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宣祖를 대신해 國亂 수습
明의 13년 세자책봉 거부로 庶子 설움
「大北派」에 의지한「코드인사」로 몰락
申東埈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역임. 現 고려大 강사. 저서 「관중과 제환공」, 「통치학원론」, 「삼국지통치학」, 「조조통치론」, 「중국문명의 기원」, 「논어론」, 「공자의 군자학」 등 20여 권.
明의 13년 세자책봉 거부로 庶子 설움
「大北派」에 의지한「코드인사」로 몰락
申東埈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역임. 現 고려大 강사. 저서 「관중과 제환공」, 「통치학원론」, 「삼국지통치학」, 「조조통치론」, 「중국문명의 기원」, 「논어론」, 「공자의 군자학」 등 20여 권.

- 심하전투에서 패전한 후 항복하는 姜弘立.
廢位(폐위)된 지 얼마 안 돼 독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燕山君과 달리 光海君은 오래도록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아들과 며느리의 자결과 부인의 暴死(폭사)를 지켜보아야 했다는 점에서 燕山君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이는 光海君이 유배지인 강화도 喬桐(교동)에서 제주도로 옮겨 갈 때 자신의 비통한 심경을 읊은 詩(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風吹飛雨過城頭(풍취비우과성두)
?氣薰陰百尺樓(장기훈음백척루)
滄海怒濤來薄暮(창해노도래박막)
碧山愁色帶淸秋(벽산수색대청추)
歸心厭見王孫草(귀심염견왕손초)
客夢頻驚帝子洲(객몽빈경제자주)
故國存亡消息斷(고국존망소식단)
烟波江上臥孤舟(연파강상와고주)
바람 불어 날리는 비는 성벽 위를 지나가니 / 습하고 더운 독기 백 척 樓閣(누각) 덮었구나 / 창해 怒濤(노도) 밀려오자 날은 점차 어둑하고 / 벽산의 슬픈 기색 싸늘한 秋色(추색) 띠었구나
歸心(귀심)으로 실컷 王孫草(왕손초) 보려 하나 / 나그네 꿈속의 제주도는 번번이 잠을 깨우네 / 고국의 存亡(존망)소식 끊어진 지 오래 되니 / 안개 자욱한 강 위에 孤舟(고주)만 누워 있네
이것은 光海君이 남긴 유일한 詩이다. 史官(사관)은 「당시 이 詩를 듣는 자치고 悲感(비감)에 젖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기록했다. 史官은 光海君이 사망한 지 9일 뒤인 그해 7월10일에 조정이 비로소 그의 사망소식을 접한 사실을 기록하면서 이 詩를 附記(부기)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한 것으로 짐작된다.
光海君은 왜 신하들에게 쫓겨나 비참한 삶을 살다가 죽은 뒤에 「폭군」과 「패륜아」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것일까? 당시 仁祖反正(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들이 내세운 사유는 무려 36가지에 달한다. 이 중에는 날조 내지 과장된 내용이 많아 액면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 내용을 종합해 보면 대략 국내요인과 국외요인으로 요약할 수 있다.
「親金排明」이 폐위 명분
국내요인은 크게 異腹(이복)동생을 죽이고 大妃(대비)를 幽閉(유폐)시켰다는 소위 「殺弟廢母(살제폐모)」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宮闕營建(궁궐영건)」을 들 수 있다. 국외요인으로는 소위 「再造之恩(재조지은)」을 베푼 上國(상국) 明(명)나라를 저버리고 오랑캐인 後金(후금)을 섬겼다는 이른바 「親金排明(친금배명)」을 들 수 있다.
光海君이 재위했던 시기는 대외적으로 中原(중원)의 주인공이 明에서 淸으로 바뀌는 과도기로 두 세력 간의 격돌로 인한 거센 압력이 조선의 숨통을 옥죄던 시기였다. 對內的(대내적)으로는 宣祖(선조) 때 시작된 朋黨政治(붕당정치)가 국가통치의 기본 틀로 고정되면서 각종 현안이 등장할 때마다 君命(군명)이 黨爭(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실종되는 소위 君弱臣强(군약신강) 양상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光海君의 통치행위는 이들 국내외 요인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지 않고는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먼저 光海君이 즉위하기 직전의 국내 상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원래 光海君은 寶位(보위)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다. 宣祖의 후궁인 恭嬪(공빈) 金씨 소생인 그는 庶出(서출)인데다가 長子도 아닌 次子였다.
光海君이 왕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壬辰倭亂(임진왜란) 때문이었다. 倭亂이 발발했을 당시 宣祖는 41세였다. 왜란 전에 西人(서인)의 鄭澈(정철)이 섣불리 世子(세자) 책봉 문제를 논했다가 된서리를 맞은 소위 「建儲議(건저의) 사건」이 일어난 데서 알 수 있듯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次庶子(차서자)인 光海君이 왕세자로 책봉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傍系(방계) 출신으로는 최초로 寶位(보위)에 올랐던 宣祖는 자신의 후계자만큼은 반드시 嫡子(적자)가 이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懿仁王后(의인왕후) 朴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이 와중에 왜란이 발발했다. 급히 피란길에 나선 宣祖는 破竹之勢(파죽지세)로 北上하는 倭軍(왜군)의 진격 소식에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내 평양성에 이르러 대신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次庶子 光海君을 世子로 책봉하고 分朝(분조)를 맡겼다. 分朝는 국가비상時 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을 말한다.
分朝 이끌며 民心 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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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光海君의 묘. |
당시 宣祖는 「최악의 경우 압록강을 건너 遼東(요동)으로 들어가 明나라 遼東都司(요동도사)에게 의탁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의주까지 몽진한 宣祖는 이내 遼東으로 넘어갈 생각으로 기별을 넣었다. 遼東순무 ?杰(학걸)은 宣祖의 요청을 받고 明나라 조정에 이같이 보고했다.
