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로고
2003년 8월호

일본 政界의 떠오르는 별,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 副장관

對北 강경책 주도 總理 후보 1위

 

● 북한을 폭력단으로 규정, 『대화 주장하면 非상식적인 사람』이라 포문
●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前 총리가 외할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 前 외무상이 아버지
●「일본 제일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내 자부심이 높다


鄭 權 鉉 朝鮮日報 東京특파원〈khjung@chosun.com〉
『총리 되면 일본 憲法부터 고치겠다』
  日本에서 요즘 아베 신조(安倍晋三) 官房(관방) 副장관은 가장 주목받는 정치인이다.
 
  일본의 외교·안보 정책에도 상당한 발언권을 가진 그는 북한 核문제에서 항상 對北 압박론의 선봉에 서 있다. 對北 경제제재의 필요성을 거침없이 내뱉는가 하면 자위대 존재를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기 위한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주저 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지난 6월14일 요코하마(橫濱)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폭력단 같은 북한과 대화만 주장하는 사람은 非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월간 文藝春秋(문예춘추) 6월호 인터뷰에서는 『전수(專守)방위라 하더라도 상대의 공격을 받을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전수방위 개념의 수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 발 나아가 그는 金正日로부터 일본을 지킬 수 있느냐는 질문에 『물론이다. 맡겨 달라』고 당당히 말하기도 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總理가 된다면 가장 먼저 憲法부터 개정하겠다』고 말한다. 현재의 헌법은 1947년 美軍 점령下에서 만들어져 자위대 활동에 대해 명시적으로 써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다.
 
  지난 5월 하순 美日 정상회담 후 언론 발표에서 「(對北) 압력」이라는 표현을 쓰자는 그의 주장과 그것에 반대한 외무성이 한바탕 격돌한 끝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그의 손을 들어 주면서 그의 발언에는 더욱 무게가 느껴진다. 그의 이 같은 발언과 주장들은 최근의 우경화 바람을 타고 일본 국민들에게도 깊숙이 각인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아베 총리 大望論」도 나오고 있다.
 
  요미우리(讀賣) 신문이 지난 5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再選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東京) 都지사를 제치고 「총리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 두 번째로 조사됐다. 1위는 고이즈미 총리이기 때문에 「포스트 고이즈미」의 선두 주자로 뛰어오른 셈이다. 그가 강연에 나서면 언제나 만원이고, 청중들은 『빨리 총리가 되어 달라』며 성화가 대단하다.
 
  오는 9월 예정된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對抗馬(대항마)로 이름이 거론되는 사람은 전부 환갑 전후의 노인들뿐인 만큼, 올해 49세의 아베 신조 부장관이 세대 교체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대안이 없으니까 고이즈미를 지지한다. 따라서 고이즈미 재선은 확실하다』는 꽉 막힌 日本의 정치상황에 새 바람을 불어넣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정계의 떠오르는 별」이다.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가 집권한 이래 떴다가 사라진 기대주는 몇 명 있었다.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前 외상, 쓰지모토 기요미(元淸美) 前 사회당 정책심의회장,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伸晃) 행정개혁담당상, 다나카 야스오(田中康夫) 나가노(中野)현 지사 등.
 
 
 
 사토 에이사쿠 前 총리는 큰아버지
 
  과연 아베 신조 副장관은 떴다가 사라진 차기 주자들과는 달리, 일과성이 아닌 진정한 차세대 주자인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前 총리를 외할아버지로,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前 외상을 아버지로 둔 그는 대학 졸업 뒤 고베 제철소에서 샐러리맨 생활을 하다 1982년 아버지 비서로 정계에 입문, 1993년 의원 배지를 단 뒤 현재 3選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 패전 後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초안을 만들어 준 「평화헌법」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일본을 「군사적 보통국가」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처음으로 내걸고 추진한 인물.
 
  기시는 태평양전쟁 개전 때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의 각료를 지내고 종전 후 A급 전범으로 투옥됐다가 도조 등이 교수형에 처해지기 하루 전 무죄 방면된 이력을 갖고 있다.
 
  1955년의 「보수 합동=자민당 탄생」을 주도하면서 총리에 취임했지만 1960년 이른바 「안보 투쟁」이라는 좌파들의 저항에 부딪혀 퇴진했다.
 
