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주 펑톈에서 중학 재학 중 해방 맞아
⊙ 중국인, 일본 헌병 몸뚱이를 땅에 묻은 후 칼로 쳐 죽여
⊙ 男裝한 일본 여인들, 驛에서 중국인들에게 호떡 사 달라고 애걸
⊙ 소련군, 複線 철도레일 뜯어 가려 피란열차의 화차 강제분리, 이산가족 속출
崔奭信
⊙ 86세. 육군사관학교 졸업(6기). 美육군포병학교, 육군대학, 美합동참모대학·국방산업대학 졸업.
⊙ 제1사단장, 합참 전략기획국장, 한미1집단군단 부군단장, 육군 소장 예편, 주파나마대사,
주노르웨이대사 겸 아이슬란드대사,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역임.
⊙ 중국인, 일본 헌병 몸뚱이를 땅에 묻은 후 칼로 쳐 죽여
⊙ 男裝한 일본 여인들, 驛에서 중국인들에게 호떡 사 달라고 애걸
⊙ 소련군, 複線 철도레일 뜯어 가려 피란열차의 화차 강제분리, 이산가족 속출
崔奭信
⊙ 86세. 육군사관학교 졸업(6기). 美육군포병학교, 육군대학, 美합동참모대학·국방산업대학 졸업.
⊙ 제1사단장, 합참 전략기획국장, 한미1집단군단 부군단장, 육군 소장 예편, 주파나마대사,
주노르웨이대사 겸 아이슬란드대사,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역임.

- 일본이 패망한 후,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소련군의 감시 아래 무장해제를 하고 있다.
그때 내 나이 16살. 만주 펑톈(奉天)제2중학교(4년제. 지금의 중·고등학교 과정) 졸업반이었다. 내가 만주로 건너간 것은 그보다 3년 전인 1942년이었다. 고향은 경북 영일군 기계면이었다. 집안은 원래 고향에서 어느 정도 유지에 속했지만,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생활이 어려워졌다. 그러자 아버지가 먼저 만주행(行)을 택했고, 이어 어머니와 가족들이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펑톈(지금의 선양 인근 카이위안・開原)이라는 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滿洲國’이라는 나라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 일제(日帝)가 1932년 청(淸)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우두머리로 하는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만주국은 분명 일제의 괴뢰국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천지(新天地)’였다. 조선의 가난한 농민들은 만주로 개척이민(開拓移民)을 떠났다. 관리나 군인이 되려고 만주로 건너간 사람도 많았다. 드물기는 하지만, 만주로 진출한 일본회사의 직원으로 만주에 건너간 경우도 있었다. 맨 앞의 농민들을 제외하면 나름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 즉 만주국을 구성하는 일본인, 조선인, 만주인, 한인(漢人), 몽골인이 서로 화합하면서 동양의 이상향(理想鄕)을 만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하지만 만주국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일본인, 조선인, 만주인, 한인, 몽골인이었지, ‘만주국민’은 아니었다. 호적(戶籍)은 있었지만, 국적(國籍)은 없었다. 하긴 만주국으로 건너갔다는 이유에서 이미 일본제국의 국민인 일본인, 조선인들에게 ‘만주국적’을 새로 부여하기도 곤란했을 것이다.
말로는 ‘오족협화’를 내걸었지만, 그중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은 것은 당연히 일본인이었다. 전차(電車) 안에서 나이 어린 여학생들이 초라한 행색의 중국인, 만주인들에게 “더럽다! 저리 가라!”고 호통을 치면, 그들은 자리를 비켜 서야 했다.
만주에서의 조선인은 애매한 입장이었다. 조선에서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입장이었지만,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조선인들은 만주에서는 일본인 다음 가는 자리에 놓이게 됐다. 조선에서는 일본인들에게 멸시받던 조선인들이 만주에서는 현지인들에게 위세를 부렸다. 일본경찰이나 군인이 되어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 중국인(한족), 만주인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식량공급은 민족별로 차등이 있었는데, 조선인 고관들 중에는 일본인과 같은 등급의 공급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인을 보는 현지인들의 눈길은 곱지 못했다.
근로동원으로 중학시절 보내
나는 고향에서 할아버지 보살핌 아래 자라면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면(面)소재지 출신은 중학교 진학이 어려웠다. 기계국민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나는 교장선생님의 추천으로 경북중학교 시험을 치렀다. 구두(口頭)시험을 보는데, 선생님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버지 월급이 얼마냐?”
