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NewsRoom Exclusive

추적보고-송두율의 배후세력<전편>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추적보고 - 송두율의 배후세력; 송두율ㆍ 서동만(국정원 기조실장)ㆍ 이종석(청와대 NSC 사무차장)은 「내재적 접근법」으로 맺어졌다; 吳 東 龍 月刊朝鮮 기자 프랑크푸르트發 「KAL 906편」 2003년 8월29일 오후 7시30분경, 개인 사업을 하는 A씨는 유럽 출장을 마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行 「KAL 906편」에 탑승했다. 보잉 747機는 오후 7시45분 프랑크푸르트 상공을 날아올랐다. 그는 2층 비즈니스석에 자리를 잡았다. 11시간의 비행 끝에 그는 8월30일 오후 1시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계류장에 도착했고, 짐칸에 있는 자신의 짐을 챙겨 2층(Upper Deck) 통로에서 1층에 있는 1등석 복도로 내려왔다. 순간, A씨는 그곳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2003년 4월 高泳耉(고영구·64) 국가정보원장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했던 徐東晩(서동만·47) 국정원 기조실장이 비행기 트랩을 빠져나가기 위해 복도에 서 있었던 것이다. 70석에 불과한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은 일반석과 出口가 다르다. 徐실장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일등석에 탑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테 안경을 낀 徐실장은 베이지색 드레스 셔츠, 紺色(감색) 양복 상·하의에 노타이 차림이었다. 그는 짐칸에서 여행용 서류가방을 내려 일등석 출구를 통과해 트랩으로 걸어나갔다. 이때 수행원으로 보이는 사람도 그를 뒤따랐다. 짐을 찾기 위해 徐씨가 手荷物(수하물) 컨베이어벨트에 도착하자 손에 무전기를 든 사람이 나타났다. 徐실장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춘 그는 徐씨가 여행용 가방을 찾는 동안 어디론가 분주히 무전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徐씨는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공항청사를 총총히 빠져나갔다고 한다. 徐東晩 기조실장이 독일을 방문한 시점은 현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북한 노동당원 宋斗律(송두율)씨가 국내에 들어온 2003년 9월22일보다 20여 일 앞선 시점이었다. 宋씨의 귀국은 9월22~26일까지 펼쳐진 「해외 민주인사 한마당」 행사의 주최 측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朴炯圭)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이때 국가정보원은 宋씨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법원으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상태였다. 체포영장에는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혐의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徐실장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은 그가 베를린에 갔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독일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올 경우에는 반드시 직항 편이 있는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해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을 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직 국정원 간부는 『국정원에서 기조실장은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자리가 아닐 뿐더러 업무상 해외에 나갈 일이 거의 없는 자리』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기조실에서 근무하던 기간 동안 한 번도 기조실장이 해외에 공무상 출장을 나간 적이 없으며, 역대 기조실장도 해외출장을 간 적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통상적으로 국정원 직원들은 외국을 드나들 때 「가명 여권」을 사용한다고 했다. 심지어 서너 개의 가명 여권을 돌려 가며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徐東晩 기조실장의 경우도 가명 여권을 사용해 해외에 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항공사에서 공개하지 않는 「탑승자 명부」에는 徐실장의 「흔적」이 없을 수도 있다. 전직 국정원 간부에 따르면, 2003년 9월경 국정원 차장급 간부들이 美洲, 유럽, 일본, 러시아 등지로 대거 출국했다고 한다. 