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로고
2000년 10월호

[특집] 다시 모인 6·25 참전 소대장들이 조국에 남기는 마지막 말

『우리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思想戰의 소대장이 되겠다』

배경 없는 사람들의 모임
  『「6·25 참전 소대장 모임」이라… 이름 좋다!』
 
  그러자 옆에 있던 노인이 대꾸했다.
 
  『좋긴 뭐가 좋아? 「배경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지난 7월25일 아침 7시 전쟁기념관 전우회관에서 열린 「6·25 참전 소대장 모임」의 「月刊朝鮮 趙甲濟(조갑제) 편집장 초청 朝餐(조찬)강연」에 참석한 노인들의 대화이다.
 
  이날 모임을 마련하는 데 앞장선 육사8기 회장 張東雲(장동운·73·예비역 육군준장·前 원호처장)씨는 모임의 취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남북 頂上회담이 있은 후 마치 통일이 目前에 있는 양 서울에 人共旗(인공기)가 내걸리고, 親北세력들은 공공연히 헌법상의 영토조항과 국가보안법 개정,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우리 老兵들도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6·25 참전 소대장 모임」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날 모임에는 388명이 참석했다.
 
  8월1일 한일관에서는 「6·25 참전 소대장 모임」의 활동방향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이 열렸다. 이날 모인 20여 명의 6·25 참전 소대장 출신들을 보면 육군사관학교 8기·9기·10기·생도2기, 護國軍(호국군)사관학교, 육군종합학교, 甲種간부후보생, 現地任官(현지임관), 해병간부후보생 등으로 다양했다.
 
  鄭泰植(정태식·73·육사8기·예비역 육군 준장)씨는 『서로 출신이 다른 6·25 참전 소대장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 자리에 모인 6·25 참전 소대장들은 저마다 남북 頂上회담 이후 안보의식이 解弛(해이)해져 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6·25 당시 피 흘려 나라를 지킨 소대장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 「6·25 참전 소대장 모임」을 조직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으나 金學浩(김학호·육군종합학교 11기·예비역 육군소장)씨 등의 주장에 따라 당분간은 남북관계전문가들의 초빙강연 등을 통해 변화하는 정세를 「공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8월29일 「6·25참전 소대장모임」은 재향군인회관 강당에서 鄭鎔碩(정용석·63·단국대) 교수 초청 강연을 가졌다.
 
  鄭교수의 강연이 끝난 후 「6·25 참전 소대장 모임」의 향방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미전향 장기수 北送 등에 자극받은 일부 참전 소대장들은 이 자리에서 조직화를 서두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6·25 참전소대장들 가운데 일부(540명)만이 참석한 자리에서 조직화를 논의할 수는 없다』는 반론도 나왔다.
 
  결국 모임을 주도해 온 張東雲 육사8기회장을 임시의장으로 추대하고, 육사 각 期別·출신別 모임의 회장을 운영위원으로 하여 「6·25 참전 소대장 모임」의 활동과 조직화 문제 등을 논의키로 했다. 이어 金學浩 陸綜(육군종합학교) 전우회장의 선창으로 남북회담시 相互主義 원칙 고수, 국군포로 송환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6·25 참전 소대장
 
 
  기자는 「6·25 참전 소대장들이 후세와 조국에 남기는 마지막 유언」을 듣기 위해 지난 8월 한달 동안 50명의 6·25 참전 소대장들을 만났다. 가장 나이가 적은 사람이 68세, 대부분 이제는 70代 초·중반의 노인들이었지만, 어깨가 꼿꼿하고 걸음걸이에 절도가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6·25 전쟁은 바로 우리가 치러 냈다」는 자부심과 함께, 6·15 남북 頂上회담 이후 당장이라도 통일이 될 듯이 들떠 돌아가는 분위기에 대한 경계, 남북화해의 先行 조건으로 6·25 남침 및 숱한 對南테러에 대한 북한의 사과요구, 북한억류 국군포로의 송환요구, 6·25 참전군인에 대한 예우가 미흡한 데 대한 서운함, 反美감정 및 주한미군 철수론에 대한 우려 등이 담겨 있었다.
 
