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萬守
1955년 경남 하동 출생. 한양大 체육학과 졸업. 日 와세다大 교육학과 졸업. 日 동해大 체육학 석사. 국가대표 배구선수. 현대자동차써비스 배구단 감독·남자국가대표 배구팀 감독·현대자동차 배구단 감독·현대캐피탈 배구단 감독 역임. 상훈 제7회 테헤란아시아경기대회 은메달(1974). 제8회 방콕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1978). 멕시코유니버시아드대회 금메달(1979) 등.
1955년 경남 하동 출생. 한양大 체육학과 졸업. 日 와세다大 교육학과 졸업. 日 동해大 체육학 석사. 국가대표 배구선수. 현대자동차써비스 배구단 감독·남자국가대표 배구팀 감독·현대자동차 배구단 감독·현대캐피탈 배구단 감독 역임. 상훈 제7회 테헤란아시아경기대회 은메달(1974). 제8회 방콕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1978). 멕시코유니버시아드대회 금메달(1979) 등.
스파이크 시속 105km
돌고래처럼 솟구쳐 후려 패는 백어택과 온몸을 던지는 슬라이딩 리시브도 여기서 연출된다. 네트 저만치 위에서 내리꽂는 강타도 이곳에 작렬한다. 스탠드는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박수와 탄성으로 뒤덮인다.
그런데 요즘 국내 배구장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다. 프로로 옷을 바꿔 입었는데도 조용하다. 팬들의 열기가 식은 걸까? 아니면 볼거리가 없는 걸까?
현실이 피곤하면 과거의 榮華(영화)가 그리운 법. 姜萬守(강만수·50·배구연맹 경기위원)씨를 만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한국남자배구의 한 시대를 풍미한 「아시아의 巨砲(거포)」다.
그가 네트 왼쪽에서 뛰어오르면 상대 수비수들은 몸부터 사렸다. 때린 공을 블로킹하면 손바닥에 불이 났고 어쩌다 정통으로 얼굴에 맞으면 끝장이었다. 나뒹굴었다가 벌떡 일어나긴 하지만 눈앞이 캄캄해 한동안 헤맨다. 한창 때 그의 스파이크 시속이 105km이었으니 충격은 알만하다.
지난 5월26일 오후 2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한 제과점에서 그를 만났다. 부인(金貞希·46)과 함께 들어서는 그는 정말 컸다. 신장 193cm, 체중 0.1t(100kg). 앉아야 인터뷰하기가 편했다.
―키가 얼맙니까.
『선수시절은 195cm였는데 지금은 2~3cm 줄었습니다』
―아버님이 壯士(장사)였겠네요.
『아뇨, 어머니가 장사였습니다. 외탁인 셈이지요』
그에게 「왜 배구를 했느냐」고 묻는 건 실례다. 키만 봐도 아는데. 처음엔 축구를 했단다. 그러다가 키가 자꾸 자라면서 「땅바닥에 구르는 축구공보다는 공중에 날아다니는 배구공이 잡기 쉬워」 中3 때 배구로 바꿨다.
경남 하동의 「꺽다리 소년」은 금세 전국에 소문이 났다. 서울(대신高)과 인천(인창高)에서 군침을 흘릴 때 부산(성지工高)에서 냉큼 낚아챘다. 그의 솜씨는 高2 때 전국종별선수권을 제패하면서 공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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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와 인터뷰하는 姜萬守. |
―아시아 예선전인데 왜 파리에서 열렸습니까.
『南北대결 탓이겠지요. 북한이 올림픽에 처음 나선 게 뮌헨대회였는데 아시아지역예선에서 南과 北이 맞붙게 되니 「만일의 사고」에 대비, 제3국에서 개최한 것 같습니다』
파리의 여름은 뜨거웠다. 그러나 생디에 실내체육관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高3 까까머리」 강만수는 북한사람을 거기서 처음 봤다.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오던 「빨갱이」가 바로 곁에 와 있었다. 눈도 매섭고 스치면 찬바람이 일었다.
코트에 마주서니 네트가 바로 「38선」이었다. 朴鎭觀(박진관) 감독이 작전지시를 내렸다.
『눈(目)싸움에서 지지 마라. 말로써 氣를 꺾어라』
崔宗玉(최종옥)·陳準鐸(진준탁)·李仁(이인)·朴基元(박기원)은 번갈아 전위로 나서면서 공격이 성공할 때마다 네트 너머로 부화를 올렸다.
『동무들, 뭐 하러 왔수?』
『여기서 지면 아오지 탄광 간다며?』
스탠드에는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200여 명의 남쪽 교포들이 꽹과리와 북을 쳐댔다.
북한선수들은 말이 없었다. 착한 건지, 주눅이 든 건지, 스스로 허물어졌다.
