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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때마다 자신을 버리고 남을 구한 휴머니스트 산악인 韓王龍

해발 8000m에서 자신의 산소통을 조난자에게 주어버린다는 것

한필석    ps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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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이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의 限界는 어디까지일까
2002년 브로드피크 베이스캠프를 향하던 중 환하게 웃고 있는 韓王龍
  매스컴을 통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고 다른 이를 구해 낸 美談(미담)을 들으면 누구든 마음이 훈훈해진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달려오는 열차에 깔릴 위험을 무릅쓰고 철길에 뛰어든 사람도 있고, 물에 빠진 이를 구하려 자신이 헤엄을 제대로 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 물로 뛰어든 사람도 있다.
 
  산악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훈훈한 얘기를 남긴 이들이 여럿 있다. 韓王龍(한왕용·37·한고상사 과장)이 그 중 한 명이다. 엄홍길, 박영석의 그늘에 가려 매스컴의 화려한 조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어떤 산악인도 감히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殺身成人(살신성인)의 행동을 보인 휴머니스트 산악인으로 통하고 있다. 1992년 天山山脈(천산산맥)의 칸텡그리(7010m)를 정복하며 고산 등반을 시작, 8000m급 巨峰(거봉) 12개를 등정한 그는 神(신)의 영역으로 일컬어지는 고산에서 生死(생사)의 갈림점에 서 있는 산악인을 구해 내는 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에베레스트(8848m) 8700m 고지에서 다른 원정대 대원을 안전하게 하산시키려고 다섯 시간 이상 머무는가 하면, 포베다(7439m) 등정을 마치고 역시 他원정대의 대원을 구하려다 자신의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2000년 여름 K2(8611m) 등반 때는 해발 8000m가 넘는 高所(고소)에서 산소호흡기가 고장나 고통을 겪고 있는 선배에게 자신의 산소호흡기를 건네 주기도 했다.
 
 
 
 해발 8700m 고지에서 5시간여 머물러
 
 
 
 
  특히 그의 에베레스트 逸話(일화)는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산악인들 사이에서 미담으로 膾炙(회자)되고 있다. 1995년 10월14일 오후 1시50분, 그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頂上(정상)에 서 있었다. 그에게는 1993년 네팔 쪽으로 시도한 첫 번째 도전에 실패한 이후 티베트 쪽으로 도전한 두 번째 등반에서 이루어 낸 快擧(쾌거)였다.
 
  1993년 그가 에베레스트에 처음 도전할 때 연이은 궂은 날씨에 애를 먹었지만 1995년에도 쉽지는 않았다. 그가 속한 개척산악회 원정대(대장 이동호)는 朴英碩을 비롯한 국내 최강의 대원들로 구성, 에베레스트의 여러 능선 중 가장 길고 험난한 北東稜(북동릉) 루트에 도전했다. 그러나 등반을 시작하자마자 눈사태를 맞아 셰르파(sherpa) 한 명이 사망하고 등반대장 朴英碩은 갈비뼈 세 대에 금이 가는 사고를 당했다. 그럼에도 韓王龍을 비롯한 대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두껍게 쌓인 눈을 헤치며 頂上을 향해 밀어붙였다.
 
  그러나 북동릉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를수록 눈이 깊어지고 예상 못 했던 지점에서 칼날 같은 암릉과 설릉이 나타났다. 韓王龍은 동료 대원과 함께 해발 7800m 지점에 제4캠프를 구축, 마지막 難區間(난구간) 돌파를 위한 전진기지를 마련했지만, 다른 대원들은 이미 지친 상황이었다.
 
  북릉을 경유한 북동릉 루트로 등반로를 바꾼 원정대는 전체 대원 8명 가운데 7명이 頂上 직하 150m 지점까지 오르며 막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같은 루트로 등반한 다른 한국팀들과 인도팀이 갑자기 나타났다. 세 팀이 함께 세 개의 바위절벽으로 이어지는 難區間과 급경사 설릉을 거쳐 頂上에 오르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고 사고의 위험이 높다고 판단해 첫 번째 공격을 포기했다. 韓王龍의 에베레스트 첫 등정은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을 겪은 다음, 대원들 가운데 체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판단된 동료 대원과 셰르파 이렇게 셋이서 이룩한 것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감격스러웠다.
 
  등정의 기쁨을 만끽하면서 파노라마 사진을 촬영하는 사이 30분이 지나갔다. 그 사이 마지막 캠프에서 함께 출발한 서울의 모 대학팀 대원도 셰르파와 함께 올라왔다. 그는 이미 여러 시간 전에 산소통 안의 산소가 바닥 난 상태에서 등반했기 때문에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韓王龍은 마지막 캠프에서 頂上까지 오를 때는 10시간이 조금 더 걸렸지만 체력에 자신이 있었다. 그는 해가 지려면 아직 네댓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판단, 2300여m 아래 베이스캠프(6500m)나 적어도 제1캠프(7100m)까지 내려갈 생각이었다.
 