『거절하자니 不仁(불인)이고, 받아들이자니 난처하기 그지없습니다』
宣祖가 이끌던 조정은 이미 그 기능이 정지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光海君은 父王의 신임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分朝를 이끌며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를 순행하면서 勤王兵(근왕병)을 모집하는 한편 民心(민심)수습을 위한 여러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光海君에 대한 칭송이 날로 자자해졌다. 光海君은 경기도 伊川(이천)에 머물고 있을 때 그를 찾아온 成渾(성혼)을 만났다. 성혼은 훗날 「牛溪集(우계집)」에서 당시의 해후를 감격스럽게 회상해 놓았다.
<사변 직후 乘輿(승여)가 멀리 피하자 士民(사민)들은 목을 빼어 멀리 쳐다보면서 눈물을 감추지 못한 채 어디로 쫓아가야 할지를 몰랐다. 倭軍이 물밀듯이 쳐들어오자 모든 郡縣(군현)이 殘破(잔파)하여 小民(소민)들은 내심 이미 나라가 없어졌다고 여겼다. 이때 세자가 이천에서 分朝를 이끌고 駐箚(주차)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사방에서 칭송키를, 「비로소 우리 군주가 있는 곳을 알았다」고 했다. 이에 비로소 民心이 안정되었다>
당시 宣祖는 光海君 이외에도 臨海君과 異腹동생인 順和君(순화군) 등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파견해 근왕병을 모집케 했다. 그러나 臨海君과 順和君은 모두 倭軍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宣祖는 더욱 光海君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이때 宣祖는 光海君에게 절박한 심경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살아서 亡國(망국)의 군주이니 죽어서도 異域(이역)의 귀신이 되려고 한다. 父子가 서로 떨어져 만날 기약조차 없구나」
明나라, 世子책봉 승인 거부
光海君은 이 글을 보고 가슴이 미어져 밤새 통곡했다. 왜란 초기만 해도 宣祖의 光海君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戰亂(전란)의 와중에 宣祖가 쉬지 않고 明나라에 世子 책봉을 주청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明나라 조정의 반응은 의외로 싸늘했다. 이에 光海君이 世子로 책봉된 1592년부터 1604년까지 13년 동안 世子 책봉을 청하는 奏請使(주청사)가 北京에 모두 다섯 차례 파견되었으나, 모두 거부되었다. 마지막에는 「光海君이 수만 명의 근왕병을 모은 것은 물론 分朝활동을 통해 民心을 수습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를 世子로 정한 것은 모든 臣民의 여망」이라는 간절한 내용의 奏文(주문)을 보냈지만, 이마저도 거부되었다.
당시 明나라 禮部(예부)는 표면상 光海君이 次庶子라는 점을 그 이유로 내세웠다. 그러나 사실은 明나라 神宗(신종)이 아직 황태자를 결정하지 않은 것이 근본이유였다. 황태자를 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藩國(번국)의 次庶子를 승인할 경우 장차 황태자 책봉時 嫡長子(적장자) 이외의 다른 皇子(황자)를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明나라 대신들의 의구심이 작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의 주청이 계속되자 明나라 都督主事(도독주사) ?雲翰(섭운한)은 조선의 주청사를 향해 이같이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었다.
『너희 나라 王은 昏亂(혼란)하여 임진년에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그러니 長子가 어찌 왜적에게 붙잡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오히려 長子가 포로가 된 것을 죄로 삼아 그 次子를 세우고자 하니 어찌 너희들의 말을 들어줄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亂臣賊子(난신적자)」의 무리이다. 禽獸(금수)들이나 하는 일을 내가 어찌 차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결국 明나라 神宗은 宣祖에게 『經常(경상)은 바꿀 수 없는 만큼 臨海君을 世子로 다시 정하고 光海君은 次子로서 분수를 지키도록 하라』는 勅諭(칙유)를 내렸다.
神宗의 칙유를 접수한 조선 조정은 크게 당혹해했다. 더 큰 문제는 이를 계기로 宣祖와 光海君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한 점이다. 이미 사자를 통해 섭운한의 질책을 보고받은 宣祖는 자신을 昏君(혼군)으로 여기고 있는 明나라 조정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채고 주변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위신이 실추된 반면 光海君에 대한 조야의 신망이 날로 높아지자 불안감을 느끼지 시작했다.
영창대군의 탄생
마침내 宣祖는 왜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재위 33년(1600)에 의인왕후가 사망하자 光海君을 엄격히 대하기 시작했다. 「宣祖실록」 33년 3월30일조는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主上이 世子에게 대하는 것이 매우 엄해져 引接(인접)하는 일이 매우 드물게 되었다. 이에 世子는 문안할 적마다 外門(외문)에 이르렀다가 이내 물러가곤 했다>
이때 宣祖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내심 새 왕비를 맞아 嫡子를 둘 생각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로부터 2년 뒤인 재위 35년(1602)에 宣祖는 50세의 나이에 이조좌랑 金悌男(김제남)의 딸을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녀가 宣祖 사후 仁穆大妃(인목대비)인데, 이때 나이 18세였다.
새 왕비는 결혼한 지 4년 뒤인 宣祖 39년(1606)에 마침내 宣祖가 그토록 고대하던 嫡子 永昌大君(영창대군)을 생산했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宣祖의 마음은 급속히 어린 嫡子에게 기울어졌다. 宣祖의 속마음을 눈치 챈 北人의 柳永慶(유영경)이 嫡子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백관들의 하례식을 추진하는 등 발빠르게 光海君을 견제하고 나섰다.
이를 계기로 北人은 마침내 光海君을 지지하는 鄭仁弘(정인홍)의 大北과 柳永慶의 小北으로 갈리게 되었다. 이때 鄭仁弘이 小北의 왕세자 교체 시도를 통박하면서 光海君을 비호하는 疏(소)를 올리자 宣祖가 크게 화를 냈다. 훗날 李建昌(이건창)이 쓴 「黨議通略(당의통략)」은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기술해 놓았다.
