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로고
2001년 7월호

[인물연구] 영화배우 최민식

벼락 스타 탄생 뒤 추락, 再起 되풀이

  화면은 거짓말을 못한다
 
 
  영화 「파이란」. 스물 셋의 중국여자 파이란이 난생 처음 밟는 한국땅. 입국 심사대. 심사원이 파이란을 몇 번인가 뚫어지게 바라보다 이윽고 입국허가 도장을 『꽝』 하고 찍는다. 첫 화면은 흑백처리된다. 우중충한 파이란의 삶을 예고한다.
 
  어머니의 유언 『한국에 있는 이모를 찾아가라』는 말만 믿고 파이란은 인천을 찾는다. 그러나 이모는 이미 캐나다로 이민 가고 없었다.
 
  파이란은 갈 곳이 딱히 없다. 직업소개소를 통해 위장 결혼을 한다. 한국에 눌러 앉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서류상의 남편인 강재는 인천 바닥을 핥는 「3류 건달」. 그러나 「3류 건달」은 강재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실은 「등외 인간」이었다.
 
  강재役의 영화배우 최민식(38). 아무 역이나 받아먹지 않는다. 최민식의 인기에 편승, 서른개쯤의 시나리오가 들어왔으나 모조리 거절해 버렸다.
 
  잘 나가는 배우로 목에 힘주는 게 아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役엔 혼신의 연기를 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처음 「파이란」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눈시울이 젖었다. 얼굴놀음이나 하는, 그저 그런 멜로물이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물론 그럴 경우 내게 출연 제의도 없었겠지만. 시나리오가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혀졌다. 이건 나를 위해 만든 배역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건 통상 과학적이라거나 논리적인 것과는 다르다. 느낌으로 와 닿아야 한다. 두 번째 읽으면 이미 「계산」이 들어간다. 순수한 맘에서 선입견없이 이 영화를 선택했다. 화면은 거짓말을 못한다. 마지못해 출연했다면 그게 그대로 화면에 드러난다. 그건 관객모독이다』
 
  「파이란」의 감독 송해성은 서울 대일고교 1년 후배다. 이 영화를 같이 하면서 알게 됐다. 「파이란」의 원작은 아사도 지로의 단편집 「철도원」에 있는 「러브 레터」. 한국식으로 각색했다.
 
  「파이란」은 지나온 각자의 삶을 반추케 하는 휴먼 드라머. 지난 4월28일 개봉됐다. 무대는 인천 항구. 극중 강재는 실제 최민식의 나이와 비슷한 30代 막바지. 각박한 세상살이와 타협하기엔 너무 여리다. 어정쩡한, 악착스럽지 못한 성격은 늘 「아웃사이더」로 머물게 한다.
 
  비디오 가게, 구멍가게, 싸구려 술집 등이 맞물려 돌아가는 인천 뒷골목. 화면은 퀴퀴한 냄새가 묻어나는 곳을 비쳐 주면서 「파이란」은 더욱 더 「칙칙한 세상살이」를 강조한다.
 
  강재는 깡패로 함께 시작한 동료를 보스로 깍듯이 모신다. 보스는 강재에게 「깡패 실격」을 선언한다. 강단도 없고 모든 일에 느슨해 깡패로서 출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뒤늦게 송장으로 나타나면 어떻게 하라는 건가?』
 
 
  『강재씨는, 세상 참 재밌게 살아!』
 
  후배 깡패가 강재에게 내뱉는 이 한 마디는 「인간 강재」의 총체적 인상을 던져 준다. 강재는, 늘상 후배들에게 술안주가 되고 씹히기만 한다. 심지어 구멍가게 아줌마까지도 시답지 않게 보는, 「한심한 사내」다.
 
  파이란은 강원도 고성군 대진의 손빨래 세탁소에서 일하다 난치병으로 세상을 마감한다. 한편 어느 날 보스는 강재를 부른다. 자신의 살인죄를 뒤집어쓰라는 제의를 했다.
 