  이야기가 너무 한쪽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아 기자는 비교적 일찍 군복을 벗고 사회로 진출한 사람이 많은 甲種간부후보생 출신이나 육군종합학교 출신들에게는 특별히 『비단 안보나 남북관계뿐 아니라, 전역 후 활동해 오신 분야를 중심으로 평소 생각하시던 바를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군복을 벗은 지 20년이 지났건, 40년이 지났건 우리는 여전히 「6·25 참전 소대장」들이다. 우리의 관심이 안보나 남북관계일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6·25 당시 소대장들을 일컬어 흔히 「소모품 소위」,「하루살이 소위」라고 한다. 1950년 현지임관 장교들의 모임인 「50동우회」에서 펴낸 「국군의 뿌리-창군·참전용사들」에 의하면 1950년 7월 한 달 동안의 소대장 손실률은 60%를 넘었다고 한다. 1개 중대에 소·중위계급의 소대장은 1∼2명뿐인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의 소대는 선임하사관 심지어 고참병이 소대장을 대리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이다. 이 당시 소대장들은 3일 내지 7일을 넘기기가 어려웠고, 한 달이면 오래 살았다고 했으며, 3개월이 넘어서면 환갑을 지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소대장들의 희생이 이처럼 컸던 이유에 대해 尹興禎(윤흥정·74·육사8기·예비역 육군중장·前 체신부 장관)씨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앞으로 총알이 날아 오는데 앞으로 나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병사들이 앞으로 나서 싸우게 하려면 그들에게 「나는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게 해 주어야 한다. 그 믿음을 주는 것이 소대장이 할 일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소대장이 선두로 뛰어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소대장들의 희생이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북괴군은 특등사수들을 일선부대에 배치, 국군 소대장만 전문적으로 저격하도록 했기 때문에 소대장들의 희생은 더욱 컸다.
 
  그러나 6·25 전쟁의 주역이었고, 숱한 희생을 치렀던 참전 소대장의 總數(총수), 전사자, 現 생존자 등에 관해 따로 나와 있는 통계는 없다. 陸士 각 期別 모임이나 출신별 모임에 의하면 대개 6·25 전쟁 중 배출 인원의 30∼40%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전투병과에만 한정할 경우 전사자 비율이 50% 가까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 죽었다 8期, 언제 죽나 9期』
 
 
  육사8기하면 흔히 「5·16 군사혁명의 주체」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들 대부분은 6·25 開戰 초기 각 부대의 先任소대장이었고, 대대장으로 휴전을 맞이한 「6·25 전쟁의 주역」이었다. 육사8기회가 「6·25 참전 소대장 모임」 활동에 적극적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육군사관학교 50년사」에 의하면 8기생 임관인원은 總 1263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육사8기생회에서 펴낸 「노병들의 증언」에 의하면 8기생 임관자수는 特科출신들을 포함, 1345명으로 되어 있다).
 
  4·3 제주폭동, 麗順반란, 38線상에서의 무력충돌 등으로 군사력증강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초급장교들을 확충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인원을 선발했던 것이다.
 
  이 가운데 6·25 전쟁 중 425명이 전사·실종되었다. 全 동기생의 3분의 1이 희생된 것이다. 6·25 당시 8기생들은 『소위는 소모품』이라는 말을 바꿔 『8기생은 소모품』이라고 자조했다고 한다. 현재 생존자는 473명이다.
 
  8기 출신 저명인사들로는 李熺性(이희성·예비역 육군대장·前 육군참모총장), 尹興禎(윤흥정·예비역 육군중장·前 체신부 장관), 李在田(이재전·예비역 육군중장·前 대통령 경호실 차장), 全成珏(전성각·예비역 육군중장·前 수도경비사령관), 姜昌成(강창성·예비역 육군소장·現 국회의원), 金宗鎬(김종호·예비역 육군소장·前 건설부 장관), 尹必鏞(윤필용·예비역 육군소장·前 수도경비사령관), 吳致成(오치성·예비역 육군준장·前 내무부 장관)씨 등이 있다.
 
  8기생들과 비슷한 무렵 소대장을 맡았던 9기생들의 희생도 컸다. 총 698명의 임관자 가운데 190명이 전사했다. 보병의 경우 349명 가운데 135명이 전사했다. 6·25 초기 軍 내부에서는 『또 죽었다 8기생, 언제 죽나 9기생』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260여 명 정도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尹誠敏(윤성민·예비역 육군대장·前 국방부 장관), 文洪球(문홍구·예비역 육군중장·前 합참본부장), 鄭炳宙(정병주·예비역 육군소장·前 특전사령관·작고)씨 등이 육사9기 출신이다.
 