<宣祖가 大怒(대로)해 말하기를, 『鄭仁弘이 世子에게 속히 傳位(전위)할 것을 꾀하니 이는 신하로서 옛 군주를 몰아내는 일을 능사로 삼는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이후 光海君이 문안할 때마다 宣祖는 대놓고 질책키를, 『冊命(책명)을 아직 받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世子를 칭하며 문안을 하는 것인가. 다시는 문안하지 말라』고 했다. 光海君이 伏地嘔血(복지구혈: 땅에 엎어져 피를 토함)했다>
光海君으로서는 참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國亡의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전국 각지를 뛰어다니며 근왕병을 모아 父王의 신임에 보답했으나, 단지 庶子라는 이유만으로 嫡子가 태어나자마자 이토록 냉대받게 된 현실에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복지구혈」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보인다.
만일 宣祖가 몇 년만 더 살았다면 光海君은 廢世子(폐세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宣祖는 재위 41년(1608) 56세의 나이로 急逝(급서)했다. 훗날 反正세력은 「宣祖독살說」을 퍼뜨렸으나 이는 터무니없는 날조이다.
柳永慶의 음모
光海君을 멀리하고 영창대군을 총애했던 宣祖조차 죽기 직전에 보위를 光海君에게 넘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영창대군의 앞날을 당부하기 위해 7명의 原任(원임·前任)대신들을 부른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때 영의정 柳永慶은 原任대신들에게 宣祖가 時任(시임·현임)대신만 불렀다고 속인 뒤 혼자서 宣祖의 말을 들었다. 宣祖가 光海君에게 보위를 물려줄 뜻을 밝히자, 柳永慶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이내 光海君에게 傳位(전위)하는 내용을 담은 敎書(교서)를 자신의 집에 감추어 두었다.
이어 그는 같은 小北인 병조판서 朴承宗(박승종)과 공모한 뒤 군사를 동원해 대궐을 에워쌌다. 君王의 遺命(유명)을 뒤집기 위한 奸計(간계)를 서슴없이 자행한 것이다. 朋黨정치가 초래한 君弱臣强의 양상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우여곡절 끝에 즉위
얼마 후 이 사실이 鄭仁弘과 李爾瞻(이이첨) 등 大北에게 발각되었다. 이들은 곧 임종 직전의 宣祖를 찾아가 柳永慶에 대한 처벌을 강력히 주청했으나, 宣祖는 이를 결정하지 못한 채 이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宣祖가 죽자 柳永慶은 인목대비를 찾아가 속히 懿旨(의지)를 발표해 영창대군을 즉위시킨 뒤 垂簾聽政(수렴청정)에 나설 것을 종용했다.
24세의 인목대비는 순간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미 16년 동안 世子 자리에 있던 33세의 光海君을 제치고 강보에 싸인 두 살짜리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발표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小北인 朴承宗이 병조판서로 있다고는 하나 小北세력이 兵權(병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도 아니었다. 자칫 先王의 遺命을 날조한 逆徒(역도)로 몰려 떼죽음을 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인목대비는 곧 光海君을 즉위시킨다는 언문 의지를 내렸다.
光海君은 일단 커다란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明나라로부터 繼位(계위)를 승인받는 난제가 남아 있었다. 世子 책봉을 거부해 온 明나라 조정이 계위를 선뜻 승인할 리 만무했다.
臨海君의 존재도 걸림돌이었다. 光海君은 明나라에 사자를 보내 臨海君이 중풍 때문에 王位(왕위)를 사양했다는 내용의 奏本(주본)을 제출했다. 예상대로 明나라 조정은 트집을 잡고 나왔다. 이내 遼東도사 嚴一魁(엄일괴)에게 명해 査問官(사문관)을 조선에 파견해 사실 여부를 조사케 했다.
이때 臨海君은 『왕위를 도둑질당했다』고 떠들고 다니던 중 이내 「무사들을 모아 역모를 꾀한다」는 의혹을 받고 강화도 郊洞(교동)으로 유배돼 있었다. 얼마 후 서울에 온 엄일괴는 臨海君을 만나 조사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光海君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엄일괴에게 막대한 양의 銀子(은자)를 건네 형식적인 조사로 적당히 끝내게 함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이 사실은 光海君의 정통성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光海君은 즉위한 이듬해 6월에 가까스로 明나라로부터 조선 국왕으로 승인을 받았다. 이때 책봉례를 주관하기 위해 조선에 온 태감 劉用(유용)은 약 6만 냥의 銀子를 뇌물로 받아 갔다. 이후 조선에 오는 明나라 사신마다 갖은 명목으로 막대한 양의 銀子를 수탈해 가는 관행이 만들어졌다.
光海君이 즉위할 당시 明나라 조정에서는 조선 문제를 둘러싼 논의가 분분했다. 이때 왜란 때 참전한 李如松(이여송)의 부친 廣寧摠兵(광녕총병) 李成梁(이성량)이 조선병탄을 골자로 하는 상주문을 올렸다. 「光海君일기」 즉위년 7월29일조에 告訃使(고부사)에 의해 보고된 상주문의 골자가 수록되어 있다.
<이성량은 明나라 조정이 조선왕의 책봉을 인준하지 않은 것을 알고 곧 都御史(도어사) 趙楫(조즙)과 더불어 은밀히 주청하기를, 「조선이 형제간에 서로 다투고 있으니 군사를 일으켜서 습격·탈취하여 郡縣(군현)으로 삼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당시 이성량은 여진족과의 무역을 독점하면서 明나라 상인들로부터 거둔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北京의 權貴(권귀)와 결탁해 사실상 遼東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는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조선의 비옥한 토지와 인삼 등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 사실이 조선에 알려지자 조선 조정은 아연 위기감에 휩싸였으나, 다행히 이성량의 계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光海君과 鄭仁弘
光海君은 천신만고 끝에 보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즉위한 이후에도 시종 안팎의 여러 도전으로 인해 커다란 곤경에 처해 있었다. 당시 여러 朋黨세력 중 유일하게 光海君을 지지한 세력은 鄭仁弘을 주축으로 한 大北세력이었다. 鄭仁弘은 南冥 曺植(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대쪽 같은 인물이었다.