  『네가 내 대신 빵(감방)에 들어가라. 넌 전과가 큰 게 없으니까, 10년만 살면 나올 수 있다. 대신 네 소원인 배를 한 척 사주마』
 
  숙고 끝에 제의를 받아들인다. 어쩌면 「바닥 인생」을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같기도 했다. 교도소 갈 날만 기다리던 중 경찰이 강재의 집으로 들이닥친다. 지레 겁먹은 강재에게 경찰관들은 파이란의 사망통지서를 들이민다. 한동안 어리둥절하던 강재는 뒤늦게 「위장 결혼」했던 사실을 가까스로 기억해 낸다. 파이란의 장례를 치러 주기 위해 강원도 대진으로 간다.
 
  屍身(시신)을 찾고 장례를 치른다. 파이란의 흔적을 더듬어 가면서 강재는 난생 처음 「자신의 과거」를 추스려 본다. 지우고 싶은 과거다. 그리고 따악 두 번밖에 보지 못한 서류상의 아내─파이란이 남긴 편지를 뜯어본다. 서툰 한글로 한자한자 또박또박 박힌 글씨.
 
  「강재씨, 고맙습니다. 저와 결혼해 주셔서…. 이곳 사람들은 친절합니다. 그러나 강재씨가 더욱 친절합니다」
 
  강재는 난생 처음 그리움의 대상이 됐다. 감사의 대상이 됐다. 묘한 감정이 일었다. 그에게 여자는 섹스 파트너일 뿐이었다. 난생 처음 「사랑」, 「그리움」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파이란의 주검을 보며 절규한다.
 
  『뒤늦게, 송장으로 나타나면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냐?』
 
  「파이란」의 매장 허가를 받는 과정은 너무 간단했다. 그래서 강재는 발광한다. 한 인간의 새파란 젊은 여자의 일생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간단하게 끝나느냐는 것이었다.
 
 
  『참, 슬프네요』
 
 
  「파이란」은 低예산 영화다. 요즘 유행하는 컴퓨터 그래픽 처리 같은 것도 없다. 지난해 12월10일 크랭크인해 지난 3월3일 촬영이 끝났다. 영화 「쉬리」의 촬영기간이 1년이 넘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최민식은 서울 시내 개봉관을 돌면서 관객들에게 물었다.
 
  『파이란, 어때요?』
 
  『참, 슬프네요. 눈물이 나서 창피했어요』
 
  눈시울이 젖은 아줌마와 아저씨도 더러 보였다.
 
  『영화 관객들을 통해 「좋은 느낌」이 왔다. 정서가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관객이 많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이 봐도 진짜 뭔가 충만한 맘으로 나의 영화를 봤다면 그걸로 족하다』
 
  여주인공 파이란役을 맡은 장바이즈는 홍콩의 인기배우다.
 
  『지난해 겨울, 폭설에다 엄청 추웠다. 촬영하면서 죽을 뻔했다. 발가락이 얼어 빠지는 것 같았다. 군대생활 이후 그처럼 혹독한 추위는 처음이다. 영화 내용상 초라해 뵈야 하기 때문에 양복 한 벌만 달랑 입었다. 내복은 입을 수가 없다. 화면에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장바이즈의 고생이 극심했다. 영상 10도에도 일쑤 사람이 얼어죽는다는 홍콩에서 왔다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배우들도 물론 스태프들과 똑같이 먹고 잤다. 거지꼴이었다. 한겨울에 훈련받던 군대 시절이 떠올랐다. 장바이즈도 식어 빠진 육개장을 잘도 먹었다. 장바이즈에 대한 특별 대우는 없었다』
 
  장바이즈는 처음에 한국 영화 제작 시스템에 뜨악해 했다. 최민식에게 묻기도 했다.
 
  『홍콩에선 한 달이면 영화 한 편을 찍는다. 한국에선 한 커트 촬영에 하루도 걸린다. 왜냐?』
 
  『한국에선 영화 한 편 촬영에 1년 넘게 걸리는 것도 있다. 하나하나 짚어가고 점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바이즈는 카메라만 돌아가면 돌연 프로가 됐다. 힘든 내색 한 번 안했다.
 
  『한 번은 울면서 홍콩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거는 장바이즈를 봤다. 너무 안쓰러웠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최민식은 장바이즈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또 한국 영화에 나올래?』
 
  『물론이다. 그러나 추운 겨울은 빼고…』
 
 
  영화광이었던 중학교 시절
 
 
  최민식.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정릉에서 흘렀다. 숭덕초등학교 때 반장이었다. 부반장이 여학생이었는데, 「준 것 없이 미운 애」였다. 맘에 안 들었다.
 