그는 해외 지역을 권역별로 나눠 이뤄지는 해외파견 요원에 대한 교육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廉燉載(염돈재) 1차장은 러시아, 朴丁三 2차장은 독일·북아프리카, 金保鉉 3차장은 중국, 徐東晩 기조실장은 미국엘 다녀왔다』고 했다. 그는 『徐실장이 일본까지 들러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 공교롭게도 宋斗律씨의 귀국과 비슷한 시기에 해외파견 요원 교육이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徐東晩ㆍ朴丁三의 일본行 또 다른 전직 국정원 직원에 따르면, 宋斗律이 입국 직전인 2003년 9월을 전후해 徐東晩 실장, 廉燉載 1차장, 朴丁三 2차장이 일본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는 『방문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해외업무를 담당하는 1차장을 제외하고 2차장과 기조실장이 외국에 가는 것은 특별한 사안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측은 『徐東晩 기조실장의 독일行에 대해서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국정원은 『기조실장을 비롯해 국정원 간부들의 해외출장은 통상적인 일』이라며 『宋斗律을 노동당 후보위원으로 판단, 「조사」 아닌 「수사」를 해 宋斗律의 혐의를 입증한 국정원이 기획입국에 간여됐다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徐실장은 독일·미국·일본 등에, 宋斗律씨를 비롯한 해외 反정부인사들의 귀국을 앞둔 시점에 출국했다는 점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국정원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宋씨 귀국 1주일 전쯤인 2003년 9월13일부터 朴丁三 2차장이 사흘간 베를린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국정원 측은 『朴차장이 해외정보요원 교육차 갔었다』는 해명을 했고, 실제 국정원에는 신임 차장들의 해외요원 격려 순방 프로그램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宋씨와 대학동창(서울大 철학과 63학번)인 朴차장 역시 『宋씨와 대학 2학년 때 軍 입대로 헤어진 후 39년 동안 공·사적 접촉은 물론, 안부 차원의 연락조차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尹九炳(60) 前 충북大 교수가 노동자 월간 문예지 「작은 책」(2003년 11월호)에 쓴 「송두율, 박정삼, 나 윤구병 이 세 사람」이란 글에는 宋斗律과 朴丁三의 관계가 잘 드러나 있다. 『우리 셋은 서울大 철학과 동기동창이다. 지난 시절 셋 다 朴正熙 군사독재 정권이 저지른 反민족적이고 굴욕적인 韓日회담에 어깨를 걸고 맞섰다』 洪準杓 의원은 朴차장의 임무는 국내담당이라는 점을 들어, 『해외정보 요원의 교육이라면 오히려 해외담당인 廉燉載 1차장이 갔어야 하며, 통상 국정원의 해외정보 요원 교육은 국내에 불러서 한다는 점에서 국정원 측의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洪의원은 『특히 朴차장이 宋씨의 입국(9월22일) 일주일 전에 宋씨의 主활동 근거지인 베를린에 가 사흘간 머물렀다는 것은 宋씨의 입국과 관련한 문제를 사전 조율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朴丁三 차장은 2003년 10월 초 자신의 베를린 방문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서울시내 한정식집으로 주요 언론사 정치부장을 불러 방문 경위를 설명했다고 한다. 그는 非보도를 전제로 『국정원의 해외 업무 수행을 위해 방문 목적을 언론에 정확히 밝히지 못한 것이니 양해해 달라』는 취지의 말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宋씨가 입국을 결심한 것은 입국 나흘 전인 2003년 9월18일. 그는 한겨레신문과 독일 자택에서 만나 『국가정보원 등의 조사는 없는 게 낫지만 일반 관광객처럼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안다. 호텔 등에 찾아와 물어볼 게 있으면 오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거나, 吳吉男에게 入北을 권유했다는 것은 黃長燁씨와의 재판에서 사실이 아닌 게 밝혀져 승소했다(실제로는 敗訴-편집자 注). 지난해에도 국정원이 「준법서약서」를 안 써도 된다고 했다가 갑자기 말을 바꿨다』는 말을 했다. 宋씨의 발언 문맥으로 보면 宋씨가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도록 입국 환경을 조성했고, 특히 『호텔 등에 찾아와 물어볼 게 있다면 오라고 했다』는 발언으로 봐서 이미 宋씨의 조사와 관련, 관계 당국과 「要式的(요식적)인 조사」와 「善處(선처)」약속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宋씨에 대해 두 차례 「美化 방송」을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KBS 李種秀(이종수·63·광주大 언론대학원장) 이사장은 2003년 8월26일부터 일주일간 기념사업회 羅炳湜(나병식) 상임이사, 朴虎聲(박호성) 서강大 교수와 함께 베를린을 방문, 宋씨와 만나 귀국문제를 논의했다. 