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로고
2006년 7월호

[한국사 인물 탐험] 조선 성리학의 두 거봉 退溪와 栗谷

理氣論으로 400년 통치사상 확립

退溪는 「도덕」, 栗谷은 「실천」을 강조

申東埈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역임. 現 고려大 강사. 저서 「관중과 제환공」, 「치도와 망도」, 「통치학원론」, 「삼국지통치학」, 「조조통치론」, 「중국문명의 기원」, 「논어론」 등 20여 권.
『유학자가 이렇게 대접받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杜維明)
퇴계 이황(1501~1570)
  孔子사상이 문화혁명으로 대륙에서 곤욕을 치를 당시 홍콩과 대만 등지의 중국인들 사이에 孔學(공학)을 적극 옹호하는 일련의 學風(학풍)이 일어났다. 흔히 제2~3세대 「新유학파」로 불리는 이들은 펑여우란(馮友蘭·풍우란) 등의 제1세대를 뒤이어 孔學연구의 새로운 章을 열었다. 이들은 중국 전래의 문화전통 속에 「민주」와 「과학」 사상이 존재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제2~3세대 「新유학파」는 西歐式(서구식) 현대화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西歐문명의 문제점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孔學에서 그 해답의 열쇠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버드大의 옌칭연구소장으로 있는 두웨이밍(杜維明·두유명)이 그들 중 한 사람이다.
 
  두웨이밍은 최근 주변 사람에게 退溪 李滉(퇴계 이황)과 栗谷 李珥(율곡 이이)의 초상화가 담긴 한국의 1000원권과 5000원권 지폐를 보여 주며 『유학자가 이렇게 대접받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말하고 다닌다고 한다.
 
 
 
 退栗의 등장
 
율곡 이이(1536~1584)
  退栗(퇴율: 退溪와 栗谷)이 활약한 시기는 조선조 500년의 역사를 양분하는 분기점에 해당한다. 흔히 역사학계에서는 조선조를 倭亂(왜란)과 胡亂(호란)을 기점으로 크게 前期(전기)와 後期(후기)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정치사상사적으로 볼 때는 그 분기점을 약간 앞당길 필요가 있다. 바로 退栗의 등장이다. 退栗의 위상은 조선조 400년 내내 거의 절대적이었다. 士林(사림)을 자처하는 사람은 退栗의 「理氣論(이기론)」을 언급하지 않고는 과거시험의 답안지를 제대로 쓸 수 없었고 선비 대접조차 받지 못했다. 조선조는 사상사적으로 볼 때 退栗을 분기점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뚜렷이 나뉘고 있다.
 
  退栗의 활동 시기는 中宗(중종) 후기와 仁宗(인종), 明宗(명종), 宣祖(선조) 초기에 걸쳐 있다. 仁宗의 在位기간이 채 9개월도 안 되는 데다 退栗의 나이가 한 세대 정도의 차이가 나는 점 등을 감안할 때 두 사람의 활동 시기는 대략 明宗朝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조는 왜란과 호란을 계기로 備邊司(비변사)가 상설화되는 등 적잖은 변화가 뒤따랐으나 사상사적으로 볼 때는 이보다 약간 앞선 明宗朝를 기점으로 그 전후가 뚜렷이 구별된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시기에 退栗이 주창한 理氣論이 정립되고 이를 토대로 한 이념적 朋黨(붕당)의 조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조선조 전기만 하더라도 權近(권근)과 金宗直(김종직), 趙光祖(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성리학자들이 출현했으나 이론 면에서는 결코 退栗만큼 높은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南宋代의 朱子(주자)가 집대성한 性理學은 退栗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退栗은 性理學의 핵심이론인 理氣論의 완성자인 동시에 조선 性理學의 鼻祖(비조)에 해당한다. 조선사 및 儒學을 전공하는 학자를 포함해 정치사상사 등을 전공하는 관련 학자들이 退栗學에 천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통치사상을 理氣論에 완전히 융해시켜
 
  退栗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통치사상을 理氣論이라는 思辨論(사변론)에 완전히 융해시킨 데 있다. 조선조 후기의 수많은 朋黨은 통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권력투쟁의 일환이었으나, 이들 붕당 모두 그 명분만큼은 理氣論 해석에 따른 政見(정견)의 차이를 내세웠다. 無定見(무정견)한 정상배들이 권력의 부침에 따라 時流(시류)를 좇아 철새처럼 이리저리 오가는 바람에 수많은 정당이 명멸한 광복 이후의 정당史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중국의 南宋代에도 性理學에 대한 견해 차이 등으로 인해 여러 朋黨이 출현했다. 그러나 南宋代는 말할 것도 없고 元代와 明·淸代를 통틀어 중국에서는 결코 退栗 등장 이후의 조선조처럼 많은 朋黨이 출현한 적이 없었다.
 
  중국에서는 과거시험에서 朱子學 이론을 위주로 한 답안을 모범답안으로 간주했으나, 陽明學(양명학)을 위시한 여타 이론에 입각한 답안일지라도 논리의 일관성 등이 인정되면 합격 처리했다.
 
  조선조는 退栗學에 기초한 답안이 아닐 경우에는 불합격 처리하는 것은 물론 그 내용에 따라서는 소위 斯文亂賊(사문난적)으로 몰아 당사자와 그 일족까지 불온분자로 몰아 처벌했다.
 
