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취임 이후 9개월여 만인 2003년 12월 초 미국을 방문,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양국관계의 기본틀을 설정해 놓은 溫家寶(온가보·60) 중국 국무원(내각) 총리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溫총리가 13억 중국인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1998년과 1999년 여름. 당시 국무원 부총리였던 그는 大홍수가 2년 연속 중국을 강타했을 때 楊子江 수해 현장을 장화 차림으로 누비며 『재해를 막아 내자』고 독려함으로써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42년 天津 출생으로 北京 지질학원(대학) 출신의 전문기술관료인 溫家寶는 胡耀邦(호요방·1989년 사망)-趙紫陽(조자양)-江澤民(강택민)으로 이어진 3代의 공산당 총서기들로부터 모두 인정을 받아 「三朝의 공신」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중국 권력서열 1위인 黨 총서기를 측근에서 모시는 黨 중앙 판공청(辦公廳) 주임, 다시 말해 비서실장을 3代에 걸쳐 지낸 독특한 이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그가 모시던 黨 총서기들이 부침을 거듭해도 溫家寶는 살아남았다.
그는 자신을 중앙판공청의 부주임으로 발탁해 준 胡耀邦 총서기가 1986년 1월 최고지도자였던 鄧小平 등의 미움을 사 실각하고, 趙紫陽 후임 총서기가 1989년 天安門 사태로 퇴진했을 때도 자리를 굳게 지켰다.
총서기와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중앙판공청 책임자 역할을 세 번에 걸쳐 지낼 수 있었던 것은 溫총리의 원만한 성품, 거의 없다시피한 정치적 색채, 빈틈 없는 업무처리 등이 높이 평가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부 외교 소식통들은 溫家寶 총리와 우리나라의 高建 총리가 여러 면에서 흡사하다는 얘기를 종종 한다.
溫家寶 총리는 교육자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중학교와 초등학교의 지리·국어 교사였고, 할아버지는 사립학교 교장을 지냈다. 그런 탓인지 학창시절 부모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조국의 탄광개발에 힘쓰라』는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北京 지질학원에 입학했고,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甘肅省(감숙성)에 下放(하방: 간부나 지식인을 사상무장을 위해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것)돼 14년간 지질분야에만 근무했다.
그러던 중 孫大光(손대광) 당시 지질광산부장(장관)의 눈에 띄었고, 孫부장은 그의 해박한 지식과 정연한 논리에 감탄하며 당시 감숙성 지질국 부국장으로 근무하던 溫家寶를 「살아 있는 감수성 지도」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孫부장은 그를 喬石(교석) 당시 공산당 조직부장과 胡耀邦 총서기에게 추천, 지질광산부 부부장으로 영전시켰고 이후 그는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溫家寶 총리는 지금도 일밖에 모르는 「무색무취」한 인물이기 때문에 파워게임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지 않고, 스스로 몸을 낮출 줄 알며,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성품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늘 경제학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경제의 총수격인 총리에 「적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현재 정치국 상무위원들로서 권력서열 1~4위인 胡錦濤(호금도)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吳邦國(오방국) 전국인민대표대회(의회) 상무위원장, 曾慶紅(증경홍) 국가 부주석 등과 함께 「제4세대 새로운 중국」을 이끌어 갈 溫家寶 총리 앞에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느냐는 과제가 놓여 있다.
하지만 2003년 12월8~11일 미국을 방문하면서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臺灣문제와 관련해 「하나의 중국」 원칙을 再확인받아 실리를 챙기고, 對中 무역수지 적자 해소와 元貨 평가절상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유연하게 일부 수용함으로써 미국의 우려를 해소하는 등 21세기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새 轉機를 마련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국제무대 데뷔는 일단 합격점이라는 평가인 셈이다. 앞으로 韓中 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두고 볼 일이다. 게다가 중국 내부적으로는 경제개혁과 행정개혁, 또 최근 중국사회의 문제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격차 해소 등의 난제를 어떻게 풀어갈지도 관심사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