鄭仁弘에 대한 光海君의 신임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이는 鄭仁弘이 光海君 3년(1611)에 晦齋 李彦迪(회재 이언적)과 退溪 李滉(퇴계 이황)의 文廟從祀(문묘종사)를 거부했을 때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자 이 유생들을 과감히 축출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초 鄭仁弘은 자신의 스승인 曺植이 문묘종사 대상에서 제외되자, 李彦迪과 李滉도 문묘종사 대상에 포함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성균관 유생들이 역대 성균관 유생의 방명록인 「靑衿錄(청금록)」에서 鄭仁弘의 이름을 삭제하는 소동을 벌이며 크게 반발했다. 그러자 光海君은 가차 없이 유생들을 모두 성균관에서 축출하는 초강수를 썼다. 光海君의 鄭仁弘에 대한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는 여타 朋黨세력 및 유생들로 하여금 光海君과 大北을 한 묶음으로 분류해 배척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흐름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光海君 5년(1613) 4월에 일어난 소위 「七庶(칠서)의 獄事(옥사)」였다. 당시 鳥嶺(조령)에서 東萊(동래)의 銀장수를 살해하고 수백 냥의 銀을 강탈한 사건이 발생했다. 銀장수의 하인이 끈질긴 추격 끝에 강도들을 찾아내 관군에게 고발하자 관군이 출동해 이들을 검거했다.
이 강도들은 놀랍게도 명문가의 庶子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宣祖 때 영의정을 지낸 朴淳(박순)의 庶子인 朴應犀(박응서)도 있었다.
이들 7명의 庶子들은 소위 庶孼禁錮法(서얼금고법)으로 인해 벼슬길이 막혀 내심 불만을 품고 있던 중, 庶子 출신인 光海君이 王位에 즉위하자 크게 기뻐하며 즉시 서얼금고법의 족쇄를 풀어줄 것을 청원했다.
이 청원이 거부당하자 그들은 불만을 품고 「윤리가 필요 없는 무리」라는 뜻에서 「無倫黨(무륜당)」이라 칭한 뒤, 鳥嶺을 넘나드는 장사치들을 약탈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七庶의 獄事」
이 사건은 당시 재주 있는 서얼 출신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지만 사안 자체만을 놓고 볼 때는 단순한 강도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내 엄청난 정치사건으로 비화하고 말았다. 이는 朴應犀의 告變(고변)으로 인한 것이었다. 「光海君일기」 5년 4월25일조는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사건이 발각되었을 때 박응서만 혼자 집에 있다가 체포되어 맨 먼저 자복하였다. 형조로 이송한 뒤 처벌할 예정이었는데 박응서가 옥중에서 상소하여 고하기를, 「우리들은 천한 도적들이 아니다. 銀貨를 모아 무사들과 결탁한 다음 반역하려 하였다」고 했다>
당초 이들이 처음 갇히게 되었을 때 사대부들 가운데에는 『이 사람들은 모두 名家의 자제들인 만큼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며 이들을 구해 주려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포도대장 韓希吉(한희길)도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史官은 이같이 평해 놓았다.
<당시 이이첨이 이 얘기를 듣고 한희길을 불러 묻자 한희길이 이들의 供招(공초) 내용을 모두 알려 주었다. 이이첨은 마침내 한희길 등과 의논한 뒤 몰래 사람을 들여보내 박응서를 유도하였다. 박응서는 죽게 된 상황에서 살고 싶은 욕심에 이이첨의 사주를 받고 마침내 告變했던 것이다>
박응서는 『國舅(국구)인 김제남과 몰래 통하여 양식과 무기를 준비해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받들려고 도모했다』고 告變했다. 이를 조사한 鄭沆(정항)이 이 사실을 보고하자 光海君은 親鞫(친국)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박응서는 이렇게 주장했다.
『뇌물을 써서 宣傳官(선전관)이나 內禁衛(내금위) 등의 관직을 얻어 내응할 발판을 마련한 뒤 3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야음을 틈타 대궐을 습격하려 하였습니다.
먼저 大殿(대전)을 범하고 두 번째로 동궁을 범한 다음 급히 國寶(국보)를 가지고 대비전에 나아가 수렴청정을 하도록 청하는 한편 성문을 굳게 닫고 백관을 모두 바꿔치려 하였습니다. 이어 감사와 병사도 모두 갈아치운 뒤 사신을 보내 중국 조정에 奏文(주문)하려고 했습니다. 이상이 예정된 계획이었는데 아직 대대적으로 모으지를 못했기 때문에 시일은 정하지 못했고, 대비와 대군에게도 알리지 못했습니다』
박응서가 무고한 모든 인사들이 일제히 투옥되었다. 박응서는 이 고변으로 사면된 뒤 벼슬길에 올랐으나, 仁祖反正 때 사형당했다. 조사 결과 「김제남이 영창대군의 사주를 들고 무당 집으로 가 영창대군이 君王이 될 운수인지 물어보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김제남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김제남이 賜死(사사)당하자 영창대군 역시 빠져나갈 길이 없게 되었다.
인목대비의 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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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창대군의 救命을 호소했던 李德馨. |
인목대비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은 이보다 늦게 시작되었다. 光海君 10년(1618)에 들어와 인목대비의 거취를 둘러싸고 朝臣들 간에 논란이 일었다. 大北은 거의 예외 없이 廢母를 주장하고 나섰다. 역도의 딸이자 생모라는 게 그 이유였다. 小北세력을 포함해 李元翼(이원익)과 鄭述(정구) 등 南人세력과 李恒福(이항복)을 중심으로 한 西人세력이 이에 강력 반발했다.