  한 번은 부반장이 화장실에 들어가는 걸 봤다. 기회다 싶어, 폭음탄(명절 때 쓰던 장난감)을 화장실에 던져 넣고 화장실 문을 잠가 버렸다. 폭음탄은 터졌고 부반장은 기절했다. 그날 부반장의 어머니에게 귀싸대기를 몇 번인가 심하게 맞고서도 집에 가선 말 한 마디 안 했다.
 
  삼선중학교 2학년 때. 연예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짬만 나면 영화관을 들락댔다. 입장료가 서울의 절반인 의정부로 원정을 가 영화를 봤다. 지금도 기억한다. 의정부行 13번 좌석 버스.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영화관 앞 팻말도, 민식에겐 먹히지 않았다. 같은 반 학생 70명 중 69번이었다. 덩치가 컸다. 그때의 177cm, 75kg은 지금도 그대로다.
 
  이때 본 영화 중 「타워링」, 「스타 탄생」은 두고 두고 감동적이었다. 대일고교 1학년 때도 반장을 했다. 리더십은 타고났다. 싸움꾼이기도 했다. 싸움판이 있는 곳이면 늘상 최민식이 있었다.
 
  고등학교는, 적어도 최민식에겐 무의미했다. 좋은 추억 하나 없다. 그렇다고 뭘 배웠다는 기억도 없다. 학교 다니는 게 징역살이였다. 훨훨 날고 싶었다. 영화관에서 살았다. 수업은 뒷전이었다.
 
  『영화가 선생이었다. 영화는 나를 때때로 울게 했고 밤잠도 설치게 했다. 비록 허구지만 진지한 메시지가 있었다. 영화감독이 되자고 했다』
 
 
  우상-영화 감독 하길종
 
 
  우연히 영화 감독 하길종의 에세이 「백마 타고 온 또또」를 읽었다. 「탁 트인 시각」이 너무 좋았다. 특히 「영화는 소중한 문화의 일부분이다. 영화인은 그 사회 문화의 리더다. 영화 제작자는 상업성 외에 예술성이 보태지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는 대목이 좋았다. 영화 관련 서적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어느 날 영화평론가 변인식을 명동의 경양식집 「필립」에서 만났다.
 
  『변선생님은 겨우 고등학교 2학년생인, 내게 진지한 충고를 해 줬다. 학생 때는 공부만 해라, 대학에 가서 영화감독의 길을 찾아도 늦지 않다는 요지였다. 교과서적인 뻔한 얘기였지만 그 진지함에 감동했다』
 
  변인식은 신일고교 국어 선생이기도 했다. 신일고교 출신인 둘째형이 영화에 미쳐 돌아치는 동생이 딱해 보여 주선한 만남이었다. 변인식은 그날 이런 얘기도 했다.
 
  『감독이란,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공부해야 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감독이 다룰 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모든 게 다 소재가 된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도 모자란다』
 
  먼 훗날. 영화 「쉬리」의 성공 축하연이 신라호텔에서 열렸을 때 최민식은 변인식을 만났다. 변인식에게 다가가 말했다.
 
  『선생님, 그 옛날, 경양식집 「필립」에서 저에게 충고해 주신 게 생각나십니까? 그때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 아, 그래. 이제사 생각나는구먼. 그때도 뭔가 일낼 학생으로 보였지』
 
  최민식. 어머니의 고향은 경기도 의정부, 아버지는 함경북도 북청. 아버지는 축구선수 출신으로 터프했다. 평소엔 말이 없고 너그러웠다. 어쩌다 아버지에게 얻어터지는 날도 없지 않았다. 아버지의 발길질 위력이 엄청났다. 한 번 당하면 대번에 2~3m쯤은 날아가야 했다.
 
  아버지의 발길질을 손으로 막다가, 민식은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눈에 안 찼다. 큰놈(찬식)은 환쟁이, 작은놈(민식)은 딴따라를 한다고 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술이라도 마시는 날엔 민식에게 대놓고 면박을 줬다.
 
  『야, 너 그 많은 직업 중에 왜 하필 딴따라냐? 그 짓거리로는 고생만 죽도록 한다는 걸 왜 몰라?』
 
  환쟁이 지망생인 형은 장남이란 이유로 아버지에게 더 많이 얻어 터졌다.
 
