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金容三 月刊朝鮮 기자
국내정치에 대한 평가盧泰愚(노태우) 전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해 지난 3월30일, 4월1일, 5월3∼4일 나흘간 서울 연희동 자택을 방문했다. 3월 말에도 비가 왔고, 5월3일에도 보슬보슬 봄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그러나 3월 말과 5월 초 사이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盧 전 대통령은 4월4일 모친상을 당했고, 또 자신의 육성 회고록 1회분 내용이 실린 月刊朝鮮(월간조선)이 세상에 소개됐다.
盧 전 대통령은 90세로 타계한 모친(金泰香 여사)을 회고하며 『어머니는 젊어서 아버님을 잃고 평생을 홀로 사셨다』고 말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祭(제)를 일주일에 한 번씩 지내기 때문에 내가 매주 주말이면 대구에 내려갑니다. 지난주에 대구에 갔더니 고향 친구들이 내 인터뷰 기사가 실린 月刊朝鮮을 많이 읽었더라고. 盧대통령 하면 가슴 아픈 상처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사를 읽고는 자기들이 잊고 있었던 것을 찾았다고 하더군요』
肉聲(육성) 회고록 제2회분의 주제는 국내정치다. 6·29 선언에서 시작하여 민주화의 진통, 중간평가 유보, 3당합당,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결정, 1992년의 14대 大選(대선)이 주된 흐름이다.
정치란 궁극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다. 따라서 정치 문제에 대한 대화 중간중간에 盧 전 대통령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아울러, 그 상황과 관련된 인물에 대한 평가를 솔직하게 밝혔다.
盧 전 대통령은 어느 인물을 언급할 때마다 신중하게 객관적 평가를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盧 전 대통령은 대화 중간중간에 전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간간이 밝혔다. 그것을 종합하면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존경하는 마음을, 그리고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에 대해서는 미안한 감정이 스며 있음을 알게 된다. 金泳三(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는 『나를 비롯해 우리나라 識者(식자)들 모두가 色盲(색맹)환자였다』면서 허탈과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지난 호 북방정책을 증언할 때는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던 盧 전 대통령은 민감한 질문이 이어질 때마다 희노애락의 감정적 기복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金泳三 전 대통령에 대한 증언 부분에서는 목소리 톤이 크게 달라지기도 했다.
盧 전 대통령은 인터뷰 내내 『나의 발언이 또다시 어떤 정치적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의 육성 회고록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더 나은 정치, 더 좋은 정치상황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면서 신중하게 가려서 써줄 것을 수차 당부했다.
민주투쟁과 권력투쟁
盧 전 대통령은 군사문화와 민주주의가 결코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면서 「군인이기 때문에 非(비) 민주적일 것이고, 민간정치인이기 때문에 민주적일 것이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선입감이라고 지적했다. 군사문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을 들어본다.
<흔히 軍을 이야기하면 「민주주의」나 「자유」 같은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여러 가지 통제를 받는 조직이어서 그렇게 豫斷(예단)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군조직 속에서 체험으로 얻은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은 軍 생활을 마치고 일반사회에서 갖게 된 것 못지 않게 민주적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민주적인 사고방식과 민주적인 절차를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 軍의 제도가 일본 군국주의를 본받지 않고 미국식을 따른 것은 천만다행이다.
초급장교 시절에 일본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軍의 제도는 미군 제도를 따온 것이다. 때문에 軍을 운용하는 데 필요한 원칙과 교본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삼아 민주적인 사고방식과 절차 등을 담고 있는 것이다.
軍의 전투력을 극대화시키는 데는 민주적인 절차가 아주 중요하다.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명령을 받아 그대로 하달하기보다는, 지휘관과 참모들의 의견을 종합해 결정하곤 했다. 나뿐만 아니라 軍에서의 결정은 거의 대부분 이같은 절차를 거친다. 거의 체질화되어 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과거에 많은 정치인들이 「민주투사」인양 부각된 적이 있는데, 그들이 민주화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추적해 보면 뚜렷한 자취를 찾아보기가 힘든 경우가 없지 않다. 오히려 민주투쟁이라기보다는 「권력투쟁」인 예가 많았다. 훌륭한 민주투쟁의 자취를 남겼다고 평가받을 분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나는 軍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와서도 많은 직책을 맡았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부 조직이나 당에 있으면서 군대에 있을 때 비해 『민주주의를 새롭게 배우는구나』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게 아닌데, 명색이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에서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민정당 대표위원 시절 당이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당직자 회의나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으면 간부들이 말을 막거나, 미리 결론을 유도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시간 낭비를 줄이고 회의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핑계에서였다. 이 점에서는 야당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래도 민주적인 절차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곤 했다>
『팔자에도 없는 대통령』
盧 전 대통령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6·29 선언이다. 기자가 1987년 6·29 선언의 진실에 대해 질문하자 盧 전 대통령은 미리 준비했던 기록 내용 중 6·29 선언과 관련된 자료를 꺼내 육성 증언을 시작했다.
陪席(배석)했던 孫柱煥(손주환) 전 공보처장관은 『6·29 관련 내용은 盧 전 대통령의 자필기록과 구두증언, 그리고 李丙琪(이병기) 당시 민정당 대표 보좌역, 崔秉烈(최병렬) 당시 민정당 정세분석실장이 배석해서 그들의 체험을 보충하여 작성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경제사정이 크게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朴正熙 대통령 말년과 마찬가지로 국민들의 저항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5共의 헌법에서는 대통령 임기가 「7년 단임」으로 마치게 되어 있었다. 그 당시 국민들의 심리가 全斗煥 대통령은 과연 이를 지킬 것인가. 全대통령이 단임으로 그만둘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5共 초기만 해도 별로 없었다. 임기 말쯤 되면 무슨 변란이 있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識者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全대통령이 단임으로 물러난다면 그 자체로써 민주주의가 크게 발전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나는 처음부터 全대통령이 단임을 지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12·12 사건 당시 내가 지켜본 바로는 정권에 대한 욕심이 분명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만날 적마다 全대통령은 내게 『팔자에도 없는 대통령을 하게 됐다』고 심중을 털어놓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그 말을 믿었다.
나는 1985년에 민정당 대표위원에 취임하면서 당시의 헌법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대통령 중심제 護憲(호헌)의 당위성을 강조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