廢母 문제는 大北의 지지기반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鄭仁弘의 제자 鄭蘊(정온)은 사제관계를 끊고 鄭仁弘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를 지지하는 세력이 하나의 당파를 형성해 中北(중북)이라고 했다. 鄭蘊은 이 때문에 제주도에 유배 갔으나 仁祖反正후 南人에 합류해 南人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때 大北세력은 인목대비를 아예 제거하고자 했으나 光海君은 인목대비를 西宮(서궁)에 유폐하는 데 그치고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이 소위 「殺弟廢母」의 전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大北이 주도한 사건이다. 굳이 결과를 놓고 탓한다면 모르나, 光海君은 결코 이 사건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 이 사건은 光海君의 책임이라기보다는 「君弱臣强」이라는 朋黨정치 체제 아래서 빚어진 부작용으로 보는 것이 옳다.
王權강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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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목대비 廢母에 반대했던 李恒福(왼쪽)과 李元翼 . |
이는 그가 재위 중에 받았던 尊號(존호)가 무려 48字에 달한 사실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존호는 君王의 德政(덕정)을 기리기 위해 붙이는 일종의 명예칭호로 대개 국가대사가 마무리될 경우 올린다. 光海君은 재위 4년(1612)에 倭亂 때 社稷(사직)을 中興(중흥)시켰다는 이유로 「體天興運(체천흥운)」으로 시작되는 8字의 존호를 받았다. 이후 각종 역모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를 평정했다는 이유로 8字짜리 존호를 다섯 번을 더 받았다.
일국의 君王이 생전에 이토록 긴 존호를 받은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燕山君은 甲子士禍(갑자사화) 이후 신하들로부터 8字의 존호를 받은 뒤 「부끄럽고 황망하다」는 내용의 詩를 지었다.
역사상 死後에 가장 긴 존호를 받은 사람은 삼국지의 영웅 關羽(관우)이다. 그는 死後에 大帝(대제)로까지 떠받들어지면서 淸代에 이르러서는 총 26字에 달하는 존호를 받았다. 관우가 받은 존호는 중국의 역대 존호 중 가장 긴 경우에 해당하지만, 光海君이 생전에 받은 존호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光海君이 자신의 生母인 恭嬪 金씨를 왕비로 追崇(추숭)한 것이나, 仁慶宮(인경궁)과 慶德宮(경덕궁) 등의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光海君 4년(1612)에는 「서울이 王氣(왕기)가 쇠했다」는 주장에 따라 交河(교하 : 지금의 파주시)로 수도를 옮기려고 시도했다. 光海君은 미신적인 풍수설을 맹신하고 있었다. 궁궐영건 사업은 비록 王權강화를 위한 것이었으나 왜란 이후의 피폐한 상황을 도외시하고 民生을 피폐하게 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大北은 政敵(정적)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으나, 그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大北이 獨走(독주)하자 여타 朋黨세력의 반감이 증폭되면서, 「反대북세력」이 광범위하게 결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大北세력과 한 묶음으로 분류된 光海君의 기반이 취약해졌다. 그는 자신의 즉위에 이바지한 大北세력만을 중용하고, 다른 朋黨들을 외면하는 「코드인사」로 몰락을 자초했다.
光海君은 뒤늦게 北方문제를 놓고 李爾瞻과 첨예한 대립을 벌이면서, 大北 일변도의 입장을 바꾸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평소 李爾瞻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던 光海君은 小北과 西人을 등용해 李爾瞻을 견제하려 했으나, 오히려 西人세력에게 武力기반을 제공해 仁祖反正을 야기하고 말았다.
光海君과 李爾瞻은 왜 사이가 벌어지게 된 것일까? 여기에 反正세력이 光海君 폐위의 결정적인 이유로 내세운 소위 「親金排明」의 진상이 숨어 있다.
누르하치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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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태조 누르하치. |
임진왜란을 前後한 시기에 만주에서는 누르하치가 이끄는 建州衛(건주위) 여진족이 그 세력을 날로 확장시키고 있었다. 建州女眞(건주여진)은 明이 遼東에 설치한 누르간도사(奴兒干都司)의 관할 아래 있었다. 여기에는 건주여진 이외에 海西女眞(해서여진)과 野人女眞(야인여진)이 속해 있었다.
누르하치 집단은 건주여진의 작은 부족에 불과했다. 누르하치는 15세기 초에 明나라에 의해 建州左衛(건주좌위)의 지휘자로 임명된 멍게티무르(猛哥帖木兒)의 6代孫으로 그의 宣祖들은 대대로 건주좌위의 요직을 맡았다.
누르하치 一家는 1583년에 이성량 휘하에 종군해 明나라에 저항하는 아타이(阿臺)를 치기 위해 원정한 적이 있었다. 이때 누르하치의 父親과 祖父가 전투 도중 적군으로 오인받아 明軍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성량은 누르하치를 위로하기 위해 明나라와 독점적으로 교역할 수 있는 칙서 30통을 주는 한편, 누르하치에게 明나라 장수의 직책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이는 누르하치가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이후 누르하치는 세력을 급속히 신장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은 백두산 등지에서 산출되는 인삼과 貂皮(초피) 등을 전매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누르하치는 이를 기반으로 주변 부족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왜란이 발발해 倭軍이 함경도 일대를 점령하자 누르하치는 조선 조정에 國書를 보내 「군대를 파견해 돕겠다」는 제의를 했으나 당시 영의정 柳成龍(유성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宣祖는 1595년에 南部主簿(남부주부) 申忠一(신충일)을 파견해 누르하치 진영을 살피게 했다. 신충일이 돌아와 남긴 보고서가 바로 「建州紀程圖記(건주기정도기)」이다. 조선에서 나온 누르하치 세력에 관한 최초의 보고서이다.