  육사9기생들은 지난 8월30일, 얼마 전 언론사 사장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다녀 온 송병준(74·육사9기생 회장) 세계일보사장을 초청, 북한 방문담을 들었다. 여기서도 최근의 남북한 정세에 대한 노병들의 관심을 읽을 수 있었다. 宋사장은 『남북화해분위기에 편승해서 대한민국의 기본이념이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등의 말도 했지만, 주로 평양 시내의 주체사상탑·인민문화궁전, 묘향산 국제친선관, 백두산 등을 둘러 본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야기가 기행담 쪽으로 흘러 가자 참석자들의 얼굴에는 답답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해병간부 1기생 32명도 육사9기생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9·28 서울 수복 때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린 朴正謨(박정모·예비역 해병대령)씨, 李丙文(이병문·예비역 해병대장·前 해병대 사령관), 金然翔(김연상·예비역 해병중장·前 해병대 사령관)씨 등이 해병간부 1기생이다. 육사9기생들과 해병간부 1기생들은 육군과 해병이라는 차이를 떠나 두터운 전우애를 자랑하고 있다.
 
 
  반창고 계급장-10期
 
 
  <『국가가 1년간이라는 修學연한을 통해서 베풀어 주신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간이 의식을 통한 임관식이라 할지라도 국가와 민족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불행스럽게도 우리 1기생 생도 중 134명만이 이렇게 영광스럽고 뜻깊은 자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지 못하고 입원 중인 20명과 전사했거나 敵치하에서 우리들의 진격만을 고대하고 있을 …』
 
  답사가 끝나기도 전에 식장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통곡 소리 때문에 몇 차례 중단된 답사가 끝나자, 생도 2기생들은 반창고를 찢어 선배들의 철모에 붙였다. 이른바 「반창고 계급장」을 단 것이다 (張昌國 著 「陸士졸업생」)>
 
  이상은 1950년 7월10일 오전 대전시내 충남도청 광장에서 있었던 육사10기의 임관식 장면이다.
 
  이들은 당초 2년간 교육을 받을 예정으로 1949년 7월15일 육사에 입교했었다. 입교 후 修學연한이 1년으로 단축되기는 했지만, 修學기간이 짧게는 45일, 길어야 6개월 정도에 불과했던 선배 기수들에 비하면 파격적으로 긴 교육기간이었다. 「사관생도」라는 호칭이 쓰이기 시작한 것도 육사10기부터였다(이전에는 「사관후보생」이라는 말이 쓰였다. 이 때문에 육사 10기를 생도1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육군사관학교가 4년제 정규육사로 발전해 가는 징검다리였던 셈이다.
 
  6·25가 발발한 것은 이들이 졸업을 20여 일 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戰況(전황)이 급박해지자 蔡秉德(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사관생도들로 생도대대를 편성, 포천지구 전투 등에 투입하도록 지시했다. 육군본부 작전국장 張昌國(장창국·예비역 육군대장·前 합참의장) 대령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패전으로 치닫고 있던 일본 군부도 생도들을 전선에 투입하지는 않았다』며 재고를 요청했지만, 묵살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개전 초기 포천전투, 태릉전투, 수원전투 등에서 육사10기생 65명이 생도 신분으로 전사했다(여기에는 서울 함락 후 불암산에 남아 유격전을 전개하다 전사한 10명의 생도가 포함된다). 6·25 전쟁 기간 중의 10기생 전사·실종자는 모두 132명이다. 10기생의 2분의 1이 희생된 것이다. 현재 생존자는 99명이라고 한다.
 
  10기생 출신 저명인사로는 黃永時(황영시·예비역 육군대장·前 육군참모총장), 金潤鎬(김윤호·예비역 육군대장·前 합참의장), 梁昶植(양창식·예비역 육군준장·前 국회의원)씨 등이 있다.
 
 
  잊혀진 생도2期
 
 
  초라한 임관식이나마 치르고 「반창고 계급장」을 달 수 있었던 육사10기는 그나마 행복한 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의 뒤를 이어 「첫 정규 4년제 사관생도」의 꿈을 안고 1950년 6월1일 입교했던 333명의 생도2期는 아예 그 존재 자체가 잊혀져버렸기 때문이다.
 
  6·25 발발로 육사10기생들과 함께 전선에 투입된 생도2기생들이 총을 쏘아 본 것은 6월23, 24일 이틀 동안 零點(영점)사격훈련을 받으면서 쏘아 본 5∼6발이 전부였다. 생도2기생 가운데 86명이 생도신분으로 전사했다.
 
