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6년 개봉 이래 네 번째 리메이크된 <만추>의 감독
⊙ 한국 최초의 스릴러물인 <다이얼 112를 돌려라>로 일약 명감독 대열에
⊙ 1967년 <기적> 등 무려 10편을 개봉해 절정기 맞아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 한국 최초의 스릴러물인 <다이얼 112를 돌려라>로 일약 명감독 대열에
⊙ 1967년 <기적> 등 무려 10편을 개봉해 절정기 맞아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하지만 ‘현빈 신드롬’에 힘입고도 1966년 당시 <만추>가 개봉될 때만큼 관객들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1966년 <만추>는 당시 서울 관객 20만명(지금의 전국 1000만명 동원 수준)을 동원한 대박 영화였다. 그해 영화상이라는 영화상은 다 휩쓸었으며, 독일·스페인·미국·홍콩 등 해외시장에 수출하는 저력도 보였다.
김태용 감독이 이번에 만든 <만추>는 네 번째 리메이크작이다. 첫 번째로는 이 감독 생전인 1972년에 일본의 사이토 고이치 감독이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했다. 이어 이 감독이 떠난 해인 1975년, 거장 김기영 감독도 <육체의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재해석한 작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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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희의 <만추>. |
이번에 <만추>를 만든 김태용 감독은 이 영화 속에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절제된 사랑의 표현 덕분에 4편의 <만추> 중에서는 처음으로 ‘15세 이상 관람가’라는 판정을 받았지만, 관객들은 이런 표현이 뭔가 미진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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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용의 <만추>. |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원작 <만추>만은 이 자리에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원본 필름을 분실한 탓이다. 복사본 역시 한 부도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김태용 감독도 시나리오를 통해서 이 작품을 리메이크했다. 북한에서 영화활동을 한 적이 있는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씨 부부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 필름아카이브에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가 보관돼 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면, 언젠가는 전설로만 구전되는 원작과 직접 만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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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용의 <만추>. |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가 만든 영화 중 현재 24편만 보존돼 있다는 사실이다. <만추>를 비롯한 절반 이상의 작품들이 유실된 상태이다. 특히 필름 보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초기 시절의 작품들은 문서로만 남아 있지 대부분 필름이 없다.(이 감독 필모그래피 참조)
그나마 보존된 작품 24편도 꾸준한 발굴작업을 통해 찾아낸 노력의 결실이다. 1968년에 만든 걸작 <휴일>도 당시 정부의 살벌한 검열에 걸려 개봉조차 못하고 있다가 2005년 발굴돼 10회 부산영화제에서 첫 상영됐다. 37년이 지나서야 빛을 본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주의 작품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실험적인 영화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극찬을 받았다. 어렵게나마 한 작품씩 발굴될 때마다 그의 진가가 확인되고 있으니 유실된 작품들에 대한 아쉬움은 더하다. 임권택 감독도 가장 존경하는 감독으로 이만희 감독을 꼽는다.
이 감독이 만든 50편의 영화는 대체적으로 3기로 나뉜다. 초기작과 전성기, 그리고 유작에 이르는 쇠퇴기이다. 전성기를 연 작품이 바로 <만추>이다. 물론 쇠퇴기에서조차 유작인 <삼포 가는 길>(1975) 같은 명작이 나왔지만, 그는 감독으로서나 생활인으로서 상당히 불행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인생과 작품이 어떻게 엮여 갔는지 그와 작업을 함께 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구성해 본다.

[초기]
1961년 데뷔작 <주마등>에서 1966년 <물레방아>까지
이 감독은 1931년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났다. 경신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유복한 가정의 8남매 중 막내로 성장했는데, 공부보다는 연극반 활동에 더 매료돼 있었다. 고교 졸업 후 1950년에 군에 입대해 한국전쟁 당시 군대생활을 했는데, 특등사수였다는 주변의 증언이 있는 것으로 보면, 전쟁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영화적 전성기를 함께 보낸 시나리오 작가 백결(70)씨는 그가 생시 어떤 영화보다 전쟁영화에 대해 가장 애착이 많았다고 하는데, 한국전 당시 경험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두 편의 전쟁영화에 카메오가 아닌 주연급 군인으로 직접 출연했다. 베트남 현지 로케이션을 통해 촬영한 베트남전 영화 <고보이강의 다리>(1970)와 한국전쟁을 다룬 <04:00-1950>(1972) 두 편이다. 연기는 참전 경험과 함께 전후 연극계에서 활동하면서 닦아 놓은 실력이 바탕이 됐다.