이 장면은 인터넷 사이트에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KTV(국가기록 영상관)의 대한뉴스 891호(1972년 8월5일 촬영).
흑백화면에 보이는 南과 北의 유니폼은 같다. 시커먼 상의와 흰색 하의. 경기장면은 세 토막인데 모두 南이 이기는 것뿐이다. 아나운서는 신바람이 나 있다.
『우리나라 남자배구가 북한을 눌렀습니다. 첫 세트를 15대 11로 이기고 제2 세트를 13대 15로 내줬으나 제3 세트에서 15대 6, 제4 세트에서 15대 10으로 연달아 이겨 세트스코어 3대 1로 승리했습니다. (中略) 7·4 공동성명 이후 처음 있은 이날의 경기는 분단된 南北의 두꺼운 장벽을 헐고 혈육의 정을 나눈 감회를 안겨 주었습니다』
스탠드에선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산토끼」 합창도 나왔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
북한 남자배구는 그 후 어디론지 사라졌다. 정말 아오지 탄광으로 간 걸까?
그런데 국내 반응이 이상했다. 여느 때 같으면 「카퍼레이드하러 빨리 귀국하라」고 야단법석이 났을 텐데 조용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당시 체육회에서는 남자배구를 올림픽 출전 종목에서 제외시켜 놓고 있었다.
「남자배구는 북한에 3대 7로 절대열세이기에 예선탈락이 뻔하다」고 자체 진단한 것이다. 그런데 북한을 꺾고 올림픽 티켓을 땄으니 황당할 수밖에.
체육회는 뮌헨올림픽이 첫 남북대결 무대인 만큼 북한에 이길 수 있는 종목과 6위 이내에 입상 가능한 선수들만 골라 일찌감치 대표단을 구성해 두었다. 여자배구·복싱·역도·레슬링·유도 등 5개 종목에 39명(임원 13명, 선수 26명)이 바로 그들이었다.


식당메뉴는 푸짐했다.
『양젖 뭉치가 나오는데 설탕에 찍어 먹으니 끝내줍디다. 요구르트라고 하대요. 하루 10개 이상 먹었습니다. 며칠 후 거울을 보니 얼굴이 허옇게 살이 올랐습디다. 머리도 많이 길었고…』
선수촌 이발소에 가서 「조금만」 깎아 달라는 뜻으로 『a little please…』 했는데 이발사가 『OK』 하더니 「조금만」 남기고는 다 깎아 버리더란다.
9월4일 첫 상대는 체코였다.
『키가 엄청 큽디다. 우린 1층에 살고 그들은 2층에 사는 사람 같았습니다』
세트 스코어 0대 3. 완패. 세계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실감했다.
벤치에서 물수건과 주전자 배달만 열심히 했던 「대표팀의 막내」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한쪽 구석에서 잠에 곯아떨어졌다.
새벽 4시쯤 됐을까. 느닷없이 총소리가 울렸다. 비명도 잇달았다. 앞쪽의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였다. 누군가 『6·25가 터졌냐?』고 중얼 댔다. 창 밖을 내다볼 수도 없었다.
「검은 9월단」이었다. 당시 외신보도는 이랬다.
<팔레스타인 무장 저항단체인 「검은 9월(Black September)단」이 5일 새벽 뮌헨올림픽 선수촌의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에 침입해 선수 2명을 사살하고 9명을 인질로 한 채 『이스라엘에 억류 중인 정치범 200여 명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8명의 게릴라들은 인질들을 끌고 공항으로 나갔다가 서독 특공대원들의 기습을 받고 5명은 사살, 3명은 체포됐다. 이 와중에 인질 9명은 모두 죽었으며 특공대원 1명도 숨졌다. 이 사고로 올림픽은 24시간 중단됐다>
놀란 가슴에 남은 경기는 엉망이 됐다. 세 게임을 내리 져 하위 리그로 밀렸다가 브라질을 간신히 꺾고 7위에 낙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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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아시아 배구 선수권대회 겸 LA올림픽 아시아 예선전. 강만수의 스파이크. |
『敵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쏘았소』
한국은 유도에서 吳勝立(오승립)이 딴 은메달 1개가 고작이었다. 여자배구도 북한에 져 4위로 밀려났다. 북한 22위, 한국 33위.
귀국한 姜萬守는 인사차 고향 하동으로 내려갔다.
TV로 올림픽중계를 봤다는 친척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니는 그 먼 데까지 가서 주전자만 들고 다니데?』
그 말은 충격이었다. 태릉에 돌아온 그는 하루 200개가 넘는 공을 벽에 대고 때렸다. 제자리 뛰기도 수백 번씩 했다. 대표팀이 물갈이되면서 그는 스타팅 멤버에 올랐다. 주전자 멤버에서 주전 멤버로 「자」字 하나를 떼는 데 1년이 걸린 셈이다.


