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물러난 潘基文前 외교통상부 차관 : 월간조선

지난해 1월14일 오전 7시30분, 서울 압구정동 H아파트 李廷彬(이정빈)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자택. 바로 전날 전격 경질된 洪淳瑛(홍순영) 장관 후임에 임명된 李이사장에게 축하인사를 하기 위해 평소 李이사장과 친분이 있던 외교부의 고위 관리가 현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새벽부터 걸려오는 축하전화를 받고 있던 그는 외교부 고위 관리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이,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潘基文(반기문)을 차관으로 데리고 장관을 하다니. 복이 참 많아』

당시 장관 취임식도 치르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말을 했던 李장관은 지난 3월 개각 때 물러났고, 潘基文 차관도 4월2일 차관 일제 경질 때 교체돼, 野人(야인)이 됐다.

보통 외교부 차관을 마치고 난 후에는 주요국의 대사로 발령받거나, 본부대사로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기에, 潘 전 차관이 아무런 보직도 받지 못한 채 퇴직한 것은 적어도 외교부 내에서는 큰 「사건」이었다. 외교부 직원들은 崔成泓(최성홍) 駐英대사가 차관으로 임명됨에 따라 潘 전 차관이 영국대사로 나갈 것을 예상했으나, 결과는 예상밖이었다. 지난 4월3일자 조간신문은 일제히 羅鍾一(나종일) 前 안기부 차장이 영국대사로 내정됐음을 보도했다.

한 조직을 이끄는 고위직 인사에 대한 평가는 그가 현직을 떠나는 날부터 이뤄진다고 한다. 그러나 외교부 내에서 潘 전 차관에 대한 평가는 그의 퇴임 후에도 일치하는 것을 여러 차례 실감할 수 있었다.

외교부의 한 국장급 간부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潘 전 차관이 아무런 보직도 못 받고 물러난 것에 대해서 눈시울을 붉혔다. 潘 전 차관과 특별한 인연도 없는 이 간부는 『외교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 이렇게 물러나도 되느냐』고 한탄했다.

『潘 차관의 10분의 1만 돼도 성공한 것』

외교관 潘基文은 어떤 사람이었길래, 선후배 외교관들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일까. 기자는 1999년 12월 외교부를 출입한 후, 潘 전 차관이 지난해 1월부터 올해 4월까지 외교부 2인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기자가 내린 결론은 潘 전 차관은 이미 외교부 내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돼 있다는 것이다.

미국대사관 정무공사,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차관을 거치면서 對北정책에 관해 미국과 정책조율을 했고, 외교정책실장을 하면서 유엔과 多者업무에 대한 식견을 쌓았다. 駐美대사관 총영사를 3년이나 역임, 영사 및 교포 문제에도 정통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외교부의 한 과장은 『외무고시 출신의 외교관 중에서 潘 전 차관만큼 화려한 경력을 가진 외교관은 또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런 이유로 외교부에서는 潘 전 차관에 대해서 유행하는 두 가지 농담이 있다. 그 중 첫번째는 『潘차관의 10분의 1만 되도, 외교관으로서는 성공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정반대로 『潘차관을 따라 하려 하다가는 제 命(명)에 살지 못하니, 아예 따라 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도 逆으로 유행하고 있다.

潘씨는 1970년 5월 외무고시 3회로 외무부에 入部(입부)했다. 현재 외교부 차관인 崔成泓(최성홍)씨가 동기 19명 중 수석을 했으며, 潘基文씨가 2등을 했다.

潘씨는 충주고 재학시절부터 외교관이 될 생각을 하고 영어 공부에 몰두,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 高2 때 적십자사에서 전국의 고등학생 중 4명을 선발하는 영어 장학생 선발시험에 뽑혀,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한 달 간 美 연수를 다녀올 정도였다. 潘씨는 그의 뜻대로 서울대 외교학과에 진학한 후, 軍복무를 먼저 마치고, 외무고시에 응시, 합격했다.

그가 외교부에서 처음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硏修(연수) 성적이 수석이었음에도, 미국대사관 대신 다른 곳을 자원한 데서 시작됐다. 예전부터 변함없이 외교부 초임 사무관 중 우수한 사무관은 駐美대사관으로 발령받기를 희망하고, 그렇게 발령받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潘사무관은 뜻밖에도 인도총영사관에 발령받았다. 그는 『집이 넉넉한 편이 아닌 상태에서, 선진국이 아닌 후진국에 다녀오면, 집을 한 채 장만할 수 있을 것 같아 인도 근무를 자원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쨌든 연수성적 수석 외교관이 인도총영사관을 자원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인사철마다 치열한 로비가 전개됐던 외교부에서 인사문제에 목숨을 걸지 않는 다소 별난 인물이 됐다.