“34원입니다.”
“그 월급으로 만주에서 가족들 생활하면서, 네 월사금(月謝金)까지 낼 수 있겠냐?”
결국 나는 국내에서 진학하는 것을 포기하고 만주로 건너가, 펑톈 제2중학교에 입학했다. 펑톈 제1중학은 상류층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고, 제2중학은 조선인도 일부 입학할 수 있는 학교였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아버지 친구의 소개로 M부인의 아파트에서 하숙을 하면서 고학(苦學)을 했다. M부인의 남편은 일본군 대위였는데, 전쟁터에 나가고 없었다. 나는 하숙비를 면제받는 조건으로 병약(病弱)한 M부인 곁에서 집안일을 도와주면서 학교에 다녔다.
일제가 계획도시로 건설한 펑톈은 당시 도쿄(東京)보다도 선진화한 도시였다. 2~3층짜리 아파트들이 도처에 있었고, 그 시절에 스팀이 들어왔다. 전시(戰時)였지만, 물자와 식량도 비교적 풍족했다.
‘학교에 다닌다’고 했지만, 제대로 공부를 한 날은 얼마 되지 않았다. 1943년부터는 거의 매일 근로동원을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청·장년층 일본인 남성들은 모두 전쟁터로 동원됐다. 군수(軍需)공장은 물론 민간회사들에도 60이 넘은 노인들 아니면, 여성들만이 남았다. 그러고도 빈자리는 어린 남녀 중학생들이 메웠다. 나도 제과공장, 방독면공장, 무전기공장 등에서 일하다가 해방 무렵에는 한 기계공장에서 사무보조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보다 1~2년 선배들은 소년병(少年兵)으로 끌려갔다. ‘지원’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강제징집이었다. 나도 곧 소년병으로 끌려갈 참이었는데, 일제가 패망(敗亡)하는 바람에 모면할 수 있었다.
일제는 만주에 중화학공업을 건설했는데, 펑톈 인근에도 비행기공장, 제철공장 등이 있었다. 전쟁기간 청두(成都)에서 출격한 미(美) B-29 폭격기들이 펑톈을 폭격했다. 한번은 70여 대의 폭격기가 몰려와 비행기공장을 완전히 박살낸 적도 있었다. 8월 9일에는 소련이 일·소(日蘇)불가침조약을 깨고 만주로 쳐들어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내(社內)에서도 중국 본토 쪽으로 선이 닿는 몇몇 일본인들은 천황의 방송이 있기 며칠 전부터 이미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조선國旗’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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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군을 처음 봤을 때 ‘소련군은 거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진은 1945년 10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
소련군을 처음 보는 순간 든 생각은 ‘소련군은 거지다’라는 것이었다. 탱크에 타거나 걸어오는 보병들을 보면, 병사 한 사람이 둘둘 만 모포 한 장, 소총 한 자루, 빵 한 덩어리, 물통 한 개만을 소지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빵을 깔개나 베개로도 사용했다. 가장 먼저 들어온 소련군 부대는 죄수(罪囚)들로 구성된 부대라는 얘기가 돌았다.
곳곳에서 살육, 약탈, 강간, 폭행이 저질러졌지만, 소련 점령군 당국은 의도적으로 이를 조장하는 것 같았다. 나도 소련군과 중국인들이 일본 헌병, 경찰을 붙잡아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목만 남기고 몸뚱이를 땅에 묻은 후, 칼질을 해서 죽였다. 끔찍했다.
다행히 조선인이 학살당하거나 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지만, 이런 일들을 보면서 비로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국적자였던, 의지할 데라고는 없는 어린 나는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함께 회사에서 일하던 일본 여학생과 여직원들은 내게 일본인 거주구역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회사 창고에 가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입는 흰색 하복(夏服)을 꺼내 입었다. 보릿짚 모자도 구해 썼다. 중국인 노동자처럼 꾸민 나는 M부인의 아파트로 가서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앞날을 걱정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서울로 치면 노량진쯤 되는 곳에 있는 조선인 거주지구로 거처를 옮겼다. 조선인 거주지구라고는 하지만, ‘코리아타운’ 같은 곳은 아니고 중국인 거주지구 내에 조선인들이 약간 살던 곳으로 해방이 되면서 조선인들이 몰려들어 살게 된 곳이었다. 이곳의 조선인은 1000명이 약간 못 되는 것 같았다. 다행히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안면이 있던 조선인 가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잠자리는 따로 없었으나 다행히 여름철이라 실외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수수밥이나 옥수수밥을 얻어먹는 대가로 자위단(自衛團)에 소속되어 곤봉을 들고 주야(晝夜)로 경비를 섰다.