『제자리서 뛰면 70cm고 러닝 점프는 80cm가 넘지요』
―선 채로 양손을 위로 뻗었을 때 최고 높이는.
『키에다 팔길이를 더하면 한 2.5m 됩니다』
그렇다면 그가 후위에서 달려와 점프 스파이크를 할 때 최고높이는 330cm로 네트 높이(243cm)보다 87cm나 더 높다는 얘기다.
그 정점에서 내리꽂는 스파이크는 橫(횡)의 타법이 아닌 縱(종)의 타법이다.
그는 A퀵이니 B퀵이니 하는 속공을 거의 하지 않는다. 시간차 공격도 사양한다. 그냥 높이 떠서 상대방 블로킹 위에다 대고 패대기친다. 숫제 타작이다. 그가 때린 공을 블로킹하다 손가락이 찢어지는 선수도 많다.
그러나 배구에선 獨不將軍이 없는 법이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성적이 이를 입증해 준다. 폴란드와 쿠바·체코에 연신 두들겨 맞고 6위로 밀려났다. 그래도 뮌헨보다는 한 칸 위였다.
거기선 오히려 여자배구가 훨훨 날았다. 「나는 작은 새」 曺惠貞(조혜정)을 비롯해 尹英乃(윤영내)·劉敬花(유경화)·柳貞惠(유정혜) 등이 멋진 콤비 플레이로 한국 구기종목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을 따낸 것이다.
―남자배구가 왜 여자배구에 밀립니까.
『남자배구는 유럽의 장신들이 휘젓고 다니고, 여자배구는 아시아권이 주름잡고 있으니 그런 것 아닐까요. 기량이야 훈련하면 늘지만 키는 훈련으로 늘리기가 어렵지요』
어쨌든 한국 남자배구는 올림픽에 세 번 출전해 뮌헨에서 7위, 몬트리올에서 6위, LA에서 5위를 한다. 그게 한계였다.

그러나 「배구올림픽」으로 통하는 세계선수권대회는 달랐다. 1978년 9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24개국이 출전했다.
당시 멤버는 姜萬守·姜斗泰(강두태)·金浩哲(김호철)·張允昌(장윤창)·文湧冠(문용관)·柳重卓(유중탁)…. 평균연령 21.3세로 새파랗게 젊었다.
예선부터 잘 나갔다. 組(조) 1위로 통과해 여섯 팀씩 A-B조로 나눠 맞붙는 결선리그에서도 체코와 폴란드를 꺾었다. 쿠바에 지긴 했지만 멕시코도 잡았다. 남은 상대는 일본이었다.
『근데 일본이란 나라가 참 웃깁디다. 자기들은 쿠바·폴란드·체코에 내리 깨져 놓고 한국에게만은 꼭 이깁니다. 희한한 징크스예요. 1대 3으로 졌습니다』
한국은 3승 2패, 일본은 2승 3패. 그런데 마지막날 쿠바가 폴란드를 3대 0으로 꺾으면서 계산이 복잡해졌다. 한국과 폴란드가 나란히 3승 2패였다.
배구에선 승패가 같으면 세트 득실차로 순위를 가린다. 따져 보니 한국은 3(+12, -9), 폴란드는 1(+10, -9)이었다. 한국은 조 2위로 4강에 올랐고, 폴란드는 조 3위로 일본과 함께 5~8위전으로 밀려났다.
세트 득실차로 얻은 4강 진출은 역대 한국 남자배구의 최고성적이다.
―결선 토너먼트에선 어떻게 됐나요.
『꼴찌했습니다. 3~4위전에서 쿠바는 잡을 수도 있었는데…. 아깝습니다. 그놈의 코브라 서브 때문에…』
배구공은 속이 비었다. 한 중앙을 골라 손바닥으로 강타하면 공이 요동치면서 뱀처럼 꿈틀거리며 날아간다. 시력이 약한 수비수는 리시브를 갖다대기가 어렵다. 특히 콘택트렌즈를 낀 선수는 공이 천장의 조명과 스치는 순간 그 정점이 새카매지면서 잠깐 동안 피사체를 잃는다.
쿠바 선수는 한국 수비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수비수 한 명만 골라 집중공격을 퍼부었다. 연속 5실점하면서 그냥 무너졌다. 세트 스코어 1대 3 패.
―세트 득실차로 재미본 대회도 많지요.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그렇습니다. 허나 세트 득실차도 분명히 실력입니다. 3대 0 완승과 3대 2 신승은 하늘과 땅 차이니까요』
1978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 남자배구는 韓-中-日의 물고 물리는 접전이었다.
한국은 일본에 지고, 일본은 중국에 지고, 중국은 한국에 졌다. 세 팀이 모두 4승 1패 동률.
세트 득실차에서 한국 10(+13, -3), 일본 9(+13, -4), 중국 8(+12, -4).