  金龍成(김용성·70·예비역 육군대령)은 『입교한 지 25일밖에 안 된 우리들을 전선에 투입해야 할 정도로 전황이 급박했던 것은 6·25가 남침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생도2기의 悲運(비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50년 7월8일 육군사관학교가 임시 휴교되면서 생도2기생들은 1950년 8월15일 만들어진 육군종합학교에 편입된 것이다. 일부 생도들이 軍 당국에 항의하였으나, 『전황이 호전되어 육사가 다시 문을 열면 再입교의 기회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대답에 만족해야 했다.
 
  생도2기생들은 대부분 6주간의 교육을 받은 후 육군종합학교 2기로 임관되었다. 그러나 再입교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후일 육사 期數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육사10기와 1952년 1월 입교한 육사11기 사이에서 「잊혀진 期」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金定洙(김정수·70·예비역 육군중령)씨는 생도2기에 대한 軍 당국의 처우에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총 333명의 동기생 가운데 모두 134명의 동기가 전사 또는 실종됐다. 그러나 우리가 육사 졸업생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96년에 이르러서였다. 오랜 탄원 끝에 1996년 생도 신분으로 전사한 86명의 전우들이 명예졸업장과 함께 「故 육군소위」로 추서받은 것이다』
 
  張正烈(장정렬·예비역 육군중장·前 병무청장), 朴普熙(박보희·예비역 육군 중령·現 금강산 국제그룹 회장)씨 등이 생도2기 출신이다. 현재 생존한 생도2기는 199명이라고 한다.
 
 
  최초의 예비역 - 호국군사관학교
 
 
  1948년 11월20일 공포된 「국군조직법」에 의하면 「육군은 정규군과 호국군으로 조직한다」고 되어 있었다. 호국군이란 평소 생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 軍에 소집되는 일종의 예비군을 말한다. 호국군의 취지에 공감한 지역유지나 고령의 軍경력자들이 호국군사관학교에 많이 지원했다고 한다.
 
  당시 국방부는 10개 여단, 30개 연대, 10만명의 호국군을 양성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마련하고, 1949년 1월7일 4개 호국군 여단을 창설했다. 이 호국군의 지휘관들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호국군사관학교였다. 호국군 사관학교는 1949년 4월10일에서 같은 해 8월8일까지 4기에 걸쳐 1080명을 배출했다.
 
  그러나 대한청년단장을 지낸 申性模(신성모)씨가 국방부 장관으로 부임하면서 호국군은 발족한 지 7개월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대한청년단을 무장시켜 향토방위임무에 종사하게 하는 것으로 호국군을 대신하게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해체 당시 호국군은 당초 목표의 절반인 5개 여단 5만명의 병력을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崔宗琯(최종관·75·예비역 육군대령) 호국군 사관학교 총동창회장은 『일부 정치인들의 그릇된 판단으로 「10만 養兵」이 무산되었다』고 안타까워하면서, 『호국군이 건재했더라면 6·25 초기 병력동원이 보다 잘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6·25 당시 예비병력 자원을 호국군 지휘계통을 통해 관리할 수 있었다면, 청년단 출신 모리배들인 金潤根 등에 의한 국민방위군 사건 같은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호국군이 해산된 후 호국군 장교들은 이후 세 차례에 걸쳐 640명이 현역으로 편입되었다. 이들 가운데 93명이 전사하고, 32명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호국군」의 존재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軍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생소한 데 비해, 호국군사관학교 출신자들 가운데는 6·25 전쟁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들이 적지 않다. 북진 당시 평양 입성을 놓고 선두 다툼을 벌인 제1사단 15연대 3대대 수색중대장 朴柱(박한주·예비역 육군소령) 소위와 제7사단 8연대 3대대 9중대장인 金好圭(김호규·예비역 육군중령) 소위가 공교롭게도 모두 호국군 사관학교 출신이다.
 
  호국군 사관학교 출신 저명인사로는 朴魯榮(박노영·예비역 육군대장·前 한미연합司 부사령관), 鄭雄(정웅·예비역 육군소장·광주사태 당시 제31사단장·前 국회의원)씨가 있다. 1·21 사태 당시 제1사단 15연대장으로 전사한 故 李益洙(이익수·준장 추서) 대령도 호국군 사관학교 출신이다.
 
