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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의 시대, 재즈는 끝이 났나?

[阿Q의 ‘비밥바 룰라’] 루시엥 말송이 쓴 《재즈의 역사》 ⑤끝 “재즈 모험은 계속 돼”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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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들.

[편집자] 25년 전 루시엥 말송이 쓴 《재즈의 역사》라는 책이 국내 번역됐다. 역자는 이재룡씨. 감수자는 재즈평론가 김진묵씨다. 지금은 절판된 이 책에는 19~20세기 재즈 역사에 대한 뿌리가 담겨 있다. 교향악 중심의 유럽음악과 달리 재즈는 색다른 음악세계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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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엥 말송이 쓴 《재즈의 역사》 
헛간에서 대충 제작한 보잘 것 없는 악기, 훗날 공업 연장에서 빌려온, 그래서 필연적으로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이런 악기가 재즈에는 존재했던 것이다.
월간조선은 재즈의 원류에 대해 5차례에 걸쳐 요약해 전달한다. 이 책이 재출간되기를 희망하면서...
 
① 뉴올리언스의 영웅들 / 루이지애나 재즈맨의 이동 / 시카고와 뉴욕을 사로잡다
② 대공황과 재즈맨 / 스윙 시대의 미국 / 제2차 세계대전 : 재즈의 휴지기
③ 바퍼들의 혁명 / 냉정을 되찾은 순간
④ 반성의 순간 / 뉴싱, 재즈-록과 리듬 앤드 블루스 / 팽창과 수축
⑤ 재출발의 시대 / 재즈의 세기
 
1.
1980~89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미국의 두 번째 도시인 시카고의 시장으로 흑인인 해럴드 워싱턴이 당선되었다. 소울 뮤직, 그 다음엔 블랙 뮤직으로 이름을 달리 한 리름 앤 블루스 분야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뮤직 비디오 clips가 잘 포장된 상품으로 비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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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스 데이비스
1980년대는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사회적 이미지’가 주도했던 시기다. 자신의 음악을 록 음악과 동일시하는 것을 혐오했던 마일스는 흑인 ‘펑크’ 엑센트를 ‘슬래핑’에 도입하여 슬그머니 받아들였다. 슬래핑은 콘트라베이스의 네크를 두드리던 루이지애나 연주기법이었다. 마일스는 비록 그의 음악에 심취한 백인들에게도 접근을 허용했으나 트럼펫 연주는 그 작품이나 기법에서 아프로-아메리칸의 정신을 표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반면 마이클잭슨과 프린스의 레퍼토리를 연주한 것은 그들이 비록 신리도퍼의 팬일지라도 동시대의 모든 현재형 음악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10년 동안 드문드문 하지만 규칙적으로 매버 새로운 광채를 더하며 음반을 취입했다. 그의 음악 경력의 표지판 정도를 꼽자면 《Ursula》(1980), 《Jean-Pierre》(1981), 《Star People》(1983), 《That’s Right》(1984), 《Time after Time》(1985), 《Tutu》(1986), 《Amandla》(1988) 등이 있다. 이제 마일스 데이비스는 최대의 명예를 누리고 있다. 그가 빠진 재즈 페스티벌은 상상할 수 없다.
 
2.
1980년대 혜성처럼 등장한 기타리스트는 드물기는 했지만 명성을 굳힌 경우는 있었다. 마이크 스턴(Mike Stern)도 여러 스타일을 혼합하여 돌풍을 일으켰다.(‘Little Shoes’(1986)) 존 스코필드(John Scofield)도 지미  헨드릭스와 음의 포화를 생각해낸 연주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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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조던
음정을 뒤섞고 코드를 혼란스럽게 사용하는 스탠리 조던(Stanley Jordan, ‘Eleanor Rigby’(1985))도 같은 계열에 속한다. 분명하게 구분되는 여러 흐름을 합친 팻 메시니뿐만 아니라 오직 로큰롤만을 연주하는 음악산업에도 붙여진 ‘퓨전 재즈’란 명칭은 ‘한가지로 귀착되는 장르’를 연주한다는 딱지를 피하기 위해 거의 편집광적으로 상용되는 명칭이 되어버렸다. 이 알맹이 없는 명칭은 아무렇게나 편리하게 사용되거나 애매모호하게 남용되고 있다. - 허비 행콕의 ‘Roct It’(1988)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아무큰 이 세기말에 만들어진 적절하지 못한 용어임에 틀림없다.
 