1972년 9월 인도총영사관 부영사로 처음 부임한 그는 全斗煥(전두환) 정권 시절, 외무장관, 안기부장, 국무총리를 역임하게 되는 盧信永(노신영) 총영사를 모시게 된다.

朴正熙 대통령은 당시 非同盟(비동맹) 그룹의 리더였던 인도와의 수교를 위해 업무추진력이 뛰어난 盧信永 로스앤젤레스 총영사를, 1972년 2월 뉴델리 총영사로 전보발령한 상태였다. 盧총영사가 인도와의 정식수교를 위해 본부에 직급이 높은 외교관의 보강을 요청하자, 본부에서는 영어 실력이 탁월하고,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潘基文 사무관을 발령한 것이었다.

부영사로 해외 첫 근무를 시작한 潘사무관은 성실함, 업무능력, 영어 구사력, 윗사람을 깍듯이 모시는 성품으로 모든 면에서 盧총영사의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1973년 한국-인도 국교 수교로 駐뉴델리 총영사에서 駐인도 대사가 된 그는 공관장 회의에서 潘사무관에 대해 많은 칭찬을 했다고 한다.

潘사무관은 1976년 서기관으로 승진했으며, 1978년 10월 駐유엔 1등 서기관으로 2년 간 근무한 후 돌아와 1980년부터 국제연합과장을 맡았다.

음지에서 빛을 발하는 사람

이와 비슷한 사례는 외교관 潘基文이 1987년 7월 駐미국대사관 참사관으로 발령받았을 때도 있었다. 그는 미국대사관에서 첫 보직으로 駐미국 총영사로 발령받은 후, 이례적으로 3년 동안 계속해서 총영사직을 수행했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관들 사이에서 領事(영사)업무는 『잘 해야 본전』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외교관들은 주재국 정부와 현안이 되는 고급 외교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교포들의 민원사항이나 교포관련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한 영사업무를 모두 꺼려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보통 외교관이 3년 임기로 해외근무를 발령받으면 영사분야, 경제 분야, 정무분야를 각각 1년씩 맡는 것이 보통이다.

그가 3년 간의 총영사 근무를 마칠 즈음 崔浩中(최호중) 당시 장관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金三勳(김삼훈) 미주국장 후임에 전격적으로 그를 임명했다. 駐美대사관에서 정무, 의회 담당 업무를 단 하루도 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미주국장에 임명된 것이다. 인도총영사관·대사관 근무와 駐美총영사 3년 근무로 그는 외교부내에서 『다른 사람이 가려하지 않는 곳에 가서, 빛을 발휘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붙게 된다.

미주국장 시절 그는 宋旻淳(송민순) 북미과장과 호흡을 맞춰 1966년 만들어진 후 불평등조약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고 있던 韓美주둔군지위협정(SOFA)를 1차 개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潘基文-宋旻淳 팀은 10년 후 다시 차관과 북미국장으로 호흡을 맞춰, 2차 SOFA 개정을 이끌어냈다).

潘基文씨는 金泳三 정부 때 차관보-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승승장구했지만, 金大中 정부 들어 그렇게 官運(관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朴定洙씨가 장관이던 때 駐美대사, 駐러시아 대사, 駐프랑스 대사 후보로 그를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오스트리아 대사로 부임했다. 청와대 의전수석, 외교안보수석을 거친 그였기에 당시 『겨우 오스트리아 대사로 나가느냐』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潘씨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는 외교부 내의 평판처럼, 駐오스트리아 대사로 재직 당시 나름대로 역할을 하면서 지냈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CTBT(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 회의 의장을 맡아 160여 개 대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駐오스트리아 대사관에 오케스트라를 조직,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고, 유학생들에게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대사를 하고 있던 도중 다시 洪淳瑛 장관에 의해 차관으로 추천돼 1년 6개월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일찍 승진해서 죄송합니다』

외교부 내에는 潘 전 차관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도 드물지만, 그보다는 위 아래로 敵(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가 그런 평판을 얻게 된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는 편지를 매개로 한 것이다.