1954~1955년경 이등중사로 만기 제대한 그는 유치진씨가 운영하는 연기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이 시절 동네 친구인 황학봉씨를 통해 안종화 감독을 만난 것이 영화계 입문으로 이어졌다. 안 감독의 조감독 시절 오흥순씨를 만나 결혼해 함께 극단활동을 하기도 했다.
영화계에 발을 디딘 후 5년 만인 1961년 그는 첫 작품 <주마등>을 만든 지 석 달 만에 두 번째 작품 <불효자>를 내놨다. 두 편 모두 원로배우 김승호씨가 주인공을 맡았는데, 감독 데뷔에도 김씨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분실 필름인 이 두 작품은, 자료에 따르면 신파적 성향의 멜로물인 것으로 알져진다. 이후 그의 영화는 거의 대원에서 제작했다. 대원영화사의 원선 대표는 그의 든든한 파트너였다.
1962년 그는 50년대 중반부터 유행하던 신파 멜로물의 하위 장르격인 <살아있는 그날까지>를 내놓았다. 이어 내놓은 <다이얼 112를 돌려라>가 바로 그의 출세작이다. 이 작품은 한국 최초의 제대로 된 스릴러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의 뛰어난 연출 역량을 영화계로부터 인정받은 첫 작품이다. 이해에 그의 세 자녀 중 막내딸인 영화배우 이혜영(50) 씨가 태어났다.
<다이얼 112를 돌려라>에서 처음 함께 일한 여배우 문정숙(2000년 작고)씨는 그의 운명의 연인이 되었다. 문씨는 그의 영화 27편에 출연하면서 전성기를 함께 누렸다. 1966년의 대작 <만추>에선 교도소에서 휴가 나온 우수에 찬 고독한 여인의 내면심리를 연기하면서 일약 대배우 반열에 올라서기도 했다. 이 감독이 간직한 문씨에 대한 연민과 집착은 지금까지도 영화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유작 <삼포 가는 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연한 후 표연히 사라진 여배우 문숙은 이 감독이 문정숙에서 ‘정’자만 떼 버리고 만들어 준 예명이다.
치밀한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는 <다이얼 112를 돌려라>는 <여섯 개의 그림자>(1969), <삼각의 함정>(1974) 등 두 번에 걸쳐 이 감독이 리메이크할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 <다이얼 112를 돌려라>는 필름 유실로 전설이 됐지만 나중에 리메이크된 두 작품은 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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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오지 않는 해병〉. |
1964년은 이 감독에게 잊지 못할 해였을 것이다. <7인의 여포로>로 인해 반공법에 휘말려 한 달간 감옥생활을 하는 불운을 겪었기 때문이다. 남측 여군 포로가 중공군에게 성폭행당하려는 상황에서 북한군이 구해준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이념보다는 민족애에 포인트를 둔 작품이었는데, 이를 군사정권이 용인하지 않은 것이다. 이해에 오흥순씨와 이혼하는 개인적 고난도 겪었다.
개봉하지 못한 <7인의 여포로>를 비롯해 <묘향비곡> <내가 설 땅은 어디냐> <마의 계단> <추격자> <검은 머리> <협박자>까지 일곱 편을 만들었다. 한 달에 두 작품을 개봉할 만큼 대단한 정력으로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래도 작품성은 뛰어났다. <검은 머리>와 <마의 계단>은 한국의 스릴러와 호러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은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검은 머리>는 도시의 뒷거리와 아지트를 배경으로 갱들의 세계를 매혹적으로 재현해 낸 작품인데, 한국 영화 중 가장 누아르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의 공동 시나리오 작가로 이름을 올린 ‘추남’은 이만희 감독의 필명이다.
