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로고
2006년 12월호

[역사 현장 답사] 高宗황제의 손녀 李海瓊 여사, 皇嗣孫 李源씨와 함께한 古宮 산책

『황실은 우리 민족의 文化 콘텐츠 중 하나일 뿐이죠』

「나는 독립된 한국의 한 시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이 되기를 불원한다. 임시정부가 설립된 當地에 가서 萬의 一이라도 보조하려 한다」
(義親王이 上海 임정으로의 탈출을 결심하고 임정에 보낸 편지)
황실 후예들과의 昌德宮 산책
낙선재의 안채인 錫福軒에서 尹대비를 회상하는 이해경 여사(오른쪽)와 필자. 가운데 서 있는 이는「皇嗣孫」李源씨.
  가을 단풍으로 처연한 昌德宮(창덕궁) 앞뜰에서 大韓帝國(대한제국) 황실의 후예들인 李海瓊(이해경·77) 여사와 李源(이원·45)씨를 만났다. 이해경 여사는 光武황제(高宗)의 차남인 義親王(의친왕)의 13남9녀 중 제5녀이고, 李源씨는 「마지막 황태자」 英親王(고종의 제3자)의 아들인 李玖(이구)의 뒤를 이은 養子(양자)이다.
 
  皇家 후예들과 함께 古宮을 걷기로 했다. 처음엔 공연히 쑥스러웠다. 우선, 그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감했다. 대한제국이 망한 지 근 1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그 후예들에게 「王女」 또는 「皇嗣孫(황사손)」이라 호칭하는 것도 거북하게만 느껴졌다.
 
  창덕궁의 정문인 敦化門(돈화문)을 지나 「御道(어도)」로 접어들면서 이해경 여사에게 좀 얄궂은 말을 건넸다. 『李여사님, 오랜만에 「큰댁」에 오시니 심경이 어떠하십니까』. 그녀에게 純宗(순종: 융희황제)은 伯父(백부)인 만큼 순종이 기거했던 창덕궁을 「큰댁」이라고 해도 크게 망발일 수는 없다.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말머리를 슬쩍 돌렸다.
 
  『임금님의 행차 때는 御道에 지금의 카펫과 비슷한 行步席(행보석)이라는 자리를 깔았어요. 임금님이 그 위로 지나가신 후에는 행보석을 다시 도르르 말아 창고에 보관해 뒀지요』
 
세계문화유산 昌德宮.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左上쪽)과 정문인 돈화문(右下쪽)이 보인다.

낙선재에서 대한제국 황실의 일화를 들려주는 高宗의 손녀 이해경 여사. 이해경 여사의 얼굴은 조부 高宗을 빼닮았다.

朝鮮 왕가의 宗孫인 李源씨. 皇世孫 李玖씨의 사망 직후 양자로 입적됐다. 이해경씨가 고모다. 공식 호칭은 皇嗣孫이다.
 
  御道를 밟지 않는 두 사람
 
고종황제 어진.
  문득 깨닫고 보니 필자는 옛날 임금만 다니던 御道 위를 걷고 있었다. 이해경 여사와 이원씨는 어도보다 한칸 낮은 길을 걸었다. 이것이 황실의 후예와 대한민국 국민인 필자의 차이점인 것으로 느껴졌다.
 
  창덕궁 서북쪽으로 흐르는 물이 도랑을 타고 남쪽으로 흘러내린다. 물 흐르는 석축 도랑을 御溝(어구)라고 부른다. 어구를 따라 흐르는 물은 明堂水(명당수)라고 했다. 도랑 위에는 돌다리 錦川橋(금천교)가 걸려 있다.
 
  금천교를 지나 中門에 해당하는 전선문을 거쳐 正殿(정전)인 仁政殿(인정전) 앞을 지나면서 「皇嗣孫」 이원씨에게 좀 싱거운 질문을 던졌다.
 
  ―조선왕조가 계속되었다면 지금 이원씨는 인정전의 玉座(옥좌)에 좌정해 있을 것 아닙니까.
 
  『조선왕조가 이미 망했는데, 非현실적인 말씀 아닙니까. 이제 皇族(황족)은 없고, 황실의 후예들만 있습니다. 황실은 우리 민족의 문화 콘텐츠 중 하나일 뿐이죠』
 
  이날, 필자는 두 황실 후예와 함께 다섯 시간 동안 창덕궁과 창경궁의 한 구획인 樂善齋(낙선재)를 걷고, 점심을 함께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왕조의 후예와 고궁을 함께 걸으면 짙은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 더욱이, 요즘 李씨 황실의 후예들 사이엔 꽤 심각한 의견대립까지 빚고 있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만화「宮」과 드라마「宮」이 몰고 온 패션
 
   지난 9월29일, 「대한제국 皇族會」란 단체가 의친왕의 제2녀이며 금년 88세인 이해원 여사를 「대한제국 황위의 승계자」로 추대했고, 이해원 여사가 이를 수락하면서 스스로 「吉運女皇(길운여황)」임을 「선포」했다. 대한민국 헌법下에서 「황위 계승식」은 시대착오적 해프닝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 사회에 「황실 복원」을 待望(대망)하는 정서가 상당한 흐름을 이루고 있는 현상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8월15일, SBS 러브FM 「뉴스엔조이」가 「리얼미터」라는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성인남녀 46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4.4%가 「황실 복원에 찬성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위의 여론조사 결과가 어느 정도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는지는 속단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바람개비 같은 세태의 일면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황사손 이원씨의 답변) 얼마 전, 젊은이들 사이에 「宮」이란 만화가 수십만부나 팔렸고, 同名의 TV 드라마가 방영되어 황실 또는 왕가에 대한 호기심이 고조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소멸되었고, 광복 3년 후인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이제 와서 「대한제국 황위 계승」이니 하면 시대를 거스르는 일이죠. 다만, 「英國이나 日本에 가보니 王室이라는 문화 콘텐츠를 활용하던데, 그것이 부러웠다」는 일부 젊은이들의 말은 경청할 만합니다. 우리도 문화 콘텐츠로서 조선왕조 또는 대한제국 황실을 활용해 볼 필요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제30대 황위 계승」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
  그렇다면 왜 「吉運女皇」이 등장한 것일까. 좀 장황하지만, 「등극의 변」 중 일부를 인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05년 일제의 침탈 강점으로 대한제국의 황실은 무참하게 짓밟히게 되었고, 그 후 고종황제와 그의 장남이신 순종황제께서 승하하신 뒤 그 후사로 고종의 2남이신 義王(의왕: 義親王)께서 황위 보위를 승계하셔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아버지 義王께서는 일제에 항거하고 배후에서 독립을 지원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제의 극한 반대에 부딪혀 나의 작은아버지이시자 제3남이신 영친왕께 황위 계승권을 물려 주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작은아버지이신 영친왕께서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일본 황족인 方子 여사와 결혼하시어 아들 두 분을 낳았으나 한 분은 일찍이 早卒(조졸)하시고, 남은 李玖(이구) 왕세자마저 후손 없이 작년 7월 일본에서 비명횡사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의 영친왕계의 황실대통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순종(병약하여 소생이 없었음)의 황태자로서 순종의 첫째 동생인 의친왕이 배척되고, 둘째 동생인 영친왕이 책봉된 배경에 대해 약간의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겠지만, 위의 인용문은 고종-순종-영친왕-이구로 이어지는 系譜(계보)에 대한 약술로서 대체로 史實에 부합한다. 다음은 본론에 해당하는 이해원씨의 말이다.
 