  이론투쟁을 내세운 각 朋黨 간의 권력투쟁이 격화된 데 따른 악폐가 아닐 수 없다. 古今東西(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경전해석에 따른 견해의 차이는 이념적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고, 이념적 갈등은 派黨(파당)의 분열을 부추기고, 승리한 파당의 이념만 존재하는 소위 「思想(사상)의 化石化(화석화)」 도정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사상의 화석화」는 상황변화에 따른 임기응변의 변신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정신적 질식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국가 단위에서 빚어지는 「사상의 화석화」는 곧 국가의 멸망을 의미한다.
 
  과거 일본은 明治維新(명치유신)을 통해 서구화에 성공함으로써 600여 년에 걸친 封建政(봉건정)에서 과감히 벗어나 東아시아의 覇者(패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조선조는 「사상의 화석화」로 인해 끝내 日帝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선조 全시기를 통틀어 退栗처럼 政界와 學界를 양분하여 全一的으로 지배한 인물은 없다. 물론 退栗 모두 生前에 자신들의 이론이 「사상의 화석화」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요동치는 주변국의 변동 상황에 눈을 감은 채 退栗을 전면에 내세우고 권력투쟁을 일삼은 후기 儒者(유자)들의 책임이다. 그러나 退栗 역시 이미 조짐을 드러내기 시작한 朋黨의 폐해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보내지 않고, 극심한 명분론에 치우친 性理學을 연구의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다시 功臣세력에게 제압당한 中宗
 
  退栗이 집중적으로 활약한 明宗朝는 사회·경제적 피폐가 심각해져 「임꺽정의 난」 등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대체로 평온한 시기였다. 明宗 즉위 초에 빚어진 乙巳士禍(을사사화) 역시 外戚(외척) 간의 세력다툼에서 빚어진 것으로 王權(왕권)과 臣權(신권) 간의 갈등에서 빚어진 이전의 3大 士禍와 기본성격이 다르다.
 
  을사사화는 明宗이 즉위한 1545년에 대비인 文定王后(문정왕후)의 친동생인 尹元衡(윤원형)의 小尹(소윤)세력이 仁宗의 外叔(외숙)인 尹任(윤임)의 大尹(대윤)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빚어진 士禍를 말한다. 당초 中宗反正으로 보위에 오른 中宗은 趙光祖로 상징되는 士林세력을 이용해 王權을 유지했으나 己卯士禍(기묘사화) 이후 다시 功臣세력에 제압되고 말았다.
 
  中宗은 功臣세력의 위압에 눌려 正室인 愼氏(신씨)를 내쫓은 뒤 反正 3등공신인 尹汝弼(윤여필)의 딸을 제1계비인 章敬王后(장경왕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元子인 岵(호)를 낳은 지 7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에 燕山君(연산군) 때 벼슬한 尹珣(윤순)의 조카인 尹之任(윤지임)의 딸을 在位 12년에 제2계비인 문정왕후로 맞아들였다.
 
  당시 士林세력들은 윤지임의 딸을 제2계비로 맞아들이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했다. 이는 「중종실록」 4년 9일자에 실린 史官의 다음 논평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윤순은 본래 才行(재행)이 없는데 급제한 지 오래지 않아 觀武才(관무재)에서 우등한 것으로 인하여 당상관으로 뛰어올랐다. 廢主(폐주: 연산군)에게 아첨하여 그 뜻을 맞추기에 못하는 짓이 없었다. 당시 그의 처가 궁중을 출입하여 추문이 있었으나 그녀와 의절하지 못했다. 조카인 윤지임의 딸이 왕비로 선정되어 私第(사제)에 머물 당시에는 아첨하는 일에 재산을 기울이면서 吉禮(길례)의 준비를 빙자하여 郡邑(군읍)에서 강제로 거두어들였다>
 
  이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나 최소한 당시 윤임이 士林세력으로부터 적잖은 배척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中宗의 長子인 仁宗은 태어나자마자 生母를 잃은 까닭에 매우 고단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仁宗의 나이 20세 때 慶原大君(경원대군) (환)을 낳은 문정왕후는 자신의 소생을 보위에 올릴 심산으로 仁宗을 심하게 괴롭혔다. 6세에 世子에 책봉된 후 무려 25년간이나 世子로 머물러 있던 仁宗이 中宗 37년(1544)에 부왕의 죽음으로 비로소 보위에 올랐다가 在位 8개월여 만에 요절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乙巳士禍
 
  윤원형의 小尹派(소윤파)는 外甥(외생)인 경원대군을 보위에 올려놓기 위해 仁宗의 외숙인 윤임의 大尹派(대윤파)와 치열한 권력다툼을 전개했다. 이들 외척 간의 권력다툼은 中宗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크게 표면화하지는 않았다.
 
  仁宗이 즉위하자 외척 간의 갈등이 표면화했다. 당초 윤임은 仁宗의 즉위를 계기로 柳灌(유관)과 李彦迪(이언적) 등 士林의 名士들을 대거 천거해 기세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기묘사화 이후 은퇴했던 士林들이 속속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인사가 小尹인 윤원형 일파에 가담하게 되자 士林세력도 크게 大尹派와 小尹派로 갈라지게 되었다.
 
  포문은 大尹派가 먼저 열었다. 공조참판으로 있던 윤원형은 大尹派인 대사헌 宋麟壽(송인수) 등의 탄핵을 견디지 못하고 이내 관직을 박탈당했다. 이때 공교롭게도 얼마 안 돼 仁宗이 죽고 경원대군이 明宗으로 즉위케 되었다. 문정왕후가 大妃의 자격으로 垂簾聽政(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조정의 실권은 곧 大尹派에서 小尹派로 넘어갔다.
 
