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 졸업 후 된장공장에 취직
나의 이름은 정옥경이에요.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구요. 저는 1972년도에 함경남도 신포시에서 출생했어요. 출생할 당시 아빠는 신포수산 사업소에서 운전사로 일하셨고, 엄마는 유치원 선생을 하였댔어요. 제가 태어나 신포시 인민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것은 1989년도예요. 이때까지만 하여도 북한에 식량난이 들지 않았으므로 사는 것이 괜찮았어요. 괜찮다는 것이 지금의 중국처럼 쌀밥이나, 사탕 과자를 먹으며 산 것이 아니라 옥수수 70%에 쌀 30%를 넣은 밥을 하루 세 끼 먹을 수 있었거든요. 중학교를 졸업한 후 내가 취직한 곳은 신포시의 장공장이었어요.
장공장은 된장, 간장, 옥수수 기름을 생산하는 곳이었지요.
신포시에서는 먹고 사는 데 보탬을 줄 수 있는 직업이어서 시세가 대단한 직업이었지요. 수산사업소 후방과 과장을 하는 아빠가 시 노동과장한테 예물(뇌물)을 먹여서 들어가게 된 거예요.나는 된장 작업반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일은 깨끗하지 못하였어요.
옥수수로 곰팡이를 피워가지고 발효시켜 된장을 만드는 곳에서 위생복을 입고 일한다 하지만, 곰팡이 냄새와 시큼한 된장 냄새는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곤 하였어요. 옥수수가 항상 부족하다 보니 대신 도토리로 된장을 만들곤 하였는데 옥수수보다 장맛이 쓰고 냄새가 역했어요.
복도로 걸어다니던 고무장화를 신고 된장 탱크 속에 들어가 삽을 휘두를 때면 저 된장을 어찌 먹나 생각할 정도로 위생상으로는 깨끗하지 못하였어요.
옥수수로 만든 된장은 주로 市(시) 안의 관료들이 공급받아 먹었고, 도토리 된장은 일반 주민들이 공급받아 먹었지요. 이런 속에서도 우리 장공장 직원들은 한 달에 옥수수 된장 5㎏과 기름 1㎏을 공급받아 생활에 아주 큰 보탬을 하였지요. 말하자면 다른 일반 주민들은 먹지 못하는 좋은 된장에 기름까지 받아서 급식하니 식생활에서는 상층이라 불렸지요.
그때 북한에서는 먹는 食用油(식용유)를 일반 가정에서 소비할 형편이 못되었어요. 기름값도 아주 비쌌구요. 그래서 우리는 탄 옥수수 기름을 가지고 在日(재일) 동포들이나 중국 국적 화교들과 거래하여 옷도 좋은 것으로 바꾸어 입고 다녔어요. 이런 직업을 가진 나는 아주 생활에 만족했고, 신포시에서는 어깨가 올라가 눈을 쳐들고 다니는 부류에 속했다 자부했지요.
그때가 나의 생활에서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들이에요.
그러던 것이 내가 스물세 살 되던 해인 1994년부터는 뜻밖의 식량 기근이 들이닥쳤어요. 옥수수로 된장을 조금씩 만들어 市 안의 간부들이나 우리 직원들이 먹던 것은 아예 중단되었지요. 도토리도 모두 주민들의 식량으로 대신했기에 장공장은 원료가 없어 생산을 중지했어요.
아빠가 경제범으로 감옥에 가다
옥수수 기름 생산은 더 말할 것도 없구요. 주민들은 하루 세 끼를 때우기 위한 생존에 결사적으로 달라붙었어요. 하루 세 끼 밥이 아니라 옥수수 가루를 넣은 풀죽을 마련하기 위해서지요. 아이, 어른, 늙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배낭을 메고 산과 들로 풀 뜯으러 달려나가곤 하였지요. 신포시 앞바다에서 뜯어낸 미역이나 바다 풀들은 식량 보탬이 아주 컸어요. 그러나 가까운 바다의 것은 다 뜯어내어 그 원천은 고갈이 되었어요.
당국의 선전은 이 시기가 지나가면 쌀밥에 고깃국을 먹일 작전을 북한 노동당에서 구상하고 펼친다는 것이었어요.
사람들은 무리로 굶어 죽어가고, 거지들만 신포시 바닥을 이리저리 휩쓸고 다니게 되었지요. 식량 난리통에 노인들이 제일 많이 죽구요. 먹지 못하여도 젊은이들은 그럭저럭 지냈지만 노인들은 여기저기서 맥 없이 푹푹 쓰러졌어요. 우리 가정은 아빠가 후방과에 근무하면서 요행 「부정축재」한 것이 큰 효과를 내 굶어죽지도 않고 버티어 낼 수 있었어요.
내가 가동 못하는 장공장에 출근하지 않아도 어머니가 집에서 놀아도 1996년도까지는 먹을 것이 있었거든요. 언니는 함경남도 축구선수단에 들어가 공을 찼으니까, 체육단에서는 먹을 것을 주어 근심이 없었어요.
그러던 1996년 말에 우리 아빠가 덜컥 「경제범」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사연은 우리 집에 옥수수 1백㎏과 50㎏을 몰래 들고 온 것이었지요. 아빠는 5년 징역형을 받고 함흥시 감옥에 들어갔어요.
市 안전부에서 와 집의 식량을 말끔히 걷어간 집안은 폐허 같았어요.
우리 母女는 뜻밖의 벼락에 너무 황당해 서로 마주 바라볼 뿐 어쩔 바를 몰라했어요. 그후부터 우리 가정은 모진 식량 타격 앞에 쩔쩔 매게 되었어요.
옥수수죽이나 밥이 풀죽이나 풀범벅으로 바뀌고, 나와 엄마는 매일 먹을 것을 구하러 뛰어다니게 되었어요. 그런 속에서 아빠 생각에 속머리를 썩이던 엄마가 덜컥 정신 이상이 되었어요. 처음에는 헛소리를 하며 아빠를 부르던 엄마는 점차 심해져 별의별 흉내를 다 내었어요.