  <그러므로 대한제국의 황실복원위원회와 황족회의 결의에 의하여, 의왕의 자녀 중에서 황실의 법도에 따라 의왕(의친왕)의 妃(비)로 堂號(당호)를 받은 분의 자녀 중에서 누군가가 황실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에 생존한 자녀 중 가장 연장자인 본인이 황족회 대표로서 대한제국 황실의 제30대 황위의 계승을 수락하였습니다>
 
  의친왕의 妃는 연안 김씨 한 분뿐이다. 의친왕비는 소생을 두지 못했다. 의친왕은 수많은 첩실을 거느렸으며, 수많은 첩실들에겐 堂號를 주었지만, 1930년 이후에는 그런 堂號조차 주지 않았다. 이번에 「황위 승계자」임을 주장한 이해원 여사는 修德堂(수덕당: 이회춘)의 소생이다.
 
  이해원 여사는 현재 경기도 하남시에서 아들 한 분과 함께 쪽방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형편의 이해원 여사가 왜 「제30대 왕위 계승자」임을 주장했을까.
 
  <그러므로 나 이해원은 대한제국 황실의 법통승계자로서 대한제국 황실의 복원 및 유지-보존권과 제31대 후계자 지명권, 대한제국 황실의 대표전권을 행사할 것을 선포합니다>
 
순종이 탑승했던 승용차(다임러) 앞에서.
 
  全州 李氏 대동종약원의 비판
 
궁중 대례복 차림의 의친왕비 연안 김씨.
  「제30대 왕위 승계식」에서는 사무총장, 비서실장, 경호실장, 총리대신, 재무대신이 임명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全州 李氏 대동종약원은 『조선왕조의 맥은 고종황제-순종황제-황태자 영친왕-이구 皇世孫-이원 皇嗣孫으로 이어진다』며 황족회 측을 비판했다.
 
  ―둘째 언니 이해원 여사의 「황위 승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한제국이 1910년에 이미 망했으니 「황위 승계」란 말은 틀려요. 우리는 皇家의 후예일 따름입니다. 황가의 후예라 해봐야 이제 의친왕계만 남았습니다. 영친왕과 운현궁(흥선대원군)의 가계도 의친왕계 자손들이 양자로 가서 代를 이어 오고 있지 않습니까. 의친왕계의 자손들이 화목하게 지내야 합니다. 황가의 후예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황위 계승보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황실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친왕의 11남 이석(가수·전주大 교수)씨의 따님으로서 연예활동을 하고 있는 이홍씨에 대해 일부 매스컴에서 「공주」 또는 「옹주」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센세이셔널리즘을 좇는 일부 언론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런 센세이셔널리즘에 의해 포장되면 우리가 국민들에게 우습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아우님(이석)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황실의 명예회복을 위해 온몸을 던져온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주위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의친왕계의 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센세이셔널리즘으로 포장되면 우리가 우스워져』
 
고종황제 붕어(1919년) 후 상복 차림의 의친왕비와 의친왕의 큰아들 李鍵(수관당 소생).
  올해 77세의 이해경 여사는 미혼녀이며, 20년쯤 젊어 보이는 얼굴이다. 스무일곱 살 이후 미국에 건너가 50년간 살아왔지만, 피는 속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녀는 할아버지 高宗과 매우 닮았다. 특히, 눈과 입언저리는 판박이다.
 
  『「서유견문」을 지은 유길준 선생의 동생이 저를 처음 만나 「어떻게 이렇게도 친탁을 했어요. 수염만 기르면 딱 광무황제이십니다」라고 말씀하십디다』
 
  이해경은 1930년 성북동 별장(現 예지원)에서 의친왕 李堈(이강)과 寺洞宮(사동궁·현재 종로예식장 자리에 있었던 의친왕의 거소)의 보모로 일했던 金今德(김금덕) 사이의 딸로 태어났다. 寺洞宮에서 성장하여 1946년 경기여고(당시 4년제), 1950년 이화여대 음대를 졸업하고, 6·25 전쟁 전에는 풍문여고 음악교사로 보름간 재직했다.
 
  6·25 전쟁 때 피란살이의 설움을 겪고, 糊口之策(호구지책)으로 美 8군 도서관의 司書(사서)로 일했다. 1956년, 단돈 80달러를 손에 쥐고 渡美(도미)해 1959년 「메리 하딘 베일러 女大」(텍사스州)를 전액 장학생으로 졸업했고, 1969년 컬럼비아大 동양학도서관 司書로 취업해 1996년 이 도서관의 한국학 과장직을 끝으로 정년퇴직했다. 미국시민권을 지닌 그녀는 2개월간의 모국 방문 후 필자와의 인터뷰 이틀 후인 지난 10월28일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大韓帝國을 둘러싼 列强의 각축
 
이해경과 그녀의 生母 김금덕.
  여기서 대한제국이 성립되는 배경부터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다. 1894년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벌어진 淸日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그러나 전승국 일본이 러·불·독의 3국간섭으로 몰리는 국제정세가 전개되자 당시 조선왕조의 實勢(실세)였던 민비(高宗의 왕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親러정책을 구사했다.
 
  이에 발끈한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자객 20~30명을 데리고 景福宮(경복궁)을 습격하여 민비를 죽이고, 그 시신에 석유를 끼얹어 불사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것이 乙未事變(을미사변)이다.
 