<7인의 여포로>는 그 다음해인 1965년에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목으로 바꿔서 검열로 만신창이가 된 채 개봉되었다. 40분이 삭제됐고, 마지막은 이 감독이 아닌 다른 사람이 촬영을 해서 붙였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상영되지 못한 검열 전 <7인의 여포로>를 본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걸작으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한 달간의 감옥생활은 이 감독에게 여러가지 영감을 전해 주었다. 우선 감옥에서 읽은 소설 《흑맥》을 영화화했다. 뒷골목 갱단의 사랑과 죽음을 그린 이 작품은 신성일씨를 당시의 청춘스타로 만들었다. 또 <만추>도 모범수가 휴가를 다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옥중 생활을 통해 알게 된 이 감독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1965년 그는 <흑맥>을 비롯해 <흑룡강> <시장> <돌아온 여군>까지 모두 네 편을 개봉했다.
또 이해에 백결씨를 처음 만나 그의 시나리오 <천국의 사랑>을 제작신고도 하지 않은 채 촬영을 시작했지만, 결국 반 정도 촬영을 마쳤을 때 신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무산되어 버렸다. 이후 백결씨는 그의 영화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로서 전성기를 함께했다.
[전성기]
1966년 <만추>에서 1968년 <휴일>까지
1966년 그는 <군번 없는 용사> <잊을 수 없는 연인> <물레방아> <만추>까지 4편을 내리 극장에 걸었다. <군번 없는 용사>는 <7인의 여포로>로 고초를 겪은 뒤 진짜 반공영화 차원에서 만든 것인데, 이 감독은 또 반공법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신성일이 맡은 북한군의 복장을 지나치게 멋있게 보이게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니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다.
<물레방아>는 백결씨의 공식적인 시나리오 데뷔작이었다. 나도향의 <물레방아>를 원작으로 했지만 실제는 원작으로부터 아무것도 차용하지 않은 특이한 에로티시즘적 문예영화로 흥행에도 성공했다. 다행히도 이 작품은 아직까지 보존되고 있다.
1966년 영화계 총결산 자료에 따르면, 그의 1965년 작 <시장>을 비롯해 이해에 만든 5편의 영화 중 <군번 없는 용사> <물레방아> <만추>까지 모두 4편이 ‘한국영화 베스트 10’에 들어가 있다. 당시 그의 저력을 입증하는 셈이다.
<만추>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된 사연을 보면, 당시 필름 보관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영화를 제작했던 호현찬 전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의 증언에 따르면, 스페인에서 영화를 사겠다는 요청을 받고 네거필름(원본)을 빌려줬다가 돌려받는 과정에서, 세관에서 세금을 내고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차일피일 시간이 흐르는 사이 법대로 이 필름이 한강변에서 소각돼 버렸다는 것이다. 그나마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영하고 반납된 프린트가 다행히 한 벌 있었지만, 이 또한 재상영하겠다는 사람에게 계약금 20만원을 받고 넘겼는데, 실종돼버렸다고 한다. 현재까지는 그것이 끝이다.
1967년 이 감독은 <방콕의 마리오> <기적> <사기한 미스터 허> <냉과 열> <심각의 공포> <원점> <귀로> <얼룩 무늬의 사나이> <싸리골의 신화> <망각> 등 무려 10편을 개봉했다. 이해가 그의 창조적 에너지가 정점에 달했던 시점인 것 같다. 이즈음 태국과 베트남 현지 로케이션을 통해 만든 영화 세 편인 <방콕의 마리오> <얼룩 무늬의 사나이> <냉과 열>에 대해서는 필름은 물론 자료도 거의 없어 평가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머지 7편에 대한 당시의 비평과 남아 있는 4편의 필름(<원점> <귀로> <싸리골의 신화> <망각>)을 감안하면, 비교적 고른 수준의 미학적 성취를 이룬 작품들일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열차 안에서의 하룻밤을 영화화한 <기적>은 ‘노 뮤직 노세트’라는 새로운 실험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지만 적성국인 폴란드의 <야행열차>를 표절한 것이라는 시비에 휘말려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
<귀로>는 이 감독이 처음으로 만든 여성 멜로 드라마로, 그의 연인 문정숙씨가 보여준 무르익은 연기력이 스크린을 채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1968년은 <외출> <창공에 산다> <여로> <휴일> 4편을 만든 해이다. 그중 <휴일>은 검열에 걸려 2005년에야 빛을 봤다. 가난한 연인들의 휴일 하루를 우울한 색조로 담아낸 이 영화는 1960년대 후반 청춘들의 황폐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줬기 때문에 개봉이 무산됐다.