  고교 시절이 마감됐어도 하길종은 여전히 우상이었다. 그의 사상은 물론 형태성도 닮고 싶었다. 하길종은 한국외대-美 UCLA대를 거쳤다. 최민식 또한 그 코스를 거치고 싶었다. 그러나 실력이 달려 한국외대에의 진학은 포기한다.
 
  연극영화과로 진학키로 맘먹었다. 고3때 극단 「뿌리」 연구단원으로 들어갔다. 연극영화과는 실기 성적의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극단 「뿌리」의 연구단원은 3개월 코스였다. 수강료가 13만7000원이나 됐다. 수강료 구하기가 막막했다. 그런데, 동국대 미대에 다니는 형(찬식)이 팔방으로 뛰어 돈을 마련해 줬다. 지금 專業화가인 형은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의 후원자다』
 
  극단 「뿌리」의 무대─손튼 와일더의 「우리 읍내」에서 주인공 조지 役을 맡았다. 연기가 괜찮았던지 선생 배규빈(現 목사)은 민식에게 아예 극단 단원으로 눌러 앉으라고 했다. 그러나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는 게 당장 급했다.
 
 
  안민수 교수와의 만남
 
 
  이듬해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합격한다. 경쟁률 13.7대 1. 연극영화과에는 안민수(연극 교육학·서울예대 총장), 유현목(영화 감독) 등 내로라 하는 교수들이 있었다.
 
  연극영화과는 1학년 때도 연극 한 편씩은 출연토록 했다. 민식은 테드 모젤의 「즉흥극」에 출연한다. 극중 연출가役을 했다. 이 연극을 지켜 본 안민수는 대뜸 민식에게 말했다.
 
  『야, 너 차라리 배우를 해라. 좋은 감독이 되려면 어차피 배우가 뭔지 알아야 될 거 아냐』
 
  민식의 영화 인생에서 안민수는 큰 그림자였다. 많은 영향을 줬다. 지금도 「안민수 교수와의 만남」은 生에 있어 축복이라고 민식은 생각한다.
 
  민식은 연극 「작은 여우들」, 「내 아들을 위하여」,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에도 출연한다. 고교 때와는 달리 대학에서는 신나게 돌아쳤다. 청춘을 모조리 연극을 위해 소진하고 싶었다.
 
  『대학 시절은 지금도 후회가 없다. 치열하게 보냈다. 미팅 한 번 못 해봤다』
 
  연극은 제 역할만 다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공동작업이다. 무대 세트를 챙기고 조명작업도 도와야 했다. 뿐인가 포스터도 붙이고 때로는 스폰서까지도 잡아야 했다. 그러면서 「총체적 연극 시스템」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하도 무대 세트를 많이 만들어 「배우 안하고, 목수해도 살겠다」는 말도 들었다.
 
  대학 2학년 때 영화진흥공사에서 하길종 감독 서거 2주기 추모 영화 상영이 있었다. 민식은 「영화 감독 이장호의 조카」라고 속여 영화를 봤다. 초청받은 사람 외엔 영화관람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바보들의 행진」, 「화분」, 「한네의 승천」 등이었다. 민식은 이때 집을 나가고 싶었다. 별 까닭이 없었다. 아버지와 담판을 했다.
 
  『아버지, 독립하고 싶습니다. 등록금만 대 주십시오. 나머지 생활비는 제가 벌어서 쓰겠습니다』
 
  『좋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가야병원 뒤쪽 다세대 주택에 방을 얻었다. 한 번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친구들이 집에 연락하자고 했으나 말렸다.
 
  『야, 늬들 돈좀 모아 내 입원비나 마련해 다오』
 
  물론 입원비는 친구들이 주선해 줬다. 연극영화과는 최민식의 체질에 딱 맞았다.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장학금도 탔다. 아르바이트로 그럭저럭 생활비를 벌었다. 앙케이트 요원도 하고 식당에서 서빙도 했다. 공사판에도 기웃댔다. 그러나 힘만 들고 돈이 안 됐다. 몇 대학의 연극 연출을 맡아 거금 20만원을 벌기도 했다. 빈집에 황소 들어온 것이었다.
 