  민비가 시해된 후 高宗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거처를 貞洞(정동)의 慶運宮(경운궁·지금의 德壽宮)으로 옮겼다. 정동엔 영국·미국·러시아의 공사관 등이 모여 있어 일본이 만행을 저지르기가 어렵고, 유사시에 대피가 용이하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당시 일본세력을 배경으로 들어서 있던 제3차 金弘集(김홍집) 내각은 양력의 사용, 종두법 및 우편제도의 실시, 斷髮令(단발령)등 개혁정책을 강행했다(甲午更張). 그러나 단발령 등 개혁정책 강행과 민비 살해는 정부와 그 배후에 있는 일본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를 자아내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896년 2월11일부터 약 1년간, 高宗은 세자(후일의 순종)와 함께 지금의 경향신문사 뒤편의 러시아공관으로 또다시 거처를 옮겼다. 이것을 俄館播遷(아관파천)이라 부른다. 아관파천은 李範珍(이범진)·李完用(이완용) 등 친러파가 러시아공사 웨베르와 결탁해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水兵 100명을 서울로 불러 올려 러시아공사관의 수비를 굳히고, 신변의 불안을 느끼던 高宗을 회유해 감행한 사건이었다.
 
  아관파천 직후 高宗이 부추긴 민란이 일어나 총리대신 金弘集, 농상공부대신 鄭秉夏(정병하), 탁지부대신 魚允中(어윤중)은 난민들에게 피살되었고, 兪吉濬(유길준)·趙羲淵(조희연)·張博(장박)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로써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朴定陽 수상(內相 겸임)의 친러내각이 조직되었다. 친러파의 중심인물은 法相 겸 警務使에 오른 이범진이었다.
 
  러시아공사 웨베르는 군대로써 高宗을 둘러싸고 조선 정부를 제 마음대로 흔들어 산림벌채권·채광권 등 많은 이권을 강탈했다. 탁지부 고문 알렉세예프는 마치 조선 정부의 재정대신처럼 행세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독주에 대해 국내외의 비판이 들끓었다. 1897년 2월25일, 高宗은 내외의 권고를 받아들여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왔다. 그해 8월에 연호를 「光武」,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선포하고, 10월에는 원구단을 쌓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英親王 李垠의 기구한 일생
 
순종비가 선물한 프랑스 인형을 손에 든 이해경(7세 때).
  이제는 대한제국의 황실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高宗의 자녀는 3남1녀(유아 때 사망한 분 제외)이다. 이 가운데 민비(명성황후로 추증됨)의 소생은 1907년 7월 高宗에 이어 대한제국 황위에 오른 순종(융희황제)뿐이다. 순종은 허약하여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순종의 황태자로 책봉된 李垠(이은)은 高宗(광무황제)의 3남으로서 淳嬪(순빈) 엄씨의 소생이다. 그러니까 황태자 이은은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영친왕의 기구한 일생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이은은 11세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건너가 철저한 일본 교육을 받았다. 1900년 영친왕에 책봉되었고, 1907년(융희황제 즉위년)에 황태자로 책립되었다.
 
  1910년 韓日합방으로 융희황제(순종)가 폐위되어 李王으로 격하됨에 따라 이은도 황태자로부터 王世弟로 격하되었다. 1920년 4월28일에 결혼한 일본 황족 니시모토노미야(梨本宮)의 딸 마사코(方子)와 결혼했다. 1926년 순종이 별세하자 이은은 李왕가를 계승하여 李王이라 불렸다. 이은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 중장을 지냈다.
 
  광복 이후에도 영친왕은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머물었다. 李承晩(이승만) 정부가 영친왕의 귀국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도 조선왕조의 國姓인 全州 李씨였지만, 父王에 의해 廢世子(폐세자)된 양녕대군의 후손인 만큼 이미 왕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太宗의 왕위는 제3자인 忠寧大君(충녕대군: 후일의 世宗)이 이었다. 영친왕은 朴正熙(박정희) 정부 때인 1963년 11월에 식물인간의 상태로 귀국했고, 1970년에 별세했다.
 
  이은과 방자의 외아들인 이구는 우크라이나系 미국인 여성 줄리아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두지 못했다. 이렇게 순종-영친왕-이구로 이어지는 家系는 子孫이 귀했지만, 고종의 차남인 의친왕은 확인된 자녀만 22명이고, 확인되지 않은 자녀를 합치면 자녀수가 30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李堈의 출생과 성장
 
의친왕의 대한제국 군복 정장 모습.
  의친왕 李堈(이강)은 구한말인 1877년 3월30일(양력) 高宗의 다섯째 아들로 궁녀 德水 張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민비는 자신의 궁녀인 張상궁이 高宗의 아들을 낳은 것을 알고 불같이 화를 내, 張상궁을 불러 여자의 깊숙한 부분에 칼질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張귀인은 그때 입은 상처로 10여 년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유년 시절의 이강은 외가에서 외삼촌으로부터 학문과 서예를 배웠다.
 
  그러나 1871년, 민비의 심경이 갑자기 바뀌었다. 민비는 高宗에게 진언, 15세의 이강을 궁으로 불러들여 冠禮(성인의식)을 시키고 義和君(의화군)으로 봉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민비는 세자(후일의 순종) 다음에 낳은 大君들이 모두 유아 시절에 죽었고, 세자 역시 몸이 허약해 후사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화군은 17세 되던 1893년 10월29일, 당시 14세였던 金思濬(김사준)의 딸인 延安 金씨와 吉禮(길례: 혼인)를 올렸다. 의화군 이강은 1894년 9월, 18세 나이에 報聘大使(보빙대사)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895년 민비가 일본 자객들에게 시해당하자 의화군은 특파대사의 자격으로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국을 순방했다. 일본에 의한 국권침탈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던 高宗의 의도가 엿보이는 일이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899년 의화군은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州 로아노크大에서 공부했다. 미국에서는 독립운동가 金奎植(김규식)과 같은 학교에 다녀 교분이 두터웠다. 在美 중이던 의화군은 高宗의 황제 등극(1897년)에 따라 1900년 8월17일 義親王으로 進封(진봉)되었다.
 
  한반도를 먹기 위한 러日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1905년). 대한제국의 국운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그해 8월, 의친왕은 귀국을 위해 東京까지 왔지만, 웬일인지 高宗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高宗의 후비인 엄귀비(영친왕의 생모)가 의친왕의 귀국을 막았다는 설이 전해진다.
 