 
 
 울음소리 듣는 순간 발 떨어지지 않아
 
   하산 길에서는 동료 대원과 셰르파를 연결한 로프를 풀었다. 한 명의 실수가 전원 추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가급적 빠른 속도로 하산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후 「각자 살기 식」 하산을 시작한 韓王龍은 추락 위험이 높은 雪稜(설릉)을 벗어나고, 등정길에 섬뜩함을 느꼈던 20여m 높이의 바위절벽 구간인 세컨드 스텝(second step)도 내려섰다. 바위절벽에 로프가 설치돼 있었지만 下降器(하강기:로프에 걸고 안전하게 내려설 수 있도록 해주는 장비)가 없었던 韓王龍은 동료 대원이 먼저 내려간 다음 내려섰다.
 
  그런데, 세컨드 스텝을 내려설 즈음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20여m를 더 가로질러 안전지대로 내려선 다음 베이스캠프로 무전교신을 했을 때는 함께 정상에 올랐던 모 대학팀의 사고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셰르파는 설릉에서 추락하고, 모 대학팀 대원은 해발 8750m지점에서 탈진해 오도가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대학팀 대원은 셰르파가 추락사한 사실도 모를 정도로 혼미한 상황이었다.
 
  『가능하다면 기다렸다 데리고 내려와라』는 朴英碩 등반대장의 요청을 들은 韓王龍은 대학팀 대원을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대학팀 대원은 세컨드 스텝 바로 위까지 내려왔으나 거기서 드러눕고 말았다. 세컨드 스텝의 고정 로프에 하강기만 걸면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는데도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두 시간, 세 시간.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高所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해발 8700m 높이의 高所에서는 기압이 海水面(해수면)에 비해 3분의 1 가까이 떨어지고 그로 인해 공기 중 산소의 양도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그로 인해 해발 8700m는 혈액순환이 제대로 안 되고 가만히 있어도 체력이 고갈되는, 일명 「죽음의 지대」라 일컬어지는 높이인 것이다.
 
  다섯 시간쯤 지나가자 韓王龍도 다급해졌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내 목숨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다가왔다. 베이스캠프에서도 더 이상 기다리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朴英碩 대장은 『네가 알아서 판단하라』 말하고, 『이러다 왕용이도 죽이겠다』는 대원들의 말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들려 왔지만 韓王龍은 대학팀 대원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계 최고봉에서 벌인 21시간의 사투
 
  그렇다고 세컨드 스텝을 다시 올라가 대학팀 대원을 데리고 올 자신은 없었다. 함께 기다리던 셰르파에게 부탁해 보았지만, 그 역시 올라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韓王龍은 妙手(묘수)를 생각해 냈다. 셰르파에게 『내 말대로 해준다면 베이스캠프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장비를 다 주겠다』며 『산소통과 산소마스크를 세컨드 스텝 위의 대원에게 올려다 주라』는 부탁을 했다.
 
  대학팀 대원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온 것은 셰르파가 가지고 올라간 산소통의 산소를 마신 뒤였다. 하지만 세컨드 스텝을 내려선 다음 마지막 위험지대인 퍼스트 스텝 직전에서 산소가 바닥 나자 대학팀 대원의 의식이 또다시 흐려졌다. 다행히 주변에 버려진 다른 팀의 산소통에 남아 있는 산소를 마신 뒤 의식을 어느 정도 되찾기는 했지만 이후 달빛에 의지해 내려서는 하산길은 이들에게 모진 拷問(고문)과도 같았다.
 
  자칫 실수하는 날이면 수천m 아래로 떨어지는 죽음과도 같은 능선을, 셰르파는 (대원을) 앞에서 끌고 韓王龍은 뒤에서 추락하지 않도록 로프로 연결해 붙잡아 주면서 한발 한발 내려섰다. 대학팀 대원이 주저앉을 때면 달래고 그래도 안 되면 피켈로 엉덩이를 후려치며 정신이 번쩍 들도록 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巖氷混合壁(암빙혼합벽)을 내려서 마지막 캠프(8350m)로 내려섰을 때는 이튿날 0시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새벽 3시30분 캠프를 출발한 지 21시간의 사투 끝에 해낸 귀환이었다. 텅 빈 텐트 안에 들어서자마자 세 사람은 배가 물 속으로 가라앉듯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이튿날 제2캠프(7800m)로 내려갔더니 支援組(지원조)가 올라와 있더군요. 그들에게 대학팀 대원을 맡기고 저는 곧바로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와 버렸죠. 아무튼 그 친구는 운이 참으로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 정도 높이에서 탈진한 상태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노출돼 있었다면 살아 내려왔더라도 대개 심한 동상으로 손이나 발을 잘라야 하는 게 일반적인 경우인데 말입니다. 무엇보다 날씨가 도와 주었던 것 같습니다』
 