누르하치는 丁酉再亂(정유재란)이 일어난 이듬해 다시 조선에 「2만 명의 병력을 보내 돕겠다」고 제의했다. 이때 조선에 주둔해 있던 明나라 제독 형개는 이를 받아들이고자 했으나 이내 조선 측의 반대로 참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누르하치 세력이 조선에 위협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宣祖 40년(1607)경부터였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동생 수르가치를 보내 함경도 국경지대에 있는 해서여진의 忽溫(홀온)의 군사를 대파하고 東海로 연결되는 통로를 확보했다.
後金과의 友好
조선은 다음 목표가 조선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光海君은 즉위하자마자 누르하치의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는 「光海君일기」 즉위년 8월13일조에 실려 있는 해평부원군 尹根壽(윤근수)의 箚子(차자)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번에 通事(통사)가 가지고 온 狀啓(장계) 중에, 「누르하치가 배를 건조하여 우리나라를 도모하려 한다」라는 말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왜란 이래 우리나라 장수가 훈련되어 있지 않아서 敵만 보면 그만 달아나기가 일쑤입니다. 胡兵(호병)을 맞을 경우 兩軍이 교전도 해보기 전에 그 승패는 이미 결정날 것입니다>
光海君이 왜란 때 병조판서를 지낸 西人의 거두 李恒福을 西北面都體察使(서북면도체찰사)에 임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를 계기로 西人 계통의 武人들이 西北邊界(서북변계)의 武將(무장)으로 대거 발탁되었다. 이들은 후일 仁祖反正 때 병력을 동원하는 주도세력이 되었다.
光海君은 여진족이 대해 구사한 정책은 중국이 전통적으로 사방의 이민족에게 구사한 소위 「羈?策(기미책)」이었다. 「기미」란 「말의 굴레와 소의 고삐」를 의미한다. 「기미책」은 「힘이 있을 때는 武威(무위)로 제압하고, 힘이 약할 때는 상대방을 懷柔(회유)하는 식으로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대방을 견제」하는 강온양면책을 말한다.
光海君은 누르하치에 관한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그들을 厚待(후대)하여 後患(후환)이 없도록 할 것을 지시했다. 이로써 조선은 東아시아의 신흥강대국으로 떠오른 後金세력과 직접적인 충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위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光海君 2년(1610)에 만주 일대에서는 「조선과 明이 합세해 後金을 공격하려 한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누르하치의 경계가 커지자 備邊司(비변사)는 사자를 보내 근거 없는 소문임을 해명했다.
누르하치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鏡城(경성)에 유배된 역관 文希賢(문희현)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光海君일기」 10년 3월5일조에 이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문희현이 경성에 유배되었을 때, 그가 여진어를 잘하자 兵使(병사)가 會寧(회령)에 통상하러 온 여진人을 만나게 했다. 얼마 후 누르하치가 문희현에게 글을 보내면서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이 글에서 누르하치는 明나라가 자신의 祖父를 죽이고 대대로 못살게 굴어 왔다는 사실과 장차 군대를 일으켜 明나라에 보복코자 하니 조선이 이를 불쌍히 여겨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을 두루 말하였다>
당시 누르하치가 조선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派兵
마침내 누르하치는 光海君 8년(1616)에 國號를 大金(대금·後金), 연호를 天命(천명), 수도를 興京(흥경)으로 정한 뒤, 소위 「七大恨(칠대한)」을 선포하고 明에 선전포고했다. 이어 遼東의 군사 요충지이자 교역 중심지인 撫順(무순)이 後金軍에게 함락됐다.
明나라는 대규모 토벌군 파견을 준비하면서, 以夷制夷(이이제이)의 일환으로 조선에 대해 後金의 배후를 치는 援兵(원병)파견을 요구했다.
派兵(파병)문제를 놓고 조선 내부에서 光海君과 비변사 臣僚(신료)들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光海君은 戰亂(전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을 들어 이를 거부코자 했으나 비변사는 「再造之恩」을 들먹이며 이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光海君은 끝내 여러 핑계를 대어 이를 회피했고 비변사 신료들이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여기에는 大北의 거두이며 光海君의 寵臣(총신)인 대제학 겸 예조판서 李爾瞻도 끼어 있었다. 「光海君일기」 10년 윤4월 24일조에 李爾瞻의 주장이 실려 있다.
<明나라는 父母의 나라로 再造之恩을 베풀었는데 지금 누르하치로부터 外侮(외모)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援兵을 요청한 마당에 어찌 달려가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 합천에 머물고 있던 영의정 鄭仁弘도 「체찰사를 국경에 보내 병사를 調撥(조발)하되, 조선의 피폐한 상황을 알리면 징발하는 숫자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며 出兵원칙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光海君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光海君은 『피폐한 군사를 호랑이굴로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일축한 뒤, 明나라에 완곡히 파병을 거절하는 回咨(회자)를 보내도록 했다. 遼東으로 파견 나온 明나라 經略(경략) 楊鎬(양호)가 回咨의 내용을 문제 삼아 北京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비변사의 반발이 심해지자 光海君은 할 수 없이 징병은 하되, 병력을 越境(월경)시키지 않고 끝까지 국내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마저 양호의 저지로 무산되자, 光海君은 결국 파병을 결정했다.