  『아버지(의친왕)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 엄귀비의 견제 때문에 말 못할 고초를 겪었고, 高宗과의 사이도 원만하지 못했는데, 귀국 후 두 분 간의 대화로 오해의 대부분이 풀렸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義親王의 기개
 
  그해 11월,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천황의 특파대사 자격으로 서울에 들어와 駐韓일본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남산에 대포를 포진시킨 가운데 대한제국 각료들을 협박해 을사보호조약을 체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의친왕은 東京 체류 8개월 만인 1906년 4월7일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이해경 여사는 당시 의친왕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의친왕)는 평생 14번이나 암살당할 뻔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투숙한 여관에 침입한 자객이 붙들리기도 했대요. 이것은 아버지가 「수양아들」로 삼았다고 알려질 만큼 아꼈던 在美 황재경 목사가 생전의 아버지에게 들은 얘기를 10여 년 전에 내게 전하신 겁니다. 그때서야 비로서 나는 왜 아버지가 항상 권총을 휴대하고 다니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의친왕은 1906년 4월 대한제국 陸軍副將과 參謀官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0월12일자로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겸임했다.
 
  의친왕은 일화가 많은 인물이다. 어느 날, 統監 이토 히로부미가 의친왕에게 『임금을 시켜줄 테니 내 말만 들어라』고 회유하자 의친왕은 『무슨 개수작이냐』고 맞받은 뒤 신변의 안전을 위해 외국공사관으로 피신했다고 전해진다.
 
  李曾馥(이증복)이 지은 「대동단 총재 의친왕 비화」에 따르면 韓日합방 직후에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별장 綠泉亭(녹천정)에서 의친왕은 술에 취한 척 주정을 부리는데, 이를 충고하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권총을 겨누면서 『이놈, 무엇이 어째? 그래,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위 책에 의하면 이토 히로부미가 高宗에게 양위를 강요할 때, 『술주정꾼으로 알려진 의친왕을 황태자(순종) 대신 황제로 세우면 어떻겠느냐』고 하세가와 조선군사령관의 의견을 물은 바, 하세가와는 『의친왕은 술만 먹고 기방출입이나 일삼아 팔난봉 같지만, 그 성격이 호방해서 우리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반대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驛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피격·살해당했을 때 당시 정부에서 의친왕을 일본에 사죄 특사로 보내기로 결정했으나 의친왕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이 사실은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왜적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씨 皇家에서 만약 의친왕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후세인들에게 더욱 미안할 뻔했다. 의친왕은 황족 중 유일하게 항일투쟁의 기록을 남겼다.
 
  1909년 10월, 의친왕은 경남 거창군 위천으로 낙향한 前 승지 鄭泰均(정태균)을 찾아가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우국청년들과 접촉하면서 四仙臺(사선대) 일대를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기도하다가 탄로되어 일본헌병에게 호송되다시피 上京했다고 한다.
 
일본 파견 보빙대사 당시의 의친왕(앞줄 중앙의 관복차림)과 수행원들.
 
  임시정부 合流 위해 신의주까지 탈출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고, 중국 上海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20년 11월, 의친왕은 항일단체 大同團 총재가 되어 동지 全協(전협)·金嘉鎭(김가진) 등과 협의하고 다음 요지의 선언문을 작성해 공포하고 上海임시정부에 보냈다.
 
  <일본이 매국 간신들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합병하고, 내 父王(부왕: 高宗)과 母后(모후: 민비)를 살해한 것이오, 결코 부왕께서 병합을 貢許(공허)한 것이 아니다. 나는 한국인의 1人인즉 독립된 한국의 한 시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이 되기를 불원하는 바이니 임시정부가 설립된 當地에 가서 공복을 위해 萬의 一이라도 보조하려 한다. 이 결심은 오직 부모의 원수를 갚고 조국의 독립 및 세계의 평화를 위함에서이다>
 
  이 거사 때문에 의친왕은 용산에 있던 조선군사령부로 끌려가서 취조를 받고, 사동궁에 돌아온 후 연금되었다. 의친왕은 밤중에 사동궁을 탈출해 상복 차림을 하고 3등열차로 국경도시 신의주까지 갔으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
 
  ―당시 일제의 재판기록을 보면 의친왕은 만주 安東縣(지금의 丹東市)에서 발각되어 호송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은, 한일합방 후 조선왕실 보호법규에 「왕족의 국내여행에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조항 때문에 일제가 재판기록을 위조한 것입니다』
 
  의친왕은 빛과 그림자가 격렬하게 교차되는 삶을 살았다. 일본에 강점된 국권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 긍정적인 면모라 한다면, 수많은 첩실을 거느리고 풍류에 탐닉했던 후반기의 생애는 부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여성」 金今德의 행로
 
  ―李(해경)여사의 生母 김금덕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생모는 경남 河東 출신으로 그 당시의 경성보육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보험회사에 다니던 신여성이었습니다』
 
  ―어쩌다 의친왕의 눈에 띄었다고 합디까.
 
  『누구가의 소개를 받아 사동궁에 보험가입을 권유하러 왔다가 아버지의 눈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요.
 
  『아버지는 최신식 파마 머리에 뾰족구두를 신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신여성을 보고 호기심을 나서 가만히 신원을 알아보셨대요. 경성보육학교 졸업생이라는 것을 알고 「그 여자를 우리 아기들 보모로 채용하라」고 하셨답니다』
 
  의친왕은 의친왕비 이외에 많은 후실을 거느렸고 염문이 많았던 인물이다. 수많은 부인들 중 일부에게 수관당, 修仁堂, 수현당, 修德堂, 수경당이니 하는 堂號를 지어 주었다.
 
  『둘째 언니(수덕당 이회춘 소생의 이해원)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너의 어머니(김금덕)가 우리들(이해경의 이복 오빠와 언니들)을 데리고 노는데, 아버지(의친왕)께서 독수리같이 채 가시더니 네가 태어났지」 라고 놀리기도 했어요』
 
  ―生母의 성품은 어떠했답디까.
 
  『생모는 가만히 집에 머물지 못하는 활달한 성격이어서 친구들과 무척 많이 돌아다니셨다고 해요』
 
  ―生母가 왜 의친왕에게 버림을 받았습니까.
 
  『1930년 아버지는 일제가 준 작위를 내놓으시고,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서 생활하셨답니다. 이에 생모는 세 살 난 나를 들쳐업고 일본에 건너가 아버지와 담판을 벌였다고 해요. 화가 난 아버지는 의친왕비께 「딸아이(이해경)를 즉시 사동궁으로 데려오고, 생모의 출입을 금지시켜라」고 명하셨대요. 이후 나는 생모와 떨어져 사동궁(옛 종로예식장 자리)에서 의친왕비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습니다』
 
 
  義親王妃의 어진 품성
 
궁중복색의 이해경(미국에서).
  ―의친왕비(호적명 金德修)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의친왕비 연안 김씨는 연흥부원군 金悌男(김제남)의 후손입니다. 김제남의 따님이 바로 유명한 仁穆大妃(인목대비: 광해군에 의해 소생인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하고 유폐당한 끝에 仁祖反正으로 복권함)예요. 의친왕비의 친정아버지 金思濬(김사준)공은 연흥부원군의 10대 손이지요.
 