당시 신문에는 이런 가십기사가 실렸다.
「남자배구의 금메달로 기분이 좋아진 金澤壽(김택수) 체육회장은 그때까지 미뤄 오던 축구선수 車範根(차범근)의 서독진출을 현장에서 결재했다. 이로써 車선수는 대회가 끝나는 대로 방콕에서 바로 서독으로 가 팀훈련에 합류하게 됐다」
배구의 세트 득실이 축구선수의 해외진출을 성사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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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방콕 아시안게임 입장식에서 사모관대를 한 강만수와 족두리를 쓴 강현숙 선수가 입장하고 있다. |
『여자농구의 강현숙 선숩니다. 요즘 말로 「얼짱」이지요. 방콕에선 신랑신부를 맡은 남자배구와 여자농구가 나란히 금메달을 땄습니다』
―배구 금메달은 그것뿐입니까.
『아닙니다. 멕시코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도 세계 정상에 올랐습니다』
―멕시코는 高地帶여서 많이 피로했겠는데요.
『피로했던 곳은 멕시코가 아니라 비행기 안이었습니다. 꺽다리들이 이코노미 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30시간을 배겨 보십시오. 어떻게 되는지…』
그는 비행기 얘기를 하면서 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특히 20~30시간씩 날아야 하는 유럽이나 남미行일 때는 아예 「죽었다」고 복창한단다. 앉으면 무릎이 앞좌석 등판에 걸쇠처럼 꽂히고 엉덩이는 배겨서 꼼짝달싹 못 한다.
『완전 마네킹입니다. 허리도 금세 뻣뻣해집니다. 배구선수들은 모든 액션을 공중에서 취하고 떨어지기 때문에 평소에도 허리와 무릎이 좋지 않습니다. 좌석이 하도 비좁아 기내 화장실에라도 가 있으면 금방 노크를 해대고 다리에 쥐가 나 풀려고 복도를 어슬렁거리면 「TV 안 보인다」고 스튜어디스들이 앉으라고 해요. 비행코스는 또 얼마나 복잡합니까? 완행열차처럼 이곳저곳 다 거쳐서 목적지에 도착하니…. 몸으로 승부를 하는 국가대표선수들에게는 최소한 비즈니스 클래스는 줘야 합니다』
당시 U대회 멤버는 그야말로 장대들이었다. 세터 金浩哲(176cm)을 제외한 주전들의 평균신장이 193cm으로 역대 최고였다. 예선리그를 거쳐 組 1위로 올라온 본선 멤버는 한국·일본·쿠바였다.
세 팀이 풀리그로 겨루는 결승에서 한국은 쿠바에 2대 3으로 역전패했으나 일본을 3대 0 스트레이트로 잡아 은메달은 확보한 상태였다.
일본은 당시 대학선수들이어서 한국의 적수가 아니었다. 남은 경기는 쿠바와 일본戰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일본이 쿠바에 얼마나 깨지나」 구경하자며 몰려갔다.
그런데 웬일인가. 일본이 씽씽 날았다. 첫 세트를 15대 7로 잡더니 2세트는 듀스에서 놓치고 3세트와 4세트를 9점과 11점에 묶어 놓고 종지부를 찍어 버렸다. 세트스코어 3대 1.
세 팀이 1승 1패 동률. 세트 득실은 따질 필요도 없었다. 풀세트로 이긴 건 한국뿐이니까. 관중석에서 딴 금메달이었다.
吳定根(오정근) 단장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라며 지화자 춤을 춰 댔고 朴鎭觀 감독은 『한국이 쿠바에 지긴 했으나, 쿠바를 꺾은 일본을 3대 0으로 완파한 만큼 우승자로서 조금도 손색없다』고 기염을 토했다. 비록 U대회였지만 한국 남자배구 사상 첫 세계제패였다.

―中東으로 돈 벌러 간 적이 있지요.
『U대회를 마치고 오니 아랍에미리트(UAE)의 알 자지라 클럽 매니저인 하마드 블럭氏가 찾아왔어요. 계약금 10만 달러에 月 5000달러를 줄 테니 2년만 뛰어달라고 합디다. 총각 때 돈이라도 벌어 두어야겠다 싶어 쾌히 승낙했습니다. 배구에서는 아마도 제가 해외수출 1호일 겁니다』
당시 10만 달러면 강남의 30평짜리 아파트 두 채 값이었다. 1980년 8월부터 2년 간 그는 국내 코트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고생이 꽤 심했을 텐데….
『처음에 가보니 선수들이 다 부잣집 아들이라 「상전 노릇」만 합디다. 나보고 「네트를 치라」고 해요. 연습시간도 안 지키고 운동하다가 싫으면 그냥 가 버리고…』
그는 「가진 자의 게으름」을 「솥뚜껑 스파이크」로 응징했다.
