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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2 峰 무산소 등정한 히말라야 巨壁 등반가 朴政憲

『셰르파들에게 끌려 올라가는 등반은 내겐 의미가 없다』

한필석    ps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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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大 巨壁인 에베레스트 남서벽, 안나푸르나 남벽을 오르고 로체 남벽만을 남겨둔 朴政憲이 말하는 히말라야 이야기
86년 한국 初登 당시 외국산악인 11명 사망
  세계 제2위 高峰(고봉) K2(해발 8611m·파키스탄)는 高山(고산) 등반가들 사이에서 「죽음의 산」 혹은 「하늘의 절대 군주」라 불릴 만큼 험난한 巨峰(거봉)이다. 8000m급 거봉 3개(가셔브룸1·2봉·브로드피크)를 마치 家臣(가신)처럼 곁에 두고 있는 K2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에 비해 높이는 200여m 못 미치지만 難易度(난이도) 면에서는 오히려 더욱 어려운 등반대상지로 꼽힌다.
 
  K2를 등반해봤거나, 혹은 직접 바라본 바 있는 이들은 『정상에는 늘 雪煙(설연)이 부옇게 휘날리고, 頂上部는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처럼 가파르고 험악한 지형의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이라고 K2를 표현한다.
 
  K2는 이러한 자연적인 險難(험난)함 때문에 1954년 이탈리아 팀이 대원 한 명을 잃는 고난 속에서 첫 등정에 성공한 이후 23년이 지나서야 再登者(재등자)가 나왔고, 대한산악연맹 원정대 대원 세 명이 등정, 한국 初登(초등)을 이룩했던 1986년에는 무려 16명에 이르는 외국의 유명산악인들이 목숨을 잃는, 카라코룸 히말라야 등반사상 최악의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던 산이다.
 
  1998년과 1999년 두 해 동안 등정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던 K2가 일반인들에게까지 알려진 것은 몇해 전 外畵(외화) 「K2」가 국내 TV에 放映(방영)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역시 이보다는 「동양인 최초의 히말라야 8000m급 14개 거봉 완등」을 목표로 등반을 해온 嚴弘吉(엄홍길·40·거봉산악회), 朴英碩(박영석·37·동국대 산악부OB) 두 산악인이 마지막으로 오를 산으로 K2를 남겨놨기에 우리에겐 히말라야의 다른 거봉보다도 더욱 관심이 높은 봉우리였다.
 
 
  嚴弘吉·朴英碩에 앞서 無酸素로 K2 등정
 
 
  그런데 뜻밖에도 올여름 K2 등정을 노리고 있는 嚴弘吉(엄홍길) 팀과 朴英碩(박영석) 팀이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기 전인 6월26일 K2 등정 소식이 전해졌다. 영호남합동대(대장 이성원) 한국 산악인 4명이 정상에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3일 뒤인 6월29일 영호남 합동대 산악인 4명이 또 등정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다.
 
  이들은 모두 K2에 나 있는 16개 등반로 가운데 가장 어렵다는 南南東稜(남남동릉)으로 등반한 영호남 합동대 대원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8000m급 거봉 등정자이거나, 해발 7000m대의 히말라야 거벽 등반을 경험한 산악인들이지만, 5월 초 출국하기에 앞서 이들의 등반 성공에 대해 확신하는 이는 사실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국내 최고의 高山 등반가로 꼽히는 嚴弘吉, 朴英碩도 노멀루트(비교적 쉬운 등반로)인 아브루치 등으로 등반에 나서는데 그들과는 등반경력상 견줄 수 없는 대원들로 구성된 영호남팀이 가장 어려운 루트를 택했다는 데에서 비롯된 회의적인 시각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朴政憲(박정헌·29·삼천포산악회장)을 잘 아는 산악인들은 그가 등반대장을 맡았기에 성공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며 은근히 성공을 기대했었다.
 
  이것은 히말라야 등반을 통해 朴政憲의 능력을 잘 알고 있고, 또한 朴政憲이 지난해 K2 첫 도전에서 해발 7900m 지점까지 오름으로써 그의 등반능력을 보여주며 그로 인해 해발 7900m지점까지는 이미 숙제를 해결한 상태에서 등반에 나서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온 믿음이었다.
 
  朴政憲은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1992년 러시아 팀이 세운 한 팀 최다 등정자 기록(6명)도 바꾸었다. 게다가 그 자신은 인공산소를 마시지 않고 등정에 성공, 「無酸素(무산소) 등정」 기록도 세웠다. 히말라야에는 해발 8000m가 넘는 高峰이 14개에 이르지만 전문가들이 무산소 등정 기록으로 높이 평가해 주는 峰은 에베레스트와 K2 두 개 峰에 불과하다.
 