  김사준公은 자신의 따님과 의친왕 간의 혼담이 오고가자 高宗께 「인목대비의 遺訓(유훈)에 따라 국혼을 사양하겠다」는 뜻을 상소했답디다. 그러나 高宗께서는 김사준公 따님의 단아한 모습을 좋게 보시고 김사준公을 재삼 설득해 의친왕과의 혼인을 관철시켰답니다』
 
  연안 김씨 德修는 1892년 의화군(후일의 의친왕)과 결혼, 延原郡夫人으로 봉해졌다. 1907년 시숙인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의친왕비로 책봉되었다.
 
  『제가 「어머니」라고 불렀던 분은 의친왕비뿐이었습니다. 남에게 이분을 말할 때 다른 형제들처럼 「至密(지밀)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복형제들의 생모들에게는 「修德堂 엄마」 「修仁堂 엄마」라고 불렀어요』
 
  의친왕비는 소생이 없었다. 의친왕이 수많은 後室(후실)을 두었지만, 유교적인 婦德(부덕)에 충실했다. 의친왕비는 스스로 「나는 法度와 결혼한 사람」이라고 말했던 분이다.
 
  『14세의 어린 나이로 결혼하신 지 얼마 후 아버지께서 오랫동안 해외에 나가 계셨기 때문에 혼자서 궁을 지키며 궁의 예법과 법도를 배우고 실천하셨어요. 어머니는 왕비이시면서 서민과 다름없이 매우 검소한 분이셨습니다』
 
 
  『어머니로 부른 분은 의친왕비뿐』
 
황세손 이구와 이해경(미국에서).
  ―검소한 궁중생활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어머니께서는 뒷마당의 정원을 밭으로 꾸며 봄이면 딸기와 오이·호박, 배추와 무, 나중에는 감자와 고구마도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衣帶(의대·옷)를 몸소 재배한 면화에서 뽑은 솜을 넣어 지어 드리기도 하셨습니다. 앞마당 우물가에 한 칸짜리 논을 만들어 그곳에 벼를 심고, 수확한 쌀로 아버지 수라를 짓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셨어요.
 
  매일 새벽 4시경에 반드시 온 집안사람들과 함께 일어나 우물에서 물을 길어 궁 안의 밭에 물을 주셨지요. 어머니께서는 홀로 생활함으로써 느끼는 번뇌를 잊으려고 그러지 않으셨나 생각됩니다』
 
  ―후실의 소생에 대한 의친왕비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어머니께서는 제가 자라서 여학교에 다닐 때의 언행 중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동생 되시는 春基 아저씨를 불러 물어보곤 하셨대요. 어머니께선 궁 밖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물정을 잘 모르셨어요. 제가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공부하는데 왜 소리가 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하셨어요. 또 제가 노래를 하면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어떤 노래였습니까.
 
  『8·15 광복 후의 얘기지만, 그 당시 유행하던 「麻衣太子(마의태자)」와 「낙화암」이라는 노래를 매우 좋아해 자주 제게 불러 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성품이 어지셨고, 학문에도 뛰어나 「孟子(맹자)」를 줄줄이 암송했고, 楷書(해서)를 매우 잘 쓰셨지요』
 
  ―李여사께선 풍문여고 음악선생으로 취직한 지 보름도 못 돼 6·25가 발발했고 미처 피란도 못 했는데, 敵 치하의 서울에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서울이 공산군에게 점령되자마자 집안에 일하던 사람들을 모두 연고지로 돌려보냈어요. 그래도 남아 있는 식구가 아홉 명이나 되어 곧 쌀뒤주가 바닥을 보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다락에 올라가 어머니께서 제 혼수감으로 사서 모아 두신 비단을 배낭에 넣어 걸머지고 동대문시장으로 나갔습니다』
 
  ―전쟁 중에도 시장은 살아 있었군요.
 
  『시장은 인파로 물 끓듯 했습니다. 제가 걸머지고 나간 비단을 상인들이 서로 자기에게 팔라고 마구 잡아끌었어요. 시세를 모르는 저는 그저 그들이 지불하는 대로 돈을 받아 쌀가게로 가서 쌀 한 말을 사갖고 집으로 돌아왔죠. 조그만 냄비에 흰쌀밥을 지어 부모님에게 먼저 드리고, 나머지 식구들은 어머니가 마당에 심어 놓으셨던 아욱 등의 채소들을 잔뜩 넣어 죽을 쑤어 먹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어머니가 나를 가만히 불러 「얘야, 얼마나 배고프겠니」 하면서 잡수시다 남긴 흰쌀밥을 제게 주셨습니다. 제가 「아니에요」라고 사양하면, 어머니는 짐짓 「얘야, 나는 죽을 더 좋아한다」고 하셨어요』
 
  ―전쟁이 의친왕 夫妻를 합가시킨 것이군요.
 
  『어머니는 전쟁 중이라는 것도 잊어버리신 것같이 무척이나 기뻐하셨어요. 어머니께서 아버지와 오붓하게 지내시게 된 것은 결혼하신 후 처음이 아니었나 싶어요. 당시 아버지는 73세의 고령으로 하루 종일 방안에 앉아 미군 비행기가 날아오는 것을 기다리셨어요』
 
 
  敵 치하에서의「부역」혐의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가 만년을 보냈던 壽康齋. 덕혜옹주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 對馬島主 아들과 결혼했지만, 이 정략결혼은 파경으로 끝났다.
  ―敵 치하에서 부역은 하지 않았습니까.
 
  『하루는 시공관에서 모스크바음악제에서 1등상을 탄 북한 음악인들의 공연이 있다 하여 저의 대학선배 金福姬(김복희·팔봉 김기진의 따님·성악가) 언니와 함께 구경을 갔어요. 음악회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별안간 시공간 문을 닫아 걸고 나가는 관객들을 일렬로 세워 음악인들을 골라내 따로 세웁디다. 벌벌 떨고 있던 우리들에게 「인민공화국 경비대 협주단을 조직하겠다」며 군복을 입히고 명동성당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들은 명동성당을 점령해 합숙소를 만든 겁니다』
 
  ―집에 연락은 했습니까.
 