<창공에 산다>는 공군의 협찬을 받아 제작한 전쟁영화였는데, 작품성이나 흥행 면에서 모두 실패했다. 이 영화의 실패는 이 감독의 영화활동에 큰 제약요소가 돼 버렸다.
[쇠퇴기]
1969년 <생명>에서 1975년 <삼포 가는 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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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살자〉. |
이해는 <만추>와 <물레방아> 이후 지속된 예술영화에 대한 탐색이 극에 달하던 시점이었다. 의무제작 쿼터로 급하게 만들어진 <생명>은 매몰된 탄광의 광부들 이야기였다. 다큐멘터리라고 홍보했지만 사실은 극적 요소를 제거한 실험적 영화였다. <여자가 고백할 때>는 <망각>과 <만추>를 합해 놓은 복제작품이었고, <여섯 개의 그림자>는 <다이얼 112를 돌려라>의 리메이크작으로 두 편 다 새롭지 않았다.
<암살자>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실험성이 높은 영화이다. 조준형 한국영상자료원 연구부장은 이 영화에 대해 “형식적 실험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서사가 축소된 무의미한 영화”라고 평가했다.
이런 영화를 만들어 내는 이 감독을 충무로는 기피하기 시작했다. 실험적 영화와 복제적 영화를 헤매는 사이 그는 어느새 ‘통제 불능의 감독’이 돼 버렸다. 이즈음 그는 오랜 연인 문정숙과 결별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1970년, 이 감독은 베트남 현지 촬영 영화인 <고보이강의 다리>를 제작·개봉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시나리오를 수정해 가면서 주인공급으로 출연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 이 문제로 오랜 동지들인 시나리오작가 백결씨와 이석기 촬영감독과의 사이가 소원해졌다. 게다가 한국영화계까지 급속도로 활기를 잃어 가고 있는 시점에서 그는 고통스러운 40대를 맞았다.
다음해 그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웨스턴 무비 <쇠사슬을 끊어라>를 제작해 개봉했다. 이 영화는 이만희 영화의 컬트작으로 지칭되지만 이전까지 보여준 그의 영화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는 자체 제작에 연이어 실패한 이후 대대로 살아온 왕십리 집까지 잃고 1년 동안 아이들과도 흩어지는 비운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1972년에는 <04:00-1950> <0시> <일본해적>까지 3편에 대한 감독료를 받아서 자양동에 전세를 얻어 자식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3년간 그는 술에 빠진 통제불능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만든 <0시>는 형사물이긴 하지만 소외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고 있어 그가 갈구하는 삶은 현실과 달랐으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04:00-1950>은 특이한 전쟁영화이다. 북한군이 지나가 버린 38선 인근에 고립된 참호 속의 1개 분대를 다룬 영화로 영화의 절반 가량이 무너진 참호 안을 비추고 있다. 그는 정보장교로 직접 출연했는데, 나름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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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국화는 피었는데>. |
당시 돈으로 1억원이 넘는 예산에 인제와 양양 인근의 거의 모든 주민이 엑스트라로 동원되는 규모에 국방부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더해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이었다.
임권택 감독의 <증언>은 중고생이 의무적으로 보아야 하는 관제영화였지만 감명 깊은 스토리라인으로 흥행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이 감독의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달랐다. 시사회에서 전면개작 판정을 받는 바람에 악전고투 끝에 그가 최종편집을 포기하는 상황까지 갔다. 반공 메시지가 신통치 않은 탓이었다. 영화계에서는 그가 편집권만 지킬 수 있었다면 한국 전쟁영화에 길이 남을 걸작이 탄생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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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포 가는 길>. |
그의 몸은 이미 폭음으로 만신창이가 돼 가고 있었다.