특히 이들의 방문기간 중에는 宋씨 美化 프로그램의 하나인 「한국사회를 말한다」의 제작진도 독일에 와 있었고, 李이사장은 이 프로그램에 「광주大 교수」 신분으로 출연, 『이제는 오히려 이런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할 때』라며 관용을 호소했다. 親北인사 명예회복에 나섰던 국정원장 宋씨에 대해 국정원이 출·퇴근 조사를 보장해 준 점이나, 검찰에 「기소」, 「공소 보류」 의견을 동시에 제시한 것 등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宋씨 귀국을 추진했던 기념사업회 朴炯圭 이사장은 이와 관련, 『국정원 등 관계기관에서 선의의 협력을 해주기로 했다』고 말한 바도 있다. 그러나 국정원 측은 『그런 사실이 일절 없다』고 부인했다. 한편 2003년 8월 末 기념사업회 측과는 별도로 宋씨의 귀국을 추진했던 崔炳模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은 『高泳耉 국정원장이 宋씨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고 했다. 이 자리에는 청와대 文在寅(문재인) 민정수석도 동석했다고 한다. 高泳耉 원장은 2003년 4월 국회 정보위원회의 인사청문회에서 與野 의원들로부터 이념적 편향성, 정보업무 분야에 대한 非전문성, 과거 잦은 黨籍(당적) 변경 등을 들어 정보기관 책임자로서 「부적격」 판정을 받은 인물이다. 강원도 정선 출신인 高원장은 영월중학교를 나와 국립체신高를 거쳐 1959년 건국大 법학과에 입학했다. 1960년 제10회 고등고시에 합격, 판사의 길을 걸었고, 1969년에 잠시 변호사 개업을 하다가 판사로 再임용되었다. 1980년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法服(법복)을 벗고, 제11代 국회에서 민한당 의원을 지냈다. 高泳耉 국정원장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1986년), 「민중정당 결성을 위한 민주화추진연합회」 공동 대표(1990년), 「박종철 기념사업회」 공동의장(1990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초대 회장(1994년), 「한국인권단체협의회」 상임대표,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연대」 고문(2000년) 등 소위 「진보단체」에서 「얼굴 마담」 역할을 해왔다. 2003년 11월8일 기자는 高泳耉 원장에게 다음 내용의 書面질의서를 보냈다. 『국정원도 한통련을 反국가단체로 분류하고 있는데, 국정원장으로서 한통련을 어떻게 보는가 ▲1980년 駐日 한국대사관에서 발행한 영사증명서에 따르면, 「郭東儀는 북한간첩」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는데, 郭東儀 의장을 「북한 공작원」으로 확인했다는 安企部의 판단은 지금도 맞다고 생각하는가 ▲국정원에서 한통련 郭東儀 의장에 대한 입국 허가를 내주었는가, 만일 郭의장이 입국했다면 宋斗律과 같이 依法(의법)처리 한다는 내부방침이 서 있었는가』 高원장은 기자의 질의에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 않은 채 非공식 루트를 통해 『(2003년) 4월 인사청문회를 통해 밝힌 내용을 참고해 달라』는 말을 전해 왔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 鄭亨根(정형근) 의원은 高원장이 인권변호사 시절, 대법원이 고정간첩으로 판결한 金洛中(김낙중)에 대해 석방운동을 벌인 것과 관련, 『간첩 석방운동을 벌인 사람이 부하 직원들에게 간첩을 잡으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국정원장 출신인 열린당 千容宅(천용택) 의원은 『국정원장은 실정법 기준에 따라 활동해야 하는데, 高후보는 대법원이 反국가단체로 판결한 단체인 韓統聯의 명예회복 운동을 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다. 당시 高후보는 국가보안법 개폐와 관련, 『反국가단체 규정 요건인 「정부참칭」(政府僭稱: 합법 정부가 아닌 특정 단체가 스스로를 정부라 칭하는 것)과 국가변란 목적 중 정부참칭만으로 反국가단체로 보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고무·찬양죄 조항은 위법요건 구성으로 막연하다』며 개정 입장을 밝혔다. 高후보는 『북한은 해석상 反국가단체』라면서도 『북한이 국가변란 목적에 해당하는 노동당 규약을 개정하거나 對南 적화통일 전략을 포기할 경우 북한을 계속 反국가단체로 둘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국정원 자료의 「質」에 대한 의구심 국정원이 검찰에 송치한 2035쪽의 宋씨 수사기록에는 지난 30여 년간 국정원이 수집한 宋씨 관련 핵심 파일과 사진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2003년 12월 宋斗律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한 첫 공판의 뚜껑이 열리자 그동안 국정원이 검찰에 제공한 자료의 「質(질)」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전직 對共 수사관 B씨는 『宋斗律의 입국에 대비, 예상 시나리오까지 짰을 국정원이 宋斗律을 기소하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자료를 누락시켰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국정원에서 넘긴 자료의 서너 배나 되는 자료를 이례적으로 검찰에서 자체수사를 통해 만든 것을 보면 자료가 부실했고, 판사 경력을 비롯해 40여 년의 법조인 경력을 가진 高원장이 「공소 보류」를 예견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은 高원장이 「공소 보류」 의견을 첨부해 놓고도 왜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기소해야 한다고 단일의견만 달았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던가 하는 점이다. 