  『아뇨, 음악회에 간다고 집을 나간 제가 이틀 동안 귀가하지 않으니 집에서는 야단법석이 났어요. 사흘째 되던 날에야 첫 외출허락을 받았고, 배급이라고 쌀 한 주머니씩 받았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곳에서 배고픔을 면했고, 가족들에게 쌀을 전해 연명을 시켰습니다』
 
  敵 치하의 3개월이 흘렀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해 전세는 역전되었다.
 
  『하루는 합주단 단장이 단원들을 모아 놓고 「내일 새벽 평양으로 떠나니 소지품을 챙겨 다시 집합하라」고 명령해요. 당시 저 얼굴엔 커다란 종기가 났었는데, 평소 내게 호의적이었던 단장에게 「떠나기 전 병원에 다녀오게 해달라」고 부탁해 허락을 받고 그 길로 도망을 쳤습니다』
 
  9·28 수복 후 그녀는 부역자로 몰렸다.
 
  『하루는 종로경찰서에서 형사가 나와서 저를 경찰서로 연행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난생처음으로 「의친왕의 딸」이라는 점 때문에 사흘 만에 풀려나게 되었죠. 어머니가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종로경찰서장을 찾아가서 「내 딸이 가족을 살리려고 뛰어다니다 공산군에 잡혀 갔다가 겨우 도망쳐 왔는데, 또 잡아가다니 말이 되느냐」고 항의하셨대요』
 
 
  음악회 열기 위해 평양까지 갔지만…
 
낙선재는 憲宗이 첫눈에 반했던 여인 金씨와 임금의 권도로 王婚을 한 후에 사랑의 보금자리로서 지은 건물이다. 그녀는 세 번의 간택까지 올랐으나 王大妃의 최종심사에서 떨어져 왕비가 되지 못했다.
  이해경은 비상한 시대에 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번에는 국군의 음악단원으로 유엔군의 북진대열에 끼어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종로경찰서 문을 나섰더니 천만 뜻밖에도 저의 생모가 군복 차림으로 지프차를 타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생모는 저를 지프차에 태워 안궁동 別宮(별궁)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더러 「내가 잘 아는 육군본부 휼병감실 보도과장 이종태 중령이 마침 평양위문단을 조직한다. 너는 클래식 음악단을 조직해 평양에 가도록 하라」고 권유하셔요. 따로 할 일도 없는 처지여서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 생모와 헤어졌어요』
 
  ―생모와 기구한 해후를 하셨군요
 
  『생모는 아버지와 절연 후에 滿洲(만주)로 건너가 그곳 동포 尹씨와 재혼해 異父동생 둘을 낳았고, 때때로 나에게 귀한 옷을 선물로 보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친왕비)는 나를 불러 「네 생모가 보낸 옷이니 입도록 해라」면서 새 옷을 내어 주셨습니다. 한번은 생모가 호랑이 털로 만든 외투를 보내 준 적이 있는데, 그것을 입고 학교에 가던 중 동네 개들이 덤벼들어 혼이 난 적도 있었어요』
 
  광복 후 귀국한 김금덕은 大田에 정착해 호텔을 운영했고, 호서대학교를 설립했으며, 「동방신문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6·25 전쟁 때는 金賢淑(김현숙·초대 女軍부장·육군대령)과 함께 대한민국 여군의 모태인 「여자의용군」을 창설했다.
 
  ―평양에 가니 어떻습디까.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친구들을 모아 음악단을 조직해 수복된 평양으로 올라갔죠. 팔에는 「Korea Army Special Service」라고 적힌 완장을 차고 평양으로 수송되는 미군들 사이에 끼어 앉아 30여 시간 걸려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조그만 방 두 개를 빌려 남자단원 7명과 여자단원 7명이 기거하며 음악회를 준비했어요』
 
  ―음악회는 열렸습니까.
 
  『별안간 중공군이 쳐들어온다고 야단법석이 났어요. 음악회는 불발로 끝났습니다. 우리를 인솔해 갔던 邊대위가 어찌할지 몰라 하다 「여기서 모두 해산할테니 각자 알아서 서울로 되돌아가라」는 거예요. 저는 단원 한 사람과 함께 순안공항에서 마지막 철수 버스에 편승해 서울로 귀환했습니다』
 
  중공군의 공세로 서울도 위험해졌다. 의친왕 일가는 부산으로 피란 갔다.
 
  『부산에서 이화여대 음대 친구들을 만났어요. 서울에서 해병대 위문단을 조직해 배를 타고 내려왔다면서 저도 끼워 주겠대요. 그들과 함께 마산 美 해병대로 위문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생 셋을 데리고 단칸방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거기에 머물 처지가 못 돼 저는 친구 집에서 경영하는 다방에 가서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기도 하며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어요. 이 소식을 어디서 전해 들은 생모의 권유로 생모와 대구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어요』
 
 
  美8군 도서관 司書로 취업
 
  대구에서 이해경은 美 제5공군 부대에 근무하는 선배언니를 찾아가 취직알선을 부탁했다. 美 제5공군 PX(매점)의 판매원으로 취업했다.
 
  『얼마 후 미군부대를 따라 폐허가 된 서울로 되돌아왔어요. 서툰 영어가 조금씩 익숙해져 美8군사령부의 도서관 司書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렵던 시절, 어떻게 미국 유학을 꿈꾸게 되었습니까.
 
  『1954년 어느 날, 제가 근무하고 있는 사령부의 도서관에 자주 와서 레코드를 빌려 가던 미군 병사가 찾아와 「곧 귀국하게 되었다」면서 「혹시 당신 미국 가서 음악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생각 없느냐」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요.
 
  그 병사는 음대 출신이어서 평소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던 사이였어요. 그래서 내가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면 모를까, 지금 내 형편에 어림없는 얘기다」라고 가볍게 대꾸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참 지났는데, 어느 날 그 병사의 안부편지와 더불어 텍사스州에 있는 침례교 목사라는 그 병사 부친의 재정보증서를 받았어요. 그의 편지에는 「텍사스州에 있는 조그만 침례교 여자대학에서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고 승낙했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얼마 후 미국 학교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당시, 渡美유학 수속이 상당히 까다로웠죠.
 