 
 
 재학생 때 「뺀질이」가 복학 후 高山등반가로 성장
 
   韓王龍은 에베레스트에서 해낸 殺身成仁의 행동으로 그해 한국대학산악연맹이 한 해 동안 가장 모범을 보인 산악인에게 수여하는 특별상을 받았다. 韓王龍 역시 등반 중 남의 도움으로 살아난 적이 있다. 첫 고산등반에서였다.
 
  1992년 여름 그는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국경에 솟아 있는 칸텡그리(7010m) 등반에 나섰다. 고산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던 그는 고산등반의 ABC라 할 수 있는 업다운(up-down), 즉 고도를 높인 다음 내려와 쉬었다 다시 올라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高所適應過程(고소 적응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해발 4000m 높이의 베이스캠프를 출발, 6200m지점의 하이캠프까지 줄곧 밀어붙였다.
 
  그만큼 힘이 넘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산은 그를 그대로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그가 하이캠프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상황이 180도 바뀌어 의식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함께 올랐던 동료 대원 역시 컨디션이 뚝 떨어져 束手無策(속수무책)이었다.
 
  다행히 같은 하이캠프에 머물고 있던 카자흐스탄 산악인이 그를 구했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어렵게 1000여m 아래 캠프로 내려서자 구조 소식을 들은 카자흐스탄 산악인들과 고려인 의사가 베이스캠프에서 올라와 있었다.
 
  『1000m쯤 내려오니까 고소증세가 어느 정도 풀리면서 정신이 돌아오고 마음이 놓이더군요. 그때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등산이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여럿이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가장 큰 수확이었죠. 아무튼 이후로는 안전사고에 늘 신경 쓰면서 등반을 했습니다.
 
  늘 안정장비를 확보한 상태로 등반하고, 동료가 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면서 말입니다. 어찌 보면 제가 겁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아무튼 칸텡그리 등반 때 멋모르고 밀어붙였다 까무러친 이후 고소증에 시달린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마도 실신할 정도로 고소증에 시달린 게 제 체질을 바꿔놓은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주 우석大 산악부 재학생 시절에는 그리 뛰어난 등반을 한 적도 없었을 뿐 아니라 주변에서 「뺀질이」라 부를 정도로 개인주의적인 사고를 지녔었다. 그러던 그는 軍복무를 마치고 복학, 동기생인 진재창씨와 함께 자취생활을 하면서 많이 달라졌다.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양보심이 많고 책임감이 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산악부 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 덕분에 그는 1992년 1월 선배들의 추천을 받아 일본 北알프스 동계 등반을 다녀올 수 있었고, 이어 한창 고산등반에 몰입해 있던 개척산악회 선배들의 발탁을 받아 칸텡그리를 원정한 데 이어 지속적으로 고산등반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발 7500m 高地서 평지처럼 행동
 
  韓王龍은 이후 1993년 전북학생산악연맹 원정대에 대원으로 뽑혀 에베레스트를 등반하고, 이듬해에는 초오유(8201m)와 시샤팡마 중앙봉(8010m) 연속 등정에 이어 北美 최고봉 매킨리(6194m)를 등정하는 등 고산등반가로서 日就月將(일취월장) 발전해 나아갔다. 이러한 모습에 현재 한국 최고의 고산등반가로 꼽히는 嚴弘吉, 朴英碩 두 사람 모두 그를 「고소체질」로 추켜세울 정도에 이르렀다. 함께 등반한 산악인들의 目擊談(목격담)에 의하면, 당시 그는 해발 7500m 높이까지는 평지나 별 차이 없이 생활하곤 했다.
 
  1995년 南美 최고봉 아콩카과(6959m) 등정에 이어 세계 최고봉 등정까지 해낸 韓王龍은 1996년 여름 우석大 포베다(7439m) 원정대(대장 유한)에 참가했다. 칸텡그리 남쪽에 솟아 있는 天山 최고봉으로, 이번에는 대원이 아닌 실질적으로 등반의 성패를 左之右之하는 등반대장 자격이었다. 이 등반에서 그는 他 원정대원을 구하려다 오히려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을 맞이 했다. 당시 같은 루트로 등반하는 부산의 모 대학팀 대원들이 高山등반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여서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도와 주기로 언약이 돼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캠프(7000m)에 도착했을 때부터 예기치 못한 상황이 계속 벌어졌다. 후배 대원인 고용석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얼음 덮인 암벽과 크레바스 지대를 거쳐 최종 캠프에 올라서 텐트를 치기 위해 눈바닥을 다지고 있는데, 뒤따라 올라온 모 대학팀 대장과 대원은 텐트조차 가져오지 않았다.
 