  기시는 내각에 헌법조사회를 설치해 헌법개정을 시도하다가 『安保는 미국에 맡기고 경제에 매진하자』는 주장에 밀려 改憲을 공론화하는 데 실패했다. 아베는 평화헌법 개정과 「보통국가론」을 주창했던 외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더 늦기 전에 국가 가치관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아베 신조는 1954년 기시 前 총리의 장녀 요오코(洋子)와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 前 외상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 아베 히로시(安陪寬)도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前 총리(그는 기시의 친동생이지만 사토氏 집안에 양자로 갔다)가 그의 큰아버지이고, 사토 前 총리의 아들인 사토 신지(佐藤信二) 前 통산상은 그의 사촌이다.
 
  기시 가문에 양자로 들어간 동생 기시 노부오(岸信夫·작년 여름 스미토모 상사 퇴사)도 내년 예정된 참의원 선거를 목표로 뛰고 있다. 그의 부인은 모리나가(森永)제과의 마쓰자키 아키오(松崎昭雄) 前 사장 장녀 아키에(昭惠·40)씨이다. 아베 신조의 형 히로노부(寬信·미쓰비시 상사 근무)는 우시오 전기 회장의 장녀와 결혼하는 등 財界인맥도 탄탄하다.
 
  아베 신조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화려한 배경을 의식한 것 같다. 소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東京에서 유력 집안의 자제들이 다니는 세이케이(成)에 다녔다. 아베 신조는 소학교 때 문집에 「나의 꿈은 실업가겸 정치가. 선거에 나올 때를 대비해 야마구치(山口)현의 학교로 전학을 갈까」라고 썼다. 기시 前 총리는 죽기 전에 외손자인 아베 신조를 불러 빨리 정치가가 되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자란 환경 자체가 일종의 「帝王學(제왕학)」인 셈이다.
 
  하지만 아베 신조는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한 것 같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최고 명문 東京대학을 지망했지만 결국 그러질 못했다. 아베가 소학교 때 가정교사를 한 사람이 히라사와 가쓰에이(平澤勝榮) 중의원이다. 히라사와 의원은 일본 국회에서 우파 인물들이 집결된 「납치의원 연맹」 회장이다.
 
  두 사람이 납치문제에 2인3각으로 뜻이 맞는 것은 40년 전의 인연도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히라사와 의원은 『아베는 애국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총리가 되려 한다면 내가 발벗고 나선다』고 말하고 있다. 아베는 세이케이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大 정치학과로 2년간 유학한 적이 있지만, 그의 경력란에 「졸업」이나 「修了」라는 두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在북한 일본인 妻, 돌려보내지 않는 데 앞장서
 
  미국에서 귀국한 뒤 고베 제철소에서 3년 반 샐러리맨 생활을 체험한 뒤 아버지 아베 신타로 외상의 비서관으로 들어가 정치수업을 쌓기 시작했다. 1991년 아버지 아베 신타로가 사망하자 곧바로 지역구를 물려받아 1993년 37세에 중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됐다. 당시 어머니 요오코씨의 눈물겨운 선거운동은 지금도 일본 정계에서 회자되고 있다.
 
  아베 신조는 자민당內에선 소장파에 속하지만, 후생족(厚生族)의 한 사람으로, 1999년 자민당 사회부 회장을 지냈다. 의사회, 치과의사회, 약사회 등 이른바 「三師會(삼사회)」가 그의 확실한 후원 세력이다. 그의 정치자금 보고서에는 제약업계의 정치단체도 단골로 등장한다.
 
  2000년 제2차 美日 모리 요시로(森喜郞) 내각의 관방(官房) 부장관에 기용됐다가, 2001년 4월 발족한 고이즈미 내각에서 유임됐다. 관방 부장관 在任 기간은 역대 最長을 기록하고 있다.
 
  1960년 美日안보조약 개정을 이뤄 낸 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名외상으로 불린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후손답게 정치 입문 때부터 일본의 외교 안전보장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총리관저에 들어가기 전까지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소장파 의원 모임」의 사무국장을 하면서, 『교원노조가 주도하는 교과서 채택은 이상하다. 일본인의 문화, 전통, 가치관에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남에다 집안 좋고 야심만만하지만 세파에 시달리지 않은 그의 모습에서 어딘가 연약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반대로 「귀하신 몸」을 좋아하는 일본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얻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의 정치사에선 이런 유형이 경험과 수완과 관계없이 정치의 전환기에 總理로 등장한 적이 있다. 戰前에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 戰後(전후)에는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前 총리가 좋은 예다. 아베도 그런 時流에 편승할 소질이 충분히 엿보인다는 게 중론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미디어를 잘 활용했다는 점이다.
 