  이번 등반은 朴政憲 개인으로서는 K2 무산소 등정이라는 기록 단 하나로 끝나지만 원정대로서는 의미가 큰 등반이었다. 정서가 서로 다른 영호남 산악인들이 함께 등반에 나서 성공리에 원정을 끝마쳤다는 점에서 또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지난해 K2 등반 때에도 朴政憲은 호남 산악인들과 함께 등반에 나섰다. 매번 경제적인 면과 행정적인 면 모두 호남 쪽이 주도했음에도, 지난해에는 대장, 올해는 「등반대의 꽃」이라 말할 수 있는 등반대장을 그가 맡았다.
 
  등반대를 구성할 때는 대개 나이 많은 사람이 대장, 그 다음 사람이 등반대장을 맡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11명 가운데 나이도 중간밖에 안되는 그가 등반대장을 맡은 것이다. 하지만 그가 등반대장을 맡는 데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은 역시 원정대장이나 대원들 모두 朴政憲의 등반력과 경험을 믿었고, 그가 원정대 전체를 리드해 나아갈 수 있는 판단력과 인화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朴政憲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산행을 해온 선배 산악인들에게 「애늙은이」란 소리를 듣곤 한다. 이는 매사에 신중하고, 어떤 자리에 있든 튀지 않고 잘 어울릴 줄 아는 그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때문에 그는 1996년에는 선배 산악인들을 이끌고 초오유(8201m) 등반을 성공리에 끝냈고, 1997년에는 충남대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충남대 낭가파르바트(8125m) 원정대에 대원으로 참가, 역시 등정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그의 능력이 결국 영호남 합동대의 K2 등반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는 이미 고교 시절 남한 최대의 빙폭인 설악산 토왕성 빙폭을 등반하고, 또한 전국암벽등반대회에서도 입상하는 등, 岩氷壁登攀(암빙벽등반)에 두루 뛰어난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朴政憲은 자기 계발을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사실 국내의 내로라 하는 등반가들 가운데 평소 체력관리를 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개 등반 목표가 정해진 다음에서야 훈련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연속되는 등반으로 인해 시간이 없어 아무런 훈련 과정을 거치지 않고 등반에 나서기가 일쑤다.
 
  그러나 朴政憲은 거벽 등반을 하려면 『적어도 배가 나와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치지 않고 히말라야 巨壁에 도전한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行爲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K2 再挑戰을 머리 속에 그린 이후 거의 매일 10km 산악구보나 25km 도로구보로 심폐력과 筋持久力(근지구력)을 키우고, 자연암벽이나 실내 인공벽에 매달려 지내면서 기술력을 향상시켰다.
 
 
  「수평의 꿈」 대신 「수직의 꿈」 택한 산꾼
 
 
  朴政憲은 마도로스의 꿈을 버리고 등반가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다. 경남 사천시 송포동 바닷가에서 태어난 朴政憲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먼바다를 응시하는 선장의 멋진 모습을 동경해 부산 선원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산은 그를 바다로 나아가게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이미 중학교 시절 삼천포 산악회에 들어갈 정도로 「산맛」에 깊이 빠져든 朴政憲은 부산에서 지내는 사이 금정산 산기슭 여기저기 박혀 있는 바위들에게 유혹을 받았다.
 
  實習船(실습선)을 타고 먼바다로 나갔을 때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바위가, 산이 더욱 그리워졌다. 결국 朴政憲의 고교시절은 말이 선원학교 학생이지 산만 생각하며 지내는 「등산학교」 학생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뜨거운 山熱情(산열정)을 실행에 옮기며 지내는 朴政憲은 선배들에게 큰 점수를 받았다. 때문에 1989년, 18세의 나이에 히말라야 원정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초오유(8201m·세계 제6위 고봉) 원정에서 朴政憲은 그 동안 전혀 모르고 지냈던 산의 혹독함과 非情(비정)함을 깨달았다. 노멀루트가 아닌 南東壁(남동벽·아직 한국 등반대가 성공한 바 없는 네팔 쪽 루트)을 겨울에 등반했던 그는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혈육처럼 가깝게 지냈던 셰르파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難易度 추구하다 보면 벼랑으로 몰릴 것
 
 
  이후 여러 해 동안 다시는 히말라야에 가지 않겠다 마음먹었다. 그러나 山열정은 그 결심을 곧 녹여버렸다. 1994년 해양경찰로 군복무를 대신한 다음 원정 소식이 전해지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경남에서 난다 하는 산꾼 13명이 참가한 경남연맹 안나푸르나(8091m·세계 제10위 고봉) 남벽 원정대였다. 안나푸르나 남벽은 정상에 이르기까지 표고차 2000m가 넘는 巨壁으로 눈사태와 낙석이 심해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당시 朴政憲은 막내 대원이었음에도 정상에 올랐다.
 