할 수 없이 나와 언니는 엄마를 신포시, 풍어동골 안에 있는 정신병자 49호 병원으로 모셔다 입원시켰어요. 거의 1년이 되어도 엄마 병은 도저히 나을 줄 몰랐어요. 그 기간 나와 언니는 풀뿌리도 캐고, 소나무 껍질도 벗겨 굶음을 면하느라 숱한 고생을 하였지요. 어떤 때는 언니가 집에서 송기떡이나 두부를 만들고 내가 신포시 장마당에 나가 팔곤 하였어요.
이때 신포시에서는 흉한 소문이 돌았어요. 중국 장사꾼과 짜고 한 남자가, 스무 살 나는 딸을 데리고 사는 아줌마의 집에 들어와 돈 3천원을 꺼내 놓으며 딸과 하룻밤 자고 가겠다고 했대요. 뜻밖의 돈에 탐이 난 아줌마가 자기 딸과 함께 그 남자를 재웠대요. 그런데 그 남자는 실컷 자고 난 뒤, 약으로 딸을 질식시키고 주사기로 피를 몽땅 뽑아갔다는 것이었어요.
몸을 판 언니 이야기
이 소문이 신포시 안에 퍼져 두 청년이, 거리에 나도는 두 어린아이의 피를 뽑아 사이다병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들킨 사실까지 있었어요.
1997년도는 정말 우리 두 자매가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살아간 해였고, 별 짓을 다 해본 나날들이었어요. 나보다 두 살 위인 스물여덟 살 된 언니는 살자고, 신포시에 온 외지 물고기 장사꾼 남자들을 상대하기 시작했어요.
신포수산 사업소에서 나는 명태, 멸치, 까나리, 오징어 같은 것을 가지러 오는 외지 장사꾼 남자들은 거개가 다 돈이나 식량을 가져와 며칠 이상씩 머물곤 하였지요. 장마당에서 두부를 팔던 언니는 그중의 어느 한 장사꾼 남자와 눈이 맞아 집으로 데려왔어요.
서른여섯 살인 이 남자는 황해북도 수안군 郡黨(군당)위원회 경리과장을 하는 사람인데 사과 20t을 싣고 물고기로 바꾸러 온 남자였어요.
내가 장마당에서 두부를 팔고 들어오니 언니가 웬 남자와 마주앉아 있더군요. 부엌에는 사과 한 꾸러미가 있었고, 금방 잡은 듯한 청어 열댓 마리가 놓여 있었어요. 눈이 휘둥그레지는 나에게 언니는 눈을 꿈쩍하더니 나를 바깥으로 끌고 나왔어요.
『옥경아, 너 오늘밤 순희네 집에 가서 좀 자거라. 큰 벌이가 생겨서 그래, 알 만하지』
나는 며칠 전부터 잠자리에 누워 언니가 입버릇처럼 외우던 「치맛바람」 이야기가 생각나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피해주었어요. 밤에 남의 집에서 자자니 잠이 잘 오지 않고, 언니 소식이 궁금해 집에 와서 몰래 커튼을 쳐놓은 틈 사이로 들여다 보았어요.
밤 11시가 지났는데도 언니와 그 남자는 팬티만 입고 서로 안았다 입 맞췄다 하며 야단이더군요. 못볼 것을 본 듯 나는 황급히 창문에서 눈길을 떼고 순희네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어요. 다음날 제집을 놔두고 또 남의 집에 가서 잘 수 없게 된 나여서 집에 갔더니 언니는 그냥 집에서 자라고 하였어요.
나무 미닫이문을 한 집이어서 이날 저녁에도 어디 잠을 잘 수 있겠어요.
저녁이 되어 찾아온 남자는 큰 문어 한 마리를 들고 와, 생회를 쳐서 술을 받침하여, 우리 셋은 술상을 마주하고 이날 저녁은 잘 먹었어요.
저녁을 물린 후 조금 있다가 윗방으로 올라간 언니와 그 남자는 서로 꼬집는 내기를 하는지 밤새 키득거렸어요. 두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는 잠이 오기는커녕 정신만 더욱 더 말똥말똥해져 윗방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어요.
윗방 불이 꺼지자 이제껏 살면서 들어보지 못하던 언니의 애교스러운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남자의 거친숨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리더군요.
흐느낌 같은 소리와 살 때리는 소리가 엇바꾸어 들려오니, 나는 난생 처음 심한 아랫배 아픔과 강한 성욕을 느껴 안절부절할 수 없었어요.
이렇게 근 며칠간 언니와 좋아하던 남자는 물고기를 싣고 돌아가며, 우리 집에 송어 열 마리 정도와 청어 30마리 정도를 내놓았어요.
그야말로 우리는 횡재를 하게 되었지요. 그때 나는 언니 보기가 민망스러웠지만 또다른 한켠으로 정말 우리 언니는 「수단가」로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 되었지요. 이 재산이 우리 가정의 밑천이 되어 우리는 석 달 동안 남들처럼 맨 풀죽을 먹지 않게 되었고, 며칠에 한 번씩 옥수수 국수도 먹게 되었어요.
하지만 이 일로 우리 가정은 말썽 많은 아낙네들로 인해 「바람쟁이 집안」으로 소문 나고, 우리 자매는 「바람쟁이 간나들」로 낙인 찍히게 되었어요. 그러나 죽은 목숨이 산 개보다 못하다고 이 세월에 별로 개의치는 않았어요. 나는 오히려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언니를 떳떳이 위로했거든요.
그후 어느 날 앞집 할머니가 찾아왔어요. 할머니는 함경북도 무산군 읍농장 창고장을 하는 자기 조카가 몇 달 전에 집에 왔다가 나를 보고 욕심나서 꼭 소개해 달라며 지금 계속 독촉중이라는 것이었어요.