  明宗 즉위 직후 軍器侍僉正(군기시첨정)으로 정계에 복귀한 윤원형의 형 尹元老(윤원로)는 먼저 大尹派를 일거에 제거하기 위해 그들이 전에 경원대군을 해치려 했다고 무함하고 나섰다. 그러나 大尹派의 힘은 아직 막강했다. 윤원로는 오히려 大尹派인 영의정 尹仁鏡(윤인경)과 좌의정 유관 등으로부터 「천륜을 이간하는 망언을 한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해남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때 예조참의로 정계에 복귀한 윤원형은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기 위해 좀더 치밀한 계책을 세웠다.
 
  먼저 세력규합에 나선 그는 곧 大尹派에게 私感(사감)을 갖고 있던 중추부지사 鄭順朋(정순붕)과 병조판서 李?(이기), 호조판서 林百齡(임백령), 공조판서 許磁(허자) 등을 끌어들여 自派 세력을 보강했다. 小尹派는 이내 『윤임이 그의 조카인 中宗의 8남 鳳城君(봉성군) (원)에게 보위를 옮기는 방안을 획책했다』며 大尹派를 무함하고 나섰다. 이들은 이와 동시에 경원대군의 보위계승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윤임이 仁宗의 임종 당시 成宗의 3남인 桂林君(계림군) 瑠(류)를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조직적으로 퍼뜨렸다.
 
  이에 문정왕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小尹派는 일거에 대세를 역전시켜 大尹派를 대거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로써 윤임을 위시해 大尹派로 분류된 柳灌과 柳仁淑(유인숙) 등은 모반죄로 유배되었다가 死賜(사사)되고, 계림군도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경기감사 金明胤(김명윤)의 밀고로 주살되었다.
 
 
 
 임꺽정의 난
 
  乙巳士禍의 餘震(여진)은 간단치 않았다. 明宗 2년 9월에 문정황후의 수렴청정과 小尹派의 弄權(농권)을 비난하는 벽서가 발견되는 것을 계기로 봉성군를 비롯해 송인수 등이 사형을 당하고 이언적 등 20여 명의 명사가 유배를 당하는 소위 丁未士禍(정미사화)가 빚어졌다.
 
  이듬해에는 홍문관박사 安明世(안명세)가 「時政記(시정기)」에 윤임을 찬양하는 글을 실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는 등 乙巳士禍의 後폭풍이 맹위를 떨쳤다. 이로 인해 을사년 이래 수년 동안 小尹派의 반격으로 화를 입은 大尹派 명사들 수가 무려 100여 명에 달했다.
 
  乙巳士禍 등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자 明宗 14년(1559)에 조선조 최초의 義賊(의적)으로 불리는 「임꺽정의 난」이 일어났다. 원래 임꺽정은 경기도 楊州(양주)의 백정으로 당시의 시대상에 불만을 품은 불평분자들을 규합한 뒤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휘저으며 관아의 창고를 털어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등의 義賊활동을 전개했다.
 
  일시 개성으로 쳐들어가 捕盜官(포도관) 李億根(이억근)을 살해하기도 한 그는 백성들의 도움으로 관군의 토벌을 용케 피했으나 明宗 15년에 형 加都致(가도치)와 참모인 徐林(서림)이 체포되자 이내 세력이 위축되었다.
 
  그는 2년 뒤 討捕使(토포사) 南致勤(남치근)이 이끄는 토벌대에 의해 九月山(구월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임꺽정의 난은 당시의 지배층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는 「명종실록」 14년 3월27일자에 실린 다음 史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고,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재상들의 貪汚(탐오)가 풍조를 이루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세가를 섬기고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 하는 짓이 없다. 이에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어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게 되었다>
 
 
 
 退溪, 대사성·대제학 역임
 
退溪의 스승이자 숙부인 이우.
  退栗은 바로 이런 시기에 활약했던 것이다. 退溪는 燕山君 7년(1501)에 지금의 경북 안동시인 경상도 禮安(예안)에서 출생했다. 그는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부친을 여의고 12세 때 숙부 李?(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몇 차례의 낙방 끝에 28세 때인 中宗 23년(1528) 진사시험에 2등으로 합격했다. 이후 34세 때인 中宗 29년(1534) 式年文科(식년문과)에 乙科로 급제해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평균적인 나이에 해당했다.
 
  그는 承文院(승문원) 副正子(부정자)를 시작으로 弘文館(홍문관) 修撰(수찬)과 司諫院(사간원) 正言(정언) 등의 淸要職(청요직)을 거쳐 형조좌랑으로 승진했다. 中宗 37년(1542)에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司憲府(사헌부) 掌令(장령) 등을 거쳐 이듬해에 成均館(성균관) 大司成(대사성)이 되었다.
 
  明宗이 즉위하던 해에 乙巳士禍가 일어나자 大尹派의 일원으로 몰려 削職(삭직)되었다. 얼마 후 明宗의 부름을 받아 복직된 뒤 단양군수로 있다가 明宗 7년(1552)에 두 번째로 大司成에 임명되었다. 이후 형조참의와 공조참판 등을 거쳐 明宗 21년(1566)에 공조판서에 오른 뒤 이내 예조판서를 제수받았다. 宣祖가 즉위하는 1568년에는 종1품인 의정부 右贊成(우찬성)을 거쳐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다가 이듬해에 낙향해 후학 교육에 전념하던 중 선조 3년(1570)에 70세의 나이로 他界(타계)했다.
 