리듬 앤 블루스(1982년부터 블랙 뮤직이라 불리기도 한다.)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프린스가 이런 상황에 혼란을 가져왔다. 흑인이지만 희끄무레한 피부색이며 남자이지만 옷차람이나 행동은 여성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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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
그는 퀸시 존스(Quincy Jones) 휘하에서 ‘Thriller’로써 음악계의 거물로 등장한 마이클 잭슨을 자신의 경쟁자로 생각했다. 아프로-아메리칸 음악을 주시했던 사람들에게 마이클 잭슨은 낯선 이방인이 아니었다.
 
이미 10년 전, 그의 다섯 형제(잭슨 파이브, 후에 잭슨 식스가 됨.)와 더불어 그는 파리의 무대에 선 적이 있었다. 이 우스꽝스런 형제, 극장을 가득 메운 10대들의 스타가 연출해 낸 콘서트를 평하는 《르 몽드》지는 “정교하게 안무된 춤에서 우리는 그들의 재능이 있음을 파악했다. 특히 마이클은 뛰어난 댄서이다”라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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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3.
이보다 덜 흥미로운 것은 랩 음악이었다. 랩은 음악이 오직 리듬을 탄 가사의 차원으로 축소된 것으로 이미 제임스 브라운이 까마득한 옛날에 이미 시도했고 ‘전도사’들은 처음부터 랩을 해왔다. 빈민굴의 초라한 예술인 랩 뮤직은 비록 그 가사가 남성우월주의, 탈색주의, 마약, 패싸움, 질병, 자유를 좀먹는 암 등을 고발하는 보편적 내용을 담고 있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불안정하 형태인 흑인 속어를 모르는 사람은 친근하게 다가갈 수 없는 음악이다.
 
재즈는 특정 세대가 아니라 여러 예술인들(그들 중에는 머리가 희끗희꿋한 노령도 끼여 있다)의 결집된 노력 덕분에 원만하게 발전을 해왔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스타일을 서로 채택하는 유연성을 발휘했다. 그룹은 결성과 해체를 거듭했지만 그 정신만은 이어졌으며 대개의 경우 알려졌거나 인기를 얻은 사람 중 그 누구도 대스타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몇몇 재즈맨이 여기저기 눈에 띄기도 했다.
 
하나의 기준점을 잡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자면 리듬 감각에 뛰어난 존 애버크롬비(John Abercrombie, 기타), 마크 존슨(Marc Johnson, 베이스), 피터 어스킨(Peter Erskine, 드럼) 등이 있다. 이들은 음반 취입에 자주 불려다니며 쉴 새 없이 연주를 했다. 존 애버크롬비는 무수한 음악적 모험에 동참했다.
 
그는 할렘의 인기 있는 오르간 주자 조니 '해먼드' 스미스(Johnny ‘Hammond’ Smith)의 파트너이기도 했고, 뉴디렉션스의 잭 디 조넷(Jack De Johnette)의 협연자로 활약하며 경력을 쌓았다. 마크 존슨은 그의 윗세대인 에디 고메즈, 외르스테드 페데르센, 데이브 홀런드 등의 뒤를 이어 고음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손가락은 거의 브리지 유니티에 닿아 있어서 과거에는 적절한 마이크만이 청중의 귀로 음을 전달할 수 있었다. 피터 어스킨은 여러 재능을 골고루 갖춘 연주가였다.
 