  그런 때는 장충동의 허름한 술집에서 객기를 부렸다. 동료, 후배들에게 술을 한껏 샀다. 그러고도 보름치 생활비는 너끈했다. 집에는 도통 가질 않았다. 다만 부모 생신 때 축하 전화는 잊지 않았다.
 
  입대할 때는 집에 갔다. 아버지는 너무 늙어 있었다. 눈물이 났다. 방배동 전세금 450만원을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내놓았다. 그건 아버지가 건네 준 돈이었다.
 
  입대까지는 얼마간 날짜가 있었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실험극장(대표 김동훈) 입단을 위한 오디션을 봤다. 통과했다. 연극 「에쿠우스」의 알런役을 맡아 한참 연습 중에 입대 영장이 나왔다. 스물 일곱에 제대. 집에 얼마간 눌러 있었다. 이때쯤 아버지는 민식의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했다. 대학에 복학해서는 실험극장에 적을 뒀다. 극단 무대와 학교 무대를 부지런히 올라 다녔다.
 
  동국대 소극장에서 4년 간을 살다시피 했다. 아예 칫솔, 치약 등 세면도구를 가져다 뒀다.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지냈다. 동국대 소극장. 150석 규모. 바닥은 삐걱삐걱 소리가 날 만큼 낡았다. 그래서 허문다는 말까지 돌고 있다.
 
  『동국대 소극장은 한국 연극의 산실이다. 그만큼 역사성이 있다. 낡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걸 허문다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최민식의 전공과목 성적은 A 플러스였다.
 
 
  벼락스타 뒤 인기 추락
 
 
  대학 졸업. 스물 아홉. 실험극장에서 김아라(연극 연출가)씨가 「에쿠우스」를 무대에 올린다고 했다. 김아라는 극단 「무천」을 조직 중이었다. 이때 김아라가 에쿠우스의 알런役을 제의해 왔다.
 
  『열일곱 살짜리 소년役을 소화하기엔 내 나이로는 무리입니다』
 
  『괜찮아요. 충분히 해낼 수 있어요』
 
  하긴 얼마나 맡고 싶었던 알런役인가.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알런役을 해 볼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한여름 6, 7, 8월을 내리, 잠자는 시간만 빼곤 연습에 매달렸다. 체중이 7~8kg이나 빠졌다. 상대역(다이사트 박사)은 탤런트 신구였다. 9월에 무대에 올랐다. 호평이었다.
 
  마침 이 연극을 드라마 작가 나연숙이 봤다. KBS 담당 PD에게 나연숙은 귀띔했다.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 쿠숑 역을 맡을 배우를 찾았다. 「에쿠우스」에서 알런 役을 맡은 친군데, 최민식이라고 하더라』
 
  최민식은, 낙하산 출신 탤런트가 된다. 「야망의 세월」의 쿠숑 역으로. 「야망의 세월」은 1990년 초부터 1년 간 방영됐다. 주말 드라마로 시청률 45%였다. 현대건설의 신화적 인물 이명박을 다룬 것이었다. 여기에 정인숙 사건까지 보태졌다는 풍문이 돌며 시청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최민식은 벼락 스타가 된다. 연극 「에쿠우스」 출연료는 한 달 개런티가 50만원이었다. 연습기간 3개월 간은 한푼의 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TV에선 상상도 못할 거금을 안겨 주는 게 아닌가. 눈이 돌았다. 월 몇백만원을 만졌다. 쏟아지는 돈을 주체하기도 어려웠다. 허파에 살살 바람이 들었다. 여기다 TV광고까지 붙어 월수입은 600~700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자가용도 샀다. 내친 김에 결혼까지 했다. 주위에선 악평이 돌았다.
 
  솔직히 민식은 결혼해서까지도 궁핍하게 살고 싶진 않았다. 더구나 남의 집 귀한 딸을 고생시키고 싶진 않았다. 「야망의 세월」 이후 역시 나연숙 극본의 「정든 님」에 출연했다. 그러나 「날마다 장날」은 아니었다. 시청률이 올라갈 줄 몰랐다. 쿠숑으로 한껏 주가를 올린, 민식을 두고 동네사람들부터 소곤댔다.
 
  『왜, 요즘은 TV에 안 나와요?』
 
  할 말이 없었다. 「정든 님」은 악몽이었다. 인기는 곧장 추락했다. 날이면 날마다 들어오던 인터뷰도 딱 끊어졌다.
 