소박한 결혼식
언니도 시집을 안 갔는데 내가 무슨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고 펄쩍 뛰었으나 언니는 신중한 표정을 지었어요. 며칠 있다가 또 집에 조카가 오니 맞선을 보자는 할머니의 제의에 언니는, 그 남자가 농장 창고장을 하면서 먹고 사는 생활이 괜찮다는 데 무척 흥미가 동했던가 봐요. 저녁 잠자리에 누워 언니는 남자가 괜찮다면 너를 시집 보낼 생각이라며 자기 속마음을 터놓았어요.
『우리 가정이 이렇게 언제까지 살며, 또 나나 너도 시집갈 나이를 넘기면 홀애비밖에 차례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나는 감옥에 들어간 아빠가 나올 때까지 시집갈 생각이 전혀 없고, 언니가 시집을 가기 전에는 거꾸로 내가 먼저 갈 생각이 없다고 단호히 우겨댔어요. 하지만 언니는 며칠 후 도착한 그 할머니 조카를 우리 집에 끌고와 끝내 나와 맞선을 보게 하였어요.
그 남자를 보니 체격이 우람하고 든든한 게 별로 싫지 않더군요. 또 지금 세월에 옥수수가 왕이라고, 옥수수깨나 다룰 농촌 창고장 총각한테 시집가는 것이 아주 바람직하다는 속타산도 있구요.
하여 겉으로는 『싫다, 싫다』 하면서도 우격다짐으로 내미는 언니의 결혼 승낙에 마지못해 움직이는 체하면서, 급작스러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어요.
지금의 북한 실정에 남자의 부모님들이 멀리에서 오기도 불편하고, 경제형편도 허락되지 않는 조건에 우리는 할머니 쪽과 합의해 「앉은 잔치」를 벌였지요.
장소는 우리 집으로 정하고 할머니와 언니가 정성껏 만든 쌀떡 한 사발, 물고기 두 접시, 술 두 병, 국수 네 그릇을 마련한 전에 없는 소박한 결혼식이었어요.
결혼식 옷은 전에 엄마가 입던 조선 치마저고리를 언니가 손바느질해 정성껏 다듬은 것을 입었어요. 전 같으면 온 동네방네 떠들썩하게 벌일 결혼식이었건만, 사람이 뻥뻥 굶어 죽어가는 세월에 이만한 잔치상도 상등이었어요.
결혼식 날 나와 언니는 부모님들 생각에 너무 많이 울어 눈이 팅팅 부었어요. 언니는 신랑과 둘이서 술을 맞잔하여, 술에 푹 취해 마구 가슴을 쥐어 뜯더군요. 할머니는 『동생을 굶지 않을 집안에 보내 이 세월에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가』 하며 언니를 위로해 주었고, 언니도 그것이 제일 큰 힘이 된다고 속을 터놓았어요.
이날은 한 해도 저물어가는 1997년 11월15일이었어요. 머나먼 북방열차에 신혼 살림을 하러 떠나는 우리 일행이 몸을 실을 때 언니는 어디에서 얻어왔는지 새 트렁크를 들고 오르더군요.
무엇인가 묻는 나의 물음에 언니는 얼버무리며 갈아입을 옷이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부모격으로 따라가는 언니는 나와 신랑이 속삭이는 모습을 대견스러운 눈매로 눈물이 글썽해 바라보더군요.
우리 일행이 무산에 도착하여 신랑의 집에 이르니, 시부모님들과 동생 셋이 있는 大(대)가정이었어요. 반갑게 맞아 준 시집의 살림은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 실태에서 아주 괜찮은 축이었지요. 그 이튿날로 결혼식을 차린 시집에서는 옥수수떡 한 소랭이와 국수를 스무 그릇 나마되게 해놓고, 읍 농장당비서와 관리위원장을 비롯한 농장 간부들을 초대해 결혼식을 치렀어요. 최근 북한 형편에서 보기 드문 결혼식이었지요.
집 팔아 만든 결혼 예물
술도 20㎏ 가져와 참가한 열댓명의 손님들이 모두 취해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니, 감옥간 아빠와, 아빠 때문에 병을 얻은 엄마의 모습이 눈앞을 떠나지 않아 눈물 속에 이날을 보낸 나였어요.
결혼식 날 언니는 새 트렁크를 내놓았는데, 거기에는 시부모님들과 시동생들에게 주는 예물들이 들어 있었어요.
예물이래야 속적삼들과 양말류들이었지요.
우리 가정에서 생길 데가 없는 그 예물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어쩔 수 없는 놀라움이 나의 마음을 압박했어요.
정찬 눈매로 나를 바라보는 언니 앞에 고맙다고 해야 할지,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는 다짜고짜로 성을 내며 『언니, 그 물건들이 어디에서 생겼어』 하고 따져물었지요.
나의 따짐에 이리저리 말꼬리를 돌리던 언니는 마침내 사실을 털어놓았어요. 떠나기 전날 우리가 살던 집을 5천원에 팔아버리고 나의 예장함을 마련했던 거예요. 내가 『이제 아빠, 언니는 어디 가서 살겠느냐』며 항의를 하자, 언니는 감옥에 계시는 아빠가 이 사실을 알면 대단히 반가워하실 거라며 산 사람은 다 살게 된다고 나를 위로했어요.
그러며 생활이 좀 괜찮다는 이 집으로 네가 시집 들어가는데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들어서면 깔본다고 했어요. 며칠 동안 묵으며 우리는 국경지역 무산땅에서 매우 놀라운 일들을 전해들었어요.
여기는 중국과의 밀수나, 장사가 아주 흥행하며, 또 중국땅으로 들어가 쌀과 돈을 얻어내오는 주민, 아예 영 들어가 사는 주민들이 많다는 소식이었어요.