1975년 그는 1월에 <태양을 닮은 소녀>, 2월에 <다이얼 112를 돌려라>의 두 번째 리메이크작 <삼각 함정>을 개봉하면서 유작인 <삼포 가는 길>을 촬영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황석영 원작 단편소설 <삼포 가는 길>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전과자, 막노동꾼, 접대부가 우연히 만나 함께 삼포로 떠나는 길에 서로의 마음속에서 고향처럼 따뜻한 정을 발견하는 이야기이다. 이 감독은 4월 13일 편집실에서 쓰러진 후 세상을 떠났다. <삼포 가는 길>은 이 감독 사후인 5월 23일 국도극장에서 개봉돼 관객들의 호응을 받았다. 떠나는 그의 마음도 한결 가벼웠을 것 같다. 하길종 감독은 평전에서 이 작품을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 되기 직전 실패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이만희 다운’ 따뜻한 영화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이다.⊙
시나리오 작가 백결 인터뷰
“이만희 이후 한국영화는 진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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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나리오 작가 백결씨. |
―이만희 감독의 작품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영화는 1960년대, 이만희 영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화 고유의 언어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가 <휴일> <만추> <물레방아> <귀로> <생명> 등입니다. 이 영화를 본다면, 그를 영화 천재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게 될 겁니다.
군사독재 시절의 어둡고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 기억되는 건 그의 영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이만희의 죽음은 한 천재 감독의 죽음이 아니라 바로 한국영화의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만추>의 시나리오 작가가 공식적으로는 김지연씨로 돼 있는데, 영화계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촬영장의 대본은 백 선생이 쓴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요.
“사실 저는 더 이상의 <만추> 원작 시나리오 논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요. 한마디로 제작시나리오는 김지연씨가 썼고, 촬영대본은 제가 쓴 것이 맞습니다. 이 감독이 1965년 <7인의 여포로>로 한 달간 형무소살이를 하고 나왔을 때였어요. 저한테 거기서 모범수 포상휴가 제도를 알게 됐다며 영화 소재로 어떠냐고 하기에 좋다고 답했어요. 그 직후 7~8매의 시놉시스(영화 혹은 드라마의 내용을 간추린 줄거리)를 만들어 주었어요. 그런데, 정인엽 감독도 그 비슷한 작품을 쓰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는 거예요. 제작사에서 마음이 급해졌지요. 그래서 먼저 시나리오를 등록하자고 서두르다 보니까 김지연씨에게 부탁해 제작신고용 대본을 급하게 쓰게 한 것이지요. 제가 다른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 이후 실제 촬영대본과 녹음대본은 제가 써 가면서 진행했어요. 당시 배우들도 그 상황을 다 알고 있어요.”
함께 만들려다가 중단한 영화가 더 많아
―이번에 김태용 감독에 의해 네 번째 <만추>가 개봉됐는데, 후속 세 작품을 다 봤습니까. 평가가 궁금합니다.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이나 김수용 감독의 <만추>는 다 자기 스타일을 보여주지 못하고 이 감독의 <만추>를 그냥 베낀 작품이었기 때문에 모두 원작만 못했어요. 김태용 감독의 <만추> 역시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언론에 나온 여러 가지 평가를 보니까 리메이크 전작 두 편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감독이 14년간 남긴 50편의 영화는 다양한 장르를 다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전쟁영화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것같습니다. 거의 한 해에 한 편 정도의 전쟁영화를 만든 것으로 기록되거든요.
“그래요. 전쟁영화에 대한 매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어요. 이 감독은 한국전 당시 군대에서 암호병으로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 과정에서 후방에서의 삶, 그리고 전방에서의 죽음에 대해 항상 고뇌했어요. 타고난 저항기질에 그런 전쟁의 모순에 대한 고민이 더해지면서 자기가 경험했던 전쟁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 감독은 작가주의든 상업주의든 그런 경향을 다 싫어했어요. 그냥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사람이었어요. 그런 그가 당시 엄혹한 상황에서 얼마나 제약을 많이 받았겠어요? <천국의 사랑>처럼 함께 만들려다가 중단한 영화가 나온 영화보다 많습니다.”