  退溪보다 한 세대 뒤에 등장한 栗谷은 中宗 31년(1536)에 강원도 강릉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6세 때인 中宗 36년(1541)에 生母인 申師任堂(신사임당)과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청진동인 한양의 壽進坊(수진방) 본가로 왔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총기로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던 그는 明宗 3년(1548)에 불과 13세의 나이로 進士 시험에 합격해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6세가 되던 明宗 6년(1551)에 정신적인 지주였던 어머니 신사임당이 타계하자 3년상을 마친 뒤 홀연히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栗谷의 入山 동기 등에 대해서는 여러 얘기가 있으나 母親의 他界를 계기로 出世間(출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佛家이론에 크게 경도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栗谷은 훗날 1년간에 걸친 자신의 入山 행보로 인해 반대파들로부터 적잖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는 21세가 되는 明宗 10년(1556)에 하산해 강릉 외가에 머물던 중 서울에서 치러지는 進士 시험인 漢城試(한성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退溪와 栗谷의 만남
 
栗谷의 모친 신사임당.
  그는 이듬해에 星州(성주) 목사 盧景麟(노경린)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佛家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었다. 결혼 이듬해인 明宗 12년(1558) 이른 봄에 栗谷은 예안에 머물고 있던 退溪를 방문해 佛家와 絶緣(절연)했음을 언급했다.
 
  당시 23세의 청년 栗谷은 혼례를 치르고 성주의 처가에 머물다가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에 退溪를 예방했다. 마침 대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58세의 退溪는 사직서를 낸 뒤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栗谷은 退溪의 사저에서 이틀 동안 머물렀다.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했으나 두 사람은 나이 차이도 잊은 채 詩談(시담)을 통해 깊은 학문적 교감을 나눴다. 당시 栗谷이 자신의 入山 행보를 고백하자 退溪는 진심으로 栗谷을 격려해 마지않았다. 栗谷이 떠난 뒤 退溪는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로써 後生可畏(후생가외)를 운위한 孔子의 말씀이 틀림없음을 알겠다」고 했다.
 
  이후 栗谷은 수시로 서신을 통해 退溪와 학문을 토론하면서 理氣論에 대한 精緻(정치)한 이론을 정립해 나갔다.
 
  栗谷은 明宗 18년(1564) 8월에 치러진 大科(대과)시험에서 또다시 장원급제를 했다. 이로써 그는 初試(초시)와 覆試(복시), 會試(회시) 형식으로 치러지는 進士 및 生員 시험과 大科 시험을 통틀어 모두 아홉 번에 걸쳐 수석을 했다는 소위 「九度壯元(9도장원)」의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후 栗谷은 49세 때인 宣祖 17년(1584)에 타계할 때까지 요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 부단히 학문을 연마하며 각종 개혁방안을 立案하는 經世家(경세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의 死後(사후) 그를 추종하는 사림들은 畿湖學派(기호학파)를 형성해 退溪를 추종하는 嶺南學派(영남학파)와 더불어 조선 性理學의 양대 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기서 조선후기의 역사를 결정적으로 규정하게 된 退栗사상에 대해 간략히 검토해 보기로 하자. 退栗사상은 기본적으로 朱子學을 심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기본적으로 철저한 朱子學者였다.
 
  적잖은 사람들이 退溪를 主理論者(주리론자), 栗谷을 主氣論者(주기론자)로 분류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이러한 분류는 일제 때 소위 「皇道儒敎(황도유교)」를 주창한 일본의 철학자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에서 비롯된 것이다.
 
  1903년에 조선 정부의 초청으로 경기高의 전신인 漢城(한성)중학교 교사로 부임한 다카하시는 이후 성균관을 개칭한 經學院(경학원)과 京城帝大(경성제대) 등에서 강의하며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내용의 「황도유교」를 주창했다.
 
  당시 다카하시는 조선 性理學을 크게 主理派와 主氣派로 대분한 뒤 조선 性理學은 자연과 인간의 존재론에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經世論(경세론)이 배제된 공허한 思辨논쟁만 일삼았다고 비판했다.
 
  그의 뒤를 이어 日帝에 의해 동원된 어용학자들은 조선儒學을 대표하는 학자로 退栗을 거론하면서 退栗 모두 독창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독창성을 지닌 退溪의 「理氣互發說(이기호발설)」과 栗谷의 「理通氣局說(이통기국설)」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日帝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었다.
 
  광복 이후 한국 철학자들은 退栗사상에 대한 깊은 천착을 결여한 채 조선儒學의 흐름을 主理論과 主氣論으로 양분하는 다카하시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했다.
 
  21세기에 들어와 이에 반발한 소장 학국 철학자들이 전통철학이라는 이유로 退栗을 무조건 옹호하는 유림과 기존 학계의 구태의연한 태도를 강력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 소장학자들 중에는 退栗사상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을 가하는 사람도 적잖다.
 
  朱子는 말할 것도 없고 孔子 자체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가했던 중국의 전례에 비춰 볼 때 때늦은 것이기도 하다.
 
 
 
 性理學과 陽明學
 
  退栗은 기본적으로 朱子의 이론에 자신들의 독자적인 견해를 가미해 性理學의 이론을 완성시켰다.
 
  원래 性理學은 道學(도학)과 理學(이학), 性命學(성명학) 등으로 불린 데서 알 수 있듯이 바로 四端七情(사단칠정)에 근거한 理氣論을 토대로 하여 성립된 학문체계다. 일종의 우주론에 해당하는 理氣論은 우주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形而上(형이상)의 「理(이)」와 形而下(형이하)의 「氣(기)」 개념을 통해 통일적으로 해석하는 이론체계다.
 