『클럽 매니저에게 먼저 양해를 구한 뒤 早退(조퇴)를 상습적으로 하는 선수를 불러 리시브 연습을 집중적으로 시켰지요. 네트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위에 올라서서 그놈의 면상을 겨냥해 집중타를 퍼부었습니다. 다음날 보니 얼굴이 만신창이가 돼 있습디다』
그 후로는 조퇴는 물론 지각생도 없어졌다.
UAE에는 한 市에 보통 2~3개씩 배구클럽이 있다. 이 팀들은 매주 경기를 갖는다. 이 팀들 중에 姜萬守의 적수는 없었다.그가 네트 앞에서 뛰어오르면 다들 피했다. 다치면 저만 손해니까.
선수들은 토스할 때 『캉, 캉~』 하다가 스파이크가 성공하면 『만쑤우~』하고 하이파이브를 해 왔다.
한국 傭兵(용병)은 첫해 알 자지라 클럽을 아부다비市 정상에 올려놓은 뒤 이듬해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이 모두 참가한 걸프만 클럽대회를 제패한다.
―총각 때라 외로웠을 텐데….
『그땐 밤낚시를 갑니다. 숙소 앞이 바다였거든요. 도미가 참 많이 잡혔습니다. 한 양동이씩 잡아다가 근처에 있는 현대건설 현장사무실로 갖고 가면 주방 아저씨가 생선회를 큼지막하게 떠줍니다. 소주도 한잔 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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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想체육상 시상식에서 정주영 회장과 부인 金貞希. |
이때부터 그의 「청춘사업」이 시작된다.
『그해 겨울 아내를 만났습니다. 선수단 숙소가 신반포아파트에 있었는데, 그곳 부녀회장님이 「참한 색시가 있다」며 소개를 해줍디다』
이화여대 무용과 출신인 부인은 당시 한불종합금융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친척 언니가 「괜찮은 남자」라는 말에 나와 보니 「거인 姜萬守」더란다.
부인에게 물었다.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1983년 12월8일에 했습니다. 남편이 도쿄에서 LA올림픽 아시아 예선전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습니다. 그 대회 때문에 일부러 결혼날짜를 미뤘지요』
하마터면 남편을 잃을 뻔했구먼. 배구 판 사정을 몰랐으니 다행이지….
당시 일본은 배구 열기가 한창이었다. 배구 월드컵이 열렸고, 「평화 컵」이란 국제대회도 창설됐다.
지구촌으로부터 「경제동물」이란 빈정거림을 받던 일본으로선 국민들의 자존심을 세워 줄 아이템으로 배구를 선택했다. 세계를 제패한 유일한 구기종목이니까.
남자들은 일에 쫓겼고, 체육관은 여자들로 가득 찼다. 한국 남자배구의 인기가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군 게 이즈음이었다.
그중에서도 姜萬守는 단연 엄지였다.
그가 체육관에 들어서면 장내는 여성 팬들의 비명으로 찢어진다.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싱글웃음에 八字걸음, 그리고 대포알 같은 오픈 스파이크. 일본 배구전문지들은 그를 「코트의 信天翁(신천옹)」으로 표현했다.
잔재주 위주의 일본 남자배구에 익숙해 있던 여성 팬들은 코트를 진동시키는 姜萬守의 거포에 탄성을 질렀다.
약삭빠른 일본 여행사들이 이를 놓칠 리 없다.「姜萬守 배구 보러가기」 여행상품이 다투어 나왔다. 「욘사마」보다 20년 앞선 「반사마(萬樣)」 시대였다.
『그때도 대단했습니다. 극성 팬들은 카메라를 들고 체육관 화장실까지 따라왔고, 선수단 전용버스를 가로막고 사인을 요청하는가 하면 선수들이 묵고 있는 호텔 부근에 침구를 갖고 와서 밤을 새는 여성들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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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U대회 개선 카퍼레이드(1979년 9월19일). |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해 놓은 한국으로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대회에서 LA티켓을 따야 했고, 일본도 홈코트의 이점을 이용해 LA行을 결정지어야 했다.
한국과 일본의 결승전 주심은 미국인 윙크 데이븐氏였다. 서로가 두 세트씩 주고받아 도착한 파이널 세트. 스코어는 한국이 8대 4로 앞서갔다.
한국으로선 勝勢를 몰아 빠른 시간 안에 승부를 결정내야 했다. 傷痍勇士(상이용사)가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姜萬守는 예선 리그 때부터 휘두른 스파이크 후유증으로 오른쪽 늑골에 무리가 와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고, 柳重卓은 20일째 편도선염을 앓고 있었으며, 姜斗泰는 중국戰에서 삔 발목이 부어 절뚝거렸다.