함경남도 지역에서는 그저 전해듣던 소식이 여기에서는 현실로 펼쳐지니, 희한하기도 하였고 잘 산다는 중국땅에 대한 부러움이 자라는 걸 어쩔 수 없더군요. 언니는 이런 쪽지를 남기고 사라졌어요.
「옥경아, 언니는 식량과 옷을 얻으러 중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따라 중국으로 넘어갔다 온다. 거기 가서 한두 달 일하면 퍽 많은 식량을 살 돈을 벌고 중국 사람들에게서 멋진 옷가지들도 얻어 내올 수 있다는데, 내 꼭 성공하고 나오겠다. 내 돈 벌어 가지고 오면 아빠가 이제 감옥에서 나오셔서 살 집도 마련하고, 너희 가정살림에도 보탬을 줄 작정이다. 언니, 숙경」
나는 언니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아 가슴이 떨렸고, 시집에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요. 속으로는 의지가지 없는 불쌍한 언니가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런데 어느새 이 사실을 전해들었는지 시집에서도 알고 있었어요. 흔히 있는 일처럼 범상하게 여기더군요.
신랑은 나에게 갈 데 없는 언니가 잘했다며, 지금 시대는 용기 있는 사람은 여기서 누구나 다 중국 걸음을 디딘다는 것이었어요.
창고장 직에서 쫓겨난 남편
그런데 무엇이 엎친 데 덮친다더니, 결혼식을 치른 지 한 달쯤 되는데 신랑이 무슨 읍 농장 창고장 직에서 덜컥 해임되었어요. 원인은 우리가 결혼식을 사회주의 생활양식에 맞게 간소하게 차리지 않고 낭비하였으며, 또 현 북한 식량난에 어울리지 않는 부정 바람을 일으켰다는 것이었지요. 농장원 총회에서 사상투쟁무대에 올라 호된 비판을 받은 신랑은 농장원으로 떨어져 한풀 꺾였어요.
농장 창고에서 옥수수나 비료를 조금씩 들여와 큰 보탬을 하던 「철 밥통」은 깨져 저축했던 옥수수를 조금씩 먹으며 생활하게 되었어요.
나와 신랑은 지금 현 북한 실정에서는 절대로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다는 결론을 가지고, 피임환을 해넣어 훗날의 세상 좋을 때를 기다리기로 하였어요.
두세 달이 지나 차츰차츰 옥수수가 거덜이 나기 시작하자 성미가 급한 시어머니는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어요. 식솔이 많은 가정의 굶주림이 다 내 탓인 듯 욕을 해댔지요. 『○○만 붙여가지고 들어와서 식량을 파먹다니 가정이 망했다』는 쌍욕이었지요. 시에미 역정에 개 배때기 찬다구, 난 그 분풀이를 신랑에게 곧잘 해댔지요. 사람 좋은 신랑은 그때마다 웃음 절반, 한숨 절반 섞어가며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어요.
시집에 식량이 다 떨어지고 온 식솔이 풀과 입씨름하는 봄이 돌아오자, 더 견디기가 참 어려웠어요.
우람한 체격이 먹지 못해 절반으로 줄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신랑은 나에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였어요.
『옥경이, 아무래도 내 중국에 좀 들어갔다가 나와야 되겠소. 우리 가정이 살 길은 이젠 이 길밖에 없는 것 같소』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나의 요구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랑은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만을 남긴 채 며칠 후 두만강을 건너 중국쪽으로 몰래 들어갔어요. 나는 중국쪽으로 들어간 신랑과 언니를 기다리느라, 매일 두만강 너머 중국땅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어요.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 가을이 접어들어도 온다던 신랑과 언니는 돌아올 줄 몰랐어요. 그 기간 혼자서 시부모님들과 시동생들을 먹여살리느라, 내가 뜯은 풀은 아마 두 자동차는 될 거예요.
끝내 굶주림 속에 이해 여름엔 시아버님이 사망하시고 시동생 한 명이 영양실조로 반신 불구가 되었어요. 게다가 노망인지, 투정인지 모를 시어머니 행패질이 극도에 달하였어요. 저년이 우리 집의 희살이고 액맥이라나요.
무슨 제 탓이겠어요. 식량을 공급 안하는 나라 탓, 제도 탓이지요. 나는 이대로 더는 살 수 없었어요. 내 몸도 반쪽이 되어 몸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고, 더는 살아갈 것 같지 못했구요. 나는 죽어도 신랑과 언니가 들어간 중국땅에 가서 죽고 싶었고, 밥 한 그릇이라도 실컷 먹어보며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신랑과 언니를 기다리며 거의 1년간 매일 나가보다시피 한 두만강변의 익숙한 지형을 따라 작년 11월 초순에 脫北(탈북)하였어요.
경비병에게 돈도 내댈 것 없는 나는 날이 푸름푸름 밝아오는 새벽 5시경에 경비인원들이 잠복했다가 철수한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정작 죽기를 각오하니 무서운 것이 없더군요. 혼자서 무작정 두만강에 들어서 중국땅 쪽으로 허겁지겁 강을 건너는 나의 마음은 새 세상을 찾아간다는 보람까지 다 들더라구요.
두만강을 건너서 북한땅 쪽을 바라보니, 숨막히는 그곳에서 왜 여태까지 살아왔는지 의문이 되구요. 그곳에서 바라본 북한땅은 집집마다에서 아침 연기가 겨우겨우 솟아오르는 게 마지막 가쁜 숨을 쉬는 늙은 할망구의 모습 같았어요.
실패한 脫北
정작 중국땅에 들어서고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머리 속에 얼핏 무산 쪽에서 두만강 건너 중국땅을 바라볼 때 어슴푸레하게 보이던 중국 마을이 생각났어요. 어림짐작하고 도로를 따라 그 마을 쪽으로 정신없이 걷는데 두 명의 중국 변방대 군인이 나타났어요. 그들은 나를 보자 뭐라고 중국말로 외쳐대는데 서라는 소리 같았어요.