국민의 대표기관에 보고하는 것과 수사당국끼리 주고받는 내용을 달리해야 할 말 못할 사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崔秉烈(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국정원의 「공소 보류」 의견 제시와 관련해 과거 「한통련대책委」 대표를 맡았던 高泳耉 국정원장의 경질을 요구하기도 했었다. 韓統聯은 「재일한국민족통일운동연합」의 약칭이다. 그 前身은 韓民統(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이다. 이 단체는 1973년 북한정권의 공작으로 만들어진 단체로서 우리 대법원은 反국가단체로 판시했다. 前 한민통 관계자인 A씨는 『한민통엔 「민주 인사」들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그 後身인 한통련은 오롯이 「친북」인사들만 남은 단체』라고 증언했다. 우리 대법원의 판단에 따르면, 한민통은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아 金大中씨를 이용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고 했던 조직이다. 高泳耉 원장은 변호사 시절이던 2000년 12월, 한통련대책委 결성 당시 공동대표였다. 2002년 4월20일 그는 東京에서 열린 「한통련 명예회복과 고국 자유왕래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한통련대책委) 1주년 기념식에 참석, 反국가단체 규정 해제와 30년간 금지된 한국 자유왕래를 요구했다. 한통련 기관지 「민족시보」 2002년 5월1일자에 따르면, 高泳耉 공동대표는 인사말에서 『한국에서는 6·15 남북공동선언 채택 후 총련 동포들도 고향방문할 수 있게 되는 등 크게 변화하고 있다』면서 『30년간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해 온 동포들을 간첩이라 하며 그 조직을 反국가단체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안당국은 냉전논리로 한통련에 대해 반성문을 쓰라든지 조사를 받으라고 강요하고 있는데,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고 『우리들은 金大中 대통령에게 하루 빨리 한통련의 명예를 회복시켜 자유로운 귀국을 보장하도록 요구한다』고 말했다. 「민족시보」 2003년 6월1일자에 따르면, 2003년 2월17일 일본 한통련대책委는 東京에서 결성 2주년 모임을 갖고, 盧武鉉 새 정부 아래 조기 명예회복과 자유왕래를 이루자고 결의했다. 모임에서는 MBC가 한통련에 대한 反국가단체 규정의 부당성을 주장한 2003년 2월 하순 방영 프로그램인 「韓民統의 진실」 비디오를 상영했다. 국내 한통련대책委 집행위원장인 李基旭(이기욱) 변호사는 『국가정보원장에 국내대책委 高泳耉 공동대표(변호사)가 취임하는 등 개혁이 진척되고 있다』는 취지의 말로써 한통련 인사들의 입국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고 한다. 국정원장이 귀국 도우려 했던 郭東儀는 「북한 공작원」 高泳耉 국정원장이 한통련대책委 공동대표 시절에 도왔던 한통련 郭의장에 대해 1980년 駐日 한국대사관은 영사증명서로 된 한민통 보고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郭東儀는 광복 직후 남로당에 가입 활동하다가 1948년 12월 남해군 인민위원장 박종환의 지령에 의해 밀항 도일했다. 그는 리츠메이칸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50년 9월경 조총련 요원에게 포섭되어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여 작전 방해 공작 후 월북하라」는 지령에 의해 입대했다. 그는 부평 미군 탄약 중대에 복무 중 기회를 잡지 못해 同부대에서 탈영하여 再밀항 도일했다. 곽동의는 1960년경부터는 조총련으로부터 월 10만 엔의 보수를 받으며 민단 조직 와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70년 4월 북한간첩 윤효동에게 포섭되어 북괴 공작선 편으로 입북, 간첩 교육과 민단 파괴, 對南공작 지령을 받은 후 동년 5월에 귀환한 그는 조총련 부의장 김병식으로부터 민단 와해 및 對南공작 자금으로 5000만 엔을 받았다. 郭東儀는 1973년 7월13일부터 8월4일 사이 배동호, 조활준, 김종충 등을 조종하여 金大中과 한민통 일본본부를 결성하도록 하고, 자신이 同 조직국장에 취임하였다. 1977년 8월13일 조총련 중앙본부로부터, 그간 한민통이 조총련의 의도대로 효과적인 反韓활동을 전개하여 왔고, 북괴가 의도하는 민주 민족통일 해외 한국인 연합을 결성하여 연대 투쟁 체제를 구축하는 데 공헌한 代價로 특별자금 5000만 엔을 받아 개인주택 구입에 사용함으로써 비난을 받은 사실이 있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소위 해외민주인사 초청 행사의 초청자 명단에 넣은 鄭敬謨에 대해서 기념사업회는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970년 朴正熙 군사독재에 반대하여 일본으로 망명, 反체제 인사로 입국 불허. 1973년 일본의 세카이(世界)에 시사평론가로 글을 싣기 시작한 이후 일본에서 한국 시사평론가, 문필가로 활동. 