  高所에서 좁은 공간에 있다 보면 산소공급량이 점차 떨어져 컨디션을 잃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들에게 그냥 내려가라 말하자니 너무 沒人情(몰인정)하다 싶어 어쩔 수 없이 2인용 텐트에서 네 명이 비좁게 하룻밤을 지내야했다.
 
  그런데 밤 사이 날씨가 급변하더니 강한 바람에 눈보라까지 몰아치고, 이튿날 아침 날이 밝은 뒤에는 안개까지 짙게 끼어 5m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상황에 이르렀다. 철수조차 엄두내지 못할 악천후였다.
 
 
 
 「여기서 이렇게 죽어 가다니」
 
   高지대의 좁은 텐트 안에서 하룻밤 더 지내자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모 대학팀 대장이 컨디션을 잃고 만 것이다. 그러자 대학팀 대장은 등정길에 자신의 후배인 金대원을 동행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韓王龍은 그 제의를 받아들이는 대신 조건을 내걸었다. 하산길에 안개를 만나면 길을 잃을 수 있으니 하산 시간에 맞추어 대학팀 대장이 캠프에서 마중 나오면서 標識機(표지기)를 꽂아 달라는 제의였다.
 
  이렇게 서로 약속을 하고 마지막 캠프에 오른 지 사흘째 되는 날 새벽 5시 출발한 직후 날씨는 좋아졌으나 金대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체력이 떨어지고 그로 인해 등반 속도는 점차 늦어졌다. 캠프를 출발한 지 세 시간쯤 지나자 칼날처럼 날카로운 설릉이 이어졌다. 한 발만 미끄러지면 카자흐스탄이나 중국땅으로 떨어질 판이었다. 韓王龍은 金대원이 추락하지 않도록 로프를 확보했다. 속도가 떨어지지만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위험한 능선을 오르며 다른 원정대 대원이라고 그냥 放置할 수는 없었다.
 
  金대원의 발걸음이 너무 더뎌지자 韓王龍은 『너희 대원이 너무 지쳐 하산할 일이 걱정이다. 아무래도 내려보내는 게 낫겠다』고 대학팀 대장에게 연락을 했다. 그러자 『혼자 내려오는 게 더 위험할지 모르니 함께 올라 달라』는 간절한 부탁만 돌아왔다.
 
  이후 頂上에 올라서기까지 안간힘을 다 짜내야 할 정도로 고난이 계속됐다. 이렇게 어려움을 겪은 끝에 캠프 출발 아홉 시간 만인 오후 2시35분경 頂上에 올라서는 데 성공했으나 등정의 기쁨을 만끽할 여유가 없었다. 예상했던 등정시각보다 세 시간 이상 늦어진 상황이었다.
 
  등정사진을 찍고는 곧바로 하산길에 들어섰다. 그런데 우려했던 상황이 닥치고 말았다. 오후 들어 기온이 올라가면서 안개가 밀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韓王龍은 위험지역을 벗어날 때까지는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시야를 확보해 가면서 하산키로 했다.
 
  어떤 때는 金대원이 갑자기 미끄러지는 바람에 세 사람 모두 끌려 내려가 3000m 아래 빙하로 떨어질 뻔한 위급한 상황을 여러 차례 겪었지만 안전지대인 안부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 지 열두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침에는 눈이 굳어 그런 대로 걸을 만 했던 설릉이 오후 내내 받은 햇볕에 녹아 발을 딛기 무섭게 빠져들었다. 체력이 이미 바닥 난 상태에서 허벅지 이상 빠져드는 눈을 헤치며 걷는다는 것은 엄청난 체력과 인내심을 요구했다.
 
  안부를 출발한 지 세 시간쯤 지났을 때 날씨마저 어두워졌다. 그런데 마중 나오기로 약속된 대학팀 대장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그가 박아 놓기로 한 표지기 역시 눈에 띄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랜턴 불빛에 앞사람 얼굴조차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짙어졌다. 걷고 또 걷다가 발자국을 살펴보면 제자리를 빙빙 맴돌고 있었다. 脫盡死(탈진사)하기 직전,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겪는다는 幻想彷徨(환상방황)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잠들지 말아야 한다」
 
  시계 바늘은 이미 자정을 넘기고 이튿날 새벽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걷다가는 모두 얼어 죽으리라는 공포가 엄습해 왔다. 마지막 캠프에 무전 교신을 시도해 보았지만 공격조를 향해 걸어간다는 교신 이후 아무런 연락이 되지 않았다. 대신 제2캠프(5100m)에서 대원들의 무사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유한 대장의 다급한 목소리만 들려올 따름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죽어 간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허망했다.
 