  옷차림이나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베는 지난해 주로 인기 연예인들이 선정되는 「베스트 드레서」(가장 옷 잘 입는 사람)에 선정됐다.
 
  그의 대중적 인기가 올라가면서 그의 반대 세력들로부터 『정책이 없다』는 비판을 자주 듣고 있다. 北韓의 일본인 납치문제에서 아베 신조가 내놓은 최대의 정책은 소가 히토미씨 등 귀국한 5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도록 한 것이다. 외무성은 돌려보낼 것을 주장했지만, 여론은 아베 편이었고, 고이즈미 총리도 결국은 그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 후 아베 신조는 납치 피해자와 가족회로부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부의 상담역」으로 떠올랐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납치 피해자 가족들과 면회하고, 적극적으로 그들의 대변인 역할도 자임하고 있다.
 
 
 
 日北 정상회담에서 납치 사과도 받아내
 
   그의 매파적인 성격 때문에 총리 관저라는 정권의 중추에 앉아 있으면서도 가끔은 핵심정보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 아베는 작년 9월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방문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한다. 북한과 대화 노선을 주장하는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과 연결된 외무성이 「강경 노선」의 아베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訪北에 동행한 그가 日北 정상회담에서 북한 측에 납치 사건의 해명을 강하게 주장해 관철시킨 것은 앞으로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관방 副장관으로서 담당해야 할 국회 대책에서는 한 발짝 물러서 있고, 경제는 원래 잘 모르니까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방 부장관으로서 그의 역할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게 각종 선거 지원 연설이다. 대중적인 人氣가 높은 만큼 그가 선거 지원 연설에 나가면 청중 동원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의 정치력에 대해선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자민당 사회부 회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99년 말 예산 편성 때의 일이다. 2000년 4월부터 실시할 예정이었던 介護(개호)보험제도의 도입을 앞두고 카메이 시즈카(龜井靜香)정조회장이 『개호보험제도는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미풍을 해친다』며 반대했다.
 
  아베는 본래 예정대로 실시한다는 입장을 정하고 사태해결에 나섰지만, 法案을 밀어붙이려는 의원들과 카메이 정조회장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 이렇다 할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결국은 보험료 징수 반년 동결이라는 어정쩡한 타협안을 만들어 냈다.
 
  고이즈미 정권을 탄생시킨 2001년 총재 선거 때도 마찬가지다. 고이즈미는 당원표를 휩쓸었지만, 고이즈미가 속한 모리(森)파 간부들은 아무래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선거 규정상 당원표보다 의원표의 비중이 커서 의원수로는 당내의 과반수를 얻을 수 없다는 불안을 떨쳐 내지 못했다. 모리파는 카메이(龜井)파와 「정책협정」이라는 종래와 같은 파벌 간 담합에 나선다.
 
  이때 아베는 모리파의 교섭역으로 카메이派 소장의원과 호텔에서 비밀교섭을 거듭했다. 카메이 前 정조회장은 후보를 사퇴하는 대신 자민당 간사장 자리를 내심 기대했지만, 당직 인선과정에서는 철저하게 물을 먹었다. 카메이는 고이즈미 집권 이래 찬밥 신세가 됐다.
 
  요즘 카메이 前 정조회장이 오는 9월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를 표명하고, 反고이즈미를 선명히 하고 있는 것은, 그가 명분으로 들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의 경제정책 실패보다도 2001년 총재선거 당시의 배신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베는 카메이를 동정하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그를 잘 아는 정치부 기자들은 당시 카메이派와의 정책협정이 모리派 차원의 음모라는 것도 모르고, 모략의 선봉을 담당했다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調整 능력 약해, 言論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
 
  일본 정치에서는 요즘 다케시다 노보루(竹下登) 前 총리 유형의 조정형 정치는 혐오의 대상이 된 지 오래됐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인에게 調整(조정) 능력은 불가결하다. 특히 한국과는 달리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의 정치인들에게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그것은 정치인의 德目에 해당한다. 아베에게 그런 재능은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를 아는 정치부 기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역시 아베는 납치자 가족들의 「대변인」役으로 등장하면서 각광받은 것을 빼면, 그가 뉴스를 만드는 것은 문제 발언을 할 때 뿐인 것 같다. 올 들어 對北 강경발언에 유난히 눈에 띄지만, 작년에도 그는 폭탄 발언을 자주했다.
 