  「유명 스타」에서 하루아침에 「무명 스타」로 전락했다. 이대로 인생 망가지는 구나 싶어 술만 펐다. 괜히 짜증만 났다.
 
 
  「서울의 달」에서 한석규와 재회
 
 
  그후에도 단막극 「일월」 등 몇 개의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인기는 부활되지 않았다.
 
  연극이나 영화대본은 몇 달을 두고 차근차근히 그 배역을 소화할 시간이 있다. 그러나 TV 드라마 대본은 그럴 여유가 없다. 대본과 인사하기가 바쁘게 바로 출연해야 한다. 민식은 TV 드라마의 경우 「정신없이 바빴다」는 기억뿐이다.
 
  1994년 KBS TV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춘섭」役의 최민식은 「지옥에서의 한 철」을 청산하게 한다. 인기는 요술방망이다. 또 다시 민식은 인기스타로 부활했다. 시골청년을 실제 시골청년보다 더 순박하고 촌티나게 연기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1년 후배 한석규와 함께 출연했다. 한석규는 최민식보다 두 살 아래다. KBS 성우를 거쳐 MBC-TV의 공채로 탤런트가 됐다. 둘은 졸업 후 「서울의 달」에서 처음 만난다. 둘은 다짐한다.
 
  『우리, 크게 한번 사고치자』
 
  「서울의 달」의 시청률은 「야망의 세월」에 버금갔다. 그러나 이때 민식은 좋다고 길길이 뛰진 않았다. 인기의 거품 속성을 이미 안 까닭이다.
 
  한석규는 최민식을 선배로 깍듯이 대접한다. 동국대 연극영화과의 위계질서는 해병대를 연상케 한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期數(기수)별 군기(?)는 대단하다. 나이 어린 선배라도 「선배 대우」는 제대로 해야 한다. 「몽둥이질」은 전통(?)이다』
 
  드라마 「서울의 달」 이후 두서너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시청률은 저조했다. 또 다시 슬럼프에 빠졌다.
 
  1996년 MBC-TV 드라마 「그들의 포옹」에 출연한다. 최민식은 전직 형사役. 심부름센터 소장을 하면서도 형사 근성을 못 버린다. 한 번은 버스 정류장에서 소매치기를 발견하곤 쫓아간다. 이 장면을 촬영하다 보도 블록에 발이 끼여 아킬레스腱이 끊어진다. 모두들 이젠 배우생활은 끝이라고 했다.
 
  그러나 드라마는 목발을 짚고 출연했다. 대본 일부가 수정되긴 했으나 주인공이어서 중도하차하기는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사고까지 겹쳐 허벅지까지 깁스를 해야만 했다. 이때 아내와 이혼한다. 위자료로 全재산을 줬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소형 아파트로 옮긴다. 무위도식한다. 깁스한 다리를 끌고도 저녁만 되면 술을 마셨다. 일쑤 친구들에게 업혀 돌아오는 세월이 반복됐다. 다행히 영동 세브란스병원 한대용 박사의 치료로 불구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배우로서 부활하기가 쉽지 않았다.
 
  『경제적·정신적으로 모두 힘들었다. 그렇다고 그 나이에 부모님께 손벌리기는 더욱 싫었다. 당초 아버지가 그렇게 반대했던 배우가 아닌가. 제대로 아들 구실을 못했다는 게 맘에 걸렸다. 매일 술에 절지 않으면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었다. 술 먹고 친구들에게 「꼬장」도 많이 부렸다. 전봇대를 이마로 들이받기도 했다』
 
  그러나 주위 친구들이나 친지들은 그런 민식을 따뜻하게 대했다. 박권수 화백(51)은 술에 취해 별 짓을 다하는 민식을 잘도 다독거렸다. 그러나 잡초는 밟아도, 밟아도 자란다.
 
 
  갈비뼈에 금이 가다
 
 
  1999년 강재규 감독의 「쉬리」에 북한 특수 8군단 대대장 박무영役을 맡는다. 안티 히어로의 강렬한 이미지를 살린다.
 