심장도 함께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아 선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붙잡히게 되었지요. 이들은 조선말로 사정하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변방대 병실로 끌고 가더니 덜컥 족쇄를 채워 구류장 안에 가두어 넣더군요.
조금 있더니 조선말을 하는 한 중국 군관이 나를 불러내 넘어온 경위를 물었어요. 나의 말을 들으며 종이에 부지런히 무엇인가 적어넣던 군관은 가버리고 한 군인이 김이 풀풀 나는 밀가루빵 다섯 개를 들여왔어요. 나는 그 빵을 너무 배고팠던 김에 게눈 감추듯 다 먹어버렸어요.
아침 9시쯤 되자 나를 불러내더니 군용트럭에 태운 후 중국 거리를 지나고 지나 어디론가 싣고 갔어요. 조선말과 중국말로 정문에 쓴 글씨를 보니 「용정현 공안국」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뜻밖에도 구류장 안에는 같은 북한 여자들 여섯 명이 잡혀 있더군요.
모두 며칠 안에 잡혀온 여자들이었는데 쉰 살 먹은 아줌마와 어린아이를 업은 아줌마 외 네 명은 20~30세 전후 나이 여자들이었어요. 네 살짜리 아이를 업은 아줌마는 중국땅에서 여섯 달 동안 체류해 있었고 나머지는 두세 달 동안 연변지구에 있다가 적발되어 붙잡힌 여자들이래요. 무서움에 벌벌 떠는 나를 보고 여자들은 『앞일을 생각하면 주름살만 간다』며 일없다고 위로해 주었어요.
모두 속에는 근심의 재를 쌓아가련만, 애써 감추고 쾌활한 표정들이었어요.
노골적으로 하는 말이 세상 사는 구경을 해보고, 못먹어본 것을 실컷 먹어보았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들의 말을 들으니 나는 넘어오자마자 잡힌 내가 한스러웠고, 희한하다는 중국 구경도 못해본 것이 안쓰러웠어요. 구류장 안에서 여자들은 오락회를 하자더군요.
그러면서 구류장 복도에 있는 공안경찰을 보고, 먹을 걸 좀 달라고 요구했어요. 조선족인 그 경찰은 나이가 중년쯤 되었는데 측은한 표정으로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여자들은 마구 말했어요.
『우리 이제 넘어가면 죽을지 모르는데, 여기서 마지막으로 실컷 노래라도 좀 부르자요』
『우린 가면 쌀도 없고 집도 없어요. 기다리는 건 매질과 감옥생활이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웃어보자요』
중국 구류장에 울려퍼진 「소양강 처녀」
경찰은 쓰다 달다 말 없이 가만 있더니 나가버렸어요. 때가 왔다는 듯 여자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순간 옆방에서 和答(화답)하듯 남자들이 웅글진 목소리로 같이 부르기 시작했어요. 놀라워하는 나에게 한 여자가 같은 북조선 사람들이라 귀띔해 주더군요.
그런데 그 노래들이 몹시 귀에 설었어요. 전부 한국 노래라는 것이었지요. 유행가 곡조 같은 게 은은하여 정말 듣기가 좋더군요.
후에 안 일이지만 「소양강 처녀」 「눈물 젖은 두만강」 「꿈에 본 내 고향」 같은 노래들이었어요. 한국 노래를 부를 줄 모르는 내가 잠자코 있자 이들은 나에게도 한 곡조 하라고 자꾸 청하여 제가 북조선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 절반도 부르지 못했는데 한 여자가 『북조선 노래는 시시해, 너무 딱딱한 게 강연제강 읽는 것 같애』라고 하여 더 부르지 못했어요.
노래 부르는 여자들은 모두 눈물을 줄줄 흘렸어요. 옆방의 남자들도 목이 멘 소리로 노래 부르는 게 들려왔어요. 나라 없는 설움, 잘못 만난 제도의 백성이라는 恨(한)이 가슴에 사무쳤던가 봐요. 조금 있어 구류장 지키는 경찰이 무엇인가 비닐자루를 한 개 복도로 질질 끌고 들어왔어요.
경찰은 자루 안에서 갖가지 빵과 사탕, 과자를 꺼내서는 여자 감방과 남자 감방에 절반씩 들이밀더군요.
『다시는 이런 걸 못먹어 보겠는데 실컷 먹소』
말하는 경찰도 속은 안좋은 것이 확연했어요.
받아들 때 좋다고 떠들어대던 여자들이 정작 음식들을 앞에 놓자 심각해졌어요. 모두 고향을 생각하는지, 처형받을 앞날을 생각하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더니 통곡하기 시작했어요. 여자들이 통곡하자 옆방의 남자들도 따라 통곡하니 감방 안은 울음바다가 되었지요.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살아야 해요』
『밥만 먹여주면 미쳤다고 우리가 제 나라를 떠났겠소』
『산 목숨이 어찌 앉아 죽기를 기다리겠소. 다 살자고 하는 노릇인데 반동으로 되어버렸으니 이게 뭐요』
통곡하는 우리를 보자 경찰은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훌쩍 나가버렸어요. 옹근 이틀 동안 갇혀 있어보니, 중국 공안측에서는 여자들은 가만히 놔두었는데 남자들은 끌어내다가 전기곤봉 찜질을 하고 마구 때리더군요. 다시 넘어오면 죽여버리겠다는 위협이었지요.
회령시 보위부 감옥
3일 지나 오후 1시경 공안측에서는 우리 모두를 족쇄도 풀어주지 않고 군용 트럭에 앉혀 용정~회령 교두 세관에 호송하여 갔어요.
북조선 세관에는 국가 보위부 일꾼들이 마중나왔더군요. 우리를 보위부 일꾼들에게 넘겨줄 때에야 중국측에서는 족쇄를 풀어주었어요.
모두 16명을 넘겨받은 보위부 일꾼들은 냉기 풍기는 서늘한 눈매로 우리를 바라보았어요. 다섯 명 일꾼들은 그 자리에서 다시 족쇄를 채우며 호령했어요.