  四端은 본래 맹자가 말한 惻隱(측은)·羞惡(수오)·辭讓(사양)·是非(시비)의 마음이 발현된 仁(인)·義(의)·禮(예)·智(지)의 도덕원리를 뜻하고, 七情은 喜(희)·怒(노)·哀(애)·懼(구)·愛(애)·惡(오)·欲(욕)의 정서를 말한다. 이는 理氣論의 핵심 개념이다.
 
  당초 性理學은 이를 대성시킨 程伊川(정이천)과 朱子의 이름을 따서 程朱學 (정주학) 내지 朱子學(주자학)으로 칭해졌다.
 
  孔子사상을 토대로 하여 성립된 유학은 宋代에 들어와 老佛(노불)사상을 가미한 朱子學이 등장하면서 매우 사변적인 철학 이론으로 변하고 말았다. 修齊(수제)를 위주로 한 朱子學은 治平(치평)을 위주로 한 孔學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비록 朱子學이 孔學의 嫡統(적통)을 자처하고 나서기는 했으나 孔子사상을 토대로 한 孔學과, 孟子의 인성론을 토대로 한 朱子學은 다른 학문체계에 속한다. 그럼에도 朱子學이 유학의 正學(정학)으로 자리 잡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朱子學을 곧 孔學으로 여기게 되었다.
 
  朱子學은 朱子가 程顥(정호)의 「天理論(천리론)」과 그의 아우 程伊川의 「性卽理說(성즉리설)」을 토대로 하여 周敦(주돈이)와 張載(장재), 邵雍(소옹) 등이 제창한 여러 학설을 가미해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시 陸象山(육상산)은 「心卽理(심즉리)」를 주장하며 이들과 다른 해석을 내렸으나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明代에 들어와 王陽明(왕양명)이 陸象山의 학설을 새로 정리해 마침내 程朱學과 대칭되는 소위 「陸王學(육왕학)」을 만들어냈다. 흔히 「陽明學(양명학)」으로 불리는 陸王學은 비록 朱子學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출발했으나 이론적인 면에서 볼 때 사실 性理學의 한 지류에 해당한다.
 
 
 
 우주생성과 인간심성에 관심을 둔 性理學
 
왕양명
  이론적인 면에서 볼 때 朱子學은 나름대로 일정한 功을 세웠다. 朱子學이 「우주의 생성과 구조」, 「인간 심성의 구조」, 「통치 문제」 등을 통일적으로 해석함으로써 漢唐(한당)의 訓?學(훈고학)이 다루지 못한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 분야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
 
  朱子學은 크게 太極論(태극론)과 心性論(심성론), 理氣論, 誠敬論(성경론) 등의 이론체계로 이뤄져 있다.
 
  太極은 원래 만물의 근원 내지 우주의 본체를 뜻하는 말로 「주역」 繫辭傳(계사전)에 나온다. 北宋의 주돈이는 여기에 전래의 五行說(오행설)을 가미해 새로운 우주론인 소위 「太極圖說(태극도설)」을 만들어 냈다. 「태극도설」은 만물 생성의 과정을 <태극_음양_오행_만물>로 보고 또 太極의 본체를 無極(무극)으로 간주한 데 그 특징이 있다.
 
  朱子는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가해 太極(태극) 외에 無極(무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有(유)와 無(무)가 구별되지 않은 상황에서 천지만물은 모두 太極에 해당한다는 그의 주장은 「태극도설」에 비해 간명하면서도 명쾌했다.
 
  朱子는 이어 人性論에 대해서도 정이천의 이론을 토대로 새로운 해석을 가했다. 원래 人性論은 孟子가 제기한 것으로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인지 여부를 놓고 전개된 논쟁을 말한다.
 
  戰國시대 당시 孟子는 性善說을 주장한 데 반해, 荀子(순자)는 性惡說을 주장했다. 두 사람의 이론은 오랫동안 병존해 왔으나 宋代에 이르러 마침내 정이천이 孟子의 性善說을 토대로 한 理氣說을 주장함으로써 荀子는 이단으로 몰리고 말았다.
 
  정이천은 「理」가 인간에 들어와 「性(성)」이 되고, 「氣」가 인간에 들어와 「才(재)」가 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性은 理의 발현인 까닭에 純善(순선)인 데 반해 才는 淸濁(청탁)과 正偏(정편)이 있는 氣가 발현된 까닭에 賢愚(현우)의 구별이 생기게 된다.
 
 
 
 朱子의 人性論과 理氣論
 
주자
  朱子는 정이천의 이론을 토대로 인간의 심성을 「本然之性(본연지성)」과 「氣質之性(기질지성)」으로 양분해 人性論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理의 발현인 本然之性과 달리 흔히 情(정)으로 표현되는 氣質之性은 氣의 발현인 까닭에 善과 惡이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 情은 반드시 惡한 것만은 아니지만 때로는 善하지 못할 수도 있어 기질을 맑게 타고난 사람은 그 情이 善하게 되지만 이것을 탁하게 타고난 사람은 그 情이 惡하게 된다는 것이다.
 
  朱子는 이를 토대로 理氣論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가했다. 원래 理氣論은 천지만물을 陰陽 2氣의 활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한 「周易」에서 나온 것이다.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태극이 陰陽 2氣를 낳고, 2氣가 5行을 낳고, 5行에서 男女가 생겨 거기에서 만물이 化生(화생)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장재는 우주의 본체를 太虛(태허)로 간주하고 그 작용인 陰陽의 2氣가 천지만물을 생성한다는 소위 「氣一元論(기일원론)」을 전개했다. 정호도 이에 동조해 氣의 통일체로서의 乾元(건원)을 내세웠다.
 