―이 감독에게 전쟁의 의미는 무엇이었나요.
“크든 작든 세상에는 폭력이 있습니다. 깡패가 지나가는 죄없는 사람을 치는 것도 폭력이고, 국가가 국민을 억압하는 것도 폭력입니다. 폭력의 극한 형태가 전쟁 아닌가요? 모든 전쟁은 폭력이고 이것에 대한 두려움, 거부감 저항 같은 것들을 영화로 담고 싶어했던 거지요(그래서 그의 전쟁영화에는 그 시절이 원하는 반공이라는 화두보다는 인간애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고, 그로 인해 검열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던 듯하다).”
―이 감독이 정부의 반공시책을 잘 따라 주지 않아서 옥고까지 치르는 등 고생을 많이 했는데, 반정부적 시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나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시인 김지하씨가 제 친한 친구인데, 이 친구를 이 감독에게 소개해 줬어요. 시라고는 관심이 없던 사람에게 김지하씨의 시를 보여줬는데, 곧 매료되더군요. 당시 김지하씨의 시는 읽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던 때였어요. 1970년대 초에 김씨가 수배되어 도망 다닐 때 제가 이 감독의 <청녀> 스태프로 넣어 줬어요. 그래서 촬영지인 흑산도에서 잡혔지요. 이 감독은 군사독재 정권의 폭력성을 몸서리치게 싫어했지만 김지하씨처럼 앞에 나서서 항거하기보다는 영화로 이야기하고 싶어했어요.”
즉흥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
―이 감독은 어떤 스타일로 일을 하는 감독이었나요. 치밀한 편이었는지요.
“<원점>을 찍을 때 이야기를 해 드릴게요. 어느날 이 감독이 급히 강릉에 술 먹으러 가자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같이 기차를 탔지요. 당시 강릉까지 16시간이 걸릴 때였는데, 침대차를 탔어요. 그런데, 강릉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책 한 권을 주는 거예요. 《원점》이었어요. 알고 보니 이 감독은 술 마시러 가는 게 아니라 선발대로 가는 거였어요. 난 거의 잡혀 온 거지요. 설악산 관광호텔에 벌써 방을 잡아 놨더라고요. 그래서 당일치기로 현장 시나리오를 써 주면서 그걸로 당일 촬영을 하고 영화를 만들었어요. 즉흥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지요.”
―두 분이 어떻게 그렇게 의기투합하게 됐는지요. 과정이 궁금하네요.
“제가 1962년도 MBC 개국기념 현상 드라마 공모에 당선됐어요. 원래 방송작가보다는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상금이 탐나서 도전했던 게 잘된 거지요. 하지만 방송 쪽에 별 관심이 없어서 영화 시나리오로 전환해 삼중당에서 창간한 《실버스크린》이라는 영화전문지에 일 년을 꼬박 쓴 시나리오 <벌거숭이 다리>를 냈어요. 그걸 보고 이 감독이 연락을 해 온 게 시작이었어요. 그걸 영화화하고 싶다는데, 인민군이 주인공이 되다보니까 시나리오가 통과되질 않는 거예요. 65년경 이야기예요. 그래서 또 다시 <천국의 사랑>을 영화예술지에 발표했는데, 이 감독이 이 시나리오를 보고 검열도 받기 전에 촬영을 시작해 버린 거예요. 50%나 찍었는데, 이것도 시나리오가 통과되지 않아서 포기해야 했지요. 그게 인연이 돼 쭉 함께 간 거지요. 저는 이 감독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감당할 의무가 있는 동반자였다고 생각해요.”
―1968년에 만들어졌지만 37년 만인 2005년에야 개봉된 <휴일>의 스토리가 궁금한데요.