『야 이 썅간나 새끼들 빨리 걸어』
세관 다리를 지나 세관에 오니 화물자동차를 몇 명의 군인들이 총을 쥐고 둘러싼 가운데 발길로 우리 엉덩짝, 옆구리를 마구 걷어차며 차에 올려 실었어요. 도착한 곳이 회령시 보위부 감옥이었는데 초만원을 이루었어요.
열 명 정도 들어가 있어야 할 감방에 스무 명도 넘게 빼곡히 가두어 놓았더군요. 감방 안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모두의 잘입은 중국 옷들을 모두 벗겨내고 헌 북조선 옷들을 입혀놓았어요. 「중국 냄새」를 말끔히 벗겨버린다는 것이었어요. 거의 모두가 「脫北 범죄자」들이었는데 내가 갇힌 감방의 어떤 여자들은 중국에 들어가 몇 달 이상 있었더니 아직 석달이 지났는데도 놓아주지 않는다더군요. 모두 무릎을 꿇어 앉히고 벌을 주는 감옥에서는 「감옥 간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감방안 구석에 있는 변소에 가서 대소변을 보자 해도 『선생님 변소 볼 수 있습니까?』라고 승인을 받아야 했어요.
남자들은 거개가 다 중국체류 기한이 두 달을 넘으면 무조건 道(도) 보위부 감옥으로 이송해 버렸어요. 감옥 간수는 남자들이었는데 조폭하기 그지없었어요. 무릎이 저려 앉음새를 달리 해도 끌어내다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귀뺨을 때리고 발길질을 하였어요. 나도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앉음새를 달리했다가 끌려나가 귀뺨 몇개를 불이 번쩍 나게 맞아보았어요.
한 명씩 끌어내다가 심문하였는데 내가 脫北한 날짜와 경위를 그대로 이야기하니 심문기록철에 기록해 놓고 손도장을 누르게 하더군요.
다 심문한 후 어린 남자 두 명이 들어와 가죽 혁띠로 때렸는데 온몸이 다 터지는 것 같았어요.
『이 간나야 왜 갔댔니?』
『썅간나, 또 가겠어?』
심문하던 나이 지긋한 일꾼도 일어나더니 구둣발로 엉덩이며 가슴팍을 사정없이 들이찼어요. 너무 아프고 분한 나머지 비명소리도 나지 않았어요.
실컷 때려 녹초가 된 내가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니 두 명의 남자는 양쪽 팔을 낀 채로 질질 끌어 다시 감방에 처넣었어요.
감방 안에 있는 죄수들은 누구나 다 겪어보는 일이라 동정하는 기미도 없고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어요. 온몸이 아파서 무릎을 꿇어 앉을 수 없게 되자 감옥간수는 감방 호실장에게 시켜 억지로 꿇어앉게 만들었어요.
하루에 한 번씩 별로 할 말도 없이 끌어내다가 때리고는 감방에 다시 처넣는 속에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어요.
식사는 콩껍데기 가루낸 것을 동글동글하게 빚어서 소금알에 묻혀 냈는데 콩알보다 조금 더 큰 알 열댓 개에 소금탄 물 한 공기씩 주었지요. 환약 같았고 음식맛은 쓰고 깔깔한 게 간염 알약 비슷했어요.
장마당에서 만난 사나이
꼭 일주일이 되는 날 또 불러 내가기에 맞을 각오를 하고 나갔더니, 중국에 들어가서 「나쁜 사상」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내보낸다는 것이었어요. 결국 내가 제일 먼저 나오게 되었지요.
참, 함께 끌려온 아이 엄마는 들어오자마자 친척들을 불러 아이를 찾아가게 한 후 다시 가두어 넣었는데 아마 중국체류 기한이 몇 달이 지났기 때문에 감방에 석 달 이상은 있어야 될 것 같았어요. 시큰거리는 허리와 채찍으로 맞아 굴뱀이 쭉쭉 가서 쓰려나는 몸을 끌며 보위부 문앞을 나서니 밖은 언제 구경했던가 싶게 날씨가 차가웠어요. 날짜도 정확히 기억되지 않구요.
다시 시집에 들어가자니 창피스럽고, 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어요. 혹시 신랑이나 언니 소식이 있지 않을까 하여 시집마을 근처에 다가간 나는 한 아이를 시켜, 나와 속마음을 터놓던 반신불수 시동생을 불러냈어요. 다리를 절룩절룩하며 해골 같은 몰골로 겨우 나온 시동생은 나를 보자 어디를 갔댔는가 시뚝해서 물었어요.
내가 어디에 낟알 구하러 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왔다고 변명하며 급히 신랑과 언니 소식을 묻자 아무 소식도 모른다 하더군요.
시동생은 눈물을 떨구며 시어머니가, 이제 형수가 나타나면 당장 그 자리에서 쫓아버리겠다고 벼른다며, 들어와서 어머님을 잘 달래라 하였어요.
시동생을 먼저 들여보내며 이제 곧 들어간다고 말한 나는 감방 안에서 내 꼭 다시 두만강을 건너리라 결심하던 것을 굽히지 않으리라 생각했어요.
또 다음날 새벽까지 어디에 가 견딜지 정말 막막했어요.
배는 고프고 힘이 안 났어요. 먹은 것이 없고 시달린 몸에서 힘이 나올 리 없지요. 생각다 못해 장마당으로 나간 나는 눈앞에 먹을 것이 많았지만 돈이 있어야지요. 눈요기만 하며 두루두루 돌아다니던 나는 중국 옷가지들을 넘겨받아 파는 한 중년 사나이에게 걸려들었어요.
『어이, 처녀 할 일이 없으면 내 일 좀 도와주오, 내 보수는 톡톡히 낼 테요』
나는 바라던 찰나 너무 기뻤어요. 그는 급히 펴놓은 물건들을 정리하고 사놓은 두부, 김치 따위들을 비닐 봉지에 꼭꼭 포장해 놓았어요. 그는 나를 보자 오늘은 장사가 잘 안된다며, 이 물건들을 자기네 집까지 같이 날라줄 수 없는가 물었어요.