  『외무부와 미국대사관에서 치른 시험에서는 운좋게 합격했지만, 문교부에서 치른 國史(국사) 시험에는 자꾸 떨어졌습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국사를 달달 외우느라고 죽을 고생을 한 끝에 겨우 합격했어요. 도미유학 허가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고 수속이 어느 정도 진행될 무렵에 갑자기 아버지께서 별세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부모님께 미국 유학 계획을 말씀드리지 않았거든요』
 
  ―生母께서는 도미유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반대였어요. 저를 보기만 하면 「용상이 같은 좋은 청년과 결혼이나 할 것이지, 미국 유학은 무어냐」고 설득하셨어요』
 
  生母가 이해경의 결혼 상대로 점찍은 詩人 이용상은 당시 정훈장교(육군대위)였다. 필자가 10여 년 전 중국 山東省 지방을 여행하다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 이용상씨는 1950~1960년대 문단 인물들의 숨은 얘기를 담은 「용금옥 시대」 등의 저자로 2년 전 별세했다.
 
  이해경과 「평생친구」로 지낸 이용상(1924~2004)의 삶도 극적이었다. 그는 일제학병에서 탈출해 중국 호남성 長沙(장사)에서 항일유격대에 참가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입대해 국방부 보도과장(1955) 등을 거쳐 육군대령으로 예편해 공보부 공보국장(1961), 문공부 예술국장(1968)을 역임했으며, 충무무공훈장과 독립유공자 건국훈장을 수상했다.
 
 
  80달러 손에 쥐고 渡美유학
 
「왕세자」李玖의 빈청이 차려진 낙선재의 사랑채.
  ―生母가 유학비를 좀 보태 주시지 않습디까.
 
  『생모는 제가 미국 가는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어 쩔쩔매는 것을 보시면서도 모른 척하며 제풀에 지치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저는 하는 수 없이 至密어머니가 어렵사리 사주셨던 추억어린 피아노를 팔았습니다. 피아노를 처분해 비행기표를 사고 나니 남은 돈은 거의 없었어요. 그러나 당시 내가 근무하던 사령부 도서관에서 함께 근무하던 미군 사병들이 전별금으로 70여 달러, 법무부에서 공식적으로 바꿔 준 돈 10달러 도합 80여 달러를 지니고, 1956년 어느 날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출국 때 옷차림은 어떠했습니까.
 
  『저의 경기여고 2년 선배가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이며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계신 노라노씨입니다. 그분이 아주 싼 값으로 양장 두 벌을 해주셔서 제법 멋을 부리고 출국했습니다』
 
  ―무슨 공부를 하셨습니까.
 
  『메리 하딘 베일러 대학 음악과를 졸업한 후 성악가가 되기 위해 뉴욕에서 여러 선생님께 개인교수를 받았지만, 낮에 힘든 일을 하고 나서 물 젖은 솜같이 피로한 몸으로 성악 연습을 계속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1973년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한 것을 마지막으로 성악가로 대성해 보겠다는 꿈을 접었습니다』
 
  그녀는 1969년부터 뉴욕 컬럼비아大 동양학도서관에서 사서로 취직해 27년간 근무하다가 1996년 6월 정년퇴임했다.
 
  『그곳에 근무하게 된 덕택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배웠고, 아버지의 숨은 면모를 발굴할 수 있었어요. 저는 그전에는 아버지를 잊어버리고 싶었는데…』
 
  ―왜 아버지를 잊고 싶어 했습니까.
 
  『저의 할아버지 高宗과 아버지 의친왕은 유약하고 무능했던 황제, 술과 여자만을 탐하고 무위도식했던 왕자로 왜곡되어 왔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이 세상에 태어나신 이후 항상 역사의 그늘 속에 사시면서 좌절의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도서관에서 아버지와 관련한 옛 자료를 새로 접하고는 잘못 알려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참모습을 널리 알려 두 분의 영혼을 달래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1997년, 이해경 여사는 자신의 체험과 왕실 관계자의 증언 및 해외자료를 바탕으로 한 회고록 「나의 아버지 의친왕」을 발표했다.
 
 
  王家 여인들의 공간 樂善齋
 
  樂善齋(낙선재)는 이해경 여사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공간이었다.
 
  『어릴 적 尹대비(순종비)께 인사드리기 위해 낙선재에 들어오면 尹대비께서는 거처하시던 錫福軒(석복헌: 낙선재의 안채)에서 이곳으로 나오셔서 우리들에게 토스트와 차를 먹였습니다.
 
  건넌방에는 영사기가 설치되어 있어 활동사진을 볼 수 있었어요. 尹대비는 석복헌에서, 덕혜옹주(고종의 외동딸)는 壽康齋(수강재: 낙선재의 또하나 안채)에서 만년을 보내셨습니다』
 
  원래 낙선재는 憲宗(헌종)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헌종은 임금이 된 후에야 장가를 들었다. 세 번의 간택을 거쳐 세 여인만 남게 되었는데, 왕대비는 그중 한 여인을 왕비로 낙점하고 혼사를 치렀다. 그러나 헌종은 「최종 심사」에서 떨어진 김씨가 마음에 들었다.
 
  헌종은 그녀와 王婚(왕혼: 임금이 선택한 여인과 혼인하는 것)을 하고 사랑에 빠졌다. 사랑하는 김씨 여인을 위해 왕비전과 멀리 떨어진, 그것도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 그러면서도 쉽게 다닐 수 있는 곳에 사랑의 보금자리를 지었던 것이다.
 
  낙선재는 尹대비·덕혜옹주뿐만 아니라 영친왕비 方子 여사, 그리고 이구씨의 8세 年上의 부인이었으나 버림을 받은 줄리아 여사가 기거했던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2005년 7월16일에 별세한 「황세손」 이구의 빈청이 설치되어 있다. 동행한 「황사손」 이원씨에게 물었다.
 
錫副軒 뒤편의 화계.
 
  방송국 PD에서「皇嗣孫」으로
 
承華樓로 통하는 만월문.
  ―어떤 절차를 거쳐 「황사손」이 되셨습니까.
 
  『작년 7월19일,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이환희 이사장이 東京에서 돌연사하신 「황세손」의 시신을 운구해 오셨습니다. 저는 7월18일 회사일로 제주도에 내려가 있었는데, 아버지(의친왕의 제10남 李忠吉씨·在美)가 귀국해 제게 급히 上京하라고 하셔요.
 
  장례를 치르려면 喪主가 있어야 하잖아요. 7월20일, 황실의 후예들이 빈청에 모여 저를 「喪主」로 정했고, 7월22일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긴급이사회를 열어 저를 황사손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저는 빈청에서 告由(고유)를 하고, 조석상식으로 卒哭(졸곡)을 마치었고, 3년상이므로 아직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의 朔望祭(삭망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원씨는 국내에서 고교를 마치고 19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NYIT大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1986년). 졸업 후 3년간 뉴욕 케이블 TV 뉴스채널의 「롱아일랜드 뉴스 투나잇」 쇼 PD와 HBO 영화채널 PD로 근무했다.
 