“가난한 연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휴일>은 제가 원래 쓴 시나리오에 따르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있어요. 프롤로그에서 남자(신성일 분)가 익사체로 발견되는 거지요. 죽어 있는 시체의 얼굴 위로 그 사람의 목소리 내레이션으로 자기소개가 들어가는 거예요. 에필로그는 다시 시체로 돌아가서 형사가 거적을 걷어내고 부패한 시신을 확인한 후 ‘20대, 신원 불명’이라고 적은 후 사라지자 황량한 모래바람이 이는 거예요. 당시 이런 스토리로는 영화를 만들 수가 없는 정치환경이라 앞뒤 부분을 다 뺐어요. 검열 당국은 그래도 암울하니 스토리를 남자주인공이 군대에 가거나 취직을 하는 것으로 바꾸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 영화를 제작했던 전옥숙씨가 아예 상영을 포기한 거예요. 아마 1960년대에 검열을 거부하며 상영을 하지 않은 유일한 작품일 겁니다. 요새 컴퓨터 그래픽이 발달했으니까 만약 가능하다면 당시 포기한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를 다시 만들어서 붙여 보고 싶어요.”
당시 한국영화계는 이 감독의 천재성을 수용하기 어려워
―이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1969년 <생명> 이후 1971년 <쇠사슬을 끊어라>를 다시 시작할 때까지 상당한 공백기간이 있는데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아무래도 문정숙씨와의 스캔들이 문제가 됐어요., 제작자들은 이 감독이 문정숙씨만 주연으로 고집하는 걸 싫어했어요. 더군다나 이 감독에게 맡기면 돈벌이가 안된다는 묵시적인 동의가 이뤄져 있는 상태였지요. 어렵고 힘든 시절로 들어선 거예요. 이 감독과 문정숙씨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참 특이했어요. 보통 영화가 끝나 생활터전으로 돌아가면 생활인으로 만나는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 감독은 실생활에서도 영화배우 문정숙의 이미지를 요구했어요. 그러니 문정숙씨는 괴롭고 힘들었겠지요. 이 감독은 훌륭한 감독이었지만 훌륭한 가장이거나 바람직한 시민이 아니었지요.(웃음)”
―1970년대 이후 쇠퇴기의 이 감독은 어땠나요.
“이 감독의 불행은 한국영화계의 혹독한 불황과도 관련이 있어요. 한국영화계에 이 감독의 천재성을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홀로서기를 하기에는 경제적으로 너무 취약했어요. 그래서 더 술에 빠졌던 것 같아요.”
―유작 <삼포 가는 길>을 보면 이 작품이 마지막이 된 것이 우연이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 영화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어요. 친구인 현진영화사 김원두 사장(작고)이 황석영 소설 <장사의 꿈>의 원작을 샀는데, 그즈음 홍파 감독이 <삼포 가는 길>의 원작권을 갖고 있는 걸 알게 됐어요. 그때 <삼포 가는 길>을 읽어 보니 딱 이 감독이 만들면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연방영화사 주동진 사장을 설득해서 <장사의 꿈>과 <삼포 가는 길>의 원작권을 바꾸자고 한 거지요. 이 감독이 이미 몸이 많이 안좋았지만 원작에 완전히 빠져 있는 상황이었어요. 주동진 사장이 두 작품 모두 하겠다고 해서 제가 <장사의 꿈> 시나리오를 맡는 조건으로 <삼포 가는 길>을 이 감독이 맡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제가 못 썼던 거지요. 결국 <장사의 꿈>은 검열 때문에 영화화되지 못했어요.
제 생각으로는 이 감독도 그게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을 거예요. 자신의 건강을 자신만큼 아는 사람이 있겠어요? 영화를 완성해 가는 모습이 왕년에 날렸던 마라토너가 사력을 다해 골인지점에 들어오는 모습같이 안타까웠어요. 이 감독은 이 영화를 저와 함께 만들고 싶어했지만, 저는 약속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 작품에 대한 제 해석을 담은 노트를 전해 줬어요. 그때 눈물이 많이 나더군요.”
―이 감독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던 영화 장르가 있었을 법한데요.
“믿기 힘들겠지만 오래 살았다면 <쇠사슬을 끊어라> 같은 마카로니 웨스턴 무비를 계속 만들었을 거예요.”
―이 감독의 영화가 한국영화사에서 갖는 의미라고 본다면요?
“한마디로 한국영화의 성공과 한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만희의 영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리겠어요. 저는 이만희 이후의 한국영화가 얼마나 진보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여전히 유보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