「씨알 어학숙」 설립운영, 「씨알의 힘」 잡지 발행 시작. 1980년대 5월 광주항쟁 당시 성명서 발표 및 시위 전개, 한통련 활동에 참여. 1989년 늦봄 문익환 목사와 방북 4·2공동선언 발표에 참여함> 1989년 鄭敬謨는 文益煥(문익환)씨와 함께 밀입북해 金日成을 만났다. 鄭敬謨가 글을 기고했다는 「世界」는 親北좌파 잡지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鄭敬謨가 1980년대 한통련 활동에 참여했다고 하는 점이다. 한민통이 추대한 초대 의장은 金大中씨였다. 金大中씨가 1980년에 군사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反국가단체의 「首魁(수괴)」였다는 점이다. 1980년에 駐日 한국대사관이 작성한 한민통 관련 보고서는 鄭敬謨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정경모(「민족시보」 주필). 1973년 초경 통혁당연대委 위원장 박덕만 소개로 배동호와 접촉. 1973년 말경 조총련을 통해 金日成으로부터 민족시보의 문필에 대해 찬양을 받음. 1973년 7월13일 金大中으로부터 민족시보 주필을 맡아 달라는 권유를 받고 수락. 민족시보 주필로서 각종 反韓 기사 및 북괴 찬양 기사 수시 게재> 한국의 국가정보기관이 북한의 공작원이라고 본 사람을, 盧武鉉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행정자치부 산하 민간기관은 「민주인사」라고 주장했다. 鄭敬謨씨는 입국 전 일본에서 이뤄진 조사과정에 불만을 품고 입국하지 않았다고 한다. 金容武와 김성수 그간 귀국의사를 밝히지 않았던 「在獨 북한 공작원(安企部의 판단)」 金容武(김용무·67)씨도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 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委」에서 나온 「해외 민주인사」에 명단이 들어 있었다. 그는 국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법원으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상태였다. 安企部(국정원의 前身)가 독일 쾰른 거주 「북한 간첩」이라 못 박은 金容武는 충남 청양 출신으로 대전高를 나와 1956년 서울大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同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원 졸업 후 金씨는 천안高에서 교편을 잡다가 전북大 철학과 전임강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 그는 병역 문제로 고민하는데 육사 11기 출신으로 서울大 철학과에 편입한 姜在倫(강재륜) 교수가 해결해 주었다. 그는 1996년 육사 교관요원 1기로 선발됐다. 그는 3년간 복무하며 육사 22기부터 25기를 가르쳤다. 金씨는 姜在倫 교수의 소개로 姜씨의 육사 동기생인 金復東(김복동)씨와 친하게 지냈고, 全斗煥씨와 안면이 있었다. 그는 1969년 육군 대위로 전역, 이듬해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對北 전문가 L씨는 『그는 대학 후배들인 宋斗律·李三悅(이삼열)씨 등이 독일 교민사회에서 공개적으로 벌이는 反정부 활동에 일체 참여하지 않는 방법으로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非합법」 투쟁을 전개했고, 덕분에 정체가 노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북한의 對南간첩 전담부서인 사회문화부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은 1996년 10월 독일 유학생 부부 박종대(당시 34세. 쾰른大 독문학 박사 과정)씨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면서 밝혀졌다. 安企部에 따르면, 朴씨 부부는 1990년 10월부터 2년간 쾰른 거주 「북한 간첩」 金容武와 수시로 만나 주체사상을 학습·유포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金容武는 「民辨(민변)」이 중심이 된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가 유럽과 일본을 중심으로 조사해 작성한 소위 「해외 민주인사」 명단 62명에 들어 있었으나 입국하지 않았다. 또 주목할 만한 인물은 김성수(68) 한독협회 회장이다. 그는 2003년 9월 귀국,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 초청 행사에 참석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그는 1973년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과 관련,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숨진 서울大 법대 최종길(崔鍾吉·당시 42세) 교수 사건과 1987년 派獨(파독)광부 간첩단 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돼 입국이 불허됐다. 