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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에 윤미향씨의 본 모습 알 수도 있었을텐데...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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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4일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184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집회에서 김복동 할머니가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에게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이유없이 문득 생각나는 순간들이 있다. 왜 그럴까 시간을 들여 곰곰 생각해보면 그렇다. 아마 뭔가 미묘히 균열이 숨어 있는 장면인 것 같은데, 그 당시엔 깨닫지 못한 순간들이다.
 
5년 전 얘기다. 그 해 <월간조선>은 위안부 할머님들과 관련해 기획 기사를 실었다. 여러 기자가 나라 별로 흩어져 취재를 했다. 기자는 일본 취재를 맡았다. 일본공산당의 시이 가즈오 위원장도 이 때 만났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정치인이다. 일본의 과거사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지식인이었고, 바이올린에 능했다. 정치에 대한 관이 바로 서있기도 했다. 정치인을 넘어 인간적으로 흥미로운 분이었다. 그는 일본이 한국 뿐 아니라 동아시아 곳곳에서 저지른 잘못을 사과하고 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관해서는 후에 더 설명할 기회가 있을 터다.
 
일본에 간 건 송신도 할머니를 뵙기 위해서였다. 그 때 이미 병환이 깊어 만나지 못했다. 말년을 침상에서 보내던 할머니는 2017년에 돌아가셨다. 대신 할머니를 곁에서 돌본 재일 교포 활동가 양징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전국행동’(이하 전국행동) 대표를 만났다. 당시 작성한 기사 중 일부다. 좀 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에 살고 계신 송신도 할머니는 만날 수 없었다. 할머니는 현재 입원 중이다. 특별한 병이라기보다는 노환 때문이다. 심장이 안좋아져 입원했는데, 입원 후에 더 몸이 쇠약해졌다고 한다.
한때 치매 증세까지 나타났지만, 현재는 정상으로 돌아와 재활 중이라고 한다. 1922년생, 벌써 아흔을 훌쩍 넘겼으니 무리도 아니다. 할머니 대신 양징자 대표를 만났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전국행동’(이하 전국행동)의 공동대표인 양씨는 송 할머니 곁을 20년 넘게 지켜 왔다. 양 대표에게서 송 할머니가 살아온 길을 들을 수 있었다.
 
양 대표와 할머니는 1992년에 처음 만났다. 당시 양 대표는 ‘종군위안부 우리 여성 네트워크’(위안부 네트워크)라는 모임에서 활동 중이었다. 여기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우리 동네에 위안부 출신 여성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스스로 연락한 게 아니라 주변 사람의 제보였기 때문에 단체에서는 피해자로 추정되는 분에게 연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를 취재해 책을 쓰기도 한 가와다 후미코 씨가 개인적으로 할머니를 찾아갔다고 한다. 할머니는 가와다 씨에게 “조선 여자와 변호사가 함께 찾아오라”고 했다. 그래서 찾아간 ‘조선 여자’가 재일교포 양징자씨였다.
30대 중반의 여자 변호사와, 30대 후반의 양 대표가 방문하자 할머니는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흥’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나이 지긋한 남자 변호사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조선인 여성을 기대했으리라. 2박3일 동안 이어진 할머니의 증언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정확했다.
 
할머니는 충청남도 논산 출신이다. 12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밑에서 자라던 할머니는 16세 때 집을 나왔다. 어머니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혼을 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여성이 다가와 “전쟁터에 가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따라간 끝이 위안부였다. 일본군과 함께 중국을 떠돌며 7년간 위안부 생활을 했다.
 
우리에겐 해방, 일본엔 패전의 해인 1945년, 어느 일본군이 다가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자”고 했다고 한다. 부부인 것처럼 결혼증명서를 이용해 무사히 중국을 빠져나왔다. 일본에 돌아오자 그 군인은 할머니를 버렸다. “미군 매춘부라도 하라”는 말을 남겼다. 할머니는 그 길로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가해자의 땅에서 가해자에게 버림받았기 때 문이었을까. 위안부 생활 7년을 죽지 않고 살아낸 스물세 살 여인이 기차 아래로 몸을 던질 때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짐작도 할 수 없다....(중략)
 
할머니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잠을 자기 위해 이불에 누워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양 대표는 ‘할머니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갑자기 환하게 웃더니 바로 잠이 들었다. 그 순간 양 대표는 결심했단다. ‘지금까지 아무도 할머니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구나. 나라도 할머니에게 엄마 같은 존재가 되어야겠다.’>
 
양 대표와 만난 곳은 도쿄 시내 한 호텔의 지하 커피숍이었다. 뉴오타니였던 것 같다. 주변은 몹시 북적거렸다. 하필 한가운데쯤 자리였다. 양 대표가 들려준 할머니의 인생사를 듣는데 눈물이 자꾸 나왔다. 당시 박근혜 정부와 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 합의가 막바지에 이른 참이었다. 얘기를 나누는데 양 대표가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할머니들이 그 합의를 받아들이더라도 정신대문제협의회가 이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윤미향 대표는 저에겐 좋은 친구이지만...”
 
당시는(사실 안 그런 적이 있었냐만은) 후에 정의연이 된 정대협이, 마치 ‘절대 선’인 것처럼 추앙받던 시절이었다. 매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연 수요집회로 1992년부터 여론몰이와 인기몰이를 해왔다. 최근까지도 열고 있다. 지난해 8월 14일에 열린 1500회 집회에는 2만여명이 참석하기도 했다.
 
그 날 양대표의 말 중, 말줄임표에 가려진 말은 뭐였을까. 두고두고 걸렸다.
 
한국에 돌아왔다. 그해 12월 28일 박근혜 정부와 일본의 아베 정부의 합의가 발표됐다. 할머니들을 위한 화해치유 재단을 만들어 할머니들을 지원할 것이며, 일본정부는 거기에 10억엔을 출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정대협은 당연한 듯이 이 합의문을 거부했다.
 
글=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입력 : 20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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