  비박(bivouac: 야영장비 없이 맨몸으로 자는 것)을 결심했다. 각자 몇 m씩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엉덩이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깊이로 구덩이를 파내고 앉았지만, 잠이 올 리 만무. 잠이 들면 얼어죽으리라는 생각에 천근만근인 눈꺼풀이 내려오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런 상황에서 날씨는 이들을 혹독하게 밀어붙였다. 눈 구덩이에 앉은 지 한 시간쯤 지나자 눈이 허리까지 차 오를 정도로 폭설이 내렸다.
 
  우모복, 장갑, 양말 등 습한 눈바람에 젖어든 모든 옷가지가 곧 꽁꽁 얼어붙었다. 손가락·발가락이 얼어붙지 않게 하려고 쉴 새 없이 꼼지락거렸다. 서로 잠들지 않게 하려고 수시로 이름을 불러 주고 그래도 대답이 없으면 흔들어 깨웠다. 너무도 처절한 밤이었다. 대학팀 대원과 대장이 원망스러웠다. 「너희들이 아니었다면 내 후배가 이런 일을 겪을 일이 없었는데…」, 「네놈들 때문에 나까지 이렇게 죽어 가는구나」라는 생각에 분통이 터졌다.
 
  대원들이 잠들지 않게 하려고 20분 간격으로 무전을 보내 오던 유한 대장도 『이렇게 고통을 겪을 바에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는 韓王龍의 말을 듣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후배들이 죽어 가는데 정작 대장인 자신은 따뜻한 텐트 안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후배들의 목소리만 듣고 있어야 한다는 현실이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새벽 5시30분, 韓王龍은 이렇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죽는다는 게 너무 억울하다 싶었다. 바람이 조금 가라앉자 텐트를 찾아나섰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 전날 출발할 때 보았던 바위를 발견,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묘하게도 어둠 속에 깊은 눈을 헤쳐 나갈 때는 힘이 들었지만 날이 밝아지자 그의 가슴속에 희망이 싹트고, 대학팀 대원들을 미워하던 마음도 눈 녹듯 녹아 버렸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제대로 찾고 곧 마지막 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텐트 앞에서 시계를 바라보았을 때는 캠프를 출발한 지 27시간30분, 이튿날 오전 8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더욱 황당한 일은 텐트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벌어졌습니다. 세상에 우리를 마중 나오기로 했던 모 대학팀 대장이 쿨쿨 잠자고 있지 뭡니까. 속에서 불덩이가 솟구치는 것 같았지만, 아직 어린 후배들이라 몰라서 그러려니 생각하고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이후부터였습니다. 사실 얄밉기도 해서, 안전지대에 있으니 알아서 내려오려니 생각하고 먼저 내려왔는데, 제2캠프에 도착하자마자 그 친구들로부터 하산길에 추락해 목뼈에 금이 갔다며 구조요청이 왔지 뭐예요. 그 연락을 받자마자 다른 산을 등반 중이던 카자흐스탄 산악인들이 무려 아홉 명이나 헬기를 타고 날아와 이들을 구조해 냈습니다.
 
  그런데 베이스캠프에 도착해 의사의 진단을 받은 결과 목뼈에 금이 갔다는 것은 거짓이었습니다. 이튿날이 되니까 멀쩡히 걸어다니지 뭡니까. 헬기 타고 빨리 내려오려고 거짓말을 했던 거죠. 정말 제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국제적인 망신이었습니다』
 
 
 
 선배 위해 자신의 산소호흡기 넘겨 줘
 
   1997년 다울라기리(8167m), 가셔브룸1봉(8068m), 로체(8516m) 세 개 巨峰 등정에 성공한 韓王龍은 이후 등반 스타일을 대규모 팀에서 소수정예화로 바꿨다. 그는 1998년 안나푸르나(8091m)와 낭가파르밧(8125m) 등정에 성공하면서, 嚴弘吉과 朴英碩에 이어 14개 巨峰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그는 괴력의 소유자니, 高所체질이니 하며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일반인들의 흥미를 끌며 등정 레이스를 벌이는 두 선배 산악인들의 그늘에 가려 매스컴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韓王龍은 高所등반력도 뛰어나지만 촬영 능력도 탁월한 편이다. 그가 등반하면서 촬영한 것이 경인방송에 다큐멘터리물로 일곱 번이나 방영되었을 정도다. 그런 능력을 높이 사준 게 KBS 영상제작국 李巨鍾(이거종) 부장이었다. 1996년 마나슬루 등반 이후 방송을 통해 嚴弘吉을 계속 밀어준 그는 14개 巨峰 등정을 마무리짓는 K2 등반에 대원이자 카메라 담당자로서 韓王龍을 끌어들였다.
 