  『도이 다카코(사민당 당수), 간 나오토(菅直人·민주당 당수)는 바보다. 고이즈미 총리를 비난하는 것이 가소롭다』(작년 10월 납치 실행범을 정치범으로 착각해서 석방요구한 것을 비난하며), 『민주당 조사단은 中國의 확성기다』(작년 5월 중국 심양의 탈북자 사건을 둘러싸고) 등.
 
  그의 발언 내용에 공감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총리를 노리는 정치가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그의 미디어 비판이다. 작년 이맘때 아베는 와세다(早滔田)大 특별 강연에서 약 200명의 학생들 앞에서 『대륙 간 탄도탄과 소형 원자탄을 갖는 것 자체가 헌법상 문제는 없다』, 『핵무기 사용은 위헌이 아니다』는 등의 「용기 있는」 발언을 했다.
 
  그의 발언은 마이니치(每日) 신문이 발행하는 주간지인 선데이 마이니치에 특종 보도됐다. 발언 그 자체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국회에서 야당의원들의 집중추궁을 받게 되자, 아베는 『조용한 학문의 전당에 주간지가 도청기와 비디오를 설치해 센세이셔널한 화제로 삼았다』며 논점을 교묘하게 돌렸다. 그를 담당하는 정치부 기자들에게는 『대학內 과격파 분자들과 주간지가 짜고 나를 함정에 빠뜨렸다』는 음모설을 거듭 주장했다. 실상은 그의 발언 내용에 놀란 대학 관계자의 고발이 발단이었지만, 아베는 마이니치 신문과의 舊怨(구원)을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고 있다.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 前 외상도 정치에 입문하기 전 한때 마이니치 신문기자를 지냈지만, 1991년 리크루트 사건 때 아베 신타로의 리크루트 주식 수수 사실을 특종 보도한 신문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마이니치였다.
 
  아사히 신문도 그의 표적이다. 아베는 연초 강연에서 『납치문제에 타협은 없다. 아사히가 주장하는 것은 북한이 죽었다고 말하는 8명을 잊어버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의 발언을 계기로 산케이 신문이 특집기사를 게재해 아사히 비난에 동참하는 등 큰 소동으로 번졌다.
 
  그렇지만, 아사히 신문의 신년 사설에는 아베가 말하는 그런 주장은 없었다. 아사히 신문은 작년 12월8일자 사설에서 『북한을 몰아붙여서 문제가 해결될 정도로 간단하지는 않다. 문제 해결을 위해선 일본 측도 타협을 일체 배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베는 『신년 사설도 그런 논조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고 받아들인 것이 진상이다.
 
  아베는 산케이 신문사가 발행하는 월간 「세이론(正論)」誌의 애독자다. 기자가 지난 6월 말 총리 관저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 그의 서재에는 매달 순서대로 正論誌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잡지인 正論誌가 아베의 주장을 집중 게재하고 있고, 그 논조가 아베의 투쟁의지를 북돋워 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젊은 층의 向背가 그의 정치 앞날 결정
 
  요즘 일본 政界에는 與野 가릴 것 없이 아베流의 40代 소장 정치인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하다. 이들은 「일본 넘버 원」이던 1970~19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만큼, 긍지가 강하고 외교·안보 문제에도 제 목소리를 낼 줄 안다.
 
  만년 與黨이던 자민당이 野黨으로 전락하면서 일본의 정치가 요동을 칠 때 정계에 입문했던 사람들이라 정치의 쓴맛도 겪을 만큼 겪었다.
 
  지난 6월6일 일본 국회에서 전쟁대비법인 有事法制(유사법제) 3법이 與野를 뛰어넘어 의원 90%의 압도적 다수로 가결된 것은 그냥 이뤄진 게 아니다. 일본의 젊은층은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 불황에 찌든 그들이 아베와 같은 새 정치 엘리트의 호소에 어떻게 흔들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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