심하전투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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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하전투에서 전사한 金應河. |
<만일 「숙달된 砲手는 매우 적은 상황에서 400명을 차출하게 되면 동쪽의 형세가 매우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경략이 곧 군사를 돌려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털끝만큼도 곤란해하는 기색도 없이 이를 흔쾌히 허락했으니 이는 경의 잘못이다>
조선군은 明나라 장수 劉綎(유정) 휘하에 배속되어 後金의 수도인 興京을 향해 전진하던 중 1619년 3월에 벌어진 深河(심하)전투에서 後金軍의 습격을 받고 대패하고 말았다. 姜弘立은 곧 남은 병력을 이끌고 투항했다. 심하전투를 포함해 당시 明나라 군사가 後金 군사와 싸운 전투 전체를 통상 「사르후(薩爾滸) 전투」라고 한다. 이 전투는 사실상 明·淸 교체를 결정지은 전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 학계에서는 당시의 심하전투와 관련해 논란이 계속돼 왔다. 光海君이 姜弘立에게 밀지를 내려 항복을 미리 지시했는지 여부가 논란의 초점이었다. 1930년대 일본인 학자 다가와 코조(田川孝三)는 光海君이 主和論者(주화론자)인 姜弘立을 도원수로 임명한 사실 등을 근거로 소위 「密旨說(밀지설)」을 제기했다.
그러자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는 밀지설의 근거로 援用(원용)된 史料 대부분이 인조반정 이후에 나온 기록인 점을 지적하면서, 後金에 억류되었다가 귀환한 李民(이민환)의 「柵中日錄(책중일록)」을 근거로 이를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당시 조선군의 항복은 事前에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라 敗戰을 당한 부득이한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라며 소위 「敗降說(패항설)」을 주장했다.
「光海君일기」의 기록은 여러 내용이 뒤섞여 있어 단정하기 어려우나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11년 3월 12일조 기록에 「패항설」을 뒷받침하는 평안감사의 보고내용이 나온다.
<유격 喬一琦(교일기)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선두에서 행군하던 중 갑자기 누르하치의 伏兵(복병)을 만나 大敗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우리나라 左營(좌영)의 장수 金應河(김응하)가 재차 진격하였다가 후퇴하는 순간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어닥쳐 먼지와 모래로 천지가 캄캄해졌고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서 화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적이 鐵騎(철기)로 짓밟아대는 바람에 좌영의 군대가 마침내 패하여 거의 다 죽고 말았습니다>
「密約說」의 허구
당시 明軍의 참패는 開鐵摠兵(개철총병) 杜松(두송)이 功을 탐내 경솔히 전진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싸움에서 明軍 휘하의 조선군은 병력의 8할 이상에 달하는 9000명이 전사했다. 姜弘立 휘하의 조선군이 애초부터 적극적인 戰意(전의)를 보이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密約說(밀약설)」로는 조선군의 慘事(참사)를 설명할 길이 없다. 이는 3월2일조에 실려 있는 姜弘立의 보고서를 보면 더욱 확연히 알 수 있다.
<오랑캐가 화살을 빗발같이 쏘아 댔으므로 싸우다가 후퇴하고 싸우다가는 후퇴하곤 하였습니다. 적은 퇴각하여 깎아지른 벼랑에 숨어서 나와서 쏘다가 다시 숨곤 하였는데 절벽이 깎아지른 듯하여 발을 디딜 수 없어서 공격해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나무에 의지한 채 서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화살과 조총을 어지럽게 마구 발사하는 가운데 죽은 자가 태반이었습니다>
서광계의 「조선감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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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감호론」을 주장했던 徐光啓. |
이때 대신 徐光啓(서광계)가 재차 조선에 대해 원병을 청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다. 그는 이해 6월에 상소를 올려 『明나라가 이미 조선에 「再造之恩」을 베푼 만큼 다시 한 번 援兵을 청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자신을 사신으로 파견해 줄 것을 청했다.
서광계는 『조선은 義理(의리)를 아는 나라이니 설득이 가능할 것이다. 만일 설득이 안 되면 조선을 監護(감호)해야 한다』는 이른바 「조선감호론」을 펼쳤다. 이는 「조선이 後金의 위협에 굴복하여 後金과 親交(친교)를 맺는 등 이미 後金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것이었다.
「감호」는 明이 직접 관리를 파견해 조선을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왜란 당시 明나라 조정에서 조선에 대한 직접통치 주장이 나왔었음을 알고 있는 조선의 조정은 이 소식에 아연 긴장했다.
光海君은 곧 『서광계가 사실을 잘못 알고 있으니 급히 사신을 보내 이를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臣僚들은 『의심을 받을 만한 단서를 없애는 것이 일의 순서』라면서, 『먼저 後金과의 왕래를 끊고, 항복한 장수들의 가족을 처벌하고, 明이 요구한 파병에 순응하기 위해 국경에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臣僚들은 「조선감호론」을 야기시킨 장본인으로 사실상 光海君을 지목한 셈이다.
光海君이 계속 강경한 입장을 보이자 다급해진 것은 明나라였다. 상황이 점차 惡化되자 明나라는 「군량과 염초를 모두 明나라에서 지원할 터이니 조선은 다만 병력만 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神宗은 사자를 통해 심하전투에서 전사한 조선 장병들에게 銀 3만 냥을 하사하면서, 「조선과 明이 ?角之勢(기각지세)를 이뤄 後金을 섬멸하자」는 내용의 칙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光海君 14년(1622)에 廣寧(광녕)마저 後金에게 함몰되자 조선과 明의 육상통로가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다. 明은 조선이 後金과 합세해 후방의 병참기지로 변할까 크게 우려했다. 明나라로서는 이제 원병을 요구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조선이 後金 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탁월한 외교
이를 계기로 光海君의 발언권이 크게 신장되었다. 光海君은 明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李廷龜(이정구)를 辨誣使(변무사)로 파견하는 동시에 심하전투에서 戰死(전사)한 선천부사 金應河를 顯彰(현창)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이와 함께 光海君은 明에게 오히려 조선의 안전을 위해 병력을 동원해 요충지를 지켜 달라고 청했다. 이는 明나라의 원병 요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고도의 책략이었다.
이때 뜻밖에도 明나라 장수 毛文龍(모문룡)이 새로운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그가 의주 등을 오가며 後金軍을 자극하자, 光海君 13년(1621) 12월에 後金軍이 그를 치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왔다.