  귀국 후에는 금강기획 차장PD로 재직하면서 「현대방송」의 개국 맴버로 참여했다. 이후 현대방송의 편성기획차장, 예능2국 차장PD를 거쳐 「스카이 라이프」 위성방송 「뷰티TV」 개국 때 제작기획 총괄이사로 일했다. 이어 현대홈쇼핑 영업·디지털방송 담당 총괄부장으로 5년간 재직해 오다 「황사손」으로 결정된 후 퇴직했다.
 
  우리 일행은 숲 사이로 난 고갯길을 따라 연경당으로 내려갔다. 이해경 여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尹대비께서 여기 연못가에서 황족과 시녀들이 참가하는 운동회를 여셨는데, 우리는 상을 받아 좋아라 했죠』
 
  ―어떤 운동을 했습니까.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으면 술래가 뒤에다 몰래 수건을 놓고 달아나는 놀이, 앞치마를 두르고 밤줍기 시합을 하는 拾栗會(습율회) 등이었습니다. 여긴 밤나무뿐만 뽕나무도 많았습니다. 저는 尹대비께서 누에들이 뽕잎을 먹는 것을 보러 여기 오실 때 뒤따라 다녔고, 여고 시절엔 꽁꽁 언 연경당에서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습니다』
 
 
  당나귀와 숏다리
 
  약 3시간에 걸친 창덕궁과 낙선재 산책에도 불구하고 이해경 여사는 전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창덕궁을 나와 돈화문 건너편 「전주 이씨대동종약원」(종로구 와룡동 139) 뒷골목 한식집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이 오찬에는 오랜만에 귀국한 이해경 여사를 맞아 450만 전주 이씨의 종친회인 종약원의 부회장·사무총장 등 10여명이 합석했다. 필자는 유일한 異姓(이성)이었다. 한 전주 이씨 종친이 필자에게 먼저 유머 한마디를 던졌다.
 
  『鄭기자는 왜 鄭씨를 「당나귀」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奠자 옆에 당나귀 귀(우부방)가 달려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실은, 필자의 집안 어른들은 「鄭」자를 略字(약자)로 쓸 때 첫 획(八)을 절대로 세우지 않고 눕혀 쓴다. 「당나귀」라는 놀림이 듣기 싫어서 그런 듯하다. 어떻든 필자의 조상들이 싫어하는 「당나귀」란 소리를 들었던 만큼 후손으로서 全州 李씨들에게 약간의 「거래」를 해야 했다.
 
  『아이구, 전주 이씨는 모두들 貴人相입디다』
 
  (특히 황실 후예들의 얼굴을 보면 그들이 처한 현재의 사회·경제적 처지가 어떠하든 어떤 기품을 느끼게 된다)
 
  『어째서요』
 
  『원래 동양적 貴人相은 劉備(유비: 蜀漢의 황제)처럼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아서 팔을 쭉 펴면 무릎 아래로 손끝이 내려와야 하거든요』
 
  『그건 그래요. 대학 시절 하숙을 함께 하던 내 친구는 롱다리였는데, 반면 나는 상체만 긴 숏다리. 그래서 내의를 살 때 사이즈 90과 100, 두 벌을 사서 친구는 90짜리 상의와 100짜리 하의를 입고, 나는 100짜리 상의와 90짜리 하의를 입었거든요』
 
  좌중에서는 『영친왕의 상·하체 비율을 보면 1대 1이셨어』, 『고종황제와 의친왕도 그러셨지 뭐』 라는 유머가 뒤따랐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필자는 그들의 유연성을 느꼈다.
 
  고종과 장남 순종의 신장은 사진자료를 통해 보면 160cm가 되지 않는 것 같다. 고종의 차남인 의친왕과 3남 영친왕, 외동딸 덕혜옹주 그리고 현재 생존중인 의친왕의 자녀인 이해원·이해경·이춘길·이석씨 등의 키도 모두 그렇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영친왕비 方子 여사의 소생인 황세손 이구(2005년 별세)였다. 그의 키는 163cm 정도였다.
 
  조선왕조의 태조 李成桂(이성계)의 정확한 키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천하의 名弓이며 왜구 토벌에 제1공을 세웠던 분이다. 이런 점 등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최고의 무장에 어울리는 체형이었을 것이다. 조선조 창업에 태조를 도운 太宗 李芳遠(이방원)도 文武兼全(문무겸전)의 인물이었던 만큼 신체조건이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후손들은 왜 이처럼 키가 작아진 것일까.
 
  어느 왕조에서나 창업자(太祖)를 보면 長大한 武骨(무골)이다. 太祖 다음의 후계자(太宗)도 왕조 開創에 태조와 同業한 인물들인 만큼 太祖 못지않게 씩씩한 모습이다. 그러나 3~4代가 지나면 으레 약골의 임금이 나온다.
 
  왜 그럴까. 그것은 왕궁이야말로 인간의 성장조건이 가장 열악한 곳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왕 또는 왕자들은 칼로리 높은 기름진 음식은 다량 섭취하면서 운동량은 절대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임금이나 그 후계자는 궁녀들에 둘러싸여 생활하는 탓에 下代로 내려갈수록 기상도 나약해지게 마련이다.
 
 
  이해경·이원의 탄탄한 현실 인식
 
  中國의 경우 한 왕조의 존속기간은 평균 200년 정도이다. 조선왕조가 519년간 존속한 것은 경이적인 일이었다. 혹자는 조선왕조의 장기존속은 事大외교와 성리학 唯一(유일)체제의 결과였다고 말한다.
 
  조선왕조가 창업 200년 만에 일어난 임진왜란 후 또는 244년 만에 발생한 병자호란 후에 망하고 새로운 기풍의 나라가 섰다면 오히려 민족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더욱이 조선왕조(대한제국)는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다는 점에서 민족사적 평가는 매우 낮을 수밖에 없다.
 
  대한제국 왕실은 일제에 의해 망가졌을 뿐만 아니라 광복 후에도 李承晩 정권의 황실재산 박탈에 의해 몇 분의 예외를 제외하고 그 후예들 대부분 사회경제적 약자로 전락했다.
 
  이런 맥락에서 『대한민국에는 황족은 없고 황실의 후예만 있다』는 이해경 여사와 이원씨의 말은 현실에 바탕한 自己 아이덴티티(正體性)의 선언이었다. 왜곡된 대한제국 황실의 명예회복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황실 복원」의 정당성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우리 민족사 최초의 성공한 國民國家(국민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이 「대한제국 부활」 운운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일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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