  K2는 14개 巨峰 가운데 지형과 기후의 여건상 오르기 가장 어렵고 사고율이 가장 높다는 巨峰. 韓王龍이 맡은 일은 제2캠프 이후 頂上까지 嚴弘吉의 등반 과정을 카메라에 담아 내는 것이었지만 당시 8,000m급 8개봉 등정자였던 그 역시 누구 못지않게 등정 의지가 강했다. 그렇지만 그는 선배의 등정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꿈을 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嚴弘吉 등반대는 다른 팀보다 늦게 등반을 시작했다. 그로 인해 날씨가 나빠지는 몬순 직전까지 짧은 기간 안에 등반을 마쳐야 했다. 시작부터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1차 공격이 때마침 닥쳐 온 눈보라에 밀려 실패하면서 원정이 무위로 끝나리라 생각하고 있던 막판에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 원정대는 2개組로 나뉘어 두 차례 頂上 공격을 시도하려다 더 이상의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컨디션이 따라 주는 대원들은 모두 頂上 공격에 나서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마지막 캠프에 올라섰을 때 대원 다섯 명과 셰르파 한 명은 모두 컨디션이 좋았다. 이튿날 0시 頂上 공격일 새벽, 嚴弘吉을 비롯한 대원 세 명과 셰르파가 출발한 다음 韓王龍은 텐트 주변을 촬영한 다음 대원들의 뒤를 따라 올랐다.
 
  그런데 한참 올라갔어야 할 유한규 대장이 힘겹게 걷고 있었다. 유대장은 『산소가 나오지 않는 것 같으니 배낭에 넣은 산소통을 살펴 달라』는 부탁을 했다. 확인 결과 마지막 캠프부터 이용한 산소통에서 산소의 양을 조절하는 산소호흡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제 컨디션을 잃은 상황이었다.
 
 
 
 눈 위에 주저앉아 가족 얼굴 그리며 눈물 흘려
 
   『잠시 망설였죠. 그러다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한규 형은 나이가 있어 이번이 아니면 또다시 기회를 얻기가 어렵겠지만, 젊은 나는 기회가 또 오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 산소호흡기를 건네 주고 유대장을 뒤따라 올라갔지요. 오를 수 있는 데까지 오르다가 너무 힘이 들면 포기하자, 그렇게 마음먹고 말이죠』
 
  뜻밖에 한발 한발 걸음이 떼어졌다. 그러다 해발 8500m를 넘어서 등정을 마치고 하산하는 嚴弘吉을 보는 순간 잊고 있던 자신의 임무가 생각나면서 미안해졌다. 嚴弘吉의 등정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 게 등반 참가의 목적이었건만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K2 등정 욕구가 솟구치고 100m만 더 오르면 頂上이라는 생각에 등반을 강행했다. 엄홍길은 자신의 산소통과 호흡기를 건네 주려 했지만, 無산소 등정 욕심이 생긴 韓王龍은 『그냥 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100m는 끝이 없는 듯했다. 발걸음은 천근만근, 30분이면 오를 것 같은 거리가 두 시간 넘게 걸렸다.
 
  돔(dome)型의 K2 頂上에 올라선 것은 嚴弘吉 일행이 등정한 지 2시간30분이 지난 뒤였다. K2 無산소 등정을 이룩한 韓王龍도 기뻤고, 1980년 한국 최초의 파키스탄 히말라야 원정대 대원으로서 바인타브락2봉(6960m) 세계 최초 등정을 일구어 낸 바 있는 유한규씨 역시 바인타브락 頂上에서 마음먹은 이후 20년간 간직해 온 꿈이 이루어져 기쁨에 넘쳤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죽음의 下山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頂上 파노라마를 촬영한 뒤 하산을 서둘렀다. 조금이라도 빠른 시간에 안전지대에 내려서야겠다는 생각에 두 사람은 추락의 위험이 높은 雪斜(설사)면에서도 빠른 속도로 내려섰다. 그런데 마지막 캠프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지점에서 갑자기 밀어닥친 짙은 안개에 방향을 잃고 말았다.
 