이곳에서 난생 처음으로 ‘조선국기(國旗)’라는 걸 보았다. 그 ‘조선국기’를 ‘태극기’라고 부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국가(愛國歌)’도 처음 들었다. 안익태(安益泰)가 작곡한 지금의 애국가가 아니라, 아일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곡조에 가사를 붙인 ‘애국가’였다. ‘올드 랭 사인’은 일제 때에도 이별가(離別歌)로 많이 부르던 노래여서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다.
공산당, 의용군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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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만주 펑톈역 역전. 펑톈은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도시였다. |
나는 소련군이 조선인은 해치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9월 20일 소련군이 운용하는 군용열차 편으로 펑톈을 떠났다. 입고 있던 흰색 작업복에는 작은 태극기를 부착했다. 이날은 마침 추석날이었다.
카이위안은 펑톈에서 열차로 두 시간밖에 안 걸리는 곳이었다. 혹시 내가 죽기라도 한 것은 아닌가 싶어 노심초사(勞心焦思)하던 부모님은 눈물로 나를 맞았다. 어머니는 내 생사(生死)가 걱정되어 무당을 찾아가 점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무당 얘기가 너는 흰옷을 입고 있으며, 추석날에는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하더구나. 네게는 흰옷이 없어서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하지만 카이위안의 조선인 사회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식모, 머슴, 거지, 창녀, 전과자 같은 하층민 출신들이 자기들 멋대로 치안기관, 행정기관을 장악했다. 그들 뒤에는 공산당이 있었다. 공산당의 조종 아래 유산자, 유식자들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제자들의 도움으로 해를 입지는 않고 있었다.
10월이 되자 공산당은 의용군 모집을 시작했다. 이들이 나중에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에 참가했다가, 중국 공산정권 수립 후에는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되어 남침(南侵)의 선봉이 되었다. 해방 이후 공산당이 저지른 일들이 도저히 생리에 맞지 않았던 나는 의용군 모집에 불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카이위안을 떠난 것은 11월 하순이었다. 기온은 이미 영하 20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교통편이 어떻게 될지, 여정은 며칠이나 될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압록강까지 2000리 길은 소련군이 약탈과 폭행, 살인, 강간을 저지르는 무법(無法)천지였다. 부모님이나 동생들과는 동행할 상황이 못 되었다. 나는 나보다 연상인 마을 청년 두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났다.
당시 창춘(長春·만주국 시절의 신징・新京)과 다롄(大連)을 잇는 남만주철도는 장제스(蔣介石)의 신육군(新六軍)이 장악하고 있었다. 일단 펑톈으로 가서, 전에 하숙하던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잔 후 남만주철도를 이용할 생각으로 펑톈으로 향했다.
약탈하려는 소련군의 총격 받아
펑톈역을 나서는데 소련군 두 명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한 명은 소총, 다른 한 명은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총검을 겨누면서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했다. 내복 속에는 어머니가 챙겨 주신 여비가 숨겨져 있었다. 그걸 빼앗기면 한겨울 만주벌판에서 동사(凍死)할 판이었다. 나는 일행에게 “도망쳐!”라고 외친 후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니, 동작이 굼뜬 일행 두 명은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소련군에게 붙잡혀 버렸다. 권총을 든 소련군이 내게 총을 두 발 쐈다. 총알이 ‘핑, 핑’ 소리를 내면서 귓전을 스쳐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허겁지겁 골목길로 도망쳤다. 그래도 몇 년을 살던 곳이라 지리에 익숙한 것이 다행이었다.
한 시간 뒤, 나는 하숙을 하던 M부인의 아파트로 가서 소리를 질렀다.
“M부인! 같이 살던 고학생 야마요시(山佳・일제시대 때 창씨개명・創氏改名한 내 성・姓)입니다! 살려주세요! 소련군의 총격을 받았습니다!”