켄턴의 빅 밴드에서 데뷔할 만큼 힘찬 파워도 있었고 그의 가볍고 섬세한 연주는 감탄을 자아냈다. 이 3명의 뛰어난 멤버는 마이클 브렉커(Michael Brecker)와 손을 잡았다. 완벽한 테크닉, 가벼운 음색, 확고부동한 신념을 겸비한 브렉커는 색소폰은 과거와는 달리 더 이상 기타에 의해 압도당하지 않았다. 트럼펫이 많은 자리를 내주는 상황에서 색소폰은 원래의 지위를 되찾았다. 10여 년 동안 색소폰 주자의 연주 테크닉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수천 명의 색소폰주자들은 그저 잘 부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4.
수많은 연주가들 중에서 작곡, 편곡,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에 지휘까지 겸했던 칼라 블레이(Carla Bley)는 이들과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다. 1980년 이래 그녀는 새로운 각광을 받았는데, 모두가 기다렸던 선물을 그녀가 제시했기 때문이다.
 
각 마디와 각 시퀀스마다 진정한 새로움을 심판하는 음악, 전례 없는 음색의 믹서,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유머러스하고 냉소적이기까지 한 음악이 바로 그녀의 선물이었다. 어떤 때는 잔 걸음으로 어떤 때는 성큼성큼 배구 선수나 마술사처럼 오케스트라를 향해 손을 뻗치고, 걸 스카우트 소녀처럼 자신의 권위를 즐기며 꿈을 추구했던 그녀는 “난 프리 재즈는 혐오해요”라고 말해서 1960년대에 재즈 콤포저스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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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 블레이

과연 그녀의 음악은 재즈였을까? 그렇다, 재즈였다. 리듬 앤 블루스 계열에 속하는 일종의 맘보곡 ‘Slam’이나 길레스피 풍의 편곡자 아르투로(일명 치코) 가족 중 하나인 아르투로 오파릴의 돋보이는 소품 노래 ‘Very Simple’을 들어보면 명확해진다. 칼라의 단원들은 과거에서 자양분을 취해 나름대로 소화하여 재창조를 시도했다.

비음 같은 소리를 내는 테너 색소폰의 토니 대그레이디(Toni Dagradi), 공허한 음의 굴곡을 자아내는 스티브 스월로(Steve Swallow)의 베이스 기타, 게리 밸런트(Gary Valente)의 트롬본, 조 데일리(Daley Jo)의 튜바, 이런 것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이 재즈가 아니라면 무엇이 재즈일까?
 
그들의 과감한 유머인 ‘D.사프’, ‘I Want to You Love Me But You Have Me?’를 가사를 알 수 없게 횡설수설하는 드럼 주자 레 디에즈가 바로 재즈가 아닐까. 이런 음악으로붙 ㅓ나온 니노 로타(Nino Rota)가 작곡한 ‘8과 1/2 Huit et demi’ 주제곡이 재즈가 아닐까. 칼라 블레이(Carla Bley)의 악단은 그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자리, 다름 아닌 최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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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턴 마살리스

5.
칼라 블레이 악단과는 동떨어진 스타일이지만 재능을 발굴했던 아트 블레이키 악단에서 1980년대 트럼펫 주자 윈턴 마살리스(Wynton Marsalis)가 스타로 부상했다. 그는 18세 청년이었다. 그의 형 브랜포드도 얼마 뒤 그와 협주를 했다(‘Keystone’, 1981).
 
윈턴은 뉴올리언스 필하모닉 악단에서 연주생활을 할 정도로 뛰어난 클래식 주자였으며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수학했다. 1982년부터 그는 무한한 문화적 세계를 찾아서 재즈에만 몰두하며 젤리 롤, 듀크, 몽크(즉 화음적 농밀성, 빌 에번스 식의 ‘보이싱’을 배제한 재즈)를 우상으로 삼은 피아니스트 마커스 로버츠처럼 흑인 음악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윈턴 이전에는 어떤 트럼페터도 그처럼 완벽하게 음을 통제하고 템포와 무관하게 저음, 중음, 고음을 내는 호흡을 조절하고, 감상의 어려움을 깨끗이 해소한 음의 균일성을 성취한 사람은 없었다.
 