그때가 오후 4시쯤이에요.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처녀 배고프지, 우리 집에 가서 내 오늘 한 턱 단단히 낼 테요. 다른 생각 말고 따라오오』 하며 나의 손에 물건 한 보따리를 척 맡겼어요. 마지못해 따라가는 척하는 나였으나 어쩔 수 없는 나의 경황이었지요. 음욕어린 그의 눈을 보고 다른 예감이 들었으나 언제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어요. 그 남자는 장마당에서 두부 두 모를 더 사고, 쌀도 2㎏되게 샀어요. 그걸 보니, 배 안이 꼬르륵하고 힘이 나더군요. 군말 없이 조금 뒤따라가니 그 남자의 집이었어요.
집안에 들어서니 예상했던 대로 아무도 없는 텅빈 집이었지요. 그 남자는 수선을 떨었어요.
『내 마누라가 양강도에 쌀 얻으러 갔는데 한 달 후에나 오겠는지, 근심 마오, 어서 쌀밥을 좀 하오, 처녀 만났길래 내 큰 선심 쓰오, 나도 쌀밥 구경한 지 두 달이 되었소』
나는 제꺽 부엌에서 밥가마에 쌀을 안치고 장작불을 피웠어요. 밥은 곧 되고, 곁따라 두부장국도 끓이니 허기증이 막 도지는 것 같더군요. 나갔다가 또 술 한 병을 들고온 남자는 저도 배가 고팠던지 빨리 먹자고 독촉하였어요.
1㎏ 되는 밥을 큰 남비에 담아놓고 밥상을 마주했던 나는 그때 체면도 없었던가 봐요. 그 남자도 술을 조금 먹는 체하더니 그만두고 정신없이 둘이 달라붙어 냄비 밑굽까지 빡빡 긁어 먹었어요. 밥을 다 먹고 그릇을 가시니 몸은 둥둥 떠다니는 것 같기도 했고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하였어요. 더는 움직이고 싶지 않아 나는 그만 구들에 쓰러졌어요.
무엇이 파고드는 감각에 눈을 겨우 떠보니 글쎄 그 남자가 내 위에 올라타 그 짓을 하고 있더군요. 뿌리칠 용기도, 거절할 생각도 없었지요.
다만 어슴푸레하게 내가 그때 생각했던 것은 「이게 보답이지」 하는 막연한 생각뿐이었어요. 그 다음 그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구요.
나는 죽은 듯이 누워 있었으니까요. 그때부터 자다가 눈을 떠보니 시계가 새벽 1시를 가리켰어요. 오늘 새벽에 脫北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펄쩍 들어 슬그머니 옆에서 자는 그 남자를 곁눈질해 보니 그도 정신 없이 자더군요.
나는 살그머니 일어나 옷을 주워입은 후 밖으로 나왔어요.
이제 집에 들어가 더 있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어요. 괜히 그 남자를 깨워놓았다가 가로막는 날에는 야단이거든요.
살얼음 낀 두만강을 건너다
12월에 접어든 북방의 날씨는 차가워 속 안까지 바람이 스며들었어요. 천천히 脫北했던 전의 그 장소 근방 멀찌감치 간 나는 추위를 막느라 쪼그리고 앉아 지루한 시간을 기다렸어요.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자 두만강둑에 살며시 올라서니 예견했던 대로 보초병들이 없었어요. 나는 급히 걸음을 다그쳐 두만강에 들어섰어요.
물 기슭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 두만강물은 어찌나 차고 시린지 금시 몸이 얼어드는 것 같았지만 언제 그런 걸 느껴볼 여유가 없었어요.
『첨벙, 첨벙』
물소리를 내며 두만강을 단숨에 무사히 건너니 배꼽 높이까지 옷이 흠뻑 젖어 몸이 다 떨리더군요. 나는 전번 일을 경험삼아 큰 길에는 나서지 않고 맞은편 산으로 올라갔어요. 산 위에 올라서서 봐두었던 마을을 짐작으로 찾아가니, 찬 이슬에 옷은 더 흠뻑 젖어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추위도 모르겠더군요.
두 개의 산을 넘어서니 마을이 한눈에 바라보였어요. 살금살금 그 마을 어귀에 다다른 내가 주위를 살펴보니 두 번째 초가집 문을 열고 나이 지긋한 한 아줌마가 나오더군요. 그 아줌마는 마당에 다가간 나를 보고 흠칫 놀랐어요. 나는 『아줌마, 내 북조선 여자인데, 좀 살려줘요』 하고 간절히 애원했어요.
그 아줌마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대문을 열고 급히 나와 젖은 나의 차림새를 보고 대문 안으로 이끌었어요. 금방 넘어오는 중이라는 나의 이야기를 들은 아줌마가 어서 집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어요. 들어서니 50세쯤 돼보이는 주인 남자가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나의 긴 사연 이야기를 들은 이들 부부는 마치 소설을 듣는 것 같다며 한숨 소리를 섞어 말하더군요.
『그놈의 북조선이 왜 그 모양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소. 다른 나라들은 점점 발전하는데 전보다 확실히 못해지니 문제가 단단히 있소… 기가 막힌 세상이 다 있지, 우리도 친척들이 북조선에 많아요. 모두 넘어오라고 연락하재도 어디 연락하겠어요. 뻔히 앉아서 굶어죽는 줄 알면서도 뛰지 않는 게 머저리지, 아가씨는 영웅이오, 영웅!』
『마음만은 신랑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고마운 주인 내외의 도움으로 근 보름 동안 그 집에 머문 나는 수시로 검사하는 변방대와 파출소의 마수를 피해 연변 지구를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주인들은 중국 친척들의 주소를 일일이 적어주고 연계하여 주며 국경 지역을 무사히 벗어나도록 차비도 대주고 동행자도 붙여 주었어요.