주심의 휘슬이 울리면서 서브가 날았다. 세터 李範柱가 잽싸게 받아 文湧冠에게 토스하자 文은 일본의 센터 다나카(田中幹保)의 블로킹에 대고 힘껏 때렸다. 공은 한국 코트 사이드 라인 밖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주심의 시그널이 「아웃」이었다. 다나카의 손에 안 맞았다는 것이다. 일본 득점. 그렇다면 한국 코트로 되돌아온 공은 「유령의 스파이크」였단 말인가. 스탠드에서는 야유가 쏟아지고, 주장이 항의를 했지만 한 번 내린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게임의 리듬은 완전히 깨졌다. 11대 15. 역전패였다.
―LA티켓을 심판에게 도둑맞았군요.
『홈코트의 텃세로 봐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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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수를 짝사랑하는 일본 여배우 구로다 후쿠미. |
구로다 후쿠미(黑田福美). 이후 구로다는 NHK를 통해 한국말을 배웠고 이듬해부터 시도 때도 없이 현해탄을 건너왔다. 姜萬守에 대한 戀情(연정)은 한국사랑으로 이어졌고, 서울올림픽 때는 아예 남산 아래에 아파트를 빌려 먹고 자면서 일본 방송국의 리포터로 활약했다.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때는 일본조직위원회 홍보이사를 맡아 도쿄와 서울을 오갔다.
구로다의 일방적 러브스토리는 일본의 배구전문지 「월간 발리볼」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대담상대는 前 일본배구협회 전무이사이자 TV해설가인 마쓰다이라 야스다카(松平康隆)氏였다.
〈―姜萬守의 어느 부분이 끌리던가요. (마쓰다이라)
『비장감이 넘치는 얼굴을 본 순간 온몸이 저렸습니다. 최후의 무대에 오른 老將이 늑골 골절(뒤에 안 일이지만)을 무릅쓰고 후배들을 독려하면서 지휘하는 그 모습은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대회가 끝난 뒤 전 매일 하루 세 번씩 VTR을 보았는데 엄마가 「또 그 사람 보느냐」면서 싫어했어요』 (구로다)
―당신이 쓴 책 속에 「배우를 그만두고라도 姜萬守를 만나고 싶다」는 대목이 있던데….
『만남은 운명이지요. 그 길이 고독하겠지만 각오하고 있습니다』
―직접 만난 적이 있습니까.
『2000년 5월19일 서울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만났습니다. 붙들고 울었어요. 그때는 현대자동차 감독이던데 선수 시절의 옛 모습을 떠올리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잘 안 되더군요. 당시 그의 부인도 방송국에 와 계셨어요』〉
필자는 옆자리의 부인에게 이 대목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모처럼의 인터뷰에서 「제3의 여자」 이야기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나중에 묻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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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때 강만수의 스파이크 시속은 105km. |
―그래서 LA올림픽은 출전하지 못했습니까.
『아닙니다. 1984년 1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LA올림픽 최종 예선전에서 마지막 한 장 남은 티켓을 따 본선에 나갔습니다』
LA올림픽의 남자배구에는 뒷이야기가 많다. 그중 하나가 「미국의 음모설」이다. 상황은 이랬다. 미국은 사실 올림픽을 하기 전까지는 배구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최고성적이 1982년 아르헨티나 세계선수권의 8위였으니까.
그러다가 올림픽을 개최했다. LA올림픽에는 소련과 쿠바를 비롯한 동구권이 보이콧, 배구강호들이 대거 불참했다. 미국배구로선 절호의 찬스였다.
여기에 미국 팀에는 걸출한 공격수 커크 키날리(192cm)가 있었다. 팀워크도 좋았다. 이렇게 되니 한국이 눈엣가시였다. 이탈리아 세계선수권 4위에다 멕시코 U대회 금메달 실력이 신경에 거슬렸다. 미국의 금메달 가도에는 한국이 장애물이었다.
그런데 하필 한국과 미국은 예선리그에서 같은 組에 편성됐다. 한국은 예선에서 중국·브라질·튀니지·아르헨티나를 잇따라 꺾고 4승을 선취했다. 미국도 3승을 거뒀다. 네 번째 상대는 한국. 이 게임에서 한국은 너무나 어이없게 진다. 0대 3.
―사령탑이 뭔가 착각한 게 아닙니까. 한 세트라도 이겼어야 하는데….
『글쎄요. 져도 4강에 오른다고 생각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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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일본 비치발리볼대회에 나선 강만수. |
객관적 전력으로 볼 때 이 판은 미국의 압승이 틀림없어 보였다. 미국이 한국을 3대 0으로 잡았고, 한국이 브라질을 3대 1로 꺾었으니 계산상으로도 미국의 6대 1 우세였다. 한국의 조 2위 4강 진출은 확정적이었다.