  『북한 공작원 출신 귀순자 안명진씨에게서 고증을 받았다. 죄수들을 훈련도구로 삼아 목을 치는 북한 침투원의 잔학상도 그를 통해 알았다』
 
  영화 「은행나무 침대」로 이미 성가를 올린 강재규는 「쉬리」를 만들며 할리우드 영화를 한번 깨보자고 했다.
 
  민식은 서울 보라매 공원 내에 있는 서울 액션스쿨에서 하루 6시간씩 45일 간 무술을 익혔다. 민식은 살 빼는 게 급선무였다. 「살찐 특수부대 요원」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식 외에 한석규 송강호 등 남자 배우들은 물론 김윤진 등 여자배우들까지 군대의 유격훈련과 진배 없는 훈련을 받았다.
 
  체육관 내에서 기초 낙법훈련부터 시작했다. 훈련 중 김윤진은 이빨이 부러졌다. 민식도 갈비뼈에 금이 갔다. 골반도 틀어졌다. 그런데도 무술감독 정두홍은 무자비(?)했다.
 
  한 번은 민식이 담배를 피우다 걸렸다. 훈련 중엔 일체 담배를 피울 수가 없었다. 오리걸음으로 체육관을 두 바퀴 도는 체벌을 받았다. 두 번째 담배를 피우다 정두홍에게 또 걸렸다.
 
  『담뱃불, 끄세요!』
 
  『무슨, 난리 났냐? 담배나 피면서 슬슬 하자』
 
  『끄십시오!』
 
  『한 대 피고 하자니까』
 
  그러나 군대의 전형적인 유격훈련 조교조의 건조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말 안 들으면, 살 못 뺍니다』
 
  이번에도 또 오리걸음을 했다. 최민식이 낙법훈련을 하는데 가슴에 심한 통증이 왔다. 숨을 못 쉴 정도였다. 정두홍에게 사정했다.
 
  『좀, 봐 주라. 장난이 아니다. 가슴의 통증이 너무 심하다』
 
  『난, 허파가 터져 입에서 피가 나도 훈련을 계속했습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정두홍의 멱살을 잡았다.
 
  『장난이 아니란 말야. 기침하면 숨이 끊어질 것 같다니까』
 
  『안 죽으니까, 그대로 훈련하세요. 내가 책임집니다』
 
  이튿날 병원에 갔다. 검진 결과 민식의 갈비뼈엔 가느다란 금이 가 있다는 것이었다. 정두홍에게, 이번에 막말이 나갔다.
 
  『야, 갈빗대가 금이 갔단 말이야, 개새끼야』
 
  정두홍은 민식의 네 살 아래 후배다. 그런데도 훈련할 때 완전 「안면 몰수」였다. 정두홍은 그제서야 큰 선심 쓰듯 민식의 가슴에 파스를 한 장 붙여 주며 말했다.
 
  『갈비뼈 금간 것 정도는 금방 저절로 메워집니다. 뼈 안에서 본드가 나와 뼈끼리 붙게 돼 있습니다. 괜찮으니 빨리 뛰십시오』
 
  민식은 진통제를 먹어가며 뛰었다. 정두홍의 말대로 얼마 후, 갈비뼈는 완쾌돼 있었다. 80kg의 몸무게를 68kg으로 줄일 수 있었다. 전투 장면 촬영은 實戰 이상이었다. 혹독한 훈련이 없었다면, 상당수의 배우들이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촬영이 끝난 후 최민식은 정두홍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뛰는 게 습관이 됐다. 요즘도 짬만 나면 일산 호수공원을 돈다. 5.5km 정도다. 전날 아무리 술을 많이 먹었어도 뛴다. 술독이 빠진다. 난 헬스클럽 체질은 아니다. 러닝머신에서 뛰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다. 조깅이 끝나면 약수터에서 평행봉에도 오른다』
 
 
  영화 「오원 장승업」에 영화인생을 건다
 
 
  1999년 정지우 감독의 영화 「헤피 엔드」에 출연한다. IMF 외환위기가 배경. 실직家長 역할을 맡았다.
 
  「헤피 엔드」는 은행원이었던 家長의 실직으로 시작된다. 家長이 집에서 설거지하고 아이도 봐준다. 이때 학원강사인 아내는 옛 애인을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진다. 家長은 아내를 살해한다. 이 영화는 사회 분위기를 타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그럼에도 살해하는 장면이 세인들의 입질에 오르내렸다.
 