모문룡은 겨우 몸을 빼내 도망쳤다. 모문룡은 이후 평안도 일대를 왕래하며 遼東에서 탈출해 조선으로 들어온 중국인들을 불러 모아 압록강변에서 後金軍과 충돌을 일으키는 등 끊임없이 事端(사단)을 일으켰다.
光海君은 모문룡을 회유해 섬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이에 모문룡이 마침내 철산 앞바다의 假島(가도)로 들어갔다. 이에 光海君은 큰 짐을 덜게 되었으나, 이후 모문룡은 인조반정 이후에도 큰 두통거리로 남아 胡亂을 촉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심하전투에도 불구하고 旭日昇天(욱일승천)하는 後金과 직접적인 충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光海君의 탁월한 외교정책 덕분이었다. 光海君은 明에 대해서는 그들이 요구한 바대로 援軍을 파견하면서 희생을 최소화해 「再造之恩」의 빚을 교묘한 방법으로 갚는 한편, 後金에 대해서는 시종 「기미책」을 써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한 것이다.
光海君의 기미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後金의 전략적 의도가 적잖이 작용했다. 後金은 明의 요충지들을 공략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까닭에 조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後金의 입장에서 볼 때 明과의 전쟁으로 무역이 중단되고 연이은 승리로 영토가 급속이 늘어난 상황에서 조선과의 경제교역 확대는 매우 절실한 과제이기도 했다. 農牛(농우)를 비롯해 곡물과 소금·면포 등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이를 공급해 줄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조선밖에 없었다.
하지만 光海君의 탁월한 외교정책이 없었다면 後金은 진즉에 全 병력을 조선으로 돌려 압록강을 넘어왔을 공산이 컸다. 당시 中原공략을 꾀하고 있던 後金이 後顧之憂(후고지우)인 조선을 먼저 평정하지 않은 채 中原공략에 나설 리는 만무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나바의 주장과 같이 光海君은 東北亞(동북아) 中華(중화)질서가 근본적으로 뒤바뀌는 난세에 탁월한 책략으로 국가를 보위한 뛰어난 군주로 평가할 만하다.
光海君의 失政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국내요인을 포함해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光海君은 크게 세 가지 면에서 커다란 실책을 범했다.
첫째, 在位 막바지 단계까지 大北과 행보를 같이 함으로써 초연한 입장에서 여러 朋黨세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외교문제를 둘러싸고 뒤늦게 大北세력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으나 이미 西人세력을 비롯한 여타 朋黨세력의 大北에 대한 증오심은 이미 한계수위를 넘은 뒤였다. 이는 곧 光海君에 대한 증오심으로 연결되었다.
둘째, 「殺弟廢母」 문제에 대해 君王으로서 좀더 확고한 입장을 보여야 했다. 大北이 政敵을 몰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일련의 「誣獄(무옥) 사건」을 전개할 때 현명한 판단을 해서 大北의 專政(전정)을 미연에 차단했어야 했다.
그는 비록 주도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으나 이를 묵인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사실 光海君이 확고한 자세를 견지하기만 했어도 나이 어린 영창대군과 아직 어린나이에 불과한 인목대비의 존재는 별다른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大北의 誣獄 사건을 묵인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셋째, 「궁궐영건」 사업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었다. 비록 王權강화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이는 결코 최우선 순위가 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도 높게 추진했다.
王威(왕위)를 內實(내실)보다 外樣(외양)에서 찾는 愚(우)를 범한 셈이다. 특히 허황된 풍수설에 현혹돼 遷都(천도)를 꾀하고 宗親(종친)의 집을 헐어 궁궐을 짓는 등의 모습을 보인 것은 暗君(암군)의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지나친 美化는 곤란
그러나 최근 들어 光海君에 대한 평가는 극찬 일변도로 흐르고 있다. 이는 이나바 이와기치의 작업과 무관하지 않다.
이나바는 역사상 최초로 光海君에 대한 명예회복을 시도한 인물이다. 그는 1930년대에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光海君 시대의 滿鮮關係(만선관계)」에서 「光海君이야말로 조선의 國益을 위해 절묘한 책략을 구사한 뛰어난 군주였다」고 극찬했다. 그는 「澤民主義(택민주의)」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光海君의 통치는 백성의 이익을 앞세운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며 光海君의 對內정치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를 내렸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이나바의 연구를 애써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90년대를 전후해 少壯(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나바의 연구 성과에 기초해 光海君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일련의 논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논문들 대부분이 光海君의 對內外 정책을 여러 각도에서 새롭게 조명하면서 光海君의 통치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史劇(사극)을 비롯한 여러 문예창작물에서도 학계의 이런 연구성과에 자극을 받아 光海君을 「亂世(난세)의 名君」으로 묘사한 작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게 되었다.
光海君을 과거 조선조 때와 같이 「폭군」 내지 「패륜아」로 모는 것은 잘못이나, 그렇다고 이나바 등과 같이 외교적 성과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해 「난세의 名君」으로 극찬하는 것 또한 지나친 것이다.
물론 光海君은 외교 면뿐만 아니라 內治(내치) 면에서도 나름대로 적잖은 성과를 거둔 게 사실이다. 왜란으로 피폐해진 民生을 어루만지고 무너져 내린 국가기반을 다시 세우기 위해 大同法(대동법)을 비롯한 일련에 稅政(세정)개혁을 실시하고 御醫(어의) 許浚(허준)을 전폭지원하며 「東醫寶鑑(동의보감)」과 같은 책을 頒布(반포)하는 등 높이 평가할 만한 게 적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기본적으로 朋黨정치로 인한 「君弱臣强」의 폐해를 몸소 겪고도 이를 근원적으로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외양적인 王權강화에 몰두하는 등 捨本逐末(사본축말)의 愚를 범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