그는 한때 독일영사증명서에 의해 「김철수」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가 귀국한 것은 黃長燁씨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가 宋斗律이라고 밝힌 데 힘 입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신문이 1998년 8월 보도한 독일주재 한국대사관의 「영사증명서」에 따르면, 김성수씨는 「전남 화순 출신으로 광주高와 연세大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 독일로 건너가 간첩 김장현에게 포섭돼 북한에서 간첩교육을 받았다. 徐敬元(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당시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었고, 김성수는 북한의 직접 지령에 따라 西獨을 거점으로 암약하고 있는 在獨 북한 공작원임」이라고 돼 있다. 李種秀 KBS 이사장,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 공동대표 民辯, 한통련대책委 등은 2003년 8월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를 결성, 소위 「해외 민주 인사」들의 명예회복과 고국방문을 추진해왔다.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는 民辯을 주축으로 전국연합, 참여연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통일연대, 한통련대책委 등 14개 단체로 구성됐다.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 결성은 2003년 5월 민가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통련대책委, 범민련남측본부 후원회, 통일연대, 5·18기념재단 등 6개 단체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모여 소위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간담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일주일 후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는 1차 귀국사업 시기를 9월 추석으로 하기로 했다고 한다. 동년 8월에는 추진위원회의 고문, 공동대표, 집행위원들을 人選했다. 고문에는 강희남(범민련남측본부 명예의장), 고은(시인), 박상증(참여연대 대표), 박형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신창균(범민련남측본부 명예의장)씨 등 16명이 위촉됐다. 공동대표는 강정구(동국大 교수), 박원순(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이종수(KBS 이사장), 최병모(민변 회장)씨 등 28명이고, 집행위원장에는 민변 부회장인 임종인 변호사가 맡고 있다.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 임원들의 面面을 보면 민변과 親北 좌파 단체, 그리고 現 정권과 연결고리를 가진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宋씨의 귀국을 위해 베를린을 방문한 적이 있는 李種秀 KBS 이사장이 공동대표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공영방송의 이사장인 李種秀씨가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에 참여한 것은 宋씨의 귀국에 맞춰 방영된 「宋斗律 美化 프로그램」과 맞물려 의심을 살 만하다.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는 결성 선언문에서 「일본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조직은 한통련」이라면서 「명예회복과 조건 없는 귀국보장, 한민통·한통련에 대한 反국가 단체 규정 철회와 명예회복,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했다. 2003년 8월7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 결성식의 자료에는 해외 민주인사 현황이 첨부돼 있다. 첨부자료에는 김성수(在獨귀향촉진회 상임위원), 김용무(명단에는 독일 쾰른 거주 「김영무」로 誤記돼 있음), 송두율, 곽동의, 정경모 등 62명의 명단이 올라 있다. 인터넷신문 통일뉴스 2003년 6월30일자에 따르면, 민변은 2003년 2월6일 盧武鉉 당선자 취임에 맞춰 인권정책 전반에 대한 제안서를 제출하고, 곽동의(한통련 의장), 선우학원(범민련 해외본부 고문), 김현환(범민련 在美본부 상임중앙위원, 1994년 10월17일 金日成 사후 100일葬 참석), 송두율, 정규명(범민련 유럽본부 고문), 윤운섭(베를린 노동교실), 이희세(범민련 해외본부 회원) 등 소위 「해외민주인사」 50여 명이 2·25 盧武鉉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宋씨를 초청했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는 기념사업회가 초청한 인사들 중 법무부에 입국 가능 여부를 조회한 사람은 정경모, 유태영(범민련 在美본부 공동의장), 송두율 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법무부에서는 입국은 자유지만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했다. 