  『너무 잔인하다. 남성 우월주의 시각에서 만든 영화다. 권선징악의 구태의연한 구도다. 여자가 바람을 피우면 죽는다는 도식은 너무 단선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직 家長의 사실적 묘사로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을 얻어낸다.
 
  최민식은 요즘 임권택 감독의 영화 「오원 장승업」의, 장승업役을 맡아 그 준비에 부산하다. 아직 시나리오도 받지 못했다. 장승업役을 위해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화실에서 동양화를 배우고 있다.
 
  임권택 감독(68), 정일성 촬영감독(72)같은 巨匠(거장)과 같이 하는 작업은 벌써부터 그를 겁먹게 만든다.
 
  『데뷔 때만큼 긴장하고 있다. 종합검진을 받으러 가는 기분이다. 名醫(명의)는 환자의 얼굴 빛깔만으로도, 환자의 말 몇 마디로도, 병을 찾아내는 게 아닌가. 내 자신을 철저하게 까발려서 진단을 받고 싶다. 새로 태어나고 싶다』
 
  임권택은 벌써부터 말한다.
 
  『장승업을 연기하면서 연기를 만들려 하지 마라. 빈 화선지처럼 맘부터 비워라』
 
  「오원 장승업」은 도올 김용옥이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그래서 도올에게도 자문을 구한다.
 
  최민식. 40을 앞두고 점차 마음을 비우고 싶다. 돈 되는 영화, 장사되는 영화만 쫓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다.
 
  자기 인생도 표현하기가 벅차다. 남의 인생의 표현은 더욱 벅차다. 그 일은 아무도 도와 주지 못한다. 혼자 할 수 있을 뿐이다. 배우는 사람을 연구하는 직업이다.
 
  『난, 배우다. 엔터테이너가 아니다. 배우는 무당이다. 神이 씌어야만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다. 장승업의, 예술혼의 실체화가 나의 몫이다. 그러려면 나도 神이 씌어야만 한다』
 
 
  박수 칠 때 떠나고 싶다
 
 
  그는 1999년에 재혼했다. 여덟 살 아래의 아내 김활란은 후배의 소개로 만났다. 아직 아이는 없다.
 
  잡기도 없다. 영화 말고는 도대체 취미가 없다. 굳이 꼽으라면 술 마시는 게 취미의 전부다. 주량이라야 소주 한 병이지만 술 마시는, 그 분위기가 얼마나 근사한가. 골프는 치지 않는다. 등산은 가끔 한다.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배우는 그 시대의 얼굴이다」라고. 나도 한때 비뚤어진 생각을 했다. TV에 출연하면서 인기에 영합하려 했고 한탕주의를 생각했다.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인생은 누구나 끝이 뻔히 보인다. 그걸 모르고 들뜨기만 하면 곤란하다. 뭐든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
 
  최민식은 탤런트나 배우들이 TV의 토크 쇼 등에서 사회자가 「울어 보라」거나 「웃어 보라」는 즉흥연기의 요구에 응하는 게 정말 못마땅하다.
 
  연기는 즉흥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수많은 시간을 그 인물에 절고, 미친 듯 연습한 후에라야 그 인물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휘자 정명훈이 토크쇼에서 사회자가 즉흥 지휘를 해보라고 하면 하겠는가 라는 것이다.
 
  영화배우 최민식. 그동안 서울연극제 연기대상(택시드리벌), 아태영화제 남우주연상(해피 엔드)을 비롯, 백상예술대상 남우주연상, 대종상 남우주연상(쉬리) 등을 받았다. 연극 「햄릿」 「박수 칠 때 떠나라」 등에도 출연했다. 「택시 드리벌」에선 연극의 진수를 맛보기도 했다.
 
  최민식은 연극이나 영화 출연 후 「무대 뒤가 보인다」 「땀이 보인다」는 말을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모두 엄청나게 연습량이 많았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최민식의 남동생, 광일(32)도 연극배우다. 최민식이 이미 연기했던 「에쿠우스」의 알런役으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까지 받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반대했던 딴따라를, 동생까지 뒤를 잇고 있는 것이다.
 
  『연극 「박수칠 때 떠나라」의 제목처럼, 언젠가 내가 떠나야 할 때, 미련 없이 떠날 것이다. 그것이 무대가 됐든, 인생이 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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