  이들이 헤맨 K2 숄더(Shoulder:어깨 형태의 산자락)는 해발 8000~8300m의 높이로 길고 펑퍼짐하게 뻗은 雪稜이지만 양쪽이 3000m 높이의 절벽을 이루고 있어 등정에 성공한 산악인들이 체력이 고갈된 상태로 하산하다 추락사를 당하곤 하는 악명 높은 구간이다. 2001년 K2를 등반한 朴英碩 등반대의 대원 한 명도 이 구간에서 失足死(실족사)했다.
 
  10m 앞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두 사람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몇 시간 동안 헤매다가 주저앉고 말았다. 체력이 거의 바닥 난 韓王龍의 머리 속에서는 돌도 채 지나지 않은 첫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기서 이렇게 죽어가다니…」, 「내 아들과 아내는 앞으로 누가 돌봐줄 것인가」, 「폐암으로 투병 중인 어머니에게 이런 불효가 또 있을까」 등, 온 가족의 얼굴이 다 떠오르자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포자기 상태였다.
 
 
 
 오줌 자국으로 방향 잡고 生還
 
   그런데 어느 한순간 안개가 옅어지더니 설사면에 노란 자국이 보였다. 분명 오줌 자국이었다. 그렇다면 대원들이 저곳을 거쳐 하산했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살아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오줌 자국으로 다가선 韓王龍은 이후 좌로 20보, 우로 20보를 거듭 지그재그로 내려서면서 캠프를 확인했다. 이렇게 내려서기를 30분쯤 했을 때 외국팀의 텐트가 눈에 띄었다. 「이제 살았다」 싶었다. 텐트 안에는 국제합동대 대원 두 명과 韓王龍팀의 高所포터 한 명이 대피해 있었다. 시각은 오후 4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頂上에서 하산을 시작한 지 여덟 시간이 지났던 것이다.
 
  그렇다고 외국팀 텐트에서 마냥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 캠프에서 쉬고 있는 일행에게 산소통을 두드려 캠프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무전을 보낸 다음 韓王龍은 유한규 대장과 高所포터(Porter: 짐꾼·셰르파는 가이드 역할을 함께 하는 高所짐꾼), 그리고 외국 대원 두 명과 함께 횡대로 서서 한 발씩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어느 순간 안개가 걷히면서 한국팀의 텐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죽음의 지대」에서 벗어났기에 안심은 됐지만, 그에게 시련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이후 이틀간 눈사태의 위험을 무릅쓰고 베이스캠프까지 무사히 내려섰으나, 차 한 잔을 마시고 났을 때부터 이상 징후가 보이더니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누가 망치로 뒤통수를 때리는 듯했다.
 
  팀 닥터인 조경기 박사의 응급조치가 신속히 이루어졌다. 腦壓降下(뇌압강하) 주사를 맞고, 「죽음의 지대」에서도 마시지 않았던 인공산소를 마시는 등, 베이스캠프에서 할 수 있는 치료를 모두 마친 뒤 다음날 오후 철수용 헬기가 착륙하기로 돼 있는 콩코르디아로 이동했다. 상태가 극도로 나빠진 韓王龍에게는 서너 시간 거리가 하루 종일 거리로 늘어났다.
 
  헬기를 타고 이슬라마드로 돌아왔을 때는 씻은 듯이 고통이 사라졌다. 고도가 낮아지자 고소증이 말끔히 사라졌으려니 했다. 하지만 귀국 이튿날 오후 韓王龍은 또다시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고 급히 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는 조경기 박사에 의해 네 차례에 걸친 뇌혈관 수술을 받아야 했다.
 
  『지금도 한규 형한테 산소호흡기를 건네준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시 원정대에 참가한 목적을 잠시 잊었던 데 대해서는 이거종 선배에게 무척 미안하네요. 홍길이 형의 등정 모습을 비디오에 충실히 담아 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어찌 보면 머리에 이상이 온 것은 그때 제 일에 충실하지 못했고, 또 지나친 욕심을 낸 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도 그는 당시 뇌혈관에 이상이 온 원인을 다른 데서 찾지 않는다. 마지막 캠프로 내려섰을 때 충분한 수분을 섭취하지 못한 게 가장 큰 실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 누가 챙겨 주지 않는다면 눈을 녹여 물을 만들어 마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게 등정 후 등반가들의 몸 상태다. 그런데 당시 마지막 캠프에는 그에게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원이 전혀 없었다.
 