  그러나 정이천은 이들과 달리 理와 氣를 확실히 구별함으로써 소위 「理氣二元論(이기이원론)」의 단초를 열었다. 朱子는 정이천의 이론을 수용해 理는 형질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는 까닭에 오직 형질을 지닌 氣의 운동을 통해서만 관념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는 논지를 전개했다. 朱子는 이를 윤리에 그대로 적용시켜 理와 氣에 경중을 두면서도 氣를 惡으로만 단정하지는 않았다. 理氣論에 대한 그의 이런 주장은 「氣質之性에 善과 惡이 혼재한다」는 그의 人性論과 조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栗谷의 「氣發理乘說」과 「理通氣局說」
 
  조선조의 退栗은 주자의 이러한 理氣論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일정한 수정을 가했다. 특히 退栗은 人性의 선악에 관한 心性論(심성론) 방면에서 깊은 연구를 진척시킴으로써 중국 朱子學과 구별되는 조선 性理學의 단초를 열었다. 退栗은 서신을 통한 「四端七情」 논쟁을 통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理氣論을 만들어 냈다.
 
  먼저 栗谷은 理와 氣를 개념적으로 분류하는 朱子의 논지를 받아들이면서도 理와 氣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理와 氣의 상호관계와 관련해 朱子가 내세운 「不相雜(불상잡)·不相離(불상리)」 주장 중 「不相離」에 주목했다. 이는 「不相雜」에 주목해 理를 극단적으로 강조한 退溪와 확연히 다른 점이다.
 
  이로 인해 栗谷은 먼저 氣가 발동하면 理가 이에 올라타나 氣의 청탁에 따라 理의 모습이 제대로 발현되는지 여부가 결정된다는 소위 「氣發理乘說(기발이승설)」을 전개했다.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氣發理乘說을 토대로 한 「理通氣局說(이통기국설)」을 주장했다.
 
  理通氣局說에 따르면 人理와 物理는 단일한 理에서 나온 까닭에 하나로 통하나 氣는 천지의 演變(연변)에 따른 局限性(국한성)을 지닌 까닭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理通」에서 理는 형체가 없고 하는 일이 없는 까닭에 시공간적으로는 始終(시종)과 先後(선후)가 不在(부재)한다. 그러나 理는 氣에 얹혀 流行하는 까닭에 만물 가운데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氣局」에서 氣는 형체를 지니고 운동하는 까닭에 시공간적으로 시종과 선후가 존재한다. 이에 氣는 쉬지 않고 오르내리며 유행하는 까닭에 휴식이 없고 만물 가운데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退溪의 理氣互發說
 
栗谷을 배향한 파주 자운서원.
  「理通」은 形而上인 까닭에 만물 속에 두루 상존하는 보편자이고, 「氣局」은 形而下인 까닭에 消長(소장)과 변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특수자에 해당한다. 栗谷의 「理通氣局說」은 理와 氣를 통일적으로 설명해 놓은 理氣論의 白眉(백미)라고 할 수 있다.
 
  退溪 또한 독자적인 입장에서 朱子의 理氣論에 약간의 수정을 가해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인 「理氣互發說(이기호발설)」을 만들어 냈다.
 
  그는 朱子의 理 개념을 극단적으로 중시한 나머지 理 역시 氣와 마찬가지로 능동적으로 발동한다는 논지를 펼쳤다. 이는 朱子 및 栗谷의 논지와 확연히 다른 점이다.
 
  이에 그는 理가 氣에 올라타는 「氣發理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理가 氣보다 먼저 발동해 氣가 理를 따르는 소위 「理發氣隨(이발기수)」도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氣發理乘과 理發氣隨 이론을 합쳐 통상 「理氣互發說」이라고 한다.
 
  退溪의 「理氣互發說」은 인간의 도덕윤리를 중시한 그의 사상이 그대로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退溪는 朱子의 논지를 좇아 「氣發理乘」만이 존재한다고 간주할 경우 사실상 理는 死物이 되어 인간의 높은 도덕적 판단에 따른 자발적 행보를 제대로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고 판단했다. 「理發氣隨說」은 理를 높이고 氣를 천하게 보는 退溪의 「理貴氣賤(이귀기천)」 사상이 약여하게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心性論과 理氣論에 대한 退栗의 견해 차이는 天理를 추종하는 방법과 관련한 誠敬論(성경론)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일찍이 주돈이는 인간이 천리에 도달하는 요체를 靜(정: 고요함)에서 찾은 데 반해, 정호는 誠(성: 정성), 정이천과 朱子는 敬(경: 공경)에서 찾은 바 있다.
 
  趙光祖(조광조)가 자신의 호를 「靜庵(정암)」으로 정한 것은 대략 주돈이의 주장을 좇은 데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栗谷은 朱子가 내세운 敬 대신 誠을 중시했고, 退溪는 敬을 중시했다. 이를 통해 退栗 모두 독자적인 입장에서 性理學의 제반 이론체계를 새로이 정립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退栗이 소위 程朱學으로 불리는 중국 性理學과 대비되는 조선 性理學의 비조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길재의 義理學에 뿌리
 
  사실 退栗이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이론을 정립하게 된 데에는 先代 性理學者들의 영향이 컸다고 보아야 한다. 이미 고려말기에 李穡(이색)과 鄭夢周(정몽주), 吉再(길재), 鄭道傳(정도전) 등은 고려조의 성균관에서 性理學을 토대로 한 새로운 학풍을 진작시킨 바 있다.
 