潘씨가 국제연합과장을 마치고, 미국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케네디 스쿨)에서 연수를 하고 있던 중, 1985년 국무총리가 된 盧信永 전 외무 장관이 그를 의전비서관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1급이 맡고 있던 총리 의전비서관에 3급(부이사관)인 그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의 업무능력과 성품을 높이 산 盧총리는 1986년경부터 그를 이사관으로 승진시키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이사관 승진도 동기들보다 가장 먼저 한 潘씨가 이를 한사코 거절했다고 외교부 관계자들을 말하고 있다. 너무 빠른 승진으로 본인과 자신의 선배, 동기들이 서로 어려운 관계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盧총리는 그러나 朴鍾哲(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난 후, 자신이 곧 퇴임하리라고 느꼈는지, 1987년 4월 그를 이사관으로 승진시키도록 했다.

외무고시 3회 출신으로 동기들은 물론, 外試 1, 2회 선배들을 모두 제치고 가장 먼저 2급(이사관)으로 승진한 것이다. 그러자, 潘基文은 당시 자신의 선배, 동기, 후배 100여 명에게 약 1주일에 걸쳐서 일일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일찍 승진해서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潘씨의 인간됨을 알고 있었던 선배들도 그의 진심어린 편지를 받은 후, 그에 대해서는 상당히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업무에 대한 빠른 이해와 추진력으로 盧信永 총리뿐만 아니라 그가 모시는 모든 윗 사람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1983년 李範錫(이범석) 장관은 나이 사십이 안 된 그를 전격 발탁, 부이사관에 임명했고, 孔魯明(공노명) 장관은 1995년 5월 그가 외교정책실장을 할 때, 이재춘 차관보와 함께 특2급으로 승진시켰다.

潘 전 차관에 대한 상사들의 신임은 절대 성실한 그의 성품 때문이라는 평가다.

지난해 10월 李漢東(이한동) 총리가 러시아 방문 당시 潘차관이 외교부를 대표해 수행하게 됐는데, 모스크바行 비행기안에서 다른 수행원들이 대부분 잠을 자는 사이에 李총리가 러시아 관련 자료를 숙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潘차관도 李총리가 언제 그를 찾을지 몰라, 잠을 자지 않고 있다가, 李 총리가 모스크바 도착 1시간 전에 잠드는 것을 확인하고, 잠을 잤다는 이야기가 총리실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공통된 평가다. 외교부의 한 선배가 고위직에서 물러났을 때 그가 앞장서서 미국 연구소에 자리를 마련해 줬다. 미국에서 연수하던 시절, 당시 병에 걸린 외교부 직원을 위해 한약을 지어, 병문안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확신하면 물러서지 않는다

그에 대해서는 고위 공무원으로서, 지나치게 윗 사람들에게 순종적이란 비판도 있다. 潘 전 차관은 국회에서 자신보다 15세 이상 젊은 국회의원들이 질문을 할 때 『○○○ 의원께서 하문하신 ○○○』표현을 자주 쓰기도 했다. 또, 외교관으로서 무게감이 없고 다소 가볍지 않느냐는 비판도 있다. 민주당의 한 실세의원은 『그의 말을 듣다 보면 감언이설로 우리들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불신감을 표현한 적도 있다.

그러나 潘基文씨는 강단 있는 면모도 많이 있다. 金泳三 정부 시절, 그가 외교안보수석을 할 때, 정부 외곽조직의 인사문제로 모 장관과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당시 모 장관은 그와 친분이 있는 학계 인사를, 潘씨는 고위 공무원을 추천했다. 결국 그는 金대통령 앞에서까지 정부 내부 승진을 주장, 자신의 안을 관철시켰다.