『그때 선수단에서는 남자배구의 올림픽 첫 4강 진출을 축하하는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선수들에게는 「고향 가족들에게 알려서 동네잔치를 벌이도록 해라」고 지시했고요. 경비는 나중에 갚아 준다면서』
그런데 웬걸?
미국이 주전선수 6명을 모두 빼내고 후보선수들만 기용해 0대 3으로 자멸하는 게 아닌가. 브라질을 4강에 데려가기 위한 고의패배였다. 미국이 브라질에게 0대3으로 지자 미국·브라질·한국이 4승1패, 동률이 됐고 세트 득실차에서 브라질이 1위, 미국이 2위, 한국은 3위로 4강 탈락이었다.
브라질을 본선에 데리고 올라간 미국은 결승에서 주전멤버들을 총출동, 3대 0으로 두들겨 패고 금메달을 챙겼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미국의 승부조작이었다.

LA에서 돌아온 姜萬守는 1984년 10월6일 대표팀 사퇴를 발표한다. 뮌헨올림픽에서 태극마크를 단 지 12년 만이었다.
―왜 사퇴했습니까.
『나이 서른이면 선수로선 환갑이지요. 결혼도 했고…. 더 늦기 전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디다』
그는 지도자로 가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
―하필 와세다(早稻田)大 였습니까.
『그 학교 출신의 재일동포가 후견인을 자청했습니다』
白萬燮(백만섭·161·하마마츠市)씨. 그는 3년 전부터 姜萬守와 일본유학을 공모했다. 와세다大에 편입시켜 배구 지도자의 길을 걷게 하면서 동시에 대학선수로 활용해 와세다大 배구부의 위상을 높이는, 一石二鳥의 포석이었다.
姜萬守는 열흘 뒤 도쿄로 갔다. 와세다大 근처에 방을 얻고 日語학원에 등록을 했다. 학비와 생활비는 白씨가 도와주었다. 10월27일 아내가 서울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알려왔다. 해가 바뀌었다. 식구가 늘어났다. 아내와 아들이 일본에 왔다.
그러나 와세다大 편입시험은 쉽지 않았다. 운동선수라고 봐주는 게 없었다. 모든 게 성적으로 결정됐다.
『애 보랴, 일본말 배우랴, 편입시험 준비하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그 해엔 위장 내시경 검사를 네 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와세다大에 편입하려면 모교인 한양大의 총장 추천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한양大에 급히 연락했더니 「不可」라고 했다. 「B학점 이상 안 되면 추천장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가 찼다.
그러던 중 白萬燮씨로부터 姜萬守의 사정을 전해들은 와세다大 교육학과 후루이치(古市英) 교수가 나섰다.
『내가 추천서를 해줄 테니 응시하세요』
1985년 2월8일 시험을 쳤다. 경쟁률 5대 1. 닷새 뒤 합격통보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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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수를 격려하는 일본의 知人들. 강만수 오른쪽은 白萬燮(와세다大 선배·재일동포)氏, 왼쪽은 모리 요시로 당시 문부상. |

3월 초 일본 중의원 「와세다 동문」들에게는 한 장의 초대장이 날아든다.
제목은 「姜萬守군을 격려하는 모임 안내」.
〈한국에서 태어난 남자배구의 세계적 슈퍼스타 姜萬守군이 일본에서 체육학을 공부하고 싶어 배구공 대신 펜을 들고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중략) 바쁘시겠지만 부디 오셔서 후배 姜군을 격려해 주십시오. 일시=1985년 4월12일 오후 6시30분/ 장소=캐피털 도큐호텔 연회장/ 회비=1만 엔/ 대표 발기인= 모리 요시로(森喜朗)〉
발기인 명단에는 森의원말고도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등의 이름도 있었다.
「한국의 거포」 姜萬守의 와세다大 입학에 두 명의 일본 前 총리가 축하차 나선 것이다.
―대학에서 배구를 계속했습니까.
『오전에는 수업 받고, 오후에 연습을 했습니다. 지도자로서의 이론무장도 중요하지만 실기연습도 게을리 할 순 없지요. 재학생들이 나를 볼 때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배구지요』
일본의 대학배구는 1부에 8팀씩 16부 리그까지 있다. 그가 입학했을 당시 와세다大는 關東지역 2부 리그 5위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뭔가 보여 주어야 했다. 4월13일 중앙大와의 첫 경기가 체육관에서 열렸다. 백넘버 11번을 달고 나선 姜은 스파이크 11득점, 블로킹 3득점으로 간단히 상대를 제압했다. 그 자신도 오랜만의 경기인지라 몸조심을 했다.
그리고 5월 초, 2부 리그전에선 가공스런 거포를 선보였다. 상대선수들은 지레 겁을 먹고 주저앉았다. 연전연승으로 1부 리그에 골인했다. 입학 후 두 달 만이었다.