  개국 당시 鄭道傳이 불교의 폐단을 통렬하게 지적하면서 性理學 이념에 충실한 臣權 우위의 통치체제를 만들고자 한 것 등이 그 실례이다. 조선조 개창 이후에 가담한 河崙(하륜)과 權近(권근) 등이 王權과 臣權이 조화를 이루는 통치체제를 만들고자 한 것도 나름대로 性理學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退栗에 의해 단초를 연 조선 性理學의 사상적 뿌리는 정몽주의 학풍을 이은 길재의 義理學(의리학)에 닿아 있다.
 
  退栗은 스스로 자신들의 학문은 정몽주와 길재, 金叔滋(김숙자), 金宗直(김종직), 金宏弼(김굉필), 趙光祖로 연결되는 조선 性理學의 學統(학통)을 이은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들 조선 性理學의 학통 전수자들은 대부분 정변과 士禍의 와중에 희생된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은 오히려 명분을 중시한 士林세력들로 하여금 이들의 의리정신을 높이 숭상하는 결과를 낳았다.
 
  退栗은 바로 이런 풍토에서 朱子學의 제반 이론을 정밀히 검토해 조선 性理學의 단초를 연 셈이다. 退栗 이후 모든 士林세력들이 400년간에 걸쳐 退栗의 사상적 후계자임을 자임한 것도 바로 退栗에 의한 조선 性理學의 정립과 무관할 수 없다.
 
  물론 退栗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退栗 이외에 徐敬德(서경덕)과 曺植(조식), 金麟厚(김인후), 奇大升(기대승), 成渾(성혼) 등 뛰어난 성리학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중국 性理學을 소화하면서 인간 내면의 性情(성정)과 도덕적 당위론에 초점을 맞췄다. 退溪와 기대승 및 栗谷과 성혼 사이에 전개된 四端七情 논쟁이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이들은 이 논쟁을 통해 소위 「理氣性情論(이기성정론)」을 정치하게 전개시켜 나갔다. 중국과 일본을 포함해 최고 수준의 朱子學 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는 退栗의 理氣論은 바로 이런 논쟁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와중에 人性논쟁은 宋翼弼(송익필)과 金長生(김장생) 등에 의하여 중국과는 다른 조선조 특유의 禮說(예설)로 정리되어 나갔다.
 
 
 
 도덕 강조한 退溪, 실천 강조한 栗谷
 
栗谷이 직접 쓴「격몽요결」(보물 602호).
  당시 退栗에 앞서 理氣논쟁의 단초를 연 사람은 서화담이었다. 그의 이론은 장재와 같은 「氣一元論」에 해당한다. 그는 氣를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파악했다. 退溪는 서화담과 정반대로 理를 절대적인 존재자로 보았다.
 
  退溪는 어떤 면에서 서화담의 「氣一元論」을 깨뜨리기 위해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인 「理氣互發論」을 개발했다고 볼 수 있다. 退溪가 栗谷의 「氣發理乘說」을 반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退溪는 서화담과 栗谷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太極 또는 理의 발현인 인간의 善性이 왜곡될 소지가 크다고 보았음이 틀림없다. 그가 性理란 곧 인간의 본성이고, 인간은 이를 확충해 인간으로서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居敬(거경)」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栗谷도 退溪와 마찬가지로 朱子學의 기본입장을 충실히 견지했다. 그러나 그는 退溪와 달리 老佛을 위시한 諸子의 학설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변적인 性理學 이론을 정치현실 문제에 접맥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는 현실 정치문제에 초연한 자세를 견지했던 退溪와 전혀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훗날 栗谷을 추종하는 소위 西人세력들이 현실정치 참여 문제와 관련해 退溪를 추종하는 東人세력과 커다란 차이를 보이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확실히 栗谷의 이론은 實事求是(실사구시)의 정신과 맥이 닿아 있다는 점에서 治平(치평)에 앞서 修齊 차원의 도덕적 人性의 도야를 강조한 退溪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栗谷은 생전에 민생안정을 위해 수많은 개혁방안을 제시하고, 특히 말년에 이르러서는 왜적의 침공에 대비해 소위 「十萬養兵說(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退栗 모두 朱子學 이론을 통해 현실의 정치문제를 해결코자 한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다만 방법론 차원에서 退溪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조절을 중시해 「敬」을 강조했고, 栗谷은 구체적인 실천에 주목해 「誠」(진실·정성)을 강조한 점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을 멸망으로 이끈 思辨논쟁의 始祖
 
  退栗은 개인적인 삶과 사상 면에서 후세인들이 추종하기 어려운 높은 도덕성과 경륜, 탁월한 통치이념을 지닌 위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이 후대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연구와 진지한 비판이 가해져야만 한다. 退栗사상은 기본적으로 朱子學의 세례를 받은 宋代의 성리학자들이 夷狄(이적)의 침공위협 앞에서도 공허한 사변론만을 전개하다가 끝내 나라를 패망의 지경으로 이끈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조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
 