또, 지난해 韓美주둔군지위협정(SOFA) 협상 당시, 그는 협정안을 놓고 법무부와도 적지 않게 싸웠다고 한다. 한 번은 외교부-법무부 합동회의 도중, 법무부의 한 검사가 지나치게 법무부안을 고집하자, 『내가 나라 팔아먹을 짓은 하지 않는다』고 버럭 소리를 질러 기선을 제압하기도 했다. 그가 부하직원들에게 자주 이야기했던 원칙 중의 하나는 『만약 99% 내가 맞다고 판단되면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97년 초 그가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으로 근무할 당시 황장엽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한국 망명을 요청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황장엽씨가 어떤 루트를 통해서 한국에 들어오느냐가 최대의 관심사로, 潘씨의 一擧手一投足(일거수일투족)이 기자들의 취재대상이었다. 조금이라도 자리를 비우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일요일 새벽 비행기로, 필리핀을 방문, 라모스 대통령을 직접 만나 황장엽의 망명을 부탁한 후, 새벽에 돌아와 출근을 하는 식으로 보안을 유지했었다. 그리고 난 후, 얼마 안 돼 1997년 4월20일 황장엽씨가 필리핀 항공 전세기로, 서울공항에 도착,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트랩을 내려올 수 있었다.

곁에서 지켜본 그는 내면적으로 자신의 스타일이 확고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석에서 『내가 룰을 안 지키면서 다른 사람에게 뭐라고 할 수 없으니까, 나는 반드시 내가 정한 룰은 지킨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낮잠을 잔 적이 없다

그는 매일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출근하곤 했다. 지난 겨울, 며칠 동안 눈이 많이 내려 흑석동 언덕배기에 위치한 그의 자택(빌라) 앞까지 관용차가 올라오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등산용 아이젠을 구두에 걸고, 중앙대 앞까지 약 500m를 걸어 내려가 관용차를 타고, 제 시간에 출근했다.

그는 외교관이 된 후 한 번도 사무실에서 낮잠을 잔 적이 없다. 그는 부하직원들에게 평소 이런 말을 했었다.

『초임 외교관 시절, 고위 관리들이 잠시 낮잠을 자느라고, 결재를 기다리는 모습이 좋게 느껴지질 않았다. 그래서 낮잠을 자지 않기로 한 후 이를 지켰다. 피곤하고, 머리가 좀 무겁게 느껴져도 안 자고 버텼다』

외교부 차관은 밖에서 보기에 화려해 보이나 보통 체력으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한 자리다. 全세계 125개 해외공관에서 쉴 새 없이 電文이 올라오며, 이를 모두 읽지는 못하더라도 주요한 흐름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장관을 대리해, 서울에 주재하는 90여 공관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아울러 정부 부처 중에서 가장 인사이동이 많고, 뒷말이 많은 1000여 외교관의 인사사항을 훤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외교부의 A부이사관은 潘 전 차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난해 潘차관과 함께 해외 출장을 가게 됐다. 潘차관과는 한 번도 함께 근무한 적이 없어, 외교부에 유행하는 그의 「전설」에 대해 사실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함께 출장을 다녀와서, 그를 인정하게 됐다. 보통 높은 사람은 말을 하면 자기 자랑 70%, 남의 험담 30%인데, 이 사람은 전혀 예외적인 사람이었다.

출장기간 동안 여러 번 비행기를 탔는데, 나를 포함한 일행은 모두 비행기만 타면 자곤했다. 그러나 潘차관은 비행기에서도 거의 자지 않고, 자료를 숙독했다. 딱 한 번 비행기에서 潘차관이 자는 것을 봤는데, 그 시간은 서울시간으로 잠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의 건강 및 체력관리 비결은 단순하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저녁 12시 전에 잠 자리에 드는 것이 습관화돼 있다. 주말에 부인 柳淳澤(유순택)씨와 TV에서 하는 영화를 보다가도, 12시가 되면 무조건 잠자리에 들 정도다. 젊었을 때 친구들과 포커를 할 때도, 11시만 지나면 빨리 끝내자고 재촉했었다고 한다.

발목잡은 NMD체제 문제

그러나 이런 것이 운명일까.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정통 미국통에 외교관의 表象(표상)으로 불리던 그도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NMD)체제 문제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NMD체제 문제가 표면화된 것은 지난 2월21일 李廷彬 전 장관이 상공회의소 초청연설 때였다. 당시 李장관은 외교통상부 출입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후의 NMD체제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을 묻는 질문을 받고 NMD체제에 부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들을 했다.