이들 중 宋씨는 입국했고, 정경모씨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며 조사를 거부하고 들어오지 않았다. 유태영씨는 초청 일정이 맞지 않아 귀국하지 않은 경우. 유씨는 당시 미국에서 열린 여자월드컵에 북한이 출전하자 본인이 응원단을 조직하는 등 교포환영·지원 업무를 위해 귀국하지 않았다고 한다. 盧대통령은 2003년 10월3일 국회에서 宋斗律씨 처리 문제와 관련, 『원숙하게 처리해 나가는 것이 한국사회의 수준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宋斗律 교수 같은 사람,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분단 체제 속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상황의 산물」임을 지적한 뒤 『이런 것을 갖고 건수 잡았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盧대통령은 열흘 후인 10월13일 국회에서 宋씨 처리문제와 관련, 『엄격한 법적 처벌도 중요하지만 우리 한국사회의 폭과 여유와 포용력을 全세계에 보여 주는 것 또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宋씨가 입국한 지 이틀 만인 2003년 9월24일 민변 출신 康錦實(강금실) 법무부 장관도 宋씨를 변호하는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 康장관은 서울지검 출입기자들과 가진 오찬에서 宋씨 사법 처리문제에 대해 『설사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고 하더라도 처벌할 수 있겠나. 그보다 더한 정치국원 이상의 인사들도 왔다 갔다 하는 판에…』라고 말했다. 민변 출신인 盧武鉉 대통령은 2003년 9월23일 오후 선우학원 미국 범민련 자문위원, 이행우 前 범민련 美洲본부 공동의장, 안재웅 목사(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文東煥 前 평민당 수석부총재(在美 목사) 등 해외 인사 44명을 청와대로 초청, 다과를 함께 했다. 한편 전날 입국한 宋씨는 피의자 신분인 관계로 참석대상에서 제외됐다고 한다. 對北 전문가 L씨는 『대통령이 초대한 만찬자리에 이적단체인 「범민련」 인사들이 버젓이 참석한 것은 우리나라 공안의 최후 보루까지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초청된 사람들 중엔 美 CIA가 북한 측 공작원으로 지목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탄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宋씨를 비롯한 소위 「망명 민주인사」들의 귀국은 6·15 남북 頂上회담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6·15 남북 頂上회담 직후인 2000년 7월31일 제1차 남북장관급회담 공동보도문 제4항에는, 「남과 북은 총련 동포들이 방문단을 구성하여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협력하며, 이와 관련한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기자는 통일부 관계자에게 『「총련동포」들이 고향을 방문하는 것에 남북이 공동으로 협력한다는 것이 해외인사의 자유로운 국내 방문 허용으로 확대해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고, 관계자는 『공동보도문의 내용은 방향을 제시하는 선언적 의미에 불과하며, 국회 동의를 요하는 합의서가 아니다. 「총련 동포」에 국한된 조치로 이해한다』고 했다.*<2편에 계속>

입력 : 2004.01.15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사진

오동룡 ‘밀리터리 인사이드’

gomsi@chosun.com 기자클럽 「Soldier’s Story」는 국내 최초로 軍人들의 이야기를 전문으로 다루는 軍隊版 「피플」지면입니다. 「Soldier’s Story」에서는 한국戰과 월남戰을 치룬 老兵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후손들에게 전하는 전쟁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또한 전후방에서 묵묵하게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軍人들의 哀歡과 話題 등도 발굴해 기사로 담아낼 예정입니다. 기자클럽 「Soldier’s Story」에 제보할 내용이 있으시면 이메일(gomsichosun.com)로 연락주십시오.
댓글달기 3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나는 (2007-10-25)

    대개 전라도 지역에서 손자나 손녀를 그리고 더 나아가서 외손과 친손을 구분하기 곤란 할 때 대개는 손주라고도 씁니다. 남들이 그 뜻을 알면 되지 안나요, 오히려 손주란 사전에 없다고 하여 이 기자님이 이 손주란 말을 더 확대하시는 것 같은데요?ㅋㅋ

  • 이상흔 (2007-10-25)

    제가 알기로 전라도 지역에서 그런 말을 쓰지 않습니다. 아마 쓰는 사람이 있다면 최근 TV 등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 이상흔 (2007-10-25)

    당연히 손자라고 발음합니다. 손주, 삼춘 등은 경기지방의 말입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