두 음을 같은 강도로 싱코페이션한 3박자 곡 ‘When You Wish Upon a Star’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편안한 상태' 에서 재즈를 연주했다. 그는 ’Cherokee‘ 같은 재즈의 스탠더드 곡을 리바이벌했고 킹 올리버, 클라크 테리, 엘링턴 악단의 독주가를 흉내내는 것을 극구 배제하면서도 그들의 음악을 복권시키며 경의를 표했는가 하면 ’Star Dust’(1985)의 잊힌 구절도 연주했다. 레오나드 페더는 《Los Angeles Times》지에 이렇게 평했다.
 
“마살리스 형제는 1980년대와 더불어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다."
 
6.
1990년대는 재즈 초기 시절에 흑인이 겪었던 모든 굴욕을 해소하지 못했으며 재즈는 몇몇 이유로 인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지난 50년 동안인에도 재즈가 죽으리란 경고성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장의사들은 가족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 신문 지상을 통해 성대한 장례식을 마련하고 재즈를 생매장하려 들었다. 재즈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은 우선 많은 평론가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변해 버린 것을 동일한 명칭으로 부르길 거부한 것이 그 원인이었으며, 쇼 비즈니스와 레코드 산업 측면에서 문화적 과소비를 부추기기 위해 새로운 명칭을 남발했던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아치 셰프와 맥스 로치가 1973년 뉴욕의 학술대회에서 발언했듯이 흑인들이 이념적, 경제적 이유를 들어 자신의 음악을 이 낡은 명칭에 한정시키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도권 내의 많은 백인 음악들은 정부나 공공단체로부터 보조금이나 공식적 지원을 누려왔지만 그런 혜택에서 오랫동안 소외된 재즈맨들을 이해해야 하며, 또한 청교도적 부르주아가 재즈 음반에 퍼부은 악평에 고통받은 이들을 이해해야 한다.
 
소설이나 영화는 재즈를 밤의 세계나 범법자들과 연관시키면서 재즈를 오직 젊은 사람들만이 이해하고 말하는, 일종의 세대 음악, 커다란 아이(흑인들), 키만 큰 아이들, 혹은 정신 연령이 낮은 어른들을 위한 음악으로 만들어버렸다. 따라서 재즈란 용어가 이러한 현상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의 심경을 거슬렀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경직된 음악 팬(다른 형식의 음악을 좋아한 뒤에 나타난 형식은 거부하는 성향이 있다), 장사꾼(이익을 부풀리기 위해 신분증을 위조하여 재즈를 유통시켰다.), 그리고 뮤지션 자신들(인종차별주의, 부르주아의 위선, 문화적 인종중심주의에 의해 고통받았다.)인 이들 세 주역에 의한 삼중고를 겪은 재즈란 용어는 현대 음악의 한 조류, 더 나아가 대부분의 과거 아프로-아메리칸 음악을 지칭하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서적, 잡지 기사, 산처럼 쌓인 레코드를 몽땅 불태우지 않으려면 다양한 스타일, 듬과 소리를 지닌 미국의 아프로-아메리칸 음악은 대화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이 짧고 실용적인 용어로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물론 누구도 이 용어를 강요할 수 없고 자신의 음악을 지칭하기 위해 다른 용어를 만들어낸 음악인에게 이 용어를 쓰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만약 여러 가지 구조적 변화를 겪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본질을 유지한 미국의 아프로-아메리칸 음악을 지칭할 만한 짧고 포괄적인 용어가 나타난다면 우리도 재즈란 용어를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볼던의 트럼펫이 군중을 흥분시켰던 것이 1895년이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100여년이 지난 지금, 누가 감히 그 무수한 후손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가? 재즈의 모험은 계속되고 있다. 만약 흑인 공동체가 재즈에 사회 정치적 악귀가 씌웠다 하여 이 악귀를 내쫓기 위해 이 용어를 버린다면 어느 유머리스트가 유명한 비극에 대해 한을 재즈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가 아니었고 그런 이름을 지닌 한 인간이었다.”
 

입력 : 202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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