내 목소리를 듣고 건물 밖으로 나온 M부인은 불빛 없는 통로를 따라 나를 집으로 안내했다. M부인은 아직도 남편의 생사를 모르는 채로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다. 양식(糧食)도 부족한 상황인데도, M부인은 야밤에 찾아간 나를 위해 정성껏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눈물 나게 고마웠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만주를 탈출해 각자의 고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M부인보다는 그래도 내 처지가 나은 것 같았다. M부인은 내 무사 귀향(歸鄕)을 진심으로 기원해 주었고, 나도 M부인에게 위로의 말을 해 주었다. 내 침구와 책이 그대로 있는, 전에 쓰던 내 방에서 난방도 없이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M부인으로부터 전갈을 받은 옛 직장 동료가 왔다. 일본인인 그는 군대에 갔다가 도망쳐서 그 무렵 중국인 행세를 하면서 숨어 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야마요시 군, 지금 소련군이 일본 남자들을 붙잡아 시베리아에 있는 강제노동 수용소로 끌고 가기 위해 길을 지키고 있으니, 대로(大路)는 피하도록 하시오.”
M부인과 석별의 정을 나누며 헤어졌다. 나는 평생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지금도 그녀를 생각하면 그 은혜를 갚지 못하고 이날에 이른 것이 죄스럽기만 하다.
역 광장의 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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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의 만주철도. 일제가 패망한 후 피란민들은 이런 여객열차가 아니라 무개화차를 타고 남으로 내려왔다. |
펑톈역은 신의주 대안(對岸)에 있는 안둥(安東・지금의 단둥・丹東)으로 가기 위해 북만주에서 내려온 조선인, 만주인 피란민들이 바글거렸다. 그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밤 9시가 되어서야 북에서 기차가 왔다. 하지만 이미 객차 하나에 500명 이상이 타고 있어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나는 객차와 객차 연결부에 몸을 실었다. 지금은 객차 연결부에 장막이 있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었다. 영하 25도의 혹한(酷寒) 속에서 발 하나는 앞 차량, 다른 하나는 뒤 차량에 올려놓고, 난간 철봉을 손으로 잡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달렸을까? 어느 이름 모를 역에서 기차가 멈췄다. 모두 강제로 열차에서 내렸다. 3000여 명은 족히 되는 피란민들이 영하 30도의 날씨 속에, 역 광장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지옥 같은 풍경이 내 앞에 펼쳐졌다. 끙끙 신음을 하면서 얼어 죽어 가는 노인도 봤고, 출산하자마자 숨을 거두는 산모와 아기도 봤다. 중국인들은 피란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아기를 팔라”고 했다. 소련군의 강간을 피하기 위해 삭발을 하거나 남장(男裝)을 한 남루한 행색의 일본여자들은 피란민들에게 호떡이나 모찌떡을 팔았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중국인이나 만주인 남자들을 붙잡고 “제발 하나만 사 달라”고 애걸하는 그들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전에는 전철에서 중국인, 만주인 남자들이 곁에 오면 더럽다며 쫓아 보내던 일본 여자들인데…. 만일 우리나라 여자들이 이런 어려움을 당하면, 저 일본여자들처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부서진 역사(驛舍)에서 목재를 가져다가 불을 피우면서 추운 밤을 지샜다. 아침이 되어 보니 광장 여기저기에 배설물들이 널려 있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얼어붙어서인지 냄새는 나지 않았다. 정오쯤 되자 무개화차(無蓋貨車) 40여 량을 매단 열차가 도착했다. 칸막이도 없이 레일 위에 하부(下部) 판자만 단 화차였다. 이 열차에는 소련군이 몇 명 타고 있었다. 이들은 따발총으로 피란민들을 위협하면서 약탈하려 했다. 하지만 피란민들도 악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3000여 명에 달하는 피란민들이 드세게 저항하자, 소련군들도 어쩔 수 없었다. 피란민들이 화차에 오르자 소련군들은 화차 사이를 뛰어다니며 다시 약탈을 하려 했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산골 驛에 버려져
원래 이 화차는 소련군이 복선(複線)으로 되어 있는 남만주철도의 한쪽 선로(線路)을 철거해 소련으로 보내기 위해 내려온 것이었다. 소련군은 화차가 정차(停車)하는 역마다, 뒤에 있는 화차 1~2량을 떼어내 피란민들을 내리게 하고 화차는 역에 남게 했다. 역에 남은 화차에는 떼어낸 레일을 실었다. 단둥까지 내려가 피란민을 내려놓은 화차는 다시 북으로 올라오면서 레일을 실어 놓은 화차들을 연결해 소련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나는 13년 후 미(美) 합동참모대학에서 대(對)중국전략연구 과정을 밟으면서 중국의 철도실태를 점검했는데, 그때까지도 이 철도는 복선으로 복구되지 못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화차를 역에 떼어 놓고 출발할 때마다 많은 가족이 생이별을 했다. 가족과 다른 화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가족과 떨어진 사실을 알고 자식들 이름을 부르고, ‘아버지’ ‘엄마’를 외치며 통곡했다. 자식들을 뒤에 두고 온 것을 뒤늦게 안 부모들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다.
