에서 95세를 일기로 獄死(옥사)했다.
 
  「프랑스의 대숙청」은 단순히 對獨협력자들에 대한 숙청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프랑스 대혁명 이래 공화주의의 理想을 지키려는 세력과 권위주의적 국가개조를 추진하던 세력, 進步와 保守, 左翼과 右翼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표출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의 대숙청」은 政變이 있을 때마다 대규모 유혈 사태를 겪었던 프랑스 정치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프랑스는 근대사에서 기여한 것 없어
 
  이러한 프랑스의 역사는 성공작이었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혁명 이후 「청산」과 「처단」으로 점철된 프랑스의 역사는 실패한 역사이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맞아 실시됐던 각종 여론 조사 결과를 봐도 대다수 프랑스人들은 『과거의 혁명이야말로 지속적인 재난이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청산」과 「처단」의 역사를 되풀이했던 프랑스가 세계사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도 의문이다.
 
  반면 「청교도 혁명」이라는 막간극을 제외하면, 「전통의 계승」과 「점진적 改善」을 추구해 온 영국은 인류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산업혁명을 통해 인류를 번영의 길로 인도한 것도,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해 근대 민주정치체제의 전형을 만든 것도 영국이었다. 재산권 보장과 자유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시장경제체제를 확립시킨 것도 영국이었다. 영국은 산업혁명과 의회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시장경제라고 하는 세계 근현대사의 3大 과업을 앞장서서 수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지난 200여 년 동안 「역사 청산」만을 되풀이했을 뿐, 인류가 진보하는 데 기여한 것은 별로 없다.
 
  만약 프랑스가 기여한 것이 있다면 잘못된 「역사 청산」의 전형을 제3세계에도 전수했다는 것이다. 그 한 예가 캄보디아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캄보디아의 역사 청산은 프랑스식 「청산」과 「처단」의 결정판이었다. 폴 포트의 크메르 루즈가 집권한 4년여 동안 학살과 강제이주, 강제노동, 기아와 질병으로 300만 명이 죽었다. 폴 포트를 비롯한 크메르 루즈의 핵심인사들이 프랑스 유학생 출신이라는 것을 단지 우연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프랑스는 제3세계의 민족주의가 反西歐주의로 가게 만든 원인도 제공했다. 프랑스는 가혹하고 착취적인 식민지 경영으로 식민지 국가에서 민족주의를 고양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脫식민주의라는 세계사의 흐름에 逆行해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들을 그대로 유지하려다가 알제리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등을 치렀다. 가혹한 식민통치와 치열한 독립전쟁 끝에 독립을 쟁취한 나라들은 자연히 反서구·親사회주의를 지향하게 됐다. 라오스·캄보디아·베트남 등 아시아의 後進국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옛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반면에 영국의 식민지들은 영국의 제도를 이식받아 비교적 용이하게 정치·경제적 근대화를 이룩했다. 독립과정도 비교적 평온했다. 미국·캐나다·호주 등 西方선진국들은 물론이고, 홍콩·싱가포르 등도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인류사에 기여한 것도 없이 「청산」과 「처단」의 역사를 되풀이해 온 프랑스의 역사가 과연 우리가 본받을 만한 역사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청산」과 「처단」의 조선史
 
  더구나 프랑스의 비시 정부 4년과 日帝 36년은 엄연히 다르다. 지금 우리가 역사청산의 대상에 올려놓은 사람은 日帝시대를 초래한 사람들이 아니라, 日帝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日帝시대에 태어나 교육받고 삶을 영위한 사람들이 日帝와 연관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다. 죄를 묻는다면 日帝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日帝 식민통치를 초래한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 中·後期의 爲政者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비시 정부 시대의 親獨, 親나치즘이라고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였고, 그것도 불과 4년이란 짧은 기간의 문제였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日帝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이미 1894년 淸日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시점부터이다. 넓게 보아 日帝시대는 그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우리가 日帝 식민지로 떨어진 기간에 그 이전 1000년간 종주국으로 행세하던 중국조차 列强의 半식민지로 전락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近代的 문물이 도입됐고, 일찍이 조선 역사에 없었던 年평균 4%대의 경제성장이 계속되었다. 민족운동가들조차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中日전쟁을 거치면서 민족독립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 당시 역사의 기록이다.
 