이듬해 가을 대회에서는 챔피언인 호세이(法政)를 비롯 도카이(東海), 일본체대 등을 모두 꺾고 1부 리그 정상에 올랐다. 와세다大로선 33년 만에 맛본 우승이었다.
한국인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와세다가 「와~ 세다」로 됐다』며 우스개를 했다.
1987년 와세다大를 졸업한 그는 요코하마의 東海대학원에 진학한다. 그곳에선 비교적 시간여유가 많았다. 학비도 벌 겸 도레이 실업팀에 입단했다. 도레이는 실업단 리그(2부 리그) 중위 팀이었다.
구단에서는 『모든 걸 맡길 테니 「일본리그(1부 리그)」에만 올려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려면 선수 1명이 더 필요합니다. 일본체대에 중국의 명센터가 청강생으로 와 있으니 불러들입시다』
동갑내기 왕짜웨이(汪嘉偉. 194cm)였다. 汪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때 중국 남자배구를 우승시킨 미남 센터였다.
둘은 호흡이 잘 맞았다. 도레이는 그 해 겨울 실업단 리그에서 14전 전승을 거두며 창단 후 처음으로 일본 리그에 올라섰다. 도레이는 작년 일본 리그를 제패했다.
―비치발리볼도 했다면서요.
『일본에선 아주 인기종목입니다. 선수들에게는 기분전환과 동시에 체력단련을 시켜 주고 팬들에게는 좋은 눈요기가 되지요. 매년 8월 全일본 비치발리볼대회가 열리는데 국가대표선수들은 의무적으로 참가하게 돼 있습니다』
그는 1988년과 1989년 이 대회를 2연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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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아시아 배구 선수권대회에서 만난 중국의 간판스타 왕짜웨이와 강만수. |
이듬해 봄에는 수원大와 연세大 체육교육과에 강의를 나가기도 했다. 교과내용은 「전공배구와 교양배구」.
그러나 마음에 안 찼다. 아무래도 그의 무대는 땀 절은 코트였다.
1993년 봄, 현대자동차서비스에서 불렀다. 코치를 맡겼다.
9년 만의 친정 복귀였다. 열심히 뛰어 2위로 끌어올렸다. 이듬해 감독으로 승진했다.
그의 조련술이 빛을 발한 건 1994 시즌. 결승에서 챔피언인 고려증권을 잡고 6년 만에 정상을 탈환했다. 그날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벌인 우승 축하파티는 꽤 질펀했다.
내친 김에 1995 시즌까지 2연패했다. 그게 전부였다.
1997년에는 신생 팀 삼성화재가 등장하면서 현대를 옥죄어 왔다. 이젠 선수들의 경쟁이 아니라 기업 간 싸움이었다.
2001년 12월9일 그는 현대 사령탑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지난해 봄 경기도 수지 근처에 「올드 스타」란 레스토랑을 개업했다.
―단골손님이 많습니까.
『요즘은 잘 가지 않습니다. 어쩌다 한번 가면 이곳저곳에서 손님들이 부르는 바람에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야 하고…. 몸이 피곤해서 못 견디겠습디다』
맞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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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金貞希와 함께. |
―일본 여배우 구로다를 예전에 한 번 만나셨다면서요.
『여러 번 만났어요. 월드컵 후에도 매년 한두 번 이상 서울에 와요. 작년에는 남편과 그쪽 매니저 등 여럿이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萬守씨 앞이라 떨려서 밥을 못 먹겠다」고 하잖아요. 내 참』
부인은 혀를 찼다.
『글쎄, 요즘도 침대 머리맡에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을 걸어두고 있대요. 매니저가 몇 번이나 떼라고 했는데도 말을 안 듣는답니다. 또 옛날에 녹화했던 LA올림픽 예선전의 VTR은 그동안 얼마나 봤던지 테이프가 다 닳았대요』
구로다는 지난 1월 우리 「안방」에까지 찾아왔다.
SBS TV 수목드라마 「유리화」에 주인공 한동주(이동건 役)의 일본인 양어머니(야마모토 게이코)로 나온 여자가 바로 구로다 후쿠미다.
요즘 어쩌다가 부부가 말다툼이라도 하면 아들이 이런 농을 던진단다.
『아버지는 쫓겨나도 갈 데가 있어서 좋겠다』
장남 成濬(성준·22)은 현재 일본 나고야 아이치(愛知) 대학에서 국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있고, 막내 成湖(성호·18)는 신일高 야구선수다.
둘 다 장신(190cm)이지만 배구는 안 한다. 古木 밑에서는 출세가 어렵기 때문이다.
姜萬守, 그는 분명히 한 시대를 주름잡은 아시아의 거포다. 한국배구가 일궈낸 성과를 姜萬守 혼자 해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없었더라면 이 성과들은 도저히 이루기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