 
  육군종합학교와 갑종장교
 
 
  육군종합학교 전우회에서 펴낸 「실록-6·25 한국전쟁과 육군종합학교」에 의하면 1950년 8월 중순경 전투에 투입 중이던 5개 사단과 再編 5개 사단, 신설 2개 사단이 필요로 하는 소·중위의 수는 2500여 명에 달했으나, 실제 활용 가능한 소·중위는 67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렇게 심각한 초급장교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육군종합학교이다. 6·25 발발 직후 육군사관학교 등이 문을 닫은 후 軍 당국은 1950년 8월15일 부산 동래에 기존의 육군보병학교를 중심으로 軍 교육기관들을 통합한 戰時사관학교인 「육군보병학교」를 만들었다(이 戰時사관학교의 명칭은 이후 육군諸兵학교,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다시 육군보병학교로 환원되었다).
 
  육군종합학교의 교육기간을 보면 제1기에서 3기까지는 6주간에 불과했으나, 나중에는 18주까지 늘어났다.
 
  육군종합학교는 개교 이래 10개월 동안 7004명의 소위를 배출(해병 290명 포함)했는데, 이는 이 기간 중 육군 소대장 소요인원의 67.4%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 가운데 1377명이 전사(해병 30명 포함)했다. 현재 생존자는 2810명이다.
 
  육군종합학교는 대장 1명, 중장 4명을 포함하여 127명의 장성을 배출, 軍발전에 이바지했다.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중반부터 일찍 사회에 진출한 사람들은 각계각층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종합학교 출신 가운데 국회의원 15명, 장·차관 13명, 대학총·학장 23명, 대학교수 52명, 판·검사 4명이 배출되었다.
 
  육군종합학교 출신 저명인사로는 李洛善(이낙선·예비역 육군 대령·前 상공부 장관), 具滋春(구자춘·예비역 육군 대령·前 내무부 장관), 朴鐘圭(박종규·예비역 육군대령·前 청와대 경호실장), 權寧珏(권영각·예비역 육군중장·前 건설부 장관), 張泰玩(장태완·예비역 육군소장·現 국회의원)씨 등이 있다. 張致赫(장치혁·예비역 육군중위·前 고합그룹 회장), 金東璿(김동선·예비역 육군대위·前 한국외국어대 총장), 陸東蒼(육동창·예비역 육군준장·現 (주)서전사장)씨 등은 육군종합학교 출신으로 사회에 나가 활발한 활동을 벌인 이들이다. 1·21 사태 때 전사한 崔圭植 종로경찰서장도 육군종합학교 출신(31기·예비역 육군소령)이다.
 
  육군종합학교가 1951년 9월30일 제32기를 끝으로 문을 닫은 후 육군 초급장교 양성제도로 기능한 것이 甲種간부후보생 제도이다.
 
  甲種간부후보생 제도가 생긴 것은 1950년 1월이었다. 6·25 동란이 발발하자 당시 교육 중이던 갑종 1·2期도 생도 1·2期처럼 임관도 하기 전에 전선에 투입되어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후 육군종합학교가 존속하던 10개월 동안 잠시 명맥이 끊어졌던 갑종 간부후보생 제도는 1951년 4월29일 제3기 갑종 간부후보생들을 모집함으로써 부활하게 되었다.
 
  전쟁 중 갑종 간부후보생들의 교육기간은 24주였다. 갑종 간부후보생들의 교육기간이 이렇게 늘어난 것은 戰況이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軍 당국이 불과 6주간의 단기교육으로 소대원들의 생사를 책임져야 하는 초급장교를 양성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인식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 갑종1기(1950년 7월15일 임관)부터 49기(1953년 7월18일)까지 1만507명이 6·25에 참전하였는데, 특히 이들 가운데 976명이 전사, 순직 또는 실종되었다. 현재 생존 인원은 5043명이다.
 
  갑종 장교 출신으로는 吳滋福(오자복·예비역 육군대장·前 국방부 장관), 鄭鎬根(정호근·예비역 육군대장·前 합참의장)씨가 軍의 頂上에까지 올랐다. 尹德炳(윤덕병) 한국야쿠르트 회장, 원로 鳥類학자 元炳午(원병오) 경희대 명예교수, 영화제작자 郭貞煥(곽정환·現 서울 시네마타운 대표)씨 등은 사회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갑종 장교 출신이다. 1971년 KAL기 납북미수사건 당시 승객들을 구하고 죽은 全明世(전명세) 기장도 갑종 장교 출신이다.
 
  아무리 단기간의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육군종합학교나 갑종 간부후보생 과정을 거쳐 소대장 요원들이 충원되기까지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들이 전선에 투입되기까지 소대장 요원으로 전쟁을 이끌어 나간 것이 現地任官 장교들이다.
 