李 전 장관은 당시 『미국이 NMD 문제를 생각하는 원인은 일부 국가가 장거리미사일을 개발하고, 그 미사일로 미국 본토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라며 『미국이 NMD를 강력히 추진하는 것보다는 이같은 원인제공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빠르고 손쉬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외교통상부 출입기자들은 이 뉴스의 비중 때문에, 대부분 이 내용을 회사로 송고했다. 그러자 潘 전 차관은 기자실로 급히 내려와 이를 부정적으로 해석하지 말아 달라고 외교부 출입기자들에게 요청했다. 『李장관이 대량살상무기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강조했을 뿐, 정부 입장은 정해진 것이 없다』며 진화에 나섰다. 당시 李 전 장관의 발언이 거의 보도되지 않은 것은 潘차관이 國益(국익)에 관련되는 사안이라며 협조를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그러나 며칠 후, 韓美관계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사건이 발생, 그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2월27일 발표된 한·러 공동성명에 NMD체제와 관련이 있는 탄도탄요격미사일제한(ABM)조약에 관한 문안이 포함된 것이다.

A4용지 약 10페이지 분량의 공동성명 중 문제가 된 부분은 이런 내용이었다.

「대한민국과 러시아는 1972년 체결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며, 핵무기 감축 및 非확산에 대한 국제적 노력의 중요한 기반이라는 데 동의하였다. 양측은 ABM 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가운데 전략무기 감축협정 Ⅱ(START Ⅱ)의 조기 발효와 완전한 이행, 그리고 START Ⅲ의 조속한 체결을 희망하였다」

한-러 頂上회담 공동성명에 탄도탄요격미사일(ABM)조약의 「보존과 강화」가 명시됨으로써, NMD체제를 위해 ABM조약 개정을 주장하는 미국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어나게 됐다.

문제의 최종 공동성명 문안이 확정된 것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방한하기 이틀 전인 2월24일 토요일이었다. 우리 정부는 지난 1월쯤 러시아 정부와 공동성명 문안 작성에 들어간 후, 푸틴 대통령 방한을 이틀 앞두고서야 공동성명에 합의했다.

당시 외교부 내에서는 이 문장이 포함되는 것이 좋은지를 두고, 해당 부서 간에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그다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의 공동성명은 2월26일 월요일 潘基文 차관, 李廷彬 장관을 거치는 과정에서 별다른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은 채 그냥 통과돼 버렸다.

외교부는 지금도 이런 표현이 미국도 합의한 표현이고, 지난해 오키나와 G8회의에서도 같은 문장이 든 성명이 통과되는 등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난 3월 미국을 방문한 金大中 대통령이 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함으로써, 외교부가 잘못 처리했음이 명확해졌다.

이를 두고, 潘차관은 이를 사전에 미리 막지 못한 것에 대해 自嘆(자탄)을 많이 했다고 한다. 자신의 실수는 아니지만, 자신의 외교관 생활 중에 가장 잊지 못할 일로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그는 지난 3월7일 미국이 추진중인 NMD체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과 관련, 논란이 발생한 것에 대해 외교부 全직원이 참석하는 非공개 조회를 소집, 「외교부 自省論(자성론)」을 제기했다.

그는 당시 『한러 공동성명에 언급된 ABM조약 관련 문구는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것이었으나, 외교부가 국제사회의 상황변화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NMD체제 관련)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와 국민들에게 누를 끼친 데 대해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외교부는 上下의 의견이나 명령은 잘 전달되나 橫的(횡적)인 논의나 정보 공유가 잘 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각 부서 간의 협조를 긴밀히 하고, 다른 부처와의 관계에도 신경을 기울여 달라』고 말했다.

이날 직원 조회에 참석했던 외교부의 관계자들은 『韓美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을 자극하는 듯한 일이 발생한 데 대해 미국통인 潘차관이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시 능력 발휘할 기회가 올 것인지

결국 NMD체제에 대한 논란으로 야기된 외교부의 위기가 계속된 가운데, 潘차관은 지난 4월2일 경질됨과 동시에 無補職(무보직) 상태로 외교관에서 일반인이 됐다. 駐美대사 시절 당시 정무공사였던 潘씨와 일해 그를 잘 알고 있는 韓昇洙(한승수) 신임 외교통상부 장관은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외교부에서는 그가 차관에서 경질된 과정이 그의 충주중-충주고 8년 선배인 洪淳瑛駐中대사(前 외교통상부 장관)를 닮았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洪 대사가 金泳三 정부 시절, 전격 경질당한 것처럼 潘 전 차관의 경우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洪淳瑛 대사가 駐독일 대사, 외교부 장관, 駐中대사로 다시 그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潘 전 차관의 복귀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 적어도 기자가 느끼기에는, 외교부의 후배들은 그가 다시 한번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