정말 잊지 못할 사람들의 도움 속에 올해 양력설 이후부터는 중국 내의 곳곳을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여행이 아니라 삯일을 찾아서, 일자리를 찾아서 말이에요. 또 어디 가나 신랑이나 언니를 혹시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수소문도 해보고, 비슷하다면 찾아도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어요.
북조선보다 몇십 배나 더 큰 중국 땅덩어리에서 신랑이나 언니를 찾는다는 건 바다에서 바늘을 찾아 건지는 격이었지요.
중국을 떠돌아다니며 한 달씩 남의 집 식모일도 해보고 식당일도 해보았는데 어쨌든 굶어죽을 염려가 없으니 북조선보다는 퍽 좋아요. 중국 내 각지에 나처럼 떠돌아 다니는 여자들은 그래도 식모살이 같은 일이 쉽게 주어지고 안착할 수 있지만 脫北 남자들의 경우는 좀 다르지요.
脫北 남자들은 일자리가 있으면 하고 없으면 유랑 생활을 하거나 남의 집 일을 죽도록 해야 되거든요. 물론 많은 여자들이 할 수 없이 마음에 없는 시집살이나 첩 노릇을 하지만 그래도 여자라면 중국 내 어디 가나 환영을 받지요. 우리 脫北者들은 모두 중국말을 잘 몰라 애를 먹고, 마음대로 일할 수 없어 중국 조선족들한테서만 거개가 다 붙어 일을 하는데 정말 이들의 도움이 커요.
나도 식모살이를 하면서 중국 남자들한테 시집가라는 것을 완곡히 반대했지요. 어떤 때는 속임수에 넘어가 남의 집에 끌려도 가지만 몸은 묶어둘 수 없는 거지요. 비록 이국땅에서 몸은 순간순간 왔다갔다할지언정 마음만은 신랑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중국땅에서 새롭게 인식하게 된 한국의 실상에 깜짝 놀라 부러워하는 것은 우리 모든 脫北者들의 마음일 거예요.
부러워할수록 빨리 통일됨을 바라고, 그런 땅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라도 있으니, 한민족으로서 생각만 해도 행복한 것 같아요.
북한땅을 떠나올 때 식량이나 돈을 벌어가지고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은 脫北者들 누구나가 품었던 생각일 거예요. 그런데 그 생각을 여지없이 짓밟아버리는 북한 당국의 처사에 누구도 감히 제 고향땅으로 도로 갈 엄두를 못내지요. 도망쳤던 개나 고양이도 집안에 다시 들어오면 반가이 맞아주는데, 세상의 진리나 인정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마구잡이 북한 당국은 몽둥이로 보이는 족족 내려치지요. 그러니 누가 감히 도로 갈 생각을 하겠어요. 너무나도 내 고향, 내 신랑, 내 언니가 그리워 나는 그동안 번 돈을 차비 삼아, 올해 7월 말에 연변지구를 다녀왔어요.
고기 그물에 걸려드는 북한 사람들
이때에는 넘어오는 脫北者들이 많아, 두만강 連線(연선) 지역에서는 버스를 세워놓고 신분증 검사를 하더군요. 신분증이 없는 나는 요행 그 고비를 넘겨 두만강 지역 마을에 가보았는데 중국이나 북한 쪽 경비가 전보다 배로 심해졌어요.
그 마을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니 자랑거리가 많았어요.
그 자랑거리란, 남자들이 두만강에서 그물을 치고 고기잡이를 보름간 하였는데 글쎄 그물에 북한 사람들 시체가 여덟 구나 걸렸대요.
모두 하는 말이 두만강을 건너다가 물 깊은 곳에 빠져 죽은 사람들이 아니면, 북한 쪽에서 굶어죽은 시체를 관이 없어 묻지 못하고 강물에 던진 것이래요.
그런데 이들이 하는 말이 너무나도 북한 쪽에서 시체가 많이 떠내려와 이제는 응당 시체를 보려 하고, 또 시체를 건져 그 살을 뜯어내 고기잡이 미끼로 쓴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망둥어나 붕어, 버들치 같은 민물고기들이 인차 낚시에 걸린다나요. 한 청년은 북한 쪽에 있는 바위에 여자 시체가 있는 것을 한 달이 지나도 치우지 않아 건너가 보았대요.
눈알은 까마귀가 다 파먹고 없어, 끔찍하게 된 것을 보고 북한 경비병들에게 소리쳤대요.
『넌 왜 이 시체를 치우지 않아, 보기만 해도 메스꺼워 죽겠어』
그 경비병들의 대답이었대요.
『하두 많은 사람이 죽는데 강에 있는 것까지 치우자면 끝이 없어』
사람 죽는 것을 병아리 죽는 것만큼도 여기지 않는 북한 당국의 대답과 같다고, 중국 사람들은 분개하였어요.
제 백성들이 죽어 남의 나라 주민들의 낚시 미끼가 되어도 아예 상관하려 하지 않는 이런 당국을, 주민들은 「위대한 친어버이」라 억지로 받들어 모셔야 하지요. 그 건너편 용정시, 개산툰에는 한국 의료진 봉사대가 와서 이국 동포들까지 무상으로 치료해 주더군요. 하지만 북한 당국은 제나라 안에서도 굶어죽게 만들고, 잠시 식량 구하러 떠난 주민들까지 잡아들여 시체로 만드니 억울하고 원통하기 짝이 없어요.
옹고집을 버리고 생각을 넓게 하면 죽음도 시체도 없고, 쌀도 기름도 다 차려질 텐데 왜 그런지, 백성들을 생각해 부디 「생각을 넓게 하라」고 권고하고 싶어요.
그러면 나도 가고 너도 가, 화목하게 같이 모여 살 거예요.
1999년 8월 중국땅에서. 정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