  필자는 朴政憲과 여러 해 동안 인연을 맺어왔다.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안나푸르나 등반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였다. 당시 朴政憲은 『대단한 등반을 해냈다』고 極讚(극찬)을 받고 있었음에도 『내 힘으로 해낸 등반이 아니었다』며 자신의 등반을 貶下(폄하), 필자를 놀라게 했다. 등반이 아무리 어려웠고, 셰르파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더라도 셰르파들 덕분에 성공했다고 말하는 高山(고산)등반가는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朴政憲은 오히려 『셰르파들에게 거의 끌려 올라가다시피 했고, 때문에 나에게 이 등반이 주는 의미는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를 대단한 등반가로 추켜세우는 주위의 분위기에 대해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K2 등정에 성공한 이튿날 저녁 전화통화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산소 등정을 이룩했음에도 그러한 사실을 자랑하지 않았다. 단지 필자가 『목소리가 왜 그러냐』는 질문에 『산소 없이 오르다 보니 기관지가 조금 상한 것 같다』고 말했을 뿐이다.
 
  朴政憲은 「등정」이니 「영예」니 하는,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보다는 등반이 주는 의미에 대해 더 고민하는 登攀家(등반가)다.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이후에도 그랬고, 1995년 한국 등반대가 여섯 번이나 도전했으나 실패했던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일곱 번째 도전에 나서 등반에 성공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등반을 마치고 난 다음 한동안 고민에 빠져 지냈다. 그 자신의 理想(이상)에 맞게 難易度를 추구하는 등반을 하느냐, 아니면 난이도에 관계없이 정상을 오르는 등반을 추구하느냐 하는 등반의 본질에 관한 문제였다.
 
  난이도를 추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벼랑 끝에 내몰릴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고 登頂(등정)만을 추구하는 등반을 하자니 별 의미가 없겠다 싶었다.
 
 
  히말라야 등반 운명적으로 받아들여
 
 
  그는 1996년 초오유와 시샤팡마 중앙봉(8008m), 그리고 1997년 낭가파르바트를 하나하나 등정하면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특히 지난해 K2를 등반하는 사이 역시 그는 자신에게 난이도 등반이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패러글라이딩, 윈드서핑, 스키도 즐기고 있는 朴政憲은 1996년 초오유 등반을 끝내고 해발 6500m대에서 활공을 시도, 7500m대까지 날아올라 주변에 있던 외국 산악인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강사급 수준의 패러글라이딩 기량을 지내고 있는 그는 파키스탄의 가셔브룸1봉(8067m)과 2봉(8035m)을 하루에 모두 등정한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먼저 2봉에 올랐다 글라이더를 타고 1봉 마지막 캠프로 이동한 다음 등정 길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2002년 봄 로체(8516m·세계 제4위 고봉) 남벽 등반에 나서 이미 등정에 성공한 에베레스트 남서벽 안나푸르나 남벽에 이어 로체 남벽마저 등정, 세계 3대 巨壁을 모두 끝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K2 등반을 마친 그에게는 쉴 틈이 없다.
 
  산악인들 가운데 산에 지나치게 沒入(몰입)하면 사회생활에서 落伍者(낙오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런데 朴政憲은 매년 두세 차례씩 해외 원정등반을 나서면서 사회생활도 착실히 해나가고 있다.
 
  3년 前 삼천포산악회 동갑내기 회원인 鄭正葉(정정엽)씨와 결혼, 현재 세 살배기 아들 성율과 태어난 지 석 달된 딸 진희를 두고 있는 朴政憲은 「내가 좋아하는 산을 오래도록 다니려면 가정생활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가능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산과 연관된 직업을 가져야겠다 생각한 朴政憲은 일반 등산인들 대상으로 案內登山(안내등산)도 하고, 또 고산을 경험하고픈 이들을 위해 알프스 商業登攀(상업등반)도 했다. 지난해에는 경남 진주 시내에 노스페이스 대리점을 냈다.
 
  그는 K2 등반을 마친 다음 대원들보다 1주일 정도 빠른 7월9일 귀국했다. K2 등반중 입은 발가락 동상을 빨리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상황에서 1주일간 병원에 누워 지내면서도 그는 인도 히말라야의 여러 거벽과 로체 남벽만 생각하며 지냈다.
 
  朴政憲은 등반을 運命的(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등반에 대해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해야 할 일 같고, 가야 할 길인 것 같아 등반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철학자들이 왜 사느냐 하는 데 대한 해답을 찾아내려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듯이 등반가들도 등반의 의미가 무엇인지 行爲(행위)로써 끊임없이 고민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럴 듯한 해답이 나오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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