 
 
 등반은 여럿이 힘을 합쳐 이뤄 내는 과정
 
   그 역시 동료를 도와 주지 못했던 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2000년 봄 그는 양손 장애인인 金洪彬(김홍빈·39)과 함께 마나슬루(8156m)를 등반했다. 출국 전 선배인 金씨에게 頂上까지 동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정작 그 상황이 닥쳐왔을 때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1991년 매킨리 등반 도중 심한 동상에 걸려 양손을 잘라내야 했던 金씨는 에베레스트 등반을 앞두고 전초전 격으로 마나슬루 등반에 참가했다. 金洪彬씨는 그 스스로 생각해도 의외일 정도로 컨디션이 좋아 韓王龍과 함께 등정길에 오를 수 있었으나, 頂上을 100여m 남겨두고 체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결국 되돌아서야 했다.
 
  『洪彬이 형한테 제가 너무 심했던 것 같습니다. 양손을 제대로 쓸 수 없기에 무슨 일이든 제가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또 무엇을 요구해도 들어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신경질도 여러 번 냈고요. 등정을 마치고 하산길에서 만났을 때도 조금만 더 형 생각을 했더라면 최소한 頂上을 향해 몇 발짝이라도 더 올라갔을 겁니다. 그런데 제 발에 동상이 오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빨리 등반을 마쳐야겠다는 생각만 했던 거죠…』
 
  韓王龍이 이렇게 魔(마)의 地帶(지대)라 일컬어지는 고산에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남을 도와 주고, 또 그러하지 못했을 경우 미안해하는 것은 첫 고산인 칸텡그리에서 그 역시 다른 산악인의 도움을 받고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고, 이에 대한 보답 역시 위기에 몰려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등반을 하면 할수록 등정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람의 목숨이라는 가치관이 형성된 것이다.
 
  『처음에는 혼자만 열심히 올라가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고를 당했을 때도 그렇지만 이후 고산을 여러 차례 오르는 사이 등반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수시로 깨닫곤 했습니다. 소위 단독 등반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고 하는 거니까요.
 
  우선 출발 전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지 않고는 적게는 몇천만원 많게는 몇억원씩 경비가 들어가는 히말라야 고산등반을 시도할 수 없습니다. 베이스캠프에 들어갈 때까지는 비록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들이지만 현지 포터(Porter:짐꾼)들의 도움이 없다면 짐을 옮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등반에 들어가서도 대개 어느 정도는 셰르파나 高所포터들이 길을 닦거나 로프를 설치해 놓은 다음 홀로 頂上 공격에 나서니까요. 그런데도 막판에 혼자 올랐다고 단독 등반에 성공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등반은 모든 과정을 놓고 볼 때 여러 사람의 힘이 모아져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등반 중 목숨 잃은 이 없다는 게 가장 뿌듯
 
  韓王龍은 K2 등반을 마친 뒤 마칼루(8463m)를 등정한 데 이어 지난해 시샤팡마(8027m)와 캉첸중가(8586m) 頂上도 밟아 국내 세 번째이자 히말라야 등반사에 열 번째 14개 巨峰 등정자 등극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는 『완등자 대열에 올라서는 것도 기쁜 일이겠지만, 그보다는 함께 등반하다 목숨을 잃은 이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늘 뿌듯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브로드피크 등반 때 보니까 세계적인 산악인들은 단지 운이 좋아 사고 없이 등반활동을 해 온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頂上을 코앞에 두었더라도 날씨가 조금만 변하면 과감하게 하산하곤 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사고는 자신의 체력과 날씨만 제대로 판단하면 막을 수 있을 것 같더군요. 한데 그게 쉬운 결정은 아닙니다. 頂上이 빤히 보이는데 포기하고 다시 올라야 한다 생각하면 진저리가 쳐지는 일이니까요』
 
  남 돕는 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은 보기 드물 정도로 가정적인 성격에서도 起因(기인)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산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아내 金玟子(김민자·36)씨와 大成, 大山 두 아들을 키우고 있는 그는 원정 나가 있을 때 외에는 지난해 여름부터 근무하는 등산장비업체 한고상사에서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직행할 정도로 가정을 지키는 데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韓王龍은 여러 해 동안 히말라야 등반을 펼치는 사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의 登攀力(등반력)과 따뜻한 人間美를 높이 사준 등산장비 업체가 나타나 지난해 6월부터 안정된 상태에서 등반활동을 펼치고 있다. 「에델바이스」와 「밀레」 상표로 널리 알려진 등산장비 제조 및 수입 판매 업체인 한고상사(대표 한철호 사장) 홍보담당 과장으로 사회생활도 충실하게 해 가고 있는 그는 올해 시도할 브로드피크(8047m)와 가셔브룸2봉(8035m) 연속등정에 성공한다면 嚴弘吉, 朴英碩 등에 이어 열 번째로 14개 고봉 완등자로 히말라야 등반사에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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