이러한 광경은 열차가 멈춰 서는 역마다 되풀이됐다. 내가 탄 화차는 후미(後尾) 부분에 속했는데, 불과 세 번째 역에 도착했을 때 앞 차량에서 분리되었다. 이름도 모르는 산골 역에 떨어지게 되니 황당했다. 다음 열차는 언제 올지 모르고, 역에서 밤을 새우다가는 얼어 죽을 수도 있었다.
민박(民泊)을 구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깊은 눈길을 헤매다가 중국인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지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그 집에 가 보니 단칸방이었다. 그들은 “피란민들에게 돈을 받고 방을 빌려준다. 우리는 부엌에서 자면 된다”고 했다. 뭔가 의심스러웠다. 그들 말대로 방에 들어가서 자는 사이에 소지품을 털리거나 죽음을 당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는 해야 했다. 우리 일행은 방에 들어가되 잠은 자지 않기로 했다.
워낙 피곤해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너, 뭐하고 있냐? 어서 떠나야지!”
잠에서 깨어 보니, 주인이 내 동행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인은 “새벽 2시에 기차가 온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기다려도 기차는 오지 않았다. 아마 그 중국인 주인 부부는 우리가 잠을 자지 않자 도둑질을 할 기회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를 그냥 내보낼 작정으로 그런 거짓말을 한 것 같았다.
이후 단둥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일들이 되풀이되었다. 일제 때는 10시간이면 되던 열차 여정이 15일이나 걸렸다.
보따리 짐 지고 압록강 철교 넘어
천신만고 끝에 단둥에 도착해 보니, 압록강 인도교(人道橋)는 소련군이 봉쇄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우연히 신의주를 드나드는 행상(行商)을 만났다. 그는 자기 보따리 짐을 운반해 주면 같이 압록강을 넘게 해 주겠다고 했다. 그를 따라 압록강 인도교에서 북으로 꽤 떨어진 곳에 있는 철교(鐵橋)를 건넜다. 침목(枕木)을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강풍이 내 몸을 때렸다. 무거운 등짐을 지고 있는데도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여린 몸으로 영하 20도의 날씨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철교 침목을 하나하나 밟으면서 어떻게 2km의 철교를 건넜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이 강을 건너야 살 수 있다’는 집념 하나로 강을 건넜을 것이다.
강을 건넌 후, 그 행상의 집에서 닭고기국과 김치, 백반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평생 잊지 못할 식사였다.
오래간 만에 여관에서 하룻밤을 잤다. 만주에서 온 피란민들을 도와준다는 인민위원회(도청)를 찾아갔다. 인민위원회에서 발행한 피란민증명서가 있어야 남으로 가는 열차를 탈 수 있다고 했다. 인민위원회는 피란민들로 붐비고 있었다. 문제는 인민위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층계급에 속했다가 소련군이 들어와 공산주의 체제를 만들면서 하루아침에 발탁된 사람들인지라 일처리가 영 서툴렀다. 그들이 일하는 모양새를 보니, 1주일이 지나도 증명서를 발급받기 어려울 것 같았다.
가만히 보니 사무를 보는 사람 하나가 국민학생도 할 수 있는 가감승제(加減乘除) 계산을 못해서 쩔쩔 매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저씨,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는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더니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수판을 이용해 몇 분 만에 계산을 해 주었다. 그는 나와 동행 두 사람의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
평양에 내려와 보니, 이미 공산당 천하였다. 일본인들은 강제 추방되었고, 유산계층, 유식계층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고 있었다. 평양역은 만주에서 내려온 피란민들 외에도 남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기차편이 없어서 며칠을 평양역에서 보내다가 12월 23일 경의선(京義線)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사리원을 거쳐, 38선 이북(以北)에 있는 신막(新幕)까지만 운행하고 있었다. 사리원역에서는 야밤에 기독교 교회 신자들이 피란민들에게 음식물을 대접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행사였던 것 같다. 일제시대에만 해도 고향인 경북에는 기독교 교세(敎勢)가 약했고, 태평양전쟁이 나면서는 ‘귀축미영(鬼畜美英)’의 종교라 하여 기독교를 탄압했기 때문에, 나는 크리스마스니 성탄절이니 하는 걸 아예 몰랐다.