  육군본부는 1950년 8월29일 「육군보충장교令」을 만들어 하사관(일등상사·특무상사)·準사관(준위) 들을 소위로 현지임관시켰다. 이들은 대부분 국방경비대 이래 軍에 복무하면서 공비토벌 작전이나 옹진지구 전투 등에 종사해 온 덕분에 실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朴鍾禹(박종우·72·예비역 육군대령)씨는 『6·25 개전 초기 2개월 동안 아군이 적에게 밀리는 상황 속에서도 국군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전투경험이 있는 고참 하사관들을 중심으로 병사들이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 고참 하사관들이 나중에 현지임관 장교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朴씨의 말에서 보듯 현지임관 장교들은 『6·25 초기 2개월 동안의 전투는 우리들이 다 치른 셈』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이들 현지임관 장교들은 대부분 국방경비대 시절 사병으로 입대한 사람들이다보니 여러 가지 재미있는 기록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예컨대 「最多數 진급자」라는 말이 있다. 가장 많은 진급을 경험했다는 뜻이다. 이등병에서부터 육군 소장에 이르기까지 17계급을 진급한 崔甲錫(최갑석·71·예비역 육군소장·前 2군 부사령관)씨 등이 이에 해당한다.
 
  「全身分 생활자」라는 말도 있다. 兵·하사관·장교의 신분을 모두 경험하였다는 뜻이다. 이들은 군번도 兵·하사관·장교의 3개를 갖고 있다.
 
  1950년부터 1953년 사이에 배출된 현지임관 장교는 모두 4935명. 이들 가운데 1020명이 전사 또는 실종됐다. 현지임관출신 장성 진급자는 모두 18명이다(소장 11명, 준장 7명).
 
 
  建國·護國·近代化
 
 
  1945년 광복 이래 우리의 현대사는 좌익세력과 대결하며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자유를 수호하고, 근대화를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유지할 물질적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이었다.
 
  6·25 참전 소대장들은 그 중심에 있었던 세력이었다. 安泰甲(안태갑·74·육사8기·예비역 육군준장)씨는 자신의 일생을,『정부 수립 이전에는 청년운동을 하면서 우리 정부를 만드는 데 미력이나마 이바지했고, 6·25 때는 피흘려 나라를 지켰다. 그리고 5·16 군사혁명 이후에는 조국 근대화에서 일익을 담당했다』고 정리한다. 6·25 참전 소대장들의 대부분은 건국·호국·근대화 과정 가운데 적어도 뒤의 두 과정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일부 정치인·지식인들은 5·16 군사혁명에 참가한 군인들을 일러 「정치군인」이라고 규정짓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들 일부 「정치군인」들과 순수 「야전군인」들을 구별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기자는 6·25 참전 소대장들을 만나보면서 이러한 구분이 얼마나 관념적인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5·16 군사혁명의 주체 가운데 하나인 吳致成(오치성·74·예비역 육군준장)씨는 6·25 당시 다부동 전투에서 입은 파편상으로 아직도 몸에 30여 개의 포탄 파편이 박혀 있다고 한다. 1950년 8월 중학 5학년 때 학도병으로 지원했던 裵慶州(배경주·69·갑종21기·예비역 육군대위)씨가 꼽은 입대동기들 가운데는 具滋春(구자춘)·李洛善(이낙선)씨 등 5·16 주체들의 이름이 보인다.
 
  『5·16 직전 나라는 가난하고,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자칫하면 6·25 때 우리가 피흘려 지킨 조국이 가만히 앉아서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유서 쓰고 혁명을 일으켰다』는 吳致成씨의 말처럼 5·16 주체들에게 있어 군사혁명과 근대화는 6·25 참전 경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물론 6·25 참전 소대장들이 모두 5·16을 지지한 세력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李一平씨는 5·16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가 예편된 경우이다).
 
  이들 5·16 군사혁명의 주체들이 소대장으로, 혹은 학도병으로 전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후일 제 3·4공화국 시절 이들과 對蹠點(대척점)에 서게 되는 金泳三·金大中씨 등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전선 복무를 免脫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5·16 이후 요직에 앉아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6·25 참전 소대장들은 전역 이후 크고 작은 기업체의 임직원·교수·교사·공무원·언론인 등으로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 기자와 만난 6·25 참전 소대장들의 입에서는 『우리가 나라를 이만큼 키워 놓았는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곤 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자부심을 바탕으로 그들은 오늘의 현실에 대한 걱정과 노여움을 거침없이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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