  따라서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우리 세대가 당시 세대에게 오늘의 시각에서 『왜 光復에 대한 희망을 갖고 끝까지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사회가 과거사 청산을 들고 나오는 것은 조선시대의 前근대적 통치행태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특히 조선 後期의 역사는 士禍(사화)와 換局(환국), 剖棺斬屍(부관참시), 유배, 陵遲處斬(능지처참), 賜死(사사) 등으로 얼룩진 「청산」과 「처단」의 역사다.
 
  庚申換局(경신환국·1679)으로 100여 명의 南人계열이 처형되거나 유배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肅宗(숙종) 15년(1698)에는 己巳換局(기사환국)으로 18명이 斬刑(참형)·賜死(사사)되고, 103명이 유배됐다. 그 후 甲戌換局(갑술환국·1694), 辛丑換局(신축환국·1720), 丁未換局(정미환국·1727) 등 政變이 있을 때마다, 반대 黨人에 대한 숙청이 되풀이 됐다. 景宗(경종) 때 辛丑換局에서는 死刑, 杖殺(장살) 및 絞殺(교살)된 자의 수가 63명에 달했고, 114명이 유배됐다.
 
  이런 「청산」과 「처단」의 역사가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왜냐하면 오직 권력을 목표로 한 「상대편 죽이기」요, 300여 개 남짓한 핵심 官職(관직)을 두고 벌이는 저열한 권력 다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주 과거청산을 벌여서, 조선 역사는 깨끗하고 순수해지고, 民族正氣가 바로 서고, 그 바탕 위에서 나라가 발전을 거듭했던가? 백성들은 苛斂誅求(가렴주구)에 시달리고, 나라는 쇠퇴한 끝에 日帝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던가?
 
 
 
 애송이들이 나서는 역사 청산
 
  더구나 역사 청산의 주체를 보면 그 어디에나 애송이들이 설친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프랑스 공포정치 시대를 이끌었던 로베스피에르 등은 30代 젊은이들이었다. 캄보디아 전역을 「킬링 필드」로 만들었던 크메르 루즈는 10代 후반~20代였다. 毛澤東(모택동)의 문화대혁명에 앞장섰던 紅衛兵(홍위병),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활약했던 볼셰비키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의 역사 청산을 주도한다는 우리 386세대도 마찬가지다. 이 나라를 건설하는 데 삽질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세대가 완장을 차고 나서고 있다. 그들은 힘겹게 日帝 강점기와 전쟁을 겪은 후 산업전선에서 피땀을 흘려가며 일했던 세대에게 존경의 뜻을 표하기는커녕,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 추궁하고 있다.
 
  권력이 시작한 역사 청산이나 역사 바로 세우기가 성공한 예는 없다. 역사는 권력의 몫이 될 수 없기에 권력이 주도하는 역사 청산은 권력투쟁일 뿐이다. 그리고 그 피해자는 항상 권력이 없는 자와 일반 국민이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역사 청산」을 주장하는 자들은 입으로는 「民族正氣」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역사 청산의 이름으로 반대세력에게 「親日派의 후손」이라는 烙印(낙인)을 찍어, 자신들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장차 정권 再창출의 기반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역사 청산」을 주장하는 裏面(이면)에는 金日成에 대해 「抗日투쟁」을 했다는 월계관을 씌워줌으로써, 金日成-金正日 정권의 反민족적 범죄행각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봉건제 청산, 日帝 청산, 군사정부 청산, 5·6共 청산 등 수많은 역사 청산이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역사가 청산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는 청산되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이다. 후세대가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 잘못된 과거가 초라해 보이도록 만들 때 비로소 그 과거는 극복되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진정 日帝 강점기에 대한 과거 청산 의지가 있다면, 일본보다 더 잘 살고 세계사에 기여하는 나라를 만드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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