내무서원들이 38선 넘는 것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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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민들은 38선을 지키는 미군병사들을 보고 이남으로 내려왔음을 실감했다. |
내무서원 한 명을 붙잡고 38선을 넘는 방법을 묻고 있는데, 옆에 있던 젊은이도 나와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내 친구인 전모(全某) 군이었다. 그의 형은 내가 펑톈 제2중학교에 입학하는 걸 도와준 분이었다. 일제시대부터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당시 신의주 제2공업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그보다 한 달 전인 11월 23일 발생한 신의주반공의거의 주동자 중 한 명이었다. 이 사건으로 학생 23명이 죽고 7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2000여 명의 시민·학생이 체포되었다. 전 군은 소련군사령부 습격에 가담한 혐의로 지명수배되자 변장을 하고 월남하려던 참이었다.
내무서원들이 일러주는 대로 트럭을 얻어 타고 하루길을 달려 황해도 금천(金川)으로 갔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예성강(禮成江) 북측 대안에 있는 조포(助浦)라는 곳까지 도보(徒步)로 이동해서 38선을 넘은 후 예성강 하류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38선 남쪽에 있는 예성강 인도교에 도달하게 되는데, 거기까지만 가면 미군이 보호해 줄 것이라고 했다.
모두 다섯 명이 38선 넘는 데 7시간이 걸렸다. 심야에 아무 표지도 없는 산길을 헤매면서, 소련군이 나타났다고 하면 사색(死色)이 되어 몸을 숨기고, 소련군이 사라졌다고 하면 다시 조심조심 한 발짝씩 내딛기를 되풀이했다. 금천에서 조포를 거쳐 38선을 넘어 예성강 인도교까지 오는 데 사흘이 걸렸다.
예성강 인도교에 이르니 미군이 있었다. 만주에서나 북한에서나 미군에 대해서는 좋은 얘기를 많이 들어 왔기에, 미군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나왔다. 카이위안을 떠나온 후 지난 한 달여 동안 겪은 고난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떠올랐다.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도 잠시,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은 아직도 만주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걸어서 토성(土城)역에 도착하자, 미군들이 밀가루 같은 것을 피란민들에게 뿌려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게 바로 DDT였다. 피란민들은 여기서 옷과 신발, 음식물을 제공받았다.
反託 호외
토성에서 기차를 타고 개성을 거쳐 그날 저녁 서울역에 도착했다. 역 광장에는 수많은 정당, 사회단체 이름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투어 피란민들을 데려가려고 야단법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피란민들을 자신들의 정치활동 전위대(前衛隊)로 삼으려고 그랬던 것 같다. 서북청년단 같은 것이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조상 대대로 불교 집안이어서였을까? 나는 한 불교단체 깃발을 따라갔다. 서울역 우측에 있는 허술한 창고 같은 곳(지금의 KTX서울역)에 이르니, 보리밥과 소금국이 나왔다. 다음 날 아침 서울역전으로 나가 보니, 호외(號外)가 뿌려지고 있었다. ‘신탁통치반대’를 주장하는 호외였다. 지프차를 타고 다니는 미군, 전봇대에 올라가 전선을 수리하는 미군의 모습이 신기했다. 이듬해 1월 초 반탁(反託) 시위대가 서울거리를 휩쓰는 모습을 보고, 고향인 경북 영일로 내려갔다. 어린 시절 나를 길러 주신 할아버지는 “종가(宗家) 종손(宗孫) 집안에서 너 하나만이라도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일본의 패망 이후 5개월 만이었다.
나와 함께 내려왔던 카이위안의 두 젊은이는 다시 만주로 돌아가 부모님께 내가 고향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알렸다. 부모님 등 만주에 남아 있던 가족들은 1947년 장제스군이 만주에서 패퇴(敗退)할 때 철수했다. 그해 4월경 대구에서 나는 가족들과 재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