  退栗이 이룬 朱子學의 精緻化(정치화) 작업은 비록 학술이론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기는 했으나 치국경세 면에서는 적잖은 문제가 있었다.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 통치이념 면에서 볼 때 退栗 이후의 조선조 역사가 退栗의 理氣論을 둘러싼 사상논쟁으로 점철된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조는 倭亂과 胡亂 당시는 물론 일제에 의해 패망할 때까지 시종 性理學에 파묻혀 思辨的인 논쟁을 그치지 않았다. 純祖 연간인 19세기 벽두에 시작되어 高宗의 즉위 때까지 지속된 戚族(척족)의 勢道政治(세도정치) 역시 기본 틀만큼은 退栗의 출현을 계기로 시작된 思辨논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일본은 19세기 중반에 페리 제독의 쿠로후네(黑船)에 출현에 따른 강제개항 이래 소위 손노죠이파(尊王攘夷派)조차 나라를 지키기 위한 개국으로 방향을 틀어 국가총력을 기울여 근대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조선은 잇단 辛未洋擾(신미양요)와 丙寅洋擾(병인양요)의 승리에 기고만장한 나머지 쇄국으로 일관했고, 뒤늦은 開國 이후에는 끝내 日帝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선조 멸망의 근원적인 배경을 찾으라면 역시 退栗의 등장을 계기로 촉발된 일련의 성리학적 사변논쟁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는 南宋의 전례를 답습한 것이기도 하다. 조선조는 전대미문의 병란을 겪고도 모든 책임을 夷狄에게 전가한 채 富國强兵을 소홀히 하는 愚(우)를 범했다. 그 결과가 바로 300년 뒤에 국가패망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조선조 후기의 사대부들이 부국강병책과는 거리가 먼 思辨논쟁에 침잠해 있던 사실과 무관할 수 없다.
 
 
 
 臣權강화에 기여
 
退溪를 배향한 안동 도산서원.
  둘째, 통치구조 면에서 볼 때 退栗 이후 理氣논쟁을 주도한 臣權세력이 실질적인 통치권력을 장악한 점을 들 수 있다. 南宋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臣權세력이 王權을 압도하는 臣權국가는 하나같이 文弱(문약)으로 흘렀다. 갈등해소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王權이 극도로 미약한 까닭에 관료체제를 장악하고 있는 臣權세력 간의 갈등에 따라 정국이 요동치고 政情불안 상태가 지속된 것이다.
 
  원래 臣權세력 내의 논쟁과 대립은 일정한 전제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內憂外患(내우외환)의 위협이 없어야만 한다. 조선조는 왜란과 호란 이후 불행 중 다행인지 몰라도 근 200여 년 동안 外患은 거의 없었다.
 
  이는 오히려 臣權세력 간의 갈등을 격화시키는 外因(외인)으로 작용했다. 조선조 후기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朋黨이 출현한 근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外患이 없었던 까닭에 臣權세력은 조그마한 이념적 차이만 있을지라도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수많은 分派로 분화하고 만 것이다.
 
  性理學은 근본적으로 臣權세력의 우위를 전제로 하여 성립된 이념체계인 까닭에 性理學이 만연하면 할수록 王權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英祖가 자신의 아들 思悼世子(사도세자)를 뒤주 속에서 죽게 만든 것도 따지고 보면 쇠미한 王權을 유지하기 위해 臣權세력 간의 갈등을 잘못 활용한 데 따른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통치권력 면에서 볼 때 권력의 변동이 理氣논쟁을 내세운 黨爭구도와 동시에 진행된 까닭에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투쟁 양상이 더욱 격화된 점을 들 수 있다.
 
  과거 日帝는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민족은 단결심이 없고 서로 黨派를 이루어 분열하는 까닭에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고 선전했다. 日帝의 이런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지만 진실의 일면을 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朋黨의 자기분열과 黨爭의 격화과정은 이미 南宋이 걸은 길이기도 했다.
 
  특히 仁祖反正을 계기로 西人의 집권이 굳어진 이후 西人에서 갈라져 나온 老論세력이 더욱 철저한 思辨論에 함몰된 나머지 이미 패망한 明나라를 기리며 유일무이한 朱子學의 나라를 자처한 것은 비극이었다. 그들은 倭亂과 胡亂으로 인해 全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이 魚肉(어육)이 된 상황에서도 소위 小中華(소중화)를 자처하며 대륙을 제패한 만주족의 淸제국을 무시하는 등 시종 현실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에 관한 모든 책임을 退栗에게 물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退栗 또한 조선조의 士大夫들로 하여금 공허한 思辨논쟁에 휘말리게 하는 단초를 제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후의 조선을 文弱의 나라로 만든 데 따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조선에 朱子보다 뛰어난 두 인물이 태어났다는 것은 性理學이 지배하던 당시 일종의 자랑일 수 있어도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조선조의 쇠락과 멸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 셈이다.
 
 
 
 순수철학을 통치에 원용하는 것은 잘못
 
  통치차원에서 볼 때 朱子學의 가장 큰 통폐는 治世와 亂世를 불문하고 오직 德政을 바탕으로 한 王道(왕도)만을 강조한 데 있다.
 
  아무리 뛰어난 철학이론이라고 할지라도 통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 이는 순수철학 이론으로는 가능할 수 있어도 결코 정치철학으로 원용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조선조는 退栗의 등장 이후 순수철학 이론에 해당하는 理氣論 등을 통치에 그대로 원용하는 愚를 범했다. 물론 이는 朱子學 자체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인 까닭에 退栗만을 탓할 수는 없지만 退栗 역시 책임의 일단을 지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 東北亞 시대를 여는 해법의 열쇠를 朱子學에 뿌리를 두고 있는 退栗사상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는 아무래도 무리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에도(江戶)시대 일본의 古學派(고학파) 및 두웨이밍과 같이 孔子 당시의 孔學 자체에서 찾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다만 誠敬(성경)을 강조한 退栗의 실천적 자세만큼은 反覆無常(반복무상)이 일상화되어 있는